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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세미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3,4장 강독(2차시)
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프랑스 혁명과 유물론
2025.03.20.(목)
신우진
3장.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두와 권력 장악
- 1848년 대통령 선거에서 루이 보나파르트의 당선
- 의회의 권력 약화와 루이 보나파르트의 대중적 인기 상승
1. 계급투쟁과 정치적 연합
- 프랑스 혁명 이후 형성된 계급들(부르주아지, 소농, 프롤레타리아트, 자코뱅 혁명가들)의 관계를 분석하며, 각 계급이 정치적 힘을 어떻게 행사했는지 설명한다.
- 1848년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트는 반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부르주아지와 소농 연합의 배신으로 탄압 당했다.
2. 국가 기구와 보나파르트주의
- 루이 보나파르트는 계급들 사이에서 독자적인 권력을 구축하기 위해 국가 관료제를 활용했다.
- 군대, 경찰, 행정기구 등의 국가기구가 강력한 중앙집권적 권력으로 작동하며, 특정 계급이 아닌 국가 자체의 이익을 위해 움직이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 결국 그는 프롤레타리아트뿐만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민주적 기회를 제한하며 독재로 나아갔다.
3. 소농 계급과 보나파르트의 권력
-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가 소농 계급의 지지를 받았기 때문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고 분석한다.
- 소농들은 개별적으로 분산된 계급이었으며, 중앙집권적 권력을 통해 자신들의 이익이 보호될 것이라 믿었다.
- 그러나 보나파르트 정권은 실제로는 금융 자본과 대부르주아지의 이익을 대변했다.
4. 쿠데타의 의미
- 1851년의 쿠데타는 단순한 정치적 사건이 아니라, 사회 계급 간 투쟁의 결과였다.
-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루이 보나파르트를 지지했지만, 결국 그는 독재자로 군림했다.
- 이 과정에서 "국가가 독립적인 힘을 가진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상 특정 계급의 지배 도구"라는 점이 드러났다.
정리하면, 맑스는 보나파르트주의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실패와 부르주아지 내부 모순에서 발생한 독재 형태로 분석했다. 또한 국가 권력이 특정 계급의 지배를 반영하면서도 독립적인 것처럼 기능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이를 통해 이후 사회주의 운동과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방향성을 제시하는 중요한 이론적 토대를 마련했다.
5. 질서당과 산악당의 충돌
- 1849년 입법국민의회 개회 직후, 부르주아 계급(질서당)은 프롤레타리아를 제거한 것처럼 민주파 쁘띠부르주아(산악당)도 제거하려 하였다.
- 산악당을 의회에서 거리로 유인해 의회권력을 스스로 포기하게 하는 전략이 진행되었다.
6. 로마 포격과 헌법 위반
- 프랑스 군대의 로마 포격은 헌법 위반(제V조, 제54조)으로, 이를 근거로 산악당 지도자 - 르드뤼롤랭이 보나파르트와 장관들에 대한 탄핵안을 제출하였다.
- 산악당은 무력 사용까지 고려했지만, 국회가 탄핵안을 부결시키자 6월 12일 의회를 떠남.
7. 6월 13일 사건과 산악당의 몰락
- 산악당 지지자들은 비무장 상태에서 군대와 대치하다 해산됨.
- 일부는 해외로 도피, 일부는 법적 처벌을 받음.
- 민주파 국민방위군 해체 및 계엄령 선포로 쁘띠부르주아 세력이 약화됨.
8. 산악당의 내부 분열과 무력함
- 의원들은 행동을 주저했고, 신문들도 대다수가 산악당을 외면함.
- 군대와 프롤레타리아의 지지를 얻지 못했으며, 자신들의 무기력을 인정하지 않음.
- 여리고 성벽 붕괴의 나팔소리에 기대했지만 현실은 달랐음.
9. 질서당의 승리와 헌법의 약화
- 산악당 제거 후, 질서당은 헌법을 의회 다수파의 결정에 종속시킴.
- 의회공화국(부르주아가 의회를 통해 지배하는 체제) 강화.
- 그러나 의회의 면책특권 약화로 인해 의회 자체의 힘이 약해짐.
10. 아이러니한 역사적 반전
- 로마 공격을 주도했던 우디노 장군이 1851년 보나파르트 쿠데타에 맞서 헌법 수호자로 등장.
- 산악당 탄압에 앞장섰던 비예가 이후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돕게 됨.
정리하면, 6월 13일 사건은 산악당의 몰락과 질서당의 승리로 끝났지만, 결과적으로 의회의 권위가 손상되고 보나파르트의 권력이 강화되는 계기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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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6월 13일 사건의 의미
- 산악당은 보나파르트를 탄핵하려 했으나 실패.
