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학교 규칙>에 의하면, 의학교에서는 동물·식물·화학·물리 등 기초과학 과목, 해부·생리·약물·위생·법의 등 기초 의학 과목, 진단·내과·외과·안과·부인과·소아과·종두 등 임상 의학 과목을 가르쳤다. 당시 각광을 받던 세균학은 위생 과목에서 다루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병리학은 별개의 과목으로 독립되어 있지 않은 대신 내과, 외과, 부인과 등에서 각론으로 가르쳤을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면 의학교에서는 학생들에게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을 어떤 수준으로 가르쳤을까? 지금으로서는, 1907년 국립병원인 광제원(廣濟院)에서 일할 의사를 선발하기 위한 시험 문제가 거기에 대해 알려주는 거의 유일한 자료이다.
광제원에서는 1907년 2월 27일부터 3월 1일까지 사흘 동안 의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의사 선발 시험을 치렀다. 첫날에 해부학, 생리학, 내과학, 다음날에 안과학, 약물학, 외과학 등 도합 여섯 과목의 필기시험을 보았으며, 마지막 날에는 실기시험이 있었다. 필기시험 과목은 기초 의학과 임상 의학이 각각 세 과목으로 균형을 이루었던 셈이다. 이것은 기초 의학을 중시한 독일-일본 의학의 영향 때문이었다. (오늘날 한국에서 의사국가시험에 기초 의학 과목을 포함시키려는 노력을 벌써 30년 가까이 벌여 오고 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어느 쪽이 더 바람직할까?)
광제원 시험 문제를 보면, 당시 내과 질환으로는 장내 기생충병과 소화기 질환, 안과 질환으로는 트라코마가 크게 문제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1907년 광제원의 의사 선발 시험 과목과 시험 문제. <황성신문> 1907년 3월 1일 및 2일자 기사 내용을 정리한 것임. ⓒ프레시안
1907년의 광제원 의사 선발 시험에 응시한 의학교 졸업생들은 누구였을까? <황성신문> 1907년 3월 2일자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광제원에셔 의학교 졸업생을 택선(擇選) 임용할 터인대 초차(初次) 응시의 문제는 기위(己爲) 보도하얏거니와 자초로 시험에 입참(入叅) 학원은 4인인대 재차 시험에도 문제로 응시하야 문제상 대답이 요외(料外)에 잘된 모양이라 하는대 기(其) 문제는 여좌(如左)하고 작일에는 실지상으로 시험하는대 학원이 실지에 대하야 과연 잘할는지 시험관이 염려한다는대 기 결과는 갱탐후보(更探後報)하갯노라."
이 기사에는 의학교 졸업생 4명이 응시했다는 언급만 있을 뿐 구체적으로 이름은 거명되어 있지 않다. 의학교 제1회, 제2회 졸업생이 응시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지만 꼭 한 달 전인 1월 29일에 졸업식을 가졌던 제3회 졸업생들, 즉 장기무, 홍종은, 홍석후, 윤중익이 응시생이었을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인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응시자가 4명이었다.
또한 이 기사는 응시생들이 필기시험은 잘 치렀는데 실기시험도 잘 볼지 시험관들이 염려한다는 언급을 덧붙이고 있다. 그리고 시험 결과를 뒤에 보도한다고 했지만 보도되지 않았고, 3월 9일자에 장기무, 홍종은, 홍석후, 윤중익 등이 의학교 선배인 한우근, 윤상만, 이병학 등과 함께 육군 3등군의로 임용되었음을 보도했다.
단정하기는 어렵지만, 장기무 등 의학교 제3회 졸업생들이 광제원 의사 선발 시험에 응시했지만 합격하지는 못했고, 그 직후 군의관으로 임용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 <황성신문> 1907년 3월 2일자. 광제원은 며칠 뒤인 3월 15일 대한의원으로 흡수 통합되었으므로, 의사 선발 시험은 대한의원에서 일할 의사를 뽑는 시험이었던 것으로 여겨진다. 의학교 역시 통·폐합으로 사라질 형편에서 불안해하는 의학교 학생들을 달래려는 조치였는지도 모른다. 외과 제1문항의 즉종(卽腫)은 각종(脚腫, 다리 부종)을 잘못 적은 것으로 생각되지만 확실치는 않다. 제2문항의 궤이(潰易)는 틀림없이 궤양(潰瘍)의 오자이다. ⓒ프레시안
1905년 12월 13일의 졸업 확정 뒤 1년이 훨씬 지난 1907년 1월 29일에야 졸업식을 가진 의학교 제3회 졸업생은 불과 4명뿐이었다. 원래 입학생이 적었던 것인지, 많은 학생이 중도 탈락했는지는 알 수 없다. 졸업생 4명 가운데 장기무, 홍종은, 홍석후 등 우등이 3명이나 되었던 점도 특이하다. 이들은 1903년과 1904년 학년말 시험에서도 우등을 했다. 3년 내리 우등생이었던 것이다.
