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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사항 저자 : 탁용국 출판사 : 탐구당 출판일 : 1986.01.01 목차 001. 사의 기원과 사관
탁용국 전 경희대 교수,중국문화대학대학원 박사
이 책을 고르게 된 이유는 손준식 교수님이 역사 고전의 이해 수업에 도움이 된다고 추천하신 책들 중에 가장 무난할 것 같아서였다. 그러나 현실은 가장 무난한 책이 250쪽은 기본이고 심지어 빛바랜 종이에다가 책 내용도 온통 한문 일색이었다. 하지만 읽고 나니 확실히 중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방식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이 이해가 되면서 중국사학사의 요점만 간단히 간추린 책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중국사학사라는 것이 중국사서의 역사라는 것을 처음 알았다. 중국은 사서의 역사까지 이렇게 길 정도면 역시 중국은 5천년도 더 되는 역사를 자랑할 만한 것 같았다. 왜냐하면 사서의 편찬 방식을 연구하는 학문까지 따로 있을 정도라면 그 학문에서 연구하는 사서의 양은 엄청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 정사의 양이 얼마 안 되는 것에 비하면 중국은 정사만 25사나 되기 때문에 우리보다 역사도 길고 사서도 더 많은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5천년도 더된 중국의 역사는 그냥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그 역사를 담고 있는 역사서와 그 역사서를 쓴 역사가의 역사관에 의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론 시대에 따라 바뀔 수도 있지만 역사서도 일정한 역사 서술 방식에 의해 이루어졌을 것이다. 역사를 기전체, 편년체, 기사본말체등 어떠한 형식으로 기술하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사실의 내용이 판이하게 달라지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기 같은 기전체는 한 인물의 전만 나와 있으므로 그 인물이 무엇을 했는지는 상세하게 알 수 있는 반면, 그 당시 시대 상황이 어떠했는지는 알 수 없다. 이와 달리 자치통감 같은 편년체는 그 때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만 나와 있으므로 그 인물의 전체 행적은 알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또한 역사가의 역사관에 의해서도 사서의 내용이 달라질 수 있다. 예를 들어 삼국지를 쓴 진수는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삼국지를 쓸 때 위나라의 역사에 치중해서 쓸 수밖에 없었다. 이와 달리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쓸 때 촉나라가 한나라를 계승했다고 생각해서 촉나라에 정통성을 두었다. 이처럼 중국이 5천년의 역사가 될 수 있었던 것은 모두 자기네 역사를 기록하려는 사관들의 노력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즉 역사는 쭉 계속되지만 그 역사 속에서 살아 숨 쉬는 인간들의 모습을 알기 위해서는 사관의 도움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제일 먼저 역사의 기원은 구전이라고 생각한다. 말로 전해져서 내려오던 역사가 창힐이 한자를 만들면서부터 역사로 기록됐기 때문이다. 선사시대라는 말 자체가 역사 이전 이라는 말이니, 말이 글로 바뀌는 그 순간부터 역사를 기록했다는 말이 된다. 결국 역사는 글이라는 표현 수단이 생기고 나서 인류가 처음으로 그들의 생활을 나타낸 증거가 된다. 지금까지 제일 오래된 역사는 바로 은허에서 발굴된 갑골문이다. 갑골문에서부터 시작된 역사가 사관이 생기면서 이제 정식으로 쓰이게 되었다. 그 후 주나라 때 공자가 춘추를 만들면서 이제 본격적인 개인의 역사 저술이 시작된다. 공자는 고국인 노나라의 역사를 춘추라는 책으로 저술했다. 이것은 공자가 남긴 저서 중에 유일한 역사서인데, 공자는 이 춘추를 통해 후대의 사람들에게 일대 경종을 주었다는 의미로 현재 평가되고 있다. 이 부분에서 보면 공자는 주의 질서를 가지고 포폄을 통해 자기 나름대로의 역사관을 가지고 춘추를 편찬한 것 같다. 다시 말해 후대에게 이 사람은 이런 잘못을 했으니 너는 그렇게 하지 마라 하는 교훈을 주기 위해 이 책을 편찬한 것이다. 하지만 이 부분에서 문제가 있다. 원래 비평이라는 것은 시대에 따라 변하게 되어 있는 것이다. 