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과 한알 속에는◁
신달자 시인(1943~)이 『월간문학』(7월) 권두언에 올린 글(’사과 한 알 속에 태양이 있다‘)이다. 오늘날 현대인의 삶은 좌불안석(坐不安席)인양 마음을 침잠하지 못하고 들떠있다. 마음의 갈피를 잡지 못한다. 세상 변화의 속도에 지쳐있고 예측할 수 없는 내일에 불안하다. 문명의 발달로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마음은 평온하지 못하다. 그래서 마음은 현재 지금에 충실하지 못하고 미래를 달린다. 현재를 온전히 살 수 없는 것이다. 시인은 그런 현대인의 마음을 읽었다. 주변분에게 일독을 권하는 이유다.
어느 모임에서 어떤 분이 말했다. “봄도 다 갔다" 3월초의 맵싸한 바람이 부는 날 인데 곧 여름이 온다는 뜻이다. "곧 덥다고 냉면집 앞에 줄을 설 거야." 그래도 너무 심하지 않는가. 지난해 9월에 막 들어섰을 때 "아, 올해도 다 갔다" 라고 하는 사람도 보았다.
아직 거의 절반이 남았는데 무슨 한 해가 다 갔다는 말인가. 이런 경우 어처구니가 없다고 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말로 시간을 너무 폭력적으로 당겨버린다. 자신을 과거나 미래에 두길 좋아하고 현재를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다. 현실이 고통스러워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이상적인 상상세계에 빠져 있는 것일까?
내 친구 하나는 오후 7시만 되면 “오늘 "하루도 다 갔다" 라고 말하고, 어느 후배는 50세인데 80이 다 되어 간다고 노래처럼 늘 말한다. 그 중에서도 아직 여름 햇살이 남아 있는데 하루가 싹 가버렸다고 말하는 것이 가장 짜증스럽다. 아니 앞으로 5시간이 남았는데 하루가 다 갔다니? 5시간이면 역사를 바꾸지는 못하더라도 시인은 명작 하나, 화가는 명작의 밑그림을 거의 그릴 수도 있는 시간이다.
60세가 된 사람이 시간을 확 당겨 “아, 이젠 다 살았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는 것도 보았다. 불교에는 一日一夜 萬生萬死라는 말이 있다. 하루 낮 하룻밤에도 만 번 태어나고 만 번 죽는다는 뜻이다. 이 순간을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한다는 의미가 깔려있다.
우린 시간성에 대해 너무 불성실하다. 한 개를 한두 개라고 하고 세 개를 서너 개라고 말하기도 한다. "널 좋아해" 가 아니라 "널 좋아하는 것 같아."라고 불투명하게 진실을 고백하는 경우도 있다. 정확하게 말하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불확실을 하나의 희망 징조로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중요한 것은 '지금'이다. 오늘 바로 지금이야말로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그리고 지금 이 시간을 사랑하고 창밖 녹음을 감사하게 바라본다.
우리 동네에서 가장 먼저 핀 봄꽃은 복수초였다. 몸을 흔들어 스스로 열을 내어 얼음을 털어내며 솟아 피어오르는 노오란 꽃이다. 주로 가까운 산에서 피어난다. 뒤를 이어 산수유 영춘화 생강나무 히어리가 피어나고, 매화가 요염하게 웃기 시작하면 다시 개나리 목련 벚꽃이 피어난다. 그 안에도 입술을 간지럽히는 풀꽃들이 동네 골목 주변에 등장한다.
우리 집 작은 뜰에는 지금 수선화가 노오랗게 피어 있다. 조화처럼 손으로 만든 것 같은 수선화는 고맙게도 참 오래도 간다. 아침마다 나는 인사를 한다. “고마워!" 수선화도 내게 인사를 한다. "그래 힘내!" 뜰에 얼굴을 내미는 파란 새싹들의 저 눈부신 생명력은 하늘을 이고 바람에 나부낀다. 눈엽(嫩葉)이었다가 신록이었다가 차차 녹음이 될 것이다.
