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揆 園 史 話 (규원사화)
揆園史話 序
北崖子旣應擧而不第, 乃위然投筆, 放浪[於]江湖, 凡數三歲, 足跡殆遍於제域, 而深有蹈海之悲. 時經兩亂之後, 州里蕭然, 國論沸鬱, 朝士간食, 野氓懷온. 於是北崖子, 南自金州 .月城, 歷泗비?熊川, 復自漢山入峽而踏濊貊舊都之地; 北登金剛之毘盧峰, 俯看萬二千峯簇擁초列. 乃望東海出日而泣下, 眺萬丈瀉瀑而心悲, 慨然有出塵之想. 更西遊至九月山, 低徊於唐莊坪, 感淚於三聖祠. 及自平壤到龍灣, 登統軍亭, 北望遼野, 遼樹계雲, 點綴徘徊於指顧之間, 若越一葦鴨江之水, 則已更非我土矣. 噫! 我先祖舊疆, 入于敵國者已千年, 而今害毒日甚, 乃懷古悲今, 咨(差)[嗟]不已. 後還至平壤, 適自 朝家有建乙支文德祠之擧, 卽高句麗大臣, 殲隋軍百餘萬於薩水者也. 經月餘, 至松京, 始聞荊妻之訃, 急遽還歸居家, 益復寂寞. 於是, 구揆園書屋於舊居之南?負兒岳之陽, 聚諸家書, 廣采其說, 意欲以此終餘生焉.
북애자는 이미 과거에 응시하였으나 급제하지 못하니, 이에 탄식하며 붓을 던지고 강호를 방랑한지 무릇 삼년에, 발길은 이 나라 구석까지 닿지 않은 곳이 없었으며, 때로는 바다에 이 발길을 내어 맡길까 하는 비탄에 젖기도 하였다. 때는 두 난리를 겪은 뒤라 온 나라가 어수선하고, 국론은 들끓어 올라 조정과 선비들은 끼니를 거를 만큼 경황이 없었으며, 뭇 백성들은 가슴에 그저 분노만을 품고 있었다.
이에 북애자는 남쪽의 금주(金州)와 월성(月城)으로부터 사비(泗비)와 웅천(熊川)을 거치고, 다시 한산(漢山)에서 골짜기로 접어들어 예맥1)의 옛 도읍을 밟았으며, 북쪽으로 금강산의 비로봉에 올라서서 빽빽이 들어차 가파르게 늘어서 있는 일만 이천의 봉우리를 굽어보았다.2) 이에 동해로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니 눈물이 절로 흐르고, 만길 높이로 떨어지는 폭포를 쳐다보니 마음은 슬픔에 잠기는데, 그 복받친 마음에 속세를 떠나고 싶은 마음이 일었다.
다시 서쪽으로 노닐며 구월산에 이르러 고개를 늘이고 당장평(唐莊坪)을 배회하자니 삼성사(三聖祠)3)에선 눈시울이 붉어졌다. 평양으로부터 용만(龍灣)4)에 이르고 통군정(統軍亭)에 올라 북녘으로 요동의 들판을 바라보니, 요동(遼東) 벌판의 나무와 계주(계州) 하늘의 구름은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거리에 드문드문 흩어져 노닐고 있는데, 작은 거룻배로 압록의 물길을 건너고자 하나 이미 갈마들어 우리의 땅이 아니구나. 슬프다! 우리 선조들의 옛 강역이 적국의 손에 들어간지 이미 천여 년에 이제 그 해독이 날로 심해져 가니, 옛날을 그리워하며 지금을 슬퍼함에 그 안타까움을 금할 수가 없구나. 그 후 돌아오는 길에 평양에 이르니 마침 조정에서 을지문덕의 사당을 세우는 행사가 있다 하는데, 곧 고구려의 대신으로서 살수(薩水)에서 수(隋)나라 군사 백여 만 명을 무찌른 분이다. 한달 남짓 지나 송경(松京)에 이르러 비로소 아내의 부음을 듣고 급히 집으로 돌아 왔으나 더욱 적막할 따름이라, 이에 옛집의 남쪽이며 부아악(負兒岳)의 양지 바른 곳에 규원서옥(揆園書屋)을 짓고,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서책을 모아 그 학설을 널리 연구하는 것으로 여생을 마치고자 하는 마음이다.
夫以力服人者, 力窮而人叛; 以財用人者, 財竭而人去. 力與財, 余旣不能有焉, 而亦不曾冀求. 觀乎! 荒凉北邙坂下, 曾何力與財之有乎! 且名者(포)[實]之賓也, 余將慕名而爲賓乎! 名亦不足願. 昔者勿稽子有言, 曰: 「天識人心, 地知人行, 日月照人意, 神鬼鑑人爲.」 夫! 人之善惡正邪, 必爲天地神鬼之所照臨監識, 則斯已矣. 寧向촉루人世, 汲汲然競寸銖之名利哉! 余決不爲. 惟存性養志, 修道立功, 以遺效於來世後孫, 則雖終世無知者, 亦可無온, 或萬世之後而一遇知其解者, 是旦暮遇之也. 觀夫閃忽千年往事, 曾復何向촉루人世, 爭寵辱於石火光中耶!
무릇 힘으로 남을 복종시키고자 하는 자는 그 힘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배반을 당할 것이며, 재물로써 남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는 그 재물이 다하면 사람들로부터 버림을 받을 것이다. 권력과 재물은 이미 내가 가지지도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일찍이 바라거나 구한 적도 없다. 보라! 황량한 북망의 산비탈 아래에 어찌 권력이나 재물이 있겠는가! 더군다나 명예란 것은 참된 것의 손님과도 같은데, 내가 명예를 그리다가 도리어 손님이 되어 버리고 말 것인가! 명예란 것 역시 내가 족히 바랄 것이 되지 못한다.
예전에 물계자(勿稽子)5)라는 사람이 말하기를 「하늘은 사람의 마음을 알고, 땅은 사람의 행실을 알며, 해와 달은 사람의 뜻을 내려 비춰보고, 귀신은 사람의 행위를 내어다 본다」 하였으니, 무릇 사람의 선하고 악함과 바르고 사악함의 그 모든 것은 반드시 천지신귀(天地神鬼)가 내려 비춰보고 살펴 아는 것이 곧 그와 같을 따름이다. 어차피 백골로 향하는 인생에서 어찌 그리도 조급하게 한푼어치의 명리를 가지고 다툴 것인가! 나는 결단코 그리하지 않을 것이다. 오직 타고난 성품을 간직하여 뜻을 기르고, 올바른 수행의 길을 닦아 공을 세움으로서 다음 세대의 후손들에게 본보기로 남고자 하는 것이니, 비록 세상이 다하도록 알아주는 자가 없다 할지라도 성냄이 없을 것이나, 혹시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 이 변명을 이해하는 이를 마주치게 된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절박하게 접하고자 하는 것일 뿐이다. 무릇 섬광과도 같은 천년의 지난 일들을 바라보며, 한낱 백골로 향하는 부싯돌의 불빛과도 같은 인생에서 어찌 또 다시 명예와 치욕을 다투겠는가!
余嘗論之, 朝鮮之患, 莫大於無國史. 夫《春秋》作而名分正,《綱(耳)[目]》成而正閏別,《春秋》.《綱目》者, 漢士之賴以立者也. 我邦經史, 屢經兵火, 散亡殆盡. 後世孤陋者, 流溺於漢籍, 徒以事大尊周爲義, 而不知先立其本, 以光我國, 是猶藤葛之性, 不謀其直而便求纏絡也, 豈不鄙哉! 自勝朝, 以降貢使北行累百年而不爲之恨, 猝以滿洲之수爲不俱戴天, 則獨何故耶. 噫! 雖然, 若天加선寧廟十年之壽, 則卽可陳兵於遼.瀋, 馳艦於登.萊, 縱敗뉵旋至而亦不失爲近世之快事也. 乃天不假만聖壽而終無其事, 幸耶? 不幸耶? 余則悽切而已矣.
내가 일찍이 항상 거론하던 바와 같이, 조선의 근심 가운데 나라의 역사가 없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다. 무릇《춘추(春秋)》가 저작되자 명분이 바로 서게 되고,《강목(綱目)》이 이뤄지니 바른 계통과 가외의 계통이 나누어지게 되었으나,《춘추》나《강목》같은 것은 한(漢)나라 선비들이 자기들의 사상에 의거하여 정리한 생각일 뿐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사서는 누차의 병화를 거치며 흩어져 거의 없어졌다.6) 후세에 고루한 자들이 한나라 서적에 탐닉하여 헛되이 사대(事大)와 존화(尊華)만을 옳다고 여길 뿐, 먼저 근본을 세우고 이로서 우리나라를 빛낼 줄은 알지 못하니, 마치 칡이나 등나무의 성질이 곧바르게 나아가고자 하지는 않고 도리어 얽히고 비틀어지는 것과도 같음에 어찌 천하다 하지 않겠는가!
고려조(高麗朝)부터 스스로를 낮추어 조공하는 사신이 북쪽을 드나든지 이미 수백 년인데도 한(恨)으로 여기지 않다가, 졸지에 만주의 동류(同類)를 불구대천의 원수로 여김은 유독 어찌 된 까닭인가? 오호라! 비록 그러할지라도 만약 하늘이 효종에게 십년의 천수(天壽)만 더하여 주었더라면, 곧 병사를 요동의 심양으로 진군케 하고 병선을 등주(登州)와 래주(萊州)로 내달리게 하였을 것인데, 설령 패하고 꺾여 되돌아온다 하더라도 그 또한 근세의 통쾌한 일이 됨은 잃지 않았을 것이다. 하늘이 임금의 천수를 빌려주지 않아서 마침내 그러한 일이 생기지 않았으니, 이것이 다행인가 불행인가? 나로서는 그저 처절하게 여길 따름이다.
余嘗有志於述史, 而固無其材, 且名山石室, 渺無珍藏, 以余淸貧匹夫, 亦竟奈何哉! 然何幸, 峽中得淸平所著《震域遺記》中有三國以前故史, 雖約而不詳, 比於巷間所傳區區之說, 尙可吐氣萬丈, 於是復采漢史諸傳之文, 以爲史話, 頗有食肉忘味之槪矣. 雖然, 凡今之人, 孰能有志於斯而同其感者哉!《經》曰: 「朝聞道, 夕死可矣.」 亦惟此而已矣. 若天假我以長壽, 則卽可完成一史, 此不過爲其先驅而已也. 噫! 後世若有, 執此書而歌哭者, 是乃余幽魂無限之喜也. 上之二年乙卯三月上澣, 北崖老人, 序于揆園草堂.
내가 일찍이 나라의 역사를 써보고자 하는 뜻은 있었으나 본디 그 재료로 삼을 만한 것이 없었으며, 또한 이름 있는 산의 석실에 조차 귀하게 비장된 것 하나 없음에, 나와 같이 씻은 듯이 가난하고 보잘 것 없는 사람으로서 이 또한 어쩔 도리가 있었겠는가. 그러나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산골짜기에서 청평(淸平)이 저술한《진역유기(震域遺記)》를 얻으니, 그 가운데 삼국 이전의 옛 역사가 있음에 비록 간략하여 상세하지는 않으나 항간에 떠도는 구구한 말들에 비하면 자못 내비치는 기상이 견줄 바가 아니라, 여기에 다시 중국의 사서에 전하는 모든 글들을 가려 뽑아 사화(史話)를 지으니, 그 재미로움은 밥 먹는 것도 자주 잊을 지경이었다. 비록 그렇지만 지금의 사람 가운데 과연 누가 이러한 것에 뜻이 있어 이 감흥을 같이 할 수 있으리오! 경전에 말하기를 「아침에 도를 듣게 되면 저녁에 죽더라도 여한이 없다」 하였으니, 오직 이를 두고 한 말 같구나. 만약 하늘이 나에게 오랜 수명을 누리게 한다면 하나의 역사를 완성하게 될 것이지만, 이는 단지 그 선구(先驅)가 될 뿐이리다. 오호라! 후세에 만약 이 책을 붙잡고 곡 소리를 내는 자가 있다면, 이는 곧 나의 유혼(幽魂)이 무한히 기뻐할 바로다. 숙종 2년 을묘년7) 3월 상순 규원초당에서 북애노인이 서문을 쓰다.
1.【濊貊】: 濊의 종족적 계통과 濊·貊·濊貊의 상호관계에 관해서는 다수의 논고가 있다. 이를 크게 대별해 보면 濊·貊同種說과 濊·貊異種說로 나뉘어진다. 前者로는 일찍이 丁若鏞이 貊은 종족명이고 濊는 지명 또는 水名이라고 보아, 濊貊은 九貊 중의 一種을 지칭한 것이라고 하였다. 凌純聲도 濊는 濊水地域에 거주하였던 貊族이라고 하여 동일한 이해를 하였다. 三品彰英은 先秦文獻上의 貊은 북방족에 대한 범칭이며, 濊는 秦代의 문헌에서 처음 보이는데, 漢代의 범칭적인 濊는 고구려·부여·東濊를 포괄하는 민족명이고, 濊貊이라는 熟語的인 호칭은 현실적인 민족명인 濊와 고전적인 북방족에 대한 범칭인 貊을 결합시킨 것이라고 보고, 고구려를 지칭한 貊은 민족명인 凡濊族內의 특정 부족명으로 보았다. 尹武炳은 예맥의 명칭은《史記》에서부터 사용되었는데, 濊족과 貊족을 합친 범칭이 아니라 貊족인 고구려를 지칭하는 것이었고, 漢代 이후의 濊와 (濊)貊을 동일계통 내에서 각각 구분되는 실체로 보았다. 한편 臺灣의 芮逸夫는 韓민족을 濊貊과 韓의 두 계열로 구성되었다고 하면서, 예맥족 중 濊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송화강·길림·嫩江 등에 살았고, 貊족은 산동·요동·渤海岸 등에 거주하여, 그 거주분포에 따라 구분되었다고 보았다. 金貞培도 濊·貊·韓은 동일계열 족속으로서, 그 분포지역에 차이를 따라 각각으로 구분되어졌다고 보았다. 異種說의 대표로서 三上次男은 濊族은 有文토기문화를 영위하였고 생활방식에 있어서 수렵·어로의 비율이 컸던 古아시아族 계통이고, 貊족은 無文토기문화를 남긴 퉁구스계통으로 파악하였다. 三上次男說은 빗살문토기문화와 무문토기문화가 동시대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先後하는 문화였다는 것이 확실해짐에 따라 부정시된다. 그런데 고구려족과 예맥과의 관계에 대해 李玉은 독특한 입론을 제기하였다. 즉, 그는 貊족과 濊족은 중국의 산서성·하북성 방면에 각각 거주하다가 점차 동쪽으로 이동해 왔는데, B.C.3세기 무렵 장춘·농안 방면에 먼저 정착해 있던 濊족은 이미 貊족에게 밀려 남쪽으로 왔다가 고조선에게 쫓겨 요동군에 예속된 것이 濊君 南閭의 집단이고, 이 濊의 일부가 貊족에 흡수되어 B.C.2세기 무렵 새로운 종족인 濊貊이 성립되었으니, 이것이 高句麗族이라 하였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盧泰敦 注.
2. 금주(金州)는 김해, 월성(月城)은 경주, 사비(泗비)는 부여, 웅천(熊川)은 공주, 한산(漢山)은 서울을 가리킨다.
3.《신단실기》에 인용된《춘관통고(春官通考)》의 '삼성사' 관련 내용.
* 朝鮮端宗壬申, 慶昌府尹李光齊소曰: 「臣修史, 至戊申, 有右議政致仕柳觀上書, 曰: 『文化縣, 臣之本鄕, 九月山, 是縣之主山, 在檀君時, 名阿斯達山. 山之東嶺, 高大위이, 山之腰, 有神堂, 不知창於何代. 北壁有檀因天帝, 東壁有檀雄天王, 西壁有檀君父王. 縣人, 稱之曰三聖堂, 其山下, 亦稱聖堂里. 檀君入阿斯達山爲神, 此山之下, 三聖堂至今猶存, 其跡可見. 縣之東, 有地名唐莊京, 父老傳以爲檀君之都, 或者以爲, 檀君初都王儉城, 今宜合在箕子廟.』 蓋檀君, 與堯병立, 至箕子千有餘載, 豈宜合於箕子之廟歟? 臣光齊, 夷考《三國遺事》, 有曰: 『檀君王儉, 以唐堯卽位後, 五十年庚寅, 都平壤始稱朝鮮, 又移都唐莊京, 還隱於阿斯達山, 爲神』云. 然則檀君, 爲君於斯, 爲神於斯, 不厭於此地, 明矣. 箕子, 傳四十代; 然人衛滿, 都王儉城, 傳二世; 高句麗, 傳七百五歲; 新羅, 병二百餘歲; 高麗王氏, 傳四百餘年. 則檀君之去平壤, 遐哉邈矣, 其肯顧戀於平壤乎! 且爲神, 致土人之尊祀, 豈有樂遷於平壤, 與東明王同廟哉?《遺事》註云, 桓因天帝, 卽柳觀所謂檀因也; 桓雄天王, 卽所謂檀雄也. 邃初之人, 不忘其本, 창立祠宇, 改桓爲檀, 號稱三聖, 果不知창於何時也. 向者, 移檀君於平壤, 치二聖於何地. 臣以爲, 修葺舊堂, 新作神像, 分坐左右, 尊敬如舊, 命遣朝臣, 致告聖堂, 以祈陰佑, 則豈無昭格降福耶? 或者以爲, 天帝降于檀樹下, 事涉怪誕. 然, 神人之生, 異於常. 簡狄, 呑玄鳥卵而生契, 姜嫄, 履帝敏而生后稷. 此, 中國上世之事, 豈易議爲也. 伏願殿下, 聿遵世宗之念, 延訪大臣, 究論天帝降於檀樹之源, 與夫遷主作怪之事, 廣問耆老之人, 改建聖堂之主, 幸甚.」
조선 단종 임신년에 경창부윤 이광제가 소(소)에서 말하였다. 「신이 역사를 엮음에 무신년 부분에 이르러 우의정으로 벼슬을 물러난 유관이 올린 글이 있었는데, 이르기를 『문화현은 신(臣)의 본향이 온데 구월산은 그 현의 중심 되는 산으로 단군 때는 아사달산이라 이름하였습니다. 산의 동쪽 마루는 높고도 크며 굴곡이 져 있는데 산의 허리에는 신당이 있으니 어느 시대에 창건한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북쪽의 벽에는 환인천제가 있고 동쪽의 벽에는 환웅천왕이 있으며 서쪽의 벽에는 단군부왕이 있습니다. 그 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일러 삼성당이라 하며 그 산 아래 역시 성당리라 일컫습니다. 단군께서 아사달산에 들어가 신이 되었는데 그 산 아래 삼성당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니 그 족적을 가히 알아볼 수 있습니다. 현의 동쪽에는 당장경이라는 이름의 땅이 있는데 노인네들이 전하기를 단군의 도읍지라 여긴다 하며 혹은 단군이 처음 도읍한 왕검성으로 여기고 있으니 이제 마땅히 기자묘에 함께 합쳐야 할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무릇 단군께서는 요임금과 더불어 함께 일어났기에 기자에 이르기까지는 천여 년의 세월이 있는데 어찌 기자의 묘에 합쳐야만 하겠습니까? 신 광제가《삼국유사》를 자세히 살펴보니 『단군왕검은 요임금 즉위 후 50년인 경인년에 평양에 도읍하며 비로소 조선이라 칭하였으며, 또 당장경으로 도읍을 옮겼다가 도로 아사달산에 은거하여 신이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한 즉, 단군께서 여기에서 임금이 되셨고 여기에서 신이 되셨으니 이 땅을 싫어하지 않은 것은 분명합니다.
기자는 40대를 전하였고, 연나라 사람인 위만은 왕검성에 도읍하여 2대를 전하였으며, 고구려는 705년을 전하였고, 신라는 거기에다 200여 년을 전하였으며, 고려의 왕씨는 400여 년을 전하였습니다. 곧 단군께서 평양을 떠난지 아득히도 먼데 평양을 돌아보아 그리워한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신이 되어 지방 사람들의 존경과 제사를 받기에 이르렀는데 어찌 평양으로 옮김을 좋아할 것이며 동명왕과 사당을 같이함을 즐겨 하겠습니까?《삼국유사》의 주석에 이르기를 환인은 천제라 하였으니, 즉 유관이 말하던 단인(檀因)을 말하며 환웅천왕은 단웅(檀雄)을 말하는 것입니다. 먼 태초의 사람들이 그 근본을 잊지 않아 이 사당을 세우고 '환(桓)'을 '단(檀)'으로 고쳐 '삼성(三聖)'이라 이름하였을 것인데 어느시대에 창건한 것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하오나 평양으로 단군을 옮긴다면 두 분의 성인은 어디에 두어야 하겠습니까. 신이 생각키로 옛 사당을 새로 보수하고 새로이 신의 형상을 만들어 좌우에 나누어 모신 다음에 예전처럼 존경하며, 명을 내려 조정의 신하를 보내 성인의 사당에 고함으로서 음덕의 도움을 바란다면 어찌 밝게 도와서 복을 내리지 않겠습니까? 혹자는 말하기를 천제께서 단수 아래로 내려왔다는 것은 그 일이 괴이하고 거짓되다고 합니다. 그러나 신인의 탄생은 보통과 다르니, 간적은 제비의 알을 먹고 설을 낳았고, 강원은 상제의 발자국을 밝고는 후직을 낳았습니다. 이는 중국의 오랜 옛적 일로서 어찌 손쉽게 분별할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세종의 유념을 좇으시고 대신들에게 문의하시어 천제께서 단수에 내려온 근원을 깊이 논하시며, 무릇 신주(神主)를 옮기는 괴이한 일 또한 함께 노인네들에게 널리 문의하시어 삼성당의 신주를 고쳐 세우시면 매우 다행이겠습니다.」
* 朝鮮成宗三年壬辰, 三聖堂, 改號三聖祠, 奉桓因桓雄檀君位版, 依平壤檀君廟例, 歲送香祝以祭.
조선 성종 3년 임진년에 삼성당을 고쳐 삼성사라 하였으며, 환인·환웅·단군의 위판을 받들어 모시고 평양 단군묘의 예에 의하여 향과 축문을 보내 제사지냈다.
* 朝鮮英祖四十一年乙酉, 命設독於三聖廟, 仍致祭. 先是, 成宗朝建三聖廟, 位版以土造成, 年久毁傷, 遂遣禮官, 以木爲독.
조선 영조 41년 을유년에 명하여 신주(神主)의 독[신주를 넣어 모시는 나무로 만든 궤]을 설치하고 계속하여 제사지내게 했다. 이보다 먼저 성종조 때 삼성묘를 세울 적에 위판을 흙으로 만들었더니 해가 오래 되자 헐어지고 상하였다. 이에 예관을 보내 독을 만들었다.
4.【龍灣】: 압록강 하구에 있는 만(灣)의 옛 이름.
5.【勿稽子】: 신라 나해 니사금 때의 사람이다. 신라가 인접국인 아라국(阿羅國)을 돕는 전쟁과 갈화성(竭火城)에 쳐들어온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古史浦) 등 세 나라를 물리치는 전쟁에서 큰 공을 세웠으나 왕손(王孫)의 시기 등으로 인해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를 애석히 여기지 않고 결국에는 거문고를 가지고 사체산(師체山)으로 들어가 버렸다. 《삼국사기》권 제48, 열전 제8, 물계자條.
6. 단군의 고사와 경전이 부여와 고구려에 전해져 번역되고 간행된 것이 많았다. 그러나 신라가 당 나라 군사와 함께 고구려를 멸하고 그 서고(書庫)를 불태웠으며 민간에 흩어져 있던 것까지도 남김없이 가져다 태워 버렸다. 이 때 부여에 간직되어 있던 것이 발해에 전해졌으나 금나라가 신라와 당나라가 한 짓을 되풀이하여 다 태워 없앴다. 혹 남모르게 은밀히 감추어 둔 것이 있어 불에 타지 않고 전해진 것이 없지 않았으나 조선의 세조와 예종 및 성종 때에 이르러 팔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거두어 올렸다가 병화로 인해 타 없어졌다. 《신단실기》(각 유시 내용은 '구서의 유시' 주석 참조.)
7.【乙卯年】: 북애노인은 孝宗(1650∼1659)의 北伐 실패를 애석하다 하였으니, 여기서 말하는 乙卯年은 곧 효종 이후 어느 임금의 즉위 2년 乙卯年임을 말한다. 이에 해당하는 것은 肅宗 즉위 2년 乙卯年, 즉 肅宗 원년인 서기 1675년 뿐이므로, 이로 미루어《규원사화》의 저작 연대는 서기 1675년이 된다.
揆園史話卷之(上)1)
一 肇判記
太古, 陰陽未分, 洪몽久閉, 天地混沌, 神鬼愁慘, 日月星辰堆雜無倫, 壤海渾瀜, 군生無跡, 宇宙只是黑暗大塊, 水火相탕不留刹那; 如是者, 已數百萬年矣. 上界却有一大主神, 曰桓因, 有統治全世界之無量智能, 而不現其形體, 坐於最上之天, 其所居數萬里, 恒時大放光明, 麾下更有無數小神. 桓者, 卽光明也, 象其體也; 因者, 本源也, 萬物之藉以生者也.
태고에 음과 양이 아직 나누어지지 않은 채 아주 흐릿하게 오랫동안 닫혀 있으니, 하늘과 땅은 혼돈하였고, 신과 도깨비들은 근심하고 슬퍼하였으며, 해와 달과 별들은 난잡하게 쌓여 질서가 없었고, 흙과 바다는 뒤섞여 있어 뭇 생명의 자취는 아직 존재하지 않음에, 우주는 단지 커다란 암흑 덩어리일 뿐이며, 물과 불은 잠시도 쉬지 않고 서로 움쩍이는지라, 이와 같은지가 벌써 수백만년이나 되었다.
하늘에 무릇 한 분의 큰 주신(主神)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환인(桓因)이라 하는데, 전세계를 통치하는 가 없는 지혜와 능력을 지니고서, 그 모습은 나투지 않은채 하늘의 가장 높은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그 거처하는 곳은 수만 리나 떨어져 있지만 언제나 밝은 빛을 크게 내뿜고, 그 아래로는 또한 수많은 작은 신들이 있었다. '환(桓)'이라 함은 밝은 빛을 말하는 것이니 곧 근본 바탕을 모양으로 나타낸 것이며, '인(因)'이라 함은 말미암은 바를 말하는 것이니 곧 만물이 이로 말미암아 생겨났음을 나타낸 것이다.
爾時, 一大主神, 乃拱手默想曰: 「如今, 宇宙大塊, 冥閉已久, 混元之氣, 包蘊停축, 正要啓生化育. 若不진時開判, 何以成無量功德乎!」 乃召桓雄天王, 授命行剖判之業. 天王奉命辭出, 乃督諸神, 令各自大顯神通, 只看風雲晦冥유深?電光閃숙馳繞?雷霆팽굉震擊하得, 玉女失色, 百鬼遁竄. 於是, 洪몽肇判, 天地始分, 虛曠浩茫, 不可端倪. 乃命日月, 輪流相轉, 光麗於天, 照臨於地, 日行爲晝, 月行爲夜, 又命星辰周잡蒼穹, 以定四時, 以紀年日.
이때 한 분의 큰 주신이 손을 마주잡고 곰곰이 생각에 잠기다 이르기를 「지금과 같이 우주의 큰 덩어리가 어둠으로 닫힌지 이미 오래되어, 천지개벽의 기운이 감싸인 채 머물러 오다가 바야흐로 낳아 길러지기를 바라니, 만약 때가 다하였음에도 세상을 열어서 구분하여 주지 않는다면 어찌 가없는 공덕을 이룰 수가 있으리오」 하고는, 환웅천왕(桓雄天王)을 불러 세상을 가르고 나누는 작업을 명하였다. 천왕은 명을 받들고 물러나와서 여러 신들을 독려하여 각자에게 스스로의 신통력을 크게 발휘하게 하니, 단지 바람과 구름이 어둑어둑한 가운데 검푸른 빛이 깊어지고, 번개불이 일어나며 번쩍이는 섬광은 쏜살 같이 치달아 얽혀 드는 것만이 보일 뿐, 우뢰와 천둥소리는 맹호가 울부짖는 소리와 같은지라, 옥녀는 놀라서 낯색을 잃어버렸고, 모든 도깨비들은 도망쳐 숨어 버렸다.
그리하여 아주 흐릿하게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지기 시작하니, 그 나누어진 처음에는 텅하니 비어 있고 휑하니 넓은 것이 아무런 구별도 할 수가 없었다. 이에 해와 달에게 명하여 바퀴가 굴러가듯이 서로 돌아가며 하늘에서 고운 빛을 발하여 땅에 내려 비추게 하여, 해가 가는 것을 낮으로 삼고 달이 가는 것을 밤으로 삼았으며, 또한 별들로 하여금 창공을 두루 돌게 하여, 이로서 사시(四時)를 정하고 햇수와 날수를 기록하게 하였다.
雖然天地旣分, 日月輪轉, 而地界, 水火未定, 壤海混淪, 停축之氣, 未卽啓發化成矣. 一大主神, 再命桓雄天王大顯法力, 只看大地, 水(涯)[회]陸現而壤海始定, 火藏水動而萬物滋生. 於是, 草木托저, 昆蟲·鱗介·飛禽·走獸之屬, 振振生育·繁衍充인於地上三界. 盖自天地始分以來, 又十萬年矣.
그러나 비록 하늘과 땅을 나누고 해와 달을 운행하게 하였으나, 땅에는 물과 불이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하였고, 흙과 바다는 그 원기가 아직 나뉘지 않은 채 하나로 엉켜 있었으니, 멈추어 쌓여온 기운은 아직 열려 변화하지 못하였다.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환웅천왕에게 명하여 법력을 크게 드러내게 하니, 단지 큰 땅덩이만 보이던 것에서, 물이 휘돌아 나가며 뭍이 드러남에 흙과 바다가 비로소 나뉘어져 자리를 잡게 되니, 불의 기운은 잠들고 물의 기운이 움직여 만물이 무성하게 생겨나게 되었다. 이에 초목은 뿌리를 내리고, 곤충과 물고기 및 날짐승과 들짐승 등의 무리들은 무수히 자라나 땅 위의 삼계에 번성하여 가득하였다. 무릇 하늘과 땅이 처음으로 나누어진 이래 또 십만년이 지났다.
一大主神, 更聚衆神曰: 「今乘宇宙自然之運會, 已煩汝等出力, 剖判天地, 化生萬物, 功德自固無量. 但天地之間, 宜置萬物之長, 其名曰人, 可與天地참爲三才, 而作萬物之主. 元來天地停축之氣, 散爲萬物, 而靈秀之性.貞明之氣, 則尙鍾毓而不發; 今可啓導靈秀, 發放貞明, 而別作人衆, 비於군生之中, 自作主宰. 但此事須先有備, 不可造次.」 乃三命桓雄天王. 天王奉令, 依計頒行. 於是, 桓雄天王大召滿天(皇)[星]宿, 令分管上天諸事, 却令主神麾下無數小神, 一幷降落下界, 主治山岳.河川.洋海.沼澤.丘陵.原野.里社之基, 務要謹嚴平正, 不可有誤. 然後, 采天地靈秀之性.貞明之氣, 造成無數人生.
한 분의 큰 주신이 다시 뭇 신들을 모아 놓고 이르기를 「지금 우주의 자연스러운 기운을 타고 이미 너희들이 번거롭게 힘을 내어 하늘과 땅을 가르고 나누며 만물이 드러나게 하였으니, 그 공덕이 자고로 한량이 없구나. 그렇지만 하늘과 땅 사이에 마땅히 만물의 어른을 두어야 하기에 그 이름을 '사람'이라 할 것이니, 하늘 그리고 땅과 더불어 삼재(三才)로 삼아 만물의 주인이 되게 하리라. 원래 하늘과 땅의 멈춰 쌓였던 기운을 흩어지게 하여 만물이 되게 하였는데,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은 자못 모아 받았지만 이것을 밖으로 드러내지는 못하였다. 이제 신령하고 빼어남을 이끌어 내고 곧고 밝음을 드러내게 할 수 있게끔 따로 사람의 무리를 만들어서 이들로 하여금 뭇 생명 가운데 스스로 주인 노릇을 하게 할 것이다. 그러나 이 일은 마땅히 먼저 철저한 준비가 있어야 할 것이며, 절대 미루어서도 안된다」 하며 환웅천왕에게 세번째로 명을 내리니, 천왕은 명을 받들어 계획대로 널리 펴서 행하였다.
이에 환웅천왕은 하늘에 가득찬 별자리를 모두 불러 하늘 위의 모든 일을 나누어 맡게 하고, 주신(主神) 휘하의 무수한 작은 신들에 명령하여 하나같이 모두 하계에 내려가 산악과 하천, 해양과 소택, 구릉과 들판 및 마을들의 바탕되는 일들을 다스리게 하며, 근엄하고 공평하게 하여 잘못이 없도록 하였다. 그러한 후에 하늘과 땅의 신령하고 빼어난 성질과 곧고 밝은 기운을 가려 모아 무수한 사람들을 만들었다.
