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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 말 가족여행 기행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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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여행을 다녀왔습니다. 가까운 곳이었지만, 아직 못 가본 곳이었습니다. 집사람 휴가일도 그렇고, 아이들도 아직 학기 중이어서, 2박3일 일정으로 하였습니다.
12월 27일 아침이 늦어, 점심은 김밥을 사서 먹으면서 이동하였습니다. 초행길이라 가장 알기 쉬운 길로 갔습니다. 외곽순환도로, 자유로를 이용하다보니, 한 강을 넘어갔다가다 다시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집사람의 타박이 있었습니다....
강화대교를 넘어 읍내로 들어가는데, 뜻하지 않게 조봉암 기념비의 이정표가 눈에 스쳤습니다. 조봉암이 인천사람이라고 생각하였는데, 고향이 강화였다는 사실은 몰랐습니다. 투철한 공산혁명가, 민족독립운동가였지만, 해방후 박헌영의 강경노선에 반대하여 공산당을 떠나, 남한 단독선거에 참여하고, 이승만 초대 정부에 농림부장관으로 들어가, 우리 사회 최대의 개혁과제였던 토지개혁을 이루었던 조봉암, 이후 이승만에 대적할 수 있는 민중의 대통령 후보가 되었으나, 정권의 간첩조작에 의하여 현대사 최초의 사법살인을 당한 비운의 인물 조봉암, 후에 꼭 찾아보리라 마음먹었지만, 결국 2박3일 일정 동안 다시 방문하지는 못하였습니다....
강화도에 늦게 도착하여 숙소로 먼저 가지 못하고, 그날의 예정 코스인 고려 궁지로 향했습니다. 고려 궁지 주차장 옆에 바로 강화 성공회성당 그리고 철종이 살던 용흥궁이 보였습니다. 강화 성공회성당은 영국 교회인 성공회가 한국에 최초로 세운 성당인데, 건물이 전형적인 한옥 형태였습니다. 신기하였습니다. 댓돌 위에 신발이 놓여져 있는 것을 보니, 지금도 성당으로 운영되는 것 같았습니다. 골목을 마주하고 있는 용흥궁은 말이 궁이지, 그저 아담한 한옥이었습니다. 철종이 강화도령으로 살던 곳인데, 왕이 된 후에 ‘번듯한’ 기와집으로 새로 지었다고 합니다.
주차장 반대편에는 강화 문학박물관이 서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없었습니다. 현대 여류 수필가 조경희씨가 세운 박물관이 아닌가 싶었습니다. 2층은 조경희 전시관으로 꾸며져 있었습니다. 1층에서는 강화에 인연이 있는 선조 문인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강화학파 양명학의 선비들, 정제두, 이건창, 정인보도 볼 수 있었고, 송강 정철의 제자로 강화에 살았던 권필도 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이목을 끈 것은 고려 최고의 문인 이규보였습니다. 이규보, 고려 문학사의 빛난 별, 동국이상국집의 저자로만 알고 있었지, 그의 글을 제대로 본 적이 한 번도 없던 저에게 이규보의 발견은 놀라움이었습니다. 박물관에 전시된 그의 글 가운데, <신곡행(햅쌀의 노래)>이라는 시가 제 가슴에 박혔습니다.
新穀行 (햅쌀의 노래) (이규보 저, 정태욱 번역)
一粒一粒安可輕
係人生死與富貧
我敬農夫如敬佛
佛猶難活已飢人
可喜白首翁
又見今年稻穀新
雖死無所歉
東作餘膏及此身
한 톨 한 톨 어찌 가벼이 여기리.
사람의 생사와 빈부가 달렸다.
나는 농부 공경하길 부처님 공경하듯 한다.
부처님은 오히려 굶주린 사람을 살리기 어렵지 않은가.
기쁘다, 이 흰 머리 늙은이.
올해 또 새 쌀을 보게 되었구나.
비록 죽더라도 부족함 없으리.
농사의 혜택이 이 몸에까지 미침에랴.
