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번째 시집김명환 시집 {바람가고 나도 가네} 표4의 글 마음속 ‘소’를 찾으려는 김명환의 시적 여정은 이렇게 수의를 입고 죽음을 체험하는 “조용한 평화”로 갈무리된다. 시인은 관 속을 “한겨울 이불 속”으로 표현한다. “오늘의 끝은 끝이 아니다”(「한겨울 이불 속」 1연)라는 시구에 암시되어 있듯, 죽음은 새로운 삶을 여는 과정으로 정리된다.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지려면 삶과 죽음을 둘로 나누는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분별이 들끓는 마음을 내보이는 순간,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끔찍한 사회로 돌변해버린다. (극)우와 (극)좌가 왜 틈만 나면 자기 목소리를 높여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겠는가.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우슈비츠나 광주의 비극은 지금 이 순간에 집착하는 지독한 분별심에서 뻗어 나오는 셈이다.분별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김명환의 시는 “모두 기고 아니고/ 아니고 긴 절묘한 대답”(「풀꽃에게 묻는다」)을 언제나 그 속에 내포하고 있다. 풀꽃은 선과 악을 나누는 법이 없지만, 인간은 자꾸만 풀꽃에게 선이냐, 악이냐를 묻는다. 풀꽃은 때가 되면 피어나 때가 되면 지는 일을 반복한다. 피는 것을 선악으로 판별할 수 없듯, 지는 것 역시 선악으로 판별할 수 없다. 선악을 묻는 순간 우리는 가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가르는 분별에 이르게 된다. 김명환은 무엇보다 선과 악을 나누는 이 마음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기우뚱한 균형’으로 그려낸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봄이 가면 여름이,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가면 오고/ 오면 가”(가을 봄)는 자연사물의 이치로 시인은 풍성한 시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오홍진, 문학평론가
두 번째 시집 {마지막 한 줄의 시} 판권 및 앞날개 글 표4의 글마음속 ‘소’를 찾으려는 김명환의 시적 여정은 이렇게 수의를 입고 죽음을 체험하는 “조용한 평화”로 갈무리된다. 시인은 관 속을 “한겨울 이불 속”으로 표현한다. “오늘의 끝은 끝이 아니다”(「한겨울 이불 속」 1연)라는 시구에 암시되어 있듯, 죽음은 새로운 삶을 여는 과정으로 정리된다. 죽음과 삶이 하나로 이어지려면 삶과 죽음을 둘로 나누는 분별심을 내려놓아야 한다. 분별이 들끓는 마음을 내보이는 순간, 이 세상은 서로가 서로에게 ‘적’이 되는 끔찍한 사회로 돌변해버린다. (극)우와 (극)좌가 왜 틈만 나면 자기 목소리를 높여 이 사회를 혼란에 빠뜨리겠는가. 그들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아우슈비츠나 광주의 비극은 지금 이 순간에 집착하는 지독한 분별심에서 뻗어 나오는 셈이다.분별을 넘어서는 자리에서 피어나는 김명환의 시는 “모두 기고 아니고/ 아니고 긴 절묘한 대답”(「풀꽃에게 묻는다」)을 언제나 그 속에 내포하고 있다. 풀꽃은 선과 악을 나누는 법이 없지만, 인간은 자꾸만 풀꽃에게 선이냐, 악이냐를 묻는다. 풀꽃은 때가 되면 피어나 때가 되면 지는 일을 반복한다. 피는 것을 선악으로 판별할 수 없듯, 지는 것 역시 선악으로 판별할 수 없다. 선악을 묻는 순간 우리는 가를 수 없는 것을 억지로 가르는 분별에 이르게 된다. 