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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8월. 제203차 산행] <함양 황석산-거망산> ❊
2019년 8월 18일 (일요일)
* [산행 코스] ‣ 봉전리 ‘우전마을’(경남 함양군 서하면)→ 시구목골→ 피바위→ 황석산성 남문→ 갈림길 [황석산성]→ 황석산 정상→ 안부[점심]→ 거북바위→ [북봉]→ 뫼재→ 불당골 갈림길→ [1245봉→ 지장골 갈림길→ 거망산→ 태장골(폭포)→ 용추사 일주문]→ ‘장자벌마을’ 주차장 -<천궁식당>(함양군 안의면 상원리)→ 귀경(22:30)
* [프롤로그] ― ‘광복절, 위기의 대한민국’, 이제 국민이 깨어나야 한다!
2019년 8·15는 ‘광복 74주년’이면서 ‘대한민국 건국[정부수립] 제71주년’이 되는 날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건국한 지 3년만인 1950년 북의 남침으로 처참한 6·25전쟁을 겪고, 그로 인한 절대 빈곤 속에서 경이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고 민주화를 성취함으로써 세계적으로 주목받는 국가로 성장했다. 그런 의미에서 ‘8·15 건국절’은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국민의 자존감을 다시 세우면서 급변하는 세계정세 속에서 미래 지향적인 포부와 국민적 결의를 다짐하는 날이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의 광복절 경축사는 매우 실망스럽다. 그 말과 작금의 현실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이다. 사실 문재인 정권이 들어서면서 반기업·친노동의 소득주도성장정책으로 잘 나가던 경제가 무너지고, 대책 없는 국방·안보 정책으로 국민적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무능하고 자폐적인 외교 정책으로 국제적으로 ‘외톨이’가 되어, 국가가 위기 상황에 이르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날 독립기념관에서 발표한 대통령의 경축사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너무나 현실과 거리가 먼, 뜬 구름 같은 현란한 말들로 성찬을 이루고 있다. 경축사는 세 가지 문제로 요약된다.
“첫째, 책임 있는 경제 강국으로 자유무역의 질서를 지키고 동아시아의 평등한 협력을 이끌어내고자 한다.”고 했다.… 그렇다. ‘책임 있는 경제 강국’은 모든 국민이 바라는 바이지만 지금 문재인 정권이 만들어 놓은 ‘책임 없는’ 경제 파탄과 주변 상황을 보면 참으로 공허한 이야기다. 보도에 따르면, 지금 우리나라 올 1분기 경제성장률이 OECD 꼴찌로 추락했고, 수출은 8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며, 상장 기업 영업이익이 1년 새 40% 격감하고 기업 파산이 사상 최고를 기록했다. 실업률이 20년 만의 최악을 기록하고 청년 체감 실업률이 25%로 치솟았으며 실업급여 지급액이 매달 최고치를 갈아치우고 있는 현실이다. 이런 데도 문 대통령은 경제가 "튼튼하다"고 하고, "일자리 지표가 개선되고 있다"고 하면서, "고용 안전망이 강화되고 있다"고도 했다. 분명 대통령의 현실 인식에 문제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자유무역의 질서’와 ‘동아시아의 평등한 협력’이 이루어지겠는가. 그 동안 문 정권의 무능 외교가 만들어 놓은 중국·일본·미국과의 ‘외교 절벽’을 생각하면 참으로 먼 나라 이야기다.
“둘째,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며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교량 국가가 되고자 한다.”… 그리고 “남과 북 사이 끊긴 철도와 도로를 잇는 일은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교량국가로 가는 첫걸음”이며 “한반도의 땅과 하늘, 바다에 사람과 물류가 오가는 혈맥을 잇고 남과 북이 대륙과 해양을 자유롭게 넘나들게 된다면, 한반도는 유라시아와 태평양, 아세안, 인도양을 잇는 번영의 터전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 참 통크고 의기양양한 말씀이다. ‘대륙과 해양을 아우르며 평화와 번영을 선도하는 교량국가’의 비전은, 시진핑의 일대일로(一大一路)를 연상하게 하는 참으로 원대한 청사진이다. 우선 ‘남과 북 사이 끊긴 철도와 도로를 잇는 일’은 언젠가는 ‘원만한’ 통일 국가로 가기 위한 ‘첫걸음’일 테지만, 북의 행태와 주변 정세를 보면 너무나 비현실적인 이야기다. 오직 핵과 미사일로 평화를 운운하며, 우리의 머리통을 겨냥하듯 미사일을 쏘아대는 북한이다. 그 무모한 도발을 억제하기 위해 유엔과 세계 여러 나라가 대북제재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북에다 도로를 건설하고 철도를 깔아주겠다니 참으로 어이가 없다. 이미 문 대통령은 ‘중재자 운운’ 하다가 젊은 김정은에게서 ‘오지랖’ 핀잔을 듣지 않았는가.