박물관을 나와 고려궁지로 향했습니다. 야트막한 언덕, 학교와 유치원이 있는 깨끗한 길을 오르니, 바로 고려궁지가 나왔습니다. 고려궁지는 바로 고려 무인정권 대몽항쟁 시절 개성에서 천도해 왔던 강화 궁궐터였습니다. 당시 유라시아를 휩쓸었던 몽골에 맞서 고려 무인정권은 39년을 싸웠습니다. 강화도는 ‘바다’에 약했던 몽골이 공략하기 어려운 곳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사이 국토는 초토화되고, 무수한 촌락은 불타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이 죽고, 또 끌려갔습니다. 가장 피해가 컸다고 하는 1235~9년 제3차 침입 시에만 20만명 이상이 포로로 잡혀가고, 그 이상이 죽임을 당했다고 합니다. 당시 고려의 인구 500만 가운데 10% 이상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고려궁지에는 조선 시대의 유적도 있었습니다. 특히 외규장각을 본 것은 망외의 소득이었습니다. 병인양요 때, 프랑스 침략자들이 퇴각하면서 왕실 자산과 도서를 약탈해갔는데, 그것이 바로 이 외규장각의 것이었습니다. 이 때 가져간 도서들을 지금 프랑스는 ‘장기(영구) 대여’의 형식으로 우리에게 반환하였다고 합니다. 참으로 희한합니다. 강탈해 간 것을 마침 선심쓰듯이 ‘대여’해 준다고 한 것입니다. 여전히 소유권자는 자신들이라고 하는 것이지요. 지금도 제국주의 약탈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뜻일까요?
고려 궁지 지역을 나와서 고인돌 유적을 보러 가기로 하였습니다. 강화도는 도처에 고인돌 유적이 많습니다. 전라도 고창 화순 지역과 더불어 강화도는 세계적으로 고인돌이 가장 많이 분포되어 있는 곳이라고 합니다. 사진으로 자주 보았던 ‘탁자 식’ 고인돌, 그 멋지게 서있는 고인돌 유적이 바로 강화도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고 합니다. 다만, 겨울 날씨가 영하로 내려가고, 해 짧은 날이 벌써 어둑어둑해져서, 우리는 역사박물관 실내로 들어가기로 하였습니다.
박물관은 참으로 잘 꾸며져 있었습니다. 고인돌을 세우는 방법에 대하여 비로소 잘 알 수 있었습니다. 먼저 받침돌을 세우고, 이어서 그 위로 흙을 쌓아 언덕처럼 만들고, 윗판에 해당하는 돌을 끌어 올려 얹은 다음, 쌓아 올린 흙을 걷어내는 것이었습니다! 오, 그 원시시대 선인들의 지혜가 이 정도였습니다! 우리 한반도가 세계적으로 고인돌 분포가 가장 많고, 조밀한 지역이라는 정보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혹시 유라시아의 혹독한 기후와 거친 땅에 살던 이들이 보다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이동하고 또 이동하여 여기에 와 정착하지 않았나 혼자 생각해 보았습니다.
고려 대몽항쟁기 무인 정권의 강화 수도 건설에 대한 내용도 있었습니다. 강화산성을 외성, 중성, 내성의 3중 구조로 축조하였다는 사실도 새로 알게 되었습니다. 무리한 건설과 권력층의 향락에 대한 백성들의 비참과 분노도 소개되어 있었습니다. ‘사람 목숨보다 잣나무가 귀한가!’
조선 말기 제국주의 침탈과 어리석은 쇄국정책이 빚은 불행한 ‘양요’에 대하여도 자세히 알게 되었습니다. 변변한 무기도 없이 현대식으로 무장한 서양에 맞섰던 우리 군사들의 불굴의 의지와 무참한 결말은 참으로 한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강화도를 잠시 점령하였던 프랑스 군들은 우리 군의 기습과 용맹한 투쟁에 밀려 퇴각하였습니다. 하지만 뒤 이어 찾아 온 미군은 광성보에서 우리 군을 전멸시켰습니다. 우리 병사들은 거의 맨 손으로 싸웠다고 합니다. 모래를 집어 던지는 것이 그들이 할 수 있었던 최후의 절망적인 전술이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조선의 왕권을 바로 세워, 국가를 갱신하려고 하였던가요? 그가 택한 쇄국정책의 아둔함은 곧 조선의 어두운 운명을 예고하는 것이었습니다.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 척화비는 전국에 200여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척화비에는 서양 오랑캐와 화해를 주장하는 자는 '매국노'라고 쓰여 있었습니다. 무지몽매하고 자고자대(自高自大)하였던 대원군은 조선의 명을 재촉하였습니다. 오만의 무지는 간사한 매국과 마찬가지로 해롭고 치명적인 것이었습니다.
