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덧 우리의 신체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투명해졌다. 모두가 대리인간이 되어간다. 은폐된 노동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일은, 결국 점점 지워져 가는 우리의 신체를 되찾는 일이다.” 《대리사회》 의 마지막 장, 마지막 문장이다. 이 책의 지은이 김민섭 (34)씨는 지방대 시간강사를 하다가 작년 5월말부터 생계형 대리운전 노동자가 되고 나서야 우리 사회의 모습을 ‘대리’라는 키워드로 풀어냈다. 그는 전작인 《나는 지방대 시간강사다》(《지방시》)를 출간하고서 학교생활을 청산했다. 10년 가까이 학교 연구실에서 논문만 쓰다가 첫 아이가 태어남과 동시에 시작한 맥도날드 물류 하차 노동도 그만두었다. (민섭 씨는 맥도날드 퇴직 후에도 건강보험 임의 계속가입 기간인 2년까지는 4대 보험을 보장받을 수 있다.) 이후 온전히 글만 쓰고자 1년의 시간을 확보했으나, 다시 대리운전 노동을 해야 했다. 생계를 위해 거의 매일 ‘밤 노동’을 하는 6개월 동안, 단지 손과 발의 조작만이 허락되는 ‘완전한 타인의 공간’ 속에서 스스로 검열당하고 통제되는 경험을 르포로 기록했다.
책 제목인 ‘대리사회’. 저마다 온전한 제 모습으로 살아가기보다는 은폐된 통제와 환상 속에서 타인의 욕망을 대리하며 살아가다 ‘투명인간이 되어 가는’ 혹은 타인을 ‘투명인간으로 만드는’ 세상이다.
그는 두 번째 책인 《대리사회》 출간 이후 글을 쓰고 말할 기회가 늘었다. 덕분에 대리운전 노동은 ‘선별적’으로 할 수 있게 됐다. 지난 6월 7일 저녁, 대리운전 동행취재를 앞두고, 그를 합정동의 한 카페에서 만났다. | | | ▲ "타인의 운전석에서 운전하는 게 어떤 느낌일까 진지하게 궁금했습니다. 과연 내가 대학에서 나로서 존재했는지 계속 물음표가 생기는 맥락에서 ‘대리’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었는데, 대놓고 ‘대리’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은 대리운전밖에 없더라고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 지금은 대리운전 노동을 매일 하지 않는다고 했는데, 한 달에 어느 정도 뛰고 있나요? 예전엔 하루도 안 쉬고 모든 밤을 뛰었지만, 지금은 선별적으로 일해요. 주중엔 망원동에서 글을 쓰고 부모님 집에서 지내다가 주말에 원주의 집에 가지요. 혹시 주중에 원주 ‘콜’이 뜰 땐 주중에도 원주 집에 가고요. 마침 글 마감이 적은 때고 오늘 ‘복상’에서 차량 지원을 해준다고 해서 일하는 날이에요. 마감이 바쁠 땐 못 뛰지만, 마감이 거의 없고 돈이 필요할 땐 일주일에 몇 번씩도 해요. 노동의 대가가 늘 일정하지 않아서 꼭 일을 해야 하는 날이 있지요.
― 언제가 꼭 일해야 하는 날인가요? 공휴일 전날은 대리기사들도 술 마시는 날이에요. 연휴 첫날, 공휴일 전날 같은 때는 기사가 적고 이용자가 많은 때라서 비교적 일이 수월하고 벌이도 좋아요. 김영란법 시행 하루 전날은 손님이 정말 많았고, 지금까지 콜이 제일 많았던 날은 대통령 탄핵 가결 날이었어요. 다들 술을 먹는지 콜이 정말 많았죠. 그날은 건마다 2천 원 더 준다는 회사 공고까지 떴는데, 저도 술을 마셔서 일을 못 했어요.(웃음) 이번 현충일 전날에는 일을 했습니다. 원래 난지천 공원이 콜이 꽤 잡히는 곳이라 거기서 시작했는데, 세 시간 동안 한 건도 안 떠서 속상했어요.