또 대통령은 “북한의 도발 한 번에 한반도가 요동치던 그 이전의 상황과 분명하게 달라졌다.”고 했는데, 과연 그런가. ‘핵으로 평화’를 말하는 김정은에 대해, 우리는 스스로 무장해제를 하고 대한민국의 정체성을 부정하면서까지 ‘평화’를 운운하고 있으니 황당하다. 국민들은 도저히 이를 받아들일 수가 없다.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는 문재인 식(式) 일방적인 종북(從北) 프레임일 뿐이다. 거기에다 “여전히 대결을 부추기는 세력”을 언급했는데, 지금 누가 남북의 대결을 부추기고 있다는 말인가. 해바라기처럼 북(北)만을 바라보는 대통령은 ‘평화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노래하고, 조국(曺國)은 죽창가를 부르며 관제 민족주의를 내세우고 있는 사이, 나라는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되어버렸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미사일을 쏘는데 무슨 평화 경제냐고 말하는 사람들’을 거론하며 “이념에 사로잡힌 외톨이로 남지 않길 바란다.”고 했다. 지금 동북아에서 외톨이는 누구인가. 보라. 북한은 문 대통령에게 '맞을 짓 말라'고 비난하고, 일본과는 단교 상태나 마찬가지며, 중국과 러시아는 우리를 무시하며 우리 영공을 넘나들고, 미국 대통령은 '북 미사일은 한국을 겨냥한 것이니 괜찮다'며 우리에겐 매일같이 '돈 내라'고 닦달이다. 우리 대한민국은 사방이 막힌 외톨이가 돼 있다. 나라를 이렇게 만든 사람이 바로 문 대통령 자신이 아닌가.
이어지는 대통령의 경축사, “셋째, 평화로 번영을 이루는 평화경제를 구축하고 통일로 광복을 완성하고자 한다.”… “평화경제는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 위에 북한이 핵이 아닌 경제와 번영을 선택할 수 있도록 대화와 협력을 계속해 나갈 것”이라고 했다.
… 좋은 말이다. 북한의 체제가 무너지고 북한 땅이 자유 시장경제에 통합되면 우리 경제에 새로운 기회가 되는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문 대통령이 말하는 것은 현재의 김정은 체제에서 개성공단 같은 경협(經協)을 확대하는 것이다. 문 대통령은 이날 경축사에서도 '북 체제 유지와 안전'을 강조했다. GDP가 세계 최악의 낙후 집단과 경협을 해 무엇을 얼마나 얻겠다는 것인가. 한 연구에 의하면, ‘개성공단을 10개 만들어봐야 한국 국민소득은 최대 0.5% 증가할 뿐이라’고 했다. 이런 경협조차 김정은이 핵을 포기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지금 북한은 핵 폐기는커녕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을 더욱더 늘리고 있다.
이렇게 대통령의 ‘평화 경제 운운’하는 8·15 경축사에 대하여, 북(北)은 그 다음날 바로 미사일 두 발을 발사하고 "삶은 소대가리도 앙천대소(仰天大笑, 하늘을 보고 크게 웃는 것)할 노릇"이라고 응답했다. 그리고 문 대통령을 향해 "정말 보기 드물게 뻔뻔한 사람", "웃겨도 세게 웃기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면서, ‘겁먹은 개처럼 짖지 말라’고 악담까지 했다. 북은 이달 초 문 대통령이 "남북 경협으로 단숨에 일본을 따라잡을 수 있다"는 얘기를 처음 꺼냈을 때도 바로 다음 날 "맞을 짓을 하지 말라"며 발사체 두 발을 쐈다. 그에 앞서 문 대통령이 "남북 대화가 다양한 경로로 이뤄지고 있다"고 말한 다음 날에도 북 외무성 국장이 "그런 것은 하나도 없다"고 일축했다. 이 무슨 옴니버스 희극인가? 민망하기 짝이 없다. 졸지에, 우리 국민은 ‘겁먹은 개’ 같은 정부의 백성이 되어 버렸다. 도대체 우리 국민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 올해 ‘8·15’는 유난히 우울한 하루였다. 대통령 경축사의 화려한 수사(修辭)의 그늘에 가린 나라의 실상과 우리 국민의 앞날이 암담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가슴 아픈 것은 국민의 분열상이다. 사실 문 정권의 정치가 분열을 조장하고 있는 것이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날 서울 도심에서 열린 ‘8·15 태극기 집회’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운집했다. 아침부터 비가 내리는 가운데 서울역에서부터 시청 광장, 광화문, 보신각 도로에 이르기까지 운집한 모든 인원은 몇 십만 명에 이르렀다.(경찰 추산 4만명) 도로를 메운 인파로 인해 그 일대는 교통이 마비된 상태였다. 우중에도 악착 같이 모여 ‘문재인 OUT’을 소리 높여 외쳤다.
