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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을 능가하겠다는 신념에서 저술.. 박상길 전 청와대 대변인, 국회의원 혁명의 이유 <이북의 경제력 : 전력 우리의 5배, 석탄 2배, 시멘트 5배, 면포는 남한의 40%, 철광석 7배, 선철 60배, 조강 생산능력은 64만1천t이나 남한 무, 어획량 2배, 벽돌 5배, 발전모터 5배, 기계공구 10배, 변압기 3배, 비료는 이북은 연 56만1천t을 생산하나 남한 무, 트랙터 역시 이북은 연 3천대를 생산하나 남한 무, 자동차도 이북은 연 3천대를 생산하나 남한 무, 목재 25배> 그리고 이 메모지의 군사력 난에는 <전차 1천9백50대, 군용기 1천 40대, 야포 7천5백문(대공포 제외), 해군 함정 5백70척, 상비군 58만명, 노농적위대 1백40만명...> 등등이 적 혀 있었다. 박장군은 메모지를 다 보여주고 나서 말을 이어 나갔다. 풋고추, 생된장, 소주를 함께 마시며 이리하여 나는 회현동 한 여관방에 진을 치고 20여차례 넘게 주로 자정 이후의 심야심방을 통하여 박정희 장군과 마주 앉아 정해진 메뉴-풋고추, 생된장, 소주-를 들며 담론하고 혹은 토론하며 수집된 자료를 놓고 의견을 취합해 한 권의 책을 퇴고하였다. 「국가와 혁명과 나」에는 「국가 민족 역사의 명제」로 된 서장과 제1장 「혁명은 왜 필요하였는가?」, 제2장 「혁명 2년간의 보고」, 제3장 「혁명의 중간결산」, 제4장 「세계사에 부각된 혁명의 각태상」, 제5장 「라인강의 기적과 불사조의 독일 민족」, 제6장 「우리와 미.일 관계」, 제7장 「조국은 통일될 것인가」, 제8장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할 것인가」 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책의 저자는 우리의 역사를 이렇게 개관하고 있다. 생각하면 참으로 곤욕과 피눈물에 점철된 것이 우리의 역사였다. 나는 지금 이 시점에서 우리가 세계로 웅비하는 일대 선진국으로 도약하지 못하고 좌절한다면 또 다시 위의 지적대로 중.일.노의 3대 대국의 각축 속에 휘말릴 우려가 있음을 통감하게 된다. 이 책 서장 은 당시의 사회적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해방 이후 우리 민족이 수확한 것은 과연 무엇이었던가. 60만으로 편성된 세계 4위의 강군을 가졌고 상당한 수의 건물과 공장을 짓기는 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아무리 값진 것이라 하더라도 해방풍조로부터 시작된 정신적 타락, 망국적 외래 풍조, 이에 깃든 부패.허영.사치.타태를 능가할 수도 없으려니와 또 38선으로 분단된 민족 단장의 비극을 메울 수도 없는 것이다.」 이 대목은 오늘 이 시점의 우리의 사회상에 비추어도 한치의 오차가 없을 뿐 아니라 도리어 큰 우려마저 느끼게 하고 있다. |
혁명의 국민화는 실패 「그런고로 혁명은 본시 함부로 있을 수 없는 동시에 만약 있다면 분명히 국가와 국민과 역사의 절대적 요청에 서만 있어야 하며 그러한 혁명이 일단 제기된 이상은 오직 개인을 떠나 공에 순하려는 구국 의 신념과 정확한 관찰, 명석한 판단, 불굴의 투지를 가지고 궁극의 목표를 향하여 굳세게 전진하지 않으면 안된다. 올바른 혁명의 발생 자체가 국가.국민.역사의 요청을 바탕으로 이 루어진 것인 이상 이 혁명의 완수는 전국민적 공동 의식.공동 노력.공동 책임하에 성취되지 않으면 안된다. 이러한 공감.공동 운명감이 없이 혁명의 국민화나 성공은 기대할 수 없다.」 이 구절에 이르러서는 필자도 당혹과 착잡한 감정을 금할 길이 없다. 