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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 수첩
해이수
천 원짜리 설탕 커피를 한 모금 홀짝였다. 그리고 이어폰을 끼고 보이스 레코더를 작동시켰다. 지난 보름 동안 작업한 녹음 파일은 30개가 넘었다. 오늘은 한산에서 맞이한 세 번째 장이었다. 인터뷰 대상은 모시 생산자와 시장 상인 그리고 노점상 등으로 다양했다. 대설주의보와 한파주의보가 하루걸러 내려지는 올 겨울에 나는 녹음기와 수첩을 들고 한산면을 헤집고 다녔다. 새벽에 반짝 열리는 모시전을 취재할 때는 거의 전투에 임하는 군인의 심정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왔디야?”
12월 초 한산면에 첫발을 디뎠을 때, 나를 접한 주민들은 대개 이렇게 물었다. 일주일이 지나자 그 물음은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아니, 여직도 안 갔디야?”
이 말은 여러 의미를 내포했다. 긍정적으로는 ‘아직도 여기 있었네?’ 하는 신기함이고, 부정적으로는 ‘아직도 안 가고 뭐하니?’ 하는 아연함이었다. 긍정적인 어조의 분들은 ‘꽤나 착실한 놈일세!’ 하면서 마음을 여는 반면, 부정적인 분들은 ‘꽤나 할일 없는 놈이네?’ 하며 혀를 차는 식이었다. 보름이 되도록 내가 시장 구석구석을 빙글빙글 맴돌자 좋게 봐주고 나쁘게 봐주고 간에 주민들은 한 목소리로 말했다.
“워메, 도대체 원제 간디야?”
면사무소 근처의 초원다방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다. 사인용 테이블 여섯 개가 놓인 홀 중앙의 연탄난로 위에서는 주전자 물이 끓었다. 벽에는 주류회사에서 배부한 달력이 붙어 있고, 출입문이 여닫힐 때마다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이 그네를 탔다. 홀과 부엌을 구분하는, ‘바(bar)’라고 하기엔 좀 토속적인 나무선반에는 전기밥솥이 놓여 있는데, 차를 주문하면 여주인은 뜨거운 밥솥에서 찻잔을 꺼내어 준비했다.
동자북 마을에서 녹취한 ‘모시 삼는 노래’를 듣다가 레코더의 정지 버튼을 누르고 이어폰을 귀에서 뺐다. 녹음 파일을 문서로 만들 생각을 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백 선배의 목소리가 귀에 쟁쟁했다.
“야, 넌 소설가가 뭐 대단한 건 줄 알아? 사람 사는 이야기 적는 거잖아! 시골 장터 가서 현지인들 인터뷰 따고 정리하는 게 뭐가 어려워?”
3주 내로 인터뷰 스무 꼭지를 건져오라는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짓자 선배는 언성을 높였다. 그것도 육성녹취를 그대로 타이핑하는 게 아니라 ‘문예 미학적으로 복원하라’는 단서가 달려 있었다. 처음에는 이런 일 한번 해보지 않겠느냐는 청유형으로 나오더니 막상 설명을 듣고 내가 망설이자 말투는 곧 명령형으로 바뀌었다. 잡지사 쪽에서 관록이 붙은 선배는 나를 마치 수습기자 다루듯 했다.
“블라디미르 나보코프는 이런 말을 했어.”
백 선배는 등을 의자 뒤로 기대며 턱을 치켜들었다. 작가 아닌 사람이 작가에게 작가는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한다고 가르치려 들 때만큼 불편한 경우는 없었다. 대학시절 같은 문학회에서 활동하던 선배는 공부도 등한시하며 작가가 되기 위해 갖은 애를 썼으나 되지 못한 사람이었다.
“잘 들어. 과학자는 우주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보고, 시인은 시간의 한 점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느낀다! 뭔 말인지 알아? 시골 촌부에게서 발견하는 것이 곧 우주일 수 있다는 거야. 잔말 말고 가서 온몸으로 채록해 와!”
이런 잡문을 쓰면서 저런 잡설까지 들어야 하나, 하는 자괴감이 밀려들었다. “이런, 블라디! 그렇게 우주를 보고 싶으면 당신이나 직접 가시지!” 하는 욕설이 치밀었지만 결국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아내와 네 살배기 딸, 돌이 지난 아들의 얼굴이 아른거렸다. 그는 원하던 작가가 못 되었고 나는 그가 원하던 작가가 되었는데, 이상하게 그는 다리를 떨면서 꾸짖는 반면 나는 고개를 숙이고 훈계를 듣는 상황이었다. 마감은 12월 25일이었다.
“이거 한 잔 드셔 보세요.”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여주인이 주문하지도 않은 생강차 한 잔을 내왔다. 그녀는 아담한 키에 몸가짐이 다소곳하고 목소리가 나긋나긋해서 마음씨 고운 시골 이모 같았다. ‘아주머니’라 하기엔 젊고, ‘누나’라 부르기엔 나이차가 보였으므로 ‘이모’라는 호칭이 떠올랐다. ‘이모’라는 단어는 얼마나 순박하고 향내 나며 곱디고운가.
