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침착하면서도 꼿꼿한 이미지를 간직한 채 김대중 대통령의 동반자로서 그림자 내조를 해왔던 이희호 여사.
김대통령과의 결혼 이후 오랜 시간 김대통령 못지않은 좌절과 환희, 절망과 영광의 길을 걸어온 이여사는 21세기 들어 ‘노벨평화상’을 받은 김대중 대통령에 이어 ‘올해의 여성상’을 수상, 대통령 내외가 동시에 영광스러운 상을 받은 세계 최초의 기록을 남겼다.
청와대에서 직접 만나 들어본 이희호 여사의 허심탄회한 청와대 생활
97대선 당시 인터뷰차 이희호 여사를 일산 자택에서 만났다. 그때 인터뷰 말미에 “만일 대통령 영부인이 되어 청와대로 들어가시면 인터뷰에 응해주실 수 있겠느냐”는 질문을 넌지시 건넸을 때 흔쾌히 “그럼요” 라고 대답하던 이여사. 역대 퍼스트 레이디 중 영부인 자격으로 공식 인터뷰를 한 예가 없었기 때문에 내심 ‘그 약속이 과연 지켜질까’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이여사는 자신의 약속을 어김없이 지켰다.
연일 강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1월12일. 겹겹이 싸인 관문을 뚫고(?) 들어간 눈덮인 청와대 안의 모습은 고요 속의 고즈넉함 그자체였다. 언뜻 어디서든 담담한 모습을 보여주는 이여사의 이미지와 잘 어울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우윳빛 바탕에, 가장자리에 군데군데 연한 꽃무늬가 들어있는 은은한 카펫이 포근함을 주는 청와대 접견실은 심플한 의자와 격자무늬 창이 어우러져 한국적인 이미지가 물씬 풍겨난다.
살구색 투피스에 작은 손가방까지 매고 나와 환한 웃음으로 기자를 맞이하던 이희호 여사. 재킷 왼쪽 칼라에 단 빨간 사랑의 열매가 유난히 돋보이는 모습이다. 팔순이 다 되어가는 나이임에도 이희호 여사의 예의 그 꼿꼿함은 여전했다. 기억력이 뛰어나다는 평을 받고 있는 이여사의 ‘능력’도 여지없이 발휘됐다. 4년여의 세월이 흘렀고, 그동안 숱한 사람을 대해왔으련만 이여사는 4년 전의 기자를 알아보고 손을 꼭 쥐며 반가움을 표시했다.
여전히 좋아보인다는 기자의 말에 “하하 그래요?” 라며 함박웃음을 지어보인 후 자리를 권하며 “날씨가 참 춥죠? 오느라고 고생하셨어요. 그런데 난 몸은 추운 줄 모르겠는데 마음이 추워요”라고 첫 마디를 꺼낸다. 날씨도 날씨려니와 정국도 그렇고 경제도 꽁꽁 얼어붙어 아무래도 마음이 편치않다는 표현인 듯 싶다.
나랏일, 특히 정치적인 문제가 잘 풀려가질 않아서 염려스럽다는 이여사. 그게 경제적인 문제까지 연결되어 안타깝다며 하루 빨리 정치가 정상화되고 경제가 회복되는 길이 열렸으면 참 좋겠다고 말문을 열었다.
“IMF 위기를 극복했는가 싶었는데 지난해 하반기부터 경제가 다시 어려워져 생활도 힘들어지고 구매력도 줄어드는 등 큰 고통을 겪는 국민들이 많아졌다는 걸 생각하면 밤잠을 설치곤 합니다. 그런데 자꾸 경제가 어렵다는 보도에 겁이 나서 소비가 더 위축되는 측면도 있는 것 같습니다. 다행히 호전의 기미가 보이고 있고, 또 하반기부터 경제가 좋아진다고 하니 빨리 그렇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이렇게 경제가 힘들 때일수록 누구보다 우리 주부들의 고생이 클 거예요. 우리 주부들이 경제가 반드시 회복된다는 희망을 가지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는 힘을 주십사고 간절히 기원하고 있습니다.”
이여사는 오랜 야당생활 끝에 청와대에 들어와서 피부로 느낄 정도로 달라진 점은 ‘책임의 무게’라고 한다.
“밖에 있을 때보다 책임이 더 무겁다는 걸 정말 많이 느낍니다. 늘 사회적으로 좋지 않은 일이 생길까봐 그게 걱정이고요. 요즘처럼 눈이 많이 와도 걱정, 또 안와도 걱정, 바람이 불어도 걱정… 그런 것에 일일이 신경이 가기 때문에 마음이 늘 무거워요. 하지만 이 자리에 온 이상 그런 고민을 안할 수는 없잖아요. 요즘 대통령께서도 많이 힘들어하시지만 제가 딱히 뭐라 위로해 드리기가 힘들어요. 가끔 너무 실망 마시고 조금 쉬시는 게 어떻겠느냐는 말을 건네는 게 전부죠.”