- 이는 보나파르트의 직접적 승리이자 민주파에 대한 개인적 승리.
- 질서당(보수파)이 승리했으며, 보나파르트는 이를 자신의 이득으로 활용.
2. 보나파르트의 정치적 전략
- 대통령이 어쩔 수 없이 나섰다는 태도를 취하며 반대파의 비방을 불만.
- 로마 원정(1849.6.13) 후 교황을 부활시켜 성직자들의 지지를 얻음.
- 교황 피우스 9세가 프랑스 왕관을 씌워줄 것이라 기대.
3. 질서당과 군대의 역할
- 무혈의 6월 13일 사건을 과장하여 군대를 찬양.
- 민주 성향의 군대는 파리 밖으로 전출되거나 알제리로 추방.
- 국민방위군의 역할이 축소되고 정규군의 부속물로 전락.
4. 국민방위군의 몰락
- 1830년: 왕정 전복에 기여 → 1848년: 소극적 → 6월 13일: 해산의 시작.
- 민주 성향의 국민방위군이 해산되며, 부르주아지는 자신들의 방어수단을 잃음.
- 1851년 12월 2일, 보나파르트가 국민방위군 해산 명령을 내리며 공식 종료.
5. 정치적 혼란과 권력 공백
- 질서당이 혁명과 공화국을 탄압하며 권력 장악.
- 의회는 휴회(8~10월)하며 각 세력(정통왕조파, 오를레앙파, 보나파르트)이 음모를 꾸밈.
- 보나파르트가 유일한 공화국 지도자로 남게 됨.
정리하면, 공화국의 실질적 형태는 의회의 휴회를 영구화하고, "자유, 평등, 박애"를 "보병, 기병, 포병"으로 대체하는 방향으로 굳어짐.
즉, 보나파르트의 권력 강화와 군사 독재로의 길이 열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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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장. 계급투쟁과 공화정의 붕괴
- 입법의회와 보나파르트 간의 갈등
- 부르주아 계급과 노동자 계급의 분열이 가져온 정치적 혼란
1. 바로-팔루 내각 해산
- 1849년 11월 1일, 루이 보나파르트가 바로-팔루 내각을 해산하고 새로운 내각을 구성.
- 기존 내각(질서당)은 공화주의 의회 해산, 로마 원정 실행, 민주파 탄압 등을 위해 필요했으나, 보나파르트는 더 이상 질서당에 의존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
- 내각 해산의 구실: 공화국 대통령이 의회와 동등한 위치에 있다는 형식적 예의를 무시했다는 점.
2. 내각 해산의 영향
- 질서당(정통왕조파+오를레앙파)은 행정부를 통한 권력 지렛대를 상실하고 정치적 영향력 약화.
- 프랑스의 강력한 중앙집권적 국가 구조에서 행정부 장악이 필수적인데, 의회가 내각을 통제할 힘을 상실하면서 영향력 축소.
- 부르주아지는 국가기구를 유지하는 데 이해관계를 두고 있으며, 이를 통해 경제적·정치적 이득을 얻음.
3. 도뿔 내각 출범 (새 내각)
- 보나파르트는 수상직 자체를 폐지하고 도뿔 내각을 출범.
- 새 내각에는 의원 출신이 거의 없었으며, 재무장관 풀드(금융귀족) 중심으로 증권시장과 연계된 정권 운영.
- 경찰권 장악(까를리에를 파리 경찰국장 임명).
4. 보나파르트의 정치적 입지
- 보나파르트는 독자적 행보를 시도하지만, 결국 의회에 굴복하는 태도를 보이며 권력 기반이 불안정.
- 왕위 찬탈 야망을 숨기지 않지만, 부르주아지와 정치권의 냉소적 반응을 얻음.
- 결과적으로 이 시기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이 강력해지고, 보나파르트는 조롱받는 존재로 전락.
5. 입법 활동
- 주세(酒稅) 부활: 과거의 부르주아적 조세제도를 강화.
- 교육법 개정: 종교적 영향력(예수회)이 교육을 장악하도록 허용하여 대중을 통제.
. 결과: 음주를 어렵게 만들고, 종교 교육을 강화해 조세제도를 수용하도록 유도.
정리하면, 보나파르트는 정치적으로 독립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의회와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은 더욱 강해짐.
부르주아지는 국가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행정부 장악과 여론 통제를 강화.
교육과 세금 정책을 통해 사회적 통제를 유지하려는 시도가 두드러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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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왕위 계승 논쟁
- 오를레앙파와 정통왕조파가 왕위 계승 문제에서 대립.
- 그러나 지배를 확고히 하기 위해 두 시대의 억압수단을 통합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인식.
2. 농민과 도시의 불만
- 농민들은 저곡가, 증가하는 조세부담, 저당부채로 인해 불만이 고조됨.
