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본문 : 계 1장 7-11절
설교제목 : 내 뒤에 들리는 음성
어디로 가고 있는가?
주님의 은혜와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기를 빕니다. 한주간 평안하셨습니까? 이 겨울의 시간을 통하여 우리의 깊이로 뿌리내려 더욱 단단해지는 시간이 되시길 빕니다. 지난 17일 미국 뉴욕포스트에 따르면, 베이징 화학기술 대학, 베이징 PLA병원, 난징대 의대로 구성된 연구진이 실험용 쥐의 뇌를 인간과 유사한 유전적 구조를 갖도록 조작한 뒤에 코로나 바이러스 변이체(GX_P2V)를 실험했을 때, 바이러스가 폐, 뼈, 눈 등에 침투해 급격한 체중감소와 체형 변형 증상을 일으킨 뒤, 8일 만에 사망했다고 보고했습니다. 치사율이 100%에 달하는 코로나 바이러스를 만든 것입니다. 여러 매체에서는 이 실험이 또 다른 끔찍한 판데믹을 야기할 수 있음을 우려하며 비판하였습니다. 실험용으로 생명을 도구화하는 인간의 비윤리성으로 점점 끔찍한 세상이 되는 것 같습니다. 신약과 백신 개발이 경제 논리로 환원된다면 인간의 문명은 더 거세게 위협당할 것입니다.
C.G. 융은 1960년에 미구엘 세라노에게 편지에서 이렇게 썼습니다.
고태적 신[보탄]이 우리 행동의 지배적 요소를 공식화하고 표현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새로운 종교적 태도, 즉 우월한 지배자를 향한 우리의 의존성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찾아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저는 인간의 갱신된 자기이해 없이 어떻게 이것이 가능할지는 모르겠지만, 이는 필연적으로 개인들로부터 시작되어야만 합니다. 우리는 인간을 다른 정신적 동물계와 비교할 수 있는 수단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인간에게 그의 존재를 객관적으로 조명하는 새로운 설정을 제공합니다. 즉 그의 ‘자유의지’, 제한된 의식성과 그의 자의적인 자기중심주의 대신에 원형적 힘에 의하여 작동되고 조종되는 존재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이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니라는 것을 배워야만 하며, 그의 운명의 진정한 통치자로 보여지는 그의 정신 세계의 다른 측면을 조심스럽게 연구해야만 합니다.[융. C. G, Letters vol. 2, 1960년 9월 14일]
우리를 사로잡는 무의식적인 힘을 인식하지 못하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 파괴적인 세계를 직면하게 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자신이 자기 집의 주인이 아님을 배워야만 하고, 진정한 운명의 통치자가 정신세계의 다른 측면에 있음을 조심스럽게 알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분이 오신다
요한은 그리스도가 다시 오실 때의 현상을 다시 힘주어 말하며 고백합니다.