지난겨울에 죽지 않은 것이 다행이다. 어쩔 뻔했는가. 이토록 어여쁘고 아름다운 꽃들을 못 보았을 지난겨울의 죽음을 피한 것만도 얼마나 행운인가. 감사하고 감사하여라.
구상(1919~2004) 선생님의 시 ’한 알의 사과 속에는‘ ”한 달의 사과 속에는 구름이 논다/한 삶의 사과 속에는 대지가 숨 쉰다/옛 앞의 사과 속에는 태양이 불탄다“ 라고 했다. 한 알의 사과 속에 모든 자연이 다 숨어 있다면 우리들의 1초 속에는 기적이 숨어 있는 것이다.
삶이란 오직 이 순간만이 존재한다. 찰나(刹那)라는 말이 그래서 섬뜩할 정도다. 과거는 지나갔고 미래는 오지 않았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현재에 머물지 못하고 과거나 미래에 머무는 것일까? 그것이 종교가 지적하는 인간의 한결같은 지적이지 않겠는가? 마음을 현재에 머물게 하는 것을 불교에서는 '정념수행(正念修行)' 이라고 한다. 念은 현재를 뜻하는 今과 마음을 뜻하는 心이 합쳐진 말이다. 곧 正念이란 마음이 현재에 머무는 것이다. 흔히 ‘마음챙김(mindfulness)’이라 부른다. 나에게 주어진 현재를 사랑하기 위해서 중국 宋나라 성리학자 장사숙張思叔(1033~1107)의 좌우명 글귀가 떠오른다. ”착한 일을 보거든 자기가 한 것처럼 기뻐하고 나쁜 일을 보거든 자기가 한 것처럼 아파하라(見善如己出 見惡如己病)“고. 오늘 하루도 참 많이 남아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많이 남았다. 생각해 보면 너무 많다. 반성해야 할 성찰도 많고 돈이 안 드는 따뜻한 말도 너무 미루고 왔다. 물건을 정리해야 하고 말로서 못할 사연이 있다면 편지 쓸 곳도 참으로 많다. 더욱 자기 일이 있는 시인이나 작가는 또한 얼마나 일이 많은가? 그런데 나는 시간이 많지도 않으면서 자꾸 내일로 미룬다. 내가 잘하는 것은 감탄과 감동이다. 혼자 하는 일이다. 그러나 사회적인 한 사람으로 더불어 하는 일에 좀 더 마음을 베풀어야 하는데 그건 참 모자랐다.
지금부터 좀 더 잘 하고 싶은 것은 ‘말’ 이다. 형식적이지 않고 진심을 담은 말은 생각보다 어렵다. 늘 하는 말인데도 다듬어지지가 않는다. 말이 가장 쉽고 말이 가장 어렵다. 하루 내내 하는 말 중에 형식적인 말이 거의 대부분이다. 나이도 있지 않은가.
좀 더 사랑을 가지고 진심을 담아 말하고 싶다. 이제 겨우 이것을 말하는 자신이 부끄럽기 짝이 없다. 나는 사무적으로 말을 해야 하는 사무원도 아닌데 말이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을 보내라. 그 사람을 수호할 말의 부적을 보내라. 썩지 않을 것을 보내고 싶다면 말을 보내라“ 와카마쓰에이스케가 『말의 선물』에서 한 말이다.
말은 시간과 같아서 그 말을 전하는 대상의 마음에 나이테처럼 그어진다. 가능한 한마디에서조차 그 사람의 마음을 더듬는 말의 온도를 생각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람들은 서로 서운하다. 나도 그런 순간들 가령 "얼마나 아파?" 하고 말해 주는 사람이 돼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말한다.
80이 되어서야 겨우 이제사 깨친다. 지금은 저녁을 먹는 시간•••오늘도 많이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