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삼국유사(三國遺事)번역문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무열왕은 대식하였고 성군의 시대를 열다(660년 (음))
무열왕은 대식하였고 성군의 시대를 열다 ( 660년 (음) )
왕은 하루에 쌀 서말과 꿩 아홉 마리를 잡수셨는데 경신년(庚申年)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는 점심은 그만두고 아침과 저녁만 하였다. 그래도 계산하여 보면 하루에 쌀이 여섯 말, 술이 여섯 말, 그리고 꿩이 열 마리였다. 성안의 시장 물가는 베 한필에 벼가 30석 또는 50석이었으니 백성들은 성군의 시대라고 말을 하였다.
정치>왕실>국왕>활동(결혼·통치)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무열왕이 청병 입당하였을 때, 당 황제의 시위 요청을 거절하다
무열왕이 청병 입당하였을 때, 당 황제의 시위 요청을 거절하다
왕이 태자로 있을 때에 고구려를 치기 위해 병사를 청하러 당에 들어갔다. 당의 황제는 그의 풍채를 보고 칭찬하여 신성한 사람이라 하고 기어이 머물러 시위(侍衛)를 삼으려 했으나 극구 청하여 돌아왔다.
정치>외교>숙위>파견·귀국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백제 의자왕은 어려서 훌륭했지만 즉위 후 주색에 빠져 충신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641년 (음))
백제 의자왕은 어려서 훌륭했지만 즉위 후 주색에 빠져 충신 성충의 말을 듣지 않다 ( 641년 (음) )
당시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義慈)註 673673 백제 제31대 왕으로 백제 패망의 군주이다. 아버지는 무왕(武王)으로, 641년에 즉위하여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까지 다스렸다. 초기에는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왕실측근을 제거하는 등 왕권 강화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함락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만년에 사치와 방종에 빠져, 어진 신하를 살해하는 등 폭정을 하였고, 빈번한 전쟁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재위 20년(660)에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에 압송되어 가서 거기서 병사하였다(이도학, ≪백제의 인물≫, 주류성, 2004).닫기는 호왕(虎王)註 674674 ‘호왕(虎王)’은 ‘무왕(武王)’을 말하는데, 고려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하여 ‘호(虎)’로 쓴 것이다.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로 600년에 즉위하여 재위 42년(641)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또한 익산에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워 그곳에 궁궐을 세웠고 당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노중국, ≪백제 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닫기의 장자였다. 영웅스럽고 용맹하여 담력이 있었으며 부모 섬기기를 효도로 하고 형제간에 우애가 있어 당시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 그는 정관(貞觀)註 675675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649년이다.닫기 15년 신축(辛丑)에 즉위하여 주색에 빠져서 정사가 어지럽고 나라가 위태로웠다. 좌평 성충佐平 成忠 ; 좌평은 백제 관직명이다註 676676 백제 의자왕대의 신하로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고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군사(軍事)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를 자세히 간하다가 옥사한 인물이다(노중국, ≪백제 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닫기이 지극하게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아니하고 [성충을] 옥 안에 가두었다. [성충이] 몸이 여위어 죽게 되었을 때 글을 올려 이르기를 “충신은 죽어서도 임금을 잊지 아니하옵니다. 원컨대 한 말씀드리고 죽고 싶습니다. 신이 일찍이 세상 돌아감을 살펴보니 반드시 병란이 있을 것 같습니다. 무릇 용병을 함에 있어서는 그 지세를 잘 살피고 택해야 하니 상류에 머물러 적을 맞이하면 보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만약 다른 나라의 군사가 온다면 육로로는 탄현炭峴 ; 침현(沈峴)이라고도 하는데 백제의 요충지이다註 677677 백제 사비성과 인접해 있던 고개로≪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산천조에서는 “탄현(炭峴) 현 동쪽 14리에 있는데 공주와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신라군의 백제 공격로를 남천정-삼년산성-산계리토성-장군재-구진베루(옥천)-마전-탄현으로 비정하여 오늘날 진산의 탄현을 신라가 넘은 탄현으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정영호, 「김유신의 백제 공격로 연구」, ≪사학지≫ 6, 1972).닫기을 통과하지 못하게 하고, 수군은 기벌포伎伐浦 ; 곧 장암(長嵓) 또는 손량(孫梁)인데 지화포(只火浦) 또는 백강(白江)이라고도 한다註 678678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닫기에 들어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험한 곳에 웅거해서 적을 막은 이후에야 [나라의 보존이] 가능할 것입니다.”라 하였으나 왕은 이를 듣지 아니하였다.