- 정부는 감시 체제를 강화하고 반동적인 정책을 시행.
3. 질서당의 태도
- 의회와 신문에서 단순한 구호("사회주의!")만 반복하며 모든 문제를 사회주의로 몰아감.
- 부르주아조차도 기존의 자유주의와 개혁을 사회주의로 간주함.
4. 부르주아 계급의 딜레마
- 자신들이 만든 제도가 이제는 부메랑이 되어 부르주아 계급을 위협.
- 사회적 평온을 위해 부르주아 의회가 침묵해야 하며, 사회권력을 유지하려면 정치권력을 포기해야 하는 모순적 상황 발생.
5. 의회의 무능과 보나파르트의 행보
- 의회는 탄압과 반동 외에는 무기력하여 중요한 사안(예: 철도 부설)도 해결하지 못함.
- 보나파르트는 질서당보다 더 강경한 정책을 펼치면서도 동시에 대중의 인기를 얻기 위해 어리석은 정책을 시도.
6. 다모클레스의 칼 비유
- 부르주아 계급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군주제를 희생시켜야 하는 상황.
- 자신들을 보호했던 검(권력)이 이제는 그들의 머리 위에 위협이 되어 존재.
7. 보나파르트의 인기 영합 정책
- 하사관의 봉급 인상(일당 4수우) 및 노동자를 위한 신용 대출은행 제안.
- 기부와 대부를 통해 대중을 유혹하려 했으나 단순한 포퓰리즘에 불과함.
8. 쿠데타 위험과 의회의 경계
- 보나파르트는 의회의 희생을 감수하며 대중의 인기를 얻으려 함.
- 빚에 쪼들린 모험가로서 쿠데타를 감행할 가능성이 커짐.
- 국회는 이에 불안해하며 계속 술렁임.
9. 1850년 3월 10일 보궐선거의 충격
- 사회민주당 후보들이 대거 당선, 특히 1848년 6월 봉기 참가자인 드플로트까지 선출됨.
- 프롤레타리아와 동맹한 쁘띠부르주아가 반격을 개시함.
- 군대마저 보나파르트 각료 대신 6월 반란자에게 표를 던지는 등 반란의 조짐이 보임.
10. 보나파르트의 굴복과 질서당의 무능
- 혁명의 위기 속에서 보나파르트는 다시 질서당에 의존, 용서를 빌고 협력 제안.
- "성주"라 불리던 오를레앙파·정통왕조파 지도자들에게 정부를 맡아줄 것을 간청.
- 질서당은 기회를 활용하지 못하고 보나파르트의 이전 내각을 그대로 유지.
11. 질서당의 실책과 보나파르트의 모욕
- 보나파르트에게 실질적 권력 장악 기회를 주는 대신, 단순한 모욕에 그침.
- 검사 출신 바로슈를 내각에 포함시켜 보나파르트를 압박.
- 바로슈는 과거 5월 15일·6월 13일 사건에서 혁명가들을 탄압한 인물.
12. "성주"의 반혁명적 음모
- 정통왕조파·오를레앙파 정치인들이 보통선거제 폐지를 추진.
-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반혁명적 계획을 입법의회에서 기획.
- ‘성주’라는 별칭은 빅토르 위고의 희곡에서 유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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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나파르트의 정치적 계산과 질서당의 대응
- 보나파르트는 하사관 급여 인상과 신용 대출은행 제안 등을 통해 대중의 지지를 얻으려 했으나, 이는 일종의 포퓰리즘적 접근이었다.
- 1850년 3월 10일 보궐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승리하자 보나파르트는 다시 의회(질서당)와 손을 잡으며 정치적 생존을 도모했다.
- 그러나 질서당은 보나파르트를 제어할 기회를 활용하지 못했고, 오히려 그를 용서하고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다.
2. 새 선거법(1850년 5월 31일)의 도입과 그 영향
- 5월 8일, 포쉐가 제출한 새 선거법은 보통선거권을 폐지하고, 3년 이상 거주 요건을 추가하여 노동자 계층의 정치 참여를 제한했다.
- 언론·출판법 개정으로 혁명적 신문들을 탄압하여 반대 세력을 약화시켰다.
3. 민주파의 실책과 혁명적 기세 약화
- 사회민주당은 선거 승리를 결정적인 정치적 반격으로 활용하지 못하고, 내부 논쟁과 선거게임에 집중하며 대중의 혁명적 열기를 소진시켰다.
- 노동자 계급은 1848년 6월 혁명의 패배 이후 점차 정치적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부르주아지의 반격을 효과적으로 막지 못했다.
4. 1850년 5월 31일 선거법의 정치적 의미
- 새로운 선거법은 프롤레타리아의 정치 참여를 봉쇄하여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지배를 강화했다.