一大主神, 乃四命桓雄天王曰: 「如今, 人物業已造完矣. 君可勿惜厥勞, 率衆人, 궁自降落下界, 繼天立敎, 爲萬世後生之範.」 乃授之以天符三印曰: 「可持此, 敷化於天下.」 桓雄天王, 欣然領命, 持天符三印, 率風伯?雨師?雲師等三千之徒, 下降太白之山?檀木之下. 太白山者, 卽白頭山也. 衆徒推爲君長, 是爲神市氏. 自草木托저.禽獸滋生以來, 又十萬年也.
한 분의 큰 주신이 이에 네번째로 환웅천왕에게 명하기를 「이와 같이 사람과 만물을 일으키는 공적을 이미 이루어 완전하게 하였다. 그대는 그 노고를 너무 애석히 생각말고 뭇 사람들을 이끌어 몸소 하계에 내려가서, 하늘을 이어서 가르침을 세움으로서 만세토록 후생의 모범이 되도록 하라」 하고, 천부(天符)의 세가지 인(印)을 주며 말하기를 「이것을 가지고 널리 천하에 교화를 베풀어라」 하였다. 환웅천왕은 흔연히 명을 받들어 천부의 세 가지 인을 지니고서 풍백(風伯)·우사(雨師)·운사(雲師) 등 삼천의 무리를 거느리고 태백산의 밝달나무 아래로 내려왔다. '태백산'이라 함은 곧 백두산을 말한다. 뭇 무리들이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니, 그가 곧 신시씨(神市氏)이다. 초목이 뿌리를 내리고 금수가 무수히 생겨난 이래 또 십만 년이 되었다.2)
1.【卷之上】: 손진태는 손필본의 筆寫後記에서 「此書據無涯梁柱東君所藏本而轉寫. 無涯所藏, 亦非《揆園》原本則明白. 只存上卷一冊. 朝鮮思想史上, 可足謂一奇書, 故使人寫之(이 책은 무애 양주동군이 소장한 것에 의거하여 옮겨 적은 것이다. 무애가 소장한 것 역시 원본이 아님은 명백하다. 단지 윗 권 한 책이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조선의 사상사에 있어 가히 하나의 기서라 할 만하기에 사람을 시켜 옮겨 적었다)」라고 하였듯이, 본《규원사화》를 상권으로 보고 하권은 따로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한영본에서는 '卷之'로 기록하였으니, 이는 揆園史話卷之一肇判記,揆園史話卷之二太始紀, 揆園史話卷之三檀君紀라는 식으로 생각하여 앞의 중복되는 부분을 생략하였을 뿐일 것이다. 그렇게 여기는 이유로는 첫째, 만약 현재의《규원사화》전체에서 서문과 만설을 제외한 부분을 '한 권의 윗단(卷之上)'으로 보는 것은 당시 일반적인 권의 분량에 비해 그 양이 지나치게 방대하다. 둘째, 내용의 나눔에 있어서 '卷'을 최소 단위로 보는게 보통이며, 하나의 卷 안에서 내용을 다시 세분할 때는 주로 上·中·下의 형식을 사용할 뿐 一·二·三 등으로 세분하지 않음을 볼 때, 이미 나누어진 권(卷之上) 안에서라면 다시 그 아랫 나눔에서 一·二·三의 형식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셋째, 손필본에서 '卷之上'으로 보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조판기·태시기·단군기'를 上卷으로 보고 下卷인 '열국기(列國紀)'가 따로 있을 것이라 여기기 때문이다. 그러나 단군기의 말미에서 만설(漫說)로 넘어가는 문맥에 무리가 없어 보이며, 특히 맺음말의 역할을 하는 만설에서 그 앞에 언급된 내용들을 벗어나는 새로운 내용, 이를테면 열국기와 관련된 내용(소위 '列國紀'에 대한 유일한 언급은 '漫說'에서 「列國之時箕氏蒙東胡之侵」이라는 문구가 유일하다)이 전혀 없이 완전한 끝맺음을 하고 있기 때문에 따로 열국기가 있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그러나 단군기와 만설에는 권 가름의 숫자가 없으며, 조판기에는 '記'를, 태시기와 단군기에는 '紀'를 사용하고 있는 등, 권을 표기하는 방식에 있어서 체계를 잃고 있음은 사실이다.
2.【천지창조 신화】: 각 민족 역사의 머리에 나타나는 천지창조의 신화는《규원사화》에서와 같이 거의 대부분이 한 분의 주재자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에 반해 자연의 상태에서 처음의 신이 태어나는 것으로 기술된《일본서기》는 특이하다 하겠다. 여기서는 몽골과 일본,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의 창조신화인《성경》의 창세기 부분을 인용한다.
1)《몽골민속》7. 神話
아주 오랜 옛날 우주에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물 등 아무 것도 없었던 시절에 옥황상제는 오백살이었다. 옥황상제가 일천살이 되어서야 하늘과 땅이 나누어지기 시작했는데, 옥황상제가 하늘의 왕(天王)에게 하늘을 만들게 하고, 땅의 왕(地王)에게 땅을 만들게 하고, 물의 왕(水王)에게 물을 만들게 하고, 산의 왕(山王)에게 산을 만들게 하고서야 하늘과 땅 그리고 산과 물이 있기 시작했다. 하늘은 구름을 만들고 비를 내리는 것을 관장했고, 땅은 만물의 생장을 관장했고, 산은 산림수목을 관장했고, 물은 생명체에 수분을 공급했으나, 이 때도 하늘에 해와 달이 없어 옥황상제는 그의 아홉째 딸인 목단청모(牧丹靑姆)를 보냈다.
그녀는 금거울을 가지고 내려와 금거울로 해면(海面) 위를 일천육백번 갈자 바다가 밝아지기 시작했고, 이천육백번 갈자 동쪽에서 밝은 빛 둘레가 나타났고, 삼천육백번 갈았더니 태양이 나타났다. 후에 목단청모는 또 은거울을 가지고 바다 위를 삼천육백번 갈자 달이 나타났다. 태양이 앞에 가고 달이 그 뒤를 쫓아가는데, 태양이 곤륜산의 남쪽에 이르렀을 때 날이 밝았다. 이 때 달은 곤륜산의 북쪽에 있었으며, 달이 곤륜산의 남쪽에 이르렀을 때 날이 어두워졌다. 태양이 다시 곤륜산의 북쪽에 있었고, 해와 달은 곤륜산을 경계로 반복해서 좇아다녔다. 해와 달의 밤낮은 이렇게 해서 형성된 것이다.
2)《일본서기(日本書紀)》권 제1, 神代 上
그 옛날 하늘과 땅이 아직 갈리지 아니하여 음양이 나누어지지 않았을 때 계란과 같이 혼돈하였고 흐릿한 가운데 형상의 싹이 포함되어 있었다. 맑고 양(陽)의 기운을 지닌 것은 엷게 나부껴서 하늘이 되고 무겁고 탁한 것은 당기고 엉키어 땅이 되었을 때, 정교하고 미묘한 것은 상승하기 쉬웠으나 무겁고 둔탁한 것은 엉키고 굳어지기가 어려웠다. 그러므로 하늘이 먼저 이루어지고 땅이 그 뒤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한 후에 신이 그 가운데에서 생겨났다. 개벽의 초에 나라의 땅이 떠 움직이는 것이, 말하자면 노니는 고기가 물 위에 떠다니는 것과 같았다. 이 때 하늘과 땅 가운데 하나의 사물이 생겨났다. 갈대싹과 같았다. 문득 변하여 신이 되었다. 국상입존(國常立尊)이라 일렀다. 다음을 국협퇴존(國狹槌尊), 그 다음을 풍짐순존(豊斟淳尊)이라 하였다. 모두 세 신이다. 건도(乾道)가 홀로 변화하여 이 순수한 사내로 이루어진 것이다.
3)《성경(聖經)》구약(舊約) 창세기 천지창조
한 처음에 여호와께서 하늘과 땅을 지어 내셨다. 땅은 아직 모양을 갖추지 않고 아무 것도 생기지 않았는데, 어둠이 깊은 물 위에 뒤덮여 있었고 그 물 위에 여호와의 기운이 휘돌고 있었다.
여호와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겨났다. 그 빛이 여호와께서 보시기에 좋았다. 여호와께서는 빛과 어둠을 나누시고 빛을 낮이라, 어둠을 밤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첫날이 밤?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물 한가운데 창공이 생겨 물과 물 사이가 갈라져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창공을 만들어 창공 아래 있는 물과 창공 위에 있는 물을 갈라 놓으셨다. 여호와께서 그 창공을 하늘이라 부르셨다. 이렇게 이튿날도 밤?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하늘 아래 있는 물이 한 곳으로 모여, 마른 땅이 드러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마른 땅을 뭍이라, 물이 모인 곳을 바다라 부르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여호와께서 "땅에서 푸른 옴이 돋아나거라! 땅 위에 낟알을 내는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나거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땅에는 푸른 움이 돋아났다. 낟알을 내는 온갖 풀과 씨 있는 온갖 과일나무가 돋아났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사흗날도 밤?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하늘 창공에 빛나는 것들이 생겨 밤과 낮을 갈라 놓고 절기와 나날과 해를 나타내는 표가 되어라! 또 하늘 창공에서 땅을 환히 비추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만드신 두 큰 빛 가운데서 더 큰 빛은 낮을 다스리게 하시고 작은 빛은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또 별들도 만드셨다. 여호와께서는 이 빛나는 것들을 하늘 창공에 걸어 놓고 땅에 비추게 하셨다. 이리하여 밝음과 어둠을 갈라 놓으시고 낮과 밤을 다스리게 하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이렇게 나흗날도 밤?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바다에는 고기가 생겨 우글거리고 땅 위 하늘 창공 아래에는 새들이 생겨 날아 다녀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리하여 여호와께서는 큰 물고기와 물 속에서 우글거리는 온갖 고기와 날아 다니는 온갖 새들을 지어 내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여호와께서 이것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새끼를 많이 낳아 바닷물 속에 가득히 번성하여라. 새도 땅 위에 번성하여라!" 이렇게 닷샛날도 밤?낮 하루가 지났다.
여호와께서 "땅은 온갖 동물을 내어라! 온갖 집짐승과 길짐승과 들짐승을 내어라!"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여호와께서는 이렇게 온갖 들짐승과 집짐승과 땅 위에 기어 다니는 길짐승을 만드셨다.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여호와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 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여호와께서 다시, "이제 내가 너희에게 온 땅 위에서 낟알을 내는 풀과 씨가 든 과일나무를 준다. 너희는 이것을 양식으로 삼아라. 모든 들짐승과 공중의 모든 새와 땅 위를 기어 다니는 모든 생물에게도 온갖 푸른 풀을 먹이로 준다" 하시자 그대로 되었다. 이렇게 만드신 모든 것을 여호와께서 보시니 참 좋았다. 엿샛날도 밤 낮 하루가 지났다.
이리하여 하늘과 땅과 그 가운데 있는 모든 것이 다 이루어졌다. 여호와께서는 엿샛날까지 하시던 일을 다 마치시고, 이렛날에는 모든 일에서 손을 떼고 쉬셨다. 이렇게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새로 지으시고 이렛날에는 쉬시고 이 날을 거룩한 날로 정하시어 복을 주셨다. 하늘과 땅을 지어 내신 순서는 위와 같았다.
二 太始紀
神市氏旣爲君長, 以神設敎, 存其彛性, 周護飽養, 聽其繁衍, 天下民物, 於是漸盛. 但此時, 開闢不遠, 隨處草木荒茂鳥獸雜處, 人民艱困殊甚, 且猛獸.毒蟲不時衝動, 人民被害不少. 神市氏, 卽命蚩尤氏治之. 蚩尤氏, 實爲萬古强勇之(租)[祖], 有旋乾轉坤之力, 驅使風.雷.雲.霧之能, 又造刀.戟.大弩.巨斧.長槍, 以之而治草木.禽獸.蟲魚之屬. 於是草木開除, 禽獸蟲魚, 僻處深山大澤, 不復爲民生之害矣. 是以, 蚩尤氏世掌兵戎制作之職, 時常鎭國討敵, 未嘗少懈.
太始紀
신시씨가 임금이 되어 신(神)으로서 가르침을 베풀며,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보존케하고 두루 보살펴 배불리 먹이고 양육하며 무성하게 불어남을 모두 받아들이니, 천하의 백성과 사물은 이로서 번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 때는 개벽한 지 아직 멀지 않은 때인지라, 곳곳에 초목이 무성하고 날짐승이며 들짐승이 어지러이 섞여 있어 사람들의 괴로움이 매우 심하였고, 더욱이 사나운 짐승과 독충들도 때를 가리지 않고 다투었기에 사람들의 피해 또한 적지 않았다.
신시씨는 곧 치우씨(蚩尤氏)에게 명하여 이를 다스리게 하였다. 치우씨는 진실로 만고에 있어 강인하고 용맹함의 조상이 되니, 천지를 움직여 휘두르는 힘과 바람·번개·구름·안개를 부리는 능력을 지니고 있었으며, 또한 칼·창·큰도끼·긴창 등을 만들어 이로서 초목과 금수며 벌레와 물고기의 무리를 다스렸다. 이에 초목이 차츰 걷히고 금수와 벌레며 물고기들이 깊은 산 속이나 큰 못 속으로 피하여 달아나 숨어 버려서 다시는 백성들이 살아가는데 해악이 되지 않았다. 이로서 치우씨는 대대로 병기 만드는 일을 맡았으며, 항시 나라 안을 편안하게 안정시키고 적을 토벌하는 일을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神市氏, 見人居已完.蠢物各得其所, 乃使高矢氏, 專掌궤養之務, 是爲主穀. 而時, 稼穡之道不備, 又無火種, 民皆就食草蔬木實, 철鮮血, 茹生肉, 殆不堪其苦. 高矢[乃氏](氏, 乃)漸敎稼穡之方, 猶以無火爲憂. 一日, 偶入深山, 只看喬林荒落, 但遺骨骸老幹枯枝, 交織亂叉. 立住多時, 沈吟無語, 忽然大風吹林, 萬竅怒號, 老幹相逼, (揆)[擦]起火光, 閃閃삭삭, 乍起旋消乃猛然, 省悟曰: 「是哉! 是哉! 是乃取火之法也.」 歸取老槐枝, (揆)[擦]而爲火, 功猶不完. 明日, 復至喬林處, 徘徊尋思, 忽然一個條紋大虎, 咆哮躍來, 高矢氏大叱一聲, 飛石猛打, 誤中巖角, 炳然生火. 乃大喜而歸, 復擊石取火. 從此, 民得火食, 鑄冶之術始興, 而制作之功, 亦漸進矣.
신시씨는 사람의 거처가 이미 완비되고 살아서 꿈틀거리는 사물들 또한 각기 그 마땅한 처소를 얻었음을 보고, 이에 고시씨(高矢氏)로 하여금 먹여 살리는 일을 맡도록 하였으니, 그것은 곡식을 주관하는 일이다. 이때는 곡식을 심고 거두는 일이 아직 갖추어져 있지 않았으며 불씨 또한 없던 때라, 백성들은 모두 풀의 푸성귀나 나무의 열매를 먹고 신선한 피를 마시며 날고기를 먹었으니, 그 고초는 참아내기 어려웠다.
고시씨가 이에 점차 곡식을 심고 거두는 방법은 가르쳤으나, 여전히 불이 없는 것이 근심이 되었다. 하루는 우연히 깊은 산 속에 들어가니 높이 우뚝 솟은 나무들이 어지럽게 쓰러져 있는 것이 온 사방으로 보였는데, 앙상하고 말라버린 체로 메마른 가지들만이 남아서 서로 어지럽게 얽혀져 있었다. 한참 동안 아무 말 없이 서 있으려니, 갑자기 숲으로 큰 바람이 불어와 모든 구멍들이 성난 목소리를 내뱉고 앙상한 가지들은 서로 밀치며 비벼대었는데, 마찰되어 일어나는 불길이 번쩍번쩍 빛나는 듯 언뜻 일어나다가는 도리어 사글어드는듯 하더니 이내 맹렬하게 타오르는지라, 깨달음이 있어 이르기를 「이것이로다! 이것이로다! 이것이 바로 불을 얻을 수 있는 방법이로구나」 하였다. 돌아와서 마른 홰나무 가지를 비벼 불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아직까지는 완전하지 못하였다. 다음 날 다시 숲속으로 가서 생각에 잠겨 배회하고 있으려니, 홀연히 한 마리의 줄무늬 범이 으르렁거리며 달려들기에, 고시씨가 벽력과 같은 소리로 꾸짖으며 돌을 날려 호되게 내려치니 바위 모서리에 빗맞으며 번쩍이면서 불길이 일어났다. 이에 크게 기뻐하고 돌아와 다시 돌을 부딪쳐서 불을 얻게 되었다. 이로부터 백성들은 음식을 익혀 먹을 수 있게 되었고, 주조하는 기술이 비로소 흥성하게 되었으며, 제작의 능률 또한 점차 나아지게 되었다.
又使神誌氏作書契. 盖神誌氏, 世掌主命之職, 專管出納獻替之務, 而只憑唯舌, 曾無文字記存之法. 一日, 出行狩獵, 忽驚起一隻牝鹿, 彎弓欲射, 旋失其(跡)[踪]. 乃四處搜探, 遍過山野, 至平沙處, 始見足印亂鑽, 向方自明, 乃俯首沈吟, 旋復猛省曰: 「記存之法, 惟如斯而已夫! 如斯而已夫!」 是日, 罷獵卽歸, 反復審思, 廣察萬象, 不多日, 悟得창成文字, 是爲太古文字之始矣. 但後世年代邈遠, 而太古文字泯沒不存, 抑亦其組成也, 猶有不完而然歟. 嘗聞, 六鎭之地及先春以外岩石之間, 時或發見雕刻文字, 非梵非篆, 人莫能曉, 豈神誌氏所作古字歟.
또한 신지씨(神誌氏)로 하여금 글을 짓게 하였다. 무릇 신지씨는 대대로 임금의 명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으며 명령의 출납과 임금을 보좌하는 임무를 관리하였는데, 단지 한낱 혀에만 의지할 뿐, 일찍이 글로서 기록하여 보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하루는 사냥을 나갔는데, 갑자기 놀라 달아나는 암사슴 한 마리를 보고 활을 당겨 쏘려 하였으나 순식간에 그 종적을 놓쳐 버렸다. 이에 사방을 수색하며 산과 들을 두루 지나 넓은 모랫벌에 이르러 비로소 어지럽게 찍혀있는 발자국을 보니 달아난 방향이 명확하게 드러나는지라, 머리를 숙인 채 생각에 잠겼다가 잠시간에 불현듯 깨달아 말하기를 「기록하여 두는 방법은 오직 이와 같을 따름이구나! 이와 같을 따름이야!」 하였다. 그 날 사냥을 마치고 돌아와 연거푸 깊이 생각하며 널리 만물의 모습을 관찰하다가, 며칠 지나지 않아 깨달음을 얻어 글을 만들어 내니, 이것이 태고 문자의 시작이다. 그러나 후세에 세월이 까마득히 오래되어서 태고 문자는 사라지고 존재하지 않으니, 생각건대 그 꾸밈새가 아직은 완전하지 못해서가 아닌가 한다. 듣건대, 육진(六鎭)1)의 땅이나 선춘(先春) 등지의 암벽 사이에 때때로 문자를 조각한 것이 발견되었다고 하는데, 범자(梵字)도 아니요 전자(篆字)도 아닌 것으로 사람들이 능히 알아먹지 못한다고 하니, 어쩌면 그것이 신지씨가 지은 옛문자가 아닌가 한다.
高矢氏, 亦世掌主穀之職, 而後世蚩尤.高矢.神誌之苗裔, 繁衍最盛. 蚩尤氏之族, 則占居西南之地; 神誌氏之族, 則繁殖於北東之地; 獨高矢氏後裔, 廣處東南, 轉流爲辰弁諸族, 後之所謂三韓者, 皆其孫也. 三氏苗裔, 又細分九派, 卽견夷.우夷.方夷.黃夷.白夷.赤夷.玄夷.風夷.暘夷之屬, 皆異支同祖, 不甚相遠. 夷之爲言, 大弓之稱也. 盖自蚩尤氏作刀.戟.大弩以後, 狩獵征戰, 賴以爲武, 中土諸族, 甚畏大弓之用, 聞風膽寒者久矣. 故謂我族曰夷.《說文》所謂: 「夷, [人人大]人人弓, 東方之人」者, 是也. 乃至仲尼《春秋》之作, 而夷之名, 遂與戎狄幷爲腥조之稱, 憤哉! 後世견夷,風夷, 分遷西南, 恒與中土諸族, 互相힐항, 風夷則卽蚩尤(氏)之一族也.
고시씨 역시 대대로 곡식을 주관하는 직책을 맡았으며, 후세에 치우씨·고시씨·신지씨의 후예들이 가장 번창하여 융성하였다. 치우씨의 부족은 서남의 땅에 자리를 잡았고, 신지씨의 부족은 북동의 땅에 많이 정착하였는데, 오로지 고시씨의 후예들만이 동남쪽에 넓게 거처하다가 더욱더 이동하여 변진(辰弁)의 뭇 부족들이 되었으니, 후에 삼한(三韓)이라 일컬어지는 것은 모두 그의 후손들이다.
삼씨(三氏)의 후예들은 또한 아홉 갈래로 자세하게 나누어지는데, 곧 견이(견夷)·우이(우夷)·방이(方夷)·황이(黃夷)·백이(白夷)·적이(赤夷)·현이(玄夷)·풍이(風夷)·양이(暘夷)의 무리들이 모두 같은 조상의 다른 가지일 뿐, 서로 그리 멀지는 않다.2) '이(夷)'자는 큰 활을 지칭하는 것이다. 치우씨가 칼과 창이며 큰 쇠뇌를 만들기 시작한 이후로 사냥하고 전쟁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을 병장기로 삼으니 중토의 뭇 부족들이 큰 활의 쓰임을 매우 두려워하였으며, 그 위풍을 듣고 간담이 서늘하곤 한 지가 오래되었기에 우리 민족을 일컬어 '이(夷)'라고 한 것이다.《설문해자(說文解字)》에 이르기를 「이(夷)는 '크다(大)'는 것과 '활(弓)'에서 유래하였으며, 동방의 사람을 말한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나 중니가《춘추》를 짓기에 이르러 이(夷)의 이름을 마침내 융(戎)이나 적(狄) 등과 아울러 비속한 명칭으로 삼아 버리니, 분할 따름이다.3) 뒷날 견이와 풍이는 따로 서남으로 옮겨가서 항시 중토의 여러 부족들과 서로 엎치락 뒷치락 세력을 다투었는데, 풍이는 바로 치우씨의 일족이다.4)
先是, 蚩尤氏, 雖然驅除鳥獸충魚之屬, 而人民猶在土穴之中, 下濕之氣逼人成疾. 且禽獸一經窘逐, 漸自退避藏匿, 不便於屠食. 神市氏, 乃使蚩尤氏, 營造人居; 高矢[氏], 生致牛.馬.狗.豚.雕.虎之獸而牧畜; 又得朱因氏, 使定男女婚娶之法焉. 盖今之人謂匠師曰智爲者, 蚩尤氏之訛也; 耕農樵牧者, 臨飯而祝高矢者, 高矢氏之稱也; 婚娶之主媒者曰朱因者, 亦朱因氏之遺稱也.
이 보다 앞서, 치우씨가 비록 그렇게 날짐승과 들짐승 및 벌레와 물고기 등의 무리를 몰아내긴 하였지만, 사람들은 아직까지 흙굴에서 사는 까닭에 아래로부터의 습한 기운이 사람에게 해를 끼쳐 질병을 일으켰다. 게다가 짐승들을 한차례 휘몰아 내쫓으니, 점차 스스로 물러나 피하고 숨어 버린 까닭에 잡아먹기에 불편하였다. 신시씨가 이에 치우씨로 하여금 사람이 거처할 만한 것을 짓게 하였으며, 고시씨에게는 소·말·개·돼지·수리·범 등의 짐승을 사로잡아 데려와서 가두어 기르게 하였으며, 또 주인씨(朱因氏)를 신임하여 그에게 남녀간에 장가들고 시집가는 법을 정하게 하였다. 무릇 지금의 사람들이 힘센 장사를 두고 '지위'라 함은 치우씨의 이름이 잘못 전하여 진 것이며, 밭갈고 농사짓거나 나무를 하고 짐승을 기르는 사람들이 밥을 먹을 때 '고시례' 하며 축원하는 것은 고시씨를 일컫는 것이며, 혼인에서 중매를 서는 것을 '주인 선다'라고 말하는 것 또한 주인씨의 이름에서 남겨진 명칭이다.
此時, 神市氏之降世, 已數千載, 而民物益衆, 地域愈博. 於是, 復置主刑.主病.主善惡及監董人民之職, 以獸畜名官, 有虎加.牛加.馬加.鷹加.鷺加之稱. 盖牛.馬.狗.豚之屬, 皆當時民衆養生之料, 而賴以爲業者也; 虎與鷹.鷺者, 境內棲息之鳥獸, 而以表官職之[性也. 後世夫餘國, 猶傳此俗, 亦以獸畜名官, 此不可탄述焉.
이때는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온지 이미 수천 년이 되었으니, 백성과 사물들은 더욱 많아졌고 땅의 경계는 더욱 넓어졌다. 이에 다시 형벌과 질병 및 선악을 주관하고 백성들을 보살펴 이끌 수 있는 직책을 설치하고,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이름하였으니, 호가(虎加)·우가(牛加)·마가(馬加)·응가(鷹加)·노가(鷺加)5) 등의 명칭이 있게 되었다. 무릇 소와 말 그리고 개와 돼지 등의 무리는 모두 당시에 백성들이 기르는 것으로서, 이에 의지하여 생업을 삼았던 것이며, 범과 매 및 해오라기 등은 나라안에 서식하는 새와 짐승들이니, 이로서 관직의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후세 부여국(夫餘國)에도 여전히 이러한 풍속이 전해져 역시 금수와 가축의 이름으로 벼슬을 일컬었다 하는데, 이를 모두 빠짐없이 적을 수는 없다.
神市氏, 旣立敎御民, 民皆協洽. 乃登太白之전, 臨大荒之野, 觀天地寂然而氣機無息, 日月奔馳而貞明不易, 春秋代序而萬物循回, 乃推天地玄妙之理, 倚數觀變而創成人民依從之則, 是乃易理之原也. 當是之時, 遼瀋.幽燕之地, 已爲我族耕農游牧之所. 伏犧氏, 適以是時, 生於風族之間, 熟知倚數觀變之道, 乃西進中土, 代燧人之世而爲帝, 又得史皇之輔.河圖之瑞, 畵成八卦, 爲中土易理之元祖. 盖陰陽消長之理, 發源於我而卒爲彼國之用, 近世禹倬, 以傳《易》之故, 反爲偉功, 造翁難測之意, 盖亦怪哉! 伏犧氏, 自能馴伏犧牲, 威降豺豹, 伏犧之名, 因於是也, 生於風族, 以風爲故姓也. 以龍紀官者, 亦原於虎加.馬加之類也.
신시씨가 이미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거느리니 백성들은 모두 서로 도우며 흡족히 여겼다. 이에 태백(太白)의 꼭대기에 오르고 대황(大荒)의 들녘에 이르러 천지를 바라보니 쓸쓸하고 고요할지언정 그 기운의 틀은 쉼이 없었다. 해와 달은 정신없이 달음박질치면서도 곧고 밝음은 변하지 않았으며, 봄과 가을은 차례대로 잇대어 가고 만물은 쉬지 않고 자꾸만 쫓아 돌아갔다. 이에 천지의 깊고도 묘한 이치는 숫자에 의지하여 그 변화를 살펴볼 수 있음을 미루어 깨닫고, 사람들이 의지하여 따를 만한 법칙을 새로 만드니, 이것이 곧 역리(易理)의 근원이다.
당시에는 요동의 심양 및 유연(幽燕)6)의 땅이 이미 우리 민족들이 농사짓고 유목하던 곳이었다. 복희씨(伏犧氏)7)가 마침 이때에 풍족(風族)에서 태어나서 숫자에 의지하여 변화를 바라보는 이치에 대하여 자세히 익힌 뒤, 서쪽으로 중토로 나아가 수인씨(燧人氏)의 세상을 이어 황제가 되어 사황(史皇)의 도움과 하도(河圖)의 상서러움을 얻어서 팔괘(八卦)를 그리니, 중토 역리(易理)의 원조가 되었다. 무릇 음과 양이 줄고 늚에 대한 이치는 우리로부터 발원하였으나 마침내 저들 나라의 쓰임이 되었는데, 근세에 와서 우탁(禹倬)8)이《역(易)》을 전한 까닭으로 도리어 위대한 공로자가 되었다 하니, 조물주의 헤아리기 어려운 뜻은 또한 괴이하다 할 것이다. 복희씨는 스스로 능히 희생(犧牲)을 잘 길들이고 복종케 하여 그 위엄이 승냥이와 표범에까지 이르렀기에 '복희(伏犧)'라는 이름이 그로 연유한 것이며, 풍족에서 태어난 까닭으로 '풍'을 성씨로 삼았다. 용(龍)으로 벼슬을 기록한 것 또한 호가(虎加)나 마가(馬加)라고 일컬음과 같은 유형에서 근원한 것이다.
神市氏御世愈遠, 而蚩尤.高矢.神..朱因諸氏, 幷治人間三百六十六事, 男女.父子.君臣.衣服.飮食.宮室.編髮.盖首之制, 次第成俗, 普天之下, 悉化其沾. 制治漸敷, 而政敎禮儀逐漸稍備, 初之于于휴휴草衣木食者, 始入人道之倫矣. 嗚呼偉哉!]9)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더욱 오래되니, 치우·고시·신지·주인씨 등이 모두 같이 사람간의 삼백 예순 여섯 가지 일을 다스려, 남녀와 부자 및 군신간의 일이며, 의복과 음식 및 궁실의 일은 물론, 머리카락을 땋고 머리를 덮는 일에 관한 법도를 차례차례 풍속으로 이뤄가게 하였기에 하늘이 덮고 있는 곳이면 모두 그 교화에 물들어 갔다.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치고 다스림과 가르침이며 예절과 의례 등도 점차 따라서 조금씩 갖추어져 가니, 처음에는 아는 바가 없이 제 멋대로 날뛰며 풀로서 몸을 가리고 나무 열매를 먹던 사람들이 비로소 사람된 도리로서의 윤리에 접어들게 되었다. 오호라 그 위대함이여!
夫六合之外, 聖人存而不論, 六合之內, 聖人論而不議;《春秋·經世》, 先王之志, 聖人議而不辯. 鴻몽肇判而萬物滋生, 則余聞諸耆老, 神人降世而民物漸繁, 制治漸敷[政而](而政)敎始成, 則余徵諸斷簡破編. 夫六合之外, 洪荒之世, 聖人曾不詳辨區區, 後生安得以窺其一斑哉! 至如唐虞三代.秦.漢.隋.唐者, 中國歷代之謂也; 험윤.훈죽.荊蠻.越裳之屬, 則上古戎狄之稱也. 漢武之世, 始通西域, 月氏,安息.奄蔡.焉嗜.于전.계賓諸國, 始現於載籍中; 多民, 隨畜牧, 逐水草往來者, 及被髮裸身之類. 及若大秦之國, 遠在西海之西, 地方數千里, 領四百餘城, 小國役屬者數十, 以石爲城郭, 列置郵亭, 人皆곤頸而衣(文)[紋]繡, 乘輜병出入所居, 城邑周(圍)[환]百餘里, 宮室皆以水精爲柱, 以至殊俗珍風.奇寶異貨之産, 不可탄述, 盖想見其殷富盛(疆)[彊]之風矣. 漢.章和中, 班超遣甘英, 由條支欲通大秦而不果, 及至桓帝.延熹中, 其主安敦遣使始通. 降至唐代, 又有당項.吐蕃.波斯.大食之國, 或交侵.洛, 或航通商舶, 而赤髮綠睛.巨幹長軀之徒, 罕至出入宮庭. 宋代, 有提擧市舶司之職, 專管西域買遷之業. 近代, 明.萬曆中, 有利瑪竇者, 自廣東轉入北京, 有數理曆法之書, 使行之從燕還者, 或傳其說. 盖其國, 與古之大秦同在西域之西, 與古來諸國逈殊云. 噫! 天下廣矣, 生民之來久矣. 未知, 後世果有巨人一目之國, 復自東南來, 通於此世否.
무릇 우주의 밖은 성인이 그대로 간직해 둘 뿐 의론하진 않고, 우주의 안은 성인이 대체의 강령만 의론할 뿐 그 근원까지는 논의하지 않는다 하였다.《춘추》의 <경세편>에, 앞선 성군의 뜻은 성인이 명분품절만 의론할 뿐 그에 대한 자세한 시비를 논변하진 않았다 하였다. 천지자연의 원기가 처음으로 나눠지고 만물이 무성하게 자라난 것은, 곧 내가 뭇 노인네들에게 듣기로 신시씨가 세상에 내려옴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 번성하고 제도로서 다스림이 점차 두루 미쳐서 사물을 다스리는 일과 가르쳐 육성하는 일이 비로소 이루어졌다 하였으니, 이것을 내가 어찌 쪼개고 나누어 밝힐 수 있을 것인가. 무릇 우주 밖의 아주 오랫적 세상에 대해서는 성인들도 아직 하나하나 상세히 나누어 놓지 않았는데, 후손이 어찌 그 일부분일지언정 헤아릴 수 있겠는가.