장날인데도 다방엔 손님이 없어서 대화를 나누기에 좋았다. 생강차는 알싸하고 달콤했다. 하루 손님이 몇 명이냐고 물으니 보통 열 명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가장 많이 나가는 품목은 천 원짜리 ‘설탕 커피’이고 웬만한 찻값도 천 원이었다. 아무리 시골 다방이지만 하루 매출이 만 원 내외에 불과했다. 나는 난로의 하루 연탄 소비량이 궁금했다.
“하루 여섯 장 때요. 요즘 연탄 한 장에 500원이에요.”
난방비로 삼천 원이 나가면 순이익은 한참 깎이는 셈이었다. 내가 노트를 하며 어이없는 표정을 짓자, 장날엔 손님이 서른 명이 넘을 때도 있어서 운영에는 큰 지장이 없다고 했다. 나는 가장 비싼 찻값이 얼마인지 물었다.
“생마를 간 차와 인삼차가 가장 비싸요. 오천 원.”
그녀는 ‘오천 원’이라고 발음하면서 환하게 웃었다. 생마는 직접 시장에서 골라 갈아 만들고, 인삼은 홍산에서 주문한다. 하루 열 명 정도의 손님이 전부 그런 차를 마실 턱이 없으므로 역시나 비관적이었다. 위로를 해야 할 쪽은 나인데 오히려 역할이 바뀌어서 그녀는 상황이 그렇게 나쁘지 않다고 힘주어 말했다.
“지금이 겨울이라 그렇지 여름엔 괜찮아요. 삼천 원짜리 냉커피가 인기가 좋거든요.”
냉커피를 논과 밭에 배달하면서 여러 잔심부름까지 도맡아 한다는 말이었다. 담배뿐만 아니라 농사에 필요한 자질구레한 것들까지 사다준다는 것. 나는 이 찻집만의 특별한 차를 개발해서 마케팅을 하는 전략이 필요한 것 같다고 제안했다.
“특별한 차는 없어요. 다방이 다 그렇죠.”
그녀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숙였다. 나는 손수 꿀에 재운 생강차처럼 직접 구해서 쓰는 다른 차 재료는 뭐가 있냐고 질문했다.
“대부분 직접 구해요. 쌍화차에 들어가는 달걀도 집에서 키운 닭이 낳은 거예요. 대추차의 대추도 집 마당에서 딴 거고.”
커피를 제외하곤 모든 재료가 토산품이고 자연산이었다. 집에서 닭을 키우느냐고 물으니, 40마리가량을 키운다고 했다. 그녀는 아침에 새로 낳은 달걀을 가져왔다며 “한번 맛 좀 보실래요?” 하고는 냄비에 달걀을 삶았다. 특별한 게 없다기보다는 특별한 것의 기준이 도시와는 다를 뿐이었다.
달걀이 익자 그녀는 쟁반에 소금과 함께 내왔다. 그중 한 알의 껍데기를 벗겨 내게 건넸다. 나는 직접 까서 먹겠다고 몇 번을 사양하다가 결국엔 그녀가 까준 달걀을 받아먹었다. 흰자가 탱글탱글하고 노른자는 고소했다. 소금 사이에는 깨가 옹기종기 박혀 있었다.
나는 슬슬 사적인 것을 알고 싶었다. 어떻게 이곳에서 다방을 열게 되었느냐는 질문이었다. ‘어떻게 해서 이런 일을 하게 되었는가?’라는 말은 간단한 듯 보이지만 실은 어려운 물음에 해당한다. 대답의 스펙트럼과 깊이의 층위가 다양하기 때문에 조심스러운 일이었다.
그녀는 신성리 갈대밭 근처의 연봉에서 태어나 스무 살에 중매로 결혼하여 한산에 정착했다. 서른이 못 되어 남편과 떨어져 살게 되었고, 이후에는 두 아이를 키우며 식당 일을 주로 했다. 남 밑에서 일하기가 힘들었는데, 마침 15년 된 다방이 세를 놓은 것을 보고 인수하게 됐다.
처음에는 주위 분들에게 왜 하필 다방이냐며 거친 소리를 많이 들었다. 그때 개업을 말리던 분들이 지금은 주요 고객이다. 장성한 딸은 달마다 생활비를 보내 주며 제발 그만두라는 잔소리를 한다. 개업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딸을 가르치던 고등학교 선생님이 심심풀이 화투를 치러 온 적이 있는데, 민망해서 얼굴이 화끈거릴 정도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분과 편하게 농담도 주고받는다.
손님이 없는 시간이나 가게 문을 닫은 후에 가장 많이 하는 생각은 자식 걱정이다. 특히 혼기가 꽉 찬 아들이 좋은 아가씨와 결혼해야 할 텐데, 하는 염려가 떠날 때가 없다. 자식 얘기가 나오자 그녀는 어느덧 ‘상냥한 다방 주인’에서 ‘걱정 많은 어머니’로 바뀌어 있었다. 나는 문득 그녀의 어릴 적 꿈이 궁금했다.