바로 박정희 대통령 자 신이 3선개헌과 유신체제 추구로 공에 순한다는 구국의 신념이 굴절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하여 국민적 공동책임-혁명의 국민화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서장은 혁명의 궁극적 목표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이것은-단순한 정권교체가 아니고 멀리는 분방 과 상잔의 고 중세대, 가까이는 이조 5백년간의 침체와 외제 36년간의 피맺핸 학정-해방 이 후 이질적인 구조 위에 배태된 갖가지 고질을 총결산하여 다시는 가난하지 아니하고 약하지 아니하고 못나지 아니한 예지와 용기와 자신을 가진 신생 민족의 우렁찬 신등정임을 뜻한다. 그러므로 이 혁명은 그 계기 자체가 한국 근대사 전환의 기점이며 해방 전후 다음 가는 제3 의 출발이자 민족중흥 창업의 마지막 기회인 것이다. 그런고로 이 혁명은 정신적으로 주체의 식의 확립 혁명이며, 사회적으로 근대화 혁명이요, 경제적으로는 산업혁명인 동시에 민족의 중흥 창업 혁명이며, 국가의 재건 혁명이자 인간개조, 즉 국민개혁 혁명인 것이다」 그렇다. 5.16혁명이 신생 민족의 신등정이자 근대사 전환의 기점이며 주체의식, 근대화, 산업혁명, 국가재건, 인간개조, 국민개혁, 민족의 중흥 창업을 추구한 혁명이었다는 점에는 누구도 이론을 제기치 않을 것이다. 다만 민족중흥 창업의 마지막 기회였다는 것은 그렇지를 못했다. 이 민족 구원의 성취는 그후 민주화의 전환을 거쳐 아직도 진통과 추구를 계속하고 있다. 혁명의 공약 「①반공을 국시의 제1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과 구호에만 그쳤던 반공의 태세를 재정비 강화함으로써 외침의 위기에 대 비하고, ②국련 헌장을 충실히 준수하고 국제협약을 이행하며 미국을 위시한 자유 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함으로써 국제적인 고립에서 벗어나야 하고, ③구정권 하에 있었던 모든 사회적 부패와 정치적인 구약을 일소하고 청신한 기풍의 진작과 퇴폐한 국민도의와 민족정기를 바로 잡음으로써 민족.민주정신을 함양하며, ④국가 자립경제 재건에 총력을 경주하여 기아선상에 방황하는 민생고를 해결함으로써 국민의 희망을 제고시키고, ⑤북한 공산세력을 뒤엎을 수 있는 국가의 실력을 배양함으로써 민족적 숙원인 국토통일을 이룩한다.」 제1항의 반공 태세의 정비와 강화, 제2항의 외교강화와 국제고립의 탈피는 대부분 또는 상당 부분 달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제3항의 부패와 구악의 일소는 신악과 새로운 부패로 엇갈렸 다. 민족정기와 청신한 기풍은 문화재의 발굴과 충효사상의 고양, 「하면 된다」는 민족 패 기의 고취로 민족정신에 확연한 선을 그었다. 그러나 퇴폐한 국민도의, 민주정신의 함양은 급격한 산업화에 따른 극단적 배금사조와 인권억제에 따른 반체제와의 혹심한 갈등으로 일그 러진 게 사실이다. 제4항의 자립경제 재건과 민생고의 해결은 박정희 치적의 백미이자 5.16 혁명세대의 트레이드 마크이며 이 나라 역사의 새로운 구획선이었다. 제5항은 1974년을 분계 선으로 남북간 비교가 남한 우세로 반전되기 시작했으며 그분의 서거 시점에서는 남한 우세 가 분명해졌다. 그러나 국토통일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경제개발 계획의 철학 두번째로 이 책에서는 전력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는데 당시 대한민국의 총출력량은 26만5처kW로 이는 미국 디트로이트시 소재 포드 자동차 회사 하나의 전력 소비량 34만kW 보다도 훨씬 적음을 지적하고 있다. 또 1945년 해방에서부 터 1961년까지 미국 원조 31억4천만 달러의 사용 내역의 모순점을 지적하고 파탄적인 민족경제의 실상을 소상히 밝혔다. 이 때문에 박정희 대통령의 진면모인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착 수된 것이었다.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게획(1962~1966)은 모든 사회의 경제적인 악순환을 과 감히 시정하고 자주경제를 달성하기 위한 기반을 추구했으며 구체적으로는 「전력.석탄.