|
|
1916년 음력 8월, 황해도 구월산(九月山) 삼성사(三聖祠).
수도실 문 앞에 쪽지 하나가 붙었다.
"오늘 오전 3시부터 3일간 절식 수도에 들어가니 이 문을 열지 말라."
음력 15일 새벽 1시부터 제천의식인 선의식(䄠儀式)을 마친 직후였다. 저녁 10시쯤 안에서 먹을 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이튿날 오전 5시, 문을 연 사람들은 반듯하게 누운 시신을 발견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곧기가 먹줄을 놓은 것 같았다고 전해진다. 시체를 검사하러 온 일본 헌병대 의사도 "아무런 물건도 쓰지 않았다"고 증언하며 공경심을 표했다.
대종교에서는 이것을 조천(朝天)이라 부른다. 하늘에 조회(朝會)하러 갔다는 뜻이다. 스스로 호흡을 통제해 죽음에 이르렀으되, 그것이 자살이 아니라 삼일신고(三一神誥)의 교리에 따라 삼진(三眞)에 통달한 철인(哲人)만이 도달할 수 있는 경지였기 때문이다. 그 날을 대종교에서는 가경절(嘉慶節), 경사스럽고 아름다운 날이라 하여 오늘도 기린다.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 본명은 나인영(羅寅永).
전라남도 보성군 벌교읍 금곡마을 출신으로, 집안은 나주 나씨 양반 가문이었지만 몇 대째 벼슬에 오르지 못한 채 경제적으로도 넉넉지 않았다. 1891년 만 28세에 문과 병과에 급제해 승정원 가주서(假注書)와 승문원 부정자(副正字)를 역임했으나, 사관 임명을 거부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행적은 불투명한 데가 많지만, 개화파 관료 김윤식의 제주도 유배 생활을 곁에서 돌봤던 것으로 알려지며, 고향의 제석산(帝釋山)에서 수도 생활을 보냈다는 설도 있다.
그가 다시 역사의 전면에 나선 것은 1904년이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호남 출신 우국지사들을 모아 비밀결사 유신회(維新會)를 조직했다. 외교로, 폭력으로, 마지막에는 종교로. 세 번에 걸쳐 나라를 살릴 방도를 찾았고, 세 번 모두 막혀서야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를 알았다.
첫 번째는 외교였다.
1905년 6월, 나철은 오기호(吳基鎬)·이기(李沂) 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 발틱 함대가 쓰시마 해전에서 전멸한 직후였다. 미국에서 러일 강화회의가 열린다는 소식에 한국의 입장을 호소하러 가려 했지만, 주한 일본 공사 하야시 곤스케의 방해로 외부에서 여권을 발급받지 못했다. 방향을 바꿔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등 정계 요인들을 직접 만났다. 그 자리에서 나철이 내세운 논거는 감정적 호소가 아니었다. 청일전쟁 때 발포된 선전조칙(1895년 8월 1일)과 러일전쟁 당시의 선전칙서(1904년 2월 10일)를 직접 근거로 들어 "당신들이 먼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고 따져 물었다. 동양평화론에 기반한 법적 논리였다. 이것이 바로 최초의 동양평화론이었다.
11월 을사조약 체결 소식이 전해지자 일행은 메이지 천황과 이토 히로부미에게 항의문을 보냈다. 이 항의문은 대한매일신보 1905년 11월 4일 자 잡보 란에 전문이 실렸다. 귀국 후 나철은 이듬해에도 두 차례 더 도일해 마쓰무라 유노신(松村雄之進), 도야마 미쓰루(頭山満), 오카모토 류노스케(岡本柳之助) 등 아시아주의자들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한계에 부딪혀 방향을 국내로 돌렸다.
두 번째는 암살이었다.
1907년, 나철은 을사조약 체결 당시의 대신들을 상대로 오적주살(五賊誅殺) 계획을 추진했다. 그해 3월 23일 광화문에서 시작된 저격 시도는 대부분 목표를 놓치거나 체포자를 내고 말았다. 지도층에서도 체포자가 나오자 나철은 오기호·김인식등과 함께 자수했다. 평리원에서 재판을 받아 유배 선고가 내려졌고 지도(智島)로 이송됐으나, 고종의 특사령으로 그해 12월 석방됐다.
