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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묵상글 들 (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맛없는 십자가는 지지 않는다.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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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맛없는 십자가는 지지 않는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그냥 <십자가 현양 축일>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그냥 십자가와 거룩한 십자가는 어떻게 차이가 납니까?
그것은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와
예수님이 달려계신 십자가의 차이지요.
그런데 예수님이 없는 십자가는 어떤 것입니까?
앙꼬없는 찐빵이 아닙니까? 맛없지요.
우리도 맛없게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병고를 예수님 없이 짊어지는 겁니다.
또는 다른 사람의 고통에 동참함 없이 고통만 당하는 겁니다.
그러니까 맛없는 십자가란 사랑 없는 십자가요 비인격적인 십자가입니다.
그 십자가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예수님께서 매달려계셔야 하고 하다못해
내가 사랑하는 가족이나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이 달려있어야 맛있습니다.
나이를 먹어가는 표시인지 가장 불행하고 불쌍한 죽음을 생각하면서
독거노인의 죽음과 고통에 대해 종종 생각합니다.
그것은 나의 죽음과 고통에 같이 해줄 사람이 없는 죽음과 고통이고,
나의 죽음과 고통을 바쳐줄 대상이 없는 죽음과 고통을 말하는 거지요.
여기서 프란치스코의 기도를 묵상하며 오늘 축일 묵상을 끝냅니다.
"주님, 나를 사랑하시는 당신의 사랑 때문에
황송하옵게도 당신이 죽으셨으니
당신을 사랑하는 사랑 때문에 나도 죽을 수 있도록
당신 사랑의 불과도 같고 꿀과도 같은 힘으로
하늘 아래 있는 모든 것에서 내 마음을 빼내어 차지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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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님.
오늘의 묵상
고통과 슬픔의 상징인 십자가가 영광의 상징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 주는 것이 요한 복음입니다.
구약의 구리 뱀은 죽어 가는 사람을 살리는 특효약이었습니다.
이집트에서의 삶을 그리워하는 이스라엘 백성의 불평불만에 불 뱀을 내리신 하느님께서 모세의 간청으로
다시 이스라엘 백성을 살리시고자 구리 뱀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요한 복음에서 구리 뱀을 다시 언급하는 이유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더 이상 죽음과 고통, 그리고 슬픔의
상징으로 여기지 말라는 가르침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대개 삶의 고통과 슬픔을 하느님의 자비하심과 도우심으로 얼른 사라져야 할 것으로 여깁니다.
고통과 슬픔 안에 함께 아파하시고 함께 울어 주시는 하느님을 우리는 달가워하지 않습니다.
영광과 기쁨 속에 하느님께서는 우리와 즐거이 함께하셔야 한다는 강박이 신앙을 괴이한 처세의 도구로 타락시키고 맙니다.
요한 복음이 쓰인 당시 교회 공동체는 늘 박해의 위협 속에 살아갔습니다.
얼른 박해가 끝나고 고통이 없는 행복의 나라에서 주님을 섬기고자 한 마음이 얼마나 간절하였을까요.
그러한 공동체에 요한 복음은, 세상의 구원은 십자가의 희생, 바로 그 안에 자리 잡고 있다고 가르칩니다.
어려울수록 서로를 배려하는 나의 자그마한 희생 안에서 구원은 이미 시작되었고, 거기에 참된 행복과 영광이
함께한다는 사실을 요한 복음은 짚어 냅니다.
지금을 불평하는 것은 지금을 죽이는 것이고, 지금의 상황이 어떻든 서로 나누고 토닥이고 보듬어 주는 것은
지금을 영광스럽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영광은 삶의 고통이나 슬픔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과 슬픔마저 함께하는 서로에 대한 애틋한 사랑입니다.
- 박병규 요한 보스코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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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구원을 위해 지신 십자가를 묵상하며 경배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기원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전승에 의하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노력으로 발견되었다. 황제는 이를 기념하여 335년 무렵 예루살렘에 있는 예수님의 무덤 옆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였다. 그 뒤로 십자가를 경배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9월 14일에 지내는 것은 이날 십자가가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복음: 요한 3,13-17: 사람의 아들도 높이 들려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먹을 것 때문에 하느님과 모세에게 반항한다. 하느님은 불 뱀으로 그들을 벌하시고, 백성들이 회개하자 모세에게 구리 뱀을 만들어 기둥에 달아 놓고 그것을 쳐다본 사람은 죽지 않게 하신다. 이 구리 뱀의 모습은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심을 미리 보여주는 것이었다. 민수 21,4-9의 구리 뱀은 사람들의 그 마음을 하느님께로 돌리게 하는 표지였다. 이것이 후에는 우상이 되어 히즈키야 때 다 없애 버렸다.
오늘 복음의 “들린다.”라는 말은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뜻이며(요한 8,28; 12,32), 하늘의 영광으로 올려졌다는 뜻(사도 2,33; 5,31; 필립 2,9)으로 이중적인 영광의 의미이다. 우리에게도 이 십자가가 없으면 아무런 면류관이 없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하느님 아버지의 구원계획을 이루셨고, 이 십자가를 바라보고 우리 모든 인간이 아버지께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하셨다. 십자가를 통한 세상의 구원업적은 바로 하느님의 사랑의 업적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업적은 인간이 그 아들을 믿고 따름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 자신이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은 두 가지가 있다. 그것은 우리의 마음을 다하여 예수께서 선포하신 하느님을 믿는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고 예수께서는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음을 믿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께서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으면서 그분의 말씀을 믿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다. “사람의 아들”은 하느님의 구원계획을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다.
그분만이 하느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이다. 이제 그분을 믿는 자만이 구원을 얻을 것이다. 예수님과 그분의 가르침을 우리의 생명, 영혼, 운명 전체를 맡기고 그 가르침을 따라 실천하게 되면 구원으로 나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은 구원을 주시기 위해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그분을 받아들이지 않고 거부한다면, 그분 안에 가지고 오신 구원의 은총까지도 거절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 구원을 거절한다는 것은 하느님의 사랑을 거절하는 것이고 그것은 절대 용서받을 수 없는 결과, 즉 멸망을 초래하고 말 것이다. 이것은 매 순간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범하였다가도 하느님의 자비하심으로 회개하여 구원을 받을 수 있었던 것과 같이 이제 우리도 언제나 나약한 의지 때문에 하느님에게서 멀어질 수 있으나, 항상 높이 들리신, 즉 십자가와 영광으로 들려지신 주님께로 되돌아가는, 회개하는 삶이 필요하다. 우리는 우리가 지고 가는 우리의 십자가를 통하여 진정 부활을 체험하며 나 자신이 새로이 태어나는 기쁨을 느끼게 될 것이다.