정유 등 에너지 산업의 개발」,「농업생산의 증대」,「에너지 산업 등 기간산업의 확충과 사회간 접자본의 확충.강화」, 「유휴자본의 활용」, 「수출 증대를 도모하는 국제수지의 개선, 기 술의 진흥」을 계획하였다. 이 계획 실시 5년 동안 GNP의 연 평균 성장률은 8.3%. 계획 착수 연도인 1962년의 3.1%에 비교하면 실로 놀라운 고도성장이었다. 국민 1인당 GNP는 계획 실시 한 해 전인 1961년 고작 4천만 달러였으나 여섯 배의 경이적 신장을 기록했다. 이 무렵의 구 호가 저 유명한 「증산.수출.건설」이었음은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다. 제2차 경제개발5개년 계획(1967~1971)은 공업화를 본격적으로 추진하고 농업의 근대화에 주 안점을 둔 기간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식량의 자급자족」,「철강.기계.화학공업에 중점을 둔 공업화」,「수출증진과 수입대체에 의한 국제수지 개선」,「고용증대와 인구증가의 억제 」,「국민소득의 향상」,「기술수준과 생산의 향상」이 목표였다. 이 기간에는 연 평균 19.5%의 성장을 기록하여 국민 1인당 GNP는 1971년 2백66달러에 달하여 1966년 GNP의 두 배 를 넘었다. 그리고 수출은 1971년에 11억3천만 달러가 되어 당초 계획의 두 배를 넘겼으며 현대.선경.삼성 등의 재벌 대기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 무렵의 구호 역시 저 유명한 「 근검.절약.저축」이었다. 변하지 않은 것-부정.부패 제 4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77~1981)은 경제의 자립화와 산업 구조의 중화학 공업화가 주 안점이었다. 그런데 계획의 중반에 박정희 대통령이 쓰러지고 제2차 석유파동(1980~1981년) 과 정치혼란 등으로 80년에는 6.2%란 사상 최초의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그러나 4차 경 제개발기간 통산의 성장률은 7%를 기록하여 일본의 4.7% 성장을 능가, 세계 최고를 자랑하였 다. 4차 경제개발계획 중반에 박정희 대통령은 가셨지만 그 혼백은 살아 남아 세계경제의 초 위기에도 불구하고 한국 경제의 성장은 지켜졌으며 그후 오늘날의 제7차 계획에 이르기까지 박대통령의 경제집념은 그대로 줄기차게 이어져 가고 있다. 한국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확실히 박정희 대통령의 대명사이며, 그의 집념이요 화신이라 할 수 있다. 이대로만 가도 1996년 7차 계획이 끝날 때 1인당 GNP는 1만9백 달러를 돌파하는 명실상부한 선진국이 된다. 그의 이상이던 5.16혁명의 국민혁명으로의 승화는 3선개헌과 유신체제로 변질되었다. 그러나 그의 경제발전 추구가 몰고 온 민주화는 역설적 시대 발전의 반면교사를 제공해주었다. 다만 변하지 않은 것은 그가 그토록 통탄했던 부패.타락.무질서.향락.사치.나태이다. 이것들은 아직도 시대적 사회병리로 창궐하고 있어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통석하기 짝이 없다. 그러나 그는 국가 백년대계의 유산일 수 있는 많은 것을 우리에게 넘겨주었다. 5.16 30주년의 유감 한마디로 사회 근대화, 산업 공업화, 국민의식 전환, 민족중흥 등은 영도자로서의 박정희의 면모였고, 깔 끔.순박.단정.신의.정의는 그의 인간성이었다. 「꽁보리밥과 생된장의 점심이 하도 쑥스러워 차마 도시락을 밖으로 꺼내지 못하고 책상 밑에 숨기고 먹었다」고 「국가와 혁명과 나」에 서 독백하고 있듯이 「가난은 은인이자 스승」이 되어 그의 삶을 관류하여 왔다. 그는 허장을 싫어하고 순박을 사랑했으며 양요리 대신에 소주와 된장과 풋고추를 즐겨 먹고, 애잔한 「황성옛터」를 애창하였다. 궁정동 비극의 시바스 리갈과 미녀는 본시의 박정희일 수는 없었다. 박대통령의 소망은 소박하고 근면하고 정직하고 성실한 서민사회가 바탕이 되 고 자주독립이 된 한국의 창건이 전부였다. 