註 673
백제 제31대 왕으로 백제 패망의 군주이다. 아버지는 무왕(武王)으로, 641년에 즉위하여 백제가 멸망하던 660년까지 다스렸다. 초기에는 귀족중심의 정치운영체제를 타파하기 위하여 왕실측근을 제거하는 등 왕권 강화에 힘썼다. 대외적으로는 고구려와 연합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대야성을 함락하는 등 큰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하지만 만년에 사치와 방종에 빠져, 어진 신하를 살해하는 등 폭정을 하였고, 빈번한 전쟁으로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다. 재위 20년(660)에 백제가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의 침략을 받아 멸망하자, 의자왕은 당나라에 압송되어 가서 거기서 병사하였다(이도학, ≪백제의 인물≫, 주류성, 2004).
註 674
‘호왕(虎王)’은 ‘무왕(武王)’을 말하는데, 고려 혜종의 이름인 ‘무(武)’를 피휘하여 ‘호(虎)’로 쓴 것이다. 백제의 제30대 왕이다. 제29대 법왕(法王)의 아들로 600년에 즉위하여 재위 42년(641)에 사망하였다. 재위 기간 동안 왕권을 안정시켰으며, 신라의 변경을 자주 공격하여 영토를 확장시켰다. 또한 익산에 천도하려는 계획을 세워 그곳에 궁궐을 세웠고 당시 최대의 사찰인 미륵사를 창건하기도 하였다(노중국, ≪백제 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註 675
당 태종(太宗)의 연호로 정관 년간은 627~649년이다.
註 676
백제 의자왕대의 신하로 나라의 존망을 걱정하고 신라의 공격에 대비해 군사(軍事)를 어떻게 운용해야 할지를 자세히 간하다가 옥사한 인물이다(노중국, ≪백제 정치사연구≫, 일조각, 1988).
註 677
백제 사비성과 인접해 있던 고개로≪신증동국여지승람≫ 권18 부여현·산천조에서는 “탄현(炭峴) 현 동쪽 14리에 있는데 공주와의 경계이다”라고 하였다. 신라군의 백제 공격로를 남천정-삼년산성-산계리토성-장군재-구진베루(옥천)-마전-탄현으로 비정하여 오늘날 진산의 탄현을 신라가 넘은 탄현으로 비정한 연구가 있다(정영호, 「김유신의 백제 공격로 연구」, ≪사학지≫ 6, 1972).
註 678
기벌포의 위치에 대해서는 약간의 이설이 있으나, 일반적으로 백강(白江)은 곧 지금의 금강이고, 금강의 하구가 곧 기벌포라고 알려져 있다.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국명 : 백제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의자왕 말기 백제 멸망을 암시하는 흉조가 이어진다(659년 (음))
의자왕 말기 백제 멸망을 암시하는 흉조가 이어진다 ( 659년 (음) )
현경(顯慶) 4년 기미(己未)에 백제의 오회사 烏會寺 ; 오합사(烏合寺)라고도 한다註 679679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1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백제시대의 사찰이다(김수태, 「오합사」, ≪성주사와 낭혜≫, 2001, 서경문화사).닫기에 커다란 붉은 말이 나타나 밤낮으로 여섯 시간을 절에서 거닐다가 길을 따라 가버렸고, 2월에는 많은 여우들이 의자궁(義慈宮)에 들어왔는데 그 중 흰 여우 한 마리가 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는 태자궁(太子宮)의 암탉이 작은 참새와 교미하였고, 5월에는 사비泗泚註 680680 현재 충남 부여군 부여읍. 백제 성왕 16년(538)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멸망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어 신라에 귀속되었다.닫기 ; 부여강(扶餘江)의 이름이다언덕 위에 큰 고기가 나와서 죽었는데 길이가 세 길이나 되었고 그 고기를 먹은 사람들은 모두 죽었다. 9월에는 궁중에 있는 회나무가 사람이 곡하는 것처럼 울었으며 밤에는 귀신이 궁의 남쪽 길에서 울부짖었다. 5년 경신(庚申) 봄 2월(660)에는 왕도의 우물물이 핏빛이 되었고, 서해 바닷가에 작은 고기가 나와 죽었는데 백성들은 그것을 다 먹을 수 없었으며, 사비수의 물이 핏빛이 되었다. 4월에는 개구리 수만 마리가 나무 위에 모여들었고, 왕도의 백성들이 이유 없이 놀라서 달아나니 마치 누가 잡으러 오는 것처럼 보였는데, 이때 놀라 자빠져 죽는 자가 백여 명이나 되었고 재물을 잃은 자는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6월에는 왕흥사(王興寺)註 681681 충남 부여군(夫餘郡) 규암면(窺岩面) 신리 37-2번지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사찰이다. 1934년 “왕흥(王興)”명 기와편이 발견되어 절터로 전해오던 중 2001년에 이곳에서 다시 “왕흥(王興)”명 고려시대 기와가 나와 비로소 이 지역이 왕흥사 터였음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왕흥사지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8차례에 걸쳐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구조를 하고 있음이 밝혀졌으며, 목탑 터, 동·서회랑 터, 부속건물 터, 동서 석축과 남북 석축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시대 목탑터 심초석에서 봉안된 사리장치가 확인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백제왕흥사≫, 2008).닫기의 모든 승려들이 배가 큰 물결을 따라서 절 안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 광경을 보았고, 들사슴과 같은 큰 개가 서쪽에서 사비의 언덕까지 와서 왕궁을 향하여 짖더니 잠시 후 그 간 곳을 모르게 되었다. 성 안의 개들이 길 위에 모여 짖기도 하고 울기도 하다 한참이 지나자 흩어졌다. 귀신 하나가 궁에 들어와서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백제는 망한다. 백제는 망한다.” 하고는 땅 속으로 들어갔다. 왕이 그것을 괴이하게 여겨 사람을 시켜 땅을 파보니 깊이가 석 자 가량 내려가 거북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그 등에 글이 쓰여 있는데 “백제는 온달[圓月輪]이고 신라는 초승달[新月]과 같다.”하므로 왕이 무당에게 그것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온달이란 가득 찬 것이니 가득 찬 것은 곧 기울게 되고, 초승달과 같은 것은 아직 가득 차지를 못했으니 가득 차지 못한 것은 곧 점점 차게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노해서 무당을 죽이자 어떤 이가 말하기를 “온달은 융성한 것이고 초승달과 같다는 것은 미약한 것입니다. 살피건대 우리나라는 점점 더 성하여지고 신라는 점점 미약해진다는 징조일 뿐입니다.”하자 왕이 기뻐하였다.