광화문 광장 중앙에는 소위 ‘촛불 세력’ 집회도 열렸다. 그 숫자로 보면 태극기 집회에 비하면 아주 적었다. 그런데, KBS MBC SBS 등 지상파 3사들은 촛불집회 한 꼭지를 비중 있게 보도한 반면 태극기집회는 단 한 꼭지도 별도 방송하지 않았다고 한다. KBS는 촛불집회 보도 말미에 겨우 한마디 끼워 넣었다. 그것도 ‘시민 3천여 명이 광화문에서 집회를 열면서, 촛불 시민들과 대치하기도 했는데요.’라고 태극기 집회를 폄하하면서 축소 왜곡 보도했다. 이런 판국이다. 좌파 권력에 장악된 공중파는 실제 상황을 철저히 무시하고 자기들에게 유리한 것들만 내보낸다. 선량한 국민은 속절없이 권력의 선전선동에 휘둘릴 수밖에 없다. 지금 나라가 어디로 갈지 모른다.… 그냥 앉아서 바라볼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모든 국민이 정신을 차려야 한다! 70여 년 전, 광복과 건국의 뜨거운 열정으로 다시 깨어나야 한다!
* [황석산] ― 백두대간 남덕유산에 갈라져나온 월봉산-거망산 지맥의 막바지에 솟은 암봉
백두대간은 우리 민족 고유의 지리인식체계이며, 우리나라 지형의 골격을 이루는 가장 장대한 산맥이다. 한반도의 중추(中樞)를 이루는 백두대간은 백두산에서 시작되어 금강산, 설악산을 거쳐 지리산까지 그 길이가 장장 약 1,440km에 이르고, 남한에서 종주할 수 있는 거리는 지리산에서 강원도 고성 진부령까지 약 670km이다. 일제 강점기 일인(日人) 학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지질 구조’에 따른 ‘산맥 체계’와는 달리, 백두대간과 13정맥은 지표(地表)의 분수계(分水界)를 중심으로 ‘산(山)의 흐름’을 파악함으로써, 인간의 생활권 형성에 영향을 고려한,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루는 산지 인식의 체계이다. 이 백두대간과 13정맥의 체계는 18세기 중엽 신경준이『산경표』로 정리하였고, 19세기 중엽의 고산자 김정호가『대동여지도』로 완성하였다.
백두대간의 장대한 산줄기는 금강산―설악산―오대산―대관령―태백산―소백산―조령산―속리산―추풍령―황학산으로 줄기차게 이어져 내려오다가 충청북도 전라북도 경상북도의 경계의 꼭지를 이루는 삼도봉을 지나 덕산재-(대덕산)-신풍령을 지나오면서 덕유산 권역에 이른다. 덕유산 중봉에서 남으로 뻗어가는 대간은 등업령-무룡산-삿갓봉을 경유하여 남덕유산에 이르고, 육십령에서 잠시 숨을 고르고 영취산-백운산을 지나, 남원 봉화산을 거쳐 정령치-만복대―노고단에 오르면서 지리산 권역이 이른다.
황석산(1,190m)은 백두대간 남덕유산에서 갈라져 나온, 그 남녘의 지맥에 우뚝 솟은 암봉이다. 황석산은 백두대간 남덕유산(1,507m)에서 남쪽으로 뻗어 내린 월봉산(1,279m) 지맥에서 서쪽으로 갈라져 나온 거망산 (1,184m) 줄기의 가장 끝자락에 솟구친 암봉이다. 월봉산 아래에서 동쪽으로는 갈라져 나가는 산줄기에는 금원산(1,353m)-기백산(1,330m)이 자리하고 있으며, 이 산줄기의 남쪽 끝에 봄이면 철쭉꽃으로 장관을 이루는 산청 황매산(1,108m)이 있다. 황석산 지맥과 기백산 지맥의 사이의 계곡이 용추계곡이다. 경상남도 함양군 안의면과 서하면 경계에 자리 잡은 황석산과 거망산은 자연의 절경을 두루 갖춘 명산이다. 이 황석산 봉우리는 덕유산에서도 선명하게 보인다.
가을 철, 거망산에서 황석산으로 이어지는 능선에는 광활한 억새밭이 장관이다. 울창한 산림, 기암절벽의 암봉, 광활하게 펼쳐진 주릉, 억새와 철죽, 이와 더불어 겨울철에는 적설량이 많아 환상적인 설경이 기암 노송과 절경을 이룬다. 백두대간과 황석산 줄기 사이에는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강’의 물줄기가 흐르는 계곡이요, 황석산과 기백산 사이에는 그 유명한 ‘용추계곡’이 있다. 거망산은 6·25때 빨치산 정순덕이 활약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함양의 안의면 화림동에는 여덟 개의 못을 비롯하여 권역에 여덟 개의 아름다운 정자가 유명하다. 농월정, 동호정, 거연정, 군자정 등은 이 지방 정자 문화를 대표한다.