이 소망은 그의 생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가 특권계층, 파벌적 계보를 부정하고 군림사회를 증오한 소이도 여기에 있을 것이라 생각된다. 이는 그가 이 책에 「본인은 한마디로 말해서 서민 속에서 나고 자라고 일하고 그리하여 그 서민의 인정 속에서 생이 끝나기를 염원한다」라고 적고 있기 때문이다. 제3공화국 발족 직 전의 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장군의 진정한 소망은 서민, 즉 중산계층이 바탕이 된 민주국가 의 수립 그것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상은「증산」「수출」「건설」「근검」「절약」「저축」「하면 된다」 와 「국가가 요구하는 것은 능력과 결과이다」였다. 우리는 역대의 대통령들에 대하여 고인, 현존인을 막론하고 지금의 통념에서 벗어나 올바른 재평가가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독재.부패.장기집권으로 매도되고 있는 이승만 박사는 그 반면에 평생의 독립운동가였고, 세계적 반공지도자였다. 이 나라의 건국 대통령이었고 6.25 의 수습과 누구도 따를 수 없는 청빈함을 갖고 있었다. 역시 같은 배열로 규탄받은 박정희 대통령은 반면에 5천년의 빈곤을 퇴치한 경제적 풍요를 가져왔다. 어쩌면 적화당했을지도 모 를 남한의 취약을 극복하고, 국기를 다진 공로와 「하면 된다」는 민족의식의 전환과 민족패 기를 심어주었다. 아울러 안심하고 민주화로 전진할 수 있는 토대를 구축해주었다. 네 명에 달하는 미국의 전직 대통령들이 제각기 국민의 존경을 받으며 때로는 국위선양에 협 조하고, 일본의 전직 총리들이 여전히 국정에 참여하며 나라를 걱정할 자유를 갖고 있다. 심 지어 밀려난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도 세계가 좁다고 활약하고 있고, 장기 집권한 싱가 포르의 이광요총리도 퇴임 후 선임 국무위원으로 건재하고 있다. 과는 과, 공은 공대로 밝혀 야 한다. 지나친 정치활동까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만고 역적처럼 매도 일변도의 평가 로 끝내버려서는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존경할 수있는 국가의 원로, 애정으로 대할 수 있는 지도자를 못 가질 때의 아쉬움과 안타까움은 그들 장본인들 이전에 우리 국민 스스로의 수치 이며 불행이 아닐 수 없다. 나는 이런 점에서 위 몇 분에 대한 온당한 재평가는 반드시 있어 야 하며 이젠 그런 때가 되었다 확신한다. <편집자 주> 본 내용은 -월간 조선 '한국의 대통령'에서 발췌하여 옮긴 것입니다.
나 쿠데타 할 거요 이동원 전 대통령 비서실장 『이박사, 조금 늦었습니다.』 약속보다 늦게 이학식당에 나타난 김동하는 먼저 와 기다리고 있던 내게 미안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순간 그의 뒤에 서 있는 사람의 모습이 내 눈에 들어왔다. 자그마한 체구, 까맣고 비쩍 마른 무표정한 얼굴, 빛나는 눈, 그리고 스프링코트에 넥타이를 단정하게 맨 모습이었다. 난 바로 그가 오늘 날 보자고 한 박정희 소장이란 걸 직감했다. 서로의 소개가 끝난 후 난 왜 그가 날 보자고 했는지 궁금해 그의 입이 떨어지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음식이 들어오고 술잔이 오고 가도 도대체 그는 말이 없었다. 『아니, 보자고 했으면 얘길 해야지. 참 괴짜 같은 친구구먼 』 난 속으로 나름대로 그를 평하며 그의 얼굴을 살펴보았으나 그는 여전히 표정이 없었다. 그러니 나 또한 얘기할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술만 마셨다. 그것도 작은 술잔이 아닌 맥주잔에 정종을 3분의 1쯤 채워 숨도 쉬지 않고 꼴깍꼴깍 들이키고 있었다. 호주가가 따로 없었다. 자연히 난 김동하와 신변잡기를 주고받을 수밖에. 그런데 약 한 시간쯤 지났을까. 박소장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건 내가 보기엔 이렇습니다. 