註 679
충남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71번지 일대에 위치했던 백제시대의 사찰이다(김수태, 「오합사」, ≪성주사와 낭혜≫, 2001, 서경문화사).
註 680
현재 충남 부여군 부여읍. 백제 성왕 16년(538)에 도읍을 이곳으로 옮겨 멸망 때까지 백제의 수도였으나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함락되어 신라에 귀속되었다.
註 681
충남 부여군(夫餘郡) 규암면(窺岩面) 신리 37-2번지에 있었던 백제시대의 사찰이다. 1934년 “왕흥(王興)”명 기와편이 발견되어 절터로 전해오던 중 2001년에 이곳에서 다시 “왕흥(王興)”명 고려시대 기와가 나와 비로소 이 지역이 왕흥사 터였음이 거의 확실시 되었다. 왕흥사지는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년부터 2007년까지 8차례에 걸쳐 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결과 백제시대의 전형적인 일탑일금당식(一塔一金堂式)의 가람구조를 하고 있음이 밝혀졌으며, 목탑 터, 동·서회랑 터, 부속건물 터, 동서 석축과 남북 석축 등이 발견되었다 또한 백제시대 목탑터 심초석에서 봉안된 사리장치가 확인되었다(국립부여박물관·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백제왕흥사≫, 2008).
정치>신이>기타>기타
정치>신이>생물>동물
정치>신이>생물>식물
정치>신이>생물>사람·귀신
정치>신이>자연현상>땅·산·돌·물·바다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660년 (음))
태종이 당의 소정방 등과 연합하여 백제로 진격하다 ( 660년 (음) )
태종(太宗)은 백제국에 많은 괴변이 있다는 말을 듣고 5년 경신(庚申)에 인문(仁問)을 사자로 보내어 군사를 청하였다. 당나라의 고종(高宗)은 좌호위대장군형국공 소정방(左虎註 682682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닫기衛大將軍荊國公 蘇定方)註 683683 이름은 열(烈)이고 자는 정방(定方)이다. 하북출신으로 당 태종(太宗) 때 이정(李靖)을 따라 동돌궐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661년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33 소정방).닫기을 신구도행책총관(神丘道行策摠管)으로 삼아 좌위장군 유백영(左衛將軍 劉伯英註 684684 당 괵주(虢州) 사람으로 당 태종대에 휴주도독(雟州都督)이 되었고, 고종대에는 계주도독(桂州都督)이 되어 두주(竇州)·의주(義州)의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이 되어 평양도총관으로서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中國歷代人名事典≫, 上海古籍出版社, 1996, 678쪽).닫기) 자(字)는 인원(仁遠)註 685685 중국의 조음 대빈 사람으로 자는 사원(士元)이었다. 일찍이 고구려와 설연타 등의 정벌에 참여하였고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공격하였다. 용삭 3년(663)에는 웅진성의 유진랑장으로서 유인궤와 함께 부여풍 및 일본의 백제 구원군을 백강구에서 토멸하여 우위위장군 노성현공을 제수받았으며, 인덕 원년(664)과 2년(665)의 두 차례에 걸쳐 당의 칙사로서 신라와 백제의 화친 서맹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건봉 2년(667) 이세적 고구려 원정 때 기약일에 늦었기 때문에 본국에 소환되어 다음해에 유배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닫기과 좌호위장군 풍사귀(左虎衛將軍 馮士貴)註 686686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닫기좌효위장군 방효공(左驍衛將軍 龐孝公) 등을 거느리고 13만의 군사를 이끌고 와서 정벌케 했다 향기(鄕記)에 이르기를 군사는 12만 2천 7백 11인 배는 1천 9백 척이라고 되어 있으나 당사(唐史)에는 상세하게 그것을 언급하지 않았다. 신라왕 춘추를 우이도행군총관(嵎夷道行軍摠管)으로 삼아 신라의 군사를 지휘하여 [당군과] 합세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군사를 이끌고 성산(城山)에서 바다를 건너 [신라]국의 서쪽 덕물도(德勿島)註 687687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해있는 덕적도(德積島)이다. (노중국, 「통일기 신라의 백제고지지배」, ≪한국고대사연구≫ 1, 1988)닫기에 이르니 왕은 장군 김유신으로 하여금 정예 병사 5만을 거느리고 그곳으로 나아가게 하였다.