외교도 막히고 암살도 실패했다.
석방 후 1년이 지난 1908년 11월, 나철은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도쿄 혼고초(本郷町)의 세이코칸(清光館)을 숙소로 잡은 일행을 12월 5일 두일백(杜一白)이라는 인물이 찾아와 단군교포명서(檀君敎佈明書)를 전수했다. 두일백은 31일에도 자리를 옮긴 일행을 다시 찾아와 삼일신고, 예식에 관한 서적 4책과 단군 영정을 전달했다. 그 배후에는 백두산에 자리한 백봉교단(白峯敎團)이 있었다. 1904년 개극절(開極節, 음력 10월 3일)에 백봉(白峯)이 백두산 옛 제단 터에서 삼일신고를 발견했고, 그것이 나철 일행과의 접촉으로 이어진 것이다.
여기서 흥미로운 사실 하나가 있다. 1908년 11월 도일 당시, 일본 경찰당국은 나철 일행을 '요시찰 외국인'으로 분류해 행적을 꼼꼼하게 감시했다. 그 보고서가 지금도 남아 있다. 놀라운 것은 내용이다. 교단 측 기록에 나오는 숙소 이름까지 정확하게 일치하는 이 보고서에서, 백봉교단 인물들과 접촉했던 시기 나철에 대해 보고된 내용은 병을 앓아 대학병원을 다녔다는 것뿐이다. 수상한 만남은 단 한 건도 기재되지 않았다. 일제의 감시망이 포착하지 못할 만큼 조용하게 전수가 이루어진 것이다. 백봉교단과의 접촉이 사후에 과장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에 대해, 일제 측 자료가 역설적으로 그 실재를 뒷받침해주는 셈이다. 이 접촉은 나철이 정치 운동에서 좌절한 시점마다 이루어졌다는 점도 눈여겨볼 만하다.
1909년 음력 1월 15일(양력 2월 5일), 서울 제동(齊洞)의 초가집에서 나철은 정훈모·오기호·이기·김인식·김윤식 등과 모여 북벽에 단군대황조신위(檀君大皇祖神位)를 걸고 중광(重光)을 선포했다.
'중광'이라는 말을 쓴 것이 중요하다. 새 종교를 창시한 게 아니라, 오래전부터 이어져 온 한얼님 신앙을 다시 빛냈다는 뜻이다.처음에는 단군교라는 이름을 썼다가 1910년 9월 대종교(大倧敎)로 개칭했다. '대(大)'는 하늘, '종(倧)'은 신인(神人) 곧 단군을 의미했다. 교명 변경에 반대한 정훈모는 단군교라는 이름을 이어가며 분립했다.
대종교의 중광이 한말 단군 부흥 운동 및 국학 운동과 분리될 수 없다는 점도 짚어야 한다. 민족사 서술의 출발로 알려진 신채호의 독사신론(讀史新論)이 발표된 것도 나철이 중광의 토대를 닦은 1908년의 일이었다. 신채호는 훗날 나철이 조천할 당시 도제사언문(悼祭四言文)을 지어 그의 죽음을 공개적으로 추도했다. 그 글은 현재 북한에 소장되어 있다.
대종교의 교리는 삼일신고를 근본으로 한다. 하늘로부터 인간에게 부여된 본성, 삼진(三眞)인 성(性)·명(命)·정(精)이 그 핵심이다. 삼진의 세 참함이란 각각 착함도 악함도 없는 성품, 맑음도 흐림도 없는 목숨, 후함도 박함도 없는 정기를 의미한다.
땅에서 살면서 인간은 삼망(三妄), 다시 말해 심(心)·기(氣)·신(身)의 치우침에 빠진다. 착하면 복되고 악하면 화가 되며, 맑으면 오래 살고 흐리면 일찍 죽으며, 후하면 귀하고 박하면 천해지는 작용이 생겨나는 것이 그 결과다. 이 치우침을 돌이켜 삼진에 통달하는 수행의 방법이 지감(止感)·조식(調息)·금촉(禁觸)의 삼법(三法)이다. 느낌을 그치고, 숨 쉼을 고루 하고, 부딪힘을 금하는 것. 이 삼법을 온전히 실천해 삼진에 통달한 사람을 철인(哲人)이라 하고, 그 철인이 죽음에 이르는 것을 조천이라 부른다.