“이건 잘 말하지 않는 건데…….”
그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내가 기다리자 조용히 대답했다.
“학교 음악 선생님이 되고 싶었어요.”
그리고 손으로 입을 가리며 수줍게 웃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참으로 적절하다 싶어서 빙긋이 따라 웃었다. 왜 ‘마음씨 고운 이모’들은 영화나 드라마에서, 소설에서, 그리고 현실에서까지 선생님이나 수녀를 꿈꾸는지 알 수가 없었다. 왜 그리 순탄치 못한 사랑의 과정을 겪는지도 알 수가 없었다. 더욱이 왜 그 꿈을 이루지 못하여 벽지(僻地)의 허름한 탁자 건너편의 낯선 남자에게만 그런 속내를 수줍게 털어놓는지 그 역시 알 수 없었다.
우리 앞에는 어느덧 달걀 껍데기만 쌓여 있었다. 소금의 양도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다. 복잡하고 굴곡진 한 사람의 생애를 한 시간에 간추려 듣는다는 건 이렇듯 부스러진 껍데기를 더듬는 일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잔해로 원형의 상태를 가늠하는 철없는 작업이 나의 일이었다.
테이블을 치우는 그녀에게 이 마을에 흥미로운 인물이 사느냐고 물었다. 가능하면 젊은 사람이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여주인은 고개를 갸웃하더니 수의대를 졸업한 마을의 전도유망한 청년이 얼마 전에 신협 서기가 되었다고 했다. 신협이라면 걸어서 1분 거리도 안 되는 곳이었다. 나는 레코더와 수첩을 챙기고 잠바를 주섬주섬 걸쳤다. 그리고 왜 상호명을 ‘초원다방’으로 했냐고 물었다.
“여기는 초원이 없잖아요. 예쁘지 않나요?”
나는 동의한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남아 있는 엽차를 홀짝 들이켰다. 벌써 세 잔째였다. 맛이 좋다고 하니 텃밭에서 자란 옥수수로 끓인 차라고 했다. 하기야 그녀에게는 볶은 옥수수를 사는 일이 훨씬 손해일 것이다. 생강차를 두 잔이나 마시고 찐 달걀까지 얻어먹은 터라 거스름을 팁으로 건넸으나 그녀는 한사코 사양했다.
출입문을 열고 나와 시멘트 계단을 내려왔다. 겨울바람이 매섭게 양 뺨을 할퀴고 지나갔다. 간판에 새겨진 ‘초원’이라는 글자를 무심히 보고 있다가 그녀의 대답을 생각했다. 여기는 초원이 없잖아요…… 맞다. 이런 초원 혹은 일상의 공터가 없다면 삶이 얼마나 답답할 것인가. 나는 천천히 신용협동조합 한산지점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문화 시계’의 유리문을 열고 들어선 건 ‘준비된 우연’이었다. 신협 서기 남영기 씨를 방문했더니 여섯 시쯤에 일이 끝난다고 했다. 벽걸이 시계는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일단 밖으로 나왔으나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나는 ‘소곡주 거리’에서 칼바람을 맞으며 콧물을 훔쳤다.
어디 들어갈 만한 곳이 없었다. 수북이 쌓인 눈을 밟으며 새벽부터 장터 사람들을 만난 터라 인터뷰에도 지쳐 있었다.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살아온 이야기를 해달라고 부탁하는 일은 고단한 작업이었다. 나 역시 낯선 사람에게서 그런 부탁을 받으면 환대보다는 냉대를 택했을 것이다. 더욱이 영업을 하는 시골 상인들에게 ‘현실적 이윤’과 무관한 ‘막연한 인생담’ 요청은 당혹스러울 게 분명했다.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내 눈에 몇 걸음 건너 시계방이 들어왔다. 배터리가 닳아서 멈춰버린 손목시계가 떠올랐다. 장날인데도 점심시간 이후로는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았다. 십여 년 전만 해도 ‘썩은 생선을 팔려면 한산시장으로 가라’는 말이 돌 만큼 문전성시를 이루던 한산은 이젠 말 그대로 한산했다.
시계방 문을 열고 들어서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몇 번이나 주인을 부르자 60대로 보이는 아주머니가 방문을 열고 나왔다. 용건을 묻더니 아주머니는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점포 안은 ‘ㅠ’자 형태로, 가장 넓은 가운데 진열장에는 각종 시계가 놓여 있었고, 왼쪽 진열장에는 보석류, 오른쪽 진열장에는 수동 카메라 등속이 정갈하게 진열되어 있었다. 시계가 주요 취급물이고 보석과 카메라는 부속 상품인 듯 보였다.
연락을 받고 나타난 사장은 첫인상이 방송인 이상벽과 흡사했다. 아담한 체구에 표정이 부드럽고 말투가 유쾌했다. 충청도 사투리가 유쾌해지면 얼마나 듣는 이를 기분 좋게 뒤흔드는지 겪어 보지 못한 사람은 잘 모를 것이다. 부쩍 친근함을 느낀 나는 애초의 계획을 바꿔 배터리 교체에다 아직 멀쩡한 가죽 끈까지 바꿔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스탠드 램프 아래서 노련한 솜씨로 수은 전지를 갈아 끼우는 그에게 슬쩍 말을 걸었다. 여기서 장사를 한 지 얼마나 됐냐는 것이었다.