註 682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
註 683
이름은 열(烈)이고 자는 정방(定方)이다. 하북출신으로 당 태종(太宗) 때 이정(李靖)을 따라 동돌궐을 정벌하였고, 657년에는 서돌궐을 쳐 항복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모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에 예속시켰다. 660년 3월 나당연합군의 대총관으로서 13만의 당군을 거느리고 신라군과 함께 백제를 협공, 사비성을 함락시키고 의자왕과 태자 융을 사로잡아 당나라로 송치하였다. 661년에는 나당연합군을 거느리고 고구려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였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철군하였다(≪구당서(舊唐書)≫ 권83 열전33 소정방).
註 684
당 괵주(虢州) 사람으로 당 태종대에 휴주도독(雟州都督)이 되었고, 고종대에는 계주도독(桂州都督)이 되어 두주(竇州)·의주(義州)의 반란군을 패퇴시켰다. 또한 좌효위장군(左驍衛將軍)이 되어 평양도총관으로서 고구려를 공격하기도 하였다(≪中國歷代人名事典≫, 上海古籍出版社, 1996, 678쪽).
註 685
중국의 조음 대빈 사람으로 자는 사원(士元)이었다. 일찍이 고구려와 설연타 등의 정벌에 참여하였고 660년에는 소정방을 따라 백제를 공격하였다. 용삭 3년(663)에는 웅진성의 유진랑장으로서 유인궤와 함께 부여풍 및 일본의 백제 구원군을 백강구에서 토멸하여 우위위장군 노성현공을 제수받았으며, 인덕 원년(664)과 2년(665)의 두 차례에 걸쳐 당의 칙사로서 신라와 백제의 화친 서맹을 주선하기도 하였다. 그는 건봉 2년(667) 이세적 고구려 원정 때 기약일에 늦었기 때문에 본국에 소환되어 다음해에 유배되었다(정구복 외, ≪역주 삼국사기≫ 3 주석편(상), 한국정신문화연구원).
註 686
고려 2대 임금인 혜종(惠宗)의 이름인 武를 피휘하기 위하여 호(虎)로 썼다.
註 687
현재 인천광역시 옹진군 덕적면에 속해있는 덕적도(德積島)이다. (노중국, 「통일기 신라의 백제고지지배」, ≪한국고대사연구≫ 1, 1988)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정치>군사>군사조직>군사전략
이름 : 인문,고종,소정방,유백영,풍사귀,방효공,춘추,소정방,김유신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의자왕이 충신 흥수의 말은 멀리하고 간신들의 말에 우왕좌왕하다 때를 놓치다
의자왕이 충신 흥수의 말은 멀리하고 간신들의 말에 우왕좌왕하다 때를 놓치다
의자왕이 이 소식을 듣고 여러 신하들을 모아 싸우고 지킬 수 있는 계책을 물었다. 좌평 의직(義直)이 나아가 아뢰기를 “당나라 병사는 멀리서 깊은 바다를 건너왔으나 물에 익숙하지 못하고, 신라의 군사는 큰 나라의 후원만 믿고 적을 가볍게 보는 마음이 있습니다. 만일 당나라 병사가 이롭지 못함을 안다면 필히 의구심이 생겨 감히 창끝을 내밀지 못할 것입니다. 그런고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을 하는 것이 마땅할 줄로 압니다.” 하였다. 달솔 상영(達率 常永)註 688688 백제의 대신으로 신라와 당의 군사가 백제를 침공하자 그에 대한 방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여 이긴 다음 당의 군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던 인물이다. 결국 신라군이 황산(黃山)에 이르자 계백(階伯)과 더불어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왕 7년조에는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백간에게 일길찬의 위를 주어 총관직에 임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태종에게 일길찬(一吉湌)의 위(位)를 받고 총관(總管)의 직에 임명되어 신라에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다(노중국, 「통일기 신라의 백제고지지배」, ≪한국고대사연구≫ 1, 1988).닫기등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당나라 군사는 먼 길을 왔기 때문에 빨리 결전을 하려고 할 것인즉 그 예봉을 당할 수 없습니다. 신라의 군사는 우리의 군사들에게 여러 번 패한 바가 있으므로 오늘날 우리의 병세를 바라보면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책으로서는 마땅히 당군의 길을 막아서 그들이 피로해지기를 기다릴 것이며, 먼저 일부의 군사로써 신라군을 쳐 예기를 꺾은 이후에 편의를 엿보아 합전을 하면 모든 군사를 지키면서 나라를 보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왕은 오히려 망설이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이때 좌평 흥수(興首)註 689689 백제의 좌평으로,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귀향 가 있을 때 신라와 당의 군사를 막는 방책을 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백제는 멸망하였다.