당요(唐堯)10)와 우순(虞舜)11) 및 하(夏)·은(殷)·주(周)의 삼대 및 진(秦)·한(漢)·수(隋)·당(唐)과 같은 것은 중토의 역대를 말하는 것이며, 험윤(험윤)과 훈육(훈죽) 및 형만(荊蠻)과 월상(越裳) 등의 무리는 상고 시대의 중국 변방 민족을 가리키는 것이다. 한나라 무제 때 처음으로 서역과 통하여 월지(月氏)12)·안식(安息)·엄채(奄蔡)·언기(焉嗜)·우전(于전)13)·계빈(계賓) 등의 나라들이 비로소 서적 가운데 나타나게 되었는데, 이러한 많은 민족들은 목축을 하며 물과 풀을 좇아 오가고 머리를 풀어 늘어트리거나 벌거숭이 몸을 한 부류들이다. 대진(大秦)과 같은 나라는 멀리 서해의 서쪽에 있으면서 영토는 사방 수천 리에 사백여 성을 거느리고 있으니, 작은 나라로서 지배를 당하는 것이 수십 개나 된다고 한다. 돌로 성곽을 쌓고 역말의 객사를 열지어 설치하였으며, 사람들은 모두 목덜미까지만 머리를 기르고, 수놓은 옷을 입으며, 덮개가 있는 수레를 타고 거처하는 곳을 출입하며, 성읍은 그 주위가 백여 리로 궁실은 모두 수정으로 기둥을 하는 등, 별스럽고 진귀한 풍속과 기이한 보물과 재화의 산출에 이르기까지 모두 자세히 말할 수가 없다고 하니, 그 번성하고 부강한 기풍은 그저 미루어 볼뿐이다.14)
한나라 장화(章和) 연간에 반초(班超)가 감영(甘英)을 보내어 조지(條支)를 경유하여 대진과 통교하려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고, 환제(桓帝) 연희(延熹) 연간에 이르러 그 나라의 주인인 안돈(安敦)이 사신을 파견하자 비로소 통교하게 되었다. 후세 당나라 시대에 이르러 또한 당항(黨項)·토번(吐蕃)·파사(波斯)·대식(大食) 등의 나라가 있어 혹은 번갈아 앙락을 침범하거나 상선을 보내와 통상을 하였는데, 붉은 머리칼에 푸른 눈을 가진 큰 몸뚱이와 큰 키의 무리들로서 드물게는 궁정에까지 출입하였다. 송나라 시대에는 제거시박사(提擧市舶司)15)라는 벼슬이 있었는데 오로지 서역과의 교역 업무만을 전담하였다. 근대의 명나라 만력(萬曆) 연간에 이마두(利瑪竇)16)라는 자가 있어 광동으로부터 북경으로 옮겨왔는데 수리(數理)와 역법(曆法)에 관한 책을 가지고 있었다고, 사신으로 갔던 무리 가운데 북경에서 돌아온 어떤 사람이 간혹 그 예기를 전하였다. 대저 그 나라는 옛날의 대진과 같이 서역의 서쪽에 있으나 예로부터 내려오는 여러 나라와는 사뭇 다르다 하니, 오호라! 천하는 넓고도 넓으며 사람이 생겨난 지는 오래고도 오래구나. 후세에 과연 외눈박이 거인의 나라가 있어, 다시 동남쪽으로부터 와서 이 세상과 통교를 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盖異風殊道之國, 星羅碁布於普天之下, 時移物換而逐漸交通. 想於神市氏之世, 坐而論之, 則安知世間有奄蔡.安息.天竺.大秦之國耶. 然則, 高辛氏之世, 所謂「執中而遍天下, 日月所照, 風雨所至, 莫不[服]從」者, 盖亦自好之(說)[言]也. 余절(蚩)[嗤]之可惜, 近世學者, 拘於漢籍, 溺於儒術, 혼혼然以外夷自甘, 動稱華夷之說.
무릇 풍속이 다르고 법도가 틀린 나라가 하늘 아래 별처럼 늘어서 있고 바둑돌처럼 퍼져 있다가 시대가 흐르고 사물이 교환되면서 점차 서로 통하게 되는 것이니, 생각건대 신시씨의 시대에 앉아서 세상을 얘기하면서 이 세상에 엄채나 안식이며 천축이나 대식과 같은 나라가 있었음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한 즉 고시씨 세대에 이른바 '한가운데를 잡아 그 교화가 천하에 두루 미치니, 해와 달이 내려 비치는 곳과 비와 바람이 닿는 곳마다 복종치 않는 자가 없었다'라고 한 것은 아마도 스스로를 훌륭하게 여긴 말일 것이다. 내가 남몰래 냉소하면서도 애석해 하는 것은, 근세의 학자들이 한나라의 서적에 얽매여 유교의 술수에 빠지고 흐리멍덩해져 '바깥 오랑캐(外夷)'라는 말을 스스로 달갑게 받아들여서 걸핏하면 '화이(華夷)'의 논리를 입에 올리는 일이다.
余於盛筵, 賓朋齊會, 皆雄談峻論之輩, 余因醉揚臂而呼曰: 「君等皆云華夷, 焉知我非華而中原之爲夷耶! 且夷者, 從大從弓, 東人之稱, 太古我朝鮮, 以武强鳴於世, 故中原之士, 聞風懼之, 夷豈是戎狄之賤名耶! 國自上古, 人皆强勇質直, 雅好禮讓, 中土有'東方君子之國'之稱焉, 我國豈本戎狄之類哉! 鴨水以外, 縱橫萬里之地, 是乃我往聖先民, 艱苦經營之地也, 豈本是漢家物耶! 孔子之世, 周室旣衰, 外族交侵, 려王敗死於犬戎, 其他北狄.荊蠻.山戎無終之屬, 侵핍不已, 我族亦以是時, 威振中土. 故孔子, 慨王政之不敷, 恨列國之交侵, 有志而作《春秋》, 尊華攘夷之說, 於是乎始立. 若使孔子, 生於我邦, 則寧不指中土而謂戎狄之地乎!」 滿座冷笑或驚怪, 不小縱有然之者, 竟不快應, 余蹴床而起, 人皆謂淸狂殊甚, 可(難)[歎]. 前者, 滿洲之有흔, 廟議紛운斥和者, 亦以尊周爲重, 余不知其可矣. 若余復出此言於제輩, 則渠等應必, 大驚小怪, 殆將不齒, 豈怪彼輩言. 箕子之化則信, 漢武之討滅則信, 唐高之平定則信, 而殊不知, 我先民却有赫赫武勳之有足誇耀者耶! 余悲, 世俗不察其變漫, 以仲尼尊攘之意, 自誤焉.
내가 어느 성대한 잔치 자리에서 손님이며 벗들과 함께 모였는데, 모두 뛰어난 말솜씨로 그럴싸한 말들을 하는 무리들이기에 내가 취기를 빌어 팔뚝을 걷어올리고 탄식하며 이르기를 「그대들이 모두 '화이(華夷)'를 말하는데, 우리가 어찌 중화가 아닐 것이며 중원이 도리어 오랑캐가 됨을 그대들이 어떻게 알겠는가!17) 또한 '이(夷)'라 함은 '크다'는 것과 '활'이라는 의미에서 유래하여 동방의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서, 오랜 옛적 우리 조선이 무예가 강성하여 세상에 이름을 드날린 때문에 중원의 선비들이 그 풍문을 듣고 두려워하여 그렇게 이름한 것인데, 이(夷)가 어찌 융(戎)이나 적(狄)과 같은 천한 이름이겠는가!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사람들이 모두 굳세고 날래며 품성 또한 강직하고 올바르기에 평소에도 예의와 양보를 좋아하여 중원에는 '동방 군자의 나라'라는 말이 있게 되었는데, 우리나라가 어찌 그 근본이 융·적 등의 무리와 같다는 말인가! 압록강 바깥 사방 1만 리의 땅은 예전에 우리의 성인과 앞선 백성들이 어려움으로 일구어 온 땅인데, 어찌 본시 한나라 놈들의 물건이겠는가! 공자의 시대에 주(周) 왕실이 이미 쇠퇴하여 바깥 민족들이 번갈아 침범하니 여왕(려王)이 견융(犬戎)에게 패하여 죽게 되었고, 그 밖에 북융(北戎)이며 형만(荊蠻)과 산융(山戎) 등 끊임없는 무리들이 침략하여 핍박하길 마지않았으며, 우리민족 또한 이때에 위엄을 중토에 떨쳤었다. 때문에 공자가 왕의 다스림이 널리 미치지 못함을 개탄하고 여러 나라가 번갈아 침범함을 한탄하며 뜻이 있어서《춘추》를 지었기에, 중화를 받들고 오랑캐를 내친다는 말이 이때 비로소 쓰여지게 되었다. 만약 공자가 우리나라에서 태어났더라면 오히려 중토를 가리켜 오랑캐의 땅이라고 어찌 말하지 않았겠는가」 하니, 모든 사람들이 비웃기도 하고 혹은 놀랍게 생각하기도 하였으며 적지 않게는 사뭇 수긍하는 자도 있었으나, 결국에는 모두 쾌히 응하지 않기에 내가 상을 박차고 일어나니, 사람들이 모두 광기가 매우 심하다고 말하였다. 탄식할 노릇이다.
예전에 만주에 허물이 있다 하여 조정에서 화친이니 배척이니 하며 의견이 분분하였는데, 이 또한 주나라 왕실을 높이는 것을 소중히 여기는 까닭이기에 나는 그것이 옳은 것인지 알지 못하겠다. 만일 내가 또 다시 동년배들에게 이 말을 끄집어낸다면 그네들은 응당 크게 놀라긴 하여도 별로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이며, 아마도 장차 친구로 끼워 주지도 않을 것인데, 그렇다고 어찌 저들의 말만을 이상하다 하겠는가. 기자(箕子)가 교화를 베풀었다는 것은 믿으면서, 한무제가 조선을 쳐서 멸망시켰다는 것은 믿으면서, 당고종이 고구려를 평정하였다는 것은 믿으면서, 오히려 우리의 선조들에게 충분히 자부할 만한 빛나는 무훈이 있었음은 왜 알지 못하는가. 내가 슬퍼하는 것은, 세속의 인식이 제멋대로 변한 점은 살피지 않고, 중니가 높이고 깎아 내린 것 만을 가지고 스스로를 그르치고 있다는 점이다.
夫神市肇降之世, 山無蹊隧, 澤無舟梁, 禽獸成군, 草木遂長. 民與禽獸居, 族與萬物幷, 禽獸可係기而(遊)[游], 鳥鵲之巢可攀援而규. 飢食渴飮, 時用其血肉, 織衣耕食, 隨便自在, 是謂至德之世也. 民居不知所爲, 行不知所之, 其行塡塡, 其視顚顚, 含哺而熙, 鼓腹而(遊)[游], 日出而起, 日入而息, 盖天澤洽化, 而不知窘乏者也. 降至後世, 民物益繁, 素樸漸離, 별설제기, 勞勞孜孜, 始以生計爲慮. 於是焉, 耕者爭畝, 漁者爭區, 非爭而得之, 則將不免窘乏矣. 如是而後, 弓弩作而鳥獸遁, (綱)[網]고設而魚鰕藏, 乃至刀.戟.甲.兵, 爾我相攻, 磨牙流血, 肝腦塗地, 此亦天意之固然而不可怨者也. 余嘗觀, 夫小兒재[出胎門, 便규救我救我者, 盖求其哺也; 재]18)至行走, 便會시打시打者, 欲其求强也. 余於是乎知, 爭戰之不可免也.
무릇 신시씨가 처음 내려온 세상은, 산에는 길이나 굴이 없었고 못에는 배나 다리가 없었으며, 날짐승과 들짐승은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풀과 나무는 무성히 자라났다. 백성들은 금수와 함께 거처하며 만물과 더불어 어울리니, 금수는 굴레를 매어 같이 노닐 수 있었고, 새나 까치의 보금자리는 기어올라가 엿볼 수 있었다. 주리면 먹고 목마르면 마심에 때에 따라 그 피와 고기로 하였으며, 옷감을 짜서 옷을 해 입고 밭을 갈아 음식을 먹으며 편함에 따라 있는 그대로 지내니, 이것이 바로 이른바 덕이 가득한 세상이다. 백성들은 살아가면서도 그 행하는 바를 느끼지 못하였고, 나아가면서도 그 가는 곳을 의식하지 않았으니, 그 행위는 당당하고 그 시야는 한결 같았다. 배불리 먹고 기뻐하며 배를 두드리고 노닐며, 해가 뜨면 일어나고 해가 지면 쉬니, 대저 하늘의 은혜가 널리 미쳐 궁핍함을 알지 못한 것이리라.
후세에 내려와 백성과 사물이 더욱 번창해지며 소박함에서 점차 멀어지고, 아등바등 힘쓰며 쉬지 않고 노력하게 되니 비로소 생계를 근심거리로 삼게 되었다. 밭을 가는 자는 이랑을 놓고 다투고, 고기를 잡는 자는 구역을 놓고 다투는데, 다투어 얻지 못하면 장차 궁핍함을 면치 못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된 후에 활이며 쇠뇌를 만드니 날짐승과 들짐승은 달아나 버렸고, 그물을 만들어 설치하니 물고기와 새우들은 숨어 버렸다. 이에 칼과 창이며 갑옷과 병사가 생기게 되고, 너와 내가 서로 공격하여 이를 갈고 피를 흘리며 간과 뇌를 꺼내어 땅에 바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하늘의 뜻이라면 원망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보건대, 어린아이가 막 태문(胎門)을 나서며 곧 '응애(救我), 응애(救我)'!19)라고 부르짖는 것은 대개 음식을 구하는 것이며, 막 걷게 되어 곧 서로 토닥거리며 '쎄다(시打), 쎄다(시打)'! 할 줄 아는 것은 강함을 추구하고자 하는 까닭이다. 내가 이로서 다투고 싸우는 것이 면하기 어려운 것인 줄 알게 되었다.
夫, 月氏.大秦之屬, 余不知其詳, 至若中國與倭, 接隣之國也, 翼在左右而我國介處其間, 從古交爭最繁, 是亦必然之勢也. 神市氏[御世之](之御世)已遠, 而民物之生愈往愈博. 民物之生愈博而, 所以彼.飮食.奉生.送死之具, 愈見其耗. 是以, 始之熙[熙]者, 漸至忙忙, 夫忙忙求索者, 豈非爭亂之(偕)[階]歟. 及夫有巢.燧人者, 西方之君也, 神市.蚩尤者, 東方之君臣也. 御世之初, 各據一方, 地域逈殊, 人烟不通, 民知有我而不識有他, 故狩獵採伐之外, 曾無險役.
무릇 월지나 대진의 무리에 대해서 내가 그 상세한 바를 알지 못하나, 한(漢)나라와 왜(倭) 같은 것은 인접한 나라로서 날개와 같이 좌우에 있고 우리나라는 그 가운데에 끼여 있어서 예로부터 갈마들어 다툼이 가장 빈번하였으니, 이는 필연적인 형세이다.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린지 이미 오래되니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가면 갈수록 넓게 퍼졌다. 백성과 사물이 번성하여 넓게 퍼질수록 덮고 입으며 마시고 먹는 일과 생전에 봉양하고 죽은 후에 장사지내는 일 등에서 모두 그 소비가 눈에 뛰게 늘었다. 이러한 까닭에 처음에는 화락하기만 하다가 점차 다급하게 되어 가니, 무릇 다급하게 무엇을 구하고 찾다 보면 다투고 싸우는 순서를 어찌 밟지 않겠는가. 대저 유소씨나 수인씨는 서방의 임금이요, 신시씨와 치우씨는 동방의 임금과 신하이다. 세상을 다스리던 초기에는 각각 한쪽에 웅거하고 있었는데, 땅의 구역이 사뭇 다르고 인가(人家)는 서로 통하지 않았으니 백성들은 자기들만 있는 줄 알고 다른이들이 있음을 인식하지 못했던 까닭에 수렵하고 채벌하는 일 외에는 별다른 힘든 일이 없었다.
降至數千載之後, 而世局已變, 且中國者, 天下之寶庫也, 沃野千里, 風氣恢暢, 我族之分遷西南者, 垂涎而轉進, 中土之民, 亦湊集而萃會. 於是焉, 黨同수異而干戈胥動, 此實萬古爭戰之始也. 初炎帝之世, 中土之漸民至盛阜, 穀.麻.藥.石之術, 亦已稍備. 及累傳至於楡罔之世, 而爲政束急, 諸侯携貳, 民心離散, 世道多艱. 我蚩尤氏與其民衆, 虎踞河朔, 內養兵勇, 外觀時變, 及觀楡罔之衰政, 乃興兵出征. 選兄弟宗黨可將者八十一人, 部領諸軍, 發葛盧山名之金, 大制劒.鎧.矛.戟.大弓.고矢, 一幷齊整, 乃發탁鹿而登九渾, 連戰連捷, 勢若風雨, 습(仗)[伏]萬民, 威振天下. 一歲之中, 凡拔九諸侯之地. 更就雍狐之山, 發水金而制芮.戈及雍狐之[戟, 再整兵而出洋水, 殺至空桑. 空桑者, 今之]20)陳留, 楡罔所都也. 一歲之中, 更兼十二諸侯之國, 殺得(仗)[대]伏尸滿野, 中土之民, 莫不喪膽奔竄. 時, 楡罔使少顥拒戰, 蚩尤氏揮雍狐之戟, 大戰少顥, 又作大霧, 使敵兵昏迷自亂, 少顥大敗, 落荒而走入空桑, 與楡罔出奔反入탁鹿. 蚩尤氏乃於空桑卽帝位, 回兵圍攻於탁鹿之野, 又大破之.《管子》所謂「天下之君, 頓戟一怒, (仗)[대]伏尸滿野」者, 是也.
수천 년을 내려온 뒤 세상의 형세는 이미 변화하였으며, 게다가 중국은 천하의 보고(寶庫)로서 기름진 벌판이 천리에 뻗어 있고 화창한 바람 기운은 널리 퍼져 있으니, 우리 민족 가운데 서남쪽으로 나누어 옮겨간 자들은 대단히 탐을 내어 더욱더 나아갔으며, 중토의 백성들 역시 꾸역꾸역 모여들게 되었다. 이리하여 자기편끼리는 도와서 무리를 이루고, 다른 편은 그저 원수로 삼아 창과 방패로 서로 충동질을 하니, 이것이 바로 만고에 있어서 전쟁의 시작이다.
처음 염제(炎帝)의 세대에 중토는 점차 백성이 번성하여 많아졌으며, 곡식을 일구고 삼베를 자으며 약과 침을 쓰는 기술 또한 점차 갖추어져 갔다. 이로서 여러 세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니, 정치에 있어서는 단속하기 급급하고 제후들은 두 마음을 지녔으며 민심은 흩어져 세상의 도는 어렵기만 하였다. 우리 치우씨는 백성의 무리와 함께 황하의 이북 땅에 할거하고 앉아서 안으로 용맹스러운 병사를 기르고 밖으로 시대의 변화를 지켜보다가 유망의 정치가 쇠잔하였음을 보고 이내 병사를 일으켜 출정하였다. 형제와 종실의 무리 가운데 장군으로 삼을 만한 사람 81명을 선발하여 부장(部將)으로써 모든 군사를 통솔케하고, 갈로산(葛盧山)의 쇠를 캐내어 칼이며 갑옷과 중기창과 가닥창을 비롯하여 큰 활과 호목나무 화살21) 등을 많이 만들어 모두 가지런히 하고는 탁록(탁鹿)으로 출발하여 구혼(九渾)에 올라 연전연승하니, 그 형세가 마치 비바람과 같아서 세상의 만민은 두려워 엎드리고 그 위세는 천하에 떨치게 되었다. 한 해 만에 무릇 아홉 제후의 땅을 빼앗았다.
다시 옹호산(雍狐山)에 나아가 수금(水金)을 캐어 끈 달린 방패와 가지창 및 옹호창을 제작하여, 새로 병사를 정비하고 양수(洋水)를 떠나 파죽지세로 공상(空桑)에 이르렀다. 공상은 지금의 진류(陳留)로서 유망이 도읍하던 곳이다. 한 해 만에 다시 열두 제후의 나라를 합치니, 죽어 엎어진 시체는 들녘에 가득하기에 중토의 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하여 달아나 숨지 않은 자가 없었다. 이때 유망이 소호(少顥)22)로 하여금 막아 싸우게 하니, 치우씨는 옹호창을 휘두르며 소호와 크게 싸우면서 또한 큰 안개를 일으켜 적병으로 하여금 혼미한 가운데 스스로 혼란케함에, 소호는 크게 패하고 황망히 물러나 공상으로 들어가더니 유망과 함께 도망 나와서 되돌아 탁록으로 들어갔다. 치우씨는 이에 공상에서 제위에 오르고 병사를 되돌려 탁록의 들판을 에워싸고 공격하여 또 크게 패퇴시켰다.《관자(管子)》에 이른바 「천하의 임금이 창을 들고 한번 크게 노하니 엎어진 시체는 들판에 가득하였다」라고 한 것은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時有軒轅者, 聞知楡罔敗走而蚩尤氏爲帝, 欲代以爲君, 乃大興兵, 與蚩尤氏拒戰. 蚩尤氏, 大戰軒轅於탁鹿, 縱兵四蹙, 斬殺無算, 復作大霧, 令敵軍心慌手亂, 奔竄逃生. 於是, 淮岱.冀연之地, 盡爲所據, 乃城於탁鹿, 宅於淮岱, (遷徙往來, 號令天下.)23) 盖是時, 中土之人, 徒憑矢石之力, 不解鎧甲之用又値, 蚩尤氏法力高强, 心驚膽寒, 每戰輒敗,《雲급軒轅記》之所謂「蚩尤始作鎧甲.兜무, 時人不知, 以爲銅頭鐵額」者, 亦可想見, 其狼狽之甚矣. 蚩尤氏益整軍容, 四面進擊, 十年之間, 與軒轅戰七十餘回, 將無疲色, 兵不退. 後軒轅, 旣屢敗, 乃復大興士馬, 效蚩尤氏而廣造兵甲, 又制指南之車, 期日會戰. 時蚩尤氏, 仰觀(天)[乾]象, 俯察人心, 深知中土旺氣漸盛, 且炎帝之民, 所在固結, 不可勝誅, 황各事其主, 不可漫殺無(事)[辜]. 乃決意退還, 使兄弟宗黨, 務要大戰而立威, 使敵不敢生意追襲, 復與軒轅大戰, 混殺一(陳)[陣], 然後方退. 此時, 部將, 不幸, 有急功陣沒者,《史記》所謂「遂禽殺蚩尤」者, 盖謂是也. 蚩尤氏, 乃東據淮岱之地, 以當軒轅東進之路, 及至其沒, 漸至退영矣. 今據《漢·地理誌》, 其墓在東平郡.壽張縣.감鄕城中, 高五丈. 秦.漢之際, 住民猶常以十月祭之, 必有赤氣, 出如疋絳, 民名謂蚩尤(氏)旗, 豈其英魂雄魄, 自與凡人逈異, 歷千歲而猶不泯者歟.
이때에 헌원(軒轅)24)이란 자가 있었는데, 유망이 패하여 달아나고 치우씨가 제위에 올랐다는 소식을 듣고, 대신 임금이 되고자 크게 군사를 일으켜 치우씨에게 대항하여 싸웠다. 치우씨는 탁록에서 헌원과 크게 싸우며 병사를 풀어 사방에서 내려침에 참살시킨 자는 수도 없었으며, 다시 큰 안개를 일으켜 적군으로 하여금 마음이 흐려지고 손발이 떨리게 하니, (헌원은) 급히 달아나 겨우 목숨을 건지게 되었다. 이리하여 회대(淮岱)25)와 기연(冀연)26)의 땅을 모두 점거하였으며, 탁록에 성을 쌓고 회대에 자리잡아서 옮겨 왕래하며 천하를 호령하게 되었다.
대개 이때의 중토 사람들은 단지 화살과 돌의 힘에 만 의지할 뿐 갑옷의 쓰임이나 가치에 대해 이해하지 못하였으며, 치우씨의 법력이 높고도 강한 것에 놀라서 간담이 서늘해져 매번의 싸움마다 번번이 참패하였다.《운급헌원기(雲급軒轅記)》에 「치우씨가 처음으로 갑옷과 투구를 만들었는데, 이때의 사람들은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 머리에 쇠로 된 이마로 여겼다」라고 한 것을 보면 그 낭패가 매우 심하였음을 상상하여 볼 수 있을 것이다. 치우씨가 더욱 군대의 위용을 가다듬고 사방을 쳐나가며 십년 동안 헌원과의 싸움을 칠십여 차례나 하였으나, 장수는 피로한 기색이 없고 병사는 물러서지 않았다. 후에 헌원이 이미 여러 번 패하더니 이에 다시 병사와 군마를 크게 일으키고, 치우씨를 흉내내어 군사들의 갑옷을 널리 제작하였으며, 또한 지남(指南)27) 수레를 만들어 놓고 더불어 싸울 날을 기다렸다.
이때 치우씨가 우러러 천체의 형상을 관찰하고 굽어 민심을 살펴보니 중토에 왕성한 기운이 점차 번성해지고, 또한 염제28)의 백성들이 곳곳에서 굳게 단결하여 가볍게 모두 죽여 버릴 수 없으며, 더욱이 각각의 백성들이 그들의 군주를 섬기는데 무고하게 함부로 죽일 수 없음을 깊이 인식하게 되었다. 이에 물러나 돌아갈 것을 마음먹고 형제와 종실의 무리에게 힘써 크게 싸워 위세를 세움으로서 적이 감히 추격하여 습격할 마음을 먹지 못하도록 하게 한 뒤, 다시 헌원과 크게 싸워 한 무리를 도륙한 후에 비로소 물러나왔다. 이때 부장 가운데 불행히도 서둘러 공을 세우려다 진중에서 전사한 자가 있었는데,《사기(史記)》에서 이른바 「마침내 치우씨를 사로잡아 죽였다」29)라고 한 것은 아마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치우씨는 이에 동쪽으로 회대의 땅에 할거하고 있으면서 이로서 헌원이 동쪽으로 나오는 길을 막고 있었으나, 그가 죽자 점차 물러서기에 이르렀다. 지금《한서·지리지》에 의하면, 그의 묘가 동평군(東平郡) 수장현(壽張縣)의 감향성(감鄕城) 안에 있으며, 그 높이가 다섯 장(丈)이라 한다.30)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때의 주민들이 한결같이 10월에 제사를 지내면 반드시 붉은 기운이 있어서 한 폭의 진홍빛 비단과도 같이 솟아오른다고 하니,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치우기(蚩尤旗)'라 이름하였다. 이 어찌 영웅의 혼백이 범상한 사람들과 사뭇 다르기에 천년이 지나고도 오히려 사라지지 않음이 아니겠는가.
蚩尤氏, 雖然退歸, 中土以是蕭然, 楡罔亦不得復位, 炎帝之業, 以是永墜矣. 自是, 軒轅代爲中土之主, 是爲黃帝. 而蚩尤氏兄弟諸人, 乃永據幽靑, 聲威自是不감, 黃帝氏亦不得自安, 終其世, 未嘗安枕高臥.《史記》所(云)[謂]「披山通道, 未嘗寧居, 邑于탁鹿之(河)[河]阿31), 遷(徒)[徙]往來無常處, 以師兵爲營衛」者, 盖其戰競之意, 歷歷可觀. 而《尙書·呂刑》亦云「若古有訓, 蚩尤惟始作亂」 彼之畏威, 而世傳其訓, 亦甚明矣.
치우씨가 비록 물러나 돌아왔지만 중토는 이로서 쓸쓸해지고, 유망 또한 다시 그 제위(帝位)를 회복하지 못하여 염제의 유업은 이로서 영원히 무너지게 되었다. 이때부터 헌원이 대신 중토의 주인이 되었으니, 곧 황제(黃帝)이다. 그러나 치우씨의 형제들이 모두 유청(幽靑)32)의 땅에 영원히 거처하며 그 명성과 위세가 계속되었기에 황제는 세상을 다 할 때까지 편안하게 베개를 높여 베고 누운 적이 없었다.《사기》에 이른바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탁록에 도읍만 정하고서 이리저리 옮겨 다니니 항상 거처하는 곳은 없었으며, 군사와 병졸들로 진영을 호위하게 하였다」고 한 것은 그 전전긍긍해 하는 마음을 역력히 볼 수 있다.《상서(尙書)》의 <여형편(呂刑編)>에 또한 「예로부터 내려오는 교훈에 '치우씨가 오직 처음으로 난을 일으켰다'고 하였으니……」라고 말한 것은 그 위세를 두려워하여 대대로 그 교훈을 전하고자 함이 분명하다.
其後, 三百餘年無事, 只與少昊氏戰, 破之, 以至檀君元年前後, 凡闕千歲. 闕者, 萬之稱也, 今之稱久遠者, 必曰闕千歲. 闕千歲者, 盖神市氏之御世, 至萬千歲, 寔爲我國最長年代, 故也. 或曰神市氏之後, 高矢氏與蚩尤氏, 相繼爲君, 前後合算, 爲闕百歲, 而檀君復立云, 此說亦近理. 大抵, 太古之事, 鴻荒(潤)[수闊]遠, 不可得而詳矣.
그 후 삼백여 년은 아무일 없이 단지 소호씨(少昊氏)와 더불어 싸워 이를 격파하였을 뿐이니, 단군 원년에 이르기까지 전후하여 무릇 궐천년(闕千歲)이 된다. '궐(闕)'이란 '만(萬)'을 가리키는 것이다. 요즘 아주 오래 되었음을 말할 때는 반드시 '궐천년'이라 말한다. '궐천년'이란 아마도 신시씨가 세상을 다스리기 시작한 이후로 1만 1천년이 흘렀다는 것이니, 진실로 우리나라가 가장 긴 연대를 지녔다 함이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혹은 신시씨의 뒤로 고시씨가 치우씨와 더불어 서로 계속하여 임금이 되었으니, 그 앞뒤를 합하여 보면 1만 1백년이 되며, 게다가 단군이 다시 나라를 일으킨 것이라 말하는데, 이러한 얘기 역시 이치에 가까울 것이다. 대저, 오랜 옛적의 일은 너무 오래고 멀어서 상세하게 알 수 없을 따름이다.
1.【六鎭】: 조선 세종때 북쪽 변방을 지키기 위해 세운 여섯 개의 군 주둔지로서, 경원(慶源)·경흥(慶興)·부령(富寧)·온성(穩城)·종성(鐘城)·회령(會寧)이다.
2.【九夷】:《爾雅·釋地》에는 「동방의 종족인 아홉 夷族과 북방의 종족인 여덟 狄族과, 서방의 종족인 일곱 戎族과, 남방의 종족인 여섯 蠻族을 통틀어 四海라고 일컫는다」라하여, '九夷'에서 '아홉'이라는 숫자는 단지 다른 종족에 비해 종족의 갈래 등이 많음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이를 동이의 아홉종족으로 정형화 하기에 이르렀다.《논어·자한편》의 疏에는 「동방에 구이가 있는데, 玄토, 樂浪, 高驪, 滿飾, 鳧臾, 索家, 東屠, 倭人, 天鄙 등이 그것이다」라 하였다.
3.《설문해자》의 이(夷), 만(蠻), 융(戎), 적(狄).
1) 夷
[說文] 東方之人也從大從弓(동방의 사람을 말한다. '大'에서 유래하였으며, 또한 '弓'에서 유래하였다).
[注] (상략) 羊部에 이르기를 「남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蠻' 또는 '민'은 곤충(충)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북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맥'은 벌레(치)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방의 종족을 지칭하는 '羌'은 양(羊)에서 유래된 글자이며, 서남의 종족을 가리키는 '북人'과 '焦僥'는 평범한 사람(人)에서 유래된 글자들이다」라고 하였다. 이는 대개 그 땅에 순응하고 있는 것으로서 자못 그 땅의 이치에 따르는 품성을 지니고 있는데, 오직 동방의 夷만이 '크다(大)'는 것에서 유래되었으니 대인(大人)이라 할 만하다. 이인(夷人)의 풍속은 어질다고 하는데, '어질다'함은 곧 장수를 의미하므로 '군자의 나라'·'불사의 나라'라는 이름이 있게 된 것이다. 생각건대, 하늘은 크고도 존귀하며, 땅도 크고도 존귀하며, 사람 역시 크고도 존귀한 것이다. 크고도 존귀함을 나타내는 '大'자는 사람의 형상을 본 뜬 것인데, '夷'자의 전체(篆體)가 '大'자에서 유래된 것인 까닭에 '夷(동방)'가 '夏(중화)'와 더불어 다르지 않다. '夏'라 함은 중국사람을 말한다. '弓'에서 유래되었다는 것은 숙신씨가 호시 또는 석노와 같은 것을 헌납한 것을 말한다. (하략)
2) 蠻
[說文] 南蠻(남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직방씨>에서는 '여덟 부류의 남방종족'이라 하였으며,《시경·이아》에서는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고는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왕제》에서 말하기를 「남방을 일컬어 '蠻'이라 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각궁에서 「오랑캐 같은 행동을 하니」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蠻'이란 남방의 만인(蠻人)을 말한다」 하였으며,《시경·소아》의 채사에서 「어리석게 준동하는 형땅의 오랑캐」라 하고는, 그 모전에 가로되 「형만이란 형주의 만인을 말한다」하였다.