― 왜 대리운전을 하게 된 건가요? 생계죠! 글쓰기로는 가족 부양이 힘들어서 다른 노동을 찾았어요. 맥도날드 노동은 아기가 태어난 이후 우연히 공고문을 보고 시작한 것이지만, 대리운전은 더 매력적이었어요. 배울 것이 많겠다는 호기심이 있었으니까요. 타인의 운전석에서 운전하는 게 어떤 느낌일까 진지하게 궁금했습니다. 과연 내가 대학에서 나로서 존재했는지 계속 물음표가 생기는 맥락에서 ‘대리’라는 단어가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었는데, 대놓고 ‘대리’라는 단어가 들어간 일은 대리운전밖에 없더라고요. 네이버에 대리운전을 검색했더니 카카오에서 대리운전 앱을 3일 후부터 시작한다고 나왔어요. 운명 같았죠. 우연과 의지가 겹쳐 시작한 거예요.
― 그래서 느낌이 어땠나요? 대놓고 ‘대리’노동을 하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기분이. 처음엔 대리운전을 끝내고 남의 차에서 내리고 나면 기분이 좋고 후련했어요. 사실 타인의 운전석에서 운전하기는 정말 답답하거든요. 내 이름, 내 몸, 내 말과 생각이 모두 이용자에게 잡혀 있는 느낌이에요. 다른 공간에서의 노동보다 그 감각이 더 첨예하게 느껴져요. 맥도날드에서 일할 땐 잠깐이라도 혼자서 창고에서 쉴 수가 있는데, 운전석은 완전한 검열의 공간이거든요. 대리운전석을 내리면 나를 되찾는 해방감과 감각이 찾아왔죠.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는 내려도 편안치가 않더라고요. 남의 운전석에서 백 번쯤 운전했을 때였던 거 같아요. 더 이상 해방감도 후련감도 없었어요. 여기서 내린다고 해서 내 몸이, 나라는 사람이 과연 이 사회 이 공간에 존재하고 있는 게 맞는지 의문이 생겼어요. 이어 지금까지의 다른 노동의 공간들도 대리운전석과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죠. 대학에서도, 다른 곳에서도요. 작년 7월초쯤이던가… ‘아, 이 사회가 대리사회구나’ 하는 각성이 명료하게 떠올랐습니다. 그날은 일하지 않고 노트북을 열었어요. ‘대리사회’로 책을 쓰고 싶었습니다.
― “하루의 밤과 하루의 문장을 조금씩 쌓아가며 썼다”고 했는데, 밤에 운전하고 글을 계속 쓰기란 무척 치열한 일과였을 것 같습니다. 살면서 가장 치열했던 때가 석사논문 쓸 때였는데, 집에 거의 들어가질 못했어요. 《대리사회》 쓸 때가 그때처럼 치열했어요. 아침부터 글을 쓰다가 콜이 들어오는 저녁 6-7시부터 새벽 한두 시, 늦으면 6시까지 대리운전을 하고는 집에 들어오면 일과를 정리하고 아침이 되어 3-4시간 정도 자고 일어나서 또 글을 썼으니까요. 그렇게 4-5개월 하니까 몸이 안 좋아지는 신호가 왔어요. 40대였으면 못 썼을 것 같아요.
― 대리운전을 시작하고 6개월 후에 책이 나왔는데요. 그 사이에 쓸 거리가 그렇게 많았나요? ‘뭐부터 쓰지’ 하며 선택을 고민할 정도로 마주하는 모든 게 쓸 거리였어요. 보고 듣고 경험하는 모든 게 영감으로 왔어요. 이전엔 나를 제외한 사람들의 일상을 생각해본 적이 없었죠. 그런데 이 사람들의 일상이 곧 도시의 일상이 되는 것이었어요. 이 도시는 어떻게 기능하는지, 도시와 도시의 관계는 어떤 상관이 있는지, 개인들이 어떻게 통제받고 살아가는지가 보였어요. 첫차와 막차 시간을 아는 것으로도 여러 가지 관계가 보였죠. 제일 신기했던 건 광역버스 노선이었어요. 기존에는 그저 멀리 다니는 버스라고 생각했었는데, 이제는 그 안에 생계 노동자들이 꽉 차 있는 게 보여요. 서울에서 노동하고 밤에는 빠져나가는 사람들이죠. 밤에 지방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경우는 거의 없어요. 있다면 다 대리운전기사들이에요. (밤에 외곽에서 서울로 들어가는 광역버스에 타 있으면, 일제히 콜 알림음이 울립니다!) 일하다보면 서울 안에서 콜을 받아 돌다가도 한 번은 반드시 외곽으로 빠지게 되어 있어요. 외곽에 가면 더 먼 외곽으로 빠져요. 상계에서 시작하면 의정부, 구리에서 다음 콜을 받으면 남양주로, 혹은 일산에서 다시 콜을 받으면 파주로. 서울로 돌아가는 콜은 정말 운 좋은 경우지요.