황석산 정상 가까운 암봉을 중심으로 장대하게 축조된 2.7km의 황석산성(黃錫山城)은 함양 땅 ‘안의’ 사람들의 지조와 절개를 상징하는 중요한 유적이다. 정유재란 때 수많은 왜군에게 맞서 관민이 하나가 되어 끝까지 항거하여 왜군과 싸웠던 전투의 현장이다. 산성이 함락되자 많은 사람이 죽음을 당하고 부녀자들은 천길 절벽에서 몸을 날려 황석산 북쪽 바위 벼랑을 핏빛으로 물들였다고 전한다.
* [산으로 가는 길] ― 나라 걱정에 무거운 가슴, 남도의 명산을 찾다
오전 7시 35분, 우리의 <금강버스>(기사 권영길)는 서울의 ‘군자역’을 출발했다. 오늘도 아침부터 여전히 뜨거운 날이다. 이미 입추(8.8)가 지났지만 연일 이어지는 폭염이다. 우리의 버스는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일로 질주하여 천안에서 대전-통영고속도로에 진입했다. 도로의 교통 사정은 원활하여 막힘이 없었다. 고속도로 ‘금산 인삼랜드휴게소’에서 차를 세우고 잠시 휴식을 취했다. 계속 남으로 질주하는 버스는 서상I.C에서 26번 국도로 내려서 가다가 산행들머리인 ‘우전마을’에 도착했다. 오늘도 불볕더위가 기승을 부렸다. 맑은 하늘에서 쏟아지는 뜨거운 태양의 불화살이 가차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 [산행 들머리 우전마을] ― ‘거연정’이 있는 경상남도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오전 10시 45분, ‘우전마을’ 초입의 주차장에서 산행에 돌입했다. ‘우전마을’은 남강 상류 ‘거연정(居然亭)’이 있는 봉전리 26번 국도에서 1차로 포장길을 따라 한참을 들어간 위치에 있다. 하늘은 맑고 햇살은 눈부시게 화사했다. 아직도 따가운 햇살은 한여름의 성깔을 그대로 지니고 있었지만 맑고 신선한 바람결이 마음을 한결 가볍게 했다. 대부분이 농가인 우전마을은 길이 잘 포장되어 있고 모든 집들이 아주 산뜻하게 정비되어 있으며 집 마당에는 고급 승용차들이 눈에 띄었다. 옛날에는 첩첩산중에 박힌 천하의 깊은 산골 마을이 이렇게 윤택한 농촌이 되었다. 나라의 발전상을 몸으로 느끼게 하는 풍경이다.
눈부신 팔월
마을 한 가운데 포장된 길을 지나서 좌우가 울창한 숲으로 들어간다. 하늘은 청명하고 눈부신 햇살이 따갑게 쏟아지는 날이다. 그러나 한여름 숲길은 신선했다. 완만하게 이어지는 도로의 오른쪽 아래에 계곡이 있다. 물소리도 들린다. 바로 ‘시구목골 봉전계곡’이다. 그렇게 포장된 숲길을 따라 오르다가 계곡의 다리를 건너 몇 걸음 올라가니, 산길로 들어가는 이정표가 있다. 우전마을에서 1.9km 올라 온 지점이다.
* [본격적인 산길] ― 시원한 숲그늘, 그러나 가파르고 험한 바위와 돌밭길
오전 11시 25분, 본격적인 산길로 접어들었다. 숲은 울창한 녹음을 이루고 있었다. 가파른 나무 계단을 지나고 나니, 크고 작은 돌들이 험하게 널린 산길이 이어진다. ‘너덜길’의 험로가 시작되었다. 길은 완만하게 오르는 듯하다가 금방 가파르고 험한 바위와 돌밭으로 이어진다. 다리에 산의 무게가 가해지기 시작한다. 숨이 차고 다리가 팍팍하지만, 다행이 울창하고 신선한 숲이 따가운 햇살을 가리고 있으니 이마를 스치는 대기는 아주 쾌적한 느낌이다. 험한 산길의 오르막을 치고 오른다. 몸은 더워지고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대원들이 걸음을 멈추고 숲 그늘에서 배낭을 내려놓고 휴식을 취했다.
* [황석산성 아래 <피바위>] ― 정유재란 왜적을 맞아 장렬하게 싸왔던
1,200고지의 황석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산길이다. 이어지는 가파른 돌밭 길을 올라 오전 11시 50분, ‘피바위’ 이정표 앞에 도착했다. 우전마을에서 2.6km 올라온 지점이다. 울창한 나무숲 사이로 올려다보니 피바위는 거대한 슬라브 암벽이 경사면을 이루고 있다.
