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저는 서울에와서 처음만난 공동체는 한국경제신문사에서 운영하는 하이텔의 동아리였는데
그 동아리는 천주교친목단체이고 예수회 마리아회 성바로회의 수사.수녀 그리고 신부님과 청소년들의
친목모임이었다. 온라인모임이 주였지만 일년에 몇차례 오프라인 모임도 가졌다
그곳에서 만난 한 젊은 수사님의 이야기를 할려고 한다
마리아수도회나 성바오로수도회는 분명히 그들이 기거하는 집이 있었다
그곳에 찾아가서 해준 밥도 먹기도 하고 각종 행사도 그곳에서 했지만
예수회는 서강대학시설을 이용하는 것 뿐이었다
서강대학 안쪽에 가보면 큰 건물이 있는데요 그 건물안에는 미사를 드릴수있는 경당이 있고
또 모임을 나눌수 있는 여러군데의 교실같은것이 있었는데 그중에는 온돌방 같은곳도 있었다
그곳 수사님을 만났을때에 그는 그곳학교철학과를 졸업한것으로 알고있었고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하고있었지만 그의거처는 분명히 일반 독신자들이 살법한 주택가 한쪽이었다
여러분들이 같이 지낸다고 한다.
그들은 무슨일을 하시든지간에 그의 손에 쥐어지는 경제력은 가장 낮은 수준이었다
간단한 의식주를 해결하고 담배피울돈과 토큰을 살돈이라고 한다
그는 어느날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들은 몇일간 훈련을 삼아서 집을 나서서 세상을 돌아다녔다고 한다
그에게 주어진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세상에 나가서 세상사람들의 도움을 받아서
몇일 지내는 일이라고 한다. 그는 다니면서 최소한도의 먹을것을 구했지만 정작 어려운것은
하루밤을 거쳐가는 일이었다. 돈을 내면 한밤 지낼수가 있는 곳은 많지만
그런 비용부담없이 지내야 했기에 어느 개신교회안에서 불편한 하루를 보내기도 했다고 한다
그곳에 계시는 어떤신부님은 무척이나 바쁘시다고 한다
여러곳에 초청되어서 미사도 드리고 그리고 피정지도를 한다고 했다
그러면 강사료등이 바로 입금된다고 하지만 그 전부는 다 수도회로 들어가고
그에게 생활비만 지급될 뿐이라고 한다.
그 수사님은 세월이 흘러서 미국에서 사제가 되신후에 한국으로 올라왔다
예수회가 운영하는 서강대학은 일반대학으로 사제의 양성코스인 신학과가 개설되지
않았다고 한다.
우리가 그 단체에서 살아가는동안 여러가지 활동을 하였는데
그중하나가 1박2일 서울을 떠나서 경기도 어느시골성당에서 하루머물다가 춘천을 다녀오는 일이었다
봉고차량은 한대는 예수회수사님이 또다른 한대는마리아회수사님 그분의 수도회소속차량을
이용했다. 경기도 어느시골 본당에서 사제관이 아닌 강당을 이용해서 그곳에서 자리에 앉아서
졸다가 애기하다가 하루밤을 지냈다
그리고 춘천을 돌아와서 서울로 향했다 그냥오기가 뭐해서 경춘국도에 있는 어느잔디밭에서
간단한 야유회를 즐겼다. 우리는 춘천에서 소양강배타는곳까지는 갔었지만
그근처에서 식사만 하고 배를 타지않았다
일요일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약간 고민이 생겼다 주일미사를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알게된것이 늦은시각에 연희동성당에 미사가 있다고 했다
거기 가 미사를 참례했다 오월의 노래를 부르는기억이 난다 민중가요였다
그리고 회원의 친적이 보좌신부로계셨다. 그신부님의 도움으로 그날 성당에서 차려진
벼룩시장잔치음싱릏 배불리 먹었다. 그이후 그성당에서 하루 피정을 가지기도 하였다
그 신부님은 제2보좌신부이고 새신부였는데 지금은 중견신부를 하시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신앙모임과 친목이 구분되지 않는 활동을 통해서
우리는 가까워져 나갔던 것이다.
한글성경이 있었지만 이들을 파일로 만든것은 없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왜관의 베네딕도수도회에서 서울교구 어느신부님을 통해서
성경전권을 다 입력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우리는 성경을 나누워서 입력해서 전달하기도 하였다
그때 저는 분량이 적은 여호수와기를 입력했지만 젊은친구는 분량이 많은 창세기를 입력하기도 했다
다를 알게모르게 우리의 신앙은 점차 성장해 갔을것이라 여겨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