― 손님들을 상대하다 인간에 환멸을 느끼게 되진 않던가요? 의외로, 아무리 술에 취한 사람이라도 혹시 실수를 할까 스스로 자제하고, 사과하는 분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물론 아닌 분들도 있지만, 인간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분들이 월등히 많았어요. 환멸보다는 애정이나 가능성을 더 많이 봤어요. 제가 카카오대리운전 앱으로만 영업을 해서일 수도 있을 거예요. 일단은 술 먹고 스마트폰으로 앱을 구동할 수 있는 좀 덜 취한 사람, 30-40대가 많이 이용하니까요. 제게 90도로 인사하는 분들도 있고, 미리 네비게이션을 켜놓고 기다리는 분도 있어요. 굳이 편의점에서 음료를 사주시는 분들도 있고요. 지역 업소 소속 선배들 이야기 들어보면 확실히 차이가 있어요. 저도 50대 이상 이용자를 만나면 긴장을 해요. 세대 차이가 분명하게 느껴지는 것이, 일단 말이 많으세요. ‘내가 인생을 가르쳐야겠다’거나 ‘전도해야겠다’ 싶은지 인생 이야기를 하며 훈계하거나 화내는 분도 있죠. 정말 전도하는 분들 많아요. 차에 십자가도 걸어 놓고. 어떤 분들은 대리운전기사가 네비게이션을 왜 이용하느냐며 짜증을 내기도 하시고요.
― 전도 얘기하시니 말인데, 기독교인이 아닌데도 관련 주제로 석사논문을 쓰셨더라고요? 1917년에 창간한 〈기독청년〉이라는 잡지를 연구한 논문이었어요. 1910년대의 동경 유학생들은 기독교를 단순히 하나의 종교로 맹목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개혁을 위한 사상 통합의 도구라고 믿었어요. 이러한 인식은 1910년대 중반부터 동경 조선 기독교 청년회를 중심으로 일어나고, 많은 논쟁을 거치며 내재화되는데요. 〈기독청년〉은 그러한 담론들을 여과 없이 담아낸 의미 있는 잡지예요. 이광수와 전영택 등 여러 유학생 문인들이 1910년대의 기독교 논쟁에 참여했던 것으로 보나, 그런 인식이 스며있는 그들의 몇몇 작품은 문학사적으로도 가치가 높거든요. 그럼에도 국문학 쪽에서도 기독교 쪽에서도 다뤄진 적이 거의 없어요. 기독교인이 아니라서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지 않았을까요? 기독교인이 아닌 기독교 연구가도 필요한 것 같아요.
| | | ▲ "전도라는 건 동등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 아닌가요? 전도하시는 분이 을의 입장일 때도 갑에게 똑같이 전도할 수 있을까요? 동의할 수밖에 없는 위치의 사람에게 하는 건 전도가 아니라 강요라고 봐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 전도하는 분들과의 만남은 어땠나요? 사실 그분들이 듣고 싶은 말은 제가 교회에 가겠다는 말일 거잖아요. 그 상황에서 제가 안 간다는 말을 할 수 있을까요? 거의 강요받는 셈이었지요. 전도라는 건 동등한 관계에서 일어나는 것 아닌가요? 전도하시는 분이 을의 입장일 때도 갑에게 똑같이 전도할 수 있을까요? 동의할 수밖에 없는 위치의 사람에게 하는 건 전도가 아니라 강요라고 봐요.
― 가장 화가 났던 때는 언제였나요? 책에도 썼는데, 지갑이 없어졌다며 나를 세워놓고는 뭐라고 하고서 결국 자기 의자 밑에서 지갑을 발견하고 사과도 없이 그냥 간 사람이 있어요. 흔한 일이긴 하죠. 책엔 안 썼지만 친구랑 동승한 손님이 편의점에서 껌 세 통을 사왔길래 혼자 ‘왜 내 것까지 샀지?’ 생각했는데, 2+1 행사 사은품이었더라고요. 혼자 민망해서 속으로 웃었는데 그다음 대화를 듣다가 너무 슬퍼졌어요. 한 통을 친구에게 주면서 “여기 사람이 둘밖에 없으니까 한 통은 나중에 먹겠다” 하더라고요. 내가 한 인간으로 인식되지 않는 순간이었어요. 마치 투명인간처럼요.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슬펐죠. 물론 그분이 술에 취했다는 건 감안해야겠지요.
