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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은 하나님이 세우신 나라이다 요10:9-10, 마24:7-9
오늘 6월 25일은 대한민국사람으로서는 그냥 넘기고 갈 수 없는 날이 바로 6.25 한국전쟁입니다. 지금 이세대에 사는 사람들은 대부분 경험하지 못하였지만 73년전 바로 오늘 새벽 4시에 북한 김일성은 38선 전 지역에서 남침하면서 나라세운지 2년도 안된 대한민국은 생존의 갈림길에 섰습니다. 3년동안 같은 민족이 이념 때문에 서로 상대를 향해 총부리를 겨눈 전쟁결과는 너무나 참담했습니다. 1000만 이산가족과 남북한 군인사상자가 민간인 포함하여 약 600만 명이 다치거나 죽었던 전쟁이 6.25한국전쟁이지만 세월이 흐르다보니 전쟁을 한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고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그 날의 참담함을 모르고 그저 흘러간 이야기로 생각하는 것 같아서 너무 안타깝습니다. 더욱이 문재인 정부때는 군복무가 단축되고 사단들이 해체되고 휴전선 GP초소가 철거되고 휴전선 둘레길이 개방되고 한편으로는 종전협상 평화협정을 부르짖으며 마치 통일이 곧 올 것처럼 국민들을 속였는데 주사파 문재인은 이 자유대한민국을 북한 김정은에게 바치겠다는 마음이 아니고야 어찌 그렇게 안보를 파괴할 수 있었는가가 놀라울 뿐입니다. 그러나 이 나라를 지켜주신 하나님께서는 저들의 의지대로 보고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윤석열 정부를 세우심으로 대한민국의 위기를 다시한번 막아 주신 것에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전쟁이 왜 일어났는가 생각하면 마귀를 알아야 합니다. 마귀가 오는 것은 사람들을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죄를 범하였기 때문에 마귀는 죄진 인류에 대해 사망권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세상에서 왕 노릇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마귀를 이길 수 있는 길은 오직 한가지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는 것 뿐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나니 천하 인간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니라 하였더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내가 다 이루었다 하실 때는 아담으로부터 장차 주님 강림 하실 때까지 인류의 모든 죄를 다 갚았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죽음에서 부활하시면서 철저히 마귀의 사망권세를 물리치셨습니다.(고전15:55-57) 55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56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5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런데 지금도 마귀는 전쟁을 통해 사람들을 죽이고 멸망시키는 일을 왜 할까요? 그것은 마귀의 정사와 권세는 무너졌으나 무저갱에 감금되기 전 까지는 게릴라전을 통해 사람들을 유혹과 거짓과 설득으로 지옥으로 끌고 가려고 하는 것이므로 우리는 일평생 마귀와의 싸움을 계속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마귀는 우리를 죽이고 멸망시키고자 전쟁 하도록 통치자들을 미혹하는 것입니다. 주님 오시는 날까지는 일정 기간 동안 마귀가 세상을 지배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지만 믿는 자들은 말씀과 기도를 통해 마귀를 물리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남북이 이념으로 대치된 국가에서는 이념자체가 분명합니다. 자유이냐? 독재이냐? 시장경제냐 국가통제냐 하나님이냐 사탄이냐 등 이념자체가 뚜렷합니다. 세계 많은 국가들 중 교회가 가장 많은 대한민국과 같은 나라도, 또 하나님 대신 김일성 주체사상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북한 같은 나라는 없는 것입니다. 마치 우리나라와 북한과는 하나님과 사탄과의 대립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나라를 지켜주지 않았다면 오늘날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지금도 우리들이 거짓을 선동하는 주사파 세력들을 경계하지 않는다면 제2의 6.25는 언제든지 다시 올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확실한 것은 그 때나 지금이나 지도자의 거짓말로 인하여 백성들의 안보불감증이 곳곳에서 들려오고 있으며 국민들은 통일이라는 말에 또 한번 속아서는 안된다. 73년 전에도 평화, 민족이라는 저들의 달콤한 말에 속아 안보불감에 빠져 있다가 전쟁난지 삼일만에 서울이 적에게 점령당함으로서 세계전쟁사중 유례없는 전쟁사를 기록하였는데 현재 우리나라는 북한에 비해 핵무기도 없고 땅굴도 부인하는 상황에서 또 다시 제 2의 6.25전쟁이 터진다면 과거와는 비교 되지 않을 정도로 훨씬 더 무자비하고 더 혹독한 피해가 오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대한민국이 어떻게 세워진 나라인지 한 나라의 역사는 그 나라의 고대사나 중세사도 근세사도 중요 하지만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는 대한민국이라는 현대사 만금 중요한 역사는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하면 일제강점기의 독립운동가이자 역사학자이셨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명언인 '역사를 잊은 민족은 재생 할 수 없다.'