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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축구의 발전
일본 축구조직의 전신인 일본축구협회(JFA)는 1921년에 설립되었다.
1948년에 국제 챔피언 경기가 천황배 경기로 바뀌었는데 1997년에는 3,000개 이상의 예비 팀들이 77회 천황 배 축구경기에서 경기를 가졌다. 결승전은 도쿄의 요기운동장에서 1998년 1월 1일에 열렸으며 ‘카시마 앤틀러스’팀이 우승했다. 사사카와 스포츠 협회가 발행한 스포츠 백서에 의하면 축구는 야구 다음으로 초등학교 남학생들이 많이 하는 스포츠로, 야구의 참가율이 24.9% 인데 비해 축구의 참가율은 21.7% 이었다. 같은 보고서에서 중학교의 61.3%가 공식경기에 참가하는 소년 팀들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고등학교의 수치는 19.7%로 다소 낮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18만 명 이상의 선수들이 있는 것으로 집계되었다. 여기에 덧붙여 회사와 지역단체 등이 조직한 클럽수가 증가하고 있다. 일본의 축구 클럽 수는 1989년과 1994년 사이에 두 배로 증가했는데 일본에는 현재 22,100 개의 축구클럽이 있다(일명 미니축구팀을 포함). 일본축구협회의 등록 회원 수는 점차로 증가하여 1995년에는 84 만 3,279명에 달했다.
축구의 인기를 장기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훈련학교의 설립과 매년 국제경기장에서 열리는 '국내 고등학교 축구대회'와 같은 시합 등을 통한 어린 선수의 발굴이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여학생 축구에 대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1986년에 등록된 7,403명의 여자축구 회원은
1995년에 2만 237명으로 증가했는데, 1989년에는 일본여성 축구리그가 창단 되었다. 1994년에 이 리그는 10개의 회사 팀들로 구성된
L리그로 이름을 바꾸었다. 일본의 국가 대표팀은 1990년 베이징에서 열린 아시안 게임에서 은메달을 땄으며, 1991년과 1995년 세계
여성챔피언 대회에 참가했지만 좋은 성적을 거두진 못했다.
J 리그의 성립
일본의 국가대표 축구팀은 서독 듀이스 버그의 ‘Dettmar Crammer’ 감독을 초빙하여 1960년부터 1963년까지 강도 높은 훈련을 받았다.
‘크레머’ 감독과 대표 팀의 끈질긴 노력 덕분에 일본 축구팀은 1968년 멕시코시티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땄으며 포워드인 ‘카마모토 쿠니시게’는 7개의 골을 넣었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배경 덕분에 일본 축구는 붐을 이루었다. ‘크래머’ 감독은 독일로 떠나기 전에 일본의 스포츠 발전을 위해 축구리그설립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본 팀은 잇따른 올림픽과 월드컵의 예선전에서 탈락하고 더 이상 국제 경기에서 선전을 하지 못했으며 그에 따라 점차로 축구 붐은 사그러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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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일본축구 리그의 ‘모리 겐지’ 회장은 선수들의 프로선수 등록을 허가했다. 1988년에 일본 축구리그(JSL)는 일본 스포츠를 되살리기 위한 방법을 모색하기 위해 활동위원회를 조직했는데 그 이듬해 이 위원회는 새 프로 리그의 창단을 추진했다.
계획 후 약2년이 지난 1991년 1월에 일본축구협회는 새로운 프로 리그에 대한 골격안을 발표했는데, 이에 따라 곧 10개 팀으로 구성된 새로운 리그가 발족되어 같은 해 7월에는 ‘일본 프로축구리그’ 또는 줄여서 ‘J리그’라는 이름이 탄생했다. 일본축구협회는 J리그를 운영하며, 프로경기의 편성, 공식경기 기록의 보유, 규칙제정, 선수, 감독, 심판의 훈련과 공인, 등록 등을 관장한다. J리그는 설립 당시 축구문화의 정착, 일본축구의 강화와 육성, 선수와 감독의 위상 고양, 경기장 개발과 홈 타운 선정 등의 설립취지를 공표 했다.