만약 주의 예법에 따르면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 치자, 그러나 주대보다 혼란스런 춘추시대에는 자기가 서로 춘추 오패가 되겠다고 싸우던 시대였다. 이런 약육강식의 시대에서는 곧 강자의 말이 법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불법이 합리화될 수 있는데도 공자는 무조건 춘추에서 주대의 예법에만 따라 악평을 했다. 그래서 후대까지 춘추의 필법에 따라 비평을 하는 전통이 생겨나서 결국은 참된 비평의 의미가 퇴색되고 말았던 것이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에서 살아남은 사서는 한나라 때에 이르러 엄청난 발전을 하게 된다. 바로 사마천의 사기가 그것이다. 사마천이 부친 사마담의 유지를 받들어 궁형이라는 엄청난 고통을 이겨내고 완성한 사기는 중국사학사 상에서 불후의 명작이 되었다. 사기 편명을 작성하면서 깨달은 것은 일반적으로 사기하면 하·은·주·춘추·전국시대의 인물 이야기가 많을 줄 알았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니 진한 교체기의 초한지 인물 내용이 많이 나오고 그 뒤의 유방부터 한 무제까지의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는 것이다.그 이유는 그동안 사기에 대해 자세히 읽어보지 않은데 원인이 있겠지만 사마천이 시대가 가까운 것은 상세하게 쓰고 시대가 먼 것은 간략하게 써서 그런 것도 있다. 사기는 일반적으로 열전의 내용이 많이 알려져 있어서 그냥 인물 내용이 중심이 된 이야기 인줄 알았는데 살펴보니 본기가 주 요리이고 열전은 그냥 밑반찬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알게 된 것은 각 시대의 자료가 풍부하고 내용이 광범위하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유협 열전은 돌아다니며 놀고먹는 의로운 협객들 내용이고, 화식지는 경제에 관련된 내용이고, 심지어는 진시황을 암살하려는 형가의 내용을 다룬 자객 열전까지 그 내용이 다양하다. 또한 형식에 구애받지 않음으로써 초패왕 항우와 유방 사후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던 여태후를 본기에 집어넣고 평민인 공자와 진승을 세가에 넣었다. 이는 유교의 기틀을 세운 공자와 진나라 때 봉기의 시초가 된 진승을 높이 평가하는 사마천의 주관적인 생각이 많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사기의 우수성은 기전체를 창시했다는 점이다. 이는 본기와 표, 서, 세가 그리고 열전으로 이루어진 형식이다. 따라서 역사서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야 할 본기를 쓰는 한편, 역사에 묻힐 뻔 했던 일반인들의 역사를 열전이라는 체로 만들어 그 인물을 생생히 복원 시켜 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열전의 끝에 사마천의 생각을 넣음으로써 그 인물을 평가하고 있다. 이는 공자의 춘추처럼 그 인물을 평가함으로써 악인의 전철을 밟지 말고 선인의 삶을 따라 하라는 다소 교훈적인 의도이다. 다만 사기에 한 가지 문제점이 있다면 조선에 대해 간략적으로 기술했다는 것이다. 기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면 어째서 기자의 무덤이 중국 산둥 성에 있다는 것인가? 이는 반드시 후대에 윤색된 것임에 틀림없다. 사기 다음으로 중요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사서는 바로 반고의 한서이다. 이 한서는 반표, 반고, 반소, 마속의 손을 거쳐서 작성된 편년체 역사서이다. 물론 왕조를 기준으로 역사를 서술한 반고의 노력은 가상하다. 그러나 한서의 가장 큰 문제점은 편년체라는 사실 이전에 단대사의 스타트를 끊었다는 것이다. 사마천처럼 통사를 안 쓰고 단대사를 씀으로 인해 후대도 한서처럼 그 왕조의 내용만을 단권화 시켜서 역사를 편찬하다 보니 다섯 권이면 끝날 중국의 사서가 오늘날의 25사처럼 급격하게 늘어나 버린 것이다. 그 후의 역사서도 새로운 왕조가 들어서면 그 전왕조의 역사서를 써야만 그 왕조의 정당성이 인정이 되므로 앞 다투어 전 왕조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보니 전왕조가 길수록 그 역사도 중간 중간에 없어진 부분도 있게 되었다. 따라서 몇 년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에 관해 쓰는 편년체 역사 체제에도 한계가 생겨나 후대 역사서는 갈수록 그 양과 질이 급격하게 낮아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반고가 한서를 쓰지 않고 통사를 썼다면 이렇게까지는 되지 않았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해 본다. 