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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2차 백두대간 산행
백봉령-생계령-고뱅이재-석병산-두리봉-삽당령
2013.11.03 무박
거리:18.5km
시간 8시간
숲이 말하다
침묵의 언어를.
03:09
백복령
백복령의 유래를 약재 복령(茯笭)에 두고있는 해석이 있지만 조금도 수긍이 가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게 씌여있다. 복령은 소나무 뿌리에 기생하는 일종의 균사체(버섯?)인데 마치 감자처럼 생겼다. 좌우간 산경표에는 白福嶺으로 표기되어있다. 백복령과는 아무 관계없는 표기이다.
석병산의 위용
새벽 03시09분 쌀쌀한 백봉령의 바람을 뒤로한 채 대간길에 오른다. 들머리는 백두대간 훼손으로 악명 높은 자병산이다. 이름도 아름다운 붉은 병풍의 자병산은 원래 875m나 되는 높은 산이다 원래는 대간길이었던 자병산은 한라 시멘트(주)에서 시멘트의 원료인 석회석을 채취하면서 철저히 파괴되고 말았다. 뿐만 아니라 진입로 마저 마구 파헤쳐 들머리에 진입하기 조차여간 어려운일이 아니다. 소위 상습 알바지역으로 변했다. 우리 일행도 두어차례 알바가 있고 난 후 제대로 길을 들어설 수 있었다.
안개가 점차 짙어지더니 생계령 지날 무렵에는 제법 비가 되어 헛뿌렸다. 비옷을 입지 않아 재킷이 비에 젖기 시작했다. 암울한 날씨였다. 비젖은 낙엽과 미끄러운 석회암 바위며,돌 나무의 뿌리들이 쉴새없이 걸음을 위협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마치 뱀처럼 어둠을 빠져나가는 동료들이 부러웠다. 나는 지난번 건의령 지날 때 입은 무릎 부상으로 걸음이 여간 조심스럽지 않았다 길은 부침이 심한 파도처럼 끊임없이 요동쳤고 서서히 경사도를 높이는 오르막은 걸음을 마냥 불안하게했다
어둠을 헤치며 생계령 지나 822봉거처 929봉 오르는 길을 오른다 길은 엄청 가파르고 미끄럽다. 길 곳곳에 위험이 뱀처럼 또아리를 틀고 실수를 기다린다. 칠흑같은 밤길이라 상황이 도무지 가늠되지 않았다. 달아나지 않으면 죽음만이 해법인 빨치산처럼 나는 사력을 다해 허겁지겁 산을 오른다. 재킷은 이미 물기가 흥건하다. 뜨거운 호흡이 몸을 데운다. 모험을 사랑하지 않는 내가 지금 몰골 사나운 모습으로 무슨짓을 하고있는지 모르겠다. 한발 앞서 걷는 동료를 바라보며 미친 사람처럼 헛웃음을 웃는다 머리 위 까마득한 곳에서 반짝거리는 랜턴 불빛이 희망을 앗아갔다.
고병이재에 도착하니 일행 두분이 아침을 들고 있었다. 후미대장님과 우리도 식사를 했다. 김밥 한줄에 뜨거운 물이 전부다. 대간길이 끝나갈수록 아침밥은 더욱 빈궁해졌다. 살림살이를 줄이는것은 산사람들의 업이다.
배낭에서 불요불급한 물건을 들어내는것 처럼 욕심의 군더더기를 줄이는것은 우리네 삶에서도 꼭 필요한 덕목이 아닐까.
우리는 너무 많이 가졌거나 가질려한다.
배낭을 싸듯 담백한 삶의 자세를, 스님들의 걸망과 같은 소박한 삶의 가치를 나는 산길에서 배워간다.
靜行
안개가 신비로운 모습으로 사람을 감싼다. 키 큰 나무에 쌓인 채 길을 걷는 모습에서 자궁에 갇혀 꼼지락거리는 태아의 모습이 연상된다.