대종교의 신관(神觀)은 삼신일체(三神一體)를 기준으로 한다.
신이란 기본적으로 환인·환웅·환검으로 구성된 한얼님을 의미한다. 이 삼신과 일체의 관계는 체용론(體用論)으로 설명된다. 한얼님이 본체(體)라면, 삼신은 각각 그 본체의 작용(用)이라는 구조다. 삼신일체를 기독교의 삼위일체를 본뜬 논리로 볼 수도 있지만, 체용론을 통해 불교와의 연관성도 지적할 수 있다. 이 점은 근대 동아시아 사상의 흐름, 즉 이노우에 데쓰지로(井上哲次郎)의 현상즉실재론이나 니시다 기타로(西田幾多郎)의 체용론과도 맞닿는다. 대종교의 교리가 민족종교의 틀에 머물지 않고 근대 동아시아 사상의 연환 속에 위치한다는 뜻이다.
단군교포명서는 교리보다 역사 서술에 비중이 크다. 신대(神代)를 다룬 삼일신고나 신사기(神事記)와 달리, 단군교포명서는 단군이 사람이 되어 세상을 다스린 이후의 인사(人事)를 기술한 경전이다. 핵심 논지는 분명하다. 근원을 잊어버린 것이 모든 재앙의 원인이며, 그 회복이 모든 행복을 약속한다는 것. 여기서의 재앙과 행복은 개인 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다. 나라의 흥망성쇠와 직결된다.
"끝없이 넓은 천만 갈래로 흐르는 물결도 그 근원을 막으면 말라 없어지고, 울창한 천만 가지와 잎이 달린 나무도 그 뿌리를 끊으면 시들어 꺾이니, 하물며 천만 자손 인류 겨레가 그 시조를 잊어버리고서 어찌 번창하기를 바라며 안전하기를 기대하는가."
망각의 죄는 불교의 침입을 받으면서 시작됐고, 발해와 고려에서 대종교를 재건하려는 노력이 있었지만 불교를 이기지 못했으며, 조선에서도 유교가 점점 왕성해져 널리 펴지 못했다고 단군의 자손이 시조를 잊었기에 나라가 망했고, 대종교를 믿는 것이 곧 흥국(興國)으로 이어진다는 논리였다.
가족관계로 단단히 엮인 자아(몸, 집, 나라)를 설정하고, 그 자아의 흥망을 대종교로 저울질하는 서사였다. 그런 의미에서 단군교포명서는 철저하게 세속적-정치적 경전이었다. '종교적'인 것이 곧 '정치적'이며, 성스러운 것이 세속적인 것과 구분되지 않는 가르침이었다.
오늘날 역사학계와 종교학계 모두 대종교의 민족주의적 성격을 높이 평가한다. 그러나 정치성을 강조하는 쪽은 대종교를 독립운동의 전사(前史)로 보고, 종교성을 강조하는 쪽은 체계적 교리를 갖춘 민족종교로 본다. 이 두 시각을 아우르려 한 개념이 '종교민족주의'다. 그러나 이 개념은 결정적인 한계를 안고 있다. "민족의 자주독립과 발전 같은 민족주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종교를 통하여(이용하여) 달성하려 한 생각-노선"이라는 규정 자체가 문제다.
정치(민족주의)를 목적으로, 종교를 수단으로 설정하는 이상 이분법을 해소한 게 아니라 이분법 위에 목적-수단 관계를 얹어놓은 것에 불과하다. 나철에게 그 둘은 애초에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나철이 중광한 지 2년 뒤인 1911년 2월, 공주시교당 사건이 벌어진다.
1910년 1월 나철은 도사교(都司敎)로 추대됐고, 9월 교명을 대종교로 바꿨다. 서울 본사 아래 북부·남부 지사를 두고 시교당(施敎堂)을 설치하는 등 종교 단체의 체제를 갖춰가던 중이었다. 포교 활동이 확대되면서 공주에 시교당이 설치된 것이 1911년 2월 2일이었다.
사립명화학교에서 포교 활동을 벌이다 탐지된 교인 성홍석이 "본교는 총독 각하의 찬동을 얻은 단체"라고 증언하면서, 충청남도 장관 박중양(朴重陽)과 총독부 내무부 장관 우사미 가쓰오(宇佐美勝夫) 사이에 대종교가 공인 종교인지를 놓고 문답이 오갔다. 이것이 이른바 공주시교당 사건이다.