역사박물관 옆에 또 하나의 박물관이 있었습니다. 자연사 박물관이었습니다. 지구가 그 탄생에서부터 현재까지 어떻게 변화 진행하여 왔는지, 그리고 그 안에서 또 다양한 생명체들이 어떻게 상호 작용하며 진화하고 있는지, 생생한 학습자료들과 정확한 설명들이 많았습니다. 짧은 시간에 공부를 적잖이 했습니다. 하늘을 나는 동물에서 ‘동력 비행’과 ‘무동력 비행’의 구분에 대하여 처음 알았습니다. 새들처럼 스스로의 날개짓으로 비행하는 동물도 있고, 날다람쥐와 같이 날개만 펴고 바람에 의해 잠시 나는 동물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풍요롭고 고급스러운 지식의 공간이었습니다. 강화가 인구 규모로 보면 작은 군에 불과할 것인데, 박물관은 세계적 수준이라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6시 박물관 문을 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벌써 깜깜하였습니다. 이제 숙소로 갈 시간이었습니다. 숙소는 교통이 편리할 것 같아, 강화도 북쪽 국화저수지 근처 펜션을 잡았습니다. 복층 구조였는데, 신기하였습니다. 윗층 작은 공간에 침대가 있고, 아래층은 거실이었습니다. 아이들 둘이 침대에서 자 보고 싶어해서(집에는 침대가 없어서...), 그렇게 하기로 하였는데, 결국은 아래 층에 이부자리 펴고 넷이 함께 자게 되었습니다.
자기 전에 TV를 실컷보았습니다(집에는 텔레비전이 없어서...). 케이블 채널이 200개가 넘는 것 같았습니다. 이것저것 보다가, 국회방송에서 중국 드라마 <삼국지>까지 보게 되었습니다. 번역이 잘되어 있었습니다. 오나라 군사령관 주유가 책략을 썼지만, 촉의 제갈량에 역이용 당해 일생일대의 타격을 입고, 사망에 이르는 스토리였습니다. 아이들이 잘 아는 부분이라 그런지 너무 흥미진진해 하였습니다. 덕분에 엄마 아빠도 밤이 깊도록 삼국지에 대한 견문을 넓혔습니다. ...
마침 옆 호실에는 청년들이 단체로 와서 신나게 놀고 있었습니다. 무슨 게임을 하는지, 새벽 두 시가 넘어서까지 시끌벅적하였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저희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어보니 얼굴이 발갛게 술기운이 오른 청년이 있었습니다. 옆 호실에서 온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게임을 하는데요.. 하면서 가족이신가요?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렇다고 대답하니, 그냥 아무 말 없이 돌아서 갔습니다. 게임에서 져서 옆 호실 ‘여학생들’을 어떻게 해 보는 벌칙을 받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삼국지 드라마에 몰입하여 있던 덕에 별 신경 쓰지 않고, 잊어버렸지만, 조금은 당황스러웠습니다.
다음 날 모두 피곤하였는지, 10시가 넘어도 일어나지 못하였습니다. 또 저도 학교 일 관련 의견서 제출 마무리 작업에 골몰하였습니다. 결국 12시 30분 다 되어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마음이 급하여, 가장 중요한 남쪽 마니산으로 향했습니다. 도중에 정제두의 묘, 김취려의 묘 이정표를 보았지만, 들를 수 없었습니다. 1시 경 드디어 화도 초등학교 쪽 마니산 입구에 도착하였습니다. 마니산에 온 이상 참성단을 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단군 국조에 제사를 지내는 곳, 지금도 전국체전 성화 채화의 장소, 민족의 성지 가운데 하나라고 할 것입니다. 집사람도 같이 출발하였지만, 아스팔트 길이 끝나면서 무릎 관계로 그냥 아래에 머물고, 저와 두 아이들만 함께 올랐습니다. 좀 더 빠른 코스인 ‘계단길’을 택하였습니다.
물정을 몰랐던 저는 조금 올라가면 정상이겠거니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큰 오산이었습니다. 마니산 등산은 간단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둘째 아이는 왜 계단길로 왔느냐며 불평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독려하며 간신히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은 의외로 단촐하였습니다. 돌로 쌓은 제단에는 올라갈 수 없었습니다. 제단 앞에 커다란 향로가 있었고, 제단 위 모서리에는 소사나무가 신비하게 뻗어 나와 있는데, 참성단 수호나무라고 하였습니다. 겨울 청명한 날씨여서 경치가 멀리까지 보였습니다. 푸른 하늘 아래 서해 뭇 섬들과 바다가 장쾌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오래 지체할 수 없어서, 바로 하산하였습니다. 짧은 코스인 계단 길로 다시 내려오는데, 무릎 문제도 부담되고, 같은 길을 밟는 지루함도 이기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올라가 옆의 ‘단군로’를 택하였습니다. 단군로는 등산로 자체도 훨씬 다채롭고, 서해 바다를 볼 수 있어, 풍광도 좋았습니다. 계단이 있어도 턱이 높지 않은 계단이 균질적으로 촘촘하게 되어 있고, 고무 그물이 깔려 있어 무릎의 충격도 적었습니다. 그래도 길은 항상 쉽지는 않았습니다. 두 손, 두 발 다 이용하여 바위를 타야 하는 곳도 있었습니다. 한 참 내려가는데, 청년 두 명이 빨갛게 상기된 얼굴로 올라오고 있습니다. 앞서 오는 청년이 숨을 헉헉거리며, ‘어휴 힘들어, 절대 다시 안 온다’며 불평하였습니다. 발걸음을 옮기며 저도 웃고 아이들도 웃었습니다.
