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 후유증으로 30미터도 못뛰는, 아니 뛸 엄두도 못내던 내가 마라톤 하프코스를 완주했고, 내년에는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기 위해 풀코스에 도전할 계획입니다."
백발의 정갑주씨(69·교동월촌동 입석마을)는 '아직은 소년'임을 자처하며 노익장을 과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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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택 정원에 선 정갑주·이남금씨 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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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홍성근 | 나이에 비해 10살 이상 더 들어보이는 정씨가 건강에 대한 자신감을 되찾고, 새로운 희망을 갖게 된 계기는 마라톤과 인연을 맺게 되면서부터다.
걷기조차 힘든데 마라톤이라니
1985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부상을 입은 정씨는 2년 전만 해도 걷기조차 힘겨운 상태였다. 그러나 건강을 회복해야 한다는 생각에 2000년 11월부터 집에서 가벼운 운동을 시작했다.
처음 시작한 것이 풍선차기. 이듬해 3월까지 발로 차고 이마로 받아보고 단순한 운동이지만 흥미를 느끼며 겨우내 같은 운동을 반복했으나, 여전히 뛰기는 어려운 처지였다. 그런데 대전 대덕연구단지에 근무하는 정씨의 딸(나현)이 돌연 마라톤을 권한 것이다.
30미터도 못뛰는, 아니 뛸 엄두도 못 내던 정씨였지만 딸의 집요한 권유를 뿌리치기엔 마음 한구석에 아쉬움도 남았고, 이대로 노인으로 주저앉고 싶지도 않았다.
주말이면 딸이 대전에서 내려와 어거지로 정씨 내외를 부축하고 걷고 뛰기를 반복했고, 운동이 거듭될수록 점점 뛰는 거리가 늘어나면서 새로운 기운과 자신감이 솟았지만, 뛰는 거리를 4㎞로 늘리면서 요통이 도졌고 통원치료를 받아야 했다.
대전 7㎞마라톤 첫 출전 완주
무리한 운동으로 인한 요통으로 정씨가 고생을 하고 있을 즈음, 야속한(?) 딸은 5월 30일 대전에서 개최되는 독거노인돕기 마라톤대회에 덜컥 아버지를 출전시키기로 결정하고 접수증을 내민다.
"꼭 도살장에 끌려가는 심정이었죠, 나는 한마디로 그날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대전종합운동장에 내린 게 아니고 부려진 겁니다."
당시를 회상하며 정씨는 고개를 설래설래 젖는다.
꾸부정한 백발노인 정씨는 수천명의 패기 넘치는 젊은이들 틈에서 아픈 허리를 두 손으로 감싸쥔 채 자신과의 싸움을 벌여야 했다. 정씨가 달려야 하는 코스는 7㎞. 허리에서 손을 떼면 주저앉아버릴 것만 같은 상태의 통증을 참아가며 억지로 뛰었다.
얼마를 달렸을까? 3.5㎞반환점이 나오고 뛰어온 거리를 되돌아갈 자신이 없었다. 마침 자원봉사 아주머니의 "쉬어가도 완주 메달은 준다"는 말이 귀에 거슬려 '마라톤은 나와의 승부다'는 생각을 되뇌이며 입술을 깨물었다.
"할아버지 힘내세요.", "할아버지 2㎞ 남았어요 화이팅."
격려의 소리를 들으며 정신을 가다듬을 즈음 멀리서 골인지점을 알리는 마이크소리가 들려왔다.
'아! 내가 7㎞를 완주했구나' 정씨는 자신도 모르게 허리를 감쌌던 손을 놓고 통증도 잊는 채 1초라도 단축하겠다는 일념으로 골인지점을 통과하고 주변사람들의 부축으로 그늘에 눕혀졌다.
"몸을 움직일 수 없었지만 다른 세계가 보일 정도로 기분이 좋고 머리는 구름 속을 떠도는 기분이었습니다"라며 당시의 감동을 엷은 웃음으로 회상한다.