김명환은 무엇보다 선과 악을 나누는 이 마음을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기우뚱한 균형’으로 그려낸다. 겨울이 가면 봄이 온다. 봄이 가면 여름이,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온다. “가면 오고/ 오면 가”(가을 봄)는 자연사물의 이치로 시인은 풍성한 시의 꽃을 피워내고 있는 것이다.----오홍진, 문학평론가 김명환의 두 권의 시집 {바람가고 나도 가네}, {마지막 한 줄의 시} 보도자료 김명환 시인은 1935년 대전 학하동에서 출생했고, 진잠초등, 대전중학교, 대전고등학교, 충남대학교 철학과과를 졸업했다. 10년간 공직 생활을 거쳐, 1971부터 법무사로 종사했으며, 젊은 날 늙으면 꽃지에 살리라 했던 서산으로 2005년 황혼이사를 했다. 2016년 {한국문학시대}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는 {바람가고 나도 가네}와 {마지막 한 줄의 시}가 있고, 대전문인총연합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김명환의 시는 이미 지나온 시간을 되돌아보는 성찰의 미학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시간을 성찰하는 주체는 시간 속에서 시간 너머로 나아가는 길을 모색한다. 생명으로 태어난 존재치고 시간을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어디에 있을까. 시간 속에서 시간 너머를 들여다보는 시적 주체는 “당신이 잃은/ 당신의 소리”(「심우정사」)를 찾아 길을 떠날 준비가 되어 있다. 심우(尋牛), 곧 소를 찾는 행위는 잃어버린 소리=마음을 찾는 행위와 다르지 않다. 「심우정사」라는 시에서 시인은 이곳을 오가는 이들에게 “언짢은 것 모두 다 두고 가게나/ 터지는 분통도 두고 가게나”라고 이야기한다. 언짢은 마음을 품고 어떻게 소를 찾을 것이며, 분통을 터뜨리며 어떻게 소를 찾을까?한밤중에 들려오는 소 울음소리를 들으려면 무엇보다 언짢음이나 분통과 같은 감정들을 내려놓아야 한다. 감정은 쉬이 바깥에서 들려오는 감각에 휘둘린다. “어차피 찾아오는 심우의 소리”(같은 시)는 바깥에 매이지 않는 존재만이 온전히 들을 수 있다. 소 울음소리는 바깥에서 들려오지 않는다. 아니, 안과 바깥이 구분되지 않는 장소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온다고 말하는 게 정확하겠다. “새 소리/ 물소리/ 바람 소리”(「심우尋牛의 소리」)는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리이면서, 동시에 마음 깊은 곳에서 울려 나오는 소리이기도 하다. 어느 한쪽에 매이면 이 소리들은 쉬이 저편으로 사라져버린다. 새 소리가 물소리가 되고, 바람 소리가 되는 이치를 깨달으려면 안과 밖을 나누지 않는 마음결을 반드시 따라야 하는 셈이다. 춤추는 노부부 문양석부엉이 가슴 문양석돌덩이에도 이름 붙이며소립자의 무정설법을 조르네 부처 되는 날기다리며쓰다듬는 손길 돌의 체온- 「돌덩이」 전문 잘 한다개구리점프 구렁이 아가리로개구리점프 개구리도 구렁이도다皆부처라네- 「부처」 전문 돌덩이는 “춤추는 노부부 문양석”이 될 수도 있고, “부엉이 가슴 문양석”이 될 수도 있다. 돌덩이에 붙여지는 수많은 이름들은 하나로 환원될 수 없는 자리에 사물로서 ‘돌덩이’가 있음을 알려준다. 돌덩이 하나하나에 이름을 붙이며 시인은 “소립자의 무정설법”에 이르는 길을 찾아 나선다. 이름이란 또 다른 이름을 불러낸다. 사물에 담긴 의미는 그것을 바라보는 사람들만큼이나 다양하기 마련이다. 열 사람이 열 개의 시선으로 돌덩이라는 사물을 바라본다.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을 꼭이 눈으로 한정할 필요는 없다. 