산행 길 곳곳에 마니산과 참성단에 관한 옛 문인들을 시가 목판에 새겨져 있어, 등산객의 마음을 여유롭게 해 주었습니다. 여러 글귀 가운데 서영보의 싯구가 제 시선을 끌었습니다.
참성단 (죽석 서영보 지음)
만길 현모한 제단은 푸른 하늘에 닿았고
소슬바람 은근한 기운이 내 마음을 밝게 해 주네
망연히 앉아 나의 견문이 좁았음을 생각하느니
눈 아래 우리 강산이 평안하구나
후에 집에 돌아와 그 원문이 한문이 아닐까 싶어 찾아보았는데, 구할 수 없었습니다. 서영보에 대하여는 아직 학계의 연구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였습니다. 저도 서영보는 모르지만, 위 시는 가히 일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의 두 구절도 훌륭하거니와 뒤의 두 구절은 백미였습니다. 저 아득한 고조선 단군 시절부터 우리 선조들의 삶의 유구한 역사를 돌이켜 보면 누구라도 한 인생의 식견과 견문이 좁음을 새삼 깨닫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한 깨달음으로 마음이 맑아지는 순간, 세상에 대한 번뇌와 불평보다 산하와 백성들에 대한 기쁨과 고마움이 앞서게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래 집사람이 장시간 기다리고 있고, 또 다음 코스 갈 곳도 많아서 마음이 바빴습니다. 아이들을 채근하여 드디어 하산에 성공하였습니다. 무사히 내려와 다행이었고, 참성단에 올랐다는 사실에 뿌듯하였습니다. 3시 반이 넘어 점심을 먹을 겨를은 없었습니다. 길가 편의점 보온기 속에 호빵이 보였습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단팥 호빵을 기대하였습니다. 집사람이 나가 사왔습니다. 그런데 먹어보니 피자 호빵이었습니다. 왕 실망... 하지만, 아이들은 맛있어 했습니다. 그렇게 차 안에서 대충 요기하면서, 초지진으로 향했습니다.
초지진, 강화도와 내륙 사이의 좁은 해협의 초입, 군사적 요충지가 아닐 수 없었습니다. 어째서 너른 한강 하구를 두고, 이 좁은 강화해협으로 한강에 접근할까 의문이었습니다. 후에 알게 되었는데, 한강하구는 조수 간만의 차가 심하여 썰물 때에는 갯벌이 드러나 배가 운행하는 데에 제약이 많았던 반면, 강화해협은 좁고 빠른 물길로 바닥이 깊어 무리 없이 배가 다닐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 군, 미군, 그리고 마침내 일본군까지 모두 여기를 통해 침략을 해 왔습니다.
진지는 의외로 단순하였는데, 당시 우리 군이 사용했다는 커다란 대포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설명을 읽은 순간 우리는 아연해졌습니다. 그 대포의 포탄은 멀리 날아가지만, 포탄 자체가 터지지는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저 크고 무거운 쇠 공으로 적의 선체를 파괴하는 용도였던 것이었습니다. 목선이라면 일리가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근대 철선에서 그러한 포탄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한편의 원시적인 코메디가 아닌가 생각하였습니다. 초지진에서 침략군과 우리군 사이에 치열한 포격전이 펼쳐졌다고 하는데, 쓴 웃음 금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이 물었습니다. 최무선이 발명한 화약은 어떻게 된 것이냐고. 그런데 최무선의 화약이 원래 대포를 발사시키는 용도였지, 탄두를 폭발시키는 것은 아니었다고 합니다. 다만, 조선시대에 이미 터지는 포탄을 발명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그것이 조선 말기 커다란 대포에 맞게 개발되지는 못한 것 같습니다...
초지진을 나와 다시 해협을 따라 위로 올라갔습니다. 덕진진이 나왔습니다. 초지진보다 훨씬 규모가 있는 곳이었습니다. 덕진진은 승전의 기억을 담고 있었습니다. 병인양요로 프랑스 군이 강화를 점령하였을 때, 우리 군의 양헌수 부대가 이 덕진진을 통해 상륙하여 프랑스 주력군을 정족산성(삼랑성)에서 격파하였다는 것입니다. 흥미롭게도 바닷가 돈대 앞에 '경고비'가 세워져 있었습니다. 해문방수타국선신물과(海門防守他國船愼勿過)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바다의 관문을 지켜 타국의 배는 삼가 통행을 금한다"라는 뜻 같습니다. 병인양요 다음 해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승리가 흥선대원군의 아집과 어리석음을 고무해 주었을까요? 경고비를 바라보는 심정이 착잡하였습니다.