리그 자체와 더불어 특수 활동분야를 다루는 여러 자매회사들이 설립되었다. 예를 들어 'J 리그 픽쳐스사'는 공식경기의 촬영을 독점하고 비디오 녹화에 대한 판권을 갖고 있다. 또다른 회사는 축구와 관련된 광고를 다루며 J리그의 로고와 마스코트 캐릭터를 이용한 상품을 만들어 판다. J리그는 특히 스타 선수들의 인기 덕을 보고 있다. 예를 들어 前브라질 선수였던 ‘지코’ 선수는 ‘카시모 앤틀러스’팀을 J리그 최고의 팀으로 만들었으며, ‘베르디 카와사키’팀의 ‘미우라 카즈요시’ 선수는 국가대표 팀의 에이스로 활약했다. ‘요코하마 마리노스’팀의 ‘이하라 마사미’ 선수는 100회 이상의 국제경기에 참가했으며 작년에는 월드컵 예선전에서 주장으로 뛰었다. ‘벨마레 히라츠카’팀의 ‘나카타 히데토시’ 선수와 ‘요코하마 마리노스’팀의 ‘카와구치 요시카츠’와 ‘조 쇼지’ 선수와 같은 젊은 선수들은 국가대표팀에서 활약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프로축구는 일본 최고의 인기스포츠인 야구와 시즌이 겹치는 등 여러 가지 위협을 받고 있다. J리그 소속팀들은 팬과 후원 사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프로 야구팀이 없는 작은 도시의 지방 팀을 창단 하는 등 여러 가지 전략에 투자했다. 또한 J리그는 팀과 클럽이 결합하여 티켓 판매와 기획을 다루는 미국사업방식(유럽방식을 따라)을 채택했다.
팀과 후원회사(프로 야구와는 달리 프로축구 선수의 유니폼에는 후원회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또한 지출을 감소시키고 재정적 위험을 최소화시켰다.
J리그가 후원됨에 따라 클럽과 그들 지역 간의 긴밀한 유대확립이 강조되었다. 실제로 클럽의 이름은 홈 타운의 이름과 닉네임을 결합한 형태이며 클럽들은 위성 팀들과 2군 팀을 갖고 있다. 이러한 노력으로 열성적인 후원 사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성공적인 출발에도 불구하고 J리그는 현재 몇 가지 어려움에 직면해 있다.
1995년과 1996년 사이에 몇몇 팀의 재정적 어려움으로 리그의 참가율은 26.3%로 감소했다. 또한 경기의 TV 방송횟수도 눈에 띄게 감소했다. 또 다른 문제는 J리그 16 개 팀 중에 8개 팀이 간토 지방에 속해 있다는 점이다. 리그의 본래 취지였던 프로축구의 강화와 육성, 스포츠를 통한 지역 개발의 촉진을 달성하기 위해 다른 지방으로 팀을 분산하는 것이 필요하다.
J리그의 구성
1993년 J리그가 만들어진 후 1998년까지는 다음과 같은 계층구조로 되어 왔습니다.
<J리그> - <JFL(Japan Football League)> - <지역 리그>
J리그는 프로리그이며 1998년에는 18팀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JFL은 프로구단과 아마구단과 대학팀으로 편성된 아주 특이한 리그였습니다. (1998년에는 동경가스를 포함한 총 16개팀이 소속했음) 프로 구단 수는 1998년 초에는 4구단이었으나 1998년 말에는 9개 구단으로 늘어났습니다. 즉 J리그 소속팀만이 프로구단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J리그 2부제가 시행돼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J리그 1부(J1)> - <J리그 2부(J2)> - <새JFL> - <지역 리그>
J리그에 있던 18개 구단 중 13팀은 자동적으로 J1으로 잔류, 하나는 다른 팀과 한 팀으로 합병(서포터들은 소멸한 걸로 인식하고 있다.) 남은 4팀은 JFL의 상위 1팀과 합해서 모두 5팀으로 플레이오프(1부 참입 결정전)을 싸워 결국 종전부터 J리그에서 플레이오프에 올라간 팀(가와사키 Frontale)이 J2에 들어갔습니다. 또 프로화 된 팀들은 대다수가 J2에 들어가 J2는 10팀으로 편성되었습니다.
또, 특이한 건 새 JFL입니다. J2신설로 대다수 프로팀이 떠났지만 여러 가지 사연으로 프로구단 2개가 들어갔습니다. 하나는 종전부터 JFL에 있던 팀인데 지역자치제 지지체제가 여의치 않아서 JFL로 남게된 팀(미토 hollyhock)이며 또 하나는 소멸된 구 J리그 팀의 서포터들이 돈을 모아(!) 새로 만든 팀(요코하마 FC)입니다. 그 2개 팀은 J리그 가입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다른 7개 팀은 대학팀 하나 그리고 기업에 소속한 아마추어 팀으로써 계속 JFL로 참전할 것이지만 기업 팀은 언제 프로화를 지향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올해 JFL은 9팀으로 편성되었습니다. 지역 리그에서는 지역리그 결승대회에서 상위권에 들어가면 JFL로 올라갈 수 있습니다.