예수께서 당신의 십자가를 통하여 세상을 구원하셨듯이 우리는 이제 우리 자신이라는 이 십자가를 통하여 나 자신의 완성 즉 구원과 그리스도를 닮도록 하여야 한다. 그분을 닮는 것이 우리가 간직하고 있는 “하느님의 모상을 닮음”을 이루는 일일 것이다. 이러한 삶을 우리도 늘 살면서 십자가의 신비를 더 깊이 체험하며 구원의 은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용감히 전할 수 있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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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새벽을 열며.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빠다킹신부님.
작가마다 글을 쓰는 습관이 다양합니다. 어떤 작가는 밖에서 열쇠로 잠가서 방에서 나가지 못하게 하고, 벌거벗은 상태로 있어서 나가지 못하고 글만 쓰는 작가도 있습니다. 썩은 사과를 서랍에 넣어두고서 글 쓰는 것이 막혔을 때 냄새로 자극을 받는 작가도 있고, 어떤 작가는 글이 안 써질 때 수학 문제를 푼다고 합니다.
저도 부족하지만, 책을 아홉 권이나 출판했기 때문에 작가 언저리에 있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만의 글 쓰는 습관은 없는 것 같습니다. 굳이 있다면 어떻게든 계속해서 글을 쓰려고 한다는 것 정도입니다. 그런데 저의 이 말을 듣고서, 어떤 작가분이 이런 말씀을 하시더군요.
“작가들이 다양한 집필 습관을 지니고 있지만, 모든 작가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 썼다’라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글을 쓰는 꾸준함이 아름답고 멋진 글이 나오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던 것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을 따르는 방법은 아주 다양합니다. 기도와 묵상 등의 영성 생활을 통해서, 사랑을 실천하는 봉사와 희생을 통해서, 그 밖의 다양한 방법으로 주님을 따를 수 있습니다. 그 어떤 방법도 다 훌륭하고,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을 잘 따르는 사람의 공통점이 하나 있습니다. 어떤 기도를 했느냐가 아니라 꾸준히 기도했는가였습니다. 한 번의 커다란 희생과 봉사를 했느냐가 아니라 꾸준히 희생과 봉사를 했느냐였습니다. 기분이 좋을 때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 안에서 매 순간 주님을 바라보면서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는 것입니다.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주님께서 인류의 죄에 대해 속죄하시려고 짊어지신 십자가를 묵상하고 경배하는 날입니다. 십자가 현양 축일인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고 자기 십자가를 짊어지고 따르고 있는지를 반성했으면 합니다. 이는 어느 한순간, 그리고 한 번으로 충분한 것이 아니라, 꾸준히 계속해야 함을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의 구원을 위해 꼭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모세가 달아 놓은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만이 살아날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죄의 홍수 안에서 주님을 바라봐야지만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생명의 주인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때 죄가 용서되는 치유가 있을 것이며, 영원한 생명도 주어지게 됩니다.
나의 꾸준함은 어떠했을까요? 특히 주님께 꾸준한 모습으로 나아가고 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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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가 당신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그건 그 자신의 내면이 심하게 고통받고 있어서 마침내 그것이 밖으로 넘쳤기 때문입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처벌이 아닙니다. 그는 도움을 필요로 합니다. 그것이 그가 우리에게 보내는 메시지입니다(틱 낫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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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짊어지는 십자가.
성 엑스페디투스의 성화를 우연히 본 적이 있습니다. 이 성인의 축일은 4월 19일로, 기원후 300년경에 활동하셨던 것으로 나와 있더군요. 그런데 이 성인의 성화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까마귀를 발로 밟고 있고, 손에는 십자가를 들고 있었습니다. 이 까마귀 부리 부분에 라틴어로 Cras(내일)이란 단어가 적혀 있었고, 십자가에는 Hodie(오늘)가 적혀 있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18세기 이후 독일과 시칠리아 지역에서는 긴박한 상황에 부닥칠 때 성인께 기도를 요청한다고 합니다.
이 성화를 유심히 바라봅니다. 성인은 내일이 아니라 오늘, 바로 지금 해야 할 것을 독려하는 것이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늘 ‘내일’을 말합니다. 나중에…. 여유가 되면…. 이 문제가 해결되면…. 그러나 성인은 이유를 말하면서 하지 않는, 그래서 찾을 수밖에 없는 ‘내일’을 밟아서 없애야 한다고 하시는 것 같습니다.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가장 먼저 짊어져야 할 자신의 십자가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뒤로 미루는 십자가가 아닌, 지금 짊어지는 십자가를 바라봐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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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변화와 혁신의 가장 큰 적은 사실에 근거한 현재”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 페이스북, 구글, 인공지능”은 30년 전에는 이해할 수 없거나, 생소한 이야기였습니다. 개념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30년 전에는 개인의 책상에 컴퓨터가 있는 걸 이해하지 못하였습니다. 개인용 컴퓨터로 무엇을 할 수 있을지도 몰랐습니다. 전화기에 컴퓨터를 넣는 것도 상상하지 못하였습니다. 전화기는 걸고 받기만 하면 되었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은 너무 느렸고, 사용하는 사람도 적었고, 가치를 알 수 없었습니다. 페이스북, 구글 , 인공지능은 먼 훗날의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게 사용하고 있으며, 우리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새로운 꿈을 꾸었던 사람들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진실에 입각한 꿈, 과학에 근거한 꿈은 함께 할 때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는 힘이 있습니다.
2억이라는 큰돈을 기꺼이 기부한 남매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남매의 나이는 이제 40대 초반이었습니다. 어머니께서 남겨 주신 유산을 모두 가난한 이들을 위해서 기부하였다고 합니다. 부동산이나 주식에 투자하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남매는 생전에 어머니가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었다는 것을 기억하였고, 어머니의 뜻을 따라 하늘나라에 보화를 쌓기로 했다고 합니다. 여동생은 아이의 돌을 축하하며 생애 첫 기부를 하였고, 5살이 된 딸은 그 사실을 알고 기뻐하였다고 합니다. 부모에게 받은 유산 때문에 가족들이 다투고, 재판까지 가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상속세를 아끼기 위해서 불법으로 회계를 조작하고, 투자한 사람들에게 금전적인 피해를 주는 기업인도 보았습니다. 부모의 유산은 당연히 나의 것이고, 상속세는 가능하면 내지 않으려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낌없이 어머니의 유산을 어려운 이웃을 위해서 기부한 남매는 이미 이곳에서 하느님 나라를 사는 것입니다.
