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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특별기획연재 -미국의 여성 불교 >
북가주 지역 담마야리니 선원의
소바나 스님
글 / 전현자( 취재기자)
샌프란시스코에서 북쪽으로 1시간 정도 가면 농장이 많은 지역인 Penngrove 시가 있고 이 곳에 비구니 스님들의 수행처인 조그만 담마야리니(Dhammadharini Monastery)가 있다. 이곳에서 다시 1:30분 정도 켈리포니아 1번 도로를 타고 가면 Jenner라는 조그만 어촌 마을이 나온다. 이 제너에서 7분 정도 가다가 산길로 들어서서 숲속으로 가면 아랸야 보디 헤미티지(Aranya Bodhi Forest Hemitage)라는 비구니 수도원이 있다. 이 담마야리니와 아랸야보디 헤미티지는 같은 소속이고, 총괄 주지는 타타로카 스님이며, 소바나 스님은 담마야리니 책임자 겸 부주지 이다.
이 수행처는 태국의 아잔차 숲속의 수행 방법을 따르고 있다. 태국 아잔 차 스님의 미국 지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차로 3 시간 정도 가는 Redwood Valley에 있는 아바야기리 수도원이다. 그래서 아랸야 보디와 담마야리니 그리고 이비야기리는 같은 소속은 아니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소바나 스님은 1948년생으로 1970년 하바드대학교를 졸업하였으며 2003년 사미니 계를 받았다. 담마야리니는 현재의 장소에 2016년 자리를 잡았다.
본지 전현자 취재 기자는 담마야리니와 아랸야 보디 헤미티지를 오가면서 한 달간 수행을 했다. 수행중에 이 인터뷰로 기사를 만들었다.
기자: 안녕하세요. 인터뷰 감사드립니다. 어떻게 불교신자가 되셨나요?
소바나 스님: 좋은 질문입니다. 젊었을 때 저는 정신적인 번뇌에 얽매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연이어 가족의 죽음을 격게 되었습니다. 남동생이 에이즈로 사망하고, 2년이 안돼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리고 또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또 2년 안에 오빠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리고 가장 친했던 친구도 죽음을 맞았습니다. 견디기 어려운 고통에 영적인 도움을 갈구했으나 천주교에는 실망하였었기에 다른 길을 찾고 있었습니다.
여러 다른 기독교 교파들을 찾아가기도 하고, 비베카난다 수행원을 찾아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믿음이 생기지 않았습니다. 저에게 손을 내밀고는 있었지만 그저 제 돈을 가져가기 위해 손을 내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어떤 곳은 사람에 대해서 미심쩍은 부분이 있었고, 어떤 곳은 그저 지나치게 미신적이었습니다. 제가 찾아갔던 한 구루(Guru) 수행원에는 구루 선생이 저를 보거나 손을 대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눈물을 쏟아내며 말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비파사나 명상이라는, 전혀 미신적이 부분이 없고 단지 호흡을 관찰하기만 하면 되는 명상이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상좌부 불교 스님께서 진행하시는 팔정도에 대한 수업을 소개받고 신청했습니다. 수업이 너무 좋아서 이 수업을 먼저 들었던 것이 매우 다행이었습니다. 다른 불교를 실천하는 절이나 수도원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을 먼저 들었다면 불교에 대해 이런 믿음이 생기지 않았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법문하시는 스님께서는 정말 배려가 깊고, 인내심 많고, 인자하셨습니다. 그 무엇도 스님의 수행의 상태를 흔들리게 할 수 없을 만큼 매우 균형 잡힌 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법문은 일반인들의 퇴근 후에 진행되었고, 따뜻하고 아늑한 곳에서 아주 평온함이 가득한 스님의 목소리를 통해 부처님의 가르침, 즉 진리의 길을 가르쳐주시는 귀한 시간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늘 잠이 들었습니다.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도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았기 때문에 편안한 환경에서 마음이 편안해서였겠지요.
또 첫 세 번의 법문은 가지도 않았습니다. 그러다 네 번째 법문에 참석했을 때 제가 빠졌던 법문들을 녹음하셔서 카세트 테이프로 만들어 두셨던 것을 스님께서 주셨습니다. 제가 수업내용을 빠짐없이 들을 수 있도록, 매번, 스님께서 돈을 들여, 시간을 들여 녹음 테이프를 만드신 것이었습니다. 그 때는 녹음을 하는 것이 쉬운 때도 아니었습니다. 더욱이 스님께서는 법문에 참석했던 학생 12명 모두를 위해 각각 테이프 세트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진정 어린 선물이었습니다.
법문을 끝마치며 스님께서는 주말 명상 수련회를 열어 자애명상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수련회에서 저는 제 한계를 돌파하는 아름다운 경험을 했습니다. 당시 저에게는 일 년 정도 악몽을 꾸게 한 끔찍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애명상을 한 후 저는 그 문제를 해결해 주는 아주 강력한 꿈을 꾸었습니다. 전쟁터에서 치열히 싸우고 있던 것만 같았었는데, 그 악몽이 물에 완전히 씻겨 나간 듯 해소되었습니다.
