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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째날(8월13일) 중국 글자는 왜 여러 가지로 읽히지요!
천수 화진대주점에서 아침 6시에 기상하여 7시에 아침을 먹고, 8시5분에 출발하여 9시50분에 맥적산 입구에 도착 전동차를 타고 5분정도 올라간 후 전동차에서 내려 계단을 따라 맥적산석굴 관람을 시작하였다. 천수라는 지역의 지명 유래는 한무제때 어느날 현재의 천수시 남쪽에서 붉은 빛이 뿜어져 나오는 동시에 천둥번개가 치고 울리며 땅이 갈라졌는데 이 갈라진 틈으로 하늘에서 물이 내려 호수가 되었는데 이 호수는 언제나 일정한 수위가 유지되었고 물맛 또한 좋았다고 한다. 그래서 이 지역 사람들은 이것을 하늘의 강과 이 호수가 연결되었다고 믿어 천수정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후 무제는 호반에 성을 쌓아 천수군이라 명하여 불렀다고 한다. 지금은 호수가 존재하지 않지만 이 지역에는 샘이 많아 샘물은 이 지역의 특산품이라고도 한다. 이 샘물은 피부미용에도 좋기 때문에 천수에는 피부 미인이 많다는 설도 있다. 천수시의 인구는 370만명 정도 되며 시내는 50만의 인구가 살고 있다. 해발 높이는 약1,200m이며, 삼국지에 나오는 강유의 고향이 이곳 천수이고, 복희씨 사당이 이 곳에 있다. 일반적으로 중국의 역사 발원지가 천수라고 생각 하는데 제갈 량이 천수를 가지고 있으면 천하를 통일할 수 있다고 하였지만, 제갈량은 이 지역을 장악하지 못하였고 조조가 장악하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감자가 많이 생산된다. 많이 생산되는 감자는 사람이 감자를 심는 것이 아니라 양이 감자를 심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다. 이는 감자씨를 산에 뿌리고 산에 양을 몰고 올라가면 양이 감자씨를 밟아서 감자가 심겨지고 양은 또, 감자를 먹지 않기 때문에 생긴 말이란다. 그러나 사실은 사람이 감자를 심지 양은 심지 않는다.
요즘 절기에는 이곳에 복숭아가 많이 난다. 상강과 황하의 발원지는 곤륜산맥의 청해성인데 모두 천수를 거쳐 흘러간다, 황하를 보면 물이 누렇다. 이는 서쪽으로 가면 거의 황토 공원이기 때문이다. 황하강의 길이는 5,400km이며, 강과 하의 차이는 강은 강의 물이 바다로 들어가고 하는 바다로 들어가지 않고 육지에서 물이 다 없어지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또한 천수에는 진나라 선조들의 무덤이 있다. 그리고 유명한 천수의 맥적산 석굴은 북쪽의 운강, 용문, 둔황에 이어 4대 석굴에 들어가며, 실크로드 지역의 마지막 석굴이다. 조성 시기는 위진 남북조 시대부터 송나라 시대에 걸쳐 조성 되었다. 맥적산의 맥자는 보리 맥자를 쓰고, 적자는 쌓을 적자를 쓰는데 이는 산꼭대기가 넓어 보릿짚을 쌓아 놓은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맥적산이란 이름이 붙었고, 붉은 모래 바위로 형성된 산이다. 맥적산이 유명하게 된 것은 천보스님(?)이 맥적산에서 설법을 했기 때문이라는데 천보스님이라는 분에 대해서는 처음 들어 보는 스님이시다. 맥적산 석굴 관람은 계단 따라 산으로 올라가며 입구와 출구가 다르다. 조각상이 7,200위 정도 되며, 벽화는 약6,000평방미터가 된다고 한다.
<맥적산 석굴 입구>
그럼 불상에 대한 시대적 특징은 어떻게 다를까?
처음 조성은 북위시대부터 만들어 졌으며, 굴 입구가 북위시대는 터져있고, 바닥이 평면이고 장방형이다. 천장도 편평하다. 불상들이 우견 편단을 하고 있으며, 우견편단은 우리나라 토함산 석굴암 불상이 대표적인 우견편단이다. 코가 높고 눈이 크다. 운강 석굴의 불상들과 비슷하다. 머리를 보면 육계에 잔 물결 모양으로 되어 있다. 우리나라 팔공산 제2석굴암이 이처럼 되어 있다 즉 우리나라 팔공산 제2석굴암 양식이 맥적산의 석굴의 모습에서 찾을 수 있다.