<피바위>
‘선조 30년 정유년(1597년), 조선을 다시 침략한 왜군 14만 명을 맞아 조선의 관민 2만 7천명이 이곳 황석산성에서 처절한 전투를 벌여 수많이 사람들이 목숨을 잃은 현장이다. 그해 음력 8월 16일 왜장 가토오 기요마사, 구로다 나가마사가 대군을 동원하여 황석산성을 공격해 왔다. 이때 안의현감 곽준과 전 함양군수 조종도는 소수의 관군과 인근 7개 고을의 백성들을 모아 성을 지키기로 결의하고 관민남녀 혼연일체가 되어 조총으로 공격해 오는 왜군과 맞서 활과 창, 혹은 투석전으로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성이 함락되자 성안의 부녀자들은 왜적의 칼날에 죽느니 차라리 깨끗한 죽음을 택하겠다고 수십 척의 높은 바위에서 몸을 던져 순절하고 말았다. 그때의 많은 여인들이 흘린 피로 벼랑 아래의 바위가 붉게 물들었다.’고 전한다.
입간판에 그 내력을 적어놓았다. 피바위 위로는 수십 미터의 길고 가파른 벼랑이 산성으로 이어진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때의 상황을 연상해 보았다. 아직도 왜란은 우리 역사에 시퍼런 상처로 남아있다. 아픈 역사다. 일제강점으로 인한 지울 수 없는 상흔이 지금도 우리 삶을 뒤흔들고 있지 않은가. 이 아픈 역사의 응어리를 어떻게 풀어낼까. 그런데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요즘 ‘일본’을 두고 우리끼리 적전 분열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심정이다. …울창한 숲, 초록의 나뭇잎이 바람결에 하늘거린다. 뜨거운 숨을 토해낸다.
피바위 위에 있는 산의 능선에 올라섰다. 가파르게 이어지는 오르막 바윗길이다. 경사가 심한 곳에는 안전자일을 설치해 놓기도 했다. 그 능선 길의 왼쪽 아래가 바로 피바위 절벽이다. 바위를 타고 오르는 산길이다. 이정표가 있는 지점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산행을 이어나갔다. 산길이 워낙 경사가 심하여 길은 지그재그로 올라간다.
* [황석산성 남문터] ― 백두대간 육십령으로 통하는 길목의 요새지
오후 12시 20분, 황석산성(黃石山城) 남문(南門) 터[址]에 올랐다. 가파른 능선 위에 쌓은 석축 사이로 통로가 있다. 석축 사이의 통로 위에 남문이 있었던 곳으로 생각된다. 여기서부터 산성의 시작되는데, 그 위로 반듯하고 완강하게 쌓아올린 산성이 완만한 경사를 이루면서 산정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파란 하늘 아래 눈부신 태양, 폭이 넓은 석축 산성이 펼쳐졌다.
황석산성 남문터 - 멀리 백두대간 <영취산>
황석산성은 백두대간 육십령으로 통하는, 이곳 함양군 서하면 봉전리 요새지에 축조된 삼국 시대 고성으로, 고려 시대를 거쳐 조선 초기에 고쳐 쌓았으며, 지금은 사적 제322호로 지정되어 있다. 산 정상을 중심으로 능선을 따라 계곡을 감싸듯 쌓은 포곡식산성으로 성벽의 길이 2.5㎞, 폭이 3m에 이른다. 성 안에 맑은 물이 흐르는 작은 계곡이 있어 요새로서 가치가 높은 성이다.
선조 30년(1597) 정유재란, 왜군이 다시 침입하자 함양 군수 조종도와 안음 현감 곽준은 호남과 영남을 잇는 요새인 이곳을 왜군이 반드시 노릴 것으로 판단하고 군민을 이끌고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맞서 싸웠다. 왜군에 비해 중과부적이기도 했지만, 김해 부사 백사림이 ‘성 밖으로 나오면 잡지 않겠다’는 왜군의 속임수에 빠져 성문을 열고 도망치는 바람에 전열이 무너져 함락되었고, 조종도와 곽준은 장렬히 전사했다. 피바위는 당시의 상황을 말해주는 유적이다.
산성은 산의 능선을 타고 황석산 정상까지 이어진다. 우리는 산성이 아닌 숲 속의 등산로를 따라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처음 숲길은 평탄하거나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올라간다. 얼마 가지 않아 거북바위(→0.6km)와 정상(→0.7km)으로 갈림길이 나왔다. 거북바위는 정상의 북쪽 능선에 있는 암봉이다. 우리는 정상을 오르고 난 뒤에 그리로 갈 예정이다. 정상으로 가는 산길은 숨이 턱에 차오르는 가파른 오르막길이었다. 길은 멀고 험했다.
