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 야고보 - 왜 나의 대사를 그르치려는가
한국 초대교회 순교자들인 박취득 라우렌시오, 원야고보, 정베드로, 방 프란치스코 이렇게 넷은 절친한 친구였다. 이들은 서릿발 같은 박해속에서 순교하려는 열의로 가득 차서 서로를 밀고하기로 약속한 적이 있었다. 밀고하지는 않았지만 주님의 섭리는 그들의 착한 열의를 받아들이시기라도 하듯 이들은 비슷한 시기에 차례로 잡혀가 영광스러운 순교의 피를 흘리는 영예를 얻었다. 이들은 충청도 응정리에서 살았으며, 같은 시기에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고 받아들였다.
이들 가운데 원 야고보는 1793년에 순교한 원시장 베드로의 사촌형이다. 원야고보는 성품이 어질고 순하며 곧고 활달하였는데, 그 좋은 바탕에 신앙을 받아들여 온갖 덕행의 싹을 트게 하고, 덕행을 실천하여 많은 사람의 칭송을 받았다. 신자가 된 뒤부터 그는 가난한 사람들을 돕는데 자신의 재산을 쓰기로 결심하고 날마다 자선을 실천하는 것을 일과로 삼았다. 더욱이 드는 지난날의 탐식과 탐욕의 죄를 보속하려고 금요일마다 금식하였다. 무엇보다도 천주교를 알리려고 곳곳을 찾아다녔고, 주일이나 축일이면 많은 음식을 장만하여 사람들을 불러모았다. 사람들이 모여서 즐겁게 음식을 나눌 때, "오늘은 주님의 날이니 거룩한 기쁨으로 이날을 지내야 하고, 천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재산을 나눔으로써 그분의 은혜에 감사해야합니다."라며 여러 가지 교리를 설명하였다.
열심한 신앙생활이 널리 알려지자 1792년 관장이 원 야고보를 체포하려고 포졸들을 보냈다. 이때 그는 몸을 피할 여유가 있어 위기를 모면하였지만 원시장은 포졸들에게 잡혀 비장하게 순교하였다. 야고보는 더욱 열절한 마음으로 함께 순교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순교할 열망으로 더 이상 피신하지 않고 오히려 드러내놓고 기도와 신심생활을 계속했다. 때로는 큰 길에서 신앙을 고백했으나 어찌된 영문인지 포졸들은 그를 보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이즈음 그는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듣고 주 신부를 찾아가 성사 받기를 간절히 청하였다. 주 신부는 "교회에서는 두 명의 부인을 데리고 사는 사람을 배척하니 당장 여기서 나가 다시는 내 앞에 나타나지 말라"며 거절하였다. 원 야고보는 물러나서 사흘 밤낮을 눈물로 탄식하며 음식도 먹으려 하지 않았다. 이를 본 사람들이 매우 딱하게 여겨 이 사실을 주 신부께 알렸다. 주 신부는 그를 불러 이렇게 말했다. "집으로 돌아가 곧 첩을 쫓아보내겠는가? 그대가 분명하게 약속하면 성사를 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다시는 나를 보지 못할 것이오." 원 야고보는 "정말이지 저는 교회법으로 아내와 첩을 가지는 것을 금지하고 있는 줄 몰랐습니다. 제발 성사만은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여 성사를 받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 첩에게 말했다. "천주교인은 첩을 둘 수 없고, 또한 첩이 될 수도 없소"라고 말한 다음 그녀가 충분히 살아갈 수 있도록 주선하여 돌려보냈다. 주 신부와 한 약속을 지킨 것이다.
원 야고보는 영적 준비를 갖추고 절친한 신앙의 벗인 박취득가 함께 덕행을 닦고 심신을 수련하여 순교를 열망하여 드러내놓고 행하는 신심생활을 보고는 그냥 지나치던 포졸들이 첩을 보내고 신자로서 올바른 생활을 시작하자 그를 체포한 것이다.
1798년 덕산 포졸들에게 잡힌 원 야고보는 옥에 갇혔지만 한 달 동안 심문을 당하지 않았다. 심문이 지연되는 까닭이 포졸들의 농간이라고 생각한 그는 "나를 관자에게 출두시키든지 석방하든지 하라" 하고 용감하게 독촉하였다. 마침내 관아에 호출되어 심문이 이루어졌다.