[說文] 타동從충(뱀의 종류로서 '충'에서 유래되었다).
[注] '蠻'자가 '벌레(충)'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로 말미암아 '蠻'이 뱀의 한 종류임을 말하는 것이다. 뱀이란 벌레를 말하는 것이고 '蠻'이나 '민'은 모두 사람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글자가 '벌레'에서 유래한 까닭에 해당 부수의 끝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것은 '맥'이 치부의 끝에 놓이고 '狄'이 犬부의 끝에 놓이고 '羌'이 羊부의 끝에 놓이는 등이 같은 것이다.
3) 戎
[說文] 兵也(병장기를 말한다).
[注] (상략)《시경·소아》에 「그럴 때는 우릴 돕지 않는다네(烝也無戎)」라 하였는데, 그 毛箋에 이르기를 「'戎'이란 '相(돕다)'을 말하는 것인데, 그 파생된 뜻에서 변방민족을 뜻하는 서쪽 오랑캐가 되었다」고 하였다. (하략)
4) 狄
[說文] 北狄也(북방의 종족을 말한다).
[注] 적적(赤狄)은 이전에 중국에서 섞여서 정착하여 살던 북방종족의 일종일 뿐이다.《설문해자》의 蟲부에서는 남방의 종족을 '蠻'이라 하고 동남방을 '민'·'越'이라 하였으며, 大부에서는 동방을 '夷'라 하고, 羊부에서는 서방을 '羌'이라 하였고, 치부에서는 북방을 '맥'이라 하였는데, 곧 북방의 '맥'이란 필시 북적(北狄)을 말한 것이다. '狄'과 '맥'은 모두 북쪽에 있으나 '맥'은 동북쪽에 있었고 '狄'은 정북쪽에 있었음을 말한다.《석지》에 가로되 「아홉 부류의 이인(夷人), 여덟 부류의 적인(狄人), 일곱 부류의 융인(戎人), 여섯 부류의 만인(蠻人)」이라 하였는데, 이들을 일컬어 사해(四海)라 하였다. 여덟 부류의 만인(蠻人)은 남방에 있었으며, 여섯 부류의 융인(戎人)은 서방에 있었으며,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은 북방에 있었다. 이순이 가로되 「다섯 부류의 적인(狄人)이라 함은 그 첫 번째를 일컬어 월지(月支)라 하며, 두 번째가 예맥(穢貊)이며, 세 번째가 흉노(匈奴)이며, 네 번째가 비우(비于)이며, 다섯 번째를 일컬어 백옥(白屋)이라 한다」고 하였다.《왕제》의 명당위에서는 모두 「동방의 이인 . 남방의 만인 . 서방의 융인 . 북방의 적인」이라 하였다.
[說文] 本犬동(본래 개의 한 종류이다).
[注] 이것은 '蠻'·'민'이 본래 뱀의 한 종류이며, '맥'이 본래 벌레의 한 종류이며, '羌'이 본래 양의 한 종류인 것과 같은 예이다.
[說文] 狄之爲言淫벽也('狄'은 '음란하다.괴벽하다'라는 말이 된다).
[注] 이것은 「공자가 이르기를 『'맥'은 나쁘다는 것을 말한다』 하였으니, '맥'이란 곧 악함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예이다. '惡'과 '맥' 및 '벽'과 '狄'은 모두 첩운으로 글자의 뜻을 새겼다.《풍속통》에 말하기를 「적인(狄人)들은 에비와 자식간에, 또는 제수와 시숙간에 같은 동굴 속에서 생활하면서 따로이 구별하지 않으니 '狄'이라 함은 편벽됨을 말한다. 그 행위는 도리에 어긋나 편벽되며 그 종류에는 다섯 부류가 있다」고 하였다. 생각컨대 '벽'은 지금의 '僻'자이다.
4. 현재 중국의 남부지방 귀주성(貴州省) 등에 거주하고 있는 소수민족인 묘족(苗族)은 '치우씨(蚩尤氏)'를 종족의 시조로 여긴다.
* 묘족의 분류와 연원은 오랜 옛적의 '구려(九黎)'·'삼묘(三苗)'·'남만(南蠻)'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우리 나라(중국)의 장강 중하류와 황하 하류 일대에는 아주 오랜전부터 매우 많은 인류들이 생활하고 있었는데, 그들은 누대에 걸친 번식과 힘든 노동을 통하여 지금으로부터 약 5,000여 년 전에 점차 부락연맹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 부락연맹을 '구려(九黎)'라고 부르는데 치우(蚩尤)를 수령으로 하고 있었다.《국어(國語)》의 <초어(楚語)>에서 「구려는 치우의 무리이다」 하였다.《서(書)》의 <여형석문(呂刑釋文)>과《여씨춘추》의 <탕병(蕩兵)> 및《전국책》<진(秦)>에서 고유(高誘)의 주석 등에 모두 '치우'가 구려의 임금임을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월한 지리적인 조건에 의지하여 부단히 근면하며 개척하여 생산력을 높임으로서 사회 경제가 발전하였으며, 조국 동방의 강대한 부락으로 일약 자리잡게 되었다. 그와 같은 시기에 황제(黃帝)가 수령으로 있는 또다른 하나의 부락연맹이 황하 상류의 희수(姬水)에서 일어나 황하의 하류를 향하여 발전하고 있었는데, 구려의 치우와 충돌이 발생하여 결국에는 탁록(탁鹿)에서 구려와 전쟁을 치르게 되었다. 구려는 전쟁에서 패한 후 그 세력이 크게 쇠약해졌으나 여전히 장강 중하류 일대의 광활한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묘족간사(苗族簡史)》제1장 族源, 貴州民族出版社 1985년.
* 묘요계苗요系 ― 이전의 역사학자들은 옛날의 삼묘三苗가 곧 지금의 묘족苗族이라 하였으나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그것을 부인한다. 지금의 묘요는 곧 춘추 이후의 남만南蠻인데, 한漢 때는 무릉만武陵蠻, 그리고 육조六朝 시기에는 형옹주만荊雍州蠻 등의 명칭이 있었으며 송 시기에 비로소 요요라 불려지고, 원 시기에 또 묘苗라는 명칭이 있게 되었다. 청 대에 이르러 더우기 '묘족苗族'이라는 명칭으로 서남 지역 각 성의 토착민족들을 통괄하였었다. 현대 학자들은 많이들 서남의 민족을 셋으로 나누어 분석하는데, 오로지 명칭과 작은 갈래에 있어서만 약간의 차이가 있다. 묘苗와 요요는 실제로 하나의 민족이기에 합쳐서 일컫는 것이다. 그들의 주거지가 예전에는 장강 유역이었으나 지금은 물러나와 호남湖南, 귀주貴州, 광서廣西, 광동廣東 등의 산지에 거처하고 있다. .. 林惠祥 著《중국민족사》제1장 중국민족의 분류
* 묘족(苗族) 개괄.
[분포 지역] 귀주성(貴州省), 호남성(湖南省), 운남성(云南省), 광서장족자치구(廣西壯族自治區), 사천성(四川省), 광동성(廣東省).
[인구] 5,021,175명. (1982년 통계자료에 의한 수치이며, 장족(藏族) 1,338만, 회족(回族) 722만, 위구르족(維吾爾族) 596만, 이족(이族) 545만에 이은 다섯번째의 중국 소수민족이다.)
5.【加】
* 夫餘의 官名 '加'를 '家'자의 잘못된 번역으로 보거나 남자의 존칭으로 보아 '커'로 읽어야 한다는 견해도 있었으나, 高句麗語의 皆 및 新羅語의 翰·干 등과 일치하는 것으로서, 본래는 部族長을 의미하였는데, 뒤에 王 또는 大官의 칭호로 되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滿蒙系統의 汗(Han·Kan)·可汗(Gahan·Kagan)과 같은 말로 이해된다. 夫餘傳의 '加'는 部族長이나 官名에 모두 쓰이고 있는데, 이는 원래 부족장을 의미하는 말인 '加'가 국가 형성의 초기과정에서 族的 紐帶感이 강한 單位政治體의 大小族長勢力이 연맹적 결속의 단계를 거쳐 집권적 국가의 지배신분층으로 결집되어 가면서, 점차 중앙의 官名으로 변천되어 감을 보여 주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한편 馬加·牛加·저加·狗加에 대하여는 일찍부터 윷 말판의 도·개·걸·윷에 대응되는 명칭으로 본 견해가 있어 왔는데, 이와는 달리 馬加의 馬는 '마리·마라'의 表音으로 보아 新羅의 麻立干과 같은 계통의 官名으로 보고, 牛加의 牛는 '우·위'의 音譯으로 보아 고구려의 于臺(優臺)와 같은 官名으로 보는 경우도 있다. ..《중국정사조선전역주》徐榮洙 注.
* 「按, 加字當爲家字之誤. 猶今蒙古謂, 典羊之官曰和尼齊, 典馬者曰마리齊, 典駝者曰特默齊, 皆因所牧之物以名其職. 正如《周禮》羊人犬人及漢狗監之掌. 范蔚宗不解方言, 好奇逞妄, 殊爲준謬(생각건대, 加자는 마땅히 家자의 오자일 것이다. 그것은 마치 지금의 몽고에서 양을 관장하는 벼슬을 '화이제'라 하고, 말을 관장하는 자를 '마이제'라 하고, 낙타를 관장하는 자를 '특묵제'라 하는 것과 같이, 모두 맡은 사물에 기인하여 그 직위를 이름한 것이다. 바로《주례》의 '양인'과 '견인' 및 한나라 때의 구감의 직위와 같다. 범엽이 방언을 이해하지 못하고, 더욱이 기이한 것을 좋아하며 망령된 것에나 만족을 느끼는 까닭에 매우 그르친 것이라 할 것이다).」 ..《滿洲源流考》권18 국속3 注.
6.【幽燕】: 유주(幽州)를 포함하는 옛 연(燕)나라의 땅을 말하는 것으로, 대략 요서와 하북지방을 가리킨다.
7.【太昊 伏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복희를 또는 복희(伏희), 복희(복희), 복희(宓犧), 포희(包犧), 포희(포犧)라고도 한다. 풍(風)씨 성이다. 처음으로 팔괘(八卦)를 짓고 서계(書契)를 만들었으며, 사냥하고 고기 잡으며 목축하는 것을 백성에게 가르쳤다. 진(陳)에 도읍하여 재위 115년에, 뒤로 15대를 전하여 무릇 1,260년 동안 이어졌다고 한다.
8.【禹倬】: 고려 26대 충선왕 때의 학자. 관직에서 물러나 역학을 연구하였다. 송나라에서 정주학(程朱學)에 관한 책이 들어왔을 때 한 달 동안 밖에 나가지 않고 연구하여 이를 해득했다고 한다.
9. 손필본에는 '官職之' 이후 '性也∼偉哉'의 총 358자가 빠져 있다.
10.【唐堯】: 옛 성인으로 제곡(帝곡)의 둘째 아들이다. 이(伊)에서 태어나 기(耆)로 옮겼으므로 이기씨(伊耆氏)라고 하고, 처음에 도(陶)에 피봉되었다가 후에 당(唐)으로 옮겼으므로 도당씨(陶唐氏)라고도 일컬어지며, 호는 요(堯)이다. 역사가들은 당요(唐堯) 또는 방훈(放勳)이라 일컫는다. 그의 형 지(摯)를 이어 제위에 올라 덕스러운 정치를 베풂에, 백성들이 강구가(康衢歌)와 격양가(擊壤歌) 등을 지어 불렀다. 아들 단주(丹朱)가 어리석어 이인(夷人)인 순(舜)에게 임금 자리를 물려주었다. 재위 98년이었다고 한다.
11.【虞舜】: 옛 성인으로 성씨는 요(姚)이다. 처음에는 견무(견畝)에 머무르며 효도를 다하니 그 곳의 백성들이 많이 따랐다. 당요(唐堯)가 그를 발탁하여 섭정을 시켰더니 사흉(四凶)[환두(驩兜), 공공(共工), 곤(곤), 삼묘(三苗)]을 제거하고, 일을 잘 처리하는 여덟 현인(八元)[백분(伯奮), 중감(仲堪), 숙헌(叔獻), 계중(季仲), 백호(伯虎), 중웅(仲熊), 숙표(叔豹), 계리(季리)]과 사물에 잘 화합하는 여덟 현인(八愷)[창서(蒼舒), 퇴애(퇴애), 도인(도인), 대임(大臨), 방항(尨降), 정견(庭堅), 중용(仲容), 숙달(叔達)]을 등용하여 천하를 크게 다스렸다. 섭정 30년에 제위의 선양을 받으니 유우씨(有虞氏)라 일컬어지게 되었다. 호를 순(舜)이라 하며, 역사가들은 우순(虞舜) 또는 중화(重華)라 일컫는다. 후에 남쪽으로 순행을 하다가 창오(蒼梧)의 들녘에서 돌아가시니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18년만이었다. 아들 상균(商均)이 어리석어 우(禹)에게 자리를 전하였다.
12.【月氏】: 秦·漢 시대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민족으로 중국 史書에 우氏·和氏 등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月氏는 春秋 時代 末부터 戰國 時代 末까지 蒙古고원의 西半을 지배하여 東方의 東胡민족과 內蒙古 방면에서 접경하고 있던 큰 세력이었지만, 秦 末 흉노의 침입에 의해 격파당하고 그 일부만이 남쪽으로 내려와서 甘肅과 靑海의 두 省의 중간 산악지대로부터 黃河 상류지역에 잔존하였다. 월지는《漢書》에 유목민족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農耕·遊牧·狩獵을 병행한 森林民族으로 보는 설도 있다. 唐代에는 月氏都督府가 설치되었다.
13.【于전】: 중앙아시아 T.rim 盆地의 南邊에 있는 나라로서 漢·唐의 史書에는 于치國으로 되어 있는데, 西域南道의 代表國이었다. 그 외에도 烏纏·于遁·于殿·屈丹·喚那·壑旦 등의 異字 異稱이 있으며, 元代에는 황도·斡端·五端·忽炭 등으로도 쓰여졌다. 于치은 崑崙山에서 북쪽으로 흐르는 Yurung Kash川과 Kara Kash川에 걸친 大 오아시스國으로, 많은 부락이 散在하여 果樹裁培 및 농경으로 생활하였다. 河床에서 채취되는 軟玉이 특산품으로 중국과 이란 및 이라크 등지에 수출되어 于치國을 부유하게 하였으며, 東西交涉과 더불어 이 나라를 西域의 유수한 문화국으로 만들었다. B.C.2세기에 중국에 처음으로 알려질 즈음 이미 于치國은 번영기에 있으면서 東西貿易의 중계시장으로서 각 방면의 문화를 받아들여 다채로운 문화가 꽃피고 있었다. 조로아스터敎가 유행하여 많은 佛寺가 건립되었다. 7세기에는 唐朝의 지배를 받아 이 나라에 沙毗都護府가 설치되어 安西四鎭의 하나가 되었다.
14. 대진국을 비롯한 서방에 대한 북애의 기록은《삼국지》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제30의 평론(評論)에 주석으로 인용된《위략·서융전(西戎傳)》의 내용과 일치하고 있으니 아마도 그 기록을 참고하였을 것이다.
15.【提擧市舶司】: 掌蕃貨海舶征각貿易之事, 以來遠人, 通遠物. 元祐初, 詔福建路於泉州置司(외국의 화물 및 외국과 통하는 바닷길의 선박, 그리고 그에 따르는 조세와 전매 및 무역 등에 관한 일을 비롯하여 외국인의 관할, 외국 물품의 유통 등을 관장한다. 원우 연간 초에 복건로에 조서를 내려 천주에 해당 관직을 설치하였다.) ..《송사》권 167, 지(志) 제120 직관(職官) 7.
16.【利瑪竇】Matteo Ricci(A.D. 1552∼1610) 명나라에 와 있던 이태리 제스이트파 선교사.
17. 중국이 비록 일부 계층에 의해서이긴 하지만, 역사에서 자신들의 중원 지역을 변방으로 보고 여타 지역을 내지(內地)로 본 적이 한 차례 있었으니, 바로 인도에서 전래된 불교가 한창 번성하던 시기에 승려들이 인도를 내지(內地)로 본 경우가 그것이다.
18. 손필본에 '出胎∼也재'의 16자가 빠져 있다.
19.【救我! 救我!】: 갓난아이가 태어날 때 처음으로 보이는 반응은 단지 울음을 우는 것 뿐이다. 북애노인은 그러한 울음 소리를 듣고 어려운 세상에 태어나며 최초로 드러내는 투쟁과 추구의 몸짓으로 보았으며, 그 소리를 한자로 옮기는 과정에서 소리 글자와 함께 그러한 시각을 뜻 글자로의 의미도 함축시켜 표현한 것이 바로 '救我'일 것이다.
20. 손필본에 '戟∼今之'의 17자가 빠져 있다.
21.【고矢】: 고木으로 만든 화살. 고는 낙엽교목인 牡荊과 흡사하며, 주로 백두산과 그 북방 지역의 소나무 숲속에 자생하는 나무이다. 겉 모양은 가시나무와 같고, 잎은 느릎나무와 비슷하며, 나무의 재질이 습기에 영향을 받지않고 단단하면서도 곧아 화살대를 만드는데 적합하다.
22.【少昊 金天氏】: 상고 시대의 제왕. 황제(黃帝)의 아들. 소호(少호)로도 쓰며 이름은 지(摯)이다. 태호 복희씨의 법을 닦았기에 소호라고 하며, 쇠의 덕(金德)으로 임금이 되었기에 금천씨라 하며, 궁상(窮桑)에 영지를 가졌기에 궁상씨라고도 하며, 청양(靑陽)에서 나라를 일구었기에 청양씨라고도 하며, 죽어서 운양(雲陽)에 장사를 지냈기에 또한 운양씨라고도 한다. 곡부(曲阜)에 도읍하였으며, 재위는 84년이라고 한다.
23. 한영본에 '遷徙往來, 號令天下'의 8자가 빠져 있다.
24.【黃帝 軒轅氏】: 상고 시대의 제왕. 소전씨(少典氏)의 아들. 성은 공손(公孫)이며, 희수(姬水)에서 자랐기에 또한 희(姬)를 성으로 삼는다. 헌원의 언덕에서 태어났기에 헌원씨라고 부르며, 유웅(有熊)에 나라를 세웠기에 유웅씨라고도 부르며, 토덕(土德)으로 임금이 되었고 흙은 누런색인 까닭에 황제라고 부르게 되었다. 애초에 신농씨로부터 여덟 대를 전하여 유망(楡罔)에 이르자 유망이 폭악무도하여 동방의 치우씨에게 쫓겨나자 황제가 다시 치우씨를 몰아내고 제위에 올랐다. 대요(大撓)에게 명하여 갑자(甲子)를 짓게 하였으며, 창힐(倉힐)에게 명하여 육서(六書)를 짓게 하였으며, 영륜(伶倫)에게 명하여 율려(律呂)를 정하게 하였으며, 예수(례首)에게 명하여 산수(算數)를 정하게 하였다. 또한 기백(岐伯)에게 자문하여 내경(內經)을 지어 처음으로 의약 처방의 길을 열었다. 그의 아내 나조(螺祖)는 또한 누에를 치고 실을 잣는 것을 가르쳐 의상의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고 한다. 100년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25.【淮岱】: 회하(淮河)와 대산(岱山 卽 泰山)의 사이를 말하므로, 지금의 산동성 중부 이남에서 하남성의 동부 및 강소성과 안휘성의 중북부 일대를 가리킨다.
26.【冀연】: 기주(冀州)와 연주(연州)를 말한다. 기주는 지금의 하북성 형수(衡水)의 남서쪽에 위치한 기현(冀縣)을 가리키며, 연주는 산동성 곡부(曲阜)의 서쪽 연주(연州)를 가리키니, 기연의 지역이라 함은 하남성과 산동성의 북부 및 하북성의 남부인 황하강 하류 일대를 말한다.
27.【指南車】: 중국 고대에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만든 수레. 수레의 바퀴와 수레 위의 신선상(神仙像) 사이에 톱니를 이용한 일정한 장치를 설치하여 수레가 비록 회전을 하더라도 신선상의 손은 항상 일정한 방향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다.
28.【炎帝 神農氏】: 상고 시대의 제왕. 강수(姜水)에서 태어 났기에 강을 성씨로 한다. 처음으로 쟁기를 만들어 백성들에게 농사일을 가르쳤다. 불의 덕(火德)으로 임금이 되었기에 염제(炎帝)라고도 하며, 열산(烈山)에서 일어났기에 열산씨라고도 한다. 재위시 온갖 약초를 맛보아 그로서 질병을 치료하였으며, 저자를 열어 재화의 유통을 처음하였다. 애초에는 진(陳)에 도읍하였다가 후에 노(魯)로 천도하였으며, 120년을 재위에 있었다고 한다.
29.《사기》<오제본기(五帝本紀)> 제1
* 蚩尤作亂, 不用帝命. 於是黃帝乃徵師諸侯, 與蚩尤戰於탁鹿之野, 遂禽殺蚩尤. 而諸侯咸尊軒轅爲天子, 代神農氏, 是爲黃帝. 天下有不順者, 黃帝從而征之, 平者去之, 披山通道, 未嘗寧居…(치우가 난을 일으키니 황제의 명령이 시행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황제가 군사와 제후를 모아 치우와 탁록의 벌판에서 싸움을 벌여 마침내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 그러자 제후들이 모두 헌원을 받들어 천자로 삼아 신농씨를 대신하게 하니, 이로서 황제가 되었다.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 황제가 그에 따라 그들을 정벌하여 평정시킨 자들은 제거하였으나, 산을 헤쳐서 길을 내어도 편안하게 기거하지 못하고……). .. 치우씨를 사로잡아 살해하였다고 한 뒤에 거듭 '천하에 순종하지 않는 자가 있음에'라 하였으니 여전히 저항의 세력이 존재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30. '치우(蚩尤) 사당'에 대한《한서》와《후한서》의 <지리지(地理志)> 기록
* 東郡 … 壽良, 蚩尤祠在西北제上. 有구城(동군 … 수량현은 치우의 사당이 그 북서쪽 제(제)의 위에 있다. 구성이 있다). ..《한서》권 28 상, <지리지> 제8 상. 동군(東郡) 條.
* 東平國 … 壽張 春秋曰良, 漢曰壽良, 光武改曰壽張. 有堂聚, 故聚屬東郡.〔《地道記》曰: 「有蚩尤祠, 狗城.」《皇覽》曰: 「蚩尤총在縣감鄕城中, 高七丈.」〕(동평국 … 수장현은 춘추 때는 량(良)이라 하였으며, 한나라 때는 수량이라 하였는데, 광무제 때 수장으로 이름을 고쳤다. 당취가 있는 까닭에 동군에 귀속되어 있다.〔《지도기》에 이르기를 「치우의 사당이 있으며 구성이 있다」 하였다.《황람》에 이르기를 「치우의 무덤이 현의 감향성 안에 있는데 높이가 일곱장이다」라고 하였다.]) ..《후한서》지(志) 제21, <군국(郡國)> 3. 동평국(東平國) 條.
31.【河→阿】:《사기(史記)》의 <오제본기(五帝本紀)> 원문에 의거하여 河를 阿로 수정한다. 正義에서 阿자에 대해 주석하기를 「廣平曰阿. 탁鹿, 山名, 已見上. 탁鹿故城在山下, 卽黃帝所都之邑於山下平地(넓고 평탄한 것을 '아'라고 한다. 탁록은 산 이름으로 이미 윗글에 나타나 보인다. 탁록의 옛 성이 그 산 아래에 있으니 곧 황제가 산 아래의 평지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라 하였다.
32.【幽靑】: 유주(幽州)와 청주(靑州). 지금의 요서와 하북성 및 산동성 일대를 가리킨다.
檀 君 紀
神市氏, 寔爲東方人類之祖, 鴻荒之世, 開창之業, 賴以成焉, 盖檀君以前, 首出之聖人也. 古有淸平山人.李茗[高者](者, 高)麗時人, 有《震域遺紀》三卷, 引《朝代記》, 備載我國故史, 比於一然之書, 甚相逕庭中, 多仙家語. 余以爲, 我國以神設敎, 從古爲俗, 沈漸於人心者, 久矣. 故, 說史者, 不可只擬班.馬之筆而踞척焉. 夫漢自是漢, 我自是我也, 豈堂堂震域, 必擬漢制, 以後乃足乎! 황, 國史蕩失於屢經兵火之餘, 今僅存者, 只是道家及緇流之所記傳, 而僥倖得, 保於岩穴者也. 道家旣承, 檀儉神人所創之源流, 而又得文獻之殘脈, 則其論東史者, 大有愈於緇流所記, 多出於牽强傅會.臆爲之說者也. 余寧取淸平之說, 而欲無疑云.
檀君紀
신시씨는 진실로 동방 인류의 조상으로서 태고적 세상이 처음으로 개벽하던 일들이 모두 그에게 힘입어 이루어 졌으니, 무릇 단군 이전에 처음으로 나타난 성인이다. 예전에 청평산인(靑平山人) 이명(李茗)이 있었는데, 그는 고려 때의 사람으로서《진역유기(震域遺紀)》1) 세 권을 저술하였으니, 이는《조대기(朝代記)》2)를 인용하여 우리나라 옛 역사를 갖추어 실은 것으로서 일연(一然)의 책과 비교하면 서로 사뭇 큰 차이를 보이는 가운데 선가(仙家)의 말이 많다. 내가 생각건대 우리나라는 신인(神人)이 교화를 베푼 것이 오래 전부터 풍속이 되어 사람의 마음에 점차 스며들어 베어 있는 지가 이미 오래인데, 역사를 이야기하면서 어찌하여 단지 반고나 사마천의 글만을 흉내내며 옴짝달싹을 못하는가! 한(漢)나라는 한(漢)나라이고 우리나라는 우리나라인데, 어찌하여 당당한 진역(震域)3)을 꼭히 한나라 정도에 견준 연후에야 만족을 하는가! 항차 나라의 역사가 몇 번에 걸친 병화(兵禍) 끝에 씻은 듯이 소실되고 지금에 근근히 남아 있는 것은 단지 도가와 불가에서 기록하여 전하는 것뿐이었으나 요행히 바위굴에 간직되어 오던 것을 얻게 되었다. 도가는 이미 단검신인(檀儉神人)이 창제한 근본 흐름을 이어받은데다 아울러 이렇게 문헌의 잔맥을 얻게 되었으니, 해동(海東)의 역사를 논함에 있어 견강부회하고 억측이 많은 불가의 기록에 비해 훨씬 낳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청평의 말을 취함에 의심이 없는 것이다.
桓雄天王御世, 凡闕千歲, 是卽神市氏. 蓬亭柳闕而居, 陶髮跨牛而治, 處無爲之事, 敷自然之化, 開創成業, 源流萬世. 及其暮年, 見功業已完, 民物樂生, 登太白山, 乃置天符三印於池邊石上.檀木之下, 因化仙乘雲而朝天. 是以, 名其池曰朝天. 高矢氏諸人, 奉天符三印, 共推其子桓儉神人, 爲君長, 是爲壬儉. 壬儉者, 君長之意也, 新羅所謂尼師今者, 亦此類也. 以今追計, 約算四千餘歲, 正與唐堯同時, 世俗所謂與堯幷立者, 是也. 因稱檀君, 檀君者, 朴達壬儉之譯也. 盖神市氏, 已降於檀木之下, 而桓儉神人, 復踐조於檀樹下, 故因以檀爲國名, 則檀君者, 檀國之君也. 而東語謂檀曰朴達, 或曰白達, 謂君曰壬儉. 當時無漢字, 故只稱白達壬儉, 而後世之述史者, 譯以檀君, 復傳至後世, 則只記檀君字, 而不知檀君之爲白達壬儉之譯, 此漢字之功罪相半也. 今若以諺書幷用, 則必無是弊, 而草野愚夫, 亦可易曉, 文化之啓發, 更可速矣. 此未遑長述.
환웅천왕이 세상을 거느린지 무릇 궐천년이니, 그가 바로 신시씨이다. 쑥대 정자와 버드나무 궁궐에 거처하면서 정성으로 사람을 교화함에, 앉아서 쉴 틈도 없이 다스리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처리하여 자연스러운 교화를 널리 펴니, 처음으로 나라를 열어 이룬 위업은 그 근본이 만세로 이이졌다. 그 말년에 이르러 공들인 위업이 이미 완성되며 백성과 사물들이 즐거이 사는 것을 보고는, 태백산에 올라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印)을 못 가 돌 위의 박달나무 아래에 놓고 신선으로 변화하여 구름을 타고 하늘에 올랐다. 때문에 그 못을 이름하여 '조천지(朝天池)'라 하는 것이다.
고시씨와 모든 사람은 하늘의 부절인 세 가지의 인을 받들고 그의 아들인 환검신인(桓儉神人)을 다함께 추대하여 군장으로 삼으니, 이로서 임금이 되었다.4) '임금'이라 함은 군장을 뜻하는 것으로서, 신라에서 이른바 '니사금'이라고 말하는 것이 또한 이와 같은 종류이다. 지금으로부터 거슬러 셈하면 대략 4천여 년이 되니 바로 당요(唐堯)와 같은 때로서, 세속에서 말하듯이 「요(堯)와 아울러 함께 일어났다」라고 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까닭에 '단군(檀君)'이라고 이름하는데, '단군'이란 '박달임금'의 번역이다. 대저 신시씨가 이미 박달나무 아래로 내려왔고, 환검신인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임금의 자리에 올랐기에 '단(檀)'으로 나라이름을 삼게 된 것이니, '단군'이라 함은 박달나라의 임금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말에 '단(檀)'을 '박달' 혹은 '백달'이라고 하며, '군(君)'을 '임금'이라고 한다. 당시에는 한자가 없었던 까닭에 단지 '백달임금'이라고 하였던 것을, 뒤에 역사를 서술하던 자가 번역하여 '檀君(백달임금)'이라 하였고, 다시 후세에 전해지며 단지 '檀君'이라는 글자만 기록하게 되었기에 '檀君'이 '백달임금'의 번역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었으니, 이는 한자의 공과 죄가 반반이다. 지금에 만약 언문과 함께 쓴다면 이러한 폐단은 반드시 없을 것이니, 곧 들녘의 어리석은 백성도 쉽게 깨우쳐 문화의 계발이 더욱더 빨라질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서술하지 않는다.
於是, 相地於諸州, 乃建都于太白山西南.牛首河之原, 曰壬儉城. 今, 滿洲.吉林之地, 有蘇密城, 在於涑沫江之南, 此卽其地也. 涑沫江, 亦稱蘇密河, 乃古之粟末水也. 新羅時, 有粟末靺鞨者, 占居粟水之地, 及大氏之興, 爲其先구. 盖靺鞨者, 古肅愼之後, 而亦檀帝遺族也. 後屬凌夷, 盡擲先祖舊(彊)[疆]於他人之手, 而區區靺鞨一支, 猶能(천)[捿]息於분楡之地; 大氏一號, 影從者數十萬, 天門大捷, 國基賴定, 夫豈偶然也哉! 盖蘇密.涑沫.粟末, 皆與牛首之意相近, 歷世傳訛, 猶不失其意, 豈聖人所宅, 神化洽被, 經萬載而其韻不絶者耶! 今, 春川.淸平山南十餘里, 昭陽.新淵兩江合襟之處, 有牛頭大村, 山中展활而江流抱回, 是爲貊國故都. 貊國亦出於檀氏之世, 則建都襲名, 必有之理也.
그리하여 모든 고을의 지세(地勢)를 살피고는 태백산 서남쪽 우수하(牛首河)의 벌판에 도읍을 세워 '임금성(壬儉城)'5)이라 하니, 지금의 만주 길림 땅에 소밀성(蘇密城)이 있어 속말강(涑沫江)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는데 이것이 바로 그 땅이다. 속말강은 또한 소밀하(蘇密河)라고도 일컬어지며 곧 옛날의 속말수(粟末水)이다. 신라 때에 속말말갈(粟末靺鞨)이 있어서 속수(粟水)의 땅을 점거하고 있다가 대조영이 흥기하자 그 선봉이 되었다. 대저 말갈6)은 옛 숙신(肅愼)의 후예로서 이 또한 단군의 자손인데, 뒤에 점차 쇠퇴해져 선조의 옛 강역을 모조리 다른 사람의 손에 던져 주고는 구구하게 말갈의 일족이 되어서 여전히 고향 땅에 깃들어 살더니, 대씨(大氏)가 한 차례 호령함에 그 그림자를 쫓는 자가 수십만이 되었으며, 천문령(天門嶺)에서 크게 이기고는 나라의 기초를 이로서 바로잡게 되었으니, 무릇 어찌 우연이라고만 하겠는가.
대개 소밀(蘇密)·속말(涑沫)·속말(粟末) 등은 모두 '우수(牛首)'의 의미와 서로 가까운데, (그 말은) 대대로 그릇되게 전해졌지만 오히려 그 뜻을 잃지 않았으니, 이는 성인이 자리잡은 곳에 신의 조화가 두루 미쳐 만세가 지나도록 그 운치가 끊어지지 않았음이 어찌 아니겠는가. 지금의 춘천 청평산 남쪽 10여 리에 소양(昭陽)과 신연(新淵)의 두 강이 합쳐지는 어귀에 우두대촌(牛頭大村)이 있으니, 산 속에 드넓게 펼쳐져 있으면서 강의 흐름을 안고 도는 이곳이 바로 맥국(貊國)의 옛 도읍지이다. 맥국 역시 단군 때에 나왔기에 도읍을 세우며 그 이름을 그대로 따른 것이니, 반드시 그러한 이치가 있었을 것이다.