우사미의 답변은 이중적이었다. 적극적으로든 소극적으로든 종교로 공인한 사실이 없다는 것이 첫째였고, 장래 신도·불교·기독교와 동일하게 취급할 사유가 있는지는 좀 더 살펴봐야 한다는 것이 둘째였다. 아직 유교와 불교에 대한 법규조차 없던 말 그대로 법적 공백기였다.
사건 자체는 간부 오혁(吳赫, 오기호의 개명)이 공주로 파견되면서 수습됐다. 그러나 교단에 미친 충격은 컸다. 오대종지(五大宗旨)가 개정됐다.
백봉교단이 1909년 반포한 원본과 나철이 1911년 개정한 판본을 비교하면 변경의 폭이 잘 드러난다.
1종지는 '경봉조신(敬奉祖神)'에서 '경봉천신(敬奉天神)'으로,
2종지는 '감통영성(感通靈誠)'에서 '성수영성(誠修靈誠)'으로,
3종지는 '애합족우(愛合族友)'에서 '애합종족(愛合種族)'으로,
4종지는 '안고기토(安固基土)'에서 '정구이복(靜求利福)'으로 바뀌었다.
5종지 '근무산업(勤務産業)'만 그대로였다.
변경의 방향은 일관된다. 조상신(祖神)을 천신(天神)으로 끌어올리고, 민족(族友)을 종족(種族)으로 확장하고, 특정 터전(基土)에 대한 강조를 복리 추구(利福)로 대체했다. 단일 민족적 위상에서 인류 보편적 위상으로의 전환이었다. 단순한 교리 수정이 아니었다. 총독부의 공인을 염두에 두고 스스로를 재포지셔닝한 전략적 선택으로 읽힌다. 이후의 행보가 이 해석을 뒷받침한다.
1914년에는 만주 청호(淸湖)에 시교당이 만들어졌고, 이듬해부터 서울 본사를 대신해 총본사로 거듭났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동서남북 네 곳에 도본사가 설치됐고, 서울은 한반도 전역을 맡은 남도본사로 편입됐다.
중국·일본·유럽·미국을 대상으로 외도교계(外道敎界)도 설정됐다. 총독부의 단속을 피하기 위한 전략이기도 했지만, 백두산 강세(降世) 교리에 맞게 체제를 재편하려는 목적도 컸다. 만약 일본의 지배 밖으로 피신하려는 의도가 컸다면, 이후 포교규칙 제정 당시 대종교 측이 신도로서 신고를 시도했던 행동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1915년 8월 16일, 총독부령 제83호 포교규칙(布敎規則)이 제정됐다. 시행일은 10월 1일. 규칙 제1항은 명확했다. "본령에서 종교라 칭함은 신도·불도 및 기독교를 말함." 셋 외에는 종교가 아니었다.
같은 날 신사사원규칙(神社寺院規則)도 함께 제정됐다. 이 두 규칙을 나란히 보면 포교규칙이 말하는 '신도'가 신사 신도가 아니라 교파신도(敎派神道)를 의미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포교규칙 제15조는 "조선총독은 필요가 있을 경우 종교유사단체로 인정되는 단체에 본령을 준용할 수 있다"고 규정했다. 유사종교 개념을 법제화한 선구적 조항이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조항을 통해 공인 종교가 된 단체는 단 한 곳도 존재하지 않았다. 포교규칙은 신도·불교·기독교만을 가르고, 나머지는 유사 종교 또는 종교적 결사로 분류해 경찰이 관리하는 구조였다.
포교규칙 제정 소식을 들은 나철은 "예측했던 시기(時機)가 도래하였으니 지성(至誠) 해결함이 가(可)하다"는 말을 남기고 바로 신고서 준비에 들어갔다. 날벼락이 아니라 기다리던 기회로 받아들였던 셈이다. 공주시교당 사건 당시 내무부의 답변이 '장래'에 여지를 열어뒀던 것을 나철은 잊지 않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추진된 교리의 보편화와 교단 체제 개편도 이 순간을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고 해석된다.