▲ <조선일보> 1934년 2월 16일자. 장기무는 2월 20일까지 세 차례에 걸쳐 "한방 의학 부흥책"을 기고하여 한의학에 관한 논쟁과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프레시안
먼저 수석 졸업생인 장기무(張基茂)는 다재다능한 사람으로 이후에 다양한 활동을 벌였다. 장기무는 1909년 한국인에 의한 최초의 의약 전문지라고 할 <중외의약신보(中外醫藥新報)>(월간)를 발간했으며, 동시에 "약업(藥業)의 부진한 정황을 연구하며 가격도 균일케 하야 남매(濫賣)하는 폐단을 교정할 목적으로" 약업단체(藥業團體)를 조직하기도 했다. <중외의약신보>는 1910년 11월 25일자 제15호에 사회의 안녕질서를 해치는 기사를 게재했다 하여 악명 높은 "광무신문지법(光武新聞紙法)"에 의해 발매 및 반포 금지 조치를 당했다. 아마도 일제의 의약 정책을 비판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또 장기무는 <조선일보>에 1934년 2월 16일부터 20일까지 3회에 걸쳐 한방의학(漢方醫學) 부흥책을 기고하는 등 1930년대의 한의학을 둘러싼 논쟁을 주도했다. 장기무는 당시 근대 서양 의학을 공부한 사람으로는 예외적으로 한의학을 배척하지 않고 포용, 발전시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한의학 논쟁에 관해서는 내년에 연재할 제2편에서 상세히 다룰 것이다.)
▲ <동아일보> 1931년 3월 20일자에 실린 장기무의 사진. 당시 직함은 광제의원(廣濟醫院) 원장이었다. ⓒ프레시안
한편, 홍종은과 홍석후는 관립 의학교와 사립 세브란스병원 의학교(1908년 6월 졸업) 두 군데를 모두 졸업한 이채로운 이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이 가운데 상대적으로 자료가 많이 남아 있는 홍석후를 통해 저간의 사정을 알아보자.
세브란스병원의 대표적인 한국인 의사가 된 홍석후(洪錫厚, 1883~1940년)의 집안은 개화기의 이름난 기독교 가문이었다. 아버지 홍준(洪埻)은 미국 북장로교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년)에게 한국어를 가르친 인연으로 기독교 신자가 되어 1892년에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그 가족은 모두 언더우드가 세운 새문안교회의 신도가 되었다. 그에 따라 홍석후는 미션스쿨인 배재학당에 입학했는데, 배재학당 선배이자 세브란스병원 의학교를 함께 졸업한 김필순(金弼淳, 1878~1919년), 김희영(金熙榮, 1879~1920년)과 배재학당 시절부터 교분을 가졌는지는 확실치 않다. 홍석후는 1918년에 배재학당 "명예" 졸업생이 된 것으로 보아 배재학당을 정식으로 졸업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 <황성신문> 1906년 10월 6일자.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학생 모집 광고. 당시 박서양(朴瑞陽, 1885~1940년)이 학감이었고, 홍석후는 교사로 활동했다. ⓒ프레시안
홍석후는 1902년 의학교에 입학했다. 에비슨이 조선에 온 1893년 무렵부터 이미 에비슨과 알고 지냈던 홍석후가 에비슨이 폄하했던 의학교로 진학한 것은 자못 의아스러운 일이다. 그렇다고 홍석후가 의학교 시절 에비슨과 인연을 끊었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홍석후가 1906년에 <신편 생리교과서>를 출판한 것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 책은 홍석후가 이미 1904년부터 에비슨의 교열을 받으며 번역해오던 것으로, 출판처도 "대한황성제중원", 즉 세브란스병원이었다. 또한 홍석후는 1906년에 에비슨의 교열을 받아 <진단학 권1>도 출간했다. 홍석후는 1906년 황성(皇城)기독교청년회(YMCA)에서 교사로 일하는 등 기독교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따라서 홍석후가 세브란스병원으로 가게 된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홍석후의 초기 의료 활동을 기록으로 파악할 수 있는 것은 <대한매일신보>의 종로자혜약방 광고를 통해서이다(제58회). 종로자혜약방은 1907년 9월 24일부터 1908년 11월 29일까지 <대한매일신보>에 150회 이상 약방(의원), 의약 서적 및 약품 광고를 냈다. 이 광고에 홍석후가 처음 등장하는 것은 1907년 10월 19일로, 서양의약방서(方書)를 번역한 <서약편방(西藥便方)>의 번역자로 소개되었으며 이때의 호칭은 "육군 군의"였다.