淸平云: 「粟末水之陽, 有渤海.中京.顯德府地, 此乃檀君始都處, 故壬儉城卽平壤也. 北去上京.忽汗城六百里…」云, 又曰: 「高王夢有神人, 授以金符曰『天命在爾, 統我震域』故, 國號曰震, 建元曰天統, 恒敬祀于天, 及至子孫, 驕逸而漸廢, 亦幷事儒.佛, 國遂衰…」云. 今, 內外載籍, 幷無是語. 盖忽汗之敗, 遼虜凶殘, 室宮庫藏, 焚燒略盡, 復豈有載籍之得存者耶. 雖然, 渤海王子大光顯以下, 來投於高麗者甚衆, 中多公侯卿相及慷慨泣血之士, 淸平所記, 盖有據於渤海人之所秘藏者也.
청평이 말하기를 「속말수(粟末水)의 북쪽에 발해 중경(中京) 현덕부(顯德府)의 땅이 있으니, 이곳이 바로 단군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임금성으로 곧 평양이다. 북으로 상경(上京) 홀한성(忽汗城)과는 육백여 리 떨어 졌으며……」라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고왕(高王)의 꿈 속에 신인이 나타나 금부(金符)를 주며 『천명이 네게 있으니 우리의 진역(震域)을 통치하라』고 하였기에, 나라의 이름을 '진(震)'이라 하고 '천통(天統)'이라 건원하며 항상 하늘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냈는데, 자손에 이르러 교만하고 안락함에 빠져 점차 이를 폐지하고 또한 유학과 불교를 아울러 섬기니 마침내 쇠퇴하여……」라고 하였다.
지금 나라 안팎의 서적에는 모두 이 말이 없다. 아마도 홀한의 패배 때 요나라 오랑캐의 흉악한 잔당들이 궁실이며 창고에 감추어져 있던 것을 거의 모두 불살라 버렸으니, 다시 어찌 서적 가운데 남아 존재하는 것이 있을 수 있겠는가. 비록 그렇지만 발해왕자 대광현(大光顯) 이하 고려에 투항해 온 자가 매우 많았는데, 그 중에는 공경대부나 제후와 재상 및 비분강개하는 의기로운 선비도 많았으니, 청평이 기록한 것은 아마도 발해인들이 비밀리에 소장한 것에 근거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可怪, 金富軾爲仁宗修三國史, 而二千載往聖之遺烈, 闕而無述, 只以「海東三國, 歷年長久, 古記, 文字蕪拙, 事迹闕亡, 前言往事幽昧…」 如彼等語, 謀逃其責. 至於東川遷都之年, 而僅有「平壤者, 本神人王儉之宅也.」 或云「王之都王[險](儉)」等[自](字). 當時較今, 猶近古五百年, 而古記之散亡無徵, 曾若是其甚耶! 且《朝代記》之名, 與《[古]朝鮮秘記》.《誌公記》.《三聖(蜜)[密]記》等書, 現於世祖求書之諭, 而金氏之世, 獨無此書耶!
괴이하게도 김부식이 인종(仁宗)을 위하여 삼국의 역사를 편수하며 2천년 동안의 옛 성인이 남긴 공덕을 빠트리고 기술하지 않고서, 단지 「해동 삼국의 역년이 장구하나 옛 기록은 문자가 거칠고 졸렬하며 일의 자취는 이지러져 없어지고 앞선 말들이나 지나간 일들은 가뭇가뭇 어둡기만 하니……」라고 하며, 이와 같은 말로서 그 책임을 회피하고자 하였다.7) 그러다 동천왕이 천도한 해에 이르러서야 겨우 「평양은 본래 신인왕검8)이 자리잡은 곳이다」 혹은 「왕이 왕검에 도읍을 하였다」 등의 글귀가 있을 뿐이다. 당시를 지금과 비교하면 오히려 옛날에 5백년이나 가까운데 옛 기록이 흩어져 없어지고 증거가 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였으니, 일찍이 이와 같은 일이 이다지도 심할 줄이야! 더욱이《조대기(朝代記)》의 이름이《고조선비기(古朝鮮秘記)》.《지공기(誌公記)》.《삼성밀기(三聖密記)》등의 책과 함께 세조(世祖)가 내린 구서(求書)의 유시9)에도 보이는데 유독 김씨의 세대에 이 책들이 없었더란 말인가!
盖, 三國鼎立, 互事呑서, 新羅終致聯唐兵而覆麗.濟, 厥後渤海雖興, 只與新羅南北相對, 不惟秦.越而已. 是以, 弓裔襲據漢北之地, 則恨平壤之茂草, 聲言爲高句麗報수, 而浿西諸鎭, 望風歸服, 立國建元, 威壓列州; 甄萱叛據完山, 則憤百濟之衰亡, 以雪義慈宿憤爲言, 而西南州縣, 所至響應, 建都設職, 喜得人心. 高麗旣承羅後, 而疆土不出鴨水以外一步之地, 自與北方無涉. 且遼.金之勢, 威壓境上, 區區鴨水以南數千里地, 更非雄邦巨國之比, 則民氣之衰微, 自有甚於古者[矣. 是以, 金氏撰史之時, 已無過問, 鴨北之事者.]10) 황, 平壤之地, 荒廢頗久, 舊基雖存而荊棘滋茂, 蕃人(遊)[游]獵, 侵掠邊邑者, 麗.太祖初年所記也. 然則, 高句麗亡後三百年, 而平壤不免荊棘, 渤海人之遊獵其間者, 則輒稱之以蕃人侵掠邊邑, 則只恨其大害. 然則, 忽汗敗而大氏之來奔高麗者, 亦家敗而睦族之類而已.
대저 삼국이 정립하고 있으며 서로 집어삼키고 물어뜯고 하다가, 신라가 마침내 당나라 병사와 연합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넘어뜨렸다. 그후 발해가 비록 일어나기는 하였지만 단지 신라와 더불어 남북으로 대치하고 있었을 뿐, 서로 마음에 두지 않았으니 곧 소원해질 따름이었다.11) 그러다가 궁예(弓裔)가 한강 이북의 땅을 점령하여 차지하고는 잡초만 무성해진 평양 땅을 한탄하며 고구려를 위하여 원수를 갚겠다고 천명하니, 패서(浿西)12)의 모든 고을이 그 기세에 힘입고 모여들어 복종하기에, 나라를 세우고 연호를 정함에 그 위세가 모든 고을을 제압하였다. 견훤(甄萱)은 완산에서 반란을 일으켜 점거하고 백제의 쇠망을 분하게 여겨 의자왕의 묵은 원한을 갚고자 한다고 천명하니, 서남쪽의 고을 가운데 그 명성이 이르는 곳마다 모두 향응하기에, 도읍을 세우고 직책을 설치하여 기꺼이 인심을 얻게 되었다.
고려가 신라를 계승하였다고는 하지만 강토는 이미 압록강에서 밖으로 단 한 발자국도 나서지 못하는 땅이 되었으며, 북방과 더불어 스스로 관계를 가지지도 않았었다. 또한 요나라와 금나라의 기세가 국경을 위세로 억누르니, 구구하게 압록강 이남의 수천 리 땅으로 다시금 웅혼하고도 거대했던 나라와 비교될 수가 없었기에, 백성의 기세가 저절로 쇠미해짐이 옛날보다 심하게 되었다. 그러한 까닭에 김씨가 역사를 서술할 때는 이미 압록강 이북의 일에 대해 묻는 자가 없었다. 항차 평양 땅은 황폐해진지가 자못 오래되었으니, 예전의 기초는 비록 남아 있다고 하지만 가시덤불이 무성히 자라고 오랑캐들이 수렵하여 노닐며 주변의 고을을 약탈하였다는 것이 고려 태조 초년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한 즉 고구려가 망한 뒤 3백년이 지난 후 평양은 가시덤불을 면하지 못하였는데, 발해인들이 그 곳을 수렵하며 노닐었던 것을 그저 '오랑캐들이 침입하여 주변의 고을을 약탈했다'라고 한 것은 단지 같은 민족을 욕하는 커다란 해악을 두려워해서이다. 그러기에 홀한에서 패한 대씨가 고려로 투항하여 온 것 역시, 마치 집안이 망하면 오히려 가족끼리는 화목하여 지는 것과도 같은 것일 따름이다.
及夫묘淸之造亂, 奉命剿討者, 又是金富軾也. 金氏旣無信文, 又惡妙淸之妖.西京之破, 幷不深採其說, 下筆寫過, 只留「本神人王儉之宅」數句, 亦何足深責! 而渤海史, 幷不過問, 金氏於此, 終不免其咎矣. 盖, 金氏旣醉於漢籍, 又乏雄圖, 則雖有甚歎於吾邦之事, 却茫然不知其始末之處, 而亦無能而已矣. 我邦經史之禍, 其來久矣. 今浩歎無益, 亦復奈何.
무릇 묘청이 난을 일으키자 왕명을 받들어 그를 토벌하여 전멸시킨 사람 또한 김부식이다. 김씨에게는 원래 믿을 만한 글이 없는데, 또한 묘청의 요사스러움과 서경의 파탄을 미워한다 하면서도 더군다나 이 모두에 대해 깊이 있게 그 내용을 캐지 않고 글을 써내려가며 단지 「본래 신인왕검이 자리잡은 곳이다」는 몇 구절만을 남겨 놓았으니, 어찌 그를 심하게 질책하는 것만으로 족하겠는가! 더욱이 발해의 역사는 언급도 하지 않았으니, 김씨는 이로서 언제까지나 그 허물을 면할 수 없게 되었다. 김씨는 본디 한나라의 서적에 빠져 있고, 또한 웅장한 계책 같은 것도 결핍된 자인지라, 비록 우리나라의 일에 대해 근심하여 한숨을 쉰다고는 하지만 오히려 엉뚱하게도 그 시작과 끝도 분간하지 못하는 것이니, 이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일 따름이다. 우리나라의 경전과 역사 서적이 입은 화는 이미 오래이니, 지금에 와서 아무리 탄식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며 또한 어찌할 수 있을 것인가.
按《遼史·地理志》, 有「顯州.奉先軍, 上,節度. 本渤海.顯德府地. 天顯三年, 遷東丹民居之, 升爲南京城. 天顯十三年, 改南京爲東京府曰遼陽…」等句. 今遼陽在蘇密以南六百餘里, 與淸平之說, 甚相逕庭. 且遼陽旣爲中京, 則西京當擬於遼西.臨潢等地, 以渤海舊疆考之, 決無是理. 황, 淸平諸說, 已有所據, 而《遼史》則乃元.至正中, 丞相脫脫等所撰也; 經金.宋交爭以後數三百年, 文獻自多不備, 傳說亦多失正鵠. 而渤海亡後, 其世族舊臣, 隨處擧兵, 殆將百年不息, 遼人多遷其民, 與漢民雜處, 遼西之地, 以至城邑, 冒稱渤海, 本名者, 不下數十, 元人修史者, 只憑古傳名字, 輒自斷之, 不亦소乎. 壬儉城者, 卽古語京城之意也. 平壤之意, 雖未詳, 亦必都城之義, 如新羅之徐羅伐.百濟之慰禮也.《括地志》云, 高麗治平壤城, 本王險城.《史記》.《漢書》[通及](及《通)典》, 皆有王險城字, 此又儉字之誤也. 此可續述焉.
《요사·지리지》에 의하면 「현주(顯州)의 봉선군(奉先軍)은 상절도(上節度)로서 본래 발해의 현덕부(顯德府) 땅이다. 천현(天顯) 3년에 동란(東丹)13)의 백성을 옮겨 살게하고 승격시켜 남경성(南京城)으로 삼았다. 천현 13년에 남경을 고쳐 동경으로 삼고 관청을 두어 요양(遼陽)이라 하였다」14)는 등의 구절이 있는데, 지금의 요양은 소밀(蘇密)의 남쪽 600여 리에 있으니 청평의 말과는 서로 차이가 매우 심하다. 또한 요양이 이미 중경이 되었으니 곧 남경은 당연히 요서(遼西)나 임황(臨潢) 등의 땅에 비견되어야 하므로, 발해의 옛 강토로써 이를 고찰하여 보면 절대로 그럴리가 없다. 더욱이 청평의 모든 말은 이미 그것이 근거하는 바를 가지고 있는 것들이지만,《요사(遼史)》는 곧 원나라 중정(中正) 연간에 승상 탈탈(脫脫) 등이 찬술한 것으로서, 금나라와 송나라가 서로 다툰 이후 거의 3백년이 지난 뒤이기에 문헌이 많이 소실되었고 내려오는 얘기 또한 자못 그 올바름을 잃어 버렸을 것이다. 게다가 발해가 망한 후 그 명문세가나 옛 신하들이 도처에서 병사를 일으킴이 거의 백년 동안 쉴 틈이 없자, 요나라 사람들이 그 백성들을 많이 옮겨 한나라 백성과 섞어 거처하게 하였기에 요서의 땅에는 성읍에 이르기까지 발해의 지명을 모방하여 부르게 되어서 본래의 지명이 남은 곳은 수십 곳을 넘지 못하였음에도, 원나라 사람이 엮은 역사는 단지 예로부터 전해 오는 이름의 글자에만 의지해서 함부로 단정지어 버린 것이므로, 이 또한 소홀했던 것이 아니었겠는가.15)
'임금성'이란 것은 옛날 말로 바로 '서울'이라는 의미이다. '평양'16)의 의미는 비록 상세하진 않지만 이 또한 반드시 '도읍한 읍성'이란 뜻으로서 신라의 '서라벌'이나 백제의 '위례'와 같을 것이다.《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고려가 평양성에서 다스렸는데 바로 왕험성(王險城)이다」라고 하였으며,《사기》와《한서》및《통전(通典)》에도 모두 '王險城'이란 글자가 있으니, 이 또한 '儉'자가 잘못 쓰여진 것이다. 이것은 계속해서 서술하겠다.
檀君旣建都於壬儉城, 乃築城郭, 建宮室, 置主命.主穀.主兵.主刑.主病.主善惡及主忽諸官, 以其子夫婁爲虎加, 총諸加者也. 神誌氏卽古神誌氏之後,下皆倣此爲馬加, 曰主命; 高矢氏爲牛加, 曰主穀; 蚩尤氏爲熊加, 曰主兵; 二子夫蘇爲鷹加, 曰主刑; 三子夫虞爲鷺加, 曰主病; [周](朱)因氏爲鶴加, 是主善惡; 余守己爲狗加, 是分管諸州也. 稱爲檀君八加, 乃殺白牛, 以祭天于太白之麓.
단군이 임금성에 도읍을 세워 성곽을 축조하고 궁실을 지으며 생명과 곡식과 병사와 형벌과 질병과 선·악과 및 지방의 일 등을 주관하는 여러 관직을 설치하였다. 아들 부루(夫婁)는 호가(虎加)로 삼아 모든 가(加)들을 통괄하게 하였으며, 신지씨(즉 옛날 신지씨의 후손이다. 다음의 모든 것도 이와 같다)는 마가(馬加)로 삼아 생명을 주관하게 하고, 고시씨는 우가(牛加)로 삼아 곡식을 주관하게 하고, 치우씨는 웅가(熊加)로 삼아 병사를 주관하게 하고, 둘째아들 부소(夫蘇)는 응가(鷹加)로 삼아 형벌을 주관하게 하고, 세째 아들 부우(夫虞)는 노가(鷺加)로 삼아 질병을 주관하게 하고, 주인씨는 학가(鶴加)로 삼아 선악을 주관하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는 구가(狗加)로 삼아 모든 고을을 나누어 관리하게 하였다. 이를 일컬어 '단군팔가(檀君八加)'라 하고는 흰소를 잡아 태백산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舊禮, 凡祭天, 必先定吉日, 擇白牛而護養之, 及期, 宰殺以頭薦之於嶽瀆. 白頭, 牛首之名, 頗亦有因於此也. 盖祭天報本之禮, 始於檀君, 後世歷代諸國, 莫不祭天. (扶)[夫]餘.濊(백)[貊].馬韓.新羅.高句麗諸國以十月, 百濟以四仲月, 各有禱天.舞天.祭天.郊天.迎鼓.東盟之稱. 夫餘則又有, 祭天殺牛, 以제占吉凶之俗, 盖其源流久遠而沈漸成俗, 亦可知矣. 夫尊卑之禮, 必自敬鬼神而興, 上下尊卑之序定而先王經世之道行焉. 而敬神之禮, 莫大於祭天, 通萬古, 흘四方, 未有人而不知畏天者. 是以,《易》曰: 「大哉! 乾元. 萬物資始, 乃統天.」 又曰: 「首出庶物, 萬邦咸寧.」 盖言其聖人, 체天而率民也.
옛 예절에 무릇 하늘에 제사를 지내려면 반드시 먼저 상서러운 날을 정하고, 흰소를 선택하여 이를 보호하여 기르다가, 날이 되면 잡아서 그 머리를 명산대천에 제물로 올렸다. '백두(白頭)'는 소의 머리를 이름하는 것이니 이 또한 여기에서 연유한 바가 있다. 대저 하늘에 제사를 지내어 근본에 보답하는 의식은 단군으로부터 시작된 것인데, 후세의 역대 모든 나라들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음이 없었으니, 부여·예맥·마한·신라·고구려 등의 모든 나라는 10월에 지냈고 백제는 사중월17)에 지냈으며, 각각 도천(禱天)·무천(舞天)·제천(祭天)·교천(郊天)·영고(迎鼓)·동맹(東盟)의 명칭이 있었다.18) 부여에서는 또한 하늘에 제사를 드리며 소를 잡아서 그 발굽으로 길흉을 점치는 풍속이 있었으니,19) 대개 그 원류가 오래되고 요원하지만 생활에 깊숙이 젖어 들어 풍속을 이루었음을 알 수 있다.
대저 존귀하고 비천함에 대한 예절은 반드시 귀신을 공경하면서부터 일어나게 되는 것이며, 위아래와 귀천의 순서가 정해지니 세상을 다스리는 선왕의 도가 행하여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신을 공경하는 예절 가운데 하늘에 제사지내는 것 보다 더 큰 것은 없으며, 만고를 통하여 이 세상에서 사람으로서 하늘의 두려움을 알지 못하는 자는 없었다. 그러한 까닭에《역(易)》에 이르기를 「크도다 건(乾)의 원(元)이여. 만물이 원(元)에 바탕하여 비롯하나니, 이에 하늘을 모두 다스리도다」라고 하였으며, 또한 「모든 것이 싹이 터 나오니 모든 나라가 다 평안하니라」 하였으니, 이는 아마도 성인이 하늘의 뜻을 체득하고 그것으로 백성을 통솔하는 것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洪範八政, 三曰祀, 祀者, 所以通神明而報其本也. 是以, 陸有祭獸之豺, 水有祭魚之獺. 夫豺獺者, 禽獸也, 猶知報本之意, 황人而不知(其)報本之禮乎! 又황神市, 肇宅人界, 其降自天, 桓儉繼志述事, 未嘗少弛, 此桓儉所以, 재定厥鼎而便祭上天也. 且太白山者, 神市陟降之靈地也, 檀君踐(祚)[조], 亦肇于厥地, 此又始行之, 于太白也. 是爲東方萬世之國典, 故古代國君, 必先敬事上帝卽一大主神[也]及檀君三神, 因以爲道.
홍범팔정(洪範八政)의 세번째는 '사(祀)'를 말하고 있는데, '사'란 신명(神明)과 통함으로써 그 근본에 보답하는 것이다.20) 그러기에 육지에는 제사를 지내는 짐승인 승냥이가 있고, 물에는 제사를 지내는 고기인 수달이 있으니, 대저 승냥이며 수달은 짐승이면서도 오히려 근본에 보답하는 의미를 아는데 항차 사람이면서 근본에 보답하는 예절을 알지 못하겠는가! 또한 신시씨가 인간세계에 처음으로 자리잡기 위하여 하늘에서 내려왔으며, 환검은 그 뜻을 이어 이를 처리함에 조금도 소흘하지 않았으니, 그러한 까닭에 환검이 비로소 솥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지내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태백산은 신시씨가 하늘을 오르내리던 신령스러운 땅이며, 단군의 등극 역시 그 땅에서 비롯하였으니, 이로서 그 제사를 태백에서 처음으로 행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동방에 있어 만세에 걸친 나라의 제전이 되었으니, 고대의 나라 임금은 반드시 먼저 상제(上帝)(한 분의 큰 주신이다)로부터 단군에 이르기까지 삼신(三神)을 삼가 섬기는 것을 도리로 삼았다.
至於官職, 又有(太)[大]仙.國仙.조衣之稱, 至若東明聖王, 有朝天之石, 明臨답夫, 曾帶조衣之職. 泉蓋蘇文, 入鳳凰山, 修鍊十年,□遂□萬古奇傑; 金庾信, 亦入中嶽石]21)窟, 十年修道, 終爲名將, 助太宗致盛强. 渤海時有報本壇, 高麗時有聖帝祠, 遼有木葉山三神廟, 金有開天弘聖帝之廟. 我世宗, 設檀君廟於平壤, 世祖元年, 改位版曰「朝鮮始祖檀君之廟」. 盖, 神市氏之事, 聽者多疑其迂怪. 至今惟知崇檀君, 而不知其前實有神市氏之開創矣. 世俗不知原由, 只憑漢籍曰: 「仙敎是黃老餘流.」 殊不知, 以神設敎, 實自我神市之世也.
관직에 있어서는 또한 대선(大仙)·국선(國仙)·조의(조衣) 등의 명칭이 있었으니, 동명성왕에 이르러서는 조천석(朝天石)이 있었고, 명림답부(明臨答夫)22)가 일찍이 조의(조衣)의 직책을 맡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연개소문은 봉황산에 들어가 십년을 수련한 뒤 마침내 만고에 뛰어난 호걸이 되었으며, 김유신은 중악의 바윗굴에 들어가 십년을 수도한 뒤 결국에는 명장이 되어 태종을 도와 나라를 강성함에 이르게 하였다. 발해 때는 보본단(報本壇)이 있었고, 고려 때는 성제사(聖帝祠)가 있었으며, 요나라에는 목엽산(木葉山)의 삼신묘(三神廟)가 있었고,23) 금나라에는 개천홍성제(開天弘聖帝)의 사당이 있었다.24) 우리 세종께서는 단군묘(檀君廟)를 평양에 설치하였는데, 세조 원년에 위패를 고쳐 '조선시조단군지묘(朝鮮始祖檀君之廟)'라 하였다.
대저 신시씨의 일을 들은 사람은 현실에 맞지 않고 괴이함에 의심을 많이 한다. 지금은 오직 단군만을 숭상할 줄 알 뿐, 그 앞에 신시씨가 세상을 열어 창조하였음이 실제로 있었다는 것은 알지 못한다. 세속은 그 연유하는 바를 알지 못하고 단지 한나라의 서적에 의지하여 이르기를 「선교(仙敎)는 황노(黃老)의 한 부류이다」라고 하니, 신인으로서 가르침을 베푼 것이 우리 신시씨의 세상에서부터 비롯하였다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檀君旣祭天而立敎率民, 而致道化行數年, 率土之民, 皆洽其化, 陶鈞停毒, 無爲而治, 此檀君神德之所致也, 乃立國之本也. 後可續述焉.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가르침을 세워 백성을 통솔하며 도를 궁구하여 교화를 행한 지 수년만에 강토의 백성에게 모두 교화가 두루 미치니, 세상은 잘 다스려지고 모든 악독함이 사라지는 등 행함이 없이도 잘 다스려졌으며, 이는 단군의 신령스러운 덕의 소치로서 곧 나라를 세우는 근본이 되는 것이다. 후에 계속하여 말하고자 한다.
居牛首河畔十年, 乃遷都於白山之南.浿水之北, 曰平壤, 卽第二(王)[壬]儉城也. 盖, 今涑沫之地, 風氣凄冷, 土味勁寒, 雖野勢通豁, 而耕農之利不如南土. 且涑沫之水, 北流入混同江, 南地交通, 自多不便, 此必其由也. 淸平云: 「檀氏之世, 四遷其鼎, 第二奠都於浿水之北. 卽渤海.西京.鴨록府地, 神州是也. 高句麗.國內.桓都古城之址, 在其境內焉.」 則浿水之非獨爲今之大同江, 明矣.
우수하(牛首河)의 물가에 거처한 지 10년만에 백산(白山)의 남쪽 패수(浿水)의 북쪽으로 도읍을 옮기고 평양25)이라 하니 곧 두번째의 임금성이다. 대저 속말의 땅은 바람 기운에 냉기가 돌고 토양이 척박하여 비록 들판의 기세는 광활하게 트였으나 농사를 짓는 이로움은 남쪽 땅만 못하였다. 게다가 속말의 물은 북으로 흘러 혼동강(混同江)으로 들어가기에 남쪽으로의 교통에는 자연히 많은 불편이 있었으니, 이것이 반드시 그 이유일 것이다. 청평이 말하기를 「단씨(檀氏)의 치세 때 모두 네 차레 솥을 옮겼는데, 그 두번째는 패수의 북쪽에 도읍을 정하였으니 발해의 서경 압록부 땅인 신주(神州)가 바로 그 곳이다. 고구려의 국내성 및 환도성(桓都城)의 옛 성터가 그 경내에 있다」고 하였으니, 패수가 지금의 대동강이 아님은 분명하다.26)
按《新唐書·渤海傳》曰: 「高麗(古)[故]地爲西京, 曰鴨(綠)[록]府, 領神.豊.桓.正四州.」《遼史·地理志》曰: 「록州, 鴨록軍, 節度, 本高麗(古)[故]國, 渤海號西京.鴨록府, 都督神.桓.豊.正四州事. 故縣三, 神鹿.神化.劒門, 皆廢.」 又曰: 「桓州, 高麗.中都城, 古縣三, 桓都.神鄕.淇水, 皆廢.」 夫, 渤海承高句麗(之)後統, 高句麗復出於夫餘, 則渤海之世, 猶有古史之傳者, 想不少矣. 或曰: 「平壤之敗李勣, 盡燒宮室庫藏, 復虜其公侯世族, 則史籍亦不免灰燼矣, 渤海, 安得傳其史乎.」 余以(謂)[爲]不然. 渤海.高王, 乃高句麗舊將也. 高句麗之亡, 徙居營州, 及看藎榮之亂, 與乞四比羽, 領衆東還, 麗.鞨之衆, 響應而起. 盖其舊國宿將, 如百濟之黑齒常之明矣, 其麾下, 想多舊國遺臣, 能博通古今者. (耳)[且]自高句麗亡後, 距高王之興, 僅二十七八年事也, 古史能無得傳乎. 且以文勢言之, 則神州當爲渤海.西京所在鴨록府地, 而神州.桓州之名, 又有近於神市.桓儉等字. 황, 神市.桓儉, 人每認爲一人, 至今擧世殆然. 而神州屬縣, 有神化.神鹿等地; 桓州屬縣, 又有桓都.神鄕.淇水之名. 桓都者, 盖高句麗之丸都也. 丸都之名, 旣出於《魏志》.《北史》等書, 則桓.丸之誤, 固不可知, 而渤海旣以桓州.桓都定名, 則其或原於慕遠之意. 神鄕則, 有寓神市之鄕之義也. 神化則, 言神人之化也. 神鹿之稱, (丸)[尤]益可奇. 황古來, 稱桓儉曰神人, 則神.桓等名, 決非偶然. 且淇水,《元.一統志》作浿水, 又與前述浿水之北之說, 暗合. 按漢籍, 說浿水及平壤者, 頗多, 今不可便述. 而神州.桓州.神化.神鹿.桓都.神鄕.浿水之名, 旣與檀君古事, 多合, 則檀君第二之平壤, 當在於鴨水之北.
《신당서·발해전》에 따르면 「고려의 옛 땅을 서경으로 삼아 압록부(鴨록府)로 이름하고 신(神)·환(桓)·풍(豊)·정(正)의 4주를 거느리게 하였다」라 하였으며,《요사·지리지》에는 「녹주(록州)의 압록군(鴨록軍)은 절도(節度)이다. 본래 고려의 옛 국토로서 발해가 서경압록부라 불렀다. 모두 신(神)·환(桓)·풍(豊)·정(正) 등 4주의 일을 감독한다. 옛 현인 신록(神鹿)·신화(神化)·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으며, 또 말하기를 「환주(桓州)는 고려의 중도성(中都城)이며 옛 현인 환도(桓都)·신향(神鄕)·기수(淇水) 등 세 군데는 모두 폐지하였다」고 하였다. 무릇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 훗날 그 지역을 다스렸고, 고구려는 다시 부여로부터 나왔으니, 곧 발해의 세대에는 아직까지 옛 역사가 전해지는 것이 적지 않았을 것이다. 혹은 말하기를 「평양이 이적(李勣)에게 패하여 궁궐이며 곳간이 남김없이 불타 버리고, 게다가 공경대부며 명문세족들은 포로로 잡혀갔기에 역사 서적 역시 재가 됨을 면할 수 없었을 것인데 발해가 어떻게 그 역사를 전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발해의 고왕은 바로 옛 고구려의 장수이다. 고구려가 망하자 영주(營州)로 옮겨 거처하다가 신영(藎榮)의 난을 보고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무리를 영도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니, 고구려와 말갈의 무리들이 이에 호응하여 일어났다. 대저 그는 옛 나라의 노련한 장수로서 마치 백제의 흑치상지27)와 같음이 분명하니, 생각건대 그 휘하에는 옛 나라의 신하였던 자로서 능히 고금의 일에 널리 통하는 자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고구려가 망한 후로부터 고왕이 일어서기까지의 사이는 겨우 27,8년의 일이니 옛 역사가 능히 전해진 것이 없었겠는가.
또한 문장의 흐름을 보아 말하더라도 곧 신주(神州)가 마땅히 발해의 서경이 있는 압록부 땅이며, 신주(神州)나 환주(桓州) 등의 이름 또한 신시(神市)나 환검(桓儉) 등의 글자에 가까운 바가 있다. 항차 신시씨와 환검신인을 사람들마다 모두 한 사람으로 여기더니, 지금은 모든 세상이 거의 다 그렇게 여긴다. 신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신화(神化)와 신록(神鹿) 등의 땅이 있고, 환주에는 그에 속한 현으로 또 환도(桓都)와 신향(神鄕) 및 기수(淇水) 등의 이름이 있다. 환도(桓都)는 아마도 고구려의 환도(丸都)일 것이다. '환도(丸都)'라는 이름은《위지(魏志)》나《북사(北史)》등의 책에도 이미 나오는데, 곧 '桓'이 '丸'의 잘못 된 표기인지는 알 수가 없으나 발해에서는 이미 환주(桓州)와 환도(桓都)로 이름을 바로잡아 놓았으니, 이는 아마도 오랜 옛날을 그리는 뜻에 그 근원을 두었으리라.
'신향'이라 함은 곧 신시씨에게 의지하며 살던 마을이라는 뜻이 있으며, '신화'라 함은 곧 신인의 교화를 말하는 것이다. '신록'의 명칭은 더욱 기이하다. 항차 예로부터 환검(桓儉)을 일컬어 신인(神人)이라 하였으니, 곧 '神'·'桓'등의 이름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또한 기수(淇水)는《원일통지(元一統志)》에 패수(浿水)로 되어 있으며, 또 앞에서 서술한 '패수의 북쪽'이라는 예기와 암암리에 부합한다. 한나라 서적에 의거하면 패수와 평양을 말한 것이 자못 많으나 지금 다 말할 수는 없다. 신주·환주·신화·신록·환도·신향·패수 등의 이름은 이미 단군의 옛 일들과 많이 부합되니, 곧 단군의 두번째 도읍인 평양은 압록강의 북쪽에 있는 것이 당연하다.
且《三國史記》, 高句麗.琉璃王二十一年, 薛支見王曰: 「臣逐豕至慰那岩, 見其山水深險, 地宜五穀, 又多미鹿魚鱉之産, 王若移都, 則不惟民利之無窮, 又可免兵革之患…」云云. 故明年冬十月, 王遷都國內, 則其地, 非但山水險阻, 原野開활, 亦可知, 適於耕農矣. 夫, 古者建都, 必取險固殷富及交通之便. 今平壤.松京.漢陽之地, 莫不皆然, 長安.洛陽, 恒爲漢土建都之地, 亦此故也. 然則, 檀君之世, 民物漸繁, 交通愈緊, 且耕農之業, 逐漸而興, 則其捨粟末之地, 而南遷於浿水之濱, 以圖後日之隆運, 盖可想見矣.
또한《삼국사기》의 고구려 유리왕 21년에 설지(薛支)가 왕을 뵙고 아뢰기를 「신이 희생(犧牲)인 돼지를 쫓아 위나암(慰那岩)에 이르렀더니, 그 곳은 산과 물이 깊고 험하며 땅은 오곡을 재배하기에 적합하고, 또한 순록과 물고기 및 자라 등 산물이 많은 것을 보았습니다. 왕께서 만일 그 곳으로 도읍을 옮기게 되면 단지 백성들의 복리가 무궁할 뿐만 아니라 전쟁의 걱정 또한 면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다음해 겨울 10월에 왕이 도읍을 국내(國內)로 옮겼으니, 곧 그 땅은 단지 산수가 험준하고 들판이 광활할 뿐만 아니라 또한 농사짓기에 적당한 곳임을 알 수 있다.