“이 바닥에서 지가 장사를 40년 넘게 했어유. 여덟 번을 넘게 이사를 댕겼구먼유.”
사장은 시선을 작업대에 고정시킨 채 시계 줄을 바꾸며 대꾸했다. 반응이 호의적이었다. 나는 이 일을 처음 하게 된 계기가 있냐고 물었다.
“처음엔 지가 전자제품 수리가 주 특기였쥬. 그것보단 아무래도 시계가 훨씬 수입이 좋으니께 바꾼 거쥬. 지금도 어지간한 전자제품은 지가 다 고치쥬. 내용을 아는 사람들은 시골서 썩기 아깝다고 한당께유.”
그는 자화자찬이 좀 어색했던지 말을 마치고 나서 나를 슬쩍 올려다보았다. 순간 눈이 마주치자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우리를 지켜보던 아주머니도 남편의 농담에 함께 웃었다. 나는 거의 동물적인 본능으로 주머니에서 녹음기의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 말씀을 참 재밌게 하신다고 칭찬하며 지갑을 열었다.
“칠천 원만 주서유.”
값을 지불하고, 정상적으로 초침이 돌아가는 시계를 손목에 차고 나서도 나는 몸을 돌려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밖은 추웠고 갈 데도 없었다. 그래서 여기는 주요 고객층이 어떤 분들인지를 물었다.
“우리의 주요 고객층은유, 60대에서 70대 할아버지, 할머니들이쥬. 요즘은 검은 머리 보기 힘들어유.”
그 별것도 아닌 말에 사장님과 나는 또 마주 보며 웃었다. 한산시장의 소비 연령층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그러자 옆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말을 거들었다.
“옛날부터 오던 손님들이 전부지유. 아주 가끔은 손주 돌 반지도 하나씩 사가세유.”
영업을 하는 당사자로서는 한심하기 그지없는 내용을 부부는 천연덕스럽게 늘어놓았다. 나는 여기서 가장 많이 나가는 상품이 궁금했다. 사장님은 잠시 흰머리를 검지 끝으로 긁적이더니,
“가장 많이 나가는 상품은유…… 그게 그러니께, 시계 수리여유. 여기는 웬만혀서 암 것도 안 버려유. 다 고쳐 써유. 수리가 가장 많아유.”
남편의 말을 받아서 아주머니가 이었다.
“옌날에는 예물 시계나 보석도 가끔 혔는디, 이제는 싹 없어유. 근디…… 어디서 왔시유?”
그제야 나는 신분과 지금 어떤 작업을 하는지를 밝혔다. 이미 대책 없이 얼굴을 마주하며 웃은 탓인지 두 분은 경계심 없이 나를 대했다. 어쩌면 이 좁은 마을에서 나의 출현을 벌써 들었을지도 모르고, 두 분의 큰아들과 내 나이가 같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올해 64세인 박순종 사장은 이곳에서 2킬로미터가량 떨어진 송산리 출신이었다. 나는 시계수리 일을 처음 배우게 된 과정을 들려달라고 했다. 사장님은 진열장 안쪽에 서서 경쾌한 사투리로 얘기를 꺼냈다. 이후 그의 입담이 얼마나 찰지고 재미있는지 나는 때로 진지하게 고개를 주억거리고, 때로 허리를 꺾어 가며 웃었다. 자칫 지루해질 찰나에 들어오는 아주머니의 추임새는 분위기를 돋우었다. 부부는 웃음이 많은 분들이었다.
십대 중반부터 동네에 버려진 라디오나 TV를 분해해서 고치는 일에 남다른 재능을 보인 그는 스무 살이 되기 전에 상경했다. 그 시절 학업의 기회를 얻지 못한 대부분의 청년들이 그러하듯 그 또한 기술을 익혀서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각오뿐이었다. 그러나 서울의 시계방에 들어가 온갖 허드렛일을 하는데도 돈은 한 푼 못 받고 밥만 겨우 얻어먹는 견습 생활이 몇 년이나 지속됐다.
역 주변에 위치한 시계방을 찾아오는 손님들은 대개 뜨내기였다. 그 자리에서 대충 손을 대서 초침만 움직이면 그걸로 끝이었다. 근본적인 수리보다는 일단 작동시키는 잔기술을 주로 부리는 곳이었다. 더욱이 처음 만난 시계방 사장은 그에게 기술을 가르쳐주는 일에 매우 인색했다.
“기술을 빨리 일러주면 딴 데로 가버리니께. 그럼 더는 못 부려 먹으니께 이 냥반이 잘 안 갈쳐주더라고!”