1915년 12월 21일, 나철은 대종교를 신도에 해당하는 종교로서 신고했다. 결과는 각하였다. '신도가 아니다'라는 이유였다.
당시 조선총독부 관보를 보면 12월부터 신고를 마친 단체들이 기재된다. 23일 자로 교파신도 계열인 금광교(金光敎)와 천리교(天理敎)도 확인된다. 나철이 대종교를 신도로서 신고한 날이 21일이었으니 이들보다 이틀 앞선 것이었다. 그러나 이들의 서류는 접수됐고 대종교의 서류는 각하됐다. 교단 측 기록에는 "총독부 측은 고의적으로 일반유사종단으로 보아오던 군소신앙단체는 모두 서류를 접수하고 오직 대교(大敎)만은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청서류를 각하했다"고 전해진다.
나철은 대종교를 '모든 신교(神敎)의 조종(祖宗)'으로 자리매김해왔다. 신도의 원류가 대종교라는 자기 인식이 있었다. 일본의 교파신도-그들 역시 일본에서 신도계 신종교 혹은 유사 종교로 분류되기도 하는 - 단체들에조차 밀리는 상황은 그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모욕이었다.
결국 신도로 인정받지 못한 대종교는 종교 단체로서의 공인에서도 제외됐다. 포교규칙에서 배제된 조선의 종교 단체는 유사 종교 또는 종교적 결사로 분류되어 경무총감부의 관리 대상으로 들어갔다. 1916년 봄부터 나철은 실제로 포교 활동에 단속을 받았다. 수도를 위해 만주로 가려던 중 총독부에 구속됐다. 총독에게 '거취(去就)의 결단을 청한다'는 글을 보냈다가 다시 경찰서로 불려가 서약서를 억지로 쓰게 됐다.
이것이 나철을 조천으로 이끈 직접적 배경이다.
1916년 음력 8월 4일, 나철은 남대문에서 교도들의 배웅을 받고 구월산으로 향했다. 6일에 삼성사에 도착해 선의식 준비를 시작했다.
삼성사는 삼신(환인·환웅·환검)에게 제사 지내는 곳이었다. 신사기(神事記)에 따르면, 단군이 아사달에 들어가 다시 신이 되어 하늘에 오른 곳으로 전해지는 장소였다. 나철이 삼성사에서 선의식을 치른 날 "이 땅은 우리 한배께서 한울에 오르신 곳"이라고 언급했던 데서, 그가 마지막 장소를 여기로 정한 이유를 헤아릴 수 있다.
음력 8월 15일 오전 1시, 선의식이 시작됐다. 2시경 식을 마친 나철은 3시부터 3일간 절식 수도를 하겠다는 문구를 방문에 붙이고 수도실로 들어갔다. 나철이 선택한 죽음의 방법은 삼법 중 조식법(調息法)이었다. 스스로 숨을 통제해 죽음에 이름으로써 철인됨을 증명한 것이다. 저녁 10시쯤 먹을 가는 소리가 마지막 생의 징후였다. 이튿날 오전 5시, 시신으로 발견됐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곧기가 먹줄을 놓은 것 같은 모습이었고, 일본 헌병대 의사도 아무런 물건도 쓰지 않았음을 증언하며 공경심을 나타냈다.
조천에 앞서 나철은 여러 방면에 유서를 남겼다. 일본 내각총리대신 오쿠마 시게노부(大隈重信)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内正毅)에게 보낸 것이 가장 상세하다. 오쿠마에게 보낸 글이 분량도 길고 더 자세하며, 데라우치에게 보낸 유서에는 포교규칙 이후 겪은 일과 항의의 근거가 집중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데라우치에게 보낸 유서에서 나철은 세 가지 일을 거론했다. 1915년 12월 총독부에서 "대종교는 신교가 아니라"는 이유로 신고를 접수하지 않은 일, 이듬해 3월 소관 경찰서에서 수도의 길을 막아낸 일, 5월에 총독에게 거취의 결단을 청한 글을 보냈다가 다시 경찰서로 불려가 억지로 서약서를 쓰게 한 일. 그러면서 이러한 일들이 "경술 8월 30일에 귀 부 발 제1호 고시에 '각 종교를 보호하야 신교를 자유롭게 한다'고 한 말과 배치된다"고 비판했다.
