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창군수 권두문 호구일록 요약
8월 7일
왜적 선봉대가 백봉령을 넘어서 정선으로부터 이날밤에 평창으로 들어왔다.
8월 9일 응암굴로 피신하고 왜군과 사흘간 싸우는데 항복을 권하는 문서를 가지고 온 왜군의 목을 베고 끝까지 항전하기로 기치를 높였다.
8월 10일 나흘 동안 왜군은 모두 도착한 듯하다. 본영에 진을 치고 동굴로 피난을 한 군민을 왜적이 적발하고 포로로 잡아갔다.
8월 11일
평창의 응암굴(鷹巖窟)은 윗 굴과 아랫 굴로 나누어 졌는데 윗 굴은 민간인이 피신하는 민굴로 삼고 아랫 굴은 관군이 피신하는 관굴로 삼아서 피신해 있는데 왜적은 응암굴을 공격해서 대장인 지사함과 병사 이인서, 우응민이 군사들과 함께 전사했다. 왜군은 나에게는 부상을 입히고 아들 권주와 함께 포로가 되고 나의 처 강소사는 왜군의 포로가되어 흉한 꼴을 보느니 차라리 죽음을 택하고 응암굴 앞 절벽에서 사천강(현 평창강) 맑은 물로 뛰어내려 목숨을 끈었다. 그날 우리는 평창 감옥에 투옥되었다.
8월 16일
왜군은 원주로 가는데 중간에 조선군이 매복을 하고 있을까 염려가되어 영월과 제천으로 돌아서 원주로 가기로 하고 우리 일행을 영월로 압송하였다.
8월 19일
17일과 18일 이틀간 왜군은 영월에 도착하고 오늘 낮에 왜군이 영월 사람들을 잡아서 옥에 투옥시키는데 영월 선비 고종원과 고종길 두 형제가 잡혀 왔다. 두 형제는 나를 보자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기를 "공께서는 어쩌다 이렇게 잡혀왔소?,,라고 물어보자 나는 두 형제에게 죄 지은 것이 있어서 내가 대답하기를 "나는 평생에 악업을 쌓은게 많아서 왜군이 휘두르는 칼날에 벌써 죽을번 했는데 오늘까지 나는 이렇게 살아 있으나 내일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소,, 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고종원이 말하기를 "공께서 악업을 쌓은게 아니라 내 제남(弟男: 남자 동생)의 운명입니다.,,라고 하였다. 내가 다시 말하기를 "영재(令第) 고종경의 죽음을 생각하면 슬프기 그지 없고 지금도 생각하면 나의 과실이 적지 않다.,,라고 하자 고종원이 다시 말하기를 "내 동생이 죽은 것은 애매하다고는 하나 이미 구명의 서찰이 도착하기 전에 형이 집행되고 죽었으니 이 어찌 운명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지 않고 공의 과실이라고 탓 하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8월 23일
왜군은 제천과 좌변면(左邊面 : 주천면)의 갈림길가의 촌락에서 곡식과 재물을 빼았고 간혹 여자를 끌고오는 것을 봐다. 자정쯤 왜군은 좌변면에 도착하고 다른 왜군과 합류하고 원주로 이동을 하는데 짐을 지고 가는 자는 모두 조선 사람들 뿐이다.
8월 24일
신림을 지나는데 왜군은 조선인 10여명 정도의 수급을 바위 위에다 올려 놓은 것을 봐다.
8월 25일
왜군의 통역을 맏은 왜인이 원주 감영에 갔는데 원주목사 김제갑과 휘하 조선군은 한명도 없고 원주읍성이 비어있자 원주읍성을 수색하던 왜인 통역관은 노인과 함께 있던 어린 아이의 목에 칼을 드여대고는 원주목사가 어디에 있냐고 노인을 다그치자 겁에 질린 노인은 원주목사 김제갑은 이틀 전에 군사를 이끌고 치악산에 있는 영원산성으로 들어간다고 하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하였다.
8월 26일
어제 저녁에 왜군들이 조선 군사들을 토벌하기 위해서 영원산성으로 갔는데 오늘 오전에 왜군 한명이 영원산성에서 가져온 머리 하나를 노파에게 보이며
누구냐고 묻자 노파가 말하기를 원주 목사 김제갑의 아들 이라고 말해주었다.
9월 2일
나는 고종원, 고종길 형제와 함께 폭우가 쏫아지는 깊은 밤에 감옥의 벽을 허물고 탈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