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동차 사고가 난 후
송 희 제
"띠 리링 띵 띠 리링 띵! 엄마! 어디세요? 뭐 하고 계세요?"
"응? 나 지금 혼자 스파텔 호텔 옆에서 맨발 걷는 중인데, 왜?~"
"알았어요."
오후 4시경 장남이 나의 행방만 묻고는 급하게 끊어버렸다. 앞 동에 살아 가끔 보는데 손자 보는 날도 아닌 월요일이라 무슨 일인지 바로 끊은 게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장남은 성격이 간단명료해서 긴 이야길 싫어한다. 그래도 궁금해 신경이 쓰여 내가 다시 전화해 왜 전화했나 물었다. 그냥 했다고만 하는데 뭔가 예감이 찜찜했다.
"이 시간이 너 한참 바삐 근무하는 시간에 왜 어미한테 행방만 묻고 끊는 거야? 뭔 일 있어?"
"됐다고요. 별일 아녜요. 끊어요!"
하며 계속 다급하게 끊어버렸다. 가끔 간단한 전화로 용건만 하는 터라 그런가 보다 했다. 스파텔 호텔 족욕장에서 온수로 족욕을 잠시 하고는 어둡기 전에 귀가했다.
남편과 나는 그날 찐 새벽 3시에 짧은 외국 여행에서 돌아왔다. 난 아침잠을 푹 자야 하루를 잘 버틴다. 새벽에 귀가해 늦잠을 잔 후 깨어보니 남편은 서재에 앉아 컴퓨터를 보고 있었다. 잠을 왜 더 안 자고 깨었냐니까 일찍 깨져서 그냥 그동안 못 본 컴퓨터를 보고 있다고 했다. 며칠간 집을 비운 터라 그날 우리 점심은 성당 근처 가서 코다리찜을 편하게 들었다. 식당 주인은 한참 만에 왔다고 반기며 따끈하고 구수한 누룽지탕까지 후식으로 더 내놓았다. 모처럼 우리 한식을 먹으니, 뱃속이 개운하고 편안했다. 난 그동안 못한 맨발 황톳길 걷기로 했고, 남편은 여러 날 못 가본 우리 시골 농장을 둘러보러 간다고 갔다.
보통 시골 다녀오는 시간에 남편이 귀가했다. 나도 어둡기 전에 집에 와 있던 터라 보통 때와 같이 그가 시골서 온 줄 알았다. 난 그러려니 하고 뒤돌아선 채 주방에서
"늦었네요. 어두워 별 할 일도 없는데 왜 그리 늦게 다녀요?"
"우리 차 폐차해야 해."
"여러 날 차도 안 타고 지하 주차장에만 있었는데 뭐 하러 세차를 해?"
"아니 세차가 아니고 우리 차를 폐차! 차를 못 쓰게 되어 없애야 한다고! 아까 시골에 가다 자동차 사고 나서 지금까지 병원 응급실서 검사하고 오는 중이야. 그런데 큰 이상은 없대서 그냥 지금 온 거야."
하며 남편은 내가 놀랄까 봐 눈치를 보며 떠듬떠듬 말했다.
난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니 남편 얼굴이 핼쑥하다. 어떻게 된 사고냐니까 자기도 전혀 모르겠다 한다. 아무래도 그날 조각 잠만 잠깐 자고 점심을 포식한 직후라 혼자 가다 깜빡 존 것 같다. 운전할 땐 늘 침착히 안전 위주로 하는데 50여 년 운전 경력에 처음 겪는 일이다. 사고 내용은 천만다행으로 피해자 없고 에어백이 앞과 좌우 3개 다 작동했단다. 아마 졸다 우측 가로등을 들이받은 것 같다고 한다. 가로등이 휘어져 그 바람에 차는 부서졌지만, 에어백 3개와 안전띠 덕에 앞가슴만 부딪혀 통증만 좀 있다고 했다.
아! 얼마나 천만다행인가! 천운인 것 같았다. 피해자 없고 본인도 크게 안 다친 게 얼마나 우릴 도운 건가! 자동차야 많이 망가져 2년밖에 안 된 수입차라 아깝지만 인명 피해가 없으니 참으로 다행이었다. 감사한 마음에 남편의 가슴을 보듬으며 손을 맞잡고 거실 벽에 걸린 예수님 십자고상 앞에 섰다. 성호경을 긋고는 '주님 감사합니다. 참으로 감사합니다. '하며 우리는 동시에 큰절을 올렸다.
이튿날 그이의 얼굴을 보니 핼쑥하고 창백하다. 생각해 보니 정말 아찔할 일이다. 사고가 나서 정신을 차려 가족의 전화번호를 떠올려 더 놀랄 나에게는 경황없어 않고
우선 사건 수습으로 장남에게만 연락했던 모양이다. 그래서 아들은 어미도 그 옆에 탔나 궁금하고 걱정돼서 내게 행방만 묻고는 사고 현장에 급히 갔던 것이다. 어미의 안전을 묻고 아버지를 친구 병원 응급실에 모시고 가서 여러 검사를 바로 한 아들이 고맙고 대견하였다. 남편에게 아무 일도 말고 며칠간 푹 쉬라고만 했다. 그 후 뒤처리도 아들이 잘할 테니 심신의 안정만 취하게 하였다.
생각해 보니 정말 아찔할 일이다. 그날 잘못되었으면 어쩔 뻔했을까? 찰나의 방심과 실수가 사람의 운명을 뒤바꿀 수가 있다. 더구나 나는 남편 없이는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다. 남편 또한 내 손길 없이는 고통을 잘 견디지 못한다. 아직은 어느 쪽이든 무슨 일이 생겨 혼자 남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내가 몇 년 전 갑자기 큰 병 수술을 할 때도 서로 내심으론 당황하였으나 신앙과 기도의 힘으로 버텼다.
남편이 50대에 들어서는 날 아침에 내 손을 맞잡고 새해맞이 동산에 올라 일출 때 한 말이 생각난다.
"새해 첫날인 오늘부터 난 덤으로 사는 인생이야. 아버님은 내 나이 때 갑자기 사고로 돌아가셨거든! 내가 아버님 돌아가신 연세를 넘어섰으니, 지금부터는 덤으로 사는 거지."
그 말을 듣고는 반백을 넘은 한참 나이에 보너스 같은 덤이란 말에 더 값지고 소중하게 잘 살아가기를 서로 다짐했다.
자! 지금부터 우리 부부는 또 제3의 인생으로 남은 후반전을 갑절 덤으로 살아갈 것이다. 언젠가 누구든 홀로 남아 떠나야 하는 홀로서기도 가치가 있고 의미 있게 준비하여야겠다. 지금의 감사가 식지 않는 삶의 열정으로 그 감사를 되갚아 가는 노력을 하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