무릇 옛날에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험준하여 견고하며 산물이 풍부하면서도 교통이 편리한 곳을 취하였다. 지금의 평양이나 송경과 한양 등지의 땅이 모두 그렇지 않은 곳이 없으며, 장안과 낙양이 항상 한나라에서 도읍을 세우는 땅이 됨은 또한 그러한 까닭에서이다. 그러한 즉, 단군의 세대에 백성과 사물이 점차로 번창해지고 교통이 더욱 요긴해지며 또한 농사짓는 일도 따라서 점차 일어나게 되니, 그 속말(粟末) 땅을 버리고 남쪽으로 패수의 물가로 옮겨와 후일의 융성한 운세를 도모하게 되었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又按《唐書·地理志》曰: 「自鴨록江口, 舟行百餘里, 乃小舫溯流, 東北三十里, 至泊작口, 得渤海之境; 又溯流二百里, 至丸都縣城, 故高麗王都; 又東北, 溯流二百里, 至神州; 又陸行四百里, 至顯州, 天寶中, 王所都; 又正東如北六百里, 至渤海王城」云. 今, 自鴨綠江口, 約行四百餘里, 乃得婆저江合流處, 又行二百里, 至江界.滿浦鎭隔江處, 田野開豁, 山河固密. 盖, 檀君南遷四百餘里, 定都于古鹽難水之東, 浿水之北, 渤海.神州.神化等地, 殆無疑, 而渤海之時, 猶傳其蹟也.
또한《당서》의 <지리지>에 의하면 「압록강 어귀로부터 배로 1백여 리 가서, 또 작은 배로 동북쪽으로 3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박작구(泊작口)에 이르러 발해와의 경계에 닿는다. 2백리를 또 거슬러 올라가면 환도현(丸都縣)의 읍성에 이르는데 옛날 고려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동북으로 2백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신주(神州)에 이르고, 또 육지로 4백리를 가면 현주(顯州)에 이르는데, 천보(天寶) 연간에 왕이 도읍한 곳이다. 또 바로 동쪽에서 북으로 6백리를 가면 발해의 왕성에 닿는다」28)라고 하였다.
지금 압록강 어귀로부터 약 4백여 리를 가면 이내 파저강(婆猪江)과 합류하는 곳에 이르고, 또 2백리를 가면 강계(江界) 만포진(滿浦鎭) 강의 맞은편에 닿게 되는데, 밭과 들이 광활하고 산과 강이 견고하게 밀집되어 있다. 대저 단군이 남쪽으로 4백여 리를 옮겨와서 옛 염난수(鹽難水)의 동쪽이요 패수의 북쪽인 발해의 신주·신화 등지의 땅에 도읍을 정하였음은 거의 의심할 바가 없으며, 발해 때는 여전히 그 유적이 전해졌었다.
乃復祭天而薦新居, 築城郭, 建宮室, 浚溝혁, 開田陌, 勸農桑, 治漁獵, 使諸民進用餘之物, 以補國用, 民皆熙熙而樂之. 時有, 蒼鹿遊郊外, 靑龍見朝天池. 檀君乃出巡, 至南海, 登甲比古次之山, 設壇祭天. 還至海上, 赤龍呈祥, 神女奉합, 有一童子, 衣緋衣, 從합中出謁, 檀君愛之, 因姓曰緋, 名曰天生, 遂爲南海上長. 及還至平壤, 有三異人, 自東方渡浿水而至, 首曰仙羅, 次曰道羅, 又其次曰東武. 於是因二龍之祥, 改虎加曰龍加, 使仙羅主之, 道羅爲鶴加, 東武爲狗加. 又因蒼鹿之瑞, 改鷺加曰鹿加, 依前, 使夫虞主之, 制治比前更完矣.
이에 다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새로운 거처로 옮겨 성곽을 짓고 궁실을 세우며, 봇도랑을 준설하고 밭두둑 길을 열어 농업과 누에치기를 권장하였으며, 어로와 수렵을 가르치고 모든 백성들에게 쓰고 남은 물자를 진상하게 하여 이로서 나라의 살림에 보태게 하니, 백성들은 모두 화합하며 즐거워하였다. 이때 푸른 사슴이 교외에서 뛰어 놀았으며, 푸른 용이 조천지(朝天池)에 모습을 드러내었다. 단군은 이에 순행을 나가서, 남해에 이르러 갑비고차산(甲比古次山)에 올라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돌아오는 길에 바다에 이르니 붉은 용이 상서러움을 드러내 보이고 신녀가 함을 받들어 바치는데, 한 동자가 붉은 비단 옷을 입고 그 함속에서 나와 단군에게 알현하기에, 그를 사랑스럽게 여겨 성을 비(緋)라 하고 이름을 천생(天生)이라 지어 주었더니 마침내 남해상장(南海上長)이 되었다.
돌아와 평양에 이르니 3명의 비범한 사람이 동방으로부터 패수를 건너와 있었는데, 그 첫째는 선라(仙羅)라 하였고, 다음은 도라(道羅)라 하였으며, 또 그 다음은 동무(東武)라 하였다. 이에 두마리 용의 상서러움이 있었다고 하여 호가(虎加)를 고쳐 용가(龍加)라 이름하고 선라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으며, 도라는 학가(鶴加)로 삼고 동무는 구가(狗加)로 삼았다. 또 푸른 사슴의 길함으로 인해 노가(鷺加)를 녹가(鹿加)로 고쳐 부르고 예전처럼 부우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니, 제도의 다스려짐이 이전에 비하여 더욱 완전하게 되었다.
當是之時, 檀君之化, 洽被四土, 北기大荒, 西率알견兪, 南至海岱, 東窮蒼海, 聲敎之漸, 偉乎廣矣. 乃區劃天下之地, 以封勳戚. 蚩尤氏之後, 封于南西之地, 巨野浩豁, 海天정碧, 曰藍國, 宅奄慮忽. 神誌氏之後, 封于北東之地, 河嶽(鹿병)[추莊], 風氣勁雄, 曰루진國, 亦稱肅愼, 方言, 豪莊之稱也, 治肅愼忽. 高矢氏之後, 封于南東之地, 山河秀麗, 草木暢茂, 曰靑丘國, 宅樂浪忽. 封[周](周)朱因氏之後, 於蓋馬國. 余守己爲(穢)[濊]君. 夫蘇.夫虞及少子夫餘, 皆封于國西之地, 句麗.眞番.夫餘諸國, 是也. 其後, 夫婁又封東來三人於各地, 後世之沃沮.卒本.沸流之稱, 皆起於其所封國名也. 通檀氏之世, 凡大國九, 小國十二, 分治天下諸州, 今不可詳矣.
당시에 단군의 교화는 사방에 두루 미쳐 북으로는 대황에 다다르고 서쪽은 설유29)를 거느리며, 남쪽으로 회대의 땅에 이르고 동으로는 큰 바다에 닿으니, 가르침이 퍼져나가 물들어 감은 위대하고도 넓은 것이었다. 이에 천하의 땅을 구분하여 나누고 공훈이 있는 친족에게 주어 제후로 삼았다. 치우씨의 후손에게는 남서쪽의 땅에 봉하니, 거대하고 광활한 들녘에 바다는 고요하고 하늘은 푸르기에 남국(藍國)이라 이름하고 엄려홀(奄慮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신지씨의 후손에게는 북동쪽의 땅에 봉하니, 물길이 수려하고 산악이 장엄하며 바람의 기운은 굳세고 웅장하기에 속진국(루진國) 또는 숙신(肅愼)이라 일컬었으니, 방언으로 호걸 장엄함을 말하며, 숙신홀(肅愼忽)에서 다스리게 하였다.30) 고시씨의 후손에게는 남동쪽의 땅에 봉하니, 산하가 빼어나게 수려하며 초목이 무성하여 청구국(靑丘國)이라 이름하고 낙랑홀(樂浪忽)에 자리잡아 다스리게 하였다. 주인씨의 후손은 개마국(蓋馬國)에 봉하고, 여수기는 예(濊)의 임금이 되게 하였으며, 부소와 부우 및 작은 아들인 부여는 모두 나라의 서쪽 땅에 봉하니, 구려(句麗)31)와 진번(眞番) 및 부여(夫餘)32) 등의 여러 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그 후에 부루가 또 동쪽에서 온 세 사람을 각지에 봉했는데, 후세의 옥저(沃沮)와 졸본(卒本) 및 비류(沸流) 등의 명칭은 모두 이 봉함을 받은 나라의 이름에서 생겨났다. 단씨(檀氏)의 시대를 통하여 무릇 큰 나라는 아홉이요 작은 나라는 열둘로서, 나누어 천하의 모든 고을을 다스렸는데 지금은 상세하지 않다.
蚩尤氏旣受封於藍國, 乃紹先祖之志, 撫民安業, 講習戎事, 恒爲西南藩蔽. 且其民, 數遷(徒)[徙]海岱之地, 以致後世, 恒與漢土諸國, 互相角逐. 神誌氏受封於루진國, 地旣勁寒, 不宜五穀, 土廣人稀, 牧畜頗適, 乃使民帶弓佩劒, 幷事遊獵. 後世, 其民漸徙黑水之地, 遂以漁獵爲生, 艱險儉嗇, 추健勁悍. 雖强勇遠出於諸國, 漸至不習文事. 後世, 漢曰읍婁, 元魏曰勿吉, 隋.唐曰靺鞨, 稍與窮北蠻人相混, 漸失其俗, 頗有陵夷之歎. 近古, 金.女眞等, 皆其後身, 同族異稱也. 高矢氏就靑丘國, 觀山川, 相土地, 開田野, 興農桑. 風氣溫양, 五穀豊肥. 民皆, 衣輕(暖)[煖]而食肥양, 頗有冠帶衣履天下之槪, 文武亦得以幷興. 夫, 食足貨通然後, 國實民富而敎化成. 故《管子》曰: 「倉름實而知禮節, 衣食足而知榮辱.」 若使民, 終歲견견以絲粟爲慮, 則復奚暇言禮義哉! 雖然, 天覆地載, 區隅各殊, 於是氣有寒溫, 土有肥瘠, 其如天澤地利之不齊, 何是! 三家者之守國敎民之道, 所以各異, 而其果應亦自不同者也.
치우씨는 남국에 봉함을 받고서 선조의 뜻을 이어 백성들을 위무하고 생업을 편케하며 군사의 일을 배워서 익히니, 항상 서남방으로 울타리가 되었다. 또한 그 백성들을 수차례 해대(海岱)33)의 땅으로 옮겨가게 하니, 후세에 이르러 항시 한나라 땅의 뭇 나라들과 더불어 서로 각축하게 되었다.
신지씨는 속진국에 봉함을 받으니, 땅의 기후는 모질게 한랭하여 오곡에 마땅하지 않았으나 넓은 지역에 사람이 드물어 목축이 매우 적합하므로, 백성들로 하여금 활을 매고 검을 차고 유목과 수렵에 함께 종사하게 하였다. 후세에 그 백성들은 점차 흑수(黑水)의 땅으로 옮겨가 마침내 어로와 수렵으로 생업을 삼으며 고생하면서도 검약하니 건장하고도 억세어 졌다. 비록 용감하게 멀리 여러 나라로 나아갔으나 점차 글은 익히지 않게 되었는데, 후세에 한(漢)나라는 읍루(읍婁)34)라고 일컬었고, 원위(元魏)35) 때는 물길(勿吉)36)이라 하였으며, 수와 당나라는 말갈(靺鞨)이라 불렀으며, 점차 북쪽 끝의 야만인들과 서로 섞이더니 점차로 그 풍속을 잃어버리고 한탄스럽게도 자못 쇠미해져 갔다. 가까이는 금나라와 여진 등이 모두 그 후손으로 같은 족속을 달리 일컬은 것이다.
고시씨는 청구국으로 나아가 산천을 둘러보고 토지의 형세를 관찰하고 밭과 들녘을 개간하여 농업과 잠업을 일으켰다. 바람의 기운은 따뜻하고 부드러워 오곡은 풍성하게 살찌니 백성들은 모두 가볍고도 따뜻한 옷을 입고 기름지고 훌륭한 음식을 먹게 되었으며, 모자를 쓰고 띠를 두르며 옷을 갖춰 입고 신을 차려 신는 등 자못 천하의 풍채가 있었기에 문무(文武)가 아울러 일어나게 되었다. 무릇 음식이 풍족하고 물자의 유통이 원활한 연후에야 나라가 견실해지고 백성이 부귀해지며 교화가 이루어지게 된다. 그런 까닭에《관자(管子)》에서 이르기를 「곳간이 가득하고 서야 예절을 알 수 있으며, 입고 먹는 것이 풍족하고 서야 영광됨과 수치스러움을 알 수가 있다」고 하였다. 만약 백성으로 하여금 평생을 곁눈짓이나 하며 먹고 입는 것을 걱정하게 한다면 곧 누가 다시 한가롭게 예의며 의리를 말하려 들겠는가.
비록 다 같이 하늘을 이고 땅을 밟고 있으나 거처하는 구석은 각기 다르기에, 기후는 찬 곳과 따뜻한 곳이 있고 토양은 비옥한 곳과 척박한 곳이 있으니, 마치 하늘의 혜택과 땅의 이로움이 고르지 않은 것과 같으므로 이를 어찌하겠는가! 세 집안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가르치는 도리가 그러한 까닭으로 각기 다르기에 그 결과 또한 응당 같지 않은 것이다.
檀君旣封諸侯, 天下淸靜. 居十年, 有南夷之患, 卽甲比古次以南夷人也, 乃遣夫餘, 率兵定之. 後益遣夫蘇.夫虞, 築城於甲比古次, 以備南巡, 今江華.三郞城, 是也. 摩利山又有塹城壇, 此卽檀君設壇祭天之頭嶽也. 盖水行藉舟, 陸行藉車, 泥行乘취, 山行則국, 此乃上古交通之具. 而陸行不如水行之易, 是以, 上古建都, 必擇37)臨水之地. 凡人居之稱美者, 必曰阻山帶水, 或依山傍水.背山臨流者, 其所從來尙矣. 故檀君之世, 必使依山臨水而結居, 耕農漁獵, 隨便可行.《山海經》所謂: 「北海有國, 名曰朝鮮, 天毒育也其人, 水居외(受)[愛]也人」者, 非但, 其聲敎之澤, 洽被四린, 亦可窺見, 其結居之風矣. 夫檀君祭天, 非但頭嶽也. 北狩則祭太白, 南巡則祭頭嶽也. 而甲比古次傍在海濱, 通航容易, 則南巡之際, 必致祭於壇所也. 황, 其地孤絶靜謐, 山岳淨潔, 海天收霽, 則정深晶瑩之氣, 使人自感, 神明之陟降者耶. 余嘗(遊)[游]觀其地, 祭壇疊石, 爲之上圓下方, 而太多頹이, 仁祖十七年改築云. 噫! 平壤故城, (王)[壬]儉舊闕, 今不留敗石殘礎, 獨一壘天壇, 得保其形骸, 豈僻處海외, 人跡稀到故耶! 余實不勝, 追遠之悲矣.
단군이 제후들을 모두 봉하니 천하는 맑고도 고요하였다. 10년만에 남이(南夷)의 환난이 있었는데, 바로 갑비고차 남쪽의 이인(夷人)들이다. 이에 부여를 파견하여 병사를 인솔해 이를 진정시켰다. 후에 부소와 부우를 아울러 파견하여 갑비고차에 성을 쌓아 이로서 남쪽을 순행할 때를 대비하게 하니, 지금의 강화 삼랑성(三郞城)이 바로 그것이다. 마리산(摩利山)에는 또한 참성단(塹城壇)이 있는데, 이곳이 바로 단군이 제단을 설치하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두악(頭嶽)이다.38)
대저 물로 다닐 때는 배에 의지하고, 뭍으로 다닐 때는 수레에 의지하며, 진흙 위를 다닐 때는 썰매를 타고, 산으로 다닐 때는 징나막신을 신었으니, 이것이 바로 오랜 옛적 교통의 도구이다. 그러나 뭍으로 다니는 것이 물로 다니는 것 보다 쉽지 않았던 까닭에 옛날 도읍을 세울 때는 반드시 물에 잇대어 있는 땅을 택하였다. 무릇 사람이 거처하는 곳 가운데 좋은 곳이라 일컫는 곳은 반드시 '산을 막아서며 물을 두르고 있다'거나, '산에 의지하고 물을 곁에 두고 있다'거나, '산을 등지고 강을 끼고 있다'는 등으로 말하는 있는데, 그러한 장소는 예로부터 바라던 곳이었다. 때문에 단군의 시대에 반드시 산을 의지하고 물을 끼고 있는 곳에 집을 지어 거처하게 하여서 농사짓고 어로와 수렵을 함에 편히 행할 수 있게 하였다.《산해경(山海經)》39)에 이른바 「북해에 나라가 있는데 조선이라 이름한다. 하늘이 그 사람들을 길렀고(毒은 기른다는 것을 의미한다)40) 물가에 살면서 남을 아끼고 사랑(외는 사랑함을 의미한다)한다」41)고 한 것은, 비단 그 덕스러운 교화의 은택이 사방에 흡족히 두루 미친 것 뿐만이 아니라 집을 지어 거처하는 기풍 또한 엿볼 수 있게 한다.
단군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은 단지 두악(頭嶽)에서 만이 아니었다. 북으로 사냥을 나가면 곧 태백에서 제사를 지내고, 남으로 순행할 때는 곧 두악에서 제사를 지냈다. 갑비고차는 바닷가에 있어서 배를 통하기에 용이하므로 남쪽을 순행할 때는 반드시 들러 제단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항차 그 땅은 홀로 떨어져 있으면서 고요하고 평온하며 산악은 정결하고 바다와 하늘은 가든히 개어 있으니, 곧 안존하고 깊으며 밝게 빛나는 기운이 사람으로 하여금 신명이 오르내리는 것을 스스로 느끼게 해준다. 내가 그 땅을 유람하며 살펴보니 제단은 돌을 포개어 위는 둥글고 아래로는 네모지게 하였는데, 아주 많이 무너져 있던 것을 인조(仁祖) 17년에 다시 고쳐서 쌓았다고 한다. 오호라! 평양의 옛 읍성과 임금성의 옛 궁궐은 이제 부서진 초석의 조각하나 남아 있지 않은데, 유독 한 채의 천단(天壇)만이 그 모습의 골격을 보존하고 있으니, 이는 편벽된 바다의 후미진 곳이기에 사람의 자취가 드물게 닿은 까닭이 어찌 아니겠는가. 나는 실로 옛일을 그리워하는 슬픔을 이기지 못하겠구나!
御國三十餘年, 正値洪水, 浩波溜天, 懷襄遼滿之(時)[野], 浿水漲溢平壤沈潛. 乃遣四子, 遍相土地之宜, 占居阿斯達下唐莊之野, 今文化.九月山下, 有莊莊坪, 卽其地也. 余嘗觀其地, 方數百里無大河, 而水勢東走, 原土高燥, 可避西來之水矣. 乃結廬阿斯達下, 使夫婁, 盡濟平壤之民, 復治平水土屢年(以)[而]後功完, 唐莊之民, 亦已安土而樂居矣. 今俗士或云: 「檀君遭洪水, 使彭吳治山川, 奠民居…」云云, 而《漢書·食貨志》明書: 「武帝卽位數年, 彭吳穿濊(백)[貊].朝鮮」等句, 則是乃, 東西有兩個彭吳, 相前後而同掌朝鮮水土之役也, 史上豈有, 如此奇巧事耶. 盖, 夫婁[與]弗虞同音, 且漢音.虞.吳相(同)[通], 而彭.弗兩字之初聲, 皆與夫音相近, 則後人忘夫婁字而只記其音, 又訛而只記彭吳也. 今, 人家有夫婁壇地者, 籬落淨潔處, 築土爲壇, 土器盛禾穀, 置於壇上, 編(緝)[葺]藁艸掩之, 每十月, 必薦之以新穀, 或稱業主嘉利, 卽報賽夫婁氏治水奠居之義, 賴爲鎭護之神[也].
나라를 다스린지 30여 년만에 홍수를 만났는데, 어마어마한 파도는 하늘까지 치솟아 요만(遼滿)의 들녘을 품으며 올라서니 패수의 물은 불어 넘치고 평양은 물에 잠겨 버렸다. 이에 네 아들을 보내 마땅한 땅을 두루 살피게 하고는 아사달(阿斯達) 아래 당장(唐莊)의 들녘을 차지하여 거처케 하였는데, 지금의 문화(文化) 구월산(九月山) 아래 장장평(莊莊坪)이 있으니 바로 그 땅이다. 내가 그 땅을 살펴보니, 사방 수백리에 큰 물줄기가 없고 물의 형세는 동쪽으로 내달으며 넓은 들녘의 땅은 높고도 건조하여 서쪽에서 오는 물을 피할 수가 있을 것 같았다. 이에 아사달 아래에 띠풀집을 짓고 부루로 하여금 평양의 백성들을 모두 구제하게 하고, 다시 물과 흙을 다스리기를 몇 년 한 후에 그 일을 온전하게 하니, 당장(唐莊)의 백성 또한 그 땅에서 편안하게 기거하며 즐겁게 생활하게 되었다.
지금의 세속 선비들이 혹 이르기를 「단군이 홍수를 만나자 팽오(彭吳)로 하여금 산천을 다스려 백성들의 거처를 정하게 하고……」라고 하는데,《한서·식화지》에 「무제가 즉위한지 몇 년만에 팽오가 예맥 및 조선과의 길을 터놓았다」는 등의 문구가 분명히 적혀 있으니, 이는 곧 동쪽과 서쪽에 두 명의 팽오가 연이어 앞뒤로 있으면서 조선의 물과 흙을 관장하는 일을 맡았다는 것인데, 역사에 어찌 이와 같이 기이하고 공교로운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이는 아마도 '부루(夫婁)'와 '불우(弗虞)'는 음이 같고, 또한 한나라 소리로 '우(憂)'와 '오(吳)'는 서로 통하며 '팽(彭)'과 '불(弗)' 두 글자의 초성이 모두 '부(夫)'의 음과 서로 가까우므로, 훗날의 사람들이 '부루(夫婁)'라는 글자는 잊어버리고 단지 그 소리만을 기록하면서, 또한 잘못 전하여져 단지 '팽오(彭吳)'라고 만 기록하게 된 것이다.
지금 사람들의 집에는 '부루단지(夫婁壇地)'라는 것이 있는데, 울타리를 친 깨끗한 곳에 흙을 쌓아 제단을 만들고 토기에 곡식을 담아 제단 위에 놓아 볏짚으로 지붕을 이어 그것을 덮어두고 매 10월마다 반드시 새로운 곡식을 올리는 것으로서 혹은 '업주가리(業主嘉利)'라고 이름하기도 하는데, 곧 부루씨가 물을 다스리고 거처를 정하여 준 것에 보답하여 제사를 지내는 의미이니, 이로 말미암아 어려움을 누르고 백성을 보호하는 신이 된 것이다.
夫婁旣平水土仍舊而奠民居, 萬民咸懷其德. 及至粗定宅宇而, 濕汚之氣蒸成려疫, 罹病死者甚多, 夫虞幷醫藥而治之. 又値猛獸毒충乘間滋殖, 殆將橫行民間, 夫蘇乃演高矢舊法, 以乾艾爲料, 金石相擊, 因此廣造火種, 燻燒山澤, 於是獸충遠遁而其害漸除. 今人, 多携取火之物, 有金.石.艾三種, 必冠之以夫蘇之名, 如夫蘇鐵.夫蘇石.夫蘇羽者, 皆原於夫蘇氏之完其功也. 夫婁, 又使民帶劒戟而行, 及至關嶺협액, 必積石爲堆, 行逢猛獸則用以爲備, 後世所謂石子軍者, (爲)[謂]東國用武之一目, 而實原於此也. 今遺俗尙存而, 野수村氓, 以此謂石城隍, 頗懷畏敬之意. 何後俗之陵夷, 如此其甚耶!
부루가 물과 흙을 예전과 같이 모두 바르게 하고 백성들을 그 땅에 편안하게 살게 하니 만백성은 모두가 그 덕을 가슴에 품게 되었다. 대충이나마 집들을 정하고 보니 축축하고 더러운 기운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병에 걸려 죽는 자가 많아서 부우가 의술과 약으로 이를 치료하였다. 또한 맹수와 독충이 그 틈을 타고 무수히 번식하여 머지않아 민간에 거리낌없이 돌아다닐 것 같기에, 부소가 이에 고시씨의 옛법을 헤아려 마른 쑥을 재료로 하고 쇠와 돌을 맞부딧쳐 이로서 불씨를 만들어 산과 못 등을 태우니, 그제야 맹수와 독충이 멀리 숨어 버리고 그 해악이 점차 제거되었다. 불을 일으키는 물건으로 지금의 사람들이 많이 지니고 있는 것에는 쇠와 돌과 쑥의 세 가지가 있는데, 반드시 '부소(夫蘇)'라는 이름을 머리에 붙여 '부싯쇠(夫蘇鐵)'·'부싯돌(夫蘇石)'·'부싯깃(夫蘇羽)'이라 하니, 모두 부소씨가 그 공덕을 온전히 하였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부루는 또 백성들로 하여금 검과 창을 지니고 다니게 하였으며, 관문과 산꼭대기의 고갯길 등 좁고 험한 길에는 반드시 돌을 쌓아 돌무더기를 만들어 놓고 지나다니다가 맹수를 만나면 곧 그것을 사용하여 위험에 대비케 하였다. 후세에 이른바 '석자군(石子軍)'이라 하는 것이 우리나라 무예의 한 종목이라 일컬어지게 된 것은 실로 여기에 그 기원을 둔다. 지금도 그 풍속이 남아 있어 시골의 늙은이와 들녘의 백성들이 이를 일컬어 '석성황(石城隍)'이라 하며 자못 두려워하고 공경하는 뜻을 품고 있으니, 뒷날에 와서 풍속의 쇠퇴함이 어찌 이다지도 심하단 말인가.42)
初, 神市之末, 蚩尤氏兄弟, 雖自탁鹿退歸, 而東人之占居淮岱者甚多, 與漢土之人雜處, 農천織牧, 資以爲業. 且, 南鄙海島之民, 皆以빈珠魚貝, 相交易於漢土, 稍稍住息於濱海之地. 至是海岱.江淮之地, 遂爲其州里, 與漢土之民, 交(遊)[游]而錯居.《尙書》所稱, 우夷.萊夷.淮夷.島夷者, 皆是也.
처음 신시씨의 말기에 치우씨의 형제가 비록 탁록으로부터 물러나서 돌아왔으나 동방의 사람으로 회대(淮岱) 지역을 차지하고 생활한 자가 매우 많았으니, 한나라 땅의 사람들과 섞여 거처하면서 농사짓고 누에치며 길삼하고 가축을 기르는 것을 밑천으로 하여 생업을 삼았다. 또한 남쪽 지방의 바다섬 백성들은 모두 진주와 물고기 및 조개 등으로 한나라 땅에서 서로 교역하더니, 차차 해변의 땅에 머물러 살게 되었다. 이에 이르러 해대(海岱)와 강회(江淮)의 땅에는 마침내 마을을 이루어 한나라 땅의 백성들과 교류하며 섞여 살게 되니,《상서(尙書)》에 이른바 우이(우夷)와 래이(萊夷) 및 회이(淮夷)와 도이(島夷)43) 등이 모두 그들이다.
夫餘之平南夷也, 洌水以南, 完服王化, 以故靑丘之民, 得漸遷居, 及洪水旣平, 南渡者益多. 於是南夷之人, 幷沾於神化, 遂變其俗, 後之辰.弁諸族, 皆是也.
부여가 남쪽의 이인(夷人)들을 평정하니 열수(洌水)의 남쪽은 완전히 왕의 교화에 복종하게 되었으며, 그 까닭에 청구의 백성들이 점차 옮겨가서 살게 되었고, 홍수가 완전히 다스려진 뒤로는 남쪽으로 넘어가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이로서 남쪽의 이인들도 함께 신인의 교화에 물들어 마침내 그 풍속이 변화하였으니, 후의 진(辰)·변(弁)의 뭇 부족들이 모두 그들이다.
御國四十餘載, 而有알견兪之亂. 알견兪者, 험윤之屬也, 洪水之際, 僥倖得免, 及看水土재定而州里蕭然, 乃乘흔東侵, 其勢頗猛, 卽使夫餘會集中外之兵, 討平之. 乃益封夫餘, 北方之地, 使宅牛首忽卽先平壤, 使夫婁居(王)[壬]儉城, 令夫蘇修樂浪忽, 夫虞監唐莊京, 更封高矢氏於南方之地.
나라를 다스린지 40여 년만에 설유의 난이 있었다. 설유는 험윤의 족속으로 홍수를 만났을 때는 요행히 그 해를 면하더니, 물과 흙이 겨우 안정을 되찾은 뒤 마을과 고을이 쓸쓸해진 것을 보고는 이내 그 틈을 타고 동쪽으로 침략해 오니 그 기세가 자못 맹렬하였는데, 곧 부여로 하여금 안팎의 모든 병사를 모아 그를 토벌하여 평정케 하였다.44) 이에 부여에게 북방의 땅을 더하여 봉하고 우수홀(牛首忽)(즉 먼저 번의 평양이다)에 자리잡게 하였으며, 부루로 하여금 임금성에 거처하게 하고, 부소에게는 낙랑홀을 다스리게 하고, 부우는 당장경을 살펴보게 하였으며, 고시씨는 그 봉토를 고쳐 남쪽의 땅에 봉하였다.
於是檀君西至(王)[壬]儉城, 按撫庶民, 大會諸侯, 令復申天下[農桑之政. 乃北巡而祭天于太白之麓, 封天下]45)山嶽河川之神, 凡三千餘. 歷牛首忽, 而至肅愼忽, 會北東諸侯, 令祭神誌氏之靈, 遂立廟于夙沙達. 西轉而至奄慮忽, 會南西諸侯, 令祭蚩尤氏之靈, 遂立廟于奄慮達. 復南巡而至甲比古次, 祭天于頭嶽之顚. 遂至樂浪忽, 會南東諸侯, 令祭高矢氏之靈, 遂立廟于蘇婁達. 乃還至平壤, 八加及衆諸侯畢集.
그리하여 단군은 서쪽으로 임금성에 이르러 모든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제후들을 크게 모아 명하기를, 다시 농사짓고 누에치는 일을 천하에 널리 펴게 하였다. 이에 북쪽으로 순행하여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천하의 산악과 하천의 신을 봉하니46) 무릇 3천 곳 남짓 되었다. 우수홀을 지나 숙신홀에 이르러 북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신지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숙사달(夙沙達)에 사당을 세웠다. 서쪽으로 돌아 엄려홀에 이르러 남서의 제후들을 모아 명령하기를, 치우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엄려홀에 사당을 세웠다. 다시 남쪽으로 순행하여 갑비고차에 이르러 두악의 꼭대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마침내 낙랑홀에 이르러 남동의 제후들을 모아 명하여 고시씨의 영령에 제사를 지내게 하고, 소루달(蘇婁達)에 그 사당을 세우고는 평양으로 돌아오니 팔가(八加)와 뭇 제후들이 모두 모였다.
檀君乃使諸加及國內人民, 各獻祭于日月.陰陽.四時之神, 及山岳.河川.里社之主. 祭畢, 大誥于有衆, 若曰: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創天地, 主全世界, 造無量物, 蕩蕩洋洋, 無物(不)[弗]包, 昭昭靈靈, 纖塵弗漏.
惟皇, 一神在最上一位. 用御天宮, 啓萬善, 原萬德, 群靈護侍, 大吉祥, 大光明, 處曰神鄕.
惟皇, 天帝降自天宮, 率三千團部, 爲我皇祖, 乃至功完而朝天, 歸神鄕.
咨爾有衆, 惟則天範, 扶萬善, 滅萬惡, 性通功完, 乃朝天.
天範惟一, 弗貳厥門, 爾惟純誠一爾心, 乃朝天.
天範惟一, 人心惟同, 惟秉己心, 以及于人心, 人心惟化, 亦合天範, 乃用御于萬邦.
曰: 爾生由親, 親降自天, 惟敬爾親, 乃克敬天; 以及于邦國, 是乃忠孝, 爾克體, 是道. 天有崩, 必克脫免.
飛禽有雙, 弊履有對; 爾男[女], 以和, 毋怨.毋妬.毋淫.
爾嚼十指, 痛無大小; 爾相愛毋胥, 讒互佑毋相殘, 家國以興.
爾觀于牛馬, 猶分厥추; 爾互讓毋胥奪, 共作毋相盜, 家國以殷.
爾觀于虎, 强暴不靈, 乃作얼; 爾毋桀오以장物, 毋傷人, 恒(導)[遵]爾天範, 克愛物. 爾如有越厥, 則永不得神佑, 身家以殞.
爾如衝火于(花)[華]田, (花)[華]將殄滅, 神人以怒; 爾扶傾, 毋凌弱, 濟恤, 毋侮卑.
爾雖, 厚包厥(杳)[香], 必漏; 爾敬持彛性, 毋懷慝, 毋隱惡, 毋藏禍. 心克, 敬于天, 親于民, 爾乃福祿無窮. 咨爾有衆, 其欽哉!