돈대 아래 쪽에 남장 포대가 보였습니다. 포대가 약간 움푹 파인 곳에 있어 신기하였습니다. 해는 서해에 가까워져 낙조를 드리우는데, 수십마리의 오리들이 포대 앞 해안에서 떼를 지어 몰려다니고 있었습니다. 문득 한 두 마리가 크게 울음을 내뿜는데, 어둑어둑하고 고요한 해안가에 마치 천둥소리처럼 들렸습니다. 옛적 대포의 역사를 상기시키듯이...
덕진진에서 또 위로 조금 가면 광성보라는 곳이 나옵니다. 해안가에 '진', '보', '돈대'등 군 방어시설을 많이 볼 수 있습니다. 대충 추측컨대 '진'은 군대 주둔 지역을 뜻하고, '보'는 성곽으로 둘러싼 성곽을 뜻하고, '돈대'는 '보'에 안에 설치된 초병 혹은 포대 시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광성보는 신미양요 때의 슬픈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1871년 미군은 이곳을 통해 강화도에 상륙하였고, 보를 지키던 우리 군은 결사항전 끝에 전원 사망하였다고 합니다. 위키피디아에는 우리 군 240명 전사, 100명 익사, 20명 포로, 미군 3명 전사, 6명 부상이라고 나옵니다(https://ko.wikipedia.org/wiki/%EC%8B%A0%EB%AF%B8%EC%96%91%EC%9A%94). 어재연, 어재순 두 형제 장수, 수많은 병사들이 순국하였습니다. 특히 병사들 가운데 51명은 신원을 확인할 수 없는 병사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결국 7군데로 나누어 함께 매장하였다고 합니다. 그곳 신미순의총(辛未殉義塚)에는 봉분이 7개였습니다. 장수와 병사들을 기리기 위해 '쌍충비(어재연/재순 형제)'와 '무명용사비'가 건립되어 있었습니다. 우리는 잠시 묵념을 하였습니다. 그 이름 없는 무명용사들은 어떤 이들이었을까? 어째서 신원을 확인할 수 없었을까? 화상이 심해 분별할 수 없던 것일까? 아니면, 원래 연고가 없는 이들은 아니었을까? 살아서도 의지할 데 없이 외로웠던 이들이 국가를 위한 희생에서도 앞길에 섰다고 생각하니, 더욱 서러웠습니다.
원래는 갑곶 돈대까지 갈 요량이었지만, 벌써 해가 넘어가, 이날 일정은 마치기로 하였습니다. 점심을 걸러 배가 많이 고파, 어서 식당을 찾고자 하였습니다. 집사람은 그래도 '맛집' 탐방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강화 관광 안내지도에 소개되어 있는 곳들을 보았습니다. 그 중에서 '부대찌개'를 한다는 '고을 식당'이 마침 가까운 곳에 있었습니다. 간판이 잘 보이지 않아, 찾은 데에 애를 먹었습니다. 겉은 허름하게 보였는데, 들어가 보니 옛날 가정집 같이 아늑하였습니다. 메뉴에는 부대찌개만이 아니라 '젓국찌개'도 있었습니다. 처음 들어보는 메뉴였는데, 새우젓을 쓴다고 하여 그것으로 정했습니다. 아울러 돼지고기 석쇠구이도 시켰습니다. 젓국찌개는 입맛에 딱 맞았습니다. 돼지고기, 호박, 두부, 버섯 등이 들어 있었고, 새우젓으로 간을 한 것이었습니다. 반찬으로 나온 김치, 강화순무김치, 콩나물, 샐러드 등도 모두 맛이 깔끔하였습니다.
훌륭한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왔습니다. 옆 호실의 청년들은 퇴실하여, 조용하였습니다. 이날도 전 날에 이어 삼국지를 또 한 편 보기로 하였습니다. 주유가 죽어 상례를 치루는데, 놀랍게도 제갈량이 문상을 온 것입니다. ...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뜨악하였고, 분노와 적의로 분위기가 살벌하였습니다. 그러나 제갈량은 태연하게 조문을 하였고, 구슬피 곡을 하였습니다. 주유에 대한 존중과 주유의 업적을 절절히 기리자, 장내는 이내 숙연한 분위기로 바뀌었습니다. 모두 같이 감흥한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반전이었습니다.....
이날 일정을 다 소화하지 못하여 다음 날은 일찍 출발하자고 다짐하고, 늦지않게 잠자리에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음날 여전히 기상시간은 지체되었습니다. 저는 조금 일찍 일어나 인터넷 지도 길찾기 이용해 탐방 노선들을 점검해 보았습니다. 10시가 되어, 드디어 다 같이 준비를 하였습니다. 아침을 해 먹고, 짐을 챙기고, 펜션의 용구와 기물들을 정리하고, 쓰레기를 버렸습니다. 숙소 앞에서 마지막 사진을 찍고 차에 오르니 11시 58분을 가리키고 있었습니다. 그래도 오전에 출발하는 데에는 성공하였습니다.