165굴에는 교각상이 있다. 교각상이란 발을 결가부좌 하지 않고 일자로 하고 있는 상이다
우리나라는 속리산 법주사, 회암사 마애불상이 그렇다. 교각상을 한 부처님은 미륵부처님이시다.
115굴에는 북위 후기에 조성된 불상으로 수골 청정상이 나온다. 수골청정상이란 굉장히 품격이 높고 귀인상을 말한다. 북위 전기시대의 상은 단정하고 힘이 넘치고 눈이 크고 체구가 단단하지만 몸이 왜소하지만 귀족상이다.
167굴 135굴에는 3존상, 5존상, 7존상이 나온다. 3존상의 본존불은 불상으로 모시고 협시는 보살로 모신다. 5존상은 보살2분에다 제자2분, 7존불이 있는데 보살3명 제자3명 마곡사 영산전에 있다. 서위시대 석굴로 43굴, 44굴,123굴 목조형식의 건물을 만들어 놓았다.
북주시대 불상은 우리나라 불상과 비슷하다. 목이 짧고, 얼굴이 네모지고, 통견이다.
<맥적산 석굴의 대불>
관람을 마치고 내려오며 길가에서 파는 개암을 먹고 가리비 나무열매로 만든 단주를 사서 기뻐하니 어느덧 전동차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동차를 타고 내려오니. 11시15분경이 되었다. 하차 장소에서 10분 거리에 있는 맥적반장(점심식당)에 도착하니 11시25분이었다. 점심을 맛나게 먹고 12시15분에 승차 난주로 출발 하였다. 12시40분에 감숙성 고속도에 진입하여 달리니 해발고도는 높아지고 산속의 수림이 점점 얕아지는 것을 보았다. 난주로 가는 길임을 알려주는 것 같았다. 14시25분 원앙복무구에서 휴식을 취하며, 수박을 먹고, 14시55분 휴게소를 출발하였다. 차창 밖 자연에 녹았던지 2시간 정도 되었을 때, 나눠주는 지식의 기쁨을 만끽하며 16시50분에 화운쾌첩주점(간이휴게소)에서 내려 작은 볼일을 본 후 17시에 다시 버스에 승차하여 출발했다.
18시에 난주시내에 도착하였다. 도교서원인 백운관을 찾았으나 문을 닫아 관람을 포기하고 황하강 철교를 관람하고 나니 19시였다. 다시 차를 타고 식당에 도착하니 19시30분이었는데 저녁식사를 먹고 20시15분에 승차하여 숙소를 향해 달렸다. 금륜빈관에 도착하니 8시45분이었다 룸배정을 받아 짐을 룸에 던져둔 채 로비에서 21시에 만나 야시장 구경에 동참했다. 야시장 구경을 마치고 숙소에 들어와 깊은 잠에 들었다.
<난주의 도관: 백운관>
원장님께서 중국의 시대구분에 대한 역사적 배경지식이 필요하다면서 중국의 시대를 구분하여 주셨다. 전설의 시대인 하나라 그리고 은나라, 상나라는 청동기시대의 국가이고 이어지는 국가가 주나라로 서주와 동주로 나주어진다. 보통 주나라는 기원전1,121에 건국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기원전 771년에 유왕이 죽고 평왕이 호경에서 낙양으로 도망갔는데 평왕 이전을 서주, 이후를 동주라고 한다. 도망간 이유는 포사라는 여자 때문이다. 포사라는 여자는 굉장히 미인이었는데 주나라의 유왕이 포사한테 반해서 포사가 웃지 않자 포사가 웃는 모습을 보고 싶어 했는데 잘 웃지를 않았다. 한번은 봉홧불을 잘못 올렸는데 제후들이 군대를 이끌고 서울로 왔고 봉화를 잘못 올려서 왔다는 사실을 알고 제후국으로 뒤돌아가게 되었는데 이걸 보고 포사가 웃었다. 그래서 포사의 웃는 모습을 보고 싶을 때는 항상 유황은 봉홧불을 올리도록 하였다. 