길에 생각을 집중시키기 좋은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고요한 날씨다. 세상 이야기를 다 거둔 만추의 속살을 헤치며 내 몸을 빙이한듯한 동료들의 모습의 뒷모습으로부터 그림자처럼 묻어있는 나를 본다.
"명기씨 뒤돌아봐!" 내가 나를 뒤돌아 본다.
숲은 녹슬듯 삭아내린다.
낙엽송의 가느디 가는 바늘잎이 떨어진다. 항암제 치료를 받는 아이들의 머리털 같다.
숲에 슬픔을 부여하는 짓은 어리석다. 숲은 생멸의 교과서인 까닭이다.
잎이 지는 한켠에서 부지런히 진달래가 꽃봉우리를 살찌우듯 숲에는 오롯이 생멸이 공생한다. 하지만 생멸이 아무리 턴테이블 위의 LP판 처럼 돌아간다하여도 생멸을 돌게하는힘은 오직 적멸의 法이다. 불생 불멸, 부증 불감의 인류 이전부터 오로지 변함없이 세계를 지배해 온 생명의 본질이다. 죽어 아쉬울게 없고 태어나 즐거울게 없는 감성 이전의 본질.
크다란 각성이 바다 위에 비친 보름달의 모습처럼 떠다닌다. 없다고도 할 수 없고 있다고도 할 수 없는 커다란 空의 세계. 숲에 그런 세계가 있었다.
걷다 지치면 웃어가면 되지.
떠나갈 때를 알고 떠나가는 자의 뒷모습처럼 숲이 멀어지고 있습니다. 숲이 멀어진다는것은 마음으로 부터 떠난다는것. 회자정리, 생자필멸의 滅離(멸리)를 감당하고 있다는 뜻입니다.
攻防에 지친 전장처럼 숲은 허무하고 결별이 생멸의 분별을 일깨울 때 가을은 참 가을답게 사라져간다는 생각이 듭니다.
열매를 맺었던 혹은 그렇지 않던 가을은 겨울을 향하여 잎을 떨구어 장엄한 열반을 보임으로써 비로소 無生法忍을 얻었습니다. 생멸을 통해 나지도 없어지도 않은 영원한 진리의 자리를 얻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내가 보고 깨닫을 수 있는 한계는 여기까지입니다. 천변만화의 생멸의 순간을 나는 다만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습니다.
낙엽이 무리져 흩어집니다. 바람없어도 낙엽은 지고 바람이 불면 큰 북처럼 내 가슴을 치며 떨어집니다. 소리없는 낙엽이 가슴을 치고있습니다. 숲은 비로소 세간상을 넘어 생멸을 통해 생멸의 空함을 보여줍니다.
그런 길을 걷습니다. 걷고 또 걷습니다. 느린 걸음으로 포행 삼매에 젖어듭니다. 화엄에 빠지면 화엄 삼매를 얻고 능엄에 빠지게되면 능엄 삼매에 들게 되듯 나는 느린 걸음을 통해 삼매에 들것입니다.
그리하여 길 끝 어딘가에 천만근의 진중한 무게로 나를 기다리고 있을 生의 一覺을 만나고 싶습니다.
세상이 실루엣처럼 은은하다. 생략이 강조된 이 은근한 풍경을 통해 세상의 원형을 바라보는것 같다. 세상 밖에 드러남이 없이 내 심리의 내면에서 나를 조정하는 정신적 원형.
滿行
일월문 못가서 있는 동굴
만덕봉
일월문
일월문 열고 삽작 밖으로 나가면 옥계면 산계리 황지미골이 나타난다. 황지미는 윤지미처럼 고어가 화석처럼 붙어 만든 이름이다. 봉황이 드나드는 연못이 있었다고 하여 凰池尾골이라 쓴다는데 연못에 무슨 꼬리가 달린것도 아니고 영 해석이 엉망이 되고만다. 봉황 황자에 고개나 산을 의미하는 지,산을 의미하는 미자가 붙여져 생긴 이름이다.