닫기가 죄를 얻어 고마미지현(古馬旀知縣)註 690690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으로 비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7 전라도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고적조(고적조(古跡條))의 수령폐현(遂寧廢縣)조를 살펴보면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마읍(馬邑)으로 고치고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영암군(靈巖郡)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와서 본부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은 부의 치소가 되었다”라고 하였다.닫기에 유배되어 있었는데, 왕이 사람을 보내어 “일이 급하게 되었으니 어찌하면 좋으냐?” 하고 묻자, 흥수가 대답하기를 “대개 좌평 성충의 말과 같습니다.” 하였다. 대신들은 이를 믿지 않고 말하기를 “흥수는 [감옥에] 결박되어 있는 중이어서 임금을 원망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그 의견을 마땅히 쓸 수 없습니다. 오히려 당군으로 하여금 백강곧 기벌포(伎伐浦)이다을 따라 내려오게 하되 배를 벌리지[方舟] 못하게 할 것이며, 신라의 군사로 하여금 탄현을 올라서 좁은 길을 따라 말을 나란히 하고 오지 못하게 할 것이며, 이런 때에 군사를 풀어서 그들을 치게 되면 삼태기 속에 든 닭이며 그물에 든 고기와 같을 것입니다.”라 하니, 왕이 “그렇도다.” 하였다. 그런데 당나라와 신라의 병사가 이미 백강과 탄현을 지났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註 688
백제의 대신으로 신라와 당의 군사가 백제를 침공하자 그에 대한 방책을 논의하는 자리에서 신라군을 먼저 공격하여 이긴 다음 당의 군사를 공격하자는 의견을 냈던 인물이다. 결국 신라군이 황산(黃山)에 이르자 계백(階伯)과 더불어 신라군을 막다가 포로가 되었으나, ≪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태종왕 7년조에는 “좌평 충상, 상영과 달솔 백간에게 일길찬의 위를 주어 총관직에 임명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신라의 태종에게 일길찬(一吉湌)의 위(位)를 받고 총관(總管)의 직에 임명되어 신라에서 활동한 사실을 알 수 있다(노중국, 「통일기 신라의 백제고지지배」, ≪한국고대사연구≫ 1, 1988).
註 689
백제의 좌평으로, 죄를 지어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에 귀향 가 있을 때 신라와 당의 군사를 막는 방책을 말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하고 결국 백제는 멸망하였다.
註 690
지금의 전남 장흥군 장흥읍으로 비정된다.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37 전라도 장흥도호부(長興都護府) 고적조(고적조(古跡條))의 수령폐현(遂寧廢縣)조를 살펴보면 “본래 백제의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이었는데, 신라 때에 마읍(馬邑)으로 고치고 보성군에 딸린 현이 되었으며, 고려 때에 지금의 이름으로 고치고 영암군(靈巖郡)에 소속되었다가 뒤에 와서 본부에 소속되었으며, 지금은 부의 치소가 되었다”라고 하였다.
정치>행정>관인>政務諫言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장군 계백이 황산에서 신라와 싸워 4번 이겼으나 마침내 전사하다
장군 계백이 황산에서 신라와 싸워 4번 이겼으나 마침내 전사하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階伯)註 691691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관등은 달솔이다. 의자왕 20년(660) 김유신과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에 맞서 황산벌에서 5천 명의 결사대로 5만 명의 신라군대에 대항하여 싸워 4번 이겼으나 결국 전투에서 패해 전사하였다. 그의 무덤은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에 위치하고 있다(노충희, 「계백」≪인물 한국사≫ 1, 박우사, 1965).닫기으로 하여금 결사대 5천을 지휘하여 황산(黃山)註 692692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의 옛 지명으로 백제 멸망기 계백의 5천 결사대와 5만 명의 신라군이 황산벌전투를 벌인 곳이다.닫기에 나아가 신라 병사와 싸우게 하였다. 그는 4번 싸워서 4번 모두 이겼으나, 군사가 부족하고 힘이 다하여 패전하고 계백은 황산에서 전사하였다.
註 691
백제 말기의 장군으로 관등은 달솔이다. 의자왕 20년(660) 김유신과 소정방이 이끄는 나당연합군에 맞서 황산벌에서 5천 명의 결사대로 5만 명의 신라군대에 대항하여 싸워 4번 이겼으나 결국 전투에서 패해 전사하였다. 그의 무덤은 현재 충청남도 논산시 부적면에 위치하고 있다(노충희, 「계백」≪인물 한국사≫ 1, 박우사, 1965).