이것은 1910년 8월 29일 자 데라우치의 유고(諭告)를 겨냥한 것이었다.
"신교의 자유는 문명 열국이 균인(均認)한 바라… 포교 전도에 대하야 적당한 보호 편의"를 주겠다고 약속했던 그 문서. 나철의 요구는 단순했다. 근대적 정교분리 원칙, 곧 신교의 자유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데라우치 유서 말미에 나철은 이렇게 썼다. "우리 한님[天帝]께 욕되며 우리 종문을 더럽힘이 여기에 이르렀나니 철이 한님교화[天帝敎]를 위하야 한번 죽음은 진실로 그곳에 죽음이로다."
오쿠마에게 보낸 유서는 더 자세했다. 나철은 '인영(寅永)'과 '철(喆)'이라는 이름의 대비를 통해 과거의 정치 운동과 현재의 종교 활동을 구분했다.
"이 몸이 다시 지난해에 칼을 품고 역적을 죽이려던 인영이 아니라 이에 오늘날 정성을 열어서 원수를 돌이키는 철이 되고… 오히려 교를 믿으므로 알지 않고 억지로 구속하는가. 설사 러일이 강화할 지음에 일본 내각에 글로 힐문하고 을사조약한 뒤에 한국대신을 죽이려고 함은 다 그 때의 일이라… 만일 철의 지난 일로써 의심을 가진다면 크게 그릇됨이다."
나인영이 추진했던 대일 외교와 오적주살, 나철이 추구하는 대종교 활동은 별개의 것이라는 호소였다. 만약 그 혼동이 대종교를 포교규칙에서 배제한 원인이 됐다면, 그 의심은 목숨을 걸고서라도 시정되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유서 말미에 나철은 "한얼[神]의 보심이 매우 밝은데 죽음에 다달아서 한번 말함을 철이 어찌 거짓 하겠냐"고 당부했다.
나철은 대종교를 "신교의 조종(神敎之祖宗)"으로 자리매김하는 자기 인식을 유서에서도 거듭 강조했다. "'대(大)'는 천(天)이요 '종(倧)'은 신(神)이니 대종교는 우리 한얼한님[天神檀帝]께서 처음 세우신 천신교"라고 규정했다. 그리고 "대화(大和일본)의 옛 사기[古史古記]를 상고하건대 그 민족의 근본과 신교의 본원이 다 어디로부터이며, 신사(神廟)의 삼보한궤(三寶韓几)와 궁내성의 오십한신(五十韓神)이 다 어디서 왔으며" 하고 반문했다.
공주시교당 사건 이후 추진했던 인류 보편적 위상의 추구가, 유서에서는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적 패러다임을 역으로 전용하는 형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일본 신도의 원류가 대종교라는 논리로 종교적 공인을 정당화하는 동시에, 조선이 일본보다 위에 있다는 역전된 위계를 주장하는 방식이기도 했다.
조천 직전 나철이 남긴 텍스트는 유서 외에도 순명삼조(殉命三條)·이세가(離世歌)·중광가(重光歌)가 있다. 이 세 텍스트는 훗날 일부 개작됐다가, 친필본이 발굴되어 원문이 확인됐다.
순명삼조 첫 조항은 간결하다. "나는 죄가 무겁고 덕이 없어서 능히 한배님의 큰 도를 빛내지 못하며 능히 한겨레의 망케 됨을 건지지 못하고 도리어 오늘의 업신여김을 받는지라. 이에 한오리 목숨을 끊음은 대종교를 위하여 죽는 것이다."
이세가 1장은 자신의 소명을 이렇게 시작한다. "神明한 우리 敎門 上帝 세운 道統으로 / 神聖한 나의 몸은 上帝ᄭ긔친 血統으로 / 불상타 이 衆生을 救하리라 건지리라."
이어지는 2장이 더 직접적이다.
"無理한 더 世法이 敎 묵그고 몸 억는다 / 上帝ᄭ긔이 侮辱과 大倧門에이 羞恥와 / 내 身上이 더럼을 한번 떠나 다 씻겻다 / 어셔 가자 한을길로 우리 한배 몬져 갑고 恩德."