일월문 밖으로 구름이 넘어가며 장관을 이룬다. 마치 거대한 폭포 줄기같다. 시간에 맞추어 석병산에 도착한것은 큰 행운이다. 한송이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밤새 소쩍새가 울듯 이 황홀한 관경을 만나기 위해 우리는 새벽비 맞아가며 산에 올라 온 모양이다.
석병산은 두개의 바위 봉우리로 이루어져 있다. 일월문이 있는 봉우리가 정상으로 정상석이 세워져있다. 두 봉우리 사이는 멀지 않아 쉽게 접근할 수 있다.
上行
돌리네 혹은 와지
카르스트 지형으로 암반이 융해되어 지표가 가라앉아 생긴 웅덩이다.
-펌-
백복령∼삽당령 구간을 탐방하다보면 생계령 가는 중간지점에 크고 작은 움푹 파인 지형이 산재돼 있는 것을 보게 된다.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왜 웅덩이가 파여 있을까라고 생각할 텐데 이곳이 바로 천연기념물 제440호로 지정되어 보호 관리되고 있는 정선 백복령카르스트 지대이다. 물에 용해됨(용식)에 따라 암석이나 지층이 침식되는 일종의 화학적 풍화작용이라 한다. 이 지형의 가장 특징적인 것은 지하에 하천이 흐르고 있다는 점이며, 때때로 대규모의 석회암동굴과 표면에 원형의 와지(움푹 파여 웅덩이가 된 땅)가 형성되는데 이 지형이 바로 돌리네인 것이다. 명칭은 지역마다 못밭(연못지), 움밭, 숫가마, 구단 등 달리 불리고 있는데 돌리네 사용목적에 따라 달리 불려지는 게 아닌가 싶다. 북쪽 능선 주위에는 50여개의 크고 작은 돌리네, 우발레 등이 좁은 지역에 원시상태 그대로 밀집해 있다. 다른 지대와 다른 점은 경작지로 이용되기보다는 다양한 식생으로 덮여 있다는 것과 일정한 면적에 돌리네가 집중적으로 발달하고 있다는 것이다.
석병산의 위용
일월문이 조그만 창처럼 보인다. 석병산의 콧구멍일까
긴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어김없이 찾아드는 운명처럼 아침이 찾아 왔습니다. 그것은 안도의 숨결이었으며 어쩌면 희망이었을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주어진 마지막 자비의 기회같았고 메마른 대지 위에 어김없이 내리는 달디단 이슬같았습니다.
安詳(안상)이 산길을 經行하며 풀잎을 떼어내듯 나를 괴롭혀 온 망상을 줄여갑니다. 적멸이라는 오직 하나의 화두로 머리를 꽉 채운 오만가지 망상을 다 누릅니다. 그러다문득 마음에 적요가 젖어들면 木神처럼 편안한 아침이 어느듯 본래의 나를 에워삽니다. 생각 해보니 산길의 모든 아침은 늘 이렇게 고요했으며 고요가 만들어 낸 밀교처럼 신비한 離苦得樂의 자기 정화야말로 세상 萬法의 근원적 이치라 생각되었습니다.
아침 햇살에 숲이 눈부시다. 빗방울을 머금은 나뭇가지는 보석처럼 반짝거린다. 신이 만들어준 샹들리에. 이렇게 빛나는 숲은 처음이다.
탄성을 누르자 입가에 은근한 미소가 저절로 생겨났다. 이런게 행복이다. 행복은 찾아가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본래 존재하던것을 꺼집어 내는것이다. 은근하게 배어나 천을 물들이는 꼭두서니처럼 마음으로부터 스며나와 심신을 온통 흔드는 이런것이 행복이다.
잠이 온다 잠이 온다.... 오늘은 졸음 산행을 하나보다.
어쩌면 이렇게 홀연히 가을이 가벼렸을까! 어둠이 걷히며 드러난 숲은 어느새 겨울의 초입입니다.