미국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이 국민을 위한 쿠데타이고 반미 쿠데타가 아니며 국민이 지지하는 쿠데타라면 별 문제 될 것이 없을 겁니다. 그런데 지금 박장군은 가장 중요한 걸 간과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건 만일 박장군이 쿠데타를 하고 싶다면 진짜 애국하는 충정에서 결심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옳다고 판단되면 밀고 나가고 그렇지 않다면 하지 않으면 그뿐입니다. 그런데 거기에 왜 미국을 계산에 넣습니까. 가장 중요한 건 바로 애국하는 마음입니다.』 어느 새 내목소리는 격앙되어 있었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박소장은 이윽고 알겠소』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까지만 해도 난 그의 말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그저 혈기 왕성한 군인의 가슴에서 으레 발아할 수 있는 사례 정도로밖에 생각지 않았다. 때문에 난 노파심에서 이학식당을 나오기 전 그에게 다음과 같은 얘기도 들려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내 생각엔 장면 내각은 선거를 통한 합법적인 정권입니다. 그리고 지난해(1960년) 8월 출범했으니 이제 겨우 8개월밖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만일 내가 박장군이라면 이유야 어떻든 1년 정도는 기회를 주겠습니다. 그래야 쿠데타의 명분도 서지요. 하나 지금 당장이라면 아마 후세의 역사가들이 정권욕 때문에 쿠데타를 했다고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나에게 그날의 만남은 박정희 소장과의 첫 대면이었다. 그러나 바로 그 인연이 후에 내 인생을 바꿀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로부터 채 한 달이 못 된 1961년 5월 16일, 난 군사 혁명이 일어났다는 라디오 방송을 듣곤 혹시 하는 마음에 신문을 펼쳐 들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불과 한 달 전 내게 쿠데타 할 거라 외치던 바로 박소장의 사진이 내 눈을 놀라게 하고 있었다. 어느덧 해가 바뀌어 1962년이 되었고, 3월 들어 정치활동 정화법에 불만을 표시한 윤보선 대통령이 사임하자 박의장이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았다. 그때 장충동에서 다시 내 게 연락이 왔다. 『이박사, 그간 어떻게 지냈소. 내 부탁드릴 일 있어 불렀소. 알다시피 내가 청와대로 들어가야 하는데 난 당분간 장충동에 있을 생각이오. 하나 어차피 청와대를 지켜주시오』 이번에도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았다. 더구나 외국 나가는 일도 아니잖 은가. 『알겠습니다. 무슨 일을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외국 나가는 일 아니니 부족하지만 혹 도움이 된다면 해보겠습니다.』 집사람 쓰러지는 장면도 보여줘 이항의 1974년 8월 15일 10시 20분쯤. 서울 중구 장충동에 있는 국립극장 무대위 연설대에서 박정희대통령이 특유의 카랑카랑한 음성으로 8.15 경축사를 3분의 1쯤 읽고 있을 무렵이었다. 반짝반짝하는 섬광과 함께『탕,탕,탕 』하고 터지는 4~5발의 총성은 8.15 기념식장을 아수라장으로 만들었다. 약 2천여명의 참석자들은 어리둥절해 하면서 단상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여기저기서 『야아! 총소리다, 누구야! 대통령이 맞았냐? 저기 저놈이다, 저놈 잡아라』하는 비명과 외마디 소리가 뒤범벅이 되어 극장 안을 뒤흔들었다. 