예수님 시대에 십자가는 치욕과 형벌의 상징이었습니다. 국가에 반역한 사람, 중죄를 지은 사람이 십자가 형벌을 받았습니다. 며칠씩 십자가에 매달려 있으면 차라리 죽고 싶을 정도의 고통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야파에게 끌려가 하느님을 모독했다는 이유로 심문을 받았습니다. 유대인들은 사형시키는 권한이 없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빌라도에게 끌려가 재판을 받았습니다. 빌라도는 예수님께서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지만 유대인들의 폭동이 두려워서 예수님에게 십자가 형벌을 선고하였습니다. 죄목은 ‘유대인의 왕’으로 반역죄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셨고,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돌아가신 후 3일 만에 부활하셨습니다. 치욕과 모욕의 상징이었던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지고가심으로써 속죄와 구원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해야 할 일을 외부에서 찾은 적이 많습니다. ‘성공, 명예, 업적, 능력’이 내가 해야 할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얻기 위해서 최선을 다합니다. 그러나 정말 해야 할 일은 나의 깊은 내면에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나눔, 헌신, 십자가, 사랑’입니다. 그것을 위해서 최선을 다했다면 우리는 ‘영원한 생명’을 이 세상에서 이미 시작하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고, 유대인에게는 걸림돌이었지만 신앙인에게는 구원의 표징이 되었습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여러분에게 십자가는 어떤 의미인지요? 윤동주 시인의 ‘십자가’를 함께 나누고 싶습니다.
“쫓아오던 햇빛인데
지금은 예배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렸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며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던 사나이
행복했던 예수 그리스도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드러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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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성 십자가 현양 축일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성 십자가 예찬 - 기도와 회개의 표징이자 구원의 이정표 -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이고 내일은 ‘고통의 성모 마리아 기념일’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중심부에 자리잡고 있는 순교영성의 모범이신 모자분의 축일입니다.
마침 어제 ‘길이 된 역사’라는 수녀원(올리비따노 성 베네딕도 수녀회) 역사가 담긴 귀한 책 두 권의 ‘들어가는 글’ 역시 ‘2020년 9월 성 십자가 현양 축일’로 끝맺고 있었습니다. 9월 순교자 성월에 선배 수도자들의 고난의 역사를 통해 순교영성을 일깨우는 귀한 자료들이었습니다. 시간나는 대로 읽을 계획입니다.
생각할수록 답은 ‘기도와 회개’뿐이 없는 것 같습니다. 간절하고 항구한 그리고 진실한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실행입니다. 특히 기후위기와 코로나19 사태로 혼란한 작금의 시대는 더욱 그러합니다.
혐오와 탐욕이란 바이러스에 대한 궁극의 대책도 구체적 기도와 회개 실행뿐이겠습니다.
이제 3개월여의 기후변화로 인한 긴 장마 기간도 끝나고 하늘 높고 푸른 본격적 가을이 시작된 듯 합니다.
가을은 기도와 회개의 계절입니다. 9월 순교자 성월, 10월 묵주기도 성월, 11월 위령성월이 이를 웅변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표징이, 희망과 구원의 표징이 바로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온 마음으로 사랑하여 늘 삶의 중심에 모셔야 할 성 십자가입니다.
산티아고 순례시 알베르게 숙소에 도착하면 우선 다음 날 새벽 미사드릴 제대 자리를 눈여겨 보았듯이
어느 자리에 가도 우선 확인해 보는 성 십자가입니다. 비로소 십자가를 바라볼 때 마음의 안정과 평화입니다.
참으로 광야 인생 여정중 삶의 중심이자 이정표로 영원한 바라볼 대상은 주님의 성 십자가뿐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수도원을 방문하여 제 집무실에 들리는 분들은 거의 예외 없이 집무실 십자가 아래 서게 한다음 사진을 찍어 드립니다. ‘사랑의 사진사’가 되어 십자가의 주님과 함께 사진을 찍어 드릴 때 기쁨이 참 큽니다.
누구나 예외없이 통과해야할 광야 인생 여정입니다.
오늘 제1독서 민수기 내용은 바로 광야 인생 여정을 상징합니다.
고난의 광야 여정중 하느님과 모세에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대로 우리의 모습같습니다.
불평의 죄로 인해 불뱀에 물려 죽자 이들은 회개하여 모세의 중재기도를 간청했고 이어 하느님의 응답입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 것이다.”
하여 모세가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고 뱀에 물린 사람들은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납니다. 기둥 위에 높이 달린 구리뱀이 상징하는바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광야 인생 여정중 우리의 영원한 기도의 표징, 회개의 표징, 희망의 표징, 구원의 표징이자 이정표인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죽으시고 부활하신 파스카 주님의 십자가가 없다면 그 광야 인생 얼마나 고달프고 힘들겠는지요.
십중팔구 길잃어 방황할 것입니다.
인생 무지와 무의미, 허무에 대한 답도 주님의 십자가뿐임을 깨닫습니다.
파스카 주님의 십자가를 삶의 중심으로, 삶의 이정표로 삼을 때 비로소 내적 평화와 안정에 광야 인생 여정도
성공리에 끝낼 것입니다. 성 금요일 십자가 경배 예식 때 부른 은혜로운 노래도 잊지 못합니다.
“보라, 십자 나무, 여기 세상 구원이 달렸네. 모두 와서 경배하세.”
“주의 십자가를 경배하오며 주의 거룩하신 부활을 찬양하나이다. 십자가 나무를 통하여 온 세상에 기쁨이
왔나이다.”
“성실하다, 십자나무, 가장 귀한 나무로다. 아무 숲도 이런 잎과 이런 꽃을 못내리라.”
모두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어울리는 노래입니다.
십자가의 의미를 예수님은 요한 복음 사가의 입을 빌어 잘 정리해 주십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 져야 한다.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습니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참으로 아드님을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바로 이런 회개와 믿음, 구원의 표징이 주님의 성 십자가요, 광야 인생 여정에 빛나는 이정표가 되는
하느님 사랑의 결정적 표현이 바로 주님의 성 십자가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각자 주어진 십자가를 잘 지고 한결같이 당신을 따를 수 있는 힘을
주십니다. 끝으로 오늘 아름다운 감사송 고백으로 강론을 마칩니다.
“아버지께서는 우리 주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 나무에서 인류 구원을 이룩하시어, 죽음이 시작된 거기에서
생명이 솟아나고, 나무에서 패배한 인간을 나무에서 승리하게 하셨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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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이기우 신부님. 십자가는 앞당긴 우리의 부활입니다
십자가로 인한 구원을 확신하라
- 사도직의 십자가를 통해 그리스도와 일치하기
민수 21,4ㄴ-9; 요한 3,13-17
성 십자가 현양 축일; 2020.9.14.; 이기우 신부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로마 제국이 그리스도교를 박해하던 모진 시기가 끝나고 신앙이 공인된 후 제국의 국교로까지 받아들여졌을 때,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였던 헬레나는 그동안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한 제국의 죄과를 보속하기라도
하려는 듯이 그동안 초대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소홀히 했던 예루살렘 성지를 부지런히 순례하며 정비를 했습니다.
그러다가 예수님께서 매달리시어 돌아가셨던 나무 십자가를
발견해서 무덤 자리 옆에 성당을 지어서 그 십자가를 모셔 놓았습니다.