바람에 일렁이는 파도처럼 시간이 물결칩니다. 밤하늘에 달빛과 별빛이 흐르듯, 고요한 마음으로 음악이 찾아들듯 이 홀연한 아름다움으로 숲은 눈부십니다.
문득 존재에 눈을 떠 찾아 낸 부처의 자리처럼 설명도, 노력도 필요없이 얻은 법열의 깨닫음이 늦가을의 새벽 숲을 막 들어서는 이런 기분일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아침 숲은 이처럼 상쾌하고 분명하며 단아한것입니다.
세상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면 산은 오로지 산이요 물은 오로지 물이듯 가을은 오로지 가을입니다.
붉고 노란 단풍 그늘에서 멀어지는 그림자를 바라보면 연기가 사라지고 등불이 꺼질것 같은 공허함을 느낍니다. 그러기에 세상은 이처럼 空 위에 청정합니다.
나를 죽여가며 산길을 걷습니다. 따라오는 당신 또한 사라집니다. 모든것이 떨어져나가 결연히 空性의 길이 열릴 때 생멸을 넘어 겨을이 찾아왔습니다. 응당 그래야할것처럼 찾아오고야 말았습니다.
道師
꼭 힘내야 할 곳에는 낙동산악회 푯말이 있다.
마지막 단풍
흘러가는 구름, 더넓은 가을 하늘, 싱그러운 개암의 냄새들. 보고 듣고 깨닫고 아는 견문각지의 능력이야말로 신이 인간에 부여한 최고의 선물입니다.
欠少什么 ? (qian suo shen me?) 무엇이 모자랍니까? 세상은 이렇게 부족함이 없는데 대체 무엇이 부족합니까? 문득 임제 스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꽉 영글어 더 할것도 덜 할것도 없는 세상. 그래서 가을을 결실의 계절이라고 하는 모양입니다. 내 몸과 마음이 잘 익은 과일처럼 신실합니다. 이런 기분이라면 백두대간 어디라도 걸을 수 있을것 같은 불같은 자신감이 입니다. 하지만 오늘은 견과류와 같은 단단한 발걸음으로 나만의 가을 길을 걷고싶습니다. 세상의 온갖 고독을 다 불러모아 청승이라해도 좋을 길을 만들어 가고싶습니다.
나를 보고 싶습니다. 오늘은 산이 아니라 진정한 나를 보고 싶습니다. 길 섶 어딘가에 고여 있을 웅덩이 속 물을 보고 싶습니다. 낙엽 한잎에서부터 웅덩이에 고여 성숙을 기다리는 청춘에 이르기까지 세상 만물에는 실상의 세계가 있습니다. 눈 앞의 숲처럼 세상의 모든 보이는것이나 만져지는것들은 언젠가 변하고 맙니다. 숲이 그랬고 내가 그랬으며 내 청춘이 그랬습니다. 수많은 인연이 물결처럼 인연을 따라 흩어지고 모입니다. 그래서 불생불멸입니다. 숲을 관통하여 길이 이어지듯, 세상을 관통하여 시간이 흐르듯...
숲을 지나 희망의 날머리에 닿으면 비로소 길은 시작됩니다. 길이며, 숲이며, 가을에 이르기 까지 세상은 생멸의 이치로 가득합니다.
생명은 물의 역사요 인생은 바람에 살랑이는 물결에 불과하다. 비록 잠깐 스쳐가는 짧은 역사라 할지라도 물이 영원하듯 우리의 실상은 영원한것이다. 실상을 보는것이 지혜이다. 바람이 어떤 물결을 만들든 물은 다만 물일 뿐. 산이 어떤 감동으로 나에게 다가왔던 산은 오로지 산으로 남을 뿐이다.
세상은 맑고 투명해 비로소 삶을 투사하기 좋고 마음은 맑아 언어에 옷을 입히기 좋습니다.
풍경의 외피를 걷어내고 그 자리에 조용히 법문을 올려놓습니다. 세상은 반야경처럼 비어있고 諸法은 법화경처럼 신실합니다.