- 또한, 대통령 당선 요건을 사실상 강화하여 보나파르트의 재선 가능성을 어렵게 만들고, 의회가 대통령을 결정하도록 유도했다.
- 이는 계급투쟁의 필연적 산물로, 부르주아지가 인민의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여 자신의 권력을 확고히 한 쿠데타적 조치였다.
정리하면, 1850년 5월 31일 선거법 개정은 부르주아지가 혁명의 위협을 무력화하고 자신들의 지배력을 강화하는 결정적인 전환점이었다. 사회민주당의 무기력한 대응과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정치적 퇴조 속에서, 부르주아 세력은 선거권 제한과 언론 탄압을 통해 혁명적 세력을 약화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법 개정은 결국 1851년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로 이어지는 정치적 긴장과 불안을 더욱 심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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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스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3장과 4장의 총합적인 결론
맑스는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3장과 4장에서 1848년 혁명 이후 프랑스 정치에서 발생한 변화를 분석한다. 그는 프랑스 혁명 이후의 사회 계급 간 권력 투쟁을 중점적으로 다루며, 특히 소부르주아적 민주주의자들과 보수적 부르주아 계급, 그리고 루이 보나파르트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어떻게 역할을 했는지를 설명한다.
1. 사회민주당과 소부르주아 민주주의의 한계
- 3월과 4월 보궐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성과를 거두었지만, 그들은 이를 혁명적으로 활용하지 못했다.
- 대신 내부 갈등과 주저함에 빠지면서 자신들의 승리를 무력화했고, 대중의 혁명적 기세를 떨어뜨렸다.
- 5월 보궐선거에서 외젠 쉬에게 표를 몰아줌으로써 3월 선거에서 얻었던 승리를 스스로 희석시켰다.
- 1848년 6월 혁명 이후 프롤레타리아는 투쟁 의지를 점차 상실하며, 순간적인 안락과 위안을 좇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노동 계급의 혁명적 이해관계가 희미해졌고, 궁극적으로 정치 권력을 쟁취할 기회를 잃었다.
2. 5월 31일 선거법과 의회의 역할
- 질서당은 프롤레타리아와 사회민주당의 약점을 이용하여 5월 31일 선거법을 도입했다.
- 이 법은 선거인 명부에서 3년 이상 거주한 사람만 투표할 수 있도록 규정하여, 도시 노동자들의 정치 참여를 원천적으로 차단했다.
- 결과적으로 선거권자의 수가 대폭 줄어들었고, 부르주아지 계급이 정치 권력을 사실상 독점하는 계기가 되었다.
- 의회는 계속해서 공세적 반혁명을 추진했으며, 군대는 이러한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 그러나 역설적으로 보나파르트가 정치의 중심으로 부상하는 계기가 마련되었고, 결국 부르주아 계급도 안정적으로 정권을 유지할 수 없는 모순에 빠졌다.
총합적 결론
- 3장과 4장에서 맑스는 1848년 혁명 이후 사회적 계급 간의 갈등과 권력 쟁탈전을 분석하며, 부르주아 계급이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어떻게 점점 더 반혁명적인 법안을 도입했는지 설명한다.
- 사회민주당과 소부르주아 계급은 초기의 혁명적 기세를 유지하지 못하고, 우유부단한 태도로 인해 기회를 상실했으며, 결과적으로 프롤레타리아 계급 역시 정치적 영향력을 상실하게 되었다.
- 1850년 5월 31일의 선거법 개정은 이러한 반혁명적 흐름을 공고히 하면서, 궁극적으로 의회와 부르주아 세력이 루이 보나파르트의 쿠데타를 가능하게 만드는 길을 열어줬다.
- 이 과정에서 루이 보나파르트는 부르주아지와 민주당을 서로 이간질하며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고, 궁극적으로 1851년 12월 2일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장악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총평: 사회계급 간의 투쟁과 반혁명의 역설
- 맑스는 프랑스의 1848년 혁명 이후 사회 계급 간의 갈등을 철저히 분석하면서, 민주파와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전략적 실책을 강조한다. 그는 민주주의를 주장했던 세력들이 결정적 순간에 타협과 혼란 속에서 기회를 잃어버렸고, 부르주아지가 반동적인 방식으로 권력을 유지하는 결과를 초래했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러한 억압이 결국 루이 보나파르트의 개인 독재를 초래하는 역설을 보여주면서, 혁명과 반혁명이 역동적으로 교차하는 역사의 아이러니를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3장과 4장은 프롤레타리아와 소부르주아가 혁명적 동력을 잃고 기회를 상실하는 과정과, 부르주아지가 스스로의 불안으로 인해 보나파르트에게 점점 더 많은 권력을 넘기면서 결국 역으로 몰락의 길을 자초하는 과정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