그때가 335년 무렵이었는데, 황제의 어머니가 나서서 아무도 하지 못했던, 그러나 꼭 필요했던 일을 해 놓으니,
그 이후에 이 성당에 순례한 신자들을 중심으로 십자가에 대한 신심이 삽시간에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그러기를 천 6백여 년이 흐른 20세기 중엽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거룩한 변모 축일이었던
8월 6일로부터 40일이 지난 오늘을 십자가를 현양하는 축일로 삼음으로써 모든 가톨릭 신자들이 본받게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려 수난하실 것을 미리 내다보시고,
제자들이 놀라서 신앙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타볼 산에 올라 거룩하게 변화된 당신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의 거룩함, 영광스런 부활의 계기 등에 관해 깨우쳐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이것이야말로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이 세상에 보내시어 온 인류가, 실제로는 믿음과 깨달음이 있는 이들로부터
시작해서 온 인류가 이 세상에서 삶을 잘 마친 후에 당신에게로 나아오기를 바라셔서 계시하신 실천적 진리 였습니다.
이 진리에 따라서, 우리가 사도직 활동에서 마주치게 되는 온갖 십자가를 통해서
예수님과 일치하게 되는 지름길이기 때문에 우리는 이를 진리로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굳게 하는 근거는 십자가에 대해 예수님께서 취하신 태도와 처신입니다.
첫째, 십자가는 예수님께서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신 활동에서 비롯된 결과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그 활동이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가 아니라
세상의 악이 예수님께서 수행하신 하느님의 선에 대해서 저항한 결과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는 내내 예수님께서는 사두가이나 바리사이나 군중이나 심지어 제자들이
복음에 저항할 때에도 그때마다 “그러려니.”하고 소극적으로 대응하셨을 뿐 적극적으로 막지 않으셨습니다.
둘째,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활동의 결과로 초래된 그 십자가를
받아들이기로 작정하셨고 미리 내다보셨으며 의식적으로 받아들이셨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에게도 머지않아 닥칠 자신들의 십자가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시키셨으며,
그 일환으로 당신의 십자가 수난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습니다.
셋째, 수난 예고는 부활 예고와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그리하여 부활의 영광에 대한 가치와 의미를 담아서 십자가를 받아들이도록 준비시키셨습니다.
오늘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앞서 거룩한 변모 축일을 미리 지낸 전례상의 취지와도 일맥상통하는 이치입니다.
부활을 향한 믿음이 없이는 십자가를 받아들이는 순명의 자세가 자칫 노예윤리로 격하되어버릴 수가 있습니다.
넷째,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수난을 받아들이시는 데 있어서 최선을 다하셨습니다.
겟세마니 동산에서는 과연 당신이 그 고난의 잔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를 놓고 처절한 영적 투쟁으로 기도 하셨습니다.
공포와 번민에 싸여서,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습니다.
결코 가볍지 않은 선택과 결단으로 이루어진 십자가 수난은 예수님께 매우 힘겨운 짐이었습니다.
대사제 카야파 앞에서나 총독 빌라도 앞에서 벌어진 재판에서 침묵하셨던 것도 그 증거요,
못 박하시기 전에 어찌나 심하게 매질을 당하셨던지 십자가를 짊어지고 가실 때에도 기진맥진하시어
키레네의 시몬이 대신 짊어져드려야 할 지경이었으며 십자가 위에서도 일찍 숨을 거두셨습니다.
이러한 십자가에 대한 처신과 태도가 우리네 사도직에서 하나의 기준과 목표가 됩니다.
현대의 가톨릭교회에서 사랑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간 삶의 표양으로 성인 반열에 오르신 인도 캘커타의
데레사 수녀가 기도방에 써 붙여 놓고 자주 묵상했었다는 켄트 케이스의 기도시 ‘그래도’의 내용이 이렇습니다.
“사람들은 논리적이지도 않고 합리적이지도 않으며 자기중심적이다.
그래도 사람들을 사랑하라
당신이 착한 일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속셈이 있을 것이라고 의심할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당신이 성공하게 되면 가짜 친구와 진짜 적들이 생길 것이다.
그래도 성공하라
오늘 당신이 착한 일을 해도 내일이면 사람들은 잊어버릴 것이다.
그래도 착한 일을 하라
당신이 정직하면 공격당하기 쉽다.
그래도 정직하게 살아라
사리사욕에 눈먼 소인배들이 큰 뜻을 품은 훌륭한 사람들을 해칠 수도 있다.
그래도 크게 생각하라
사람들은 약자에게 호의를 베풀다가도 결국에는 힘 있는 사람 편에 선다.
그래도 소수의 약자를 위해 분투하라
몇 년 동안 공들여 쌓은 탑이 하루아침에 무너질 수도 있다.
그래도 탑을 쌓아라
물에 빠진 사람을 구해주면 보따리 내 놓으라고 덤빌 수도 있다.
그래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도와주어라
젖 먹던 힘까지 다해 헌신해도 칭찬을 듣기는커녕 경을 칠 수도 있다.
그래도 헌신하라.
교우 여러분, 사도직 활동에서 만나는 십자가가 우리의 앞당긴 부활입니다.
십자가로 인한 구원을 확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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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이영근 신부님.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 요한 3, 13-17(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
그러나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아니라고 해서 십자가가 없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데는, 누구에게나 있기 마련인 인간적인 십자가가 참으로 많습니다. 원하지 않아도 불가항력적으로 닥쳐오는 이러한 십자가들을 우리는 더러는 피하거나 극복하면서, 견디거나 뛰어넘으면서, 해결하거나 타협하면서, 적당히 거리를 두거나 무관심하면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아주 특별한 의미를 지닙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멸망할 자들에게는 십자가에 관한 말씀이 어리석은 것이지만,
구원을 받을 우리에게는 하느님의 힘입니다.”(1코린 1,18)
‘십자가의 형벌’은 손과 발이 못박인 채 철저히 무력해진 참으로 무력하기 짝이 없는 비참함의 끝이요, 노예 죄수에게나 행해지는 참으로 냉혹하기 짝이 없는 철저하게 버림받음이요, 완전한 패배요, 그야말로 치욕이요, 저주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나무에 달린 자는 누구나 저주받을 자다’(신명기 21,23) 라고 성서에 기록 되어 있듯이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달려서 저주받은 자가 되셔서
우리를 율법의 저주에서 구원해 내셨습니다.”(갈라 3,13)
그렇습니다. ‘십자가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에게는 스캔들이요, 다른 민족들에게는 어리석음이었습니다.’(1코린 1,23). 그야말로 ‘하느님이 죽어버렸다’는 이야기는 참으로 막말이요 미친 소리였습니다. 곧 당시의 그들이 갖고 있었던 하느님관(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서 하느님의 대한 개념은 모든 변화와 운동의 원인이면서 자신은 변하지 않는 완전한 ‘부동의 원동자’였고, 플라톤 계통에서는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세계와는 전적으로 다른 ‘순수한 이데아’, 곧 영적, 초월적 차원에만 해당했다. 그래서 하느님은 육체와 그로 인한 물질적 불완전에서 비롯된 기쁨이나 슬픔 따위의 정서가 있을 수 없고, 누군가를 사랑할 필요도 없는 스스로 충만한 자족적 존재로 여겼다. 그런데 그리스도는 수난을 받고 죽은 것이다.)과 집단의 힘 있는 수호신이나 제정일치의 황제숭배로 여기고 있었던 고대의 종교상식과 당시의 보편적 가치와 공공질서를 깡그리 뒤집어 버리고 파괴하는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파격적인 범죄요 패륜이요 반역이었으며, 동시에 하느님을 모독하는 신성모독이었습니다. 그래서 뽈리까르뽀의 [순교록]에는 순교를 목전에 둔 뽈리까프뽀 주교와 몇몇 신자들을 향해 군중들이 “이 무신론자들을 죽여라!”라고 외쳤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초기 그리스도신자들의 죄목은 ‘무신론자’였습니다.