라는 외침이 우리들로 하여금 국가의 역사관이 절실히 느껴지는 때가 지금이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패망으로 갑자기 찾아온 해방과 함께 1948년 8월 15날 대한민국의 정부수립이 시작된 것이 대한민국의 역사 시작이다. 1948년에 대한민국이 수립된 것은 우연히 세워진 나라가 아니고 하나님의 섭리하에 세워진 나라가 바로 대한민국이다. 우리나라 애국가에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부르는 것 자체가 대한민국은 시작자체가 하나님의 함께하심이었다.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것에 대해 우리 힘은 단 1%도 없었다는 것이니 우리의 해방은 하나님의 주신 선물이라는 것이다. 나는 이 시간 이것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해방 후 대한민국이 세워진 후 2년도 안되어 일어났던 6.25한국전쟁에서 거의 다 망했던 대한민국을 다시 찾게 해주신 것이 정말 하나님의 은혜라는 것을 이야기 하고 싶다. 어떻게 하나님께서 우리나라를 멸망에서 구하여 내셨는가가 궁금하다 그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참혹한 전화를 입은 인류는 더 이상 인류가 전쟁을 하지 않고자 1945년 10월 24일 가맹국 51개국으로 발족한 국제연합 UN이 창설 되었다. 만약 UN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세상에 다시 존재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한다. UN은 여호와 이레의 하나님이 대한민국을 위해 준비하신 국제기구였다. 해방이후 대한민국은 단군이래 처음으로 선거를 하였다. 사회가 혼란하고 경제적 상황이 불안한 가운데 1948년 5월 10일 대한민국 제1대 국회의원 선거가 최초로 치러졌다. 그 당시 국회의원 임기는 2년 이었고 이때 헌법을 제정하였기에 제헌국회의원이라고 한다. 제1대 총선으로 뽑힌 국회의원 200명이 간접적으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선출하여 8월15일 대한민국 수립을 국내외에 선포했다. 국회에서 대통령을 선출한 후 처음으로 대통령을 포함한 국회가 어떻게 열렸는가를 당시 속기록을 보면 알 수 있는데 대한민국이라는 나라가 처음열리는 국회에서 대통령을 포함하여 전 국회의원이 기도하면서 제헌국회가 시작하였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오늘날 왜 우리나라는 교회가 이렇게 많은 가를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그에 대한 설명을 잠시 들어보시라. 대한민국이 탄생하기 위해 1948년 5월 10일 역사적인 총선을 통해 국회의원들이 뽑혔는데 거의 기독교인들이었다. 우리나라 제헌국회 속기록 첫 장을 열면 기도로 국회를 개원한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48년 5월 30일 대통령 이승만은 이윤영 의원겸 목사에게 기도로 국회를 열 것을 주문합니다. ‘대한민국 독립민주국 제1차 회의를 여기서 열게 된 것을 우리가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나는 먼저 우리가 다 성심으로 일어서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릴 터인데 이윤영 의원 나오셔서 하나님께 기도를 올려 주시기를 바랍니다.’고 대통령이 말하자 이윤영의원은 기도문을 다음과 같이 읽었습니다.‘이 우주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인간의 역사를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시여, 이 민족을 돌아보시고 이 땅에 축복하셔서 감사에 넘치는 오늘이 있게 하심을 주님께 저희들은 성심으로 감사하나이다. 오랜 시일 동안 이 민족의 고통과 호소를 들으시사 정의의 칼을 빼서 일제의 폭력을 굽히시사 하나님은 이제 세계만방의 양심을 움직이시고 또한 우리 민족의 염원을 들으심으로 이 기쁜 역사적 환희의 날을 이 시간에 우리에게 오게 하심은 하나님의 섭리가 세계만방 성시하신 것으로 저희들은 믿나이다. 하나님이시여, 이로부터 남북이 둘로 갈리어진 이 민족의 어려운 고통과 수치를 신원하여 주시고 우리 민족 우리 동포가 손을 같이 잡고 웃으며 노래 부르는 날이 우리 앞에 속히 오기를 기도하나이다.‘ 이 기도문이 국회가 처음 열렸을 때 하나님께 국민의 대표인 국회의원이 기도를 한 후 국회에서 처음으로 헌법과 국정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는 것이 오늘날 세계 200개 국가가 있지만 과연 한국말고 어느 나라가 하나님께 개원국회의 기도를 드렸다고 생각이 되나? 당시 기독교인이 전 국민의 5%도 안되는 때에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었겠는가? 이는 이승만 대통령이 하나님을 섬기는 참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 아니었겠는가 한다.