무리한 세법이 교단과 자신을 구속했고, 그것이 신에게 모욕이고 대종교에 수치이며 자신을 더럽혔다. 그 더럼을 떠남으로써 다 씻겠다는 것이었다. "다시 神國에서 만납시다"로 끝을 맺는다.
중광가 52장도 비슷한 묘사를 담고 있다. 1915년 중광절에 맞춰 만주에서 서울 남본사로 돌아온 이후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天祖敎 神孫몸에 世法구속 우습다 / 弘濟를 自擔터니 天神께 돌혀 累德."
이 텍스트들에서 반복되는 클리셰가 있다. '세법', 그로 인한 '업신여김'과 '더럽힘', 그리고 죽음으로 그것을 씻어내는 것. 나철이 조천을 통해 성취하려 했던 것은 바로 이 씻김이었다. 더럽혀진 신성성(神聖性)의 회복이었다.
나철의 조천을 '정치를 위한 종교적 수단'으로 이해하면 그의 죽음을 오독하게 된다. '순수한 종교적 행위'로만 보면 그의 분노가 무엇을 향하고 있었는지를 놓친다.
조선의 전통적 성속(聖俗) 개념에서 '성스러움(sacred)'의 대척점은 세속이 아니라 '불경스러움(profane)'이었다. 서구 근대의 종교적/세속적 이분법과 다른 잣대다. 전통적으로 성스러움이란 국가 권력(조선시대에는 왕조로 표상됐던)으로부터 합법적이고 공식적으로 인정받은 것을 의미했다.
이 잣대로 근대 한국의 종교 지형을 나눠보면 나철 행위의 방향이 분명해진다. (1) 교파신도·불교·기독교처럼 총독부가 공식 공인한 종교는 합법적이고 공식적인 성스러운 자리를 점하고 있었다.
(2) 반면 국가신도는 '비종교'를 표방하면서도 국가 권력과 결합해 세속적 신성함을 누렸다.
(3) 유사 종교·종교적 결사는 종교의 형식은 갖췄으나 공인받지 못해 불경스러운 취급을 받는 자리였다.
(4) 비밀결사·정치적 결사는 불경스러운 데다 정치적이기까지 하다는 낙인이 찍힌 자리였다.
나철-대종교는 지배자의 시선으로 볼 때 (3)과 (4) 사이를 오가는 존재였다.
포교규칙에서 '종교'로 포함되지 않으며, 일차적으로 종교유사단체로 분류됐지만 준용은 끝까지 받지 못한 채 비공인 영역에 배제적으로 포섭된 것이다. 만주행을 단속당했을 때는 아예 불경스러운 정치 단체로 취급됐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지배자의 시선이다. 나철 스스로의 자기규정이 어디를 향하고 있었는가가 더 중요하다. 포교규칙에 신도로서 신고한 행동은 분명히 공인된 성스러운 자리를 향하고 있었다. 다른 유사종단의 서류는 접수해놓고 대종교만 각하했다는 집단의 기억이 전해주듯이, 그것은 기본적으로 불경스러운 유사 종교로 분류되는 것 자체에 대한 거부감이 담긴 행동이었다.
지배자의 눈으로 볼 때 유사 종교로 분류된다는 것은 종교적 단체로 존재를 허용해주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나철의 입장에서 이는 용납할 수 없는 조치였다. 아무리 '종교적'이라는 수식이 붙는다 해도, 공인(합법적이고 공식적이라는 의미의)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란 불경스러운 존재를 의미했기 때문이다. 성스러움에 배치된다는 점에서 그는 유사종교로 분류되기를 거부했다.
조천은 그 불경스러움을 씻어내는 행위였다. 공인을 통해 성스러움을 얻으려 했지만 거절당했다. 그러자 죽음을 통해 그 성스러움을 스스로 증명하려 한 것이다. 순명삼조에서 한 말, 이세가에서 한 말, 유서에서 한 말이 모두 같은 방향을 가리킨다.
이 구도를 좀 더 밀고 나가면 흥미로운 역설이 드러난다.
근대 일본에서 국가신도는 '비종교'라는 명분으로 다루어졌다. 신사비종교론은 정교분리라는 문명의 표준에 걸맞게 자신을 자리매김한 결과이기도 했다. 이로써 '종교'에서 분리된 그 신성한 권력이 세속에서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했다. '종교적인 것'에서 '세속적인 것'으로 자리를 옮겼을 뿐, 신성한 권력은 그대로 유지됐던 것이다. 이를 환속화(還俗化)라 부를 수 있다.