* [황석산성 동문터] ― 황석산 정상과 남봉 사이의 안부
오후 12시 55분, 산성의 동문지(東門址)에 도착했다. 우전마을에서 4.4km 올라온 지점, 이곳에서 반대편 동쪽으로 내려가면 용추계곡의 하류의 안의면 유동마을(→4.km)로 내려간다. 산길의 교차점이다. 파란 하늘, 작열하는 태양, 눈부시게 밝은 한낮, 사방이 환이 열린다. 성곽의 통로 좌우로 단단한 화강암으로 산성이 축조되어 있었다. 북쪽으로 황석산 정상의 암봉이 하늘에 닿을 듯이 솟아 있고 성곽의 남쪽에는 만만치 않은 기세의 남봉이 솟아있다. 그러므로 이곳은 정상과 남봉 사이의 안부에 해당한다. 잠시 사방을 조망하며 머물렀다.
황석산성 동문터[址] 갈림길 (안부)
남봉 성곽에서 올려다 본 <황석산> 정상
동문지에 남봉으로 이어진 <황석산성>
정상은 억센 바위절벽을 이루고 있으므로 이곳에서 바로 올라갈 수가 없다. 잠시 숲길로 우회하여 가면, 거망산(4.2km)으로 가는 길과 정상으로 올라가는 갈림길(이정표)이다. 거기에 올려다보니 하늘을 찌르는 암봉이 시선을 압도한다. 정상을 오르는 길은 직벽에 가까운 가파른 바위에, 시설된 철계단이다. 아득하게 올려다 보인다. 하얗게 빛나는 가파른 계단을 조심스럽게 오른다. 계단의 좌우에는 철봉을 박아 안전대를 설치해 놓았고 더 가파른 곳에는 자일도 갖추어져 있다. 그러나 워낙 계단이 좁고 경사가 급해 오르내리는 사람이 비켜가기도 힘들다. 정상으로 오르는 암봉 길 무척 위태로웠다.
1,192m 황석산 정상으로 올라가는 <천국의 계단>
* [황석산 정상, 암봉이 조망] ― 천하 사방의 산들이 파노라마를 이루고 있었다
오후 1시 5분, 황석산(1,192m) 정상에 올랐다. 장방형의 작은 정상석을 가장 높은 바위에 부착해 놓았다. 몇 개의 큰 바위가 모인 곳이라 정상석도 따로 세울만한 공간이 없다. 여러 사람이 함께 머물 수도 없는 좁은 공간이다. 시차를 두고 오르는 대원들에게 인증샷을 눌러 주었다.
황석산(黃石山) 정상에 서면, 천하 사방 산천(山川)이 한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하늘이 맑고 공기도 청정하여 시야가 환하게 열려온다. 우선 가까운 산의 능선, 남쪽으로는 우리가 지나온 산성의 동문지(東門址)와 능선을 따라 ‘남봉’으로 올라가는 성벽이 보이고, 북쪽으로는 정상에서 이어지는 성곽과 기차게 솟아있는 ‘거북바위’-‘북봉’, 그 뒤로 1,245봉-거망산으로 이어지는 장대한 초록의 능선이 용틀임하고 있다. 그리고 그 뒤로 멀리 덕유산의 거대한 산체까지 시야에 들어온다. 장대한 첩첩청산의 파노라마가 아주 장관이다!
정상에서 바라본 <남봉>
정상에 바라본 <북봉>-<거망산> (산줄기) / 그 뒤에 멀리 백두대간 <덕유산>
동북쪽에는 월봉산(1,279m) 아래에서 갈라져 나온 기백산(1,330m)의 산줄기 남하하고 있는데, 눈 아래 동쪽은 용추계곡이 있는 산곡으로 함양군 안의면 일대의 농경지와 촌락이 선명하게 내려다 보인다. 그 뒤로 멀리 가야산(1,430m)의 장대한 산체가 시야에 들어왔다. 백두대간 무주의 대덕산-초점산에서 동남쪽으로 갈라져 나온 이 산줄기는 거창 수도산(1,317m)-가야산-합천 우두산(1,046m)-오도산(1,134m)으로 이어진다. 가야산지맥이다.
안의면 일대 - 그 뒤 멀리 가야산
고개를 돌려 서쪽을 바라보면, 남덕유에서 이어지는 백두대간의 장대한 산줄기가 포진하고 있다. 특히 육십령을 지나온 백두대간 영취산-백운산(1,279m)의 장엄한 산줄기가 건너다보인다. 그 산 아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가 흰줄을 긋고 지나가고 있다. 저 백두대간과 황석산 지맥의 사이가 바로 서상면-서하면 일대의 남강 상류 계곡이다. 농월정, 군자정, 거연정이 있어 아름다운 비경을 간직하고 있는 곳이다.