그 수련회가 끝난 후 스님께서는 다른 곳으로 떠나실 것이라 하시며 반테 구나라타나(Bhante Gunaratana) 스님을 저희에게 소개해 주셨습니다. 반테 구나라타나 스님께서는 인자하시고 지혜로우셨습니다. 그리고 특히나 서양인이 법을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는데 관심이 깊으셨습니다. 그 당시에는 도움이 될지 안 될지 몰랐었지만, 적어도 1년 정도는 스님께 지도를 받아보자 다짐하고 수행을 시작했습니다.
1년이 지나자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었습니다. 무엇보다도 가족과의 관계가 개선되었습니다.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으로 인해 상처받고 충격을 받은 제 가족과 지인들이 그 경험을 극복해 낼 수 있도록 곁을 지키고 함께 해줄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 저는 제가 걷는 길에 대해 의심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고통이 정신적인 번뇌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은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이기에 그것을 경험한 저는 불자가 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기자: 번뇌의 일들을, 나누어 주심에, 그리고 극복하심에 존경을 표하며, 어떤 부처님의 가르침을 계기로 출가를 결심하셨는지요?
소바나 스님: 제가 처음 불교를 접하고 명상을 시작했을 때, 저의 첫 스승님은 반테 구나라타나 스님이셨습니다. 그리고 저는 웨스트버지니아 바바나 수도원(Bhavana Society)에서 수행하였었습니다. 당시 수도원은 개인 명상실인 구티(Guti)를 만들고 있었는데, 분위기가 너무 아름다워 당장이라도 출가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가지고 있는 책임으로 인해 그러지 못했습니다. 저는 제 일과 가족에 대해서 매우 헌신적이었으며 책임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끊어버리고 출가할 수는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결혼한 적은 있었지만 아이를 낳은 적은 없었기 때문에 그나마 자식에 대한 책임은 없었습니다. 그런데 10년 후, 제가 없어도 제 사업이 잘 돌아가는 시점이 왔습니다. 하여, 사업을 드디어 저는 놓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가족과 일 외에 제가 출가를 하지 못했던 또 한 가지 이유는 사랑이었습니다. 결혼 생활이 행복하지 않았지만 사랑을 느끼는 것에는 욕구가 남아 있었습니다. 건강한 사랑의 관계를 경험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다, 그 꿈이 이루어졌습니다. 한 사람을 만나 멋진 관계를 맺었는데, 그 관계 또한 죽음으로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사람은 여성이어서 우리는 성소수자가 된 것이지요. 얼마간 함께 지내다가 파트너가 장애를 얻어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연금으로 살게 되었습니다. 저는 부모님으로부터 받은 재산이 있어 경제적 어려움은 없었지만 제 파트너는 우리가 만난 뒤부터 저의 명상 수행을 지원해왔기 때문에 명상은 계속하고 있었지만 결코 제 파트너의 곁을 떠나 출가할 수는 없었습니다.
따라서 저희는 함께 하이킹 여행을 떠나기로 했습니다. 일을 그만두고, 집을 팔고, 처리하지 못한 물건들은 창고를 임대해 보관해 두고, 함께 애팔래치안 산맥 트레일을 따라 떠났습니다. 1년 동안은 하이킹을, 그 다음 1년은 명상 수행을 하기로 했고 이후의 일은 그때 가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했습니다. 하지만 여러 일이 있었기 때문에 하이킹 속도가 매우 느려 결국 2년간 하이킹을 했습니다. 그리고 2년째 되는 해 말, 제 파트너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저에겐 부양해야 할 부모님도 안 계셨고, 돌봐야 할 사업도 없었으며, 보살펴야 할 파트너도 없었고, 처리해야 할 주택대출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저는 상가에 가 봉사활동과 명상을 하며 지내기 시작하였습니다. 2년 정도 상가가 제 가족이 되었습니다. 비구 스님과 다른 자원봉사자들이 더 가족처럼 느껴지며 세속적 가족의 연도 놓아버릴 수 있었습니다
이러한 마음상태에서의 수도생활은 전혀 문제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행복해지기 시작했고, 또한 제가 말을 잘하는 재능이 있다는 것을 알고 법사가 되고 싶었습니다. 재가 법사보다는 출가를 하여 법을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또, 수도원 생활과 출가는 인간으로서 가장 이상적인 인생길을 살 수 있다는 생각이 출가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기자: 삶이란, 어떤 것입니까?
소바나스님: 우리에게는 매 순간을 어떻게 살 지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있습니다. 자유, 지혜, 깨달음으로 한 발짝 더 가까워지는 선택을 할 수도 있고 욕망 등 고통과 더 가까워지는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삶은 선택의 결정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바른 선택을 하는데 에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있기에 참 다행입니다.
기자: 깨달음/해탈은 어떤 상태라 생각 하십니까?