나철의 조천은 그 역방향이었다. '세속적인 것'에서 '종교적인 것'으로 자리매김하려고 했을 뿐, 그 역시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신성한 권력(주권)을 추구하기는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이른바 역-환속화(逆-還俗化)다. 한쪽이 비종교라는 탈을 쓰고 신성 권력을 휘둘렀다면, 나철은 종교라는 탈 안에 성스러운 정치를 숨겼다. 외피는 달랐다. 그러나 본질은 같은 사태였다.
그 외피의 차이는 어디서 왔는가. 제국과 식민지라는 비대칭적 지배관계에서 왔다. 지배자는 비종교라는 탈을 쓰고 신성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다. 피지배자는 종교라는 탈 안에 정치를 숨길 수밖에 없었다. 나철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민족종교가 그러했다. 그것을 '종교를 가장한 항일 단체'라고 규정한 것은 지배자의 시선이다. 그 시선이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도 어렵다. 그러나 현실 사회가 가진 구조적인 착취관계는 결코 쉽게 간과할 수 없다. 외피에서 차이를 만든 것은 권력의 비대칭이었다.
조천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유지한다면, 그것이 지향한 곳(성스러운 정치)은 결국 국가신도가 추구한 세속적 신성 권력과 본질에서 다르지 않았다는 역설에서 눈을 피해서는 안 된다. 겉으로는 서구 근대적 의미의 공인된 종교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성스러운 정치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외피는 다르지만 본질은 같은 사태다. 다만 환속화든 역-환속화든, 그 신성한 권력 자체를 무위로 만들고 성스러운 정치를 향한 권력의 벡터를 불경스러운 세속으로 끌어내리는 것(다시 공통의 사용으로 되돌리는 것)이 진정한 의미의 세속화(profanation)일 터다.
나철의 죽음이 남긴 것을 보자.
그가 조천한 직후부터 대종교는 항일투쟁의 구심으로 본격 작동하기 시작했다. 2세 교주 김교헌(金敎獻)은 총본사를 만주로 이전하고 교단을 항일 기지로 재편했다. 1918년 11월 만주·연해주의 유지 39인 명의로 무오독립선언서(戊午獨立宣言書)가 발표됐다. 2·8독립선언서와 3·1독립선언서보다 앞선 것이었다. 이후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대첩을 이끈 북로군정서의 주축이 대종교인이었고, 총재 서일(徐一)은 대종교의 핵심 간부였다. 1919년 상하이 임시의정원 출범 당시 의원 상당수가 대종교 교도였다. 단군사화를 민족사의 출발점으로 복원하는 학문적 작업도 대종교를 배경으로 이루어졌다.
1942년 임오교변으로 대종교는 결정적 타격을 받았다. 만주국과 조선총독부의 합동 작전으로 교단 지도자 21명이 체포됐고, 그중 10명이 옥사했다. 일제는 마지막까지 대종교를 "종교를 가장한 항일 단체"로 규정했다.
나철이 1916년에 보낸 그 마지막 메시지는 결국 전달됐다. 그가 씻어내려 했던 불경스러움은, 적어도 그의 후계자들에게는, 다시 성스러움으로 돌아갔다. 다만 방식은 예상과 달랐다. 공인된 종교로서의 성스러움이 아니라, 총을 들고 국경을 넘어 싸우는 사람들의 정신적 원동력으로서의 성스러움이었다.
홍암 나철의 묘는 지금 중국 길림성 화룡시 청호촌 작은 구릉에 있다. 2세 교주 무원 김교헌, 서일과 함께 대종교 삼종사(三宗師) 묘역을 이룬다. 세 분 모두 건국훈장 수여자다. 비석이 있고 묘역이 있다. 중국이 '반일지사 무덤'으로 표기해 관리하고 있다. 유해봉환 논의가 몇 차례 거론됐지만 아직 이루어지지 않았다.
나철이 유서에서 남긴 말이 떠오른다.
"죽음에 다달아서 한번 말함을 철이 어찌 거짓 하겠냐."
그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문제는 그 말을 들었어야 할 사람들이 제대로 들었느냐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