註 692
지금의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의 옛 지명으로 백제 멸망기 계백의 5천 결사대와 5만 명의 신라군이 황산벌전투를 벌인 곳이다.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김유신이 겁먹은 소정방을 독려해 백제를 공격하다
김유신이 겁먹은 소정방을 독려해 백제를 공격하다
신라군이 진군하여 [당군과] 합세해 진구(津口)에 이르러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홀연히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빙빙 날아다녔다. 사람을 시켜 그것을 점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래서 소정방은 두려워하여 군사를 이끌고 [싸움을] 그만두려고 하니 유신이 소정방에게 일러 말하기를 “어찌 날아다니는 새의 괴이함으로 인하여 천시(天時)를 어길 수 있으리오. 하늘에 응하고 민심에 순응하여 지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정벌하는데 어떻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 하고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니 새는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긴 채 좌중 앞으로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은 강의 왼쪽으로 나와서 산을 등진 채 진을 치고 백제군과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하였다. 당나라 군사[王師]가 조수를 타고 배와 배가 꼬리를 물고 서로 잇달아서 북을 치고 고함지르며 나아갔다. 소정방은 보병과 기병을 데리고 곧바로 도성으로 쳐들어가 30리[一金]쯤 되는 곳에 머물렀다. 성중에서는 모든 군사를 동원하여 이들을 막았으나 패하여 죽은 자가 만여 명이나 되었다.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정치>군사>전쟁>전투유형
지명 : 진구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의자왕이 후회하나 소용없고, 결국 나라가 망하다
의자왕이 후회하나 소용없고, 결국 나라가 망하다
당나라의 군사들이 이긴 기세를 몰아서 성에 들이 닥치니 왕이 [패배를] 면하지 못함을 알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성충의 말을 듣지 않아 이 지경에 이른 것을 후회한다.” 하고 마침내 태자 융 隆 ; 혹은 효(孝)라고 하나 오류이다註 693693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로 615년에 태어나 682년에 사망하였다. 660년 백제 멸망 시에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으며 664년에 웅진도독부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으로 돌아가 682년 68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의 묘지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북망산(北芒山)에 있다(황청연, 「"부여융묘지"에서 본 당대 중한관계」, ≪백제사의 비교연구≫, 서경문화사, 1993).닫기과 함께 북쪽 지역으로 달아났다. 소정방이 도성을 포위하자 왕의 둘째 아들 태(泰)가 스스로 왕이 되어 무리를 거느리고 굳게 지키니, 태자의 아들 문사(文思)가 왕 태에게 일러 말하기를 “왕이 태자와 같이 성을 나가셨는데 숙부께서 마음대로 왕이 되었으니, 만일 당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면 우리들이 어찌 안전을 보전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좌우를 거느리고 성을 넘어 나갔다. 백성들이 모두 뒤를 따르니, 태는 능히 막을 수 없었다. 소정방이 군사를 시켜 성첩(城堞)에 올라 당나라의 깃발을 세우자, 태는 매우 급하게 되어 이에 성문을 열고 항복하기를 청했다. 이에 왕과 태자 융, 왕자 태, 대신 정복(貞福)과 여러 성이 모두 항복하였다.
註 693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의 아들로 615년에 태어나 682년에 사망하였다. 660년 백제 멸망 시에 포로가 되어 당으로 끌려갔으며 664년에 웅진도독부 도독으로 임명되었다. 중국으로 돌아가 682년 68세의 나이로 죽었으며, 그의 묘지는 중국 허난성(河南省) 낙양(洛陽)의 북망산(北芒山)에 있다(황청연, 「"부여융묘지"에서 본 당대 중한관계」, ≪백제사의 비교연구≫, 서경문화사, 1993).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백제에 5도독부가 설치되고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가 세상을 뜨다
백제에 5도독부가 설치되고 의자왕은 당으로 끌려가 세상을 뜨다
소정방은 왕 의자와 태자 융, 왕자 태, 왕자 연(演) 및 대신 장사 88명과 백성 1만 2천 8백 7인을 당의 수도로 보냈다. 백제에는 원래 5부 37군 200성 76만호가 있었는데 이때 이르러 웅진(熊津)·마한(馬韓)·동명(東明)·금련(金漣)·덕안(德安) 등 5 도독부(都督府)를 나누어 설치하고 우두머리를 뽑아 도독(都督)과 자사(刺史)로 삼아 다스리게 하였다. 낭장 유인원(郎將 劉仁願)에게 도성을 지키도록 명하고 또 좌위랑장 왕문도(左衛郞將 王文度)註 694694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거느린 장군의 하나로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삼년산성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무열왕 7년) .닫기를 웅진도독(熊津都督)으로 삼아 백제의 남은 백성을 다스리게 하였다. 소정방이 포로들을 이끌고 [당나라 황제를] 알현하니 [의자왕을] 꾸짖기만 하고 용서해 주었다. [의자]왕이 병들어 죽자 금자광록대부위위경(金紫光祿大夫衛尉卿)을 추증하고 옛 신하들이 가서 문상하는 것을 허락하였다. 교서를 내려 손호(孫皓)註 695695 중국 삼국시대 오(吳)의 마지막 황제로서 손권의 손자(242~284)이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자 국정이 문란하여 사마씨의 진으로부터 계속적인 공격으로 국력이 쇠퇴하였다. 마침내 280년 진에 항복하고 낙양에 송치되어 귀명후에 봉해졌다.닫기와 진숙보(陳叔寶)註 696696 중국 남조 진의 마지막 황제로 재위 기간은 582~589이다. 선제의 장자로서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정사를 보살피지 않고 연락에 빠져 지냈다. 마침내 589년 진은 수(隋)에 멸망당하고 진숙보는 장안에 송치되어 병사했다.닫기의 무덤 옆에 장사지내도록 하고 더불어 비도 세우게 하였다.