한계를 느낀 그는 그렇게 해서는 고급 기술을 못 배우겠다는 생각에 서울에서 과감히 군산으로 돌아왔다. 군산은 그의 고향 부근에서 대처에 속했다. 다행스럽게도 새로 취직한 군산의 수리점은 시계와 전자제품, 안경까지 두루 다루는 곳이었다. 배울 것이 많을 뿐만 아니라 시계 부속을 깎는 기계까지 구비하고 있어서 안성맞춤이었다. 그리고 오히려 서울보다 대우가 좋았다.
“지금 보니께 그 주인이 실력은 있었어. 내 보고 그러더라고, 자신이 누구 못잖게 잘 고치니께 열심히 허라고.”
그날 이후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밤에는 가게 바닥에서 자는 생활이 이어졌다. 겨울에는 접이식 군용침대를 깔고 자며 시계수리 일을 배웠다. 뜯어보면 겨우 엄지 첫 마디만 한 시계 내부가 속을 알 수 없는 깊은 우물처럼 까마득하고 어지럽게만 보이던 시절이었다.
“참 나, 지금 보면 원리가 간단헌디, 당시엔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못 배우겄더라고, 아휴, 못 배우겄어!”
그때가 떠오르는지 사장의 얼굴엔 어느새 힘겨운 표정이 역력했다.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고개까지 도리도리 저었다. 말투에도 경쾌함이 사라지고 고단함이 배어 나왔다. 나는 그가 감정에 휘말려 이야기가 뒤죽박죽 섞이지 않도록 유도 질문을 했다. 군산에 내려와 맨 처음 배운 것을 말해 달라고 했다.
*
“맨 처음 한 일은 부품 소제였어. 요즘 말로 허면 부품 청소.”
군산 시계방의 주인어른은 시계수리 주문이 들어오면 그에게 모든 부속을 깨끗이 닦아오라고 지시했다. 민감한 부속일수록 먼지가 많으면 기계가 잘 돌아가지 않는 탓이었다. 그는 그 일을 반년이나 했지만 주인이 수리를 하는 근처에는 얼씬도 할 수 없었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틈날 때마다 주인이 수리하는 모습을 몇 걸음 떨어져서 유심히 관찰하는 것뿐이었다.
“그렇게 반년을 넘게 일했을 거여. 어느 날은 주인이 부르더니, 고장 난 시계 뒷면을 뜯어서 부속을 쏟아 놓고는 맞추라고 하더랑께.”
내장 기관을 전부 밖에 풀어헤쳐 놓고 제 위치에서 톱니가 꼭 맞게 재조립하는 일이 그의 두 번째 과제였다. 그는 두 번째 과제를 잘하려고 분해와 재조립을 수백 번 정도 했다. 주인에게 인정받아서 빨리 다음 단계로 올라가고 싶은 열망이 가득했다. 나중에는 눈을 감고 잠자리에 누우면 깨알만 한 부품이 수박만 하게 떠오를 정도로 부속 하나하나를 훤히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 일에 자신이 붙었을 때, 큰맘 먹고 제대로 된 놈을 하나 땄지. 근데 말이여, 부품을 다 집어넣었는데도 초침이 안 움직이는 거여! 멀쩡한 놈을 병신으로 만들었당게. 환장하겠더라고!”
점포 일이 끝나면 원인을 알기 위해 분해와 재조립을 반복했다. 주인어른은 문제점에 관해 별다른 지침이나 언급도 없었다. 그는 처음 배운 대로 부품을 꺼내 하나하나 다시 닦고, 어깨 너머로 봤던 주인의 작업을 흉내 내어 부품에 기름칠을 한 뒤에 조립과 해체를 계속했다. 4개월가량 똑같은 짓을 반복하던 어느 날이었다.
“크아, 드디어 째깍, 하고 초침이 움직이더라고. 난 정말 지축이 움직이는 줄 알았당께!”
듣고 있던 내 입에서도 탄성이 나왔다. 그랬을 것이다. 서울에서의 견습 기간을 제외하더라도, 부속 소제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그 작은 초침을 한 칸 이동시키는 데 거의 10개월이 걸린 셈이니 째깍, 하는 순간 지구 축이 흔들리는 경이로움을 맛보았을 것이다. 해체와 조립을 반복하던 그 4개월 동안 그는 도대체 무엇을 깨닫고 발견한 것일까.
“그게 뭥가면, 지금 보믄 참으로 간단한 거여. 내가 부속 먼지를 닦아다 주면 그 냥반이 조립할 때 꼭 기름칠을 하더라고. 기계 잘 돌아가라고. 나는 기름칠이 많으면 잘 돌아갈 거라고 생각혔지 뭐여! 바보맨치로!”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나는, 그가 내 눈을 보며 “바보맨치로!” 하는 바람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난감했다.
“근디 그게 아니여, 기름칠이란 게 원래 한 듯 만 듯 혀야 지 역할을 하더랑께!”
그랬다. 120일 동안 시계 내장에 코를 박고 그가 간신히 알아낸 것은 겨우 ‘기름 몇 방울의 양’이었다. 원인은 그렇게 사소하고 간단했다. 정밀한 것일수록 사소하고 간단한 것이 문제를 일으킨다는 것을 그는 그 순간 깨달았던 셈이다. 세상사 혹은 인간관계에서도 기름칠이나 양념이란 게 원래 있는 듯 없는 듯해야 최대 효과를 본다는 이치까지 터득한 것이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근디 말이여, 희한하게도 말이여, 이 시계가 가긴 가는디 시간이 안 맞는 거여. 점점 느려지더랑께!”