사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메시아가 수난과 고통을 받는다는 것은 <구약성경>에 예언되어 있기 때문에 그다지 충격적인 사실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그 수난과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그 모습이 단죄 받는 십자가의 모습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십자가에서 저주받은 자가 어떻게 하느님이 될 수 있는가?”(유스티노의 [프리폰과의 대화])를 묻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개신교 신학자 몰트만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자가에 처형된 하느님에 대한 믿음은 이제껏 모든 이가
하느님이라고 부르던 것에 대한 도전이며,
그러한 하느님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는다는 통념을 뒤집었다.”
그러나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사랑’으로 살아갑니다. 그리고 이 ‘하느님의 사랑’은 ‘복음서 중의 복음서’ 혹은 ‘소복음서’라고 불리는 오늘 <복음>에서 말씀하시듯,
“하느님께서는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든지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여 주셨습니다.”(요한 3,16).
그리고 이 큰일을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를 통하여 이루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힘 센 사람은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약자로 만들기 때문입니다. 사랑 앞에서는 모든 것이 무의미하고, 우아함도 냉철함도 현명함도 지혜도 잃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정신 나간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게 됩니다. 이런 의미에서, 십자가는 ‘하느님이 사랑에 빠져, 하느님다움을 잃어버린 사건’이라 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그렇게 사랑에 빠지셔서 현명함을 상실하신 것입니다. 곧 십자가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하느님이 사랑에 빠진 까닭입니다. 그러니 역설적으로 그분의 약함과 어리석음은 그분의 사랑을 드러냅니다. 이렇게 당신의 숨으심으로 당신을 드러내 보이십니다. 당신의 감추심, 당신의 죽음으로 당신이 사랑을 드러내십니다. 그야말로, 빛은 어둠 속에서 드러나며, 어둠은 빛을 드러내는 ‘어두운 밝음’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죽음이지만, 동시에 죽음을 죽이고 진정 사심입니다. 무력함이지만 동시에 구원을 이루는 전능함이요, 패배이지만 동시에 사랑의 승리입니다. 낮아짐으로써 진정 높아지고, 지면서도 진정 쳐부수는 승리의 깃발이요 영광의 월계관입니다. 참으로, 십자가는 하느님 사랑의 표상이요, 그리스도의 현양입니다. 이토록,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로 인류를 구원하셨습니다. 그러기에, 십자가는 우리 삶의 의미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을 베푸신 ‘하느님 사랑’이 바로 우리의 자랑입니다. 사도 바오로는 고백합니다.
“나에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밖에는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습니다.”(갈라 6,14)
오늘, 십자가를 드높여 이 고귀한 그리스도의 구원과 하느님의 사랑을 찬미합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요한 3,16)
주님!
당신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양손을 못에 내어주고 가슴을 열어 창을 받아들이고, 머리에는 가시관을 쓰고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으셨습니다.
저도 당신 사랑의 멍에를 지고 거부되고 배척받을지라도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게 하소서!
이해받지 못하고 부당한 처사를 받을지라도 사랑으로 질 줄을 알게 하소서.
약해져 꺾일 줄 알고, 낮아져 밟힐 줄을 알게 하소서.
사랑으로 눈감을 줄을 알고, 죄 없으면서도 뒤집어쓸 줄을 알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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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십자가 현양 축일
오늘 미사의 말씀은 십자가의 예수님을 바라보도록 초대합니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14)
예수님께서 이집트 탈출 이후 광야에서 벌어진 한 사건과 연결하여 당신의 십자가 죽음을 설명하십니다. 높이 들어 올려진다는 것은 영광에 싸여 윗자리로 영전 받는 것과 다릅니다. 누군가의 폭압적인 손길에 의해 모두의 눈 앞에서 벌거벗긴 채 수치와 모욕의 구경거리가 되는 것이지요.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9)
하지만 하느님 섭리 안에서는, 처참히 매달린 누군가가 구원의 의지를 가지고 바라보는 이에게 생명을 선사합니다. 모세의 구리뱀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지요.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7)
당신 아드님을 세상에 내주신 아버지의 목적은 세상의 구원입니다. 그만큼 아버지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시지요. 최악의 상황까지 가지 않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세상이 외아드님을 받아들이지 않는 이상, 예수님께는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어 세상의 죄를 속량하는 길만 남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다인에게는 걸림돌이고 다른 민족에게는 어리석음인 십자가"(1코린 1,23 참조)를 기꺼이 선택하셨지요.
제1독서인 민수기 속 광야 일화에서 우리는 기도의 순수성을 배웁니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민수 21,7)
불편하고 힘들다고 하느님과 자신에게 불평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모세는 인간적 분노나 실망감을 내비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느님이 보내신 징벌 앞에서 그들이 간청하자 별 생색도 원망도 없이 기도의 소명을 수행합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 기도를 즉각 들어주셨지요.
문득 '욥의 기도'가 떠오릅니다. 삶의 찬란했던 모든 것을 다 잃고 나락에 떨어졌던 욥에게 와서, 짧고 현학적인 주장으로 도리어 욥을 괴롭혔던 세 친구를 기억하실 겁니다. 그때 주님은 그 무례하고 무도한 친구들에게 "나의 종 욥이 너희를 위하여 간청하면, 내가 그의 기도를 들어 주어 너희의 어리석음대로 너희를 대하지 않겠다."(욥 42,8)고 하셨지요. 그리고 욥이 세 친구를 위해 기도드리자 주님은 욥의 운명을 되돌려 주십니다.