그 후 위진 남북조에는 진서의 삼국지가 있다. 이 삼국지는 정사 삼국지로서 후대 나관중이 쓴 소설 삼국지연의와는 다른 것이다. 이 삼국지는 진수가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 사람이었기 때문에 조조가 세운 위나라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 따라서 상대적으로 촉이나 오보다 위의 정사가 많다. 이 책은 진나라가 삼국을 통일 한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쓰인 책이다. 물론 지금은 배송지가 주를 달아서 늘어난 것이지만 그래도 내용이 다른 사서에 비해 짧다. 또한 책을 쓴 진수 자체가 삼국시대 말기에 태어나서 자란 사람이므로 주관이 개입되어 있어서 인물에 대해 공정한 평가를 내리지 못하고 있다. 특히 촉에 대해 사서가 짧은 이유는 제갈량이 진수의 아버지인 진식을 처형시켜서 그렇다는 일설이 있다. 그래서 역사는 후세 사람이 써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박정희가 살아 있을 때는 온통 박정희 찬양 일색이었는데 지금은 박정희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져 식민지 시대 일본군의 장교였던 것이 드러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위진 남북조가 지나고 당대가 되면 사학이 일변한다. 일단은 위진 남북조의 8사가 편찬되는데, 사서를 쓰는 사람에서부터 큰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한나라 때만 해도 사기는 사마천, 사마담 부자가, 한서는 반표, 반고 부자가 대를 이어 역사를 써서 일가의 학으로써 사가의 정신이 살아 있었다. 그러나 당대에 와서는 많은 문인 학자들이 모여서 한꺼번에 역사를 기록하니 역사가 한 사람의 사관이 들어갈 수가 없게 되어서 역사 편찬이 기계적인 행위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더군다나 왕조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역사를 관찬하다 보니 왕조에 반대하는 사관의 의견은 삭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심지어는 당태종이 사서의 기거주를 직접 보고 고쳐 쓴 적도 있다고 한다. 또한 사서의 편찬법도 이전에는 옛날의 문서를 가져다 쓸 때는 원문 그대로 썼지만 이제는 기존에 있던 사서들을 짜깁기해서 새로운 사서를 편찬하다 보니 옛날의 원문은 사라지고 지금은 이도 저도 아닌 역사서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한마디로 역사 편찬이 사마천처럼 사관 한사람의 필생의 역작이 아닌 왕조마다 한번쯤은 정리해서 편찬 해주는 왕조간 간행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바로 이때부터 역사의 타락이 시작된 것이다. 물론 그 당시 학자들이 자기가 잘났다는 것을 만방에 홍보하기 위해 역사서를 썼을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원문 정도는 각주를 달아 주어서 알아볼 수 있게 하는 것이 원문을 쓴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닌가 하고 생각한다. 어쨌든 당대의 사학은 영원히 타락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듯 했다. 그러나 이런 상황에서도 유지기의 사통 같은 역사 이론서가 나오기도 했다. 이런 노력이 있었기에 그래도 올바른 역사서가 써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 결과 송대에 이르러 사학의 부흥이 일어난 것이다. 바로 사마광의 편년체 통사인 자치통감이다. 이 책은 주대부터 오대까지의 역사를 통사로 엮어 낸 책이다. 이 책의 훌륭한 점은 약 1400년경의 역사를 약 300권 정도로 축약한 것으로, 이는 편년체 사서로 썼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왜냐하면 기전체는 인물 중심으로 쓰다 보니 중복된 인물이 많아서 그 양이 많은데 비해, 편년체는 날짜별로 쓰다 보니 그 양을 압축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 책부터 과거 사기 이후로 끊긴 통사와 편년체의 맥이 다시 부활했다. 이것은 딱딱한 역사서보다는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역사 교양 형식의 책으로도 널리 보급되어 있다. 