박순종 사장의 음성이 한층 높아졌다. 한 고개를 넘었으나 다른 난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초침은 움직이지만 점점 느려져서 나중엔 멈춰버리는 시계. 이쪽 말로 환장할 노릇이었다. 그는 목이 마른지 아내에게 눈짓을 했다. 그러자 아주머니는 작은 냉장고에서 박카스 두 병을 꺼내어 그와 내게 내밀었다. 맞장구를 치며 듣고만 있는 나도 목이 말랐다. 박순종 사장은 목울대가 울리도록 음료수를 들이켜더니 뚜껑을 든 손을 치켜들었다.
“내가 말이여, 이걸 알아내는 게 지금까지 젤루 힘들었어. 가긴 가는디, 제대로 안 가는 거여. 한 사흘 지나면 시간이 안 맞는 거여.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인 거여. 근디 주인은 아무리 졸라도 안 갈쳐주는 거여!”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다시 처음의 스텝을 되밟는 일이었다. 부속에 먼지가 있는지, 기름칠을 적당하게 했는지, 부품의 아귀가 제대로 들어맞는지 아무리 되짚고 확인해도 작동이 느려지는 원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달력 뒷면을 양분하여 결함의 문제가 될 법한 것들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차분히 나누었다. 문제가 될 법한 것들의 범위를 좁히고 좁히다 보니 결국 한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
“시계 내부를 보믄 말이지, ‘유사’란 게 있어. 내가 그걸 몰랐던 거여.”
군산 시계점 밥을 먹은 지 11개월이 흘렀을 때, 유사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겨우 알아냈다. 그럼에도 유사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몰랐다. 그때부터 주인이 수리를 할 때마다 꼼꼼히 살폈는데, 예전에는 ‘무조건 훔쳐보기’였던 반면 그 후로는 ‘옥석을 구분한 관찰과 분석’에 들어갔다.
“그러니께 ‘유사의 간격잡기’가 안 되었던 거여. 지금 보면 되게 간단한 건디, 그게 그렇게 힘들었어. 유사가 상하좌우 어느 면에 닿지 않도록 조정해 줘야 시계가 정확허게 가거든.”
이야기를 듣던 나는 박수를 쳤다. 굳이 박수를 친 까닭은 그의 말에서 어떤 진정성을 엿보았기 때문이었다. 큰 성취를 이룬 그 어떤 연구자의 실험 과정기와 다르지 않았다. 동전 하나 크기의 세계를 파악하기까지 반복된 실패와 자각의 노고가 고스란히 다가왔다.
“일루 와바. 이거시 바로 유사랑께. 이거시 있어서 손목시계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 바늘이 돌아가거든.”
사장님은 나를 ‘시계샘방(시계 수리 장비틀)’ 안으로 불러들였다. 알전구 아래 확대경을 통해서 나는 난생처음 기계식 시계의 ‘유사’를 보았다. 머리카락 한 올 굵기의 철선을 미세한 간격에 맞춰 동심원 형태로 정교하게 감아 놓은 것이었다. 그것은 템포 바퀴, 태엽통 등과 긴밀히 연결되어 예민하게 팔딱거리며 시계에 동력을 제공했다. 사람으로 치면 맥박을 공급하는 심장과도 같았다. 고급 손목시계를 고치는 기술자일수록 이 유사에 관한 이해도와 정밀도가 높다고 했다. 나는 고개를 들어 유사의 간격잡기를 파악했을 때 기분을 물었다.
“뭐 그냥 말도 못 혀. 뛸 듯이 기뻤쥐 뭐! 날아갈 것 같았징!”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며 목소리가 떨렸다. 당시 청년 박순종은 이를테면, ‘시계 심장의 은밀한 비밀을 파악한 사람’이었다. 사람의 일생에서 몇 번 각인되지 않는 성공의 한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은 이후로 그렇게 스스로 도운 자를 계속 도왔다.
자신의 지식이 거기까지 도달하자 주인은 그저 고개를 한 번 끄덕했다고 한다. 그제야 나머지 것들을 세부적으로 차근차근 알려주었다. 그리고 주문이 들어오는 시계 수리를 그에게 맡기기 시작했다. 시계 부속을 직접 깎아 만드는 법도 가르쳐주었다. 수리에 성과를 보이자 점차 가게 운영을 거의 전부 그에게 일임했다. 한 마디로 신임을 얻은 것이다. 그러면서 청년 박순종은 수리뿐만 아니라 점포 운영에 관한 여러 노하우를 익히게 되었다. 그의 대우는 날로 좋아졌다.