당신을 모함하고 음모를 꾸며 사형에 이르게 한 이들을 위해 바친 예수님의 '용서의 기도' 역시 맥을 같이하지요(루카 23,34 참조).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양처럼 모든 죄악과 패덕을 순순히 받아들고 십자가에 못박히심으로써 가장 위대한 기도를 완성하셨지요. 예수님의 기도, 모세의 기도, 욥의 기도에서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을 위해 하느님께 올린 순수한 기도라는 공통점이 보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념하는 십자가는 어찌보면 유다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도 걸림돌입니다. 또, 다른 민족에게뿐 아니라 우리에게도 어리석음입니다. 세상은 경쟁하고 따지고 소송하고 이겨야 직성이 풀리는 쪽으로 자꾸 치달아가는데, 배알도 자존심도 없는 사람처럼 들어 주고, 받아 주고, 토닥여 주다가, 나를 해하는 이를 위해 생명까지 다 내놓고 기도해 주니 말입니다.
그럴수록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 여기 있으니, 나만 바라보라."고 하십니다. 불평하지 말고 따지지 말고 당신이 걸어온 길을 따르라고, 입이 댓발 나올 만큼 억울하고 지치면 그냥 멈춰서 당신을 바라보라고요. 무죄하신 하느님이 죽어 매달려 계신 십자가에 "네 무게를 얹고 잠시 쉬렴." 하십니다.
그렇게 주님과 십자가 길동무를 하면서 주님과 우리의 관계는 더욱 깊어가고 두터워집니다. 네 고통인지 내 고통인지 모를만큼 서로의 고통에 민감해지고 또 그만큼 제 고통에 무뎌지면서, 둘은 더 깊은 일치로 나아가는 것이지요. 십자가는 그분과의 일치, 하나됨의 자리가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벗님! 십자가로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 감사드리며, 자신의 십자가를 그분 십자가에 합하여 봉헌하는 오늘 되시길 기원합니다. 내 십자가가 힘든 줄 아는 우리는 그만큼 남도 힘든 줄 알지요. 그러니 우리, 기도 안에서 서로를 격려하며 거룩한 십자가의 길을 기꺼이 걸어갑시다. 서로 보이지는 않지만 말씀으로 연결된 우리기에, 서로의 순수한 기도가 분명 큰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오늘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함께 바라보고 있을 무수한 길벗들을 기억하고 힘을 냅시다. 동행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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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이병우 루카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창조시기 14일째-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3,14)
'십자가를 바라보자!'
오늘은 '성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하느님의 외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나를 위하여 십자나무 위에 들어 올려 지신 것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살리시기 위해서 우리들 삶의 자리로 들어오셨고, 땀을 흘리셨고, 마침내는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나무에 매달리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요한3,16)
십자가는 사랑입니다.
십자가는 기쁨입니다.
십자가는 생명입니다.
십자가는 부활입니다.
십자가는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십자가는 우리 신앙의 본질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를 몸에 지니고 다닙니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민수21,5)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의 억압에서 자신들을 구해주신 하느님의 업적을 망각하면서 이렇게 불평불만을 늘어놓습니다.
우리도 살아가면서 때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보일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시고, 지금도 베풀어 주고 계시는 은총은 생각하지 않으면서 불평불만을 드러낼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를 바라봅시다!
그럴 때마다 십자가의 사랑 안에 머물러 봅시다!
십자가는 우리를 구원하시려는 하느님의 사랑이며, 하느님의 업적입니다.
"우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하리라. 주님은 우리 구원이요 생명이며 부활이시니, 우리는 그분을 통하여 구원과 자유를 얻었네."(입당송)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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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십자가 현양 축일]
민수기 21,4ㄴ-9
요한 3,13-17
인생의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성 십자가 현양 축일에 십자가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십자가라는 것, 생각할수록 묘하고 신비스런 그 무엇입니다.
주변을 돌아보면 존재 자체가 무거운 십자가의 연속인 분들이 있습니다.
하루하루 주어진 삶 자체가 힘겨운 십자가인 분들도 계십니다.
십자가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도 제각각입니다.
어떤 사람은 마치 성냥개비 두개를 교차시켜 만든 듯한 가벼운 십자가, 잠자리 날개처럼 초경량급 십자가가 살짝 주어졌음에도, 세상 끝난 것처럼 난리를 치고 괴로워합니다.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감당하기 벅찬 천근만근 무게의 십자가를 매일 지고가면서도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기쁘게 살아갑니다.
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이유는 아마도 십자가를 지고 가는 사람이
십자가에 어떤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는가?에 달려있다고 생각합니다.
산고를 겪고 있는 엄마는 지금 겪고 있는 고통이 하늘을 찌르는 것처럼 극심하지만, 잠시 후 태어날 새 생명을 생각하며 기꺼이 견뎌냅니다.
선두에서 단독 질주 중인 마라톤 대회 우승 후보자는 40킬로미터 지점 쯤에서 느끼는 육체적인 고통이 엄청납니다.
그러나 잠시 후 결승선에서 누리게 될 영예와 성취감을 생각하며 기쁘게 달려갑니다.
우리 모두 불완전한 인간 존재로서 불완전한 이 세상 안에 살아가다보면, 어쩔 수 없이 이런 저런 다양한 무게의 십자가를 지고 갑니다.
십자가 하나를 잘 극복했다 생각하면, 어느새 또 다른 십자가가 등장합니다.
어떤 사람의 어깨 위에는 별의별 유형의 십자가가 셀수도 없을 정도로 많이 얹혀 있어서
제대로 걸어갈 수 없을 정도입니다.
결국 우리에게 주어지는 평생의 과제는 숙명과도 같은 십자가를 평생 친구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무겁다, 괴롭다, 여기며 도피하지 말고, 이왕 지고갈 십자가 큰 마음으로 지고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중요한 일 한 가지!
매일 우리에게 다가오는 십자가를 인간적인 눈으로만 바라보지 말고 영적인 눈으로, 주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일입니다.
결국 매일의 십자가에 대한 지속적인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일입니다.
부단히 십자가의 신비를 묵상하는 일입니다.
세상 울적하고 괴로운 얼굴이 아니라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한 두명도 아니고 7명이나 되는 어린 자녀들을 지극정성으로 양육하는 한 젊은 어머니를 뵙고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이들로 인해 어머니의 하루는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무럭무럭 성장하는 아이들의 교육과 의식주 해결을 위해 하루 온종일 동분서주하노라면 하루가 후딱 지나갑니다.
하루 온종일 지지고 볶고, 세탁기를 돌리고 또 돌립니다.
청소기를 돌리고 또 돌립니다.
쉴틈 없이 돌아가는 힘겨운 일상에 지쳐 짜증 낼법도 한데, 절대 그런 법이 없습니다.
환한 얼굴에 콧노래가 끊이지 않습니다. 대체 비결은 무엇일까요?
매일의 작은 십자가에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입니다.