매일 신문 꼼꼼히 체크하며 김대통령에게 전하는 이여사
이여사는 요즘도 신문을 많이 보는 편이다. 워낙 종류가 많아 모든 신문을 다 꼼꼼히 읽을 수야 없지만 웬만한 건 일일이 체크해 중요한 대목은 대통령에게 읽어준다. 바쁜 일정으로 인해 행여 대통령으로서 꼭 보아야 할 것들을 놓쳐서는 안된다는 생각에서다. 그러다 그리 중요한 건 아니지만 대통령이 들어서 기뻐할 소식이 있으면 ‘양념’삼아 전해준다. 그로써 잠시나마 웃음짓는 모습을 보기 위해서다.
그동안 이희호 여사와 김대중 대통령은 부부라기 보다 ‘동지’적인 의미로 비쳐지는 때가 더 많았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항간에선 김대통령이 국내 정치인 중 가장 부인을 잘 만난 사람이라는 말도 있었다. 그런 얘기를 이여사에게 슬쩍 건네며 의견을 묻자 이여사는 대번에 웃음부터 지었다.
“아유 잘 만났다고 하니까 기쁜대요(웃음). 글쎄요… 결혼할 당시 대통령께서는 돈도 없고, 사회적인 지위도 없고, 정치하는 사람인데 정치활동도 못하게 돼 있었고… 하여간 아무 것도 내세울 게 없는 사람이긴 했죠. 그런 상황에서 결혼을 결심했거든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그런 모험과 같은 결정을 내릴 수 있었나 하는 생각은 들어요. 당시 주위에서 반대하는 사람이 많았잖아요. 모든 사람들이 이때까지 있다가(이여사는 40세에 결혼했다) 하필이면 그런 데로 가느냐면서요.
더군다나 결혼한 지 9일만에 잡혀들어가니까 사람들이 ‘거봐라, 그런데 시집가지 말라고 했는데 가니까 그렇잖아’라며 말들도 많았어요. 그런데 사람이라는 게 얼마나 간사한지 71년 대통령 선거에 후보로 출마하니까 다들 ‘결혼 잘했다’는 거예요(웃음). 저는 그때부터 오히려 고난이 더 심해졌는데 그런 말을 들으니 참… 하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제 마음의 변화는 없어요.”
그동안 김대통령은 오랜 야당의 지도자로, 또 현재는 대통령으로, 이희호 여사의 남편이라기 보다 어떻게 보면 ‘만인의 사람’으로 자리를 해왔다. 가냘픈 체구와는 달리 마음의 그릇이 크다는 평을 들어온 이여사이긴 하지만 여자로서, 혹은 아내로서 내심 그런 측면이 섭섭하지는 않았는지 궁금했다.
“제가 20대나 30대에 결혼했더라면 남들과 마찬가지로 아기자기하고 달콤한 결혼생활을 꿈꿨을지도 모르겠지만 결혼할 당시에도 저는 그런 생각은 한 번도 안 가져봤어요. 다만 정말로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과 바르게 살려고 하는 자세가 좋아 결혼했고, 또 결혼한 후 어려움을 당하는 그 시점에도 그런 모습을 보여주셨기에 고생을 하면서도 보람을 느꼈어요. 그런 저를 보면서 남들이 오히려 저를 위로하려고 했지 제 자신이 위로를 받으려는 생각은 추호도 없었죠. 아내로서 남편한테 아기자기한 사랑 받고 싶은 마음이오? 제 자신이 아기자기하지 못하고 애교가 없는 사람인데 상대방에게 그런 걸 바란다는 건 지나친 욕심이죠(웃음). 제가 그렇지 못하기에 바라지도 않아요. 어떻게 보면 그런 면에 있어 그분이 더 ‘불행한’ 사람이죠(웃음).”
요즘에도 ‘공무’를 마치고 저녁에 단둘이 있을 때도 서로 나누는 대화는 세상 돌아가는 얘기뿐이라고 한다.
“경제가 좀 살아났으면 좋겠다는 얘기, 증시가 어떻다는 얘기, 이런 것들이 주를 이룹니다. 저는 증시에 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거든요. 그런데 요즘은 증시가 오르면 모든 사람들이 좋아하니까 저도 은근히 관심이 가더라고요. 가계부도 그렇고 다른 건 다 적자일 때 빨간색으로 표시해 별로 안 좋아했는데 증시는 올라갈 때 빨간색으로 표시하니까 요즘은 빨간색만 보면 반갑네요.”
“애교없는 아내를 만난 김대통령이 불행하죠”
이여사 또한 김대통령 못지않게 바쁜 일정으로 개인시간을 내기가 좀처럼 쉽지 않다. 그나마 짬짬이 나는 시간에는 늘 그래왔듯 책을 읽는다. 간혹 TV를 보긴 하지만 새로운 뉴스를 놓치지 않기 위해 YTN을 보는 게 대부분이다. 그러나 최근 누군가 재미있다며 보라고 권한 <가을동화> 재방송분도 가끔 본다고 한다. 그 드라마에서 이여사는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다 기른 딸자식이 바뀌었다는 걸 뒤늦게 안 부모를 보면서 참 안타까웠다”고 한다.