“보아라, 그가 구름을 타고 오신다. 눈이 있는 사람은 다 그를 볼 것이요, 그를 찌를 사람들도 볼 것이다.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이다.” 꼭 그렇게 될 것입니다. 아멘. (1:7)
주님이 다시 오실 때 나타나는 현상은 무엇입니까? 먼저 구름을 타고 오신다고 합니다. 구름을 타고 온다는 표현은 다니엘서 7장 13절에서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운송수단이 바로 구름임을 드러냅니다. 신성한 존재는 구름을 통하여 움직이고 구름을 통하여 현현합니다. 구름은 비와 연결됨으로써 천상의 활동의 현시이며, 풍요를 상징합니다. 구름은 신화와 종교에서 천상의 권능을 상징하며 하늘과 땅을 왕래할 수 있는 신성한 존재의 탈 것이었습니다. 구약성서에서는 여호와, 야훼의 현현의 징표 또는 심판의 전조로서 이해되었습니다. 연금술에서 구름은 원초적 물질로서 명확한 어떤 물질이 아니고, 그것으로 상징되는 어떤 최초의 정신적 상황에 관한 직관적인 개념으로 이해되었습니다. 구름의 출현은 주님의 현시의 징표이며, 천상적 권능으로 심판의 전조 단계임을 시사합니다. 주님은 구름타고 천상적 권능으로 모든 사람이 볼 수 있게 오십니다. 현재는 오직 주님의 오심을 믿음으로만 바라볼 수 있지만, 그때가 되면 그 모든 것이 낫낫이 드러날 것입니다. 아직 오지 않은 시간과 상태는 잠재적으로 비가시적으로 있기 때문에 쉽게 그것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최근에 어떤 분의 꿈 속에서 음식을 하고, 가스렌지 위에 불을 끄려고 했지만 불꽃은 꺼지지 않고 살아 있었습니다. 저는 끌 수 없는 열정과 소명의 불, 신성한 불이 그분 안에 있음을 이야기하였습니다. 그 불이 새로운 변환의 불이 될 것인지, 아니면 파괴의 불이 될 것인지 그것은 온전히 당신의 몫으로 주워져 있음을 함께 나누었습니다. 그 꺼지지 않는 불을 그가 간직하고 의식의 자원으로 구체화될 때까지 간직하고 담아낼 수만 있다면 기다리는 그 무엇이 현시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실 때 모든 사람의 눈으로 확연히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땅 위의 모든 족속이 그분 때문에 가슴을 칠 것입니다. 가슴을 치는 행위는 애곡과 후회의 표시입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표시하는 것입니다. 어느날 갑작스럽게 나타난 심판의 주님으로 인하여 두려움과 비탄의 상태에 처할 수 밖에 없습니다. 갑작스런 불행과 죽음을 맞닥뜨린 사람들의 경우, 가슴을 치며 애곡하는 일들을 많이 목격하곤 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이 오시는 날이 가슴을 치며 애곡하는 날이 아니라 새로운 변환과 구원의 때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참여한 사람
요한은 다시 한번 자신이 누구인지를 독자들에게 일러줍니다.
“예수 안에서 여러분의 형제요 예수 안에서 환난과 그 나라와 인내에 여러분과 더불어 참여한 사람이 나 요한...(9)”
자신을 형제이자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한 자라고 소개합니다. 형제와 참여한 사람이라는 두 개의 칭호에는 헬라어 관사, ‘호’(ό)에 의해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것은 형제이기에 더불어 참여할 수 있음을 나타냅니다. 형제, ‘아델포스’(αδελφος)란 같은 태(자궁)에서 태어난 관계라는 의미합니다. 예수 안에서 태어난 영적 형제가 되었기 때문에 환난도 고난도 인내로서 동참할 수 있었습니다. 너의 아픔이 나의 아픔이었고, 너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었기에 끝까지 고난의 시간을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태어난 형제라는 의미는 신성함이 우리의 중심원리임을 가리키는 표현이기도 합니다. 융은 죽기 며칠 전에 꿈을 꾸었습니다.
“그는 어떤 황량한 장소의 높은 곳에서 커다란 둥근 돌을 보았습니다.그 돌에 다음 글이 새겨져 있었습니다. “이것은 너에게 단일성과 전체성의 표징일터이다.” 그리고는 많은 그릇을 오른편 네모난 장소에서 보았습니다. 그러자 나무들로 이루어진 4각을 보았는데 그 뿌리가 땅위에 솟아오르고 그를 감쌌는데, 뿌리 사이에는 황금의 실들이 번득였습니다.“
황량한 장소의 높은 곳에 있는 둥근 돌이야말로 신성한 내적 중심원리이며, 황금실의 번득이는 뿌리가 그를 감싼 것은 황금의 광휘로 둘러싸인 도의 경지에 이른 단계라 할 수 있습니다. 죽음너머의 영원한 삶의로의 입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인간은 내적 중심과 그 뿌리를 잊고 단절된 채 살아갑니다. 자신이 어디에서 왔으며 어디에 있으며 어디로 가야할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예수 안에 태어난 형제는신성한 중심에서 태어난 것을 이해하고 경험한 자이며 그분과 깊은 연대와 유대로 연결될 수 있는 자입니다. 이것이 영적 에클레시아, 영적 교회의 모습입니다. 자아중심성과 이기심으로 점철된 세상에서 우리는 이 신성한 내적 중심과 연결되어 형제의 고난에 동참하고 연대하는 인생을 절실히 요청되고 있습니다.