우리 가톨릭에서는 십자가를 절대로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성당에 오면 십자가를 말끔히 없애준다고 외치지도 않습니다.
대신 십자가에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라고 강조합니다.
십자가를 지고 있는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를 지고 계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바로 그 십자가에서 위로받게 하고 힘을 얻게 합니다.
오늘 우리의 작은 십자가들에 반드시 의미가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십자가가 다가올 때 마다 즉시 예수님을 바라봐야겠습니다.
십자가를 잘 지고 갈 때, 십자가 그 너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부활의 영광을 끝까지 희망하며 그렇게 살아가야겠습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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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전삼용 요셉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민수기 21,4ㄴ-9
요한 3,13-17
명장은 숙련된 자기만의 무기가 있다
오늘은 십자가 현양 축일입니다.
십자가는 자기 자신을 매달아 죽이는 도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과 싸움에서 승리하시기 위해 십자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러니 십자가 현양 축일은 주님의 십자가를 현양하고 감사하는 날일까요?
물론 그것도 맞겠으나, 내가 어떠한 십자가를 매고 가고 있는지를 살피는 날이기도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지신 십자가만 보며 나의 십자가를 내려놓는다면 그것만큼 십자가 현양 축일과 어긋나는 삶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구약의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것처럼
당신도 높이 들어 올려져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모세가 구리뱀을 들어 올린 이유는 불뱀에 물린 이들이 그 모습을 보면서 치유되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이 하느님께 불평불만을 할 때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모두 불뱀에 물려 죽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모세가 장대에 들어 올린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셨습니다.
내가 뱀에 물려 죽어갈 때 구리뱀을 보면 살게 하신 것입니다.
모세의 구리뱀은 우리 자신을 십자가에 매달아야만 살아날 수 있다는 깨달음을 줍니다.
모세는 구약의 예수님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을 십자가에 매다셨듯이, 모세도 자신을 십자가에 매단 것입니다.
자신도 하느님께 불만을 가질 수 있었으나 자신을 죽여 감사와 찬미를 드렸습니다.
아무리 자아라는 불뱀에 물렸더라도 모세의 모범을 따르는 이들은 다시 살았습니다.
구원은 자기 안의 뱀을 십자가에 못 박을 때 이뤄진다는 것을 알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주워 와서 우리 자신을 매달 수는 없는 일입니다.
그것은 로마 시대의 것입니다.
지금 불만 가득한 나의 자아를 죽이는 나만의 도구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십자가에 자아를 매달면 이제 자아가 나를 통제하지 못하고 내가 자아를 통제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런 도구들이 모두 십자가가 됩니다.
올리버 색스의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에서 아내의 머리를 자신의 모자라고 착각한 사람이 나옵니다.
유명한 성악가로서 지금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선생인데 그는 노래를 부르지 않을 때는 아이들의 얼굴을 알아보지 못하는 것은 물론 아내의 머리를 모자로 착각할 정도로 이상한 행동을 합니다.
우리도 자아에 지배당하면 사람을 물건처럼 대할 때가 있습니다.
우리가 이상한 행동을 하는 이유는 그 이상하게 행동하게 만드는 자아를 통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남자는 노래를 흥얼거리면 모든 것을 명확히 구분하고 볼 수 있습니다.
그에게는 바로 노래가 십자가입니다.
자아를 통제할 수 있는 무기입니다.
그가 정상적으로 살려면 쉼 없이 노래를 불러야만 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자매는 원인도 모르게 자기 자신의 몸에 대한 소유의식을 잃어버렸습니다.
리는 자신의 몸을 눈으로 보고 있지 않더라도 손이 있고 발이 있다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것을 원하는 대로 움직입니다.
그런데 그 자매는 어떤 수술을 받고 나서 마치 투명인간처럼 자신의 몸이 자신 것이 아니고 자신은 몸이 없는 사람처럼 된 것입니다.
오직 자신이 눈으로 손과 발이 있음을 확인하고 머리로 명령을 내려야 그것이 움직였습니다.
내가 원하는 대로 살지 못하게 만드는 것이 나의 자아입니다.
이 자매에게는 눈으로 보는 것이 십자가입니다.
일일이 자신이 움직이고 싶은 몸을 눈으로 확인해야 합니다.
그 십자가를 통해 사라져버린 몸의 의식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세상에 큰 영향을 주는 사람들의 특징을 하나만 꼽으라면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는 그들이 자기 자신을 이기는 각자의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고 봅니다.
자신을 이기지 못하고 역사의 위대한 인물이 된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런데 자신을 이기는데 사용하는 무기들이 다 똑같지만은 않다는 것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습니다.
모세는 장대를 이용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를 이용하셨습니다.
영화에서 보면 어떤 장수는 창으로, 어떤 장수는 칼로, 어떤 장수는 표창으로, 또 어떤 고수는 부러진 칼에 줄을 매달아 자신만의 무기를 만들기도 합니다.
우선 자신에게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관우, 장비, 여포의 무기는 모두 창이었습니다.
그것이 자신에게 맞았기 때문입니다.
반면 유비는 쌍칼을 휘둘렀습니다.
몸이 창을 쓰기에는 맞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남을 돌보는 일을 해야 하는 마더 데레사가 성 프란치스코와 같은 무기를 쓰면 안 됩니다.
각자의 삶에 맞는 무기를 찾아야 합니다.
그리고 자신의 무기를 찾았다면 그 무기로 싸우면 누구도 이길 수 있을 만큼 숙련시켜야 합니다.
그 무기로 누구보다 더 많은 연습을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이것이 나의 십자가가 됩니다.
저도 나름대로 무기를 찾고 연습해 가고 있습니다.
저는 호흡과 이명을 이용합니다.
특히 이명이라는 저를 괴롭히는 질환을 이용합니다.
자아에 휩쓸려 다른 생각을 할 때는 이명이 들리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명을 의식하면 들립니다.
그리고 이명이 들릴 때마다 주님과 함께 있음을 의식하려 합니다.
이명이 생기면 이명을 안 들리게 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저는 그것을 오히려 저의 무기로 담금질하고 있습니다.
무엇이든 각자의 십자가를 찾을 필요가 있습니다.
그것이 자아를 이기는 무기가 됩니다.
그리고 자아를 이길 때, 다른 이들이 그 사람을 보고 자신도 그러한 삶을 따라가게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참으로 현양하는 삶입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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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한상우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 축일.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요한 3, 14)
누구에게나
십자가는 있다.
십자가와
함께 살아가고
십자가와 함께
열매를 맺는
우리의 삶이다.
십자가를 통해
사랑하는 사람이
되어간다.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를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다.
막을 수 없는
십자가가
하느님과
우리의 관계를
지켜주고 있다.
십자가에
구원이 있다.
십자가에
순명이 있다.
사랑과
십자가는
하나이다.
복음의 삶이란
십자가의 삶이다.