왜냐하면 과거의 정치를 통해 현재를 되돌아본다는 뜻 그대로 현대인에게도 역사를 통해 귀감을 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옛날의 역사를 읽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옛날의 역사로부터 교훈을 얻어 현재의 잘못을 고치는 역할까지도 하고 있는 훌륭한 책인 것이다. 왜냐하면 역사는 돌고 도는 것이므로 옛날에 일어난 일이 지금도 일어나지 말라는 법은 없기 때문이다. 역사는 끊임없이 순환하지만 결국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 이 책의 참된 취지인 것이다. 그 예로 독일이 세계1차 대전을 일으켰지만 패전국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망상을 버리지 못한 독일은 세계2차 대전을 또다시 일으켜 두 번 연속으로 패전국이 되고 말았다. 이처럼 역사는 순환하는 것인데 과거 일어난 일인 역사를 읽으면 현재에도 똑같은 일을 또다시 하지 않을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역사의 쓰임새이다. 역사는 과거로서 죽은 학문이 아니라 현재와 소통하는 살아 있는 학문인 것이다. E.H.카가 말했던 것처럼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인 것이다. 사마광은 이것을 간파하고 자치통감을 지어서 후세에게 경세서로 활용하라고 한 것이다. 그 후 원추의 통감기사본말이 있는데 이것은 새로운 기사본말체의 창시이다. 기사본말체는 과거 기전체와 편년체의 장점만을 가지고 새로 만든 것이다. 즉 이 사건은 누가 몇 년부터 몇 년까지 어떤 사건을 일으켰는지에 대해 자세히 설명이 나옴으로써 인물의 연대기와 더불어 그 사건이 일어난 연도까지 한 번에 두 마리 토끼를 잡는 역사 서술체인 것이다. 송대에는 사학 부활의 전성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사학이 발전했던 시기였다. 그 이유는 신당서와 구당서, 신·구오대사 사이에 객관적 사료만 취하는 사체 변화가 있었고, 책부원구와 자치통감의 저술에 힘입어 양질의 새로운 저서 체제가 발전했다. 거기다 정통론 논쟁으로 사학 연구가 활발해졌으며, 정초의 통지의 저술도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정초의 통지는 당시 자치통감의 영향으로 통사가 어느 정도 전성기에 이르렀음을 말해 주는 증거가 된다. 또한 금석학의 발달로 정확한 역사와 실제 유물과의 사실 대조가 이루어졌으며, 수서경적지 이후 유흠의 칠략으로 목록학이 발전되었다. 그리고 옥해와 문헌통고의 편집으로 송대 사학의 부흥은 끝을 맺는다. 사실 송대는 문치주의의 영향으로 학문이 발달했던 시기이므로 여러 가지 학문 발달과 더불어 사학이 많이 발달되었다. 그러나 그 후 원대의 송사, 요사, 금사는 그 내용이 번잡하여 사학에 대해 논할 거리가 못 된다. 왜냐하면 원 자체가 오랑캐 민족의 나라이기 때문에 사학사의 발달은 그들의 안중에 없이 그저 있는 서적들을 가지고 되는대로 만든 것이 원대 삼사이기 때문이다. 송사는 있는 내용을 또 썼고, 원사는 일 년 반 만에 만들어졌고, 금사가 그나마 낫다고 평가된다. 그 후 한인인 주원장이 세운 명나라가 원사를 지었지만, 원나라가 엄청난 대제국을 건설해서 그 나라의 역사가 여러 나라의 문자로 나뉘어져서 한 번에 합치기도 어렵기 때문에 혼잡한 역사서가 되고 말았다. 게다가 1년도 채 안되어서 급조되었기 때문에 있는 사료조차도 다 활용을 못했다. 명나라는 한인의 나라이긴 한데 그전의 원나라가 이민족이었기 때문에 원사를 짓는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당연한 결과이다. 원사는 비난을 면치 못했지만 명대에도 영락대전등 대규모의 편찬, 장고학, 이지의 사론, 양진의 학문, 초굉의 목록학 등 많은 학문이 발전한 시기였다. 그 중 양명학자인 이지는 공자를 경멸할 정도로 독특한 사평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나 그의 결정적인 패인은 바로 그의 저서인 장서를 그의 생전에 출판한 사실이다. 이로 인해 그는 사회의 질타를 이기지 못하고 자살해 버린다. 그러나 그의 저서는 후대 사람들에게 객관성과 합리성 면에서 높이 평가된다. 그 당시 사람들은 공자의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어서 이지를 매도하여 죽인 것이다. 하지만 유교 논리의 아집에 사로잡히지 않고 인정할 것은 인정하는 것이 역사를 공정하게 보는 길이다. 그 다음 청대는 한학이 발달하여 사학에 영향을 주었다. 청은 개국하자마자 명사를 편찬하기 시작하여 만사동이 포의로 참가한 명사는 90여년에 걸쳐 완성된다. 더불어 청대는 훈고학이 발달해 고서를 제대로 연구하는 사학이 발전하기 시작한 때였다. 서양의 문물들도 많이 들어와 있는 때이므로 청대의 사학도 과학적 연구법을 응용하였다. 강희제는 명사 편찬을 위해 학자들을 불러와 편찬을 시킬 정도로 학문에 관심이 많은 인물이어서 강희자전도 만든 것이다. 