소바나 스님: 해탈은 우리가 숨 쉬고 있을 때, 우리가 발을 내 딛여 걷고 있을 때, 자아와 인격의 존재성에 대한 집착을 놓아버리고 완벽한, 완전한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우리의 삶은 마치 인격과 자아 등 존재에 대한 모든 것을 담은 수레를 끌고 다니는 것과 같습니다. 저는 40년 동안 그 수레를 끌고 다녔습니다. 해탈은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이제 그 수레를 놓아버려도 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자: 해탈에 대한 이해가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요?
소바나 스님: 과거에는 심리적으로 저를 흔드는 일이 생기면 몇 일이고, 몇 달이고, 심지어 몇 년이나 그에 대한 번뇌와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러한 일들이 제 마음을 흔들지 못합니다. 마음이 그저 열려 있습니다. 간혹, 흔들릴 때도 있지만 아주 짧게 1분이 걸리지 않습니다. 평온한 마음의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 아주 쉬워졌으며, 별 노력 없이도 가능합니다. 이것이 해탈의 영향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기자: 대학을 하버드에서 공부하셨다고요!
소바나 스님: 고등학생 때는 어느 정도 똑똑해서 하버드 대학에 갈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대학을 다니는 대부분의 시간은 술 마시고, 마약을 하며, 활발한 성생활을 하는 데 보냈습니다.
대학 때 저는 매우 불행했습니다. 불안증이 심해 가끔은 이유도 없이 아침부터 밤까지 울었습니다. 아마 제가 마약을 했기 때문에 더 심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출가한 뒤로 그러한 일들에서는 완전히 벗어났습니다.
기자: 코로나 19로 인해 줌(zoom)을 통해 법문 하시는 것을 들었습니다. 실생활에서 수행할 수 있는 방법과 그런상황에서 생긴 경험을 잘 가르쳐 주시어 참 좋았습니다. 불교는 언제 배우셨나요?
소바나 스님: 처음 법을 접하게 된 것을 1989년입니다. 그리고 집을 떠나 하이킹을 가게 된 것이 1999년이었습니다. 그 후 2003년 사미니계를 받았습니다. 반테 구나라타나 스님께서는 모든 제자들을 법문을 잘하는 비구, 비구니로 양성하고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비구니계를 받은 바로 다음 날 저에게 법문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저는 법문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직접 법문을 하도록 하여 스스로 배울 수 있게 하셨으며, 그것은 보다 많은 법의 제자를 만드시려는 스승님의 뜻이 잘 담긴 실천의 장이었습니다.
그리고 그즈음에 쓰나미가 스리랑카와 아시아를 강타했습니다. 참혹한 자연재해였지요. 그리고 스리랑카의 적십자사, 불교 적십자사에서 긴급회의를 소집했기에 스님께서 스리랑카로 급하게 가셔야 하는 상황이었습니다. 당시 스님께서는 10일 자애 명상 수련회를 준비하고 계셨습니다. 그런데 저에게 대신 수련회를 인도하겠냐고 물으셨습니다. 그 수련은 스님의 수련이었습니다. 전 세계에서, 심지어 독일에서까지도 참석자 50명이 스님과 함께 명상을 배우고자 찾아오는 수련이었습니다. 즉 모두 반테 구나라타나 스님으로부터 명상 지도를 받고 법문을 배우러 기대를 하고 오는 것이었는데 저는 비구니계를 받은 지 고작 네 달쯤 되고 난 후였는데 말입니다. 스님께서는 그러한 분이셨습니다. 제가 어떻게 할 수 있겠습니까? 노력하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상좌부 불교는 매우 간단합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원인과 결과가 간결한 언어로 설명되어 있습니다.
기자: 줌(zoom)법문에 세계 여러 나라의 사람들이 함께 한다고요?
소바나 스님: 그렇긴 합니다만 많은 사람들이 함께하는 것은 아닙니다.
기자: 법문을 하는 것에는 어떤 좋은 점이 있습니까?
소바나 스님: 법문을 준비하면서 어떤 말씀을 드릴지 생각하고, 법에 대해서 성찰하고, 어떻게 법을 표현할 것인지 생각하면서 제 스스로가 많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또한 학생들의 질문이 저에게 더 큰 깨달음을 줍니다. 사실상 법문을 통해 가장 많은 가르침을 얻는 것은 바로 저라고 말씀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자: 수행생활에 어떤 계획이 있으신지요?
소바나 스님: 이곳에 계속 머물고 싶습니다. 그리고 내년이나 내후년에는 긴 명상 수행을 할 수 있도록 수도원에서 지원을 해 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먼저 법에 대해 아주 잘 아시는 스승님께 배운 다음 그것을 바탕으로 아란냐 보디 구티에 머물며 수행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이 몸과 마음이 가능할 때가지 수행과 그 수행을 나누며 부처님을 가르침을 전하는 지금의 삶을 이어가고 싶습니다.
기자: 당신은 누구신가요?
소바나스님: 수수께끼인가요? 저는 누구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기자: 누구도 아니면 질문의 답은 무엇이 한 것입니까?
소바나 스님: 원인과 조건으로부터 일어나는 오온의 집합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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