나중에 진짜 흉노족이 처들어 왔을 때 봉화를 올렸지만 제후들이 아무도 오지 않았고, 그래서 유왕은 죽고 유황의 아들 평왕이 낙양으로 도망을 가게 된다. 이 때 진 양공이라는 사람이 낙양으로 가는 평왕을 호송하는데 많은 공을 세우게 되고, 그 후 주나라의 동주가 시작 되면서부터 제후들이 점점 독립하게 되며, 300여 국가에서 100개로 되는 시기가 춘추시대. 이 시기부터 즉, 기원전 475년부터 나머지 7국가가 남았을 때 까지를 전국시대라고 하였으며, 이때 우리나라는 고조선 시대로 고조선 옆에 있는 국가가 연이었는데 연의 왕은 제후가 아니라 왕이라고 하니 고조선의 왕도 나도 왕이다라고 하여 연나라의 진개가 고조선을 공격하게 된다. 이 때가 기원전 313년으로 고조선은 2,000리 땅을 내주고 동쪽으로 옮기는데 그곳이 평양이다. 7개국을 통일한 왕이 진시황이다. 진시왕의 성씨는 영씨인데 진짜 영정이 맞나? 이 시기에는 철기를 농기구로 사용하므로 많은 생산이 나왔다. 이때 여불위가 장사을 잘했으며, 합종 연횡설도 많았다. 여불위가 볼 때 조나라에는 자초라는 사람이 와 있었고 여불위를 생각하는 사람은 자초 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여불위가 자초를 초대하였는데 자초는 영정 즉 진시황의 아버지이다. 그 때 여불위의 애첩중의 한사람이 예뻣는데 초대된 자초가 여불위의 애첩을 달라고 하여 주게 되었다. 그때 이미 그 애첩은 여불위의 아이를 임신을 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래서 진시황제의 성씨는 영씨가 아니고 여씨라고 본다.
진나라가 통일하는 배경을 보면 여불위의 영향이 매우 크다. 여불위가 무역을 하며 다니다 보니 각국마다 입국세를 받았다. 그래서 세금을 많이 내었다. 시장이 통일 되어야하고 화폐가 통일 되어야한다. 삼황오제에서 이름을 따서 황제로 이름을 바꾼다. 시황제의 업적 중 화폐통일, 문자통일은 예서이며, 도량형 통일을 하였다. 그 당시 각 나라 마다 마차의 폭이 다 달랐는데 마차의 폭도 통일을 시켰다. 역사적 배경으로 북위는 후한 말기에 유비, 조조, 손권이 싸움을 하지만 통일은 엉뚱하게 사마염이 하여 진나라를 세운다. 진나라가 8왕의 난이 일어나 사마예가 동쪽으로 가서 나라를 세우는데 동쪽으로 갔다고 해서 동진이라고 하고. 진이 있었던 그 지역에는 5섯 오랑캐인 5호(흉노, 선비, 저, 강, 갈족)16국 이다. 양쯔강 북쪽의 진을 몰아낸 족은 즉 장안을 먼저 친 족은 저족이다 저족은 사천성과 티벳 지방에 많이 사는 사람인데, 장안을 점령하여 양자강 북쪽지역을 다 점령한다 이를 전진이라고 하고, 전진의 왕중 부견왕은 우리나라 고구려에 372년에 불교를 전해주었다. 나라 이름을 진이라고 하지만 서진과 구분하기 위해 전진이라한다. 불교를 전래한 것은 372년에 백제 근초고왕이 고구려를 공격하자 고구려 고국원왕이 평양까지 나와서 전투를 벌이다가 전사한다. 이 때 전진에서 조문사절을 고구려에 보내는데 순도라는 스님이 사절로 따라감으로서 불교가 전래된다. 순도라는 스님은 불상과 경전을 가지고 가서 전하게 된다. 부견은 양자강 북쪽만 차지해서는 속이 안차서 양자강 남쪽의 동진까지 치로 간다. 이것이 양자강 유역의 팔공산 전투이다. 우리나라도 팔공산이란 지명이름이 있는데 이는 경덕왕16년(757년)에 한화 정책에 의해 지명 이름을 중국식으로 바꾸었기 때문이다.