전부 J1에 16개, J2에 10개 그리고 JFL에 2개 팀 도합 28개가 정답입니다.
일본인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
일본의 새해 연초 특집들을 보면 대단히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출연한다. 물론 우리나라 스포츠 선수들도 텔레비전에 많이 출연하지만 우리와 다른 점은 쇼맨십이 대단하다는 점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프로 스포츠 선수들의 탤런트 화라고 할 수 있다. 항상 그렇지만, 한국과 일본의 축구경기는 양국에서 최고의 관심사가 되고 있다. 일본에게 한국이 패배하였을 때, 많은 사람들이 지탄을 하고 한숨을 쉬어댔다. 그러나 분석해보면 졌다고 욕을 한 수많은 사람 중에 요즘 축구장에 가서 구경해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 거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한국 프로축구 경기리그는 몇 게임을 제외한 대부분의 시합이 스탠드가 텅텅 빈 상태에서 진행된다. 그러나 일본은 정반대다. 표를 못 사서 못 들어간다. 젊은애들은 아예 축구장에서 새벽부터 진을 치고 기다린다. 좋은 자리를 잡아 응원하기 위해서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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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일본 프로축구 관객은 프로야구 관객을 압도하고 있다. 경기장에 입장한 양쪽 팬들의 응원 열기라든가 일사불란함 그리고 선수들에게 보내는 애정은 그야말로 축구가 일본 스포츠의 No.1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일본 축구가 한국 축구에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양국의 상반되는 축구열기에 기인하는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축구 경기장에 손님이 와야 경기하는 사람도 신이 난다. 또 입장수입이 많아지니까 선수들 연봉도 많이 줄 수 있고 해외에서 유명한 스타를 데리고 올 수도 있다. 우수한 외국선수들과 시합을 하다 보면 개인기도 한 수 배우고 투지도 배가된다. 그렇게 해서 경기의 수준이 높아지니까 관객도 더더욱 는다. 이보다 더욱 근본적인 것은 운동 자질이 있는 어린 소년들이 많은 스포츠를 두고 앞으로 자신의 인생을 선택할 때 영순위로 축구를 택하게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한일전에서 한국 선수들이 패한 것이 아니라 우리 축구 팬들이 패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평소엔 전혀 프로축구나 기타 축구경기에 관심이 없다가 돌연 한일전에 열광하며 소리치다가 졌을 때 욕을 해댄다면 그건 축구 팬 자신도 먹어야 하는 욕이다. 근본적인 것은 어떻게 하면 수많은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끌어들이는가가 최대 관건이다. 물론 양질의 훈련으로 좋은 경기를 보여주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그러나 둘째 조건이라면 단연 관객에게 인기 있고 사랑 받는 선수들이 있어야 된다는 것이다. 많은 경기장의 입장객들 중엔 어떤 선수 하나가 좋아서 그 팀을 응원하는 경우가 많다. 특별한 연고가 있는 팀이라서 가 아니라 그냥 좋아하는 선수가 있기 때문에 응원한다는 것이다. 이런 면에서 일본의 각 구단과 선수 그리고 방송계는 상호 협조 체계를 갖춰 스포츠 선수를 낀 예능프로, 토크쇼, 특집 와이드를 1년 내내 끝도 없이 내보낸다. 일본 축구팀의 No.1이라면 미우라, 라모스, 다케다가 속해있는 베르디 팀이라 할 수 있는데, 브라질 태생의 라모스는 유창한 일본어로 토크쇼에서 자신의 축구 인생을 시종 재미있게 털어놓고, 미우라는 쇼프로에 나와 가라오케를 열창한다. 후기 일본 리그 결승골을 터뜨린 다케다는 마지막 날 홍백전에 나와서 축구 응원가를 부르며 애교를 떨었다. 베르디 팀만이 아니라 각 구단의 수많은 스트라이커과 키퍼들은 코미디 팀과의 승부차기 경기에서 간신히 이기거나 져준다. 축구 경기만이 아니라 프로야구 선수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몇 년전 일본 챔피언이었던 야쿠르트의 MVP 가와사키와 팀 선수들은 아예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전속된 쇼맨십의 황제들이다. 노무라 가쓰야 감독까지 공익CF에 나와 애교를 떨고 노래해다. 결국은 이런 힘이 팬을 확보하게 하고 그 힘이 팀을 부흥시켜 일본 No.1이 되는 원동력이 된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우리 축구 각 구단과 개인의 인기관리 및 유머 감각은 몇 점쯤 되는지 묻고 싶다. 우리나라에도 운동 감각과 함께 엔터테인먼트의 감각을 갖춘 선수들이 엄청나게 등장하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