십자가는
믿음의
실천이다.
걸어가야 할
믿음의 길은
십자가의 길이다.
십자가의 길은
하느님을
향해 있다.
하늘 아래
십자가가 있다.
하느님께서는
십자가로
하느님의 일을
하신다.
십자가가
은총이다.
십자가는
생생한
우리의 삶이다.
삶의 의미는
들어 올려지는
십자가에 있다.
사람의 아들또한
십자가를 통해
아버지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셨다.
십자가에
모든 것이
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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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반영억 신부님. 성 십자가 현양축일
사랑의 십자가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민수 21,8-9).
쳐다본 사람과 쳐다봐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보지 않은 사람과의 운명은 분명히 다릅니다.
믿음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말씀대로 행함으로써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사는 방법을 알려 주었으면 단순히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대로 행동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까지 우리를 사랑하셨으니 우리도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져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마태16,24).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마태10,38).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 주어질 구원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오로는 “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어떠한 것도 자랑하고 싶지 않습니다”
(갈라6,14).하고 고백했습니다.
성녀 줄리 빌리아르는 “여러분이 십자가를 사랑한다면 십자가는 여러분을 사랑할 것이며
천상 하느님께로 여러분을 이끌어 줄 것입니다.”하면서 십자가를 가까이할 수 있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사실 “십자가를 질질 끌고 가는 것보다 차라리 짊어지는 것이 가볍습니다”(성 아우구스띠노).
그러니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지십시오.
그리고 믿음으로 십자가를 바라보십시오.
구리 뱀을 쳐다본 사람들이 살았듯이 영원한 생명을 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곳곳에서 십자가를 볼 수 있습니다.
또 몸에도 지니고 다닙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에 담긴 주님의 사랑을 일깨우고 십자가를 지겠다는 고백을 하지 못한다면
그 십자가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십자가가 점점 더 화려해지고 상품화되는 현실에서 나를 정화시키고 성숙시키는 은총의 십자가를 바로 세워야겠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승리를 이루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영광에 앞서 반드시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는 내 눈과 가슴에만 있을 뿐 아니라 내 안에서 생생하게 생활하고 있어야 합니다.
내가 만일 생활 안에서 십자가에 못 박힌 자가 된다면 그분은 분명히 나를 부활시켜줄 것입니다”(성녀 벨라뎃다).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이 얼마나 큰 기쁨인지를 미리 깨닫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많은 경우에‘왜 나만 십자가를 져야하느냐? 고 하소연합니다.
왜 나는 이런 무거운 십자가를 져야 하느냐고 투덜댑니다.
그러나 그 투덜거림 속에서 십자가는 더 무거워집니다.
“십자가의 길에서는 언제나 첫 발이 중요합니다. 십자가를 무서워하는 것이 바로 우리에게 더 큰 십자가가 됩니다.
첫 발을 예수님께 맡기십시오”(성 요한 비안네).
사람마다 져야 하는 십자가는 다르지만 모두가 자기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가난이 십자가일 수도 있고 오히려 큰 부가 십자가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는 자녀가, 남편이,
아내가, 동료가, 공동체의 일원이, 장상이 장애물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성격이, 언어의 습관이,
주변의 환경이 십자가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주님께서는 그 십자가를 통해서 나를 다듬고, 겸손하게 하고,
기도하게 하고, 마침내 내가 취할 길을 발견하게 하고, 가야 할 길에 용기를 얻게 해 주십니다.
따라서 십자가를 피할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기꺼이 짊어질 수 있는 은총을 구해야 하겠습니다.
십자가를 내 것으로 받아들이고 사랑함으로써 십자가를 극복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십자가가 어디서 오는지 아예 생각하지 마십시오!
언제나 하느님으로부터 옵니다.
십자가는 언제나 하느님께서 우리의 사랑을 당신에게 증거할 방법으로 주시는 것입니다(성 요한 비안네).
십자가는 우리 모두의 교과서입니다.
십자가는 고통스럽기도 하지만 구원의 도구임이 틀림없습니다.
십자가 현양축일에 사랑의 십자가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는 말씀은 우리에게 큰 기쁨과 희망을 안겨줍니다.
특별히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에는 우리를 무조건 살리고 싶어 하는 하느님의 구원의지가 담겨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의 구리뱀을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았듯이 우리도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기만 하면 무조건 살 수 있게 해주고 싶어 하시는 하느님의 극진한 사랑에 감사합니다.
심판보다는 구원을 앞세우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며 나의 삶에 있어 십자가는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 생각해봐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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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송영진 신부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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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4. 십자가 현양 축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십자가 현양 축일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십자가의 제헌을 통하여 인류의 죄를 속죄하시는 것을 경배하며 기념하는 날입니다. 전승에서 예수님께서 못박혔던 십자가를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 헬레사 성녀의 노력으로 찾게 되었는데, 황제는 이것을 계기로 335년 무렵 예루살렘의 예수님 무덤 곁에 성전을 지어 봉헌하여 그 때부터 예수님의 십자가 현양을 기념하였습니다. 축일은 제 2 차 바티칸 공의회 이후 9월 14일로 고정되었습니다.
말씀의 주제는 '모세의 중재기도. 구리뱀을 본 모든 사람들은 살아남 과 하느님의 외아드님을 통한 영원한 생명"입니다. 불뱀에 물린 사람이 구리뱀을 바라보면 살았듯이,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모든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현장을 되돌아 봅니다. 나와 만나 사람들. 만남 대화, 한 일을 구체적으로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그릇됨을 봅니다.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함가 개선을 묵상합니다.
-. 지난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길을 가는 동안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뱀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민수 21,4-9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하느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셨기에 사랑하는 외아드님을 보내 주셨습니다. 외아드님을 믿는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하느님은 사람을 만드시고 숨을 부으시어 자녀가 되게 하신 모든 이들이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라십니다. 당신의 사랑의 아드님은 세상에 오셔서 십자가의 제물로서, 죄로 죽을 인간을 대신해서 스스로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아버지의 아드님의 극진한 사랑을, 외아드님은 자신을 희생으로, 모든 인간의 죄를 속죄하고 구원하는 데 바치셨습니다. 사랑의 극치입니다.
십자가 현양의 믿음 생활은, 사랑의 일을 시작하는 것입니다. 오늘 좋은 일과 만남을 위해서 시간을 내고, 장소를 허락해 줍니다. 희생과 나눔과 사랑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제헌을 따르는 길입니다. 십자가를 현양합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합니다.
이재을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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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9월 14일 월요일 성 십자가 현양 축일 매일미사
_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집전
https://youtu.be/ANOcbyP0N3E (33:05)
•2020. 9. 14.
cpbc TV_가톨릭콘텐츠의 모든것
김정일 안드레아 신부 (의정부교구 고양동 본당 주임) 집전
사람의 아들도 들어 올려져야 한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3,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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