핍박과 갈등이 첨예한 세상에서 요한은 참음, 곧 인내로 참여하고 있다고 고백합니다. 여기에서 인내, 참음의 원어는 ‘휘포모네’(ύπομονη)로 ‘휘포’와 ‘메네’의 합성어입니다. ‘아래에’ ‘머물다’라는 의미입니다. 참을 수 있는 것은 아래에서 적극적으로 머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아래에 머물 수 있는 인내함으로 사랑과 평화, 희망이 필요한 이들과 더불어 연대하며 동참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내 뒤에 들리는 큰 음성
요한은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를 증언하는 일로 밧모섬에 갇혀 있다고 고백합니다. 그리고 주님의 날에 성령에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음성을 들었다고 합니다. 요한의 상황은 감옥 또는 갇힘의 상태입니다. 심리적으로 이런 조건은 집단의식과의 단절과 소외로 인하여 집단적 무의식을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감옥의 이미지는 리비도의 정체상황을 대변하며 정상적이고 자연적이며 자발적인 방출이 허용되지 않고 축적되어 있음을 시사합니다. 이런 갇힘의 최종결과는 응축된 리비도의 분출, 폭발입니다. 요한에게 이러한 묵시적 환상을 폭발시킨 것은 이런 갇힘이고 결국 갇힘은 리비도의 폭발의 전제조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집단과 개인 안에서 동일하게 목격할 수 있습니다. 집단 안에서 리비도가 지나치게 오래 억눌려 있으면, 폭동과 소요 속에서 폭발합니다. 개인 안에서 억제된 정서는 의식의 균열이 생기면서 폭발하기도 합니다. 홀로 은둔하며 우울증을 경험하던 이들이 갑작스럽게 리비도가 폭발하면서 망상과 환각에 시달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리비도의 폭발을 견디기 위해서는 자아의식의 강함이 필요합니다. 취약한 자는 부정적으로 사로잡힙니다. 요한은 성령에 의해 사로잡힙니다.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지 알면 우리는 정신적으로 와해되지 않습니다. 사로잡는 실체를 알지 못하면 정신분열적 증상으로 인격은 해체될 수 있습니다. 나를 사로잡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면 그것은 무의식의 압도적 힘에 의해 노예가 되고 맙니다.
요한은 뒤에서 들려오는 큰 목소리를 듣습니다. 뒤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무의식으로부터 다가오는 내면의 목소리, 신의 음성입니다. 우리는 일상생활을 할 때는 의식을 전면으로 내세워 기능하기 때문에 무의식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무의식이 우리의 관심을 끌고 무언가를 표명하기 시작하면 우리는 관심과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그 소리에 반응해야 합니다. 우리의 내면에서, 또는 우리의 뒤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관심을 기울이기 위해 돌아서야 합니다. 다음 주에 본문을 읽겠지만 요한은 그 음성을 알아보려고 돌아섰습니다. 이것이 일종의 돌아섬, 회개라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목소리가 나를 부르고, 내면의 심상 혹은 꿈을 통해 나의 의식을 환기시킬 때, 외부세계로 향하던 나의 힘과 생각을 내면세계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우리는 요즘 어떤 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내 안에서 내 뒤에서 들리는 소리가 있다면 그 소리에 주목하여 돌아설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