대체로 청대는 사학이 절동학파의 황종의와 절서학파의 고염무 두 파로 나뉘어 발전했다. 그리고 옛날 고서들을 보수하는 사학이 많이 발전했다. 더불어 고증 사학, 고사 연구, 금석학도 발전해 그야말로 고문 부흥의 황금기를 이루었다. 청대에서 눈여겨 볼만한 인물로는 왕부지가 있다. 이 사람은 독통감론을 통하여 이적인 만주족이 청나라를 세움으로써 명의 정통이 끊겼다고 하면서 청을 강하게 비판하고 있다. 역사를 통해 망국의 유한을 달래는 이런 사람이야말로 사관의 참된 교본인 것이다. 마치 송나라가 망했을 때 증선지가 18사략을 지어 망국의 한을 달랜 것처럼 말이다. 박은식도 일제강점기에 한국통사를 지어 우리나라의 역사를 기록하여 울분을 토했다. 이런 사람들의 노력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도 우리는 역사 공부를 해야 한다. 강희제때는 청의 모든 학문을 집결시켜 경사자집의 사고전서를 만들 정도로 국력이 강성했던 시기였다. 그때에만 가능한 일들을 과대망상증에 걸린 건륭제는 잘도 해내서 드디어 10년 만에 청사고라는 대작을 만들어 내고야 말았다. 얼마나 자료가 완벽했으면 아직도 원고 상태로만 남아 있을까 하는 의문점도 든다. 사고전서는 경사자집으로 되어 있는데 그 중 사는 사서이고 경은 진리를 연구하는 것이다. 이 둘은 청대 전까지는 서로 섞여 있었다. 그러나 청대에 이르러 고염무의 제자인 대진과 황종의의 제자인 장학성에 의해 사가 경에서 떨어져 나와 새로 독립한다. 이것은 마치 사마천이 공자의 춘추를 사에서 경으로 내몬 상황과 비슷한 것이다. 먼저 절동학파인 장학성은 문사통의를 통해 사학을 방법론적 원리로 설명하고 있다. 즉 문과 사의 원칙을 제시하며 지방지를 쓸 때 되도록 넓고 많이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면에 절서 학파인 대진은 지리의 연혁만을 기록하면 된다고 했다. 그 후 양계초의 신사학은 역사연구법을 통해 동아시아의 역사를 새로 쓰려고 노력한다. 양계초의 제자로 유명한 사람은 입헌 군주정을 주장한 강유위이다. 강유위는 양계초의 사상을 이어받아 손문의 삼원주의와 대립하지만 결국 실패로 끝나고 만다. 하지만 양계초는 훗날 우리나라 사학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이 사람의 연구를 끝으로 청대에는 더 이상의 사학의 발전을 일어나지 않는다. 다만 근대에 드디어 전설상의 은허 갑골문이 발견되고 고대 금문과 도기의 출토로 고고학과 사학에게 호사가 생겼다. 그 후로 만주어인 만문노당, 책인 내각당안, 돈황학으로 많은 사료가 발견되었다. 특히 둔황 석굴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을 비롯한 진귀한 사료들이 쏟아져 나왔다. 실로 사학사 최고의 발견이었다. 민국 이래의 사학사는 갑골문부터 현대적인 사료들까지 종합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처럼 중국사학사는 길고도 험난한 여정을 거쳐 지금까지 발전해 왔다. 사실 고대사는 신화로 치부하고 무시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신화로만 여겨지던 은의 갑골문이 그것도 현대에 와서 극적으로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현재와의 끝없는 대화 속에서 점차 발전해 나가는 것이다. 그래야만 우리는 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고 점차 좋은 방향으로 발전해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중국사학사는 그저 과거 중국에 이런 사서가 있었다는 것을 연구하는 학문으로 끝날 것이 아니다. 현재 일어나는 일도 미래의 입장에서 볼 때는 과거의 역사가 되는 것처럼 사학사도 우리가 유심히 지켜봐야 할 우리의 또 다른 미래인 것이다. 중국사학사를 읽고 나서 느낀 점은 우리도 중국만큼 오랜 역사를 지닌 민족으로써 옛날의 역사책에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찾아 읽음으로써 과거의 전철을 밟아 똑같은 우를 범하지 말자는 것이다. 은감불원과 같이 은의 멸망을 지켜본 주가 은의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처럼 우리도 중국사학사를 교훈으로 삼자. 우리나라는 중국보다 사서의 양은 적지만 그건 전부 중국 역대 왕조가 반고의 단대사라는 농간에 휩싸여 기하급수적으로 사서의 양을 늘린 결과일 뿐이므로 우리나라가 중국에 비해 사서가 적다는 생각을 하지 말고 우리나라 사서도 체계적으로 정리하여 한국사학사라는 학문을 발전시켜 보는 것은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첫댓글 고전의 이해 과목의 리포트로 제출한 책을 선택한 사람을 다른 책을 선택해야 함.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