― 책은 많이 팔렸어요? 1쇄 1만 부를 찍었는데 다 나가고 2쇄를 찍었어요. 출판사가 정말 열심히 팔아주어서 너무너무 감사해요. ‘지방시’를 쓰고 정말 외롭고 힘들었거든요. 예상과 달리 동료 강사들의 공격적인 반응을 보면서 애초 계획과 반대로 시간강사를 그만 두었어요. 여튼 《대리사회》를 쓰면서 다른 매체에 기고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열려서 지금 다섯 곳에 칼럼을 쓰고 있어요. 생계를 채울 수는 없지만 살면서 하고 싶고 말을, 신문이나 잡지 같은 매체에 쓸 수 있게 되어 기뻐요. 지면을 허락받은 게 큰 변화에요. ‘글을 계속 쓸 수 있겠다’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겠다’는 작은 희망이 열렸어요.
― 책이 나온 뒤로 변한 점이 있는지 궁금해요. 변한 점이라기보다는 책을 쓰고 놀랐어요. 크게 두 군데서 피드백이 왔거든요. 우선 방송 작가들이 우리가 ‘지방시’라면서 ‘너무 힘들다’는 반응이 왔고요. 그리고 교회 노동자들이요. ‘우리 교회는 크고 자본이 많은데 내부 노동자인 우리는 대학에서보다 더 대리인간으로 살고 있다’고 하더라고요. 상식선의 우위에 있어야 하는 사회적인 공간들이 있는데, 대학과 교회와 방송국에 대리인간이 가장 많다는 건 이 사회가 그만큼 정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방증하는 것이지요.
| | | ▲ "대리운전 앱은 늘 켜놔요. 글을 쓰다가도 먼 지방으로 가는 장거리 콜이 뜨면 잡아요. 돈이 되거든요." ⓒ복음과상황 이범진 |
― 둘째가 태어났다고 들었어요. 생계에는 문제가 없을까요? 다음 주면 둘째가 100일이에요. 몇 군데서 정기 원고료가 들어오고, 주 1회 정도 인문학 강의가 있고, 대리운전으로 어떻게든 꾸역꾸역 살고 있어요. 책 계약이 세 권 정도 들어와서 계약금 받은 건은 열심히 쓰고 있고요. 글을 손에서 놓지 않아요. 어쨌든 대리운전은 생계수단의 일부이지만, 글을 쓰는 건 제 삶의 수단이거든요. 무얼 하든 글을 쓸 것 같아요.
― 아이에게 사회적 계층을 물려줄 게 걱정되지 않나요? 어떤 ‘수저’로 태어나는지가 사회적 문제인 건 사실이에요. 지금 첫째가 네 살이에요. 그런데 저는 물려줘야 할 게 돈은 아닌 것 같아서 별로 걱정되진 않아요. 제가 혹시 아이를 덜 사랑하는 걸까요?(웃음) 내가 ‘한 인간’으로서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를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정의롭게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물음을 물려주고 싶어요. 그게 돈을 물려주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 같아요. 그 물음에 따라 저도 아내도 한 사람의 인간으로 잘 살면 좋겠어요. 공부를 잘하는 것은 노력하면 많은 이들이 할 수 있어요. 우리 아이들은 성적이 뛰어나거나 무언가를 잘한다는 평가를 듣지 않아도 한 인간으로서 존중받을 만한 사람이 되면 좋겠어요. 부모를 보면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는 아이로, 자기 자신으로 행복하게 살아가면 좋겠어요. 물론 자신도 행복하지만, 주변 사람들과 사회에 보탬이 되는 사람이면 좋겠어요. 고난 없이 자라길 바라지 않아요. 저는 고난을 통해서 배우는 게 많았습니다. 아이에게도 나름의 준비된 길이 있을 것이고, 편한 길은 아니겠지만 그럼에도 배우는 게 있을 테니까요. 제대로 된 한 인간으로 자라면 좋겠습니다.
| | | ▲ 인터뷰 중에도 대리운전 앱 알림을 확인 중인 김민섭 씨 ⓒ복음과상황 이범진 |
― 책 마지막 부분에 “어느덧 우리의 신체는 서로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투명해졌다. 모두가 대리인간이 되어간다. 은폐된 노동을 기억하고 상상하는 일은, 결국 점점 지워져 가는 우리의 신체를 되찾는 일”이라고 썼던데, 어떤 의미인가요?