귀로 들을 수도 있고, 코로 냄새를 맡을 수도 있다. 입으로 맛을 볼 수도 있고, 온몸으로 그 촉감을 느낄 수도 있다.시인은 “부처 되는 날/ 기다리며” 하염없이 이 돌덩이를 손으로 쓰다듬고 있다. 쓰다듬고 또 쓰다듬다 보면 돌덩이도 부처가 되는 날이 오게 될까? 부처가 되어 “소립자의 무정설법”을 말하는 순간이 돌덩이에게도 오게 될까? 인간의 시간으로 셈할 수 없는 무한을 시인은 돌덩이에서 보고 있다. 중요한 것은 돌덩이가 품고 있는 무한의 시간을 견뎌야 부처가 되는 날을 기약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부처가 되는 길은 무한하게 뻗은 시간의 길을 걷는 것과 다르지 않다. 시인은 무한으로 가는 길 위에서 끊임없이 돌덩이를 쓰다듬으며 “돌의 체온”을 느낀다. 돌덩이가 부처가 되는 날 시인도 부처가 될 수 있다. 시인이 부처가 되는 날 돌덩이 또한 부처가 된다고 말해도 좋다.하나면서 둘인 시인과 돌덩이의 관계는 「부처」에서는 구렁이와 개구리의 관계로 변주되어 나타난다. 개구리가 구렁이 아가리로 점프를 한다. 개구리에게 구렁이 아가리는 죽음이 도사리고 있는 장소이다. 개구리는 왜 목숨을 걸고 구렁이 아가리로 점프하는 것일까? “개구리도 구렁이도/ 다皆/ 부처라네”라는 시구에 이 물음에 대답할 단서가 나와 있다. 개구리가 구렁이 아가리로 점프하는 순간 개구리는 삶과 죽음을 넘어서는 어떤 장소에 들어서게 된다. 개구리는 ‘목숨을 건 도약(점프)’을 함으로써 새로운 목숨을 얻는다. 점프를 하기 전과는 다른 존재가 된 이 존재에 시인은 ‘부처’라는 번듯한 이름을 붙이고 있다.개구리가 부처가 되었으니 그 부처를 온몸으로 끌어안은 구렁이 또한 부처가 될 수밖에 없다. 물론 부처가 되려면 구렁이도 개구리처럼 목숨을 건 도약을 주저 없이 감행해야 한다. 절벽 위에서 한 발을 더 내딛는 모험은 어찌 보면 ‘자기’에 대한 집착을 거둔 존재만이 이를 수 있는 마음의 경지인지도 모른다. 자기에 집착하는 사람은 결코 목숨을 걸고 구렁이 아가리로 점프하는 개구리가 될 수 없다. 심우의 소리로 말하자면, 목숨을 거는 순간은 소 울음소리와 마주하는 순간을 가리킨다. 목숨을 건 개구리에게 구렁이 아가리는 더 이상 두려운 장소가 아니다. 그 속으로 기꺼이 들어가야 개구리는 이전과는 다른 존재로 탄생할 수 있다.돌덩이와 개구리와 구렁이에 내재된 부처의 심성은 「심우尋牛의 소리」에 이르면, “예수님 눈망울에서/ 크고도 슬픈/ 소의 눈”으로 변주되어 표현된다. 예수님 눈망울에는 새 소리가 있고, 물소리가 있고, 바람 소리가 있다. 그것들만 있을까? 돌덩이가 있고, 개구리가 있고, 구렁이가 있다. 한마디로 예수님 눈망울에는 부처라고 불리는 모든 사물들이 스며들어 있다. 세상의 만물에 스민 이 부처(의 마음)를 시인은 계룡산 삼불봉에 있는 심우정사에서 발견하기도 하고, 서산 예천동 성당에서 발견하기도 한다(「자화상-암자에서 성당으로」). 암자와 성당이 중요한 게 아니다. 중요한 것은 온갖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부처(예수라고 해도 좋다)를 발견하는 일이다. 가까이에선 너무 커서멀리서도 너무 커서 안 보이는하느님.- 「하느님」 부분 도道는 따라야 할 길순順하는 자에게역易이 있나니.- 「지극한 복종」 부분 불경을 외우며 그린 부처님성경을 읽으며 그린 하느님부처님은 허허 하느님은 하하내가 그린 부처님과 하느님은 눈이 둘 코가 하나 입이 하나 나를 닮았습니다- 「내가 그린 부처님 하느님」 부분 너무 커서 안 보이는 하느님으로 시인은 무한한 시간을 이야기한다. 시간 안에 있는 하느님은 언제나 시간 밖을 거닐고 있다. 너무 크면서 너무 작은 하느님을 보려면 그에 걸맞은 존재로 거듭나야 한다. 앞서 시인은 개구리와 구렁이 아가리의 모순어법으로 너무 크면서 너무 작은 부처를 묘사한 바 있다. 