註 694
당이 백제를 공격할 때 당나라 군대를 거느린 장군의 하나로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라의 삼년산성에서 무열왕에게 황제의 조서를 전하다가 갑자기 죽었다(≪삼국사기≫ 권5 신라본기5 무열왕 7년) .
註 695
중국 삼국시대 오(吳)의 마지막 황제로서 손권의 손자(242~284)이다.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키고 조세를 가혹하게 징수하자 국정이 문란하여 사마씨의 진으로부터 계속적인 공격으로 국력이 쇠퇴하였다. 마침내 280년 진에 항복하고 낙양에 송치되어 귀명후에 봉해졌다.
註 696
중국 남조 진의 마지막 황제로 재위 기간은 582~589이다. 선제의 장자로서 선제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정사를 보살피지 않고 연락에 빠져 지냈다. 마침내 589년 진은 수(隋)에 멸망당하고 진숙보는 장안에 송치되어 병사했다.
정치>군사>전쟁>전후처리
이름 : 소정방,의자,유인원,왕문도,소정방,손호,진숙보
국명 : 백제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 평양성을 치게 했지만 실패하다(662년 (음))
당 황제가 소정방을 보내 고구려 평양성을 치게 했지만 실패하다 ( 662년 (음) )
7년 壬戌에 당나라 황제는 명을 내려 소정방을 요동도행군대총관(遼東道行軍大摠管)으로 삼았다가 바로 평양도(平壤道)로 고쳤다. [소정방은] 패강(浿江)에서 고구려 군사를 격파하고 마읍산(馬邑山)註 697697 평양 인근에 위치한 산이다.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략할 때,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자 평양성을 포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20년 8월). 평양의 서쪽 근교에 있다는 것은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닫기을 탈취하여 군영으로 삼고, 이어 평양성(平壤城)을 포위하였으나 큰 눈이 내려 포위를 풀고 돌아갔다. [당 황제는 소정방을] 양주안집대사(凉州安集大使)로 삼아 토번(吐蕃)을 평정하였다. 건봉(乾封) 2년(667) [소정방이] 죽자 당 황제는 매우 애도해 하며 좌효기대장군유주도독(左驍騎大將軍幽州都督)을 추증하고 시호를 장(莊)이라 하였다 이상은 唐史의 내용이다.
註 697
평양 인근에 위치한 산이다. 당의 소정방이 고구려를 공략할 때, 패강에서 고구려군을 파하고 마읍산을 빼앗자 평양성을 포위할 수 있었다고 한다(≪삼국사기≫ 권22 고구려본기10 보장왕 20년 8월). 평양의 서쪽 근교에 있다는 것은 추정되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정치>군사>전쟁>전쟁결과
이름 : 소정방
卷 第一 >제1 기이(紀異第一) >태종춘추공(太宗春秋公) >문무왕이 웅진도독 부여융과 회맹하다(665년 8월 (음))
문무왕이 웅진도독 부여융과 회맹하다 ( 665년 08월(음) )
신라별기(新羅別記)에 이르기를, “문호왕 즉위 5년 을축(乙丑) 가을 8월 경자(庚子)에 왕은 친히 대병을 이끌고 웅진성(熊津城)에 가서 가왕(假王) 부여융(扶餘隆)과 만나 단을 만들고 흰 말을 잡아 맹약을 하였다. 먼저 천신과 산천의 신령에게 제사를 지낸 연후에 말의 피를 입가에 바르고 글을 지어 맹세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백제의 선왕이 반역과 순응에 어두워서 함부로 이웃 나라와 좋게 지내지 않고 인친(姻親)과 화목치 않으며 고구려와 결탁하고 또 왜국과 교통하여 함께 잔인하고 포악한 일을 하였으며, 신라를 침략하여 [인명을] 살상하고 읍락을 파괴하고 도성을 무너뜨려 항상 편안할 날이 없었다. 천자는 한사람이라도 제 살 곳 잃음을 민망히 여기고 백성이 해 입는 것을 애석하게 여겨 누차 명을 내려 사신을 보내 사이좋게 지내기를 타일렀는데도 험함을 구실로 삼고 멀리 있음을 믿어 매번 하늘의 도리[天經]를 거슬렀다. 이에 황제가 크게 노해 삼가 정벌을 행하니 깃발이 향하는 곳에서 한번 싸워 크게 평정하였다. 