부인 이남금씨 전국대회 입상
사실 마라톤 출전은 정씨의 부인 이남금씨(69)가 먼저다. 지난해 4월15일 전군간 건강마라톤 5㎞코스에 출전한 것. 첫 출전이다보니 달렸다기보다 걸었던 거리가 많았지만 어쨌든 완주를 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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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갑주·이남금씨 부부가 각종대회에 출전해 받은 상장과 상패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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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홍성근 |
| 이를 계기로 지난해 6월에는 바르셀로나올림픽 제패기념 8회 SAKA 서울하프마라톤 대회 60대 여자부에서 당당히 1위를 거뒀고, 지난 3월 3.1절 기념 하프마라톤과 지난 4월 제주축제 하프마라톤에서 2위의 성적을 거두는 등 두각을 나타냈다.
전국대회 부부동반 출전 화제 낳아
이후 정씨 부부는 전국 유수의 마라톤대회에 부부동반으로 출전해 일약 스타덤(?)에 올랐다. 나이에 비해 노령으로 보이는 탓에 항상 최고령자로 대우를 받았고 카메라 플래시 세례와 인터뷰를 반드시 거쳤다.
"마라톤을 하면서 77세의 노인을 만났죠, '춘추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묻길래 '69세 소년'이라고 답했더니 그분이 자신은 나이에 비해 젊다고 좋아하시더군요.
또 이런 때도 있었죠, 마라톤을 하면서 걷고 있는 젊은이에게 "걸으면 나한테 떨어져"했더니 사력을 다해 뛰고는 "할아버지 때문에 뛰었네요'하면서 인사를 했어요"하더군요. 나이먹은 사람에게는 희망을 주고, 젊은이들에게는 기운을 줄 수 있어 보람을 느낀다고 마라톤이 주는 또 다른 매력을 밝힌다.
어느 대회에서는 부인과 같이 뛰고 있는데 자신이 너무 늙어보이는 탓에 방송해설자가 "부녀가 같이 뛰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멘트를 했다면서 "젊은 사람과 사니 좋다"고 말하자 옆에 있던 부인 이씨가 "머시 그려, 동갑임서"라며 곱게 눈을 흘긴다.
정씨의 남다른 한글사랑
정씨는 마라톤에 출전하면서 '드높이자 한글날'을 가슴에 달고 전국 방방곡곡을 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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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갑주씨는 남다른 한글사랑으로 한글학회로부터 <우리말글 지킴이>로 위촉됐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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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 홍성근 | "세종 큰임금께서 우리 겨레살이에 어울리는 바른 소리글을 만드셨고, 겨레의 빛인 한글날을 어찌 외면한단 말입니까? 국경일은 그 나라의 바탕이 되는 문화, 삶과 관련한 역사가 깃들인 날이 돼야 합니다, 우리 글날이 있다는 건 행복한 것입니다"라고 남다른 역사관과 한글사랑의 마음을 표현한다.
정씨의 이같은 노력을 기리기 위해 한글학회(회장 허웅)은 지난 8월 31일 정씨를 <우리말글 지킴이>로 위촉하기도 했다.
지난 3일 김제에서 열린 지평선마라톤대회에서 2시간을 조금 넘긴 기록으로 하프코스를 완주한 정씨는 이달 27일 열리는 정읍 단풍마라톤대회와 11월10일 서울 남산마라톤대회에 역시 부부동반으로 출전할 예정이며, 내년 3월에 서울에서 개최되는 동아마라톤대회에는 고희의 나이로 풀코스에 도전해 '한글날을 국경일로' 만들기 위한 염원을 불사를 계획이다.
"달리면 내 세계가 보인다"
올해 초 고성마라톤대회에 출전했던 정갑주씨는 같이 출전했던 부인 이남금씨가 10㎞를 완주하고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골인하자 42년 전의 새신부를 맞는 기분으로 아내를 얼싸안았다고 한다.
마라톤으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 정갑주씨는 말한다. "몸이 아프다고, 늙었다고 체념하면 안된다, 달리자! 달리면 내 세계가 보인다"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