단군은 이에 뭇 가(加)와 나라안의 인민들로 하여금 각기 일월과 음양 및 사시(四時)의 신과 산악과 하천 및 마을의 주인에게 제사를 올리게 하였다. 제사를 마친 다음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하니 다음과 같았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하늘과 땅을 시작하게 하고 모든 세계를 주재하며 한없는 사물을 만드시니, 가없이 넓고도 넓음에 감싸지 아니한 사물이 없으며, 신령스럽게 밝고도 밝음에 가녀린 티끌마저도 새지 아니한다.
하느님은 오직 하나 되는 신으로서 가장 높은 곳의 하나 되는 자리에 있도다. 부리고 거느리는 하늘 궁전은 모든 선함이 열리고 모든 덕화가 근원하는 곳이며, 뭇 영령들이 보호하고 모시는 크게 길하고도 크게 밝은 곳이니, 이름하여 신향(神鄕)이라 한다.
하늘의 천제(天帝)께서는 하늘 궁전으로부터 3천의 동아리를 거느리고 내려와 우리들 임금의 조상이 되더니, 공덕을 온전히 함에 이르러 하늘로 향하여 신향으로 돌아갔다.
너희 무리들아!
오직 하늘 본보기를 본받아 모든 선함을 돕고 모든 악함을 소멸시키며, 본바탕이 통하여 맡을 일을 온전케하면 이에 하늘로 향하느니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그 문은 둘이 아니니, 너는 오로지 정성을 순수하게 하고 너의 마음을 하나 되게 한다면 이에 하늘로 향하리라.
하늘 본보기는 오직 하나요 사람의 마음도 오직 같으니, 오로지 자기의 마음을 잡아 이로써 다른 사람의 마음에 미치게 한다면, 그 사람의 마음이 교화되고 또한 하늘 본보기에 부합하게 되므로 이에 만방에 이르러 부리고 거느리리라.
말하노니, 네가 생겨난 것은 어버이로 말미암은 것이요 어버이는 하늘에서부터 내려온 것이므로, 오로지 너의 어버이를 공경하면 이는 능히 하늘을 공경하는 것이다. 이로서 나라에 미치게 하면 그것이 곧 충효이며, 네가 극복하여 체득하게 된다면 이가 곧 도(道)이니, 하늘이 무너짐이 있더라도 능히 피하여 면할 수 있을 것이다.
날아다니는 짐승도 쌍이 있고 헤어진 신발도 짝이 있으니, 너희 남녀들은 화합할 뿐 미워하지 말고, 투기하지 말며, 음탕하지 말지어다.
네가 열 손가락을 깨물어 보아라, 아픔에는 크고 작음이 없으니, 너희는 서로 사랑할 뿐 너희끼리 헐뜯지 말 것이며, 서로 도울 뿐 너희끼리 죽이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일어나리라.
너희는 보아라, 소나 말도 가히 그 먹이를 나눠 먹으니, 너희는 서로 양보할 뿐 너희끼리 서로 빼앗지 말 것이며, 서로 같이 경작할 뿐 너희끼리 훔치지 말지어다. 집안과 국가가 이로서 은성하리라.
너희는 보아라, 범은 강하고도 사나우나 신령스럽지 않기에 재앙을 일으키는 법이다. 너희는 사납고 교만해져 사물을 상하게 하지 말며 다른 사람을 다치게 하지 말며, 항상 하늘 본보기를 존중하여 사물을 사랑하라. 너희가 만약에 그것에 지나침이 있다면 곧 영원히 신인의 도움을 얻지 못할 것이며, 몸과 집안은 이로서 망하리라.
너희가 만약 꽃밭에 불을 질러 꽃이 장차 모조리 없어지게 되면 신인이 이로서 노여워할 것이다. 너희는 위태로움을 도울 뿐 약함을 업신여기지 말며, 어려움을 구제할 뿐 천하다고 업신여기지 말라.
너희가 비록 두텁게 감싼다 하더라도 그 향기는 반드시 새어나오는 것이니, 너희는 타고난 떳떳한 성품을 삼가 지닐 뿐 간사함을 품지 말고, 악함을 숨기지 말고, 재앙을 감추지 말라. 마음으로 능히 하늘을 공경하고 백성을 가까이하면 너희는 이에 복록이 한없을 것이다.
이로서 너희 무리들은 삼갈지어다.
檀儉旣大誥于有衆, 於是神德大彰, 如此數十年, 天下復熙熙焉, 忘其災矣. 或曰, 此卽檀君八條之敎令, 可以此分八目, 或說是也. 後世, 駕洛國.房登王時, 有암始仙人者, 自七點山而來, 見王於招賢臺曰: 「君以自然爲治, 則民[自以](以自)然成俗. 爲治之道, 古有其法, 君何不體之.」 饋以大牢, 辭不受而去. 此道, 破先聖之訣也. 又崔孤雲.鸞郞碑序曰: 「國有玄妙之道, 實乃包含三敎, 接化군生. 且如入則孝於親, 出則忠於君, 魯.司寇之旨也; 處無爲之事, 行不言之敎, 周.柱史之宗也; 諸惡莫作, 諸善奉行, 竺乾太子之化也.」 孤雲, 精敏文學, 卓越諸人, 博通古今, 文名飄動, 其言可謂善採先聖垂訓之精華矣. 此外, 散見於載籍者, 及道家文集, 如《四聞錄》.《三韓拾遺記》等諸書者, 不可탄記矣.
단검이 무리들에게 크게 유시를 내리니 이에 신인의 덕화가 크게 빛나기를 수십년, 천하는 다시 화락하여 그 재앙을 잊게 되었다. 혹은 말하기를 이것이 바로 '단군팔조(檀君八條)의 교령(敎令)'이라 하는데, 이것을 여덟 조목으로 나눌 수 있으니 혹은 그 예기가 맞을 것이다.
후세에 가락국 방등왕(房登王) 때 암시선인(암始仙人)이 있어, 칠점산(七點山)으로부터 내려와 초현대(招賢臺)에서 왕을 뵙고 이르기를 「임금께서 자연의 도리로서 다스림의 기본을 삼으면 곧 백성들도 자연의 도리로서 풍속을 이루어 갈 것입니다. 다스림의 기본이 되는 도(道)는 예로부터 그 법도가 있는데 임금께서는 어찌하여 이를 체득하지 않습니까」라고 하기에, 왕이 크게 희생(犧牲)을 잡아 보내 주었으나 사양하며 받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그가 말하는 도가 바로 앞선 성인의 도를 공구(窮究)할 수 있는 비결이다.
또 최고운(崔孤雲)의 난랑비(鸞郞碑) 서문에 이르기를 「나라에는 심오한 이치를 지닌 도가 있으니, 실로 삼교(三敎)를 모두 포함하고 있으며 뭇 삶의 무리들을 가까이에서 교화한다. 또한 들어오면 어버이에게 효도하고 나서면 임금에게 충성함과 같은 것은 노나라 공자의 요지이고, 행함이 없는 듯이 일을 다스리고 말함이 없는 듯이 가르침을 펴는 것은 주나라 노자의 근본 되는 생각이며, 모든 악함을 짓지 말고 모든 선함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천축국 태자의 교화이다」라 하였다.47) 최고운은 문학에 정통하고 재주가 뭇 사람들 보다 뛰어나며 고금의 일에 대해 두루 통하고 글의 명성이 자자한데, 그의 말은 앞선 성인들이 후세에 전하는 교훈의 진국을 잘 가려 뽑았다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 여러 서적에 흩어져 보이는 것과《사성록(四聞錄)》및《삼한습기(三韓拾記)》같은 도가(道家) 문집에 있는 것들은 빠짐없이 적지 못하였다.
從此時, 常出巡, 以孟冬月祭天, 遂爲萬世之遺俗, 此乃東方特有之盛典, 而非外邦之可比也. 太白一山, 足壓崑崙之名而有餘矣. 古之三神山者, 卽太白山也. 三神, 又云三聖, 今文化.九月山有三聖祠, 卽敬祀桓因.桓雄.桓儉者也. 今檀君之敎, 雖不得健行, 而神化靈訓猶傳於後世. 擧國男女, 猶崇信於潛默之中, 卽人生生死, 必曰三神所主, (兒小)[小兒]十歲以內, 身命安危及智愚庸俊, 多托於三神帝釋. 三神者, 卽創天地.造治民物之三神也. 帝釋等語, 雖出於佛家之《法華經》, 亦天帝之意. 此則, 只因古史譯出於緇流之手也, 不可妄以爲非. 昔司馬相如謂漢.武帝曰: 「陛下謙讓而弗發, 契絶也三神之歡.」 註云: 「三神, 上帝.」 三神之說, 當時亦通于漢土矣.
이때부터 항상 순행을 나가면 10월에 하늘에 제사를 지내니, 마침내 만세에 길이 전하는 풍습이 되었다. 이는 동방 특유의 성대한 제전으로 외국과는 가히 비할 바가 아니다. '태백'이라는 하나의 산은 족히 곤륜(崑崙)의 이름을 누르고도 남음이 있으니, 예전의 삼신산이 곧 태백산이다. '삼신(三神)'을 또는 '삼성(三聖)'이라 하는데, 지금의 문화 구월산에 삼성사(三聖祠)가 있어서 환인과 환웅 및 환검을 공경하여 제사를 지낸다. 지금에 와서 단군의 가르침이 비록 꾸준히 행해지지는 않지만 신령스러운 교화의 가르침은 여전히 후세에 전해지고 있다. 온 나라의 남녀가 여전히 은연중에 받들어 믿고 있는 것으로서, 곧 사람의 삶에서 나고 죽고 하는 것은 반드시 삼신이 주관한다고 말하며, 10살 이전 어린아이의 신변과 목숨의 안위 및 슬기롭고 어리석음과 못나고 뛰어남 등을 모두 삼신제석(三神帝釋)에게 의탁한다.
'삼신'은 곧 하늘과 땅을 열고 백성과 사물을 만들어 다스린 삼신을 말하는 것이다. '제석' 등의 말은 비록 불가의《법화경》에서 나왔지만 역시 하늘 임금의 뜻이다. 이것은 단지 옛 역사가 승려의 손으로 옮겨진 까닭일 뿐이니, 망령되게 잘못되었다고만 할 수는 없다. 옛날 사마상여(司馬相如)가 한나라 무제에게 아뢰어 「폐하께서 겸손하게 사양만 하시고 내어 비치지 않으신다면 이는 삼신(三神)의 기쁨을 끊는 것입니다」 하였는데, 그 주석에 삼신은 상제를 말한다 하였으니, 삼신이란 말은 당시 한나라에도 통용되었던 것이다.48)
盖, 東方諸山, 以太白名者, 頗多. 俗士, 卒以寧邊.妙香山當之, 實由於一然《三國遺事》之說, 而彼等眼孔如豆, 安足以與論哉! 今白頭山上, 有大池, 周八十里, 鴨(록)[綠]49).混同諸[江]發源於此, 曰天池, 卽上述神市氏乘雲朝[天]處也. 妙香, 曾無一小만, 其不爲桓雄肇降之太白, 不足辨也. 盖, 白頭巨岳, 盤據大荒之南, 橫..千里, 高出二百里, 雄偉山層릉완연磅박, 爲東方諸國之鎭山. 神人陟降, 實始於此, 豈區區妙香一山, 只係狼林西走之一맥, 而得참如許聖事耶! 世俗, 旣以妙香爲太白, 則其見, 只局於鴨水以南一隅之地, 便唱, 山之祖宗崑崙, 欣欣然以小中華自甘宜; 其貢使北行屢百年而不爲之恨, 僅以南漢下城之羞, 효(효)然, 自歎者也.
무릇 동방의 모든 산 중에 '태백(太白)'이라 이름하는 것이 자못 많은데, 세속의 선비들이 졸지에 영변의 묘향산을 그것으로 여기고 있으나 이는 그저 일연의《삼국유사》의 이야기에서 연유한 것일 뿐이니, 저들의 눈구멍이 마치 콩알 같음에 어찌 족히 더불어 논박할 수 있겠는가. 지금의 백두산 위에는 큰 못이 있어 주위가 80여 리며, 압록(鴨綠)과 혼동(混同) 등의 여러 강이 여기에서 발원하기에 '천지(天池)'라 일컫는데, 곧 위에서 서술하였듯이 신시씨가 구름을 타고 하늘로 올라간 곳이다. 묘향산에는 일찍이 작은 물줄기 하나 없었으니, 그 곳이 환웅이 처음으로 내려온 '태백'이 될 수 없음은 밝힐 필요도 없다.
무릇 백두의 웅대한 산악은 대황(大荒)의 남쪽에 굳게 자리하여 좌우로 1천리에 뻗치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웅장하면서도 층을 지은 험한 능선이 길게 이어지면서 아울러 하나가 되어 있으니, 동방의 모든 나라를 위엄으로 진압하는 명산이다. 신인의 오르내림이 실로 여기에서 처음 하였거늘, 구구하게 단지 서쪽으로 내달은 낭림의 한 줄기에 매어 달린 묘향의 산 하나가 어찌 그와 같은 많은 신성한 일들에 참여할 수 있었겠는가! 세속에선 이미 묘향을 태백으로 여기지만, 이는 곧 그 견해가 단지 압록강 이남의 한 모퉁이에만 국한된 것일 뿐이다. 곧잘 산의 으뜸이 되는 우두머리는 곤륜이라 노래 부르고 기꺼이 스스로를 '소중화(小中華)'로 마땅한 듯 달갑게 여기며, 그 조공의 사절이 북으로 다닌지가 수백년이 되었으나 이는 한스러워 하지 않다가 겨우 남한산성 아래의 수치만을 떠들썩해 하니, 스스로 한탄스러울 뿐이다.
余嘗歷觀載籍, 白頭山之異名, 頗多.《山海經》曰: 「大荒之中, 有山, 名不咸, 有肅愼氏之國」.《後漢書》曰: 「東沃沮, 在高句麗.蓋馬太山50)之東, 東濱大海, 北與읍婁接.」 註云: 「在平壤城西.」 此, 漢士眩學之(忘)[妄]語也. 읍婁, 乃肅愼後身, 東沃沮, 又在今咸鏡之地, 則蓋馬之(謂)[爲]太白, 可知. 且《麗史·列傳》曰: 「女眞, 本高句麗之部落, 聚居于蓋馬山東」云, 當時女眞, 明在白頭山之東北, 蓋馬之爲白頭, 明矣.《魏書·勿吉傳》曰: 「國有徒太山, 魏言太白, 有虎豹熊狼不害人, 人不得上山수溺…」云云.《北史·勿吉傳》[曰亦](亦曰): 「國有徒太山, 華言.太白, 俗甚畏敬之.」《唐書》曰: 「粟末部居最南, 抵太白山, 亦曰徒太山, 與高麗接.」《括地志》曰: 「靺鞨, (古)[故]肅愼也, 其南有白山, 鳥獸艸木皆白.」《金史·高麗傳》述高句麗以來靺鞨之事曰: 「黑水末曷, 居故肅愼地, 有山曰白山, 蓋長白山, 金國之所起焉.」 葉隆禮《遼志》曰: 「長白山在冷山東南千餘里, 盖白衣觀音所居, 其山內禽獸皆白, 人不敢入, 恐穢其間…」云云, 又曰: 「黑水發源于此.」《明一統志》曰: 「長白山在三萬衛東北千餘里, 故會寧府南六十里, 橫선千里, 高二百里, 其전有潭, 周八十里, 淵深莫測, 南流爲鴨綠江, 北流爲混同江, 東流爲阿也苦河」云. 然則, 不咸.蓋馬.太白.徒太(白)[白].長白等名, 皆爲同山異名, 而歷代方言之異也. 又《高麗史》光宗十年: 「逐鴨綠江外女眞, 於白頭山外居之」云, 則白頭之名, 始見於此. 而蓋字之音, 近[白於](於白)字之意; 東語, 「馬」.「頭」亦同訓, 蓋馬, 白頭之異字同意亦可明辨, 而白頭之名, 其來亦尙矣.
내가 일찍이 여러 서적들을 두루 살펴 보건대 백두산의 다른 이름이 자못 많았다.《산해경》에 이르기를 「대황의 가운데 산이 있으니, 이름하여 불함(不咸)이라 하며 숙신씨의 나라가 있다」51) 하였으며,《후한서》에 이르기를 「동옥저는 고구려의 개마태산(蓋馬太山)의 동쪽에 있다. 동으로 큰 바다를 접해 있고 북으로 읍루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고는 그 주석에 「평양성의 서쪽에 있다」 하였는데, 이것은 한나라 선비가 잘 알지 못하고 배웠기에 생긴 망령된 말이다.
읍루는 곧 숙신의 후신이며 동옥저 또한 지금의 함경의 땅에 있었으니, '개마'가 '태백'이 됨을 알 수 있다.52) 또한《고려사·열전》에 이르기를 「여진은 본래 고구려의 한 부락이었는데 개마산의 동쪽에 모여 살았다」라 하였으니, 당시의 여진이 분명히 백두산의 동북에 있었으므로 '개마'가 '백두'가 되는 것은 분명하다.《위서·물길전》에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위(魏)나라 말로는 '태백'이라고 한다. 범과 표범·곰·승냥이 등이 있으나 사람을 해치지 않으며, 사람들은 산위에 올라가서는 방뇨를 하지 않았다」53) 하였고,《북사·물길전》에도 역시 「나라에 도태산(徒太山)이 있는데 중원의 말로 '태백'이라 하며, 풍속에 그것을 매우 삼가며 공경한다」54)고 하였다.《당서》에는 「속말부가 가장 남쪽에 살고 있는데, 도태산(徒太山)이라고도 일컬어지는 태백산과 맞닥뜨린 곳에서 고려와 더불어 접해 있다」 하였다.《괄지지》에는 「말갈은 옛 숙신이다. 그 남쪽에 백산(白山)이 있는데 새와 짐승이며 풀과 나무가 모두 희다」라 하였고,《금사·고려전》에는 고구려 이래 말갈의 일을 기술하며 「흑수말갈이 옛 숙신의 땅에 거주하였는데, '백산(白山)'이라 불리는 산이 있었으니 곧 '장백산'으로서 금나라가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섭융례(葉隆禮)의《요지》에는 「장백산은 냉산(冷山)의 동쪽 1천여 리에 있으며, 대저 백의관음이 기거하는 곳이다. 그 산 안의 짐승은 모두 희다. 사람들은 그 곳을 더럽힐까 염려하여 감히 들어가지 않는다」라 하였고, 또 「흑수(黑水)가 그 곳에서 발원하였다」라 하였다.《명일통지(明一統志)》에는 「장백산은 삼만위(三萬衛) 동북쪽의 1천여 리에 있으니 옛 회녕부(會寧府)의 남쪽 60리에 있다. 좌우로 1천리에 뻗어 있고 위로 2백리를 솟아 있으며, 그 곳의 정상에 못이 있는데 주위는 80리이며 못은 깊어서 측량할 수 없다. 남쪽으로 흘러 압록강이 되고, 북쪽으로 흘러서 혼동강이 되며, 동쪽으로 흘러서 아야고하(阿也苦河)가 된다」 하였으니, 불함·개마·태백·도태·장백 등의 이름은 모두 같은 산의 다른 이름으로 역대 방언의 차이점일 뿐이다. 또《고려사》의 광종(光宗) 10년조에 「압록강 밖의 여진을 백두산 밖으로 몰아내어 살게 하였다」 하였으니,55) 곧 '백두'의 이름이 처음으로 여기에서 보인다. '개(蓋)'의 음은 '백(白)' 자의 뜻과 가까우며, 동방의 말에 '말(馬)'과 '두(頭)'는 같은 새김이기에 글자의 뜻으로 새기면 '개마(蓋馬)'와 '백두(白頭)'가 글자는 다르지만 뜻은 같은 것이 분명하므로 '백두'라는 이름의 유래 또한 오래된 것이라 할 것이다.
東方諸山, 有馬耳.摩尼等山, 俗人幷以「摩利」呼之, 曾不相別. 盖馬耳.摩尼, 幷出於頭字之意也. 今廣州有修理山, 此必「鷲山」之意也; 積城有紺岳山, 則乃「玄山」之意也; 忠州有達川, 則是「月川」之意也; 而馬耳.摩利之爲頭嶽或頭山之訛, 尤可辨矣. 太白之一名曰白頭, 甲比古次之祭天處曰頭岳, 此非檀君祭天, 必隨「頭」名之山也, 乃檀君祭天處, 必成「頭」名之山也. 盖, 「頭」者, 最上或元首之稱也. 白頭爲東方諸山之宗, 而又是東人始降之地, 兼復, 元首檀君, 恒行祭天禮于其山, 當時之人, 名之曰頭山也, 必矣. 而甲比古次之頭嶽, 亦不出於此外也. 獨不知, 牛首河之名, 亦只出於沈牛首之俗耶. 此不可斷矣. 然則, 神市氏(之)降, 旣在[白頭於山](於白頭山), 乃漸(徒)[徙]西南, 復沿浿水而南來, 三氏之族, 又各四遷也. (耳)[且]太白旣爲東方靈地, 祭天大儀必始於其山, 則自古, 東民之崇敬是山也, 不尋常. (耳)[且]古(者)昔, 禽獸悉沾神化, 安捿於其山而未曾傷人, 人亦不敢上山수溺而瀆神, 恒爲萬代敬護之表矣. 夫我先民, 皆出於神市所率三千團部之裔. 後世, 雖有諸氏之別, 實不外於檀祖同仁之神孫. 因.雄.儉.三神之, 開創肇定之功德, 常傳誦而不忘, 則古民指其靈山曰三神山者, 亦必矣.
동방의 여러 산에는 '마이(馬耳)'나 '마니(摩尼)' 등의 산이 있는데, 항간의 사람들은 뭉뚱그려 '마리(摩利)'라고 부를 뿐 일찍이 구별하지 않았다. 대저 '마이'와 '마니'는 모두 '頭'의 '머리'라는 뜻에서 나왔다. 지금의 광주에 '修理山'이 있는데 이는 필시 '수리산(鷲山)'이라는 뜻이며, 적성에 있는 '紺岳山'은 곧 '검은산(玄山)'이라는 뜻이며, 충주에 있는 '達川'은 바로 '달천(月川)'이라는 뜻이니, '마이'나 '마리'가 '頭嶽' 혹은 '頭山'이 잘못 전해져 그리되었음을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태백'을 달리 일컬어 '백두'라 하였으며, 갑비고차에서 하늘에 제사지내던 곳을 '두악'이라 하였는데, 이는 단지 단군이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이 붙은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는 것이 아니라 단군이 하늘에 제사 지내던 곳은 반드시 '머리'라는 이름을 가지게 되었음을 말한다. 무릇 '머리'라 함은 가장 높다거나 혹은 으뜸 되는 우두머리를 가리키는 것이다. '백두'가 동방 모든 산의 으뜸이 되고, 또한 동방의 사람이 하늘로부터 처음 내려온 땅이 되며, 게다가 더하여 으뜸 되는 우두머리인 단군이 항상 그 산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예식을 행하였기에 당시의 사람들이 '머리산(頭山)'이라 이름하였음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갑비고차의 '두악' 역시 이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다만 '우수하(牛首河)'라는 이름은 알지 못하겠는데, 이 역시 단지 소머리를 물 속에 담그는 풍속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하지만, 이는 단정 지을 수 없다.
그러므로 신시씨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이미 백두산에 있으면서 점차 서남쪽으로 옮기고, 다시 패수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으며, 삼씨(三氏)의 겨레들은 각자 더욱더 사방으로 옮겨갔다. 또한 태백이 이미 동방의 신령스러운 땅이 되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큰 의식은 반드시 그 산에서 시작하였으니, 예로부터 동방 민족이 이 산을 숭상하고 공경함은 남다른 것이었다. 또 옛날에는 짐승들이 모두 신의 교화에 젖어 그 산에 편안히 깃들여 살며 사람을 해치지 않았으며, 사람 또한 산에 올라가 오줌을 누는 등의 신을 모독하는 행위를 감히 하지 않았으니, 만대에 걸쳐 항상 받들고 보호하는 지표가 되었다. 무릇 우리 선조들은 모두 신시씨가 거느린 3천의 무리에서 나온 후예들이다. 뒷 날 비록 여러 씨(氏)의 구별이 있게 되었지만, 실제로는 단군 선조께서 똑같이 어여삐 여기는 신의 후손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환인(桓因)·환웅(桓雄)·단검(檀儉)의 삼신이 나라를 열고 기초를 바로잡은 공덕을 항상 전하여 예기하고 잊지 않았으니, 곧 옛 백성들이 그러한 신령스러운 산을 가리켜 '삼신산'이라 하였음은 당연한 일이다.
盖, 神市以降, 神化之漸, 逐歲益深, 立國經世之本, 自與人國逈異. 其神風聖俗, 遠播於漢土, 漢土之人, 有慕於神化者, 必推崇三神, 至有東北.神明之舍之칭焉. 及其末流之弊, 則漸陷於荒誕不經, 愈出愈奇, 怪誕之說, 迭出於所謂燕.齊海上怪異之方士. 盖其地, 與我震邦相接, 民物之[敎](交)特盛, 自能聞風驚奇. 又推演傅會曰: 「三神山, 是蓬萊.方丈.瀛洲, 在渤海中…」云云. 且患其無驗, 則曰: 「望之如雲, 終莫能至…」云云, 以惑其世主.《神仙傳》又以「海中」字, 推以斷之曰: 「海上有三神山, 曰蓬萊.方丈.瀛洲山, 謂之三島…」云云. 而於是「海上」.「六鰲」, 荒怪之說, 繼出於(閑)[閒]人之(革)[筆], 乃我國之士, 則更效嚬於此, 曰: 「金剛.蓬萊也, 智異.方丈也, 漢拏.瀛洲也.」 則此, 又返咀漢士之餘唾也.《史記·封禪書》曰: 「三神山者, 其傳, 在渤海中. 盖嘗有至者, 諸僊人及不死之藥皆在焉, 其物禽獸盡白, 而黃金銀爲宮闕…」云云. 又仙家書類或曰: 「三神山, 有還魂.不老等艸, 一名震檀」云.
대저 신시씨가 하늘에서 내려온 이래로 신의 교화가 점차 세월에 따라 더욱더 깊어 감에, 나라를 세우고 세상을 경영하는 근본이 자연스럽게 다른 나라와는 자못 다르게 되었기에, 그 신성한 풍속이 멀리 한나라 땅에까지 퍼져서 한나라 땅의 사람 가운데 신의 교화를 사모하는 자가 있었으니, 오로지 삼신을 추앙하여 동북 지방에는 '신명의 집(神明之舍)'이라는 명칭까지 있게 되었다.
그러나 그 말단의 폐해에 이르러 곧 점차 허무맹랑함에 빠지고 더욱 기괴해지더니 괴이하고 허망한 말들이 꼬리를 물고 갈마들어 나왔는데, 심지어 '연나라와 제나라의 바다 위에 신선의 술법을 닦는 괴이한 사람이 있다'라고 말해지기까지 하였다. 무릇 그 땅은 우리의 진방(震邦)과 더불어 서로 접해 있어서 백성과 사물의 교류가 특히 왕성한데, 직접 그 풍문을 듣고는 놀라며 이상하게 여겼다. 또한 생각을 미루어 넓히고 억지로 이치에 맞춰 말하기를 「삼신산은 봉래산(蓬萊山)·방장산(方丈山)·영주산(瀛洲山)으로 발해 가운데 있다……」라고 하였다. 또한 그 증거가 없음을 두려워하여 「그것을 바라보면 마치 구름과 같은데 결국에는 능히 다다르지 못한다……」라고 말하며 세상의 주목을 미혹케 하였다.《신선전》에서는 또 '海中'이라는 글자만으로 추측하고 단정지어 말하기를 「바다 위에 삼신산이 있는데 봉래·방장·영주산이라 하며, 이를 일컬어 삼도(三島)라 한다」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해상(海上)'이나 '육오(六鰲)' 등의 황당무계한 말들이 한가로운 사람들의 붓 끝에서 연이어 나왔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다시 그것을 억지로 흉내56)만 내어 「금강산이 봉래산이며, 지리산이 방장산이고, 한라산이 영주산이다」라고 말하니, 이는 또한 한나라의 선비가 뱉은 침을 도리어 받아 곱씹는 격이다.《사기》의 <봉선서>에 말하기를 「삼신산이란 발해의 바다 가운데 있다고 전해진다. 무릇 가본 적이 있는 사람에 의하면 뭇 신선들과 불사의 영약이 모두 있으며, 그 곳의 사물과 짐승들은 모두 희고 황금과 은으로 궁궐을 지었으며……」57) 하였고, 또한 선가(仙家)의 서책에서 혹은 말하기를 「삼신산에는 넋을 부를 수 있거나 먹으면 늙지 않는 등의 풀이 있는데 일명 '진단(震檀)'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今白頭山, 自古有白鹿.白雉或白鷹之屬;《括地志》所云: 「其南有白山, 鳥獸草木皆白」者, 是也; 方士之說, 亦頗有所據也. 又白頭山一帶, 時産山蔘, 世人擬之以不老草. 山氓欲採取, 則必沐浴致齋祭山以後, 敢發, 其還魂.不老之名, 想, 亦原於此也. 古, 烏斯帝北巡而得靈草, 則此尤驗矣. 且白頭山産紫檀樹, 從古所稱檀木者, 是也. 而古記所傳, 九변震檀之說, 想, 必有因於此, 而「不老震檀…」云云者, 盖亦聽者之錯誤也. 然則, 燕.齊方士, 扼腕而言「海中三山」者, 亦병遊於夢中, 欺其主而又自欺也. 今我國有 「願得三山不老草, 拜獻高堂白髮親」之句, 殆爲養老者, 春祝之定文, 究其原則, 亦可噴飯. 何不, 卽往白頭山, 拜檀帝之靈, 而祈其萬壽耶.
지금의 백두산에는 예로부터 흰사슴이나 흰꿩 혹은 흰매의 무리가 있었으며, 이는《괄지지》에서 말한 바 대로 「그 남쪽에 '백산'이 있는데 날짐승과 들짐승 및 초목이 모두 희다」라고 한 것이 바로 그것이니, 신선의 술법을 닦는 사람의 얘기 역시 상당히 근거하는 바가 있다. 또한 백두산 일대에는 때때로 산삼이 나는데,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불로초로 생각하였다. 산에 사는 백성들이 이를 캐고자 하면 반드시 목욕하고 정성을 들여 산에 제사를 드린 후에야 감히 캐고자 하는 마음을 먹었다고 하는데, '환혼(還魂)'이나 '불사(不老)'라는 이름은, 생각건대 역시 이러한 것에 근거한 것일 것이다. 옛날 오사제(烏斯帝)께서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하였으니, 곧 그것으로 더욱 증거가 된다. 또한 백두산에는 자단수(紫檀樹)가 나는데 예로부터 단목(檀木)이라 일컫던 것이 바로 그것이다.
생각건대 옛 기록에 전하는 '구변진단(九변震檀)'이란 얘기는 반드시 이러한 것에 연유함이 있을 것이나 '불로진단(不老震檀)' 운운하는 것은 아마도 역시 전해들은 사람의 착오일 것이다. 그러한 즉, 연나라와 제나라의 방사들이 팔을 걷어붙이고 '바다 속의 삼신산'을 말하는 것 역시 똑 같이 꿈속을 노닐며 그 주인을 속이고 또한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 된다. 지금 우리나라에 「원하건대 삼신산의 불로초를 얻어, 윗채에 계신 백발의 어버이에게 바치고자 한다」는 글귀가 있으니, 아마도 노인을 봉양하는 자가 젊음을 찾아 드리고자 하는 전형적인 글인 것 같은데, 그 근원을 따져 보면 역시 웃음을 참지 못할 뿐이다. 어찌하여 백두산에 가서 단제(檀帝)의 영정에 절을 하고 만수를 기원하지 않는 것인가.
漢.淮陽之地, 古陳國地, 本太昊之墟, 婦人崇好祭祀用史巫, 故其俗崇巫鬼.《陳詩》曰: 「坎其擊鼓, 宛丘之下. 亡冬亡夏, 値其鷺羽.」 又曰: 「東門之분, 宛丘之허. 子仲之子, 婆娑其下.」 吳札, 聞其歌則曰: 「國亡主, 其能久乎.」云. 此 又伏犧所傳, 倚數觀變之餘弊也.《孟子》[舜曰](曰: 「舜)生諸馮, 東夷之人也.」《尙書》曰: 「舜肆類于上帝, 인于六宗, 望秩于山川, 편于군神.」 虞舜以前, 曾無是事, 此或原於上古東邦祭天報本之禮, 及山嶽.河川.洋海.沼澤, 皆有奉命主治之神者也. 漢土, 自古, 以雍州積高爲神明之오, 故立치郊上帝, 諸神祠皆聚云, 則此又與檀祖祭太白, 同其類也. 齊俗有八神之祭, 八神者曰天主.地主.兵主.陰主.陽主.月主.日主及四時主也. 天好陰, 故祠之必於高山之下.小山之上, 此祭天太白之麓之類也. 地貴陽, 祭之必於澤中환丘, 此祭天頭嶽之類也. 兵主, 祠蚩尤, 蚩尤氏爲萬代强勇之祖, 作大霧, 驅水火, 又爲萬代道術之宗. 是以, 太初之世, 恒爲東方戎事之主, 海岱一帶, 曾爲其族虎據之地. 藍侯之民, 再進而建奄.徐諸國於淮岱之地, 則八神之說, 萌於是時也.