밤 노동을 하기 전엔 도시가 어떻게 이렇게 깨끗하게 유지되는가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어요. 밤 거리에 나와도 노동자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죠. 그런데 제가 밤의 거리에서 노동을 해보니 그동안 ‘숨어 있던’ 사람들이 다 거리에 있더라고요. 그들이 다 노동자예요. 대리운전기사뿐이 아니라 새벽에 도로 공사하시는 분들, 버스 운전하시는 분들, 쓰레기 치우시는 분들, 지하철 막차 끝나고 청소하시는 분들…. 이들이 원래부터 ‘투명인간’은 아니었을 텐데, 내가 그렇게 그들을 지워왔음을 인식하면서 쓴 것이죠. 우리들이 만들어낸 투명인간들이 참 많구나 싶어요. 그들을 더 발견할 때마다 숨어 있는 언어도 그만큼 더 발견하게 될 거예요. 대학에서 공부한 시간도 유익했지만 거리에서 ‘지금 여기’의 이야기를 글로 쓸 수 있어서 저는 지금이 좋아요. 자유로워요.
| | | ▲ 첫 콜 시작 지점인 홍대입구역으로 달렸다. ⓒ복음과상황 오지은 |
1차 인터뷰는 여기서 끝났다. 이어서 곧 시작된 그의 ‘밤일’에 일일 지원차량으로 나섰다. 평소보다 두 시간여 늦은 밤 10시가 되어서야 첫 콜을 물어왔다. ‘홍대입구역-독바위역 힐스테이트’(9km, 18,000원) 경로였다. 그는 보조석에 앉았다. 홍대입구역으로 향하는 동안 그는 캡 모자를 꺼내 썼다. 왜냐고 물었더니 웃으며 “음…, 그냥요” 하고는 첫 손님 차를 운전하러 배낭을 멘 채 차에서 내렸다.
인터뷰 중에도 대리운전 앱 알림을 확인하던 최신 스마트폰을 손에 쥔 그는 지하철역 1번 출구 쪽으로 뛰어가더니 잠깐 사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취재팀도 곧바로 첫 도착지로 향했다. 목적지 근방에서, 첫 일감을 벌써 마무리한 그의 전화를 받고 힐스테이트 아파트 정문 앞에서 픽업하기로 했다. 멀리서 취재팀 차량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는 그를 차에 태웠다. 다음 콜은 2.7km 떨어진 은평장례식장에서 들어왔다. ‘은평장례식장-길음뉴타운래미안6단지’(13.5km, 20,000원) 콜이었다.
두 번째 출발지로 이동하는 차 안에서 그가 떠나온 대학 시간강사 생활에 대해서 물었다. 알고 보니 그는 누구보다 착실하게 대학의 대리사회에 적응한 사람이었다. 그러다 첫 아이가 태어나자 4대 보험을 보장받기 위해 맥도날드에 취업하면서 익숙함에 물음표를 던졌다고 했다.
| | | ▲ 차에서 내려 두 번째 콜 출발지로 향하는 김민섭 씨의 뒷모습 ⓒ복음과상황 오지은 |
“저는 대학에서 시간강사 할 때 그 역할에 무지 성실하고 익숙해있던 사람이었어요. 여덟 번 강의에서 다섯 번 최우수 평가를 받기도 했죠. 두 번은 평가 대상이 아니었고요. 그런데 맥도날드에서 일하면서부터 물음표가 고개를 들었어요. ‘햄버거를 파는 가게에서도 나를 법적 노동자로 대우하게 되어 있는데, 대학이라는 공간에서 과연 나는 무엇인가’ ‘내가 정말 잘 살고 있는 건가’ 하는…. 당연한 질문인데 너무 늦었던 거죠.”
두 번째 출발지에 그를 내려주었다. 그가 세 명의 젊은 남자가 기다리던 검은 세단 운전석 문을 여는 모습을 확인하고서 취재팀도 목적지로 향했다. 이번엔 취재 차량이 먼저 도착했다. 다음 출발지로 이동 준비를 마치고 1-2분 정도 기다리니 그가 다시 손을 흔들며 나타나 차에 올랐다. 2.3km를 달려 다음 콜 출발지로 가는 동안 혹시 기분 상하는 일은 없었는지 싶어 이번 손님들은 어땠느냐 물었다.