연설대 오른쪽에 앉아 있던 정일권 국무총리, 김정렴 비서실장, 조상호 의전비서관 등이 일제히 의자에서 내려앉아 무대 바닥에 엎드렸고 연설대 왼쪽에 앉아 있던 육영수여사는 의자 손잡이에 고개를 떨구었다. 『육여사가 맞았다, 저거 봐, 육여사가 의자에서 넘어지네, 빨리 육여사를, 빨리요.. 』불과 20~30초 간의 일이었다. 박종규 경호실장만이 뒤늦게 연설대 앞으로 뛰어나와 권총을 빼들었으나 이때는 이미 범인이 경호원들에 의해 덮쳐진 뒤였다. 이 순간까지도 박대통령은 조금도 자세를 흐트리지 않은 채 관중석을 쏘아보면서 오히려 큰소리로 호령을 했다. 『왜들 이리 소란하시오? 조용히들 해요』하면서, 그제야 단상의 좌우를 살펴보았다. 박대통령은 육여사가 의자에 넘어져 있는 장면을 목격했다. 그러나 박대통령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담담한 표정으로 다시 경축사를 계속 읽어 내려갔다. 경축사가 계속되는 동안 단하에서는 범인 문세광을 경호원들이 밖으로 끌어 내고 단상에서는 의자에 비스듬히 쓰러진 육여사를 업어 황급히 뒷문으로 나가는 일들이 벌어졌지만 박대통령은 이를 전혀 의식하지 않은 듯 태연자약하게 기념사를 읽어 내려간 것이다. 첫번째의 섬광과 총성이 터졌을 때 목표 인물이 대통령 자신이라는 것은 즉각 감지했을 것이다. 후일 그 장면을 VTR을 통해 본 외국기자들은「그레이트 리더」라고 평가했다. 언론사 사장 자격으로 식에 참석했던 나는 식이 끝나기 전에 극장을 빠져 나와 MBC사장실로 달려 돌아왔다. 보도국 간부들을 불러 사건 현장을 어느 정도 잡았는지 확인해 본 결과 MBC, KBS, TBC 등 국내 방송 3사는 말할 것도 없고 일간 신문들까지도 범인의 저격장면과 육여사 의 쓰러진 장면, 체포장면을 잡은 카메라는 하나도 없다는 것이었다. 8.15 경축식이 끝나면 박대통령은 지하철 1호선 개통식 테이프를 끊게 되어 있어 모든 기자와 카메라맨들이 국립극장을 나와 청량리역에 대기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오후 3시가 조금 지나서 김영수 보도국장 이 내 방에 뛰어들어오면서 외쳤다. 『사장님, 미국의 CBS 카메라맨이 오늘 사건 현장에 끝 까지 남아서 사건 전모를 잡아 본사로 보냈다고 합니다. CBS는 우리 MBC와 뉴스협정이 되어 있으니 뉴욕 본사에 사장 명의로 필름을 요구해서 인공위성으로 받아 전국에 때리면 어떻습 니까』 나는 CBS 뉴욕 본사에 긴급 타전을 시켜 필름 송부를 약속한 텔렉스를 받은 뒤 청와 대 비서실의 전석영 총무비서를 통해 박대통령의 긴급면담을 요청하여 허락을 받고, 청와대 본관으로 가서 박대통령을 만났다. 『각하, 오늘 국립극장 사건의 전모를 찍은 미국 CBS 필 름을 MBC에서 받기로 했습니다. 위성으로 필름을 보내오면 밤 6시부터 전국에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허가해 주십시오.』『 뭐, 외국 방송기자가 찍었어, 그러면 우리 집사람이 쓰러 지는 장면이 나오겠는데, 흉하지 않을까』 박대통령은 남산이 보이는 창 밖을 물끄러미 내 다 보면서 몇 번이고 한숨을 내뿜었다. 박종규 경호실장이 한 마디 거들었다. 『각하, 이항 사장이 말씀드린 대로 텔레비전에 내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북한의 흉계를 국민에게 보여 줘야 됩니다.』『사모님이 쓰러지는 장면은 편집해서 삭제할 수 있습니다』 나는 다시 한번 박대통령에게 조심스럽게 건의했다. 『좋아, 내보내. 기왕 방송을 할 바에는 우리 집사람이 쓰러지는 모습도 자르지 말고 다 보여줘. 모습은 흉하겠지만 국민들이 알 것은 알아야지』 나는 방송사에 돌아오자마자 CBS가 보내준 끔찍한 필름을 앞뒤에 멘트나 CM을 빼버린 채 전 국에 내보내고 또 재방송을 몇번이고 시켰다. 아마도 이 필름은 76회에 걸쳐 MBC를 통해 방 송된 것으로 기억된다. 끔찍하고 비통한 일이었지만 내가 겪은 박대통령의 모습 중에 가장 잊혀지지 않는 박대통령의 의젓하고 대담한 모습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