한나라 회양(淮陽) 땅은 옛적 진(陳)나라의 땅으로 본디 태호씨(太昊氏)의 옛터인데, 그 땅의 부인들이 제사지내 받들기를 좋아하여 화려하게 꾸민 무당을 이용하였기에 그 곳의 풍속은 무당과 도깨비를 숭상하게 되었다.《시경》의 <진시(陳詩)>에서 이르기를,
그 북을 둥둥치며 완구(宛丘) 아래에서 놀고 있네.
겨울이나 여름도 잊고 저 백로깃을 가지고 춤추네.
또 이르기를,
동문(東門)에는 흰느릅나무 완구땅에는 상수리 나무.
자중(子仲)씨 딸이 그 아래서 덩실덩실 춤을 추네.
라 하니, 오찰(吳札)이 그 노래를 듣고는 말하기를 「나라는 망하고 주인은 없는데 그 향락이 오래 가겠는가.」 하였다. 이는 또한 복희씨가 전한 '의수관변(倚數觀變)'의 남겨진 폐단이다.
《맹자》에 이르기를 「순(舜)은 제풍(諸馮)에서 났으며 동이 사람이다」58)라고 하였으며,《상서》에 이르기를 「순(舜)에 이르러 드디어 상제(上帝)에게 성대히 제를 올리고, 육종(六宗)에게 정성으로 제사를 지내며, 섶을 태워 멀리 산천에 제를 지내고, 여러 신들에게 두루 제사를 지냈다」고 하였다. 우순(虞舜) 이전에는 일찍이 이런 일이 없었는데, 이것은 아마도 옛적에 동방에서 '하늘에 제를 올리고 그 근본에 보답한다'는 예식과, '산악·하천·해양·소택에 있어서도 모두 하늘의 명을 받들어 맡은 곳을 주관하여 다스리는 신이 있다'는 생각에서 근원 하였을 것이다.
한나라 땅에는 예로부터 옹주(雍州)의 높은 산을 신명이 거처하는 곳으로 여기고 제사 터를 세워 상제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뭇 신들의 사당 또한 모두 그 곳에 모여 있다 하니, 이는 또한 단군이 태백에서 제사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제(齊)나라의 풍속에 '팔신제(八神祭)'라는 것이 있는데, 여덟 신이라 함은 천주(天主)·지주(地主)·병주(兵主)·음주(陰主)·양주(陽主)·월주(月主)·일주(日主) 및 사시주(四時主)를 말한다. 하늘은 음(陰)을 좋아하기에 제를 올릴 때는 반드시 높은 산 아래의 작은 산 위에서 지냈으니 이는 태백산의 기슭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며, 땅은 양(陽)을 귀하게 여기기 때문에 제사를 지낼 때는 반드시 못 가운데의 둥근 언덕에서 지냈으니 이는 두악(頭嶽)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던 것과 같은 것이다.
군사를 주재하는 자는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치우씨는 만대에 걸쳐 굳셈과 용감함의 조상으로서 큰 안개를 일으키고 물과 불을 몰아쳐 부렸으니, 또한 만대에 걸친 도술의 근본이 된다. 그러한 까닭에 태초의 세상에서는 항상 동방의 군사(軍事)를 주재하는 자가 되었으며, 해대(海岱) 일대는 일찍부터 그의 부족들이 자리잡고 앉은 땅이 되었다. 남후(藍侯)의 백성들이 다시 더욱 나아가서 엄국(奄國)과 서국(徐國) 등의 뭇 나라들을 회대(淮岱)의 땅에 세웠으니, '팔신(八神)' 등의 얘기는 이 때 싹튼 것이다.
漢.高起兵於豊沛, 則祠蚩尤, 흔鼓旗, 遂以十月至파上, 與諸侯平咸陽, 而立爲漢王, 則因以十月爲年首. 此雖, 襲於秦之正朔, 而亦有因於敬蚩尤也. 後四歲, 天下已定, 則令祝官, 立蚩尤之祠於長安, 其敬蚩尤之篤如此.《晋書·天文志》「蚩尤旗類彗而後曲象旗, 主所見之方下, 有兵」云, 則是乃蚩尤氏, 上爲列宿也.《通志·氏族略》「蚩氏, 蚩尤之後也」云, 則是蚩尤氏之後而永居於漢土者也. 蚩尤氏之英風雄烈.播傳異域之深, 推此可知, 而今世人, 殆無過問者, 則此, 又國史散滅之故也, 而後代學者, 竟不免疎迂之譏矣.
한나라 고조는 풍패(풍沛)에서 병사를 일으키며 치우씨에게 제사를 지내고 북과 깃발에 희생의 피를 발랐으며, 마침내 10월에 패상(파上)에 이르러 제후들과 더불어 함양(咸陽)을 평정하고 한나라의 왕으로 즉위하였다. 그런 연유로 10월을 새해의 시작으로 삼았으니, 이것이 비록 진(秦)의 책력을 이어서 따른 것이긴 하지만 역시 치우씨를 공경함에서 연유되었다 할 것이다. 그 뒤 4년에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곧 축관(祝官)에게 명하여 치우씨의 사당을 장안에 세우게 하였으니, 치우씨를 공경함이 이와 같이 돈독하였다.59)
《진서·천문지》에 「치우기(蚩尤旗) 유형의 혜성은 그 뒷 꼬리의 곡선이 마치 깃발 모습을 하고 있는데, 그것이 주로 나타나는 방향의 아래에는 병사가 있다」60)고 하였으니, 이는 곧 치우씨가 하늘로 올라가서 별자리가 되었음을 말한다.《통지·씨족략》에 「치(蚩)씨는 치우의 후손이다」라 하였으니, 곧 이들은 치우씨의 후손으로서 영원히 한나라 땅에 머무른 자들이다. 치우씨의 영웅된 기풍은 다른 지역까지 매우 널리 퍼졌음을 이로 미루어 알 수 있으나 지금의 세상 사람들 가운데 이를 물어 오는 자가 거의 없으니, 곧 이는 또한 나라의 역사가 흩어지고 없어진 까닭이기도 하지만, 후대의 학자들도 그것을 소흘히하고 멀리하였다는 비난을 결국에는 면할 수 없을 것이다.
盖, 燕.齊之士, 沈惑於神異之說, 亦尙矣. 自齊.威宣.燕.昭之時, 遣使求三神山. 秦.漢之際, 宋無忌.正伯.僑克.尙이.門子高之徒, 則皆燕人也; 文成.五利.公孫卿.申公之屬, 皆齊人[人]也. 昔, 太公治齊, 修道術, 後世其地, 多好經術者. 則此又太公爲之助俗也, 燕.齊之士, 安得以不好怪異之說哉!
무릇 제나라와 연나라의 선비들은 신비하고 괴이한 말에 깊이 현혹되고 또한 이를 높이 여겼다. 제나라의 위왕(威王)과 선왕(宣王) 및 연나라의 소왕(昭王) 때부터 사신을 보내 삼신산을 찾게 하였으니, 진(秦)과 한(漢) 때의 송무기(宋無忌)·정백(正伯)·교극(僑克)·상선(尙羨)·문자고(門子高) 같은 무리는 모두 연나라 사람이고, 문성(文成)·오리(五利)·공손경(公孫卿)·신공(申公) 등의 무리는 모두 제나라 사람이다. 옛날 태공(太公)이 제나라를 다스리며 도술을 닦았더니, 뒷날 그 땅의 사람들이 도술 부리는 것을 매우 좋아하게 되었다. 곧 이것은 또한 태공이 세상의 풍속을 그렇게 이끈 것이므로, 연나라와 제나라의 선비들이 어찌 괴이한 말들을 좋아하지 않았겠는가.
余幼而嫌梳頭, 老婢諭曰: 「不梳頭者, 蚤슬鑽穴, 將至耳腦相通, 寧不懼乎.」 余曰: 「寧有是事乎.」 曰: 「東部山邨之兒, 正如是矣.」 及後, 到山村, 無有是事. 嘗與客坐談, 客曰: 「木之最大者, 有(經)[徑]數間者.」 曰: 「寧有是事乎.」 曰: 「嶺東之地, 多斯木, 斫而橫之, 則行旅可連枕而宿其上, 一面至(數十人)[十數人].」 其後, 余隨舍叔父, 至嶺東, 曾無是木. 及讀《莊子》曰: 「北溟有魚, 其名爲鯤, 化而爲鳥, 其名爲鵬, 其長數千里, 其翼若垂天之雲.」 余問於師曰: 「可信有此事否.」 曰: 「窮髮之北, 安知, 其必無耶.」 雖然, 其後歷觀載籍, 且無是語. 今, 大荒數萬里, 未聞有數千[里]巨湖, 且寒威酷烈, 絶冠天下, 安容如許大物, 能逍遙於寒熱兩極之間耶. 其云「단扶搖而上[者](有)九萬里」者, 欲杜世人之辨也. 又看《神異經》曰: 「崑崙之西, 有大蛇繞山, 長三萬里…」云云. 長三萬里大蛇, 盤據於崑崙之西, 則西域諸國, 應遊牧於鱗角之下, 世間寧有是事耶. 盖喜作迂怪之說者, 必藉於聽者之所不知. 此, 漢土迂怪之士, 只憑東方三神之說, 而효효然, 胥出浮言, 以惑其聽者也.
내가 어렸을 때 머리에 빗질하기를 싫어하였더니 늙은 종이 빗대어 말하기를 "머리를 빗지 않으면 이가 구멍을 뚫어 장차 귀와 뇌가 서로 통하게 되기에 이르는데 어찌 두렵지 않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하였더니, "동쪽 산골 마을의 아이가 바로 그렇게 되었다"고 하여, 나중에 산 마을에 가 보았더니 그런 일이 있은 적이 없었다 한다. 한번은 손님과 앉아서 얘기를 나누는데 손님이 말하기를 "나무 가운데 가장 큰 것은 직경이 몇 칸이나 되는 것이 있습니다"라고 하기에 "어찌 그러한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하였더니, "영동 땅에 그런 나무가 많습니다. 베어서 가로질러 놓으면 지나가는 나그네가 그 위에서 배게를 나란히 하고 누워 잘 수 있는데, 한 쪽 면에 열 명이 넘는 사람이 누울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 후에 내가 작은 아버님을 따라 영동에 가 보았더니 일찍이 그러한 나무는 없었다 한다.
《장자》를 읽으니 「북쪽 바다에 물고기가 있는데 그 이름은 곤(鯤)이다. 변화하여 새가되면 그 이름을 붕(鵬)이라 하는데, 그 길이는 수천리가 되며 그 날개는 마치 하늘에 드리운 구름과도 같다」라 하였다. 내가 스승에게 여쭙기를 "그런 일이 있다는 것은 믿을 만한 것입니까." 하니 "초목이 나지 않는 북극 지방인데 어찌 알겠냐 마는 그것이 반드시 없다고만 할 수 있겠느냐." 하였다. 그리하여 비록 그 후에 모든 서적들을 낱낱이 살펴보았지만 또한 그러한 말은 없었다. 지금에 대황의 수만 리 넓은 땅에 수천 리에 걸친 큰 호수가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으며, 또한 추위의 위세가 혹심하기로 으뜸인 하늘 아래 어찌 그와 같은 큰 사물을 받아들여서 능히 춥고 더운 양극 사이를 유유자적히 노닐게 할 수가 있겠는가. 「큰 바람을 북돋우며 9만리의 상공으로 오른다」라고 한 것은 세상 사람들의 분별을 가로막기 위해서이다.
또한《신이경(神異經)》을 보았더니 「곤륜산의 서쪽에 큰 뱀이 있어 산을 휘어 감고 있는데 그 길이가 3만리이다」 하였다. 길이가 3만리나 되는 큰 뱀이 곤륜의 서쪽에 또아리를 틀고 앉았으면 서역의 뭇 나라들이 응당 그 비늘조각 아래에서 짐승을 길렀을 터인데, 세상에 어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는가. 무릇 이상한 말을 짓기 좋아하는 사람은 반드시 듣는 사람이 모르는 것을 빌미로 하기 마련이다. 이처럼 한나라 땅의 기괴한 선비들도 단지 동방의 삼신 예기에 빙자하여 공연히 시끄럽게 거짓말을 퍼트려 인심을 선동하고 이로서 듣는 자들을 미혹케 하였다.
高麗.仁宗九年, 因妖僧妙淸之說, 置八聖堂于西京.林原宮中. 淸平爲之說曰: 「第一曰護國白頭嶽太白仙人, 有大(彗)[慧]大德, 助主神, 造大界, 卽桓雄天王之謂也. 第二曰龍圍嶽六通尊者, 有변化萬理之能, 掌人間禍福. 第三曰月城嶽天仙, 掌風雨之神. 第四曰駒麗平壤仙人, 掌光明之神. 第五曰句麗木覓仙人, 掌人間壽命之神. 第六曰松嶽震主, 有大勇大力, 掌神兵, 恒鎭守國都, 以驅外敵, 卽古蚩尤氏之神. 第七曰甑城嶽神人, 掌四時穀蔬草木之事, 卽古高矢氏之神. 第八曰頭嶽天女, 掌地上善惡, 卽神市氏之后.桓儉神人之母. 皆在主神調度之下, 掌治天下諸事之神…」云云. 盖仁宗之於妙淸, 信惑太甚, 卒致西京之變, 使金富軾討平. 妙淸, 發身於沙門, 蠱惑其世主, 寵傾宗戚, 權壓內外, 漸致驕傲, 敢謀不軌, 其罪固不可誅. 然而, 當時猶有, 恨國力之不振, 憤外侮之천至, 採古來之神明於殘散傳說之中, 欲以激當時之人心, 其行雖乖, 其志則猶有可采者矣. 古之說史者, 只以妖僧荒誕之說, 唾棄而不采, 則猶有一分迂소之責[八聖矣](矣. 八聖)之名, 必表以佛家名字, 僧侶之筆, 安不得如斯耶. 此不可深怪也.
고려 인종(仁宗) 9년에 요승 묘청(妙淸)의 말로 말미암아 서경의 임원궁에 팔성당(八聖堂)이 설치되었다. 청평이 그 예기를 보충하여 이르기를 「그 첫번째를 호국백두악(護國白頭嶽)의 태백선인(太白仙人)이라 하는데, 큰 지혜와 큰 덕을 지니고 주신을 도와 큰 세상을 만드니 곧 환웅천왕을 일컫는 것이다. 그 두번째를 용위악(龍圍嶽)의 육통존자(六通尊者)라 하는데, 1만 가지의 이치를 변화시키는 능력을 지니고 인간의 길융화복을 관장하고 있다. 그 세번째를 월성악(月城嶽)의 천선(天仙)이라 하는데, 바람과 비를 관장하는 신이다. 그 네번째를 구려(駒麗)의 평양선인(平壤仙人)이라 하는데, 광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다섯번째를 구려(句麗)의 목멱선인(木覓仙人)이라 하는데, 인간의 수명을 관장하는 신이다. 그 여섯번째를 송악(松嶽)의 진주(震主)라 하는데, 큰 용기와 큰 힘을 지니고서 신의 군사를 관장하고 항시 나라의 도읍을 지키며 외적을 몰아내니 곧 예전의 치우씨 신이다. 그 일곱번째를 증성악(甑城嶽)의 선인(神人)이라 하는데, 사시(四時)와 곡식 채소 및 초목의 일을 관장하니 곧 예전의 고시씨 신이다. 그 여덟번째를 두악(頭嶽)의 천녀(天女)라 하는데, 땅위의 선악을 관장하니 곧 예전 신시씨의 황후이며 환검신인의 어머니이다. 이들 모두가 주신의 영도 아래 있으면서 천하의 모든 일을 관장하여 다스리는 신이다」라고 하였다.
무릇 인종이 묘청에 대하여 믿고서 현혹됨이 너무 심하여 결국에는 서경의 변란이 일어나기에 이르자, 김부식으로 하여금 토벌하여 평정하게 하였다. 묘청은 불문(佛門)에서 몸을 일으켜 임금의 마음을 미혹시키고 종친과 외척의 총애를 독차지하여 권력으로 안팎을 누르고는 점차로 교만해져 감히 모반을 도모하고자 하였으니, 그 죄는 진실로 주살 됨이 마땅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당시에도 여전히 국력이 위세를 일으키지 못함을 한탄하고 외적들의 업신여김이 거듭됨을 분개하는 마음이 있었는데, 이에 헤지고 흩어져 전해 내려온 얘기 가운데에서나마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명(神明)을 골라내어 이로서 당시의 인심을 격앙시키고자 하였으니, 그 행위는 비록 어그러졌다 하지만 그 뜻은 오히려 가려서 취할 만한 것이 있다고 할 것이다. 옛적에 역사를 얘기하는 사람들은 단지 요승의 황당무계한 말만을 들어 침을 내뱉듯이 버리고는 가려서 취하지 않았으니, 이는 오히려 조금은 그 일에 어둡고 소홀한 책임이 있다 하겠다. 여덟 성인의 이름을 반드시 불가의 이름으로 나타낸 것은 승려의 글이기에 어찌 그와 같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이는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다.
噫! 神市立極, 檀帝垂訓, 聖化神澤, 皇皇亮亮, 足爲萬代之天範. 而後孫不肖, 乃致聖謨鴻猷, 潛消默失於冥冥之中, 使堂堂皇謨, 盡付於空山臥睡之人, 所傳者, 只遺怪亂之說, 不亦悲乎. 今, 崇三神帝釋之風頗盛, 每人家正寢壁上, 以檀木爲釘, 紙囊盛純白米而掛之, 名曰三神囊或帝釋囊. 每十月, 新穀肇成, 則主婦必정手, 換新甑, 蒸爲餠, 以賽其神而祝景福. 此, 旣出於檀朝之遺制, 而俗民競以巫覡相尙, 或至禍福壽夭, 專托巫祝而云爲之, 此乃古俗末流之弊也. 能向燕.齊之士, 而嗤其迂怪也哉! 悲夫!
오호라! 신시씨가 임금의 자리에 오르고 단제가 그 교훈을 후세에 전하니, 성스러운 교화와 신인의 은택은 환히 빛나서 족히 만대에 걸쳐 하늘 모범이 되었다. 그러나 후손이 불초하여 성스럽고도 원대한 대계(大計)는 어둑어둑한 가운데로 잠겨서 사라지듯 소리 없이 잃어버리고, 당당하던 임금의 천하 경영의 뜻은 빈 산에 누워 잠든 이들에게로 모두 미뤄 버리니, 전해지는 것이라곤 단지 괴상하고 어지러운 말만 남았을 뿐이라, 이 역시 슬프지 않겠는가.
이제 삼신제석(三神帝釋)을 숭배하는 풍조가 자못 성하여, 집집마다 잠자리의 바로 윗 벽에 박달나무로 만든 못을 박고, 종이 주머니에 깨끗한 흰 쌀을 가득 담아 걸어 두며 이름하여 '삼신낭(三神囊)' 혹은 '제석낭(帝釋囊)'이라 한다. 매년 10월 새로운 곡식이 날 때면 주부는 반드시 손을 정결히 하고 새로 마련한 시루에 떡을 쪄서 그 신에게 정성을 올리며 큰 복을 바란다. 이것은 단조(檀朝)때 생겨나 지금까지 남겨진 풍속인데, 속된 백성들은 다투어 무당과 박수를 받들면서 혹은 길흉화복과 장수하고 단명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오로지 무당과 박수에게 의탁하며 말과 행동을 그것에 따르니, 이는 곧 옛 풍속의 끄트머리로 흐르는 폐단이다. 그러니 어찌 연나라와 제나라 선비를 향하여 그들이 괴상하다고 비웃을 수 있겠는가. 슬프도다!
先是, 夫婁旣平水土, 而夏禹適治唐堯九(年)[秊]之水. 宇內諸國, 悉會於塗山.明.鳳陽府. 夫婁亦奉命往會, 又使神誌(氏)61)齋寶玉.弓矢以從焉. 自蚩尤.軒轅大戰以後, 兩國始以玉.帛相見, 可稱東方會盟之始矣.
이 보다 앞서 부루가 물과 땅을 모두 안정시키고 나니, 하우씨(夏禹氏)가 마침 당요(唐堯) 9년의 홍수를 다스리기에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모두 도산(塗山)(명明의 봉양부鳳陽府)에 모였다. 부루 역시 명을 받들고 가서 함께 모이며 신지씨로 하여금 보옥 및 활과 화살을 지니고 따르게 하니, 치우와 헌원이 크게 싸운 이후 두 나라가 처음으로 옥과 비단을 가지고 서로 만난 것으로서, 가히 동방회맹(東方會盟)의 시초라고 할 만하다.
在位九十餘載, 天下호호然, 忘其樂焉. 乃命夫婁攝位曰: 「天道昭昭, 降在爾心, 惟秉爾心, 以親萬民, 其惟純誠乎!」 乃南至唐莊, 入居阿斯達, 以孟冬月, 化神朝天. 在世凡二百十年, 在君位九十三年. 於是夫婁率諸加及諸侯, 獻祭於朝天處, 以辛丑歲卽位于平壤, 是二世檀君也. 後有文朴氏, 居阿斯達, 韶顔方瞳, 頗得檀儉之道. 其後, 如向彌山之永郞及馬韓之神女寶德諸人, 只得其一斑, 淸정無爲, 適遙塵外, 又非檀祖用化萬民之大義也.
재위 90여 년 동안 천하는 공허롭게 넓기에 즐거움을 잊고 지냈다. 이에 부루에게 명하여 재위를 잇게 하며 이르기를 「하늘의 도는 밝디 밝게 네 마음에 내려와 있으니, 오로지 네 마음을 잡고 그로서 만백성을 사랑하면 그 뜻은 순수하고 정성스러울 것이니라」 하고는, 남쪽으로 당장(唐莊)에 이르러 아사달에 들어가 기거하다가 10월에 신이 되어 하늘에 오르니, 세상에 있은 지 무릇 210년이요 임금의 자리에 있은 지 93년이다. 이리하여 부루가 뭇 가와 제후를 거느리고 하늘에 오른 곳에서 제사를 지내고는 신축년에 평양에서 즉위하니, 바로 두번째 단군이다. 뒤에 문박씨(文朴氏)가 아사달에 살고 있었는데, 환하게 젊어 보이는 얼굴에 모가 난 눈동자62)를 하고서 자못 단검(檀儉)의 도를 얻은 듯하였다. 그 후에 향미산(向彌山)의 영랑(永郞)과 마한(馬韓)의 신녀보덕(神女寶德) 등 뭇 사람들은 단지 그 한 부분만을 체득하여 정결하게 무위(無爲)로서 속세를 벗어나 소요할 뿐이었으니, 이 또한 단조(檀朝)가 만백성을 교화시키는 그러한 큰 뜻은 아니다.
辛丑歲, (王)[壬]儉夫婁元年. 夫婁旣卽位, 繼父志而治天下, 凡三年, 出巡國中, 祭天如禮, 復使諸侯, 致祭如古. 居數年, 有앙肅者無道, 使仙羅往撫之. 其後, 앙肅再叛, 乃使仙羅會루진.蓋馬之兵, 討平之, 逐其徒於窮北. 益修德政, 廣采賢能, 乃擧息達爲龍加, 今勿爲馬加, 增置主財之職曰鳳加, 使阿密主之. 於是浚渠혁, 開道路, 興農桑, 勸牧畜, 啓學而廣敎, 民生益殷, 聲聞大彰. 令天下, 以孟冬西成之後, 居民相聚, 薦穀而祭天, 幷祀檀儉在天之神, 民人咸悅, 推戴欽慕, 無異存日.
신축년은 부루 임금의 원년이다. 부루가 즉위하여 부왕의 뜻을 이어 천하를 다스리니, 무릇 삼년만에 나라안으로 순행을 나가서 예를 갖추어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다시 제후들로 하여금 제사를 지냄을 예전처럼 하게 하였다. 수년이 지난 후에 앙숙(앙肅)이라는 무도한 자가 있어서 선라(仙羅)로 하여금 가서 그를 달래게 하였는데, 그 후에 앙숙이 다시 배반하기에 선라로 하여금 속진과 개마의 병사를 모으게 하여 그를 토벌하고는 그 무리를 북쪽의 후미진 곳으로 내어쫓았다.
이에 덕스러운 정치를 더욱 닦으며 널리 현명하고 능력 있는 자를 가려 뽑았으니, 식달(息達)을 등용하여 용가로 삼고, 금물(今勿)을 마가로 삼았으며, 재정을 주관하는 직책을 증설하여 붕가(鳳加)라 이름하고 아밀(阿密)로 하여금 이를 주관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물도랑을 파고 길을 내며 농사와 누에치기를 일으키고 목축을 권장하였으며, 학문을 계도하여 널리 가르치니, 백성의 생활은 더욱 윤택하여지고 이를 기리는 소리는 천하에 자자하였다. 천하에 영을 내려 10월 추수를 마친 후에 그 땅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서로 모여 새 곡식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고, 아울러 하늘에 계신 신(神)인 단검께도 제사 드리게 하니,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추대하여 떠받들고 그 덕을 흠모하기를 살아 있을 때와 다름없이 하였다.
初, 夫婁踐位之際, 虞舜以藍國隣接之地爲營州, 凡數十年, 夫婁使諸加征其地, 盡逐其衆. 是時, 天下諸侯, 來朝者數十. 於是作於阿之樂, 以諧人神. 於阿者, 喜悅之詞也. 時有, 神獸出於靑丘, 白毛九尾, 銜書作瑞, 乃賞高矢氏, 令國中奏樂而致歡, 又作朝天之舞. 封仙羅於앙肅之地, 後數年, 又封道羅.東武, 以表其功, 卽後之沃沮.沸流.卒本(朝)諸國也. 在位三十四歲, 崩, 壽一百四十六歲. 子, 嘉勒立.
처음에 부루가 임금의 자리에 올랐을 때 우순(虞舜)이 남국(藍國)에 인접한 땅을 영주(營州)로 삼은지가 무릇 수십년이기에, 부루가 뭇 가로 하여금 그 땅을 정복하게 하고 그 무리들을 모두 내치게 하였다. 이 때 천하의 제후 가운데 들어와 알현하는 자가 수십 명에 이르니, 이에 '어아의 노래(於阿之樂)'를 지어 이로서 사람과 신이 어울려 화합하였다. '어아'라 함은 기쁨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때 신령스러운 짐승이 청구(靑丘)에 나타났으니, 털은 희고 꼬리는 아홉에 서책을 입에 물고 상서러움을 드러내는지라, 이에 고시씨에게 상을 내리고는 나라 안에 영을 내려 음악을 연주하게 하여 매우 즐기며, 또한 '조천무(朝天舞)'를 지었다.
선라(仙羅)를 앙숙의 땅에 봉했다가 그 몇 년 뒤에 또 도라(道羅)와 동무(東武)를 봉하여 그 공덕을 표창하니, 곧 뒤에 옥저(沃沮)·비류(沸流)·졸본(卒本) 등의 뭇 나라들이다. 임금으로 있은 지 34년만에 세상을 떠나니 수(壽)는 146세였다. 아들 가득(嘉勒)이 임금이 되었다.
乙亥歲, (王)[壬]儉嘉勒元年. 亦有聖德, 能繼父祖之道. 又擧九室氏爲龍加, 益致其隆盛焉. 時, 夏王失德, 其臣有簒逆者, 乃使息達率藍.眞蕃之民, 以征之, 於是國威益彰. 乃行祭天禮, 遍及于諸神. 在位五十一歲, 威德流被于四表, 國人咸慕其化. 以乙丑歲崩, 壽八十四. 子, 烏斯立.
을해년은 가륵 임금의 원년이다. 역시 성스러운 덕이 있어 능히 부왕과 조부의 길을 이었다. 또 구실씨(九室氏)를 등용하여 용가로 삼으니 그 융성함이 더욱 극진하였다. 이 때 하나라 왕이 덕을 잃어 그 신하 가운데 왕위를 넘보고 반역하는 자가 있으므로, 이내 식달(息達)로 하여금 남국(藍國)과 진번(眞蕃)의 백성들을 이끌고 가서 그를 정벌케 하니 나라의 위세가 더욱 빛났다.63) 이에 하늘에 제사의 예식을 행하며 뭇 신들에게 고루 미치게 하였다. 재위 51년 동안 위엄 있는 덕은 사방으로 퍼져서 나라의 사람들은 모두가 그 교화를 사모하게 되었다. 을축년에 세상을 떠나니 수는 84세였다. 아들 오사(烏斯)가 임금이 되었다.
丙寅歲, (王)[壬]儉烏斯元年. 北巡而得靈草. 分天下爲二十一州. 征夏王后相, 不克, 後和, 遣使相通. 在位四十九歲, 崩, 子, 丘乙立.
병인년은 오사 임금의 원년이다. 북쪽을 순행하다 신령스러운 풀을 얻었다. 천하를 21주(州)로 나누었다. 하나라 왕 후상(后相)을 정벌하고자 하였으나 이기지 못했으며, 후에 화해하여 사신을 보내고는 서로 교통하였다.64) 임금자리에 있은 지 49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구을(丘乙)이 임금이 되었다.
乙卯歲, (王)[壬]儉丘乙元年. 時, 夏民有慕化而至者, 使處於奄慮忽. 後, 少康復興夏道, 久相和好. 封太白之山, 使凡民不得恣意侵犯. 在位三十五歲, 崩. 子, 達門立.
을묘년은 구을 임금의 원년이다. 이 때 하나라 백성 가운데 임금의 교화를 사모하여 오는 자가 있으므로 엄려홀(奄慮忽)에 거처하게 하였다. 뒤에 소강(少康)이 하나라의 도를 다시 일으키므로 오랫동안 서로 화목하게 지냈다.65) 태백산을 봉하여 일반 백성들이 함부로 들어가지 못하게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달문(達門)이 임금이 되었다.
庚寅歲, (王)[壬]儉達門元年. 生而有異, 及長, 有聖德. 又得東海人黎老爲龍加. 德聞益彰, 國人不知惡.不知煩懊, 聲敎之漸, 可謂盛矣. 乃西撫알견兪, 北安앙肅, 南攘夏, 東至于蒼海, 而波息十年. 在位三十二歲, 崩. 子, 翰栗立.
경인년은 달문 임금의 원년이다. 태어나면서부터 다름이 있더니, 자라서는 성스러운 덕이 있었다. 또 동해 사람 여로(黎老)를 얻어 용가로 삼으니 그 덕의 평판은 더욱 빛났다. 나라 사람들은 악을 모르고 번민을 몰랐으니, 임금의 가르침이 번져나가 백성에게 물들어 감이 가히 융성하였다 할 것이다. 이에 서쪽으로 설유를 달래고 북쪽으로 앙숙을 진정시켰으며, 남으로 하나라를 물리치고 동쪽은 푸른 바다에 이르니, 십년동안 어려움 없이 조용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32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한율(翰栗)이 임금이 되었다.
壬戌歲, (王)[壬]儉翰栗元年. 有阿叱者, 作亂害民, (王)[壬]儉曰: 「惟罪歸于作犯, 惟道成于謹修.」 乃益修德政, 使黎老征之, 三年而後始禽. 且當時, 夏政方殷, 使藍侯勤修戎事, 而終世以和. 在位二十五歲, 崩. 子, 于西翰立.
임술년은 한율 임금의 원년이다. 아질(阿叱)이라는 자가 있어 난을 일으켜 백성을 해치니 임금이 이르기를 「죄(罪)는 오로지 그것을 범한 자에게로 돌아가며, 도(道)는 오로지 그것을 삼가 닦은 자에게서 이루어진다」라 하고 더욱 덕스러운 정치를 닦으며 여로(黎老)에게 그를 정벌하게 하니, 삼년이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사로잡았다. 또한 당시 하나라의 정치가 바야흐로 융성해지므로 남후로 하여금 군사 일을 힘써 다스리게 하니, 오랫동안 이로써 평화로웠다.66) 임금자리에 있은 지 25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우서한(于西翰)이 임금이 되었다.
丁亥歲, (王)[壬]儉于西翰元年. 或曰烏斯含. 使民, 九十稅一, 廣通有無, 以補不足. 在位五十七歲, 崩. 子, 阿述立.
정해년은 우서한 임금의 원년이다. 혹은 오사함(烏斯含)이라고도 한다. 백성들에게 90분의 1을 세금으로 내게 하였으며, 물자의 유무에 따라 널리 통하게 하여 부족한 것을 보충케 하였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57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아술(阿述)이 임금이 되었다.
甲申歲, (王)[壬]儉阿述元年. 有仁德. 時, 民有犯禁者, (王)[壬]儉曰: 「糞地雖汚, 乃有降露之時.」 置而不治, 犯禁者, 乃化其德. 在位二十八歲, 崩. 子, 魯乙立.
갑신년은 아술 임금의 원년이다. 임금에게 어진 덕이 있었는데, 이 때의 백성 가운데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있기에 임금이 말하기를 「똥을 눈 땅이 비록 더럽기는 하지만 거기에도 이슬이 내릴 때가 있을 것이다」라 하며 내버려두고 죄를 다스리지 않으니, 금지한 것을 범한 자가 그 덕에 감화되었다. 임금자리에 있은 지 28년만에 세상을 떠났다. 아들 노을(魯乙)이 임금이 되었다.
-규원사화 원문(2)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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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진리의 문 원문보기 글쓴이: Libyt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