*
군산 시계방에서 4년을 보냈을 때, 그는 독립을 결심한다. 나가겠다는 의사를 밝히자 주인어른은 이전보다 훨씬 나은 처우를 약속했지만, 그는 당장의 안락을 뿌리치고 한산시장에 첫발을 내민다. 가게를 열기에는 자금 사정이 턱없이 열악했기 때문에 햇빛 가리개도 없는 좌판을 벌인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이고 한산시장이 한창 흥청대던 시기였다. 아주머니는 그 시절을 딱 몇 마디로 요약했다.
“혼담이 들어왔는디, 아, 상대가 한산시장서 시계방을 한다네유. 주변에서 부자헌티 시집 잘 간다고 얼마나 부러움과 시샘을 받았능갑나 몰러유. 근디 막상 와보니께 글씨, 국민핵교 책상만 한 좌판에다 시계 몇 개, 시계 줄 몇 개, 도라이바 몇 개, 뭐 그딴 거 달랑 갖다 놓고 서 있드만유.”
그 말에 우리 셋은 또 얼굴을 마주 보며 웃었다.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애틋함 때문이었다. 그때는 텃세가 심해서 ‘시장 주먹들’한테 얻어터지기도 많이 얻어터졌다고 했다. 술 먹고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고, 무작정 손을 내밀고 돈을 달라는 이들이 걸핏하면 좌판을 뒤집는 일도 심심찮게 벌어졌다.
곧 박순종 사장의 실력은 입소문을 타고 빠르게 퍼져 나갔다. 장날이 되면 시계 수리가 한 보따리씩 들어왔다. 다음 5일 장이 설 때까지 수리를 마쳐야 해서 그는 늦은 밤까지 시계샘방에 앉아 일을 했다. 그리고 시장 구석에서 구석으로 여덟 번의 이사를 다닌 끝에 지금의 널찍하고 번듯한 가게를 열었다. 가게를 연 자리는 바로 군산에서 내려와 초등학생 책상만 한 좌판을 처음 펼친 곳이었다. 그러는 와중에 세 아들을 모두 대학까지 졸업시킨 것을 보면 그가 얼마나 성실했을지 짐작됐다. 나는 그렇게 한 보따리씩 들어오던 일감이 언제부터 끊겼는지를 물었다. 부부는 동시에 대답했다.
“IMF때! 1998년, 그 뒤로 뚝 끊기더랑께.”
IMF가 몰고 온 악몽의 시간을 이 시계 기술자 또한 피해갈 수 없었다. 점방을 차린 후로는 돈 걱정을 크게 한 적이 별로 없었는데, 이때는 만 원 한 장을 쓸 때마다 손이 벌벌 떨렸다고 했다. 요새는 어떠냐는 질문에 전보다는 ‘쬐금’ 나아졌지만 재미없기는 매한가지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는 여전히 연구를 게을리 하지 않는다. 수동 카메라 수리에도 상당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서천군에서 수동 카메라를 수리할 만한 기술자는 몇 손가락에 꼽을 정도에 불과하다. 신제품들은 그에게 전부 연구대상이다. 여전히 그는 책도 참조 안 하고 오로지 정면 승부를 택한다. 그가 내뱉은 한 문장에서 나는 수리 실력 9단의 내공을 바로 느꼈다.
“원리를 찾아내서 고치는 게 젤루 어려워.”
아내가 안쓰러운 듯 옆에서 거들었다.
“교육기관서 책으로 배워서 고치는 법을 익혔으면 쉬울 터인디, 그냥 무작정 뜯어서 고치니께 지금도 아침부터 밤까지 저 늬가 그렇게 애를 써요.”
그 덕에 박순종 사장은 칠형제 중 가장 먼저 머리가 하얗게 새는 기록을 세웠다. 다른 사람은 못 하는 특기 개발에 여전히 고심 중이라는 증거였다. 최근에는 디지털시계와 디지털 카메라까지 연구하고 수리한다. 디지털시계의 경우 대전에서 한 박스씩 모아서 수리를 맡기고 간다고 했다. 한번은 도저히 못 고치는 디지털시계를 맡아서 자존심이 상한 적이 있는데, 결국 생산 공장에 들어가서도 수리가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고 나서야 가슴을 쓸어내렸다고 한다.
나는 그의 실력을 검증하지도 않았고 검증할 수도 없지만, 그의 실력을 의심하지 않게 되었다. 박순종 사장이 밑바닥에서부터 본질에 접근한 사람임을 납득했기 때문이다. 시계수리 기술자의 시간에는 무엇보다 진정성의 맥박이 뛰고 있었다. 따라서 서울의 오리엔트 수리 최고 전문가에게서 인정받은 일화, 부여와 군산에서 못 고친 고급 롤렉스를 고친 성공담 등은 생략하기로 마음먹었다.
두 시간이 얼마나 빨리 갔는지 녹음기가 꺼진 줄도 모를 정도였다. 밖에는 어느덧 함박눈이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가게 문을 열고 들어온 사람은 한 명뿐이었다. 그것도 물건을 구입하거나 수리를 의뢰하는 분이 아니라 불우이웃돕기 떡을 팔러 들어온 아저씨였다. 차가운 떡을 든 아저씨의 손에 사장 내외는 몇 천 원을 쥐어줬다. 나는 박 사장과 인사를 나누며 이렇게 가게 안에 수많은 시계의 바늘이 돌아가고 추가 흔들리면 어지럽거나 불안하지 않으냐고 물었다. 악수를 하던 그가 일축했다.