마땅히 궁택(宮宅)을 무너뜨려 연못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삼고 폐해의 근원을 뽑아 버려 후손에게 교훈을 남길 것이나, 복종하는 자는 회유하고 배반한 자를 정벌하는 것이 선왕의 법도이며, 망한 것은 흥하게 하고 끊어진 것은 잇게 함이 옛날 성인들의 일반적 규범이다. 일은 반드시 옛 것을 본받아야 함이 여러 이전의 책에 전해옴으로써 전백제왕 사가정경 부여융(前百濟王 司稼正卿 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삼아 그 나라의 제사를 받들게 하고 산천을 보전케 하니 신라에 의지하여 길이 동반국[與國]이 되어 각기 묵은 감정을 제거하고 우호를 맺어 화친하라. 삼가 황제의 명을 받들어 영원토록 번복(藩服)이 되어라. 이에 사자 우위위장군 노성현공 유인원(右威衛將軍 魯城縣公 劉仁願)을 보내어 친히 와서 권유하여 황제의 결의를 자세히 선포한다. 혼인으로써 이를 약속하고 맹세로써 이를 펼치며 희생을 잡아 피를 바르고 함께 시작과 끝을 도탑게 할 것이며, 재앙을 나누고 근심을 구할 것이며, 은혜를 형제처럼 할 것이다. 삼가 윤언(綸言)을 받들어 감히 실추치 말 것이며, 이미 맹세를 한 다음에는 함께 오랫동안 보존토록 할 것이다. 만약 어기거나 배반하여 그 덕을 갈라 군사를 일으키고 무리를 움직여 변경을 침범하면 신명이 이것을 보고 백가지 재앙을 바로 내리시어 자손은 기르지 못하고 사직은 잇지 못하고 제사는 끊어져 남는 것이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금서철계(金書鐵契)註 698698 중국 고대에 제왕이 신하에게 세습적으로 면죄권을 누릴 수 있도록 발급하던 증서로서 금서철권(金書鐵券)·단서철권(丹書鐵券)·단서철계(丹書鐵契) 또는 간단히 철권(鐵券)이라고도 하였다.닫기를 만들어 [맹문을] 종묘註 699699 선왕(先王)의 영(靈)을 제향하는 종실(宗室)의 가묘(家廟)로, 신라에서는 대체로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국의 예제를 받아들여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채미하,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2008).닫기에 간직해두니 자손만대 감히 어기지 말 것이며, 신은 이를 들으시고 제물을 향유하시고 복을 주시옵소서.” 맹세가 끝난 다음 폐백은 단의 북쪽 땅[壬地]에 묻고 맹세한 글은 대묘(大廟)에 간직하여 두었다. 맹세한 글은 대방도독 유인궤(帶方都督 劉仁軌)註 700700 중국 당(唐)의 장수, 자는 정칙(正則)이다. 당 태종(太宗) 때에 급사중(給事中)이 되었으며, 고종(高宗) 때에 백제의 반란을 평정하고 대방주(帶方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었으며, 다시 고구려를 평정한 공으로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었다(노중국, ≪백제 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닫기가 지은 것이다 위의 당사(唐史)를 살펴보면 정방이 의자왕과 태자 융 등을 [당의] 수도로 보냈다고 하는데, 지금 부여왕 융이 회맹했다고 일컫는 것은 바로 당 황제가 융을 용서하여 백제로 보내 웅진도독으로 삼은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맹문에서 명확히 말하니 이것으로써 증명이 된다.” 하였다.
註 698
중국 고대에 제왕이 신하에게 세습적으로 면죄권을 누릴 수 있도록 발급하던 증서로서 금서철권(金書鐵券)·단서철권(丹書鐵券)·단서철계(丹書鐵契) 또는 간단히 철권(鐵券)이라고도 하였다.
註 699
선왕(先王)의 영(靈)을 제향하는 종실(宗室)의 가묘(家廟)로, 신라에서는 대체로 문무왕(文武王) 때에 중국의 예제를 받아들여 성립된 것으로 생각된다(채미하, ≪신라 국가제사와 왕권≫, 혜안, 2008).
註 700
중국 당(唐)의 장수, 자는 정칙(正則)이다. 당 태종(太宗) 때에 급사중(給事中)이 되었으며, 고종(高宗) 때에 백제의 반란을 평정하고 대방주(帶方州) 자사(刺史)로 임명되었으며, 다시 고구려를 평정한 공으로서, 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에 임명되었다(노중국, ≪백제 부흥운동사≫, 일조각, 2003).
정치>외교>문서>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