가을이 깊어가고 있습니다. 마음으로 향하는 긴 계단이 마침내 가을의 심연에 와 닿았습니다. 낙엽이 더문 더문 허공에 흔적없는 바람을 만들다 마른풀 사이에서 걸음을 주춤거립니다. 말라버린 곤충의 사해 위에 까닭없는 슬픔이 찾아옵니다 존재는 늘 이렇게 슬픔을 좇아다닙니다.
지나치고 버려진것들이 따뜻한 커피를 들고 찾아오는것이 가을입니다. 과거를 통해 미래를 모색하듯 버려지고 잊어진 기억의 틈을 통해 생각이 선명해 지기를 바랍니다.
떨어진 낙엽과 더불어 풍화되어가는 삶을 확인한다는것은 검은 밤하늘에 사라지는 불꽃만큼 아름다운 삶의 관조일거라 생각됩니다. 차가워진 바람속에 영혼이 이토록 따스해짐을 느끼는것은 가을 바람이 새삼 불붙게한 삶의 의지때문이 아닐까요. 그래 살아야합니다. 살아야겠습니다. 수억의 잎들이 부딛혀 마지막 소리를 내는것처럼 나도 세상에 살을 부비어 살아야겠습니다.
모자를 깊이 쓰고 종종걸음으로 걸어갑니다. 아직 산은 저만치 남아 목표를 찾지못한 시선을 불안하게하지만 나는 세상이 내게 남긴 성적표를 더 이상 믿지않기로 했습니다. 이제 11월의 환승역을 지나 나는 늦지않게 겨울로 갈것입니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겨울 일찍 경험하지못한 미증유의 희망이 차오릅니다.
사람들을 다 떠나보내고 홀로 산길을 걷는다는것은 어찌보면 고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결벽성의 발로일지도 모릅니다.
혼자임으로써 얻게 될 외로움의 궁벽성을 다른 어떤것으로도 대체하고 싶지않은 일종의 아집이요 자기 만족입니다.
가을이기에 가을 길이기에 나는 나에게 던져진 이 고독의 고립성에 더 진한 자애를 느낍니다. 이것이 내 삶의 방식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제각각의 색채가 있고 규범이 있다는것은 영혼을 쉬게하는 자신만의 솔리튀드(고독)의 방식이 있다는 뜻합니다. 고독은 세상의 사랑과 본질을 스스로에게 회향하는 일로 음미하는것이지 내세울 일이 아닙니다. 나는 내 자신의 기량을 비교없이 유지하는 삶을 사랑합니다. 산을 하나 넘으면 팔만 사천 방편문이 싸리문 하나같다는 말처럼 그 동안 수많은 산을 넘었지만 오늘 아침의 산길만이 산길처럼 제대로 오롯하고 지나온 모든 산길이 다 이러하였을것이라는 확신에 사로잡힙니다. 삶의 여름에 나를 숨겨 온 무수한 생의 곁가지들을 하나씩 쳐나가다 보면 나의 相은 어떤 모습일까요.
諸法에 實相이 있다하여도 내 삶을 보편적으로 해석할 수는 없습니다. 나는 내 몫의 삶을 내 나름으로 살아감으로써 진리의 근원적 실상에 도달할것입니다.
진정한 스승은 길 밖에 있는것이 아니라 길 위에 있습니다. 하지만 오늘 숲은 너무도 고요해 아무리 정신을 집중한다하여도 곧 마음의 산란함을 진정시킬 수 없습니다. 가을 숲길은 이렇게 진리를 숨긴 미망처럼 감성을 자꾸 부추깁니다.
我相을 지우려 몸부림칠수록 집착의 그물에서 한치도 벗어날수 없는 이런 중생의 모습 또한 어쩌면 그대로 자연스런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하여 바람이 불면 부는대로 떨어져 밟히면 밟히는 낙엽처럼 내 삶은 영원히 허공처럼 남을 모양입니다.