먼저 조선 말 군대 훈련 장소였던 연무당 옛터로 갔습니다. 아이들 교과서에 나오는 유적지이기도 하고, 강화도 조약에 체결된 곳이기도 하니, 빼놓을 수 없었습니다. 텅빈 공터에 기념비 하나 서 있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의 아픔을 되새겨보는 이은상 시인의 글이 적혀 있었습니다. 강화도 조약은 조선이 최초로 외국과 맺은 개항에 관한 조약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일제 침략의 시작이었습니다. 제1조에서 '조선은 자주국으로 일본과 동등한 권리를 가진다'라고 되어 있지만, 이는 조선을 청나라로부터 떼어 놓고, 자신들의 영향권 아래 두는 수순이었던 것입니다. 제국주의 침략의 시대, 약소국으로서 그 화를 피할 수 없었다고 하더라도, 제국들 가운데 한반도에 가장 흉악한 야심을 가진 일본의 관할로 들어가게 된 것은 최악의 결과였습니다.
연무당 옛터 앞에는 고려산성 서문이 위치하고 있습니다. 고려산성의 흔적을 조금 본 후, 바로 일정을 재촉하였습니다. 다음 방문지는 강화도 옆의 교동도였습니다. 한강 하구 최북단, 민통선 내의 지역이고, 또 연산군 및 광해군 유배지이기도 하여 관심이 있었습니다. 가는 길에 고인돌 유적지를 다시 들렀습니다. 청명한 겨울날이어서 탁자식 고인돌이 너무나 멋지게 느껴졌습니다. 지금도 이렇게 웅장하게 느껴지는데, 선사시대 움집에 살던 사람들에게는 어땠을까? 당시 고인돌은 아마 지금의 63빌딩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드디어 교동도에 가까이 왔습니다. 북한과 가까운 민통선 지역이라 입구에서 군부대가 검문을 실시하였습니다. 신분을 확인하고 출입증을 발부하였습니다. 저로서도 새로운 경험이었지만, 아이들에게는 좀 충격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군인들이 바리케이드를 치고, 총을 든, 완전 무장한 군인들이 거수 경례를 하고, 출입을 통제하는 광경에서 두려움을 느낀 것이 아닐까 추측하였습니다.
먼저 교동 향교를 목표로 차를 몰았습니다. 이렇게 외진 섬에도 향교가 있다는 것을 아이들에게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스마트 폰 경로 안내를 잘못 따라가 혼선이 생겼고, 마침 화개산 아래 연산군 유배지 이정표가 눈에 들어와 그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화개산 자락을 조금 올라가야 했습니다. 새벽에 눈이 조금 내렸는데, 유배지로 가는 길 이미 누가 빗자루로 쓸어 놓았습니다. 바삐 오르고 있는데, 셋째 우용이가 저 뒤에 처져서 시무룩하게 오는 것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냥 왠지 좀 무섭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민통선 군인들 검문의 후유증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게 아니라 북한과 맞닿아 있다는 곳을 가고 있다는 생각에 긴장을 하게 되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연산군 유배지는 연산군이 중종반정으로 쫓겨나 위리안치(圍籬安置)된 곳으로 추정되는 곳입니다. 정확히 고증된 것은 아니고, 누구는 광해군이 유배된 곳이라고도 합니다. 연산군이 기거하였다는 가옥을 하나 복원해 놓았는데, 좀 생뚱맞았습니다. 옛날 초가집도, 기와집도, 이상한 황토색 건물이었습니다.... 다만, 앞에 연산군을 유배지로 호송하는 마차와 그 일행은 그럴듯하게 복원되어 있었습니다.
조금 실망하고 나와 가까운 교동의 '대룡시장'을 들러 보기로 하였습니다. 옛날 시장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고 하여 저의 향수를 자극하였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가보고 싶었는데, 아이들은 아직도 얼어 있었습니다. 교동도를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뿐인 것 같았습니다. 시장 옆 트럭을 개조한 호떡 가판에서 호떡을 4개 사서, 그것으로 점심을 때우기로 하고, 다시 차를 강화도로 돌렸습니다. 일정이 빠듯했지만, 강화도 평화전망대를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습니다.