하느님과 부처를 찾아 떠나는 심우의 길은 확연히 보이면서도 전혀 보이지 않는 존재를 찾아가는 역설의 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설의 길은 이것과 저것을 한 몸에 품고 있다. 이리로 가면 저기가 나오고 저리로 가면 여기가 나온다. 여기와 저기를 나눌 수 없는 자리에 역설은 자리하고, 여기와 저기를 가로지르는 경계에 역설은 자리한다.시인이 “안 보이는/ 하느님.”을 향해 ‘지극한 복종’을 다짐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늘의 종복從僕”(「지극한 복종」 2연)이라는 시구가 암시하거니와, 시인은 너무 커서(작아서) 안 보이는 하느님에게 지극한 복종을 맹세하고 있다. 복종은 집착과 다르다. 집착이 하느님이라는 존재에 매이는 일이라면, 복종은 하느님이라는 존재를 기꺼운 마음으로 따르는 일이다. 위에 인용한 「지극한 복종」의 마지막 연에서 시인은 “도道는 따라야 할 길”이라고 이야기한다. 도가 없는 무한을 상상해 보라. 무한의 바깥에는 무한이 있을 뿐이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이 무한에 복종하려면 방법은 오로지 하나, 도를 따르는 길밖에는 없다.도를 따라 걷는 사람은 도에 순(順)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순’이란 길에서 어긋나지 않고 길을 따라 걷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내보인 무한의 길을 시인은 굳건한 믿음으로 흔들림 없이 걷는다. 하느님=도=길에 대한 믿음=순 없이 어떻게 길 없는 길을 걸을 수 있을까? 시인은 길 없는 길을 무사히 걷기 위해 끊임없이 하늘을 향해 절실하게 기도를 올린다. 복종이 지극할수록 기도는 그만큼 더 절실해진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시인이 말하는 지극한 복종은 말 그대로 자발적인 복종이라고 할 수 있다. 한없이 자유로워지기 위해 시인은 더욱 더 지극한 복종을 하느님 앞에서 맹세한다고나 할까.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말하는 지극한 복종이 순(順)과 함께 역(易)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알 필요가 있다. 역은 거스르는 것이고 뒤바꾸는 것이다. 무엇을 거스르고 뒤바꾼다는 것일까? 순과 역을 함유하고 있는 것이 도라는 점을 다시금 떠올려 보자. 시인에게 하느님을 향한 지극한 복종은 절대 명령과도 같은 것이다. 그것을 따르는 과정 속에서 순이 나오고 역이 나온다. 역이란 그러므로 무한 속에서 끊임없이 변주되는 수많은 형상들이라고 할 수 있다. 도를 따르는 존재는 시간 속에서 시간을 따르며 동시에 시간을 거스른다. 도는 시간의 안과 밖을 아우르며 새로운 길로 뻗어나간다. 김명환이 이야기하는 심우의 소리는 이렇듯 순과 역이 반복되는 길(道) 위에서 비로소 펼쳐지는 마음결이라고 봐야 하겠다.「내가 그린 부처님 하느님」에 표현된 대로, “내가 그린 부처님과 하느님은 눈이 둘 코가 하나 입이 하나 나를 닮았”다. 시인이 그린 부처님과 하느님은 인간의 부처님과 하느님이다. 돌덩이는 돌덩이대로 부처님과 하느님을 그리고, 개구리는 개구리대로 부처님과 하느님을 그린다. 저마다의 마음에 새겨진 부처님과 하느님은 어느 때는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다가, 어느 때는 돌덩이로, 개구리로, 구렁이로 끊임없이 변신을 한다. 도의 길에서 펼쳐지는 순과 역의 상상력은 모든 사물이 부처님이 되고 하느님이 되는 과정으로 거듭난다. 저 밖에 부처님이, 하느님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이 존재가 바로 부처님이고 하느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