가을은 잎새를 떨구고 햇살은 낙옆을 익게한다. 그렇게 익은 채 흙이된다.
석병산 지나면 완만한 하산길이지만 우리는 아무도 그 완만함이 주는 거짓에 속지 않는다. 안만하다는것은 고요히 사위는 불꽃과는 다르다. 산길의 완만함은 잔물결 처럼 굽이친다는 것이다. 그냥 길이 시키는대로 몸을 맏겨 오르내리면 그만이다. 하지만 무릎 인대가 고장난 내 다리는 내리막길이 여간 고생스럽지 않다. 길가에 가득한 산죽은 계절을 잃고 가을에 어울리지 않은 빛으로 남아있다. 서걱 서걱 풀잎스치는 소리를 듣는다. 길이 다 끝나가는 모양이다.
황홀한 황금빛 낙엽송을 끝으로 오늘 길이 끝이났다 아직 11시가 채 되지 않은 아침이다. 여유가 우리에게 안도감을 주었는지 생계령지나 오르던 험한 길의 기억이 깨끗이 지워지며 이번 대간길은 참 순탄한 길이었다고 기억 속에 갈무리될것이다. 세상 사는 이치가 그렇다. 오직 기억하고 싶은것만 기억할 따름이니까. 따듯한 목욕물이 기다려진다. 목욕은 좋은 기억인 모양이다
11:00
삽당령은 지팡이를 짚고 넘어야할 정도로 험한 고개라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삽당령의 揷(삽) 은 본래 쇠스랑의 삼지창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 어디를 보아도 삼지창을 연상시키는 구석은 없어보인다. 지팡이가 필요할 만큼 고개가 험해보이지도 않는다. 그렇다고 이름이 붙여졌던 그 때도 이런 모습이었을거라는 생각은 금물이다. 아직도 삽질이 부족한지 포크레인 한대가 삽당령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 후 기-
오브리 라는 말이있다, 룸쌀롱같은데서 노래 반주를 부탁하며 내는 돈을 오브리라고 하고 그때 하는 연주를 오브리 연주라고 하는데 반주자에 의해 악보없이 노래반주가 즉흥적으로 이루어 지는것을 말한다.
그러나 오브리의 원개념은 obligato 즉 피아노 혹은 관현악 따위의 반주가 있는 독창곡에서 독주적 성질을 가지는 다른 악기를 곁들이는 연주를 말한다.
오늘 나는 오브리가토의 길을 걸었다. 숲이 들려주는 레퀴엠에 맞추어 나는 나만의 길을 연주했다. 길이 꽉 찬듯한 알뜰한 충만감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행복을 위헤 길을 나선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행복을 얻은 기분이었다.
번외 관광
추 암
광화문의 정동쪽 끝을 정동진으로 부르는것은 이해할만 한데 남한산성의 정동쪽을 추암이라고 기념해야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남한 산성이 추암을 기준으로 만들어 졌을리도 없을터이고 문족의 치욕인 남한산성을 굳이 추암에 결부시켜 들먹거려야할 이유도 없어보이는데 집채만한 바위에다 이렇게 알뜰하게 기록으로 남긴 뜻은 이 땅의 공무원이 아니면 참으로 생각해내기 힘든 예산 낭비적 아이디어라 생각된다.
옛날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추암 바닷가에 한 남자가 살았는데 소실을 얻자 본처와 소실간의 투기가 극심해 마침내 하늘을 노하게했단다. 그래서 하늘로 부터 벼락응징을 받아 두 여자는 죽고 남자만 살아남게되었다. 그 남자가 홀아비로 남아 추암 바위가 되었단다.
죄는 남자가 짓고 벌은 여자가 받게되는 남존여비 사상이 더럽게 묻어있는 전설이다.
동해불과 백두산이 마르고 달도록~~~ 우리 애국가에 등장하는 기념비와 같은 추암바위에 전혀 어울릴것 같지 않은 전설이니 좀 그럴듯한 전설을 하나 더 만들어 붙였으면 좋겠다.