달구벌이 대구이고 사벌이 상주이다. 이는 중국의 지명을 따서 그렇게 바뀐 것이다. 팔공산 전투에는 병사 87만명을 데리고 가서 대패하고 낙양으로 돌아올 때는 10만명이 채 못되어 돌아오는데 부견이 부끄러워 도읍까지 돌아오지 못하고 오장산으로 들어가는데 그곳에서 요장에 의해 부견은 죽고 요장은 옥새를 빼앗고 나라 이름은 그대로 진나라로 쓴다. 이것이 성이 요씨라서 요진이다. 이를 뒤에 생긴 진이라 하여 후진이라고 하기도 한다. 요진시대 구마라집은 전진의 왕 부견이 383년에 여광이라는 장수에게 모셔오라고 하는데 구자국에 있는 왕이 보내주지 않아 여광이 구자국을 멸망시키고 돌아오다가 하서회랑지역(양주)에 오니까 부견이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갈 필요 없다고 생각하고 그 지역에서 나라를 세웠다 그 나라가 후량이다.
요장이 힘이세니까 요장이 구마라집을 보내주기를 후량에게 말하니 보내주지 않았다. 요장이 죽고 요범이 여광을 쳐서 멸망시키고 구마라집을 장안으로 모시고 오게 된다.
경전의 번역은 구역과 신역으로 나누어지는데 구역은 서역사람이 들어와서 중국말을 배워서 인도 말을 중국말로 번역한 것을 말하고 신역은 중국 사람이 서역말을 배워서 중국말로 번역한 것을 말한다. 신역은 현장이 번역한 반야심경이 있다. 그 다음 북부 지역을 통일한 민족이 선비족인데 이를 북위라고 한다. 통일 후 선비족은 북위라고 하지 않고 위라고 하였다 이유는 선비족 중에 탁발씨가 있는데 탁발씨가 조조하고 유비하고 싸울 때 조조에게 조공을 바쳤고 나중에 조조가 사마염에게 망하자, 우리는 조조를 잇는다라고 하여 위나라라고 하였다. 선비족은 내몽골 자치구에 있다가 지금의 대동으로 와서 운강 석굴을 만들고. 효문제 때가 되면 평성(산서성의 대동시)에서 수도를 낙양으로 천도한다. 낙양으로 옮겨서 선무제가 죽자 선무제의 황후가 호씨인데 바람이 나서 자기의 아들 보기가 민망해서 아들 명제를 독살시켰다. 그러자 육진의 난이 일어났는데 그 난을 평정한 장수가 이주 영이다 이주 영이 정권을 잡아 호태후와 관료 1,000여명을 살해하고 효장제를 옹립하였다 효장제는 이주 영을 주살하였으나 효장제는 이주 조에게 살해되고 말았다. 이주씨가 내분으로 오랜싸움에 지쳐 있는 동안 본래 이주 영에 소속되어 있는 고환이 이주 조를 물리치고(이주 조는 자살) 정권을 잡고 효무제를 옹립한다.효무제가 고환을 제거하려다 실패하여 서쪽 장안에 있는 우문태 있는 곳으로 도망을 간다. 이로서 이듬해 우문태는 효무제를 살해하고 효문제를 즉위시키니 이것이 서위이고, 우문태가 죽고 뒤이어 우문각이 선양을 받게 되는데 이것이 북주이다. 고환은 효정제를 옹립하였는데 이것이 동위가 된다 고환이 죽고 맏아들 고징은 주벽이 심해 살해되고 둘째아들 고양이 효정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임금이 되는데 이나라가 제나라이다. 이는 고환의 고향이 발해이기 때문에 제나라라고 하였다. 그 지역이 옛날 제나라가 있었던 곳이고, 춘추전국시대의 제와 구분하기 위해 북제라고 한다.
북주의 양견이 통일하여 수나라가 건국된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공격해서 오래가지 못하고 당나라에 멸망한다. 당나라는 수문제의 동서인 이연이 장안서 세운 나라이다.
배경 지식으로 석굴의 재료에 따른 부처님 상을 구분하면 철심소상, 목심소상과 석조상과 목조상, 청동상 금동상 철불 등이 있다. 또한 오늘날 중국에서 사용하는 간체자는 우리나라에서 한자 공부하는 번안자와 달라 읽기가 어려웠다. 또한 읽기도 한문을 우리식으로 읽는 방법과 중국식 발음법으로 읽는 방법이 있어 혼란스러웠다. 이제 중국의 문화혁명으로 생긴 간체자의 도입을 이해함으로서 중국의 문화를 이해하는데 조금은 도움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