관장이 물었다. "네가 천주교를 믿는다는 것이 참말이냐?"
"예, 과연 천주님을 섬기고 제 영혼을 구하려고 천주교를 봉행합니다"라고 원 야고보는 대답했다. 대답을 들은 관장이 다그쳤다.
"그렇다면 네 공범들을 말하라."
원 야고보는 "저와 같이 천주님을 섬기고 그분을 위해 목숨을 바칠 마음이 간절한 사람이 셋이 더 있습니다"라고 했다.
이는 아마도 열의에 찬 신앙 동지들이 서로 밀고하여 함께 순교하자고 한 약속했던 일을 생각한다고 말한 것이리라. 그러나 이 말을 한 뒤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 관장은 "더 분명히 말하라"며 거듭 다그쳤지만, 원 야고보는 "만번 죽어도 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라고 분명하게 답했다. 이로 인해 매질과 주리를 트는 형벌을 받았으나 그의 태도는 조금도 바뀌지 않았다.
덕산에서 심문과 형벌을 견딘 원 야고보는 홍주 진영으로 이송되어 무서운 고문을 또 당했다. 형벌을 받으면서도 줄기차게 교리를 설명하던 그는 다시 덕산으로 옮겨져 고문을 받다가 두 다리가 완전히 부러지고 말았다.
또다시 감사의 명으로 그는 충청도 병사(兵使)가 머물고 있는 청주로 압송되던 날이었다. 아내와 자식, 친구들이 울면서 따라오자 그들을 가까이 오라도 하여 "천주님을 섬기고 영혼을 구하는 일을 할 때에는 인간 본성의 정을 따르지 말아야 하네. 모든 공생과 고통을 잘 참아 받으면 우리는 기쁨 가운데 천주님과 착하신 동정 마리아 곁에서 서로 만나게 되네. 자네들이 여기 있으면 내 마음이 흔들리고 내게 해로울 수밖에 없네. 그러니 제발 이성을 따라 눈앞에 다시는 나타나지 말게" 하고 돌려보냈다. 그리고 첨이었던 여인이 사람을 보내어 마지막으로 한 번 보기를 원했지만, 원 야고보는 "왜 나의 대사를 그르치려는가!" 하며 청을 거절하였다. 그는 두 다리가 완전히 부서지는 형벌에도 의연하였지만 혈육의 정 앞에서 마음이 흔들림을 걱정하여 이성으로 협조를 부탁하였고, 연연한 세속의 정도 주님 사람의 질서 밖에서는 한갓 장애물이라는 것을 준엄히 선언하며 대사를 그르치지 말라고 장하게 호소하였다.
인간의 본성으로 견디기 어려운 이 고통을 이겨낸 원 야고보의 위대한 인내, 이는 그리스도교 진리의 승리일 것이다. 오직 주님만이 그 인내를 보상해주실 수 있으리라.
청주에 이르러 원 야고보는 마지막 심문을 당했다. 영장은 그를 살려주겠노라며 배교하라고 유혹하였다. 하지만 그는 "저는 9년째 천주님을 위해 순교하기를 원하였습니다"라는 결의에 찬 대답을 하고는 어떠한 심문과 형벌에도 의연히 침묵했다. 영장은 자신의 말이 통하지 않자 화가 나서 하루종일 혹독한 형벌을 가했다. 위대한 증거자 앞에서 이성을 잃은 영장은 다음날 다시 고문을 시작하여 거의 한달 내내 태장, 주장, 곤장, 주리 따위의 온갖 형벌을 가했다. 마침내 주님께 그의 장한 결의가 받아들여져 원 야고보는 1799년 3월 13일 장하치명으로 순교하였다. 그때 나이 70세였다.
그런데 그가 죽은 뒤 상처투성이인 육체는 신비로운 광채에 휩싸여 있었으니, 그 모습을 보고서 50여 가구가 천주교를 믿게 되었다고 한다. 과연 순교의 피는 그리스도교 신앙의 씨앗이 되었으며 박해 속에서도 한국 초대교회가 성장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다.
그렇다! 하루를 살더라도 순교자처럼 살아야 할 것이다.
[경향잡지, 1998년 3월호, 김길수(대구가톨릭대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