강화평화전망대는 저희가 이번에 가본 관광지 가운데 가장 관람객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학생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어떤 학급 혹은 동아리 선생님이 인솔하고 온 것 같았습니다. 2층 전망대 앞에는 한강하구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습니다. 한강, 임진강, 예성강이 모여 서해 바다로 이어지는 이 한강하구는, 옛부터 한반도의 강 중의 강 '조강(祖江)'이라고 불렸습니다. 한반도 물류의 대동맥으로 수천의 배들이 왕래하던 곳이었습니다. 지금은 남북 분단의 군사대치 현장에서 모든 뱃길이 끊기고, 다만, 새들만이 넘나들뿐입니다. 엄밀하게 말하자면, 정전협정에서도 한강 뱃길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남과 북이 공동이용하도록 민간에게 개방된 구역으로 했던 것인데, 이후 남북의 군사적 대립이 계속되면서, 결국 사람들이 왕래를 금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전망대에는 망원경이 설치되어, 강 건너 북쪽 마을과 들녘을 볼 수 있었습니다. 삼삼 오오 걸어가는 주민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사람도 보였고, 빨간 버스가 지나가는 것도 볼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지척인데, 남북이 갈라져 총칼로 대치하고 있다니... 아이들이 묻습니다. 왜 통일을 안하지요? 어떻게 설명을 하는 것이 좋을지... 남북의 주민들이야 통일이 되면 너무 좋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하지만, 권력자들은 통일이 되면, 그들의 권력이 그대로 보전될지, 세력을 잃지나 않을지 걱정이 될 수도 있겠지? 요령부득이나마 그렇게 설명해 보았습니다.
전망대 다음 일정은 연미정으로 정했습니다. 원래는 강화 화문석문화관도 가보고 싶었는데, 시간상 생략하였습니다. 연미정(燕尾亭)은 한강 하구를 통행하는 모든 선박들을 볼 수 있는 요지에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처음에 연미정이 한양으로 올라오는 조운(漕運)을 검사하고 관리하는 행정단위라고 강변하였는데, 그릇된 억측이었습니다. 공연히 아이들에게 혼란을 야기하였습니다. 부모의 그릇된 인식은 아이들을 오도합니다! 옛말에도 아이들 앞에서는 찬물도 함부로 마시지 말라고 하였는데, 저는 이렇게 경솔하였습니다! 연미정은 글자 그대로 하나의 '정자'였습니다. 한강의 풍광을 감상하는 정자였습니다. 한반도 물류의 결집지, 한강 하구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수많은 배들이 한강 하구를 들고 나고, 또 썰물 때에는 수다한 선박이 정박해 있는 모습은 정말 진귀한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연미정을 뒤로하고, 갑곶 돈대로 향했습니다.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벌써 오후 4시가 다되어 가는데, 다음 코스인 전등사, 삼랑성에는 늦어도 4시 반에는 입장을 해야 하였기 때문입니다. 갑곶 돈대 부근에 있는 것으로 보았던 조봉암 기념비는 결국 찾지 못하였습니다. 갑곶 돈대에 도착하여서도 발걸음을 서둘렀습니다. 갑곶 돈대는 고려 대몽항쟁시에도 임시 수도 강화를 지키는 요충지였고, 조선 말기 병인양요 때에는 프랑스 군이 이쪽으로 상륙하여 강화성을 점령하였던 길목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 바빴던 탓인지, 돈대다운 곳이 눈에 보이지는 않았습니다. 대신 전쟁박물관이 서있었는데, 시간 제약으로 안에 들어가지는 못하고, 벽에 전시된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인의 기록화만 감상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박물관 옆에 국궁(전통 활)을 간단하게 체험해 볼 수 있는 장소가 있었습니다. 둘째 가용이가 흥미를 보여 화살을 장착하고 시위를 당겨 발사까지 해보았습니다. 허전한 마음을 그렇게 달랬습니다.
드디어 이번 여정의 마지막 장소인 전등사, 삼랑성으로 출발하였습니다. 초지진 가까이 왔을 때, 우용이가 어제 초지진에서 포탄 흔적이 있는 소나무를 미처 보지 못하였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잠시 초지진을 다시 들르기로 하였습니다. 다행히 그 소나무는 주차장 쪽으로 뻗어 나와 있어 새로 입장권을 끊을 필요는 없었습니다. 차에서 내려 가까이 가서 보니, 정말 아이들 교과서 사진과 같은 포탄의 상흔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초지진에서 전등사는 가까웠습니다. 전등사 입구에 도착하니 딱 4시 30분이었습니다! 매표원에게 '삼랑성, 정족산 사고도 볼 수 있지요?'라고 물으니, 그렇다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안심이 되었습니다. 삼랑성은 병인양요 때, 프랑스 군을 물리친 유적지로서 아이들 교과서에 나오는 곳이었고, 정족산 사고는 조선왕조실록 등 중요 국가서적을 보관하던 곳으로 제가 아이들에게 꼭 보여주고 싶었던 곳이었습니다. 전등사 자체도 유서깊은 절이었지만, 지금은 절 구경할 계제는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손을 잡고 서둘러 절 뒤편 정족산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집사람은 무릎 때문에 도중에 그냥 머물러 있겠다고 하였습니다.