<백두대간>, 그 아래 대전-통영간 고속도로 - 발아래 <우전마을>
* [가파르고 험난한 급전직하의 내림길] ― 안부의 숲그늘에서 점심식사
정상 조망을 마치고 다시 철계단을 타고 내려와, 이정표 갈림길에서 거망산 가는 길로 접어들었다. 암봉의 능선은 험준하여 산길은 산비탈에 나 있는 우회로이다. 아래로 쏟아지는 길은 경사가 아주 급했다. 스틱을 의지하여 조심스럽게 내려간다. 왼쪽 아래는 절벽이다. 아주 힘겨운 산길이다.
오후 1시 30분이 훌쩍 넘은 시각, 많이 지치고 배가 고팠다. 서둘러 가파른 길을 내려와 안부의 숲 그늘에 자리를 잡아 점심식사를 했다. 그 숲 자리가 넓어 모든 대원들이 한 자리에 앉아 식사를 했다. 각자 준비해 온 음식이 다양했다. 한 자리에 내어 놓고 서로 환담하며 정겹게 정성을 나누었다. 거기에다 유 대장이 권하는 시원한 막걸리 한 잔은 더위와 갈증을 씻어내는 데 아주 그만이었다.
* [절묘한 형상의 거북바위] ― 황석산 암릉의 진풍경을 바라보며 …
점심식사 후 산행이 시작되었다. 가파른 산길이다. 산성의 석축은 암봉의 절벽에 이어지므로 등산로는 산기슭의 길로 우회한다. 가파르게 올라가는 산길이다. 금방 식사를 끝낸 뒤라 몸이 무겁고 발걸음이 만근(萬斤)이다. 오늘 황석산의 산길은 그 육중하고 가파른 암산이므로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한참을 경사면을 오르고 나서 또 하나의 높은 암봉에 올랐다. 그 암봉 위에 커다란 바윗덩어리가 얹혀 있다. 그 형상이 거북모양을 하고 있어 ‘거북바위’라고 부른다. 암봉에서 바라보니 우리가 올랐던 황석산 정상의 암봉과 그 뒤에 이어진 남봉까지 시야에 들어왔다. 황석산 암릉의 진풍경이 장관이다. 유형상 대장과 류경 대원은 거북바위에 올라가 포즈를 잡기도 했다.
<거북바위> - 그리고 황석산 정상과 그뒤 남봉의 암릉
황석산 정상의 암봉과 그 뒤의 남봉
[줌인] 황석산 암봉의 위용
다시 내려가는 산길, 급전직하의 절벽 같은 산록을 따라 내려가는 길이다.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는 산길이다. 황석산, 과연 명불허전이다! 그 위위한 정상의 산봉과 상하로 용틀임하는 듯한 암릉! … 산록에 나 있는 급경사의 험로는 엄청난 체력을 요구한다. 그렇게 한참을 내려오니 다시 가파른 오르막길이다. ‘북봉(北峯)’을 우회하는 산길이다. 비록 시원한 숲길이기는 하지만 경사가 급한 산길은 다리에 엄청난 고통을 안겨주었다. 일찍이 자연인을 자처하고, 산을 좋아하고 산을 오르는 것은 큰 낙으로 삼은 호산아, ‘사서하는 고생’이니 당연히 감당하는 수밖에 없다. ‘고통의 축제’, 온몸에 땀이 솟고 뜨겁고 거친 숨이 쏟아져 나온다.
* [엄청난 절벽길을 올라와서] ― 초록의 숲그늘, 토산의 흙길이 이어지다
오후 2시 30분, ‘거망산 →3,8km’를 가리키는 이정표 앞에 이르렀다. 그 사이 우리는 북봉을 우회하여 지나온 것이다. 여기서부터 산길은 토산의 흙길이었다. 산길은 완만하게, 약간의 오름내림이 있다. 지금까지의 험악한 바윗길은 아니었다. 하산과 귀경할 시간을 고려하여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계획대로 거망산까지 종주하기로 한 일군의 대원이 속보로 숲길의 바람을 갈랐다. 그리고 중간의 갈림길에서 하산할 대원들은 뒤에 따라오고 있었다. 선두그룹이 ‘뫼재’를 지났다. 이곳은 용추계 ‘신내골’로 내려가는 갈림길이다. 초록의 숲길 능선을 따라 거침없이 내달았다.
* [1,154고지의 이정표 갈림길] ― 거망산 1.8km, / 불당골로 내려가는 길
오후 3시 24분, 선두 그룹이 1,154고지의 이정표 앞에 도착했다. ‘용추계 불당골(→3.8km)’로 내려가는 갈림길 지점이다. 여기서 계속 직진하여 거망산을 경유하여 하산하는 경우 그 거리가 약 6km가 넘는다. 거리 상, 하산 시간이 매우 늦어질 듯했다. 숙의 끝에 김재철·유형상 대장, 강완식, 류 경, 박현주, 이경숙 대원이 원래 계획대로 거망산 종주를 하기로 하고 서둘러 떠났다. 여기서 거망산은 1.8km, 그 중간에 황석산 줄기에서 가장 높은 산봉을 넘어야 한다. 거망산(1,184m)보다 해발 고도가 높은 이 산봉은 이름이 없어 그냥 ‘1,245고지’라고 부른다. 그 연유는 알 수 없다.