이여사가 요즘 보고 있는 책은 여성문제를 다룬 것이 주를 이룬다. 오래전부터 이여사는 여성문제에 많은 관심을 두어 왔다. 여성문제를 두고 이여사가 특히 바뀌었으면 하는 건 남아선호사상 문제.
“이건 정말 바뀌어야 돼요. 그렇지 않으면 불균형한 성비를 낳고 그것이 사회문제로 이어지거든요. 어떻게 보면 남아선호사상이 남자보다 여자들에게 더 심한 것 같아요. 지금도 젊은 사람이 딸 낳고 나서 시어머니나 남편한테 미안하다고 그러는데 그게 왜 자기 책임이에요? 우리가 흔히 쓰는 말 가운데서도 여성을 차별하는 것들이 많죠. 예를 들어 ‘남자가 왜 울어?’ 라는 말들을 많이 하잖아요. 그럼 남자는 울지 않고 여자만 운다는 거 아니에요. 또 남자는 항상 씩씩하고 앞장서야 하는 존재라는 거… 아직도 그런 의식이 바뀌지 못하고 있는 게 안타까워요.”
아울러 이여사는 여성들 스스로 자기를 존중할 줄 아는 게 필요하다고 했다. 최근들어 예전에 비해 여성의 사회활동이 활발해지면서 정치에 참여하는 비율은 높아졌지만 여전히 첩첩산중이라고 한다.
“여성들이 선거에 출마하더라도 여성이 여성에게 표를 안 준다고 알려져 있어요. 저는 우리나라는 뭐니뭐니 해도 여성들이 정치에 많이 참여해야 한다고 봅니다. 그래야 오늘과 같은 국회가 되지 않고 서로 협조하면서 순조롭게 나갈 것 같아요. 여성들이 많이 참여하면 달라질 거예요. 경제적인 측면에 있어서도 여성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곳에서는 부정사건들이 거의 일어나지 않거든요.”
역대 퍼스트 레이디중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던 이여사는 지난 1월 중순 의미있는 상을 수상했다. ‘펄벅 인터내셔널’이 시상하는 ‘올해의 여성상’을 받은 것. 펄벅 인터내셔널은 여성 최초의 노벨 문학상, 퓰리처상 수상자인 <대지>의 작가 펄벅 여사가 1964년 ‘전세계 아동에게 희망을’이라는 주제로, 전세계 아동들의 삶의 질 향상을 지원하기 위해 만든 비영리 인권기구.
펄벅 인터내셔널은 “이희호 여사가 한국 민주화 운동에 지도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특히 아동과 여성의 권익에 앞장서 오면서 김대중 대통령의 동반자로서의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했다는 점을 높이 사게 됐다”며 선정 이유를 밝혔다.
‘올해의 여성상’은 1978년부터 전세계 여성을 대상으로 시상해 온 것으로 그동안 클린턴 미국 대통령 부인인 힐러리 여사, 미얀마의 민주화 지도자 아웅산 수지, 팔레스타인의 반전 운동가인 하난 아시자니, 전 필리핀 대통령인 코라손 아키노 여사, 배우이자 사회활동가로 유명했던 오드리 헵번 등이 수상했다.
“저에겐 과분한 영예입니다. 역대 수상자들의 면면을 볼 때 더욱 그렇습니다. 저는 어려운 처지에 있는 여성, 장애인, 아동, 노인 등 소외되고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많은 수고를 해오신 분들을 대신해서 제가 받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또한 앞으로 더욱 소외된 계층, 특히 외로운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라는 채찍으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모든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날 때는 신의 특별한 뜻이 숨겨져 있다고 생각하는 이여사. 초등학교 시절부터 미국 유학을 갔다오기까지 자신에게 특별한 기회가 더 주어졌다고 생각하는 이여사는 이 모든 것에 다 뜻이 있다고 본다. 이런 기회를 준 만큼 어려운 사람들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사는 것이 그 뜻이 아닌가 싶다는 이여사의 소망이 오래도록 펼쳐지길 기대해본다.
첫댓글 정말 훌륭한 성품을 가지신 이희호 여사이십니다
오는 10월에 이희호 여사님이 고문으로 활동하시는 (사)'사랑의 친구들'에서 사랑나누기 바자한마당이 열릴 것입니다. 불쌍한 어린이들을 돕는 행사지요. 영부인 시절인 98년부터 지금까지 해마다 해오는 행사입니다..
작년에는 이화여고 운동장 류관순 기념관에서 했었는데 '후광마을'회원들도 참여를 했었지요..만약 올해도 한다면 저도 서울에 올라갈 것이니까 그 때 진정한친구님을 뵈었으면 합니다..^^
참 아름다운 분입니다..더욱 건강하시길 바랍니다.^^
하누리님/ 이희호 여사님은 아름다운 분이기도 하지만, 노벨평화상 수상과 남북정상회담 등 대통령님의 업적 중에서 50%는 이희호 여사님이 쌓은 것이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