“보자 마자 ‘대학생이 왔어?’라고 하더라고요. 좋아해야 하는 건지, 하하하. ‘애가 둘입니다’라고 말했더니 차내 분위기가 급 숙연해졌어요.”
그 말에 다같이 웃었다. 세 번째 콜은 ‘돈암동-목동신시가지1단지아파트’(17.3km, 21,000원) 코스였다. 그를 출발지에 내려주고 달리는 동안 아까부터 신호가 왔던 소변이 더욱 급해졌으나, 자정 가까운 시간에 도로 위에서 화장실을 찾지 못하고 일단 목적지로 향했다. 이번엔 길이 엇갈려 4-5분 정도 헤맨 후 그를 태웠다. 겨우 1-2분 더 걸려 만나는 사이에 그는 시 외곽으로 가는 비싼 콜을 놓쳤다고 했다. 못내 아쉬워하는 그에게 ‘등촌역-부천 LH옥길브리즈힐아파트’(17.5km, 25,000원) 콜이 잡혔다. 네 번째 일감이었다. 출발지로 이동하는 중에 그에게 생리현상은 언제 해결하느냐 물었다.
“이 시간에 화장실 가는 건 사치예요. 평일엔 새벽 1시까지가 피크거든요. 그때를 넘기면 콜이 잘 없어요.”
목동에서 3km 떨어진 등촌역에 그를 내려주면서 전속력으로 지하철 화장실을 다녀왔다. 네 번째 목적지에 그와 엇비슷하게 도착하기 위해 더 빨리 달렸다. 거의 도착 무렵인데 주변에 가로등 하나 없는 길이 이어졌다. 캄캄했다. 부천에서도 꽤 외진 곳이었다. 조금 일찍 도착한 그를 픽업했다. 가쁜 숨을 몰아쉬었고 이마엔 땀이 맺혀 있었다. 차에 복귀할 때마다 같은 모습이었다. 숨을 고른 그가 입을 뗐다.
“부천에서도 이렇게 외진 곳인 줄은 예상하지 못했어요. 지금처럼 지원하는 차량이 아니면 못 올 곳인데, 이런 곳은 손님이 고마워해야겠는데요.”
순간 아파트 단지 앞에서 나와 한 손에 쥔 스마트폰 화면을 계속 응시하며 어디론가 급히 걸어가고 있던 중년 남성이 떠올랐다. 그도 대리운전기사 같았다고 말하니 격하게 아쉬움을 표현한다. “아! 같이 타고 가면 좋았을 걸 그랬네요…. 이런 데선 다시 콜 받기도, 빠져나가기도 정말 어렵거든요.” 다섯 번째 콜을 잡으려면 근처 번화가로 나가야 해서 7km 거리에 있는 철산역으로 향했다. 그동안 피로가 급속도로 밀려왔다. 인터뷰 때 들었던 다른 취재팀 이야기가 떠올랐다. 대리운전을 끝까지 동행하겠다고 나섰다가 두 건을 함께 뛰더니 “돈을 낼 테니까 여기서 접자”고 했다고. “이제야 그들이 이해가 간다”고 말했다. 다 같이 웃었다. 피크타임이 끝나가는 새벽 1시 무렵에야 철산역에서 다섯 번째 콜을 받았다. ‘철산동-래미안영등포프레비뉴아파트’(9km, 16,000원) 코스였다. 또 다시 그를 출발지에 내려주고 목적지로 향했다. 대리운전기사 차량 지원이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새벽 도로를 달려 아파트단지에 도착해 그를 태웠다. 손님이 건네준 음료수 하나를 보여주며 “이걸 받았다”며 웃었다. 외곽인 수원이나 일산, 혹은 강남으로 가는 콜을 아직 받지 못하고 있던 차에 다섯 번째로 ‘여의도-일산 위시티2단지자이아파트’(25km, 26,000원) 콜을 받았다. 여의도까지 6km를 달리는 동안 그는 늘 그렇듯 곧바로 손님에게 확인 전화를 걸었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대리 부르셨죠? 제가 지금 차량으로 이동 중이라서요. 15분 내로는 도착할 수 있습니다.” 이동 시간이 좀 걸렸지만 손님에게 말한 15분은 넘기지 않았다. 스마트폰 화면을 계속 보는 그에게 혹시 오늘 말을 걸어온 손님들에게 책 홍보는 했느냐고 물었더니, 피식 웃음이 돌아왔다. 통화음으로 들은 이번 손님의 목소리가 꽤 점잖았으니 이야기를 걸어오면 책 구매를 꼭 권하라고 세차게 당부했다. 그가 콜 출발지에 도착해 손님 차를 찾기 위해 전화를 다시 걸어 비상등을 켜달라고 요청했다. 새벽 어둠 속에서 한강공원에 주차된 차를 찾아 두리번거리다가 곧 차량을 발견하고 그를 내려준 후 다시 30분 정도를 달려 도착지에 이르렀다. 새벽 두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차에 오른 그가 먼저 입을 열었다.