갈림길에서
* [가을이면 억새의 장관을 이루는 거망산] ― 무학대사의 중생제도의 일화가 전하는
거망산(擧網山)은 산의 형상이 ‘그물[網]을 쳐놓은[擧]’ 것과 흡사하다 하여 붙어진 이름이라고 한다. 유서가 있는 산봉이다. …‘조선조 초기 무학대사가 정도전과의 알력으로 이곳 거망산에 은신암을 지어 몸을 숨기고 수도하여 깨달음을 얻은 뒤 중생제도의 그물을 펼쳤다 하여 그렇게 불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1,245고지와 거망산으로 가는 능선과 그 주변은 광활하게 펼쳐진 억새밭으로 유명하다. 가을이면 장관을 이룬다.
그리고 거망산은 6·25전쟁 후 빨치산 정순덕(1933년 6월~2004년 4월)이 은거하며 활약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정순덕은 이곳 거망산을 중심으로 활동하던 중, 국군 1개 소대를 잡아 억류한 뒤 무장해제 시켜서 돌려보냈다는 일화가 전한다. 그 후 정순덕은 이홍이와 함께 1963년까지 지리산에서 최후까지 버텼으나 11월 12일 새벽 생가 근처인 지리산 삼장면 상내원리에서 국군과 교전 끝에 부상을 입고 체포됐다. 그로부터 41년이 지난 2004년, 그녀는 72세의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경남일보」)
거망산에서 바라본 <1,245고지>의 장엄한 능선
* [대원들의 하산점] ― 명승 ‘용추폭포’ 아래― 용추사 ‘일주문’의 내력
우리 대원들은 거망산을 등정하고 난 후, ‘용추사 일주문’으로 하산했다. ‘용추사 일주문’은 원래 ‘德裕山 長水寺 曹溪門’이다.(지금도 현판은 그렇게 남아있다) 그 내력은 다음과 같다.
용추사 일주문 <德裕山長水寺曹溪門>
‘덕유산 장수사’는 지금으로부터 1,500여 년 전인 신라 소지왕 9년(서기 487년) 각연조사에 의해 창건된 고찰로서, 지리산과 덕유산에 산재한 많은 사찰을 말사로 거느렸으며 이 곳 심진동 계곡 주변에도 열 개가 넘는 암자를 거느린 큰 절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6·25 전란 때 장수사와 암자들이 다 소실되었고, 현재의 ‘일주문(一柱門)’만이 남아있다. 용추사(龍湫寺)는 원래 장수사에 딸린 작은 암자였다. 장수사가 일주문만 남기고 모두 타버리자, 1959년에 중건하면서 이름을 용추암에서 용추사로 바꾸었다.
* [길고 험난한 황석산 산행을 마치고] ― 용추계, 따뜻하고 정겨운 뒤풀이 자리
1,154고지 갈림길에서 불당골로 하산한 대원들은 오후 5시 10분, 청량사-장자벌마을로 무사히 하산을 완료했다. 장자벌마을은 일주문 아래의 용추계곡에 있는 마을이다. 몇몇 대원은 용추계 맑은 물에 잠시 몸을 담그고 ‘시원한 물맛’을 보기도 했다. 거망산 등정 대원들은, 오후 6시가 넘어 용추사 일주문 주차장에 도착했다. 주차장에 대기하고 있던 버스를 타고 6시 30분, 장자벌마을 <천궁식당>에 모인 본 대원들과 합류했다.
용추계곡
용추계 <천궁산장>
김준섭 회장을 비롯한 본 대원들은 장자벌마을, 계곡 옆 <천궁산장> 야외식탁에 자리를 잡고 황석산 산행 뒤풀이를 시작했다. 불판에 생오리고기를 굽고 별도로 오리백숙을 시켜 모든 대원들이 함께 따뜻한 음식을 나누며, 여정의 피로를 풀고 환담을 했다. 오늘 유난히 힘들게 산행한 대원들이 많았다. 차가운 맥주 한 잔이 더운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렸다. 그래서 더욱 고마운 자리가 되었다. 오늘 ‘하산 뒤풀이’ 자리는 신시호 대원이 마련했다. 어느 때보다도 힘든 산행을 했으므로, 모두 목마르고 기진한 때, 신 대원의 호의가 모든 대원들을 행복하게 했다. 그 정성에 깊이 감사를 드린다.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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