“건 모르는 소리여. 우덜은 저거시 안 움직이면 불안혀.”
*
신협 서기 남영기 씨를 만나러 여섯 시에 찾아가자 집에서 급한 전화가 왔다며 내일로 미뤘으면 좋겠다고 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어서 나는 그렇게 하자며 밖으로 나왔다. 눈송이가 꽤나 굵었다. 장이 완전히 파한 뒤여서 텅 빈 시장과 거리는 눈에 뒤덮이고 있었다.
초원다방을 지나쳐 큰 길을 따라 내려오는 길에 ‘멕시칸 치킨’의 간판에 불이 들어온 게 보였다. 이제는 새로운 프랜차이즈에 밀려 도시에서 자주 볼 수 없으나 한때는 흔하던 멕시칸 치킨의 붉은 간판이 그곳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과거에 접하던 멕시칸 치킨과는 다른 독특한 풍경을 나는 그곳에서 발견했다.
지난 보름 동안 한산면을 헤매다가 해가 저물면 나는 언제나 이 치킨집 앞을 지나갔다. 다른 길도 많지만 나는 일부러 이 가게 앞으로 지나갔다. 더욱이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문 밖에서 안을 기웃거리며 서성댔다. 그 가게 앞에 서면 커다란 유리창 너머로 두 아들의 공부하는 모습이 보이기 때문이었다. 단정하게 스포츠머리를 한 아이들은 오늘도 연필을 세우고 문제집을 풀거나 책을 읽고 있었다. 매일 똑같이 펼쳐지는 정경은 이랬다.
이 가게는 여느 치킨 집이면 구비하기 마련인 손님용 테이블이 없다. 대신 두 개의 학생용 책상이 있다. 초등학교 고학년으로 보이는 아이는 좌측 벽의 책상에 앉아 있고, 중학생쯤 되는 큰 아이는 출입구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다. 우측 사이드의 튀김 조리시설 앞에는 어머니가 신문을 읽고 있다. 아버지는 출입구의 작은 의자에 앉아서 공부하는 두 아들의 등을 보며 배달을 준비하고 있다. 그 가족은 한두 걸음이면 닿을 거리임에도 불구하고 서로 조심하며 독려하는 듯 보였다.
나는 마음속으로 ‘멕시칸 치킨’이라는 간판을 떼어내고 ‘미시건 독서실’이라는 새 간판을 붙여 주었다. 단 한 번도 그 아이들은 한눈을 팔거나 다리를 떨거나 코를 후비는 짓은 하지 않았다. 물론 꾸벅꾸벅 조는 일도 없었다. 밖을 서성대는 나와 눈이 마주치는 일도 없이 매번 반듯하게 앉아서 자신의 공부에 몰두했다.
목화솜 같은 눈송이가 펄펄 내리는 밤거리에 서서 그 가족을 보고 있으면 까닭 없이 눈물이 핑 돌았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이들이 공부하는 뒷모습을 보며 노동의 피로와 쪼들리는 살림살이를 감내하는 듯 여겨졌다. 그리고 아이들은 아버지와 어머니의 삶의 현장에서 아무런 불평 없이 정신적 지평을 넓히는 데 열중이었다.
책꽂이에 꽂힌 학업 참고서와 낡은 위인전과 과학 도서를 보면 괜히 콧등이 시큰거리고, 좌에서 우로 또박또박 움직이는 연필을 보면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번잡한 대로와 유리 한 겹을 두고 공부에 여념이 없는 그들을 볼 때면, 나는 느닷없이 문을 열고 들어가 녀석들의 짧은 머리를 한 번씩 쓰다듬어 주고 싶었다. 그리고 이해받을 수 있다면 용돈을 건네주고도 싶었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 가게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다만 밖에 서서 두 아들과 부모님을 위해 기도를 했을 뿐이다. 이런 말을 하면 웃길지도 모르지만, 한산의 빼어난 풍경 몇 개를 꼽으라면 나는 주저 없이 이 멕시칸 치킨의 유리 너머 가족 풍경을 포함시킬 것이다. 그것은 그대로 액자와 제목을 갖춘 한 폭의 수채화와 다름없었다.
나는 그렇게 치킨 집을 들여다보다가 내일은 이 시장에서 또 누굴 만나야 하나, 헤아리며 걸음을 옮겼다. 발이 시리고 배가 고프고 가족의 품이 그리웠다. 간혹 크고 작은 차량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옆으로 지나갔다. 여관은 마을 밖의 대로변에 있었다. 내일은 신협 서기 남영기 씨를 만나는 게 급선무였다. 그를 만나서 별다른 성과가 없더라도 그것 외에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나는 콧물을 훔치고 시린 손으로 주머니 속의 레코더를 움켜쥐었다. 지금은 나보다 이 레코더가 더 소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