“손님이 너무 점잖으신지, 말 한마디도 건네지 않고 잠을 자더라고요, 하하…. 그래도 자는 손님이 제일 편해요. 특히 음악만 틀어놓고 잠드는 손님이요. 다른 건 신경 안 쓰고 운전만 하면 되거든요.”
| | | ▲ 아내와 함께 2인 1조로 대리운전을 했던 날. 스마트폰 CCTV 화면 속, 홀로 자고 있는 첫째. (사진: 김민섭 페이스북) |
거의 파장 시간, 남은 콜이 있을지도 몰라 5km 거리의 번화가로 향했다. 그 일대를 차로 천천히 이동하는 동안 그는 창밖을 주시하면서 “가게 문이 거의 닫혀 있고, 다른 대리기사가 보이지 않는다”고 했다. 지금부터 남은 콜은 매일 영업하시는 ‘선배’들의 손님이라고도 했다. 차로 변에는 대리운전기사들을 ‘택틀’(택시 셔틀)할 주황색 서울택시가 꽤 많았다. 그의 핸드폰에 단거리 콜이 떴다가 사라지길 두어 번 하는 동안, 일을 마치기로 결정하고 그의 부모님 집이 있는 서울 망원동으로 차를 돌렸다. 자유로를 달리며 부모님 댁으로 복귀하는 중에도 ‘좋은 콜’이 뜨면 응하기로 했다. 이 시간에 좋은 콜이란 최단거리 코스다. “아, 제가 1초 만에 눌렀는데 다른 기사분이 0.7초 만에 눌렀나 봐요.” 대리운전도 눈치와 응답속도가 생명인 모양이다. 이어서 그의 ‘선별적 대리운전’ 이야기를 더 들을 수 있었다.
“매일 안 해도 대리운전 앱은 늘 켜놔요. 글을 쓰다가도 먼 지방으로 가는 장거리 콜이 뜨면 잡아요. 돈이 되거든요. 그리고 먼 지방까지 대리운전을 부르는 경우는 대게 차종이 좋거든요. 승차감이 좋아서 운전할 때 팔이 안 아파요. 현금을 더 얹어주는 경우도 꽤 있고요. 혹시 원주로 가는 콜이 뜨면 평일이라도 가족 보러 가죠. 원주 콜 뜨면 그날은 정말 운수 좋은 날이에요.”
이제 새벽 3시를 훌쩍 넘었다. 새벽 허기를 순대국으로 달래기로 했다. 영업 시작 후 한 번도 화장실을 가지 못한 그는 순대국 집에 들어서야 화장실을 다녀왔다. 언제부터 참았느냐고 물으니 “한 시부터”라고 했다. 순대국을 비우며 소설은 언제쯤 쓰게 되겠느냐고, 앞으로 어떤 노동이 또 하고 싶으냐고 물었다.
“아직은 다른 글들을 쓰고 있지만 때가 되면 소설도 쓸 수 있을 거예요. 오늘도 집에 가면 마감인 원고를 마저 써 넘기고 자야 해요. 대리운전이든 다른 노동이든 글쓰기라는 삶과 같이 갈 거예요. 노동은 항상 할 테고, 다음 노동은 무엇이 될지 아직 모르지만 무엇이든 거기 맞는 옷을 또 입겠죠. 저는 작가 김민섭이 되고 싶어요.”
| | | ⓒ복음과상황 이범진 |
취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 기절하듯 곯아 떨어졌다. 기상 시간에 눈을 뜨지 못하고 주섬주섬 더듬어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하려는데 카톡 메시지가 하나 와 있었다. 마감 원고를 송고하고 나서 김민섭 씨가 새벽 5:23에 보내온 것이었다. 오늘 고생 많았다며 또 보자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