▲ 종로자혜약방 광고에 홍석후가 처음 등장한 <대한매일신보> 1907년 10월 19일자. 서양의약방서(西洋醫藥方書)를 번역한 <서약편방(西藥便方)>(제중원 의학원 박자혜 발행, 종로자혜약방 이관화 발매)을 광고하는 기사로 11월 9일까지 계속 똑같은 내용이 실렸다. "육군 군의" 홍석후가 번역한 이 책의 서문은 의학교장 지석영이 썼고, 의학교 교관 유병필이 교정했다. 지석영과 유병필의 소속을 의학교로 표시했고(1908년 6월부터 前 의학교로 바뀌었다), 한 달 반 전인 9월 3일 군의관에서 면직된 홍석후는 육군 군의로 나타내었다. ⓒ프레시안
그리고 11월 12일부터 11월 30일까지는 광고 내용이 구체적인 몇 가지 약을 선전하는 식으로 조금 달라지는 한편, 홍석후의 호칭도 제약감사인(製藥監査人)으로 바뀌었다.
▲ <대한매일신보> 1907년 11월 12일자. 보익환(補益丸), 회충환, 임질약 등을 광고하는 기사이다. 의학교 교장 지석영이 약효가 유효함을 증명하며 홍석후, 박자혜, 이관화가 제약감사인(製藥監査人)으로 되어 있다. 이때부터는 박자혜에게서 제중원 의학원이라는 호칭이 빠졌다. 11월 30일까지 똑같은 광고가 실렸다. ⓒ프레시안
그러다가 12월 1일자부터 홍석후의 호칭에 "제중원 의학원(醫學員)"이 추가되었다. 필자가 확인한 바로는, 홍석후가 제중원(이때까지도 세브란스병원을 제중원으로도 불렀다) 의학원(학생)으로 불린 당시 기록은 이것이 최초이다.
홍석후가 "졸업 후 종로의 상공회의소 옆에서 자혜의원(慈惠醫院)을 개업하여 성업 중이었으나, 본인이 환자를 보기에는 경험이 너무 적다는 사실을 깨닫고 에비슨에게 부탁하여 1906년 2월 1일 세브란스병원의학교에 편입하였다"라는 주장이 있다. 하지만 위에서 보았듯이 홍석후는 의학교를 졸업하고 한참 뒤인 1907년 9월부터 박자혜(朴慈惠)와 이관화(李觀化)가 개설한 종로자혜약방의 고용 의사 격으로 관계를 맺기 시작했다. 그리고 제중원 의학원, 즉 세브란스병원 학생이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은 1907년 12월 1일부터이다. 다시 말해, 홍석후는 '관립' 의학교 재학 시절인 1904년경부터 에비슨에게 지도(번역 교열)를 받았지만, 세브란스병원의 학생(의학원)이 된 것은 1907년 말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지석영이 홍석후가 사용하거나 제조한 약제의 약효가 유효함을 증명했다는 언급은 1908년 11월까지도 지속된다. 이때의 표현은 "전 의학교장 훈5등 지석영 씨 유효 증명, 의학 박사 홍석후 씨 실험방제(實驗方劑), 의학 박사 홍종은 씨 실험방제"였다. 홍석후와 홍종은에 대한 지석영의 후견(後見)과 지원은 이들의 세브란스 시절에도 지속되었던 것이다.
▲ <대한매일신보> 1907년 12월 1일자. 이때부터 홍석후의 호칭으로 제약감사인 이외에 "제중원 의학원"이 덧붙여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