웃는 느낌이 동갑내기들 같은데....
찍사들이 단단히 무장하고 사진을 찍으러 왔다. 지금 이시간에 사진 찍으러 오신분들은 사실 상급 찍사는 아니다.
찍사와 일반인의 차이는 빛을 볼 줄아는 능력에 있다. 우리같은 일반인들은 대상을 가둘줄은 알아도 빛을 가둘만한 실력은 없다. 좋은 빛은 하오에 찾기 어렵다. 지금은 찍사들이 보따리 사는 시간일 따름이다.
좁은 길을 함께 걸으면 연인이 된다. 산꾼들도 오솔길을 오래 걸으면 연인처럼 우정이 돈독해진다. 살을 부비며 얻은 사랑은 진하고 오래간다.
乙 乙 乙
청산에 살리라 미샤마이스키 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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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저건 왠 웅덩이지? 예비군 참호인가?
그냥 무심히게 지나쳤는데..
그것이 돌리네 카르스트 지형이라는 글을 읽고 쓴웃음 지었습니다.
어릴적 반에서 전교 일등하던 친구가 생각납니다.
아무리 따라 할려해도 안되고, 다른 무엇인가 있는..
그땐 그것이 무엇인지 몰랐는데 지금은 알고 있습니다.
DNA가 다른거죠.
맞을 겁니다 .
세상은 1%의 사람이 움직입니다.
POLL님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은 저 혼자 만의 생각은 아닐듯 싶습니다.
초이님도 츠암~~~
다르죠,같은 사람이 어디있어요.초이님은 저보다 엄청 빠르시지 않습니까.산에가면 저는 그런 분이 제일 부러워요.
오죽하면 후미조 동료에게 도사님이라 부르겠습니까 ㅋㅋ
꼴찌를 하더라도 열심히 산을 탔다는 소리는 듣고 싶어서요.
과찬이지만 감사합니다^^*
명산님께서 거듭 이런 댓글을 주시니 솔직히 더 부담이 됩니다.
워낙 두서없이 쓴 글이라 저도 제가 뭘 말하려는지를 모르겠습니다 ㅎㅎㅎ
몇번 남지 않는 대간길이지만 끝까지 후기를 남길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새벽 안개에 빗방울 까지 옷깃을 적시니
오늘도 기분좋은 산행은 틀렸나보다 했는데...
오!!석병산~~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구름위를 걷고 있는 느낌 ㅎㅎ
쌓였던 피로가 단번에 사라져 버리고....
정말 기분 좋은 산행이였습니다.
언제나 멋진 사진에 후기 감사드립니다.^*^
석정산인님의 단아안 발자국 소리에 귀 기울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네요.
어둠이 깔린 새벽길에 귀를 곤두세우고 님의 걸음에 맞추어 따박 따박 걸어가다보면 어느새 새벽...
별것 아닌것 같은 단순한 상황이지만 그래도 이시간 만은 마치 스님들의 정진처럼 마음이 맑았습니다.
얼마남지 않은 대간길이나마 소중히 여겨 알뜰히 타도록 해야겠습니다.
감사합니다^^*
poll 원장님!
석병산은 우릴 따뜻하게 품어 안았다.
시계제로 그 무아지경 무령도원에서 맘껏 외쳐본 하늘세상
운무빗속으로 힘들게 걸어왔지만
세상이치가 고진감래가 아닐련지요!
영화장면 같은 비경속에 잠영하다 갑니다...
늘 건안하시고 22구간에서 못다한 사랑얘기 나누어요!
영감님과 무슨 사랑 얘기를 ㅋㅋ
세상 살아가는 놀음에..
힘들어 웃음도 잃어버린줄 알았는데..
폴님 앞에서 웃고 있네요..
감상 잘 하고 갑니다...
세상에나,늘 웃는 얼굴이셔서 근심이라고는 없는 도사신줄 알았는데...
언제던 불러주시면 후미조를 대동하고 (저는 술을 못하는 관계로) 기거이 출동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