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의사(忠義祠)에 모신 곽재우 의병부대 18위 제장
. 이중 2위는 무명 의병 신위이다. 나머지 18신위 중 앞에서 소개가 된 곽재우를 제외한 17장령의 신위를 모셨다.
* [군관(軍官) 주몽룡(朱夢龍) 1561~1633]▶ 진주 출신으로 21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이 되었다.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관을 맡아 전공을 세웠으며 그 공로로 김산군수(金山郡守)를 역임했다. 사후에 형조판서의 직위를 받았으며, 진주 평천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 [영장(領將) 윤탁(尹鐸) 1554~1593]▶ 합천 삼가현 구평에서 거주했으며, 훈련원의 봉사로 재직했다. 1592년 삼가에서 스스로 의병을 모집하여 거느리고 와서 곽재우 휘하에서 활동했다. 삼가대장(三嘉代將)을 맡았다. 1593년 6월 진주성이 함락될 때 전사했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 병조참판의 직위를 받았다. 삼가의 귀연서원에서 제향하고 있다.
* [도총(都摠) 박사제(朴思齊) 1549~? ]▶ 합천 삼가에서 살았다. 임진왜란 발발 전에 성균관의 학유(學諭)였다. 곽재우 장군이 경상도의 김사 김수(金睟)로부터 반격을 받아 심히 위험한 지경에 이르렀을 때 그를 구원하자는 격문을 만들어 적극적인 구명활동을 했다. 일본군이 함안지방을 노략질하고 낙동강을 건너 의령지방으로 침입하려 할 때 곽재우 휘하 의병부대의 도총이라는 중책을 맡아 삼가지방을 지켰다. 사후에 이조참의 직위를 받았다.
* [수병장(收兵將) 오운(吳澐) 1540~1617]▶ 영주 출신으로 퇴계 이황과 남명 조식 밑에서 수학했으며, 1566년 충주목사, 사성을 거쳐 광주목사(光州牧使)를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그는 주로 의병 모집을 담당했는데, 백령(白嶺) 등지에서 모집한 의병의 수가 2,000명에 달했다. 경주부윤과 공조참의 등을 역임했으며, 1594년(선조 27)에는 명나라 장수 진린의 접반사로 활동했다.
* [수병장(收兵將) 이운장(李雲長) 1541~1592]▶ 의령에서 거주했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1568년에 좌부장(左副將)이 되었다. 임진왜란 때 전 목사 오운과 함께 곽재우 의병부대의 수병장이라는 중책을 맡았다. 이 의병부대가 정암진, 즉 솥바위 나루를 수비하고 있을 때 일본군이 침입하자 전투를 벌이던 중 전사했다. 사후에 병조참의의 직위를 받았다.
* [선봉장(先鋒將) 배맹신(裵孟伸) 1560~? ]▶ 의령 출신이다. 33세 때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전 훈련원 판관 심대승(沈大承)과 함께 곽재우 의병부대의 선봉장을 맡아 활약했다. 사후에 병조참의의 직위를 받았다.
* [선봉장(先鋒將) 심대승(心大承) 1556~1606]▶ 의령 출신으로 훈련원 판관과 군자감정 등을 역임했다. 임진왜란 때 곽재우 의병부대의 선봉장으로서 정진과 장현 등지에서 전공을 세웠다. 사후에 좌승지의 직위를 받았다.
* [독후장(督後將) 정연(鄭演) ?~? ]▶ 합천 삼가현에 거주하던 중 의령에서 곽재우가 의병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듣고 참여해 의병부대의 독후장의 직책을 맡았다. 벼슬은 첨중추에 이르렀다.
* [돌격장(突擊將) 권란(權鸞) ?~? ]▶ 의령 출신으로 곽재우 부대의 돌격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선두에서 의병활동을 했다. 벼슬은 군위현감이었으며, 사후 선무원종공신 2등과 좌참찬의 직위를 받았다.
* [조군(調軍) 정질(鄭晊) ?~? ]▶ 합천 초계 출신이며 삼가현 육동에서 살았다.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량을 조달하는 직책을 맡았다. 지역 지리에 밝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 [전군(典軍) 허언심(許彦深) 1542~1603]▶ 의령현 가례에서 살았으며 곽재우의 매형이다. 의병부대에 자신의 많은 곡식과 가동(家僮)을 내놓았다. 의병부대의 군향(軍餉)을 관장했으며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했다.
* [전향(典餉) 노순(盧錞) 1551~1595]▶ 초계에서 살았으며 남명 조식의 문인이다.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궤(軍饋)를 관장했다. 1593년(선조 26)에 영변부사에 부임했다.
* [치병(治兵) 강언룡(姜彦龍) 1545~1613]▶ 의령 출신으로 임진왜란 이전에는 유곡찰방을 했으나 왜란 발발 후에는 의병부대의 병계 즉 병기와 기계 등을 담당했다. 사후에 좌승지의 직위를 받았다.
* [군기(軍器) 허자대(許子大) 1555~? ]▶ 삼가 출신으로 곽재우 의병부대에서 군기 제조를 책임지고 있었다.
* [기찰(譏察) 심기일(沈紀一) 1545~1610]▶ 의령 출신으로 곽재우 의병부대는 함안지방에서 의령으로 침입해오는 일본군을 방어하기 위해 정암진을 지키고 있었는데 이때 그가 책임을 지고 있었다. 특히 그는 정호(鼎湖)의 배를 지키고 있으면서 왕래하는 것을 기찰하는 직책을 맡았다. 사후에 병조참판의 직위를 받았다.
* [복병(伏兵) 안기종(安起宗) 1556~1633]▶ 의령 출신으로 그는 낙동강 연변인 유곡에서 매복해 있다가 전공을 세웠다. 그때부터 곽재우 의병부대의 복병은 그의 직책이 되었다. 사후에 이조참의의 직위를 받았다.
* [군관(軍官) 조사남(曺士南) 1560~1592]▶ 의령 출신으로 벼슬은 주부(主簿)를 역임했으며, 곽재우 의병부대의 군관을 지냈다. 그는 기강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사후에 선무원종공신에 오르고 좌승지의 직위를 받았다.
충의각(忠義閣)
의병탑(義兵塔)
충익사는 1972년 4월 22일 의병기념사업회가 구성되고, 주민들이 성금을 거두어 의병탑을 건립했다. 의병탑은 곽재우 장군과 17인 장령의 위훈을 기리고 그들의 영혼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탑이다. 탑의 높이는 27m이며, 가운데 둥근 18개의 백색 고리는 곽재우 장군과 17장령을 상징하며, 백색 고리 양옆의 팔자형 기둥은 의병이 든 횃불을 상징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