정족산 사고, 삼랑성에 대한 표지판이 눈에 띄지 않아서, 마음이 조급해졌습니다. 그래도 가장 뒤편에 사고가 있다는 것은 알고 있어서 계속 나아갔습니다. 드디어 정족산 사고를 찾았습니다! 정족산 사고의 유래는 이렇습니다. 조선 시대 서울의 춘추관, 충청도 충주, 전라도 전주, 경상도 성주 이렇게 네 곳에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당시 모두 훼손 소실되었고, 전주 사고만 보존되었고, 이후 오대산, 묘향산, 태백산, 적상산 네 곳에 사고를 다시 설치하고, 전주사고의 판본을 찍어 분산 보관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인조 때에 청나라의 위협을 받게 되자, 묘향산 사고를 이곳 강화 정족산 사고로 옮긴 것입니다. 우리 조상들이 기록을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역사를 얼마나 중시하였는지, 저는 경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우리 선조들이 이렇게 기록과 역사 진실을 소중하게 여겼다는 점을 말해주고 싶었습니다. 역사와 진실을 중히 여기고 존중하는 민족은 언제나 미래가 그들의 것이 될 것으로 믿습니다....
이제 삼랑성 병인양요 유적지를 찾을 차례였습니다. 마침 사고 뒷편으로 삼랑성 북문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있어, 능선에 올랐습니다. 조금 가보니 '산성 성곽'을 볼 수 있었습니다. 무언가 발견한 것 같아 보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병인양요 유적에 대하여는 실마리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근본적으로 정족산성과 삼랑성이 무슨 관계인지도 혼돈스러웠습니다. 삼랑성 정상이라는 이정표도 보이는데, 올라갈 수는 없었습니다. 눈길이었고, 또 어두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수 없이 돌아서 반대편 길로 내려왔습니다. 내려오면서 표지판들을 유심히 보았는데, 의병 유적은 보여도 병인양요 유적은 찾을 수 없었습니다.
기념품 가게에 들어가 물어보아도 잘 모른다는 대답이었습니다. 조금 더 아래 카페가 있었습니다. 선물용 과자도 살 겸 겸사겸사 들어갔습니다. 대학생쯤으로 보이는 아가씨가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었습니다. 병인양요 삼랑성 유적에 대하여 물었습니다. 잘 알고 있다는 듯,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있다고 하였습니다. 너무 반가운 대답이었습니다. 확실하게 하기 위하여 어디에 있냐고, 문밖으로 나와 방향을 부탁하였습니다. 아가씨는 친절하게 남문으로 오셨냐고 하면서, 왼 편 동문 쪽으로 가다보면, 얼마 안가 기념비가 있다고 설명해 주었습니다.
과자들을 후하게 사가지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왔습니다. 조금 걸어가니 정말 동문 바로 입구에 양헌수 장군 승전비가 보였습니다. 저와 아이들은 손뼉을 치며 기뻐했습니다. 병인양요 때에 프랑스 군은 강화를 점령하였는데, 이후 양헌수 장군이 덕진진으로 강화에 몰래 상륙하여 이곳 정족산에서 프랑스 주력군을 급습하여 격파하였습니다. 이 곳 전투에서 패배한 프랑스 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강화산성에서 퇴각을 하였고, 그 때, 외규장각에 있는 서적들 그리고 은괴 등 보물들을 약탈해 갔던 것입니다. 비록 외규장각 소재 왕실 문서는 도난당했지만, 정족산 사고 문서들은 지킬 수 있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비록 일시적인 승리였지만, 최신식 군대인 프랑스 군을 물리친 양헌수 부대의 투지완 전략은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이로써 전등사에 온 목표, 정족산 사고, 병인양요 양헌수 승전비를 모두 탐방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안내문을 읽으면서 정족산성과 삼랑성에 대한 의문도 풀 수 있었습니다. 그 둘은 같은 것이었습니다. 정족산성이 일반적인 명칭이었다면, 삼랑성(三郞城)은 단군의 세 자손(삼랑)이 남쪽으로 이주하여 세웠다는 전설에 기초한 명칭이었던 것입니다....
전등사에 나오니 해는 거의 기울었습니다. 농협 옆에 있는 로컬 푸드 매장에 가서, 아이들이 친구들에게 줄 과자들을 골랐습니다. 강화도 특산으로 '속노란 고구마 빵'을 샀습니다. 돌아오는 길 차안에서 아이들은 잠에 떨어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