1. 6.25 한국전쟁이 일어난 역사적 배경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미국과 공산주의의 탄생을 주도한 소련이 새로운 강대국으로 부상하면서 새로운 이념대결과 패권다툼이 벌어졌는데 그 현장이 바로 대한민국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연합군의 승리가 임박한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흑해 연안의 휴양도시 얄타에서 영국, 미국, 소련의 수뇌부가 모여 2차 세계대전 전후 처리를 논의한 얄타회담으로 인하여 한반도가 38선을 경계로 미소 양국에 의해 분할되는 계기가 되었다. 1945년 8월15일 우리나라는 해방을 맞이하였지만 기쁨도 잠시였고 얄타회담에 의해 38선을 기준으로 남한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북한은 1948년 9월 9일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정부가 출범하였는데 문제는 북한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면서 자리를 잡았지만 한국은 자유주의와 공산주의 이념논쟁이 각 진영에서 첨예하게 대립된 상황이 시작되었다. 남한에서 공산주의 발생은 1925년 박헌영이가 조선공산당을 최초로 창당하였었는데 해방되기전 까지는 조선공산당에 가입하는 것이 애국운동이었고 반일운동이었으므로 공산당에 대해 대부분 호감을 갖게 되었다. 그러나 해방 후 1946년 9월4일 박헌영은 조선공산당. 조선인민당· 남조선신민당 3당을 결성한 남조선노동당 보통 남노당을 탄생시켰을 때 일반사람들은 남노당을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다. 미군정 자료에 따르면 해방후 적어도 80% 정도가 남노당을 지지하던 터였을 때 해방후 이승만 박사가 귀국했을 때는 여윤형, 김구 박헌영 등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다 남노당에 동조하던 때 이승만 박사 조만식 등 이 이들과 싸우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을 것이다. 문제는 박헌영이 중심이 되어 결성된 남노당이 신생국가인 대한민국을 흔들어 댔다는 것이다. 총선전에 발표한 남노당은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무상몰수·무상분배의 토지개혁, 주요산업의 국유화를 강령으로 내세우면서 '부산의 철도노동자들이 일으킨 9월 총파업을 시작으로, 3.1운동 이후 가장 큰 민중항쟁인 '10월 대구폭동사건'을 주도해 나가면서 전쟁나기 까지 정치는 좌·우 이념대결로 국론이 분열되었고 사회는 극도로 혼란스러웠으며 더욱이 국방은 1949년 미군 철수로 무방비 상태였다. 그러면 건국 후 6.25 전쟁이 날 때 까지 우리 사회가 얼마나 정치적으로 사회적으로 불안하였는가를 다음 사건들을 통해 알 수 있다.
(1) 남노당이 주도한 제주 4.3사건
정부가 수립되기 직전인 1948년 4월3일에 제주도에서 이른바 4·3사건이 일어났다. 이는 1947년 3·1절 기념대회에 시가행진을 구경하던 군중들에게 경찰이 총을 발사함으로써 민간인 6명이 숨지는 사건으로 인해 민심이 악화된 것을 이용해 남노당 제주도당은 조직적인 반정부 활동을 전개하면서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 이상이 참여한 대규모 민·관 총파업을 유도했다. 대규모 파업 주모자 검거작전을 벌여 한 달 만에 500여 명이 체포됐고, 1년 동안 2,500명이 구금되면서 이런 민심을 대변하듯이 1948년 4월 3일 새벽 2시 총성과 함께 한라산 중허리에서 남노당 제주도당이 주도한 무장봉기의 신호탄이 타오르면서 350명의 무장대는 12개의 경찰지서와 시청 등 우익단체 요인들의 집을 습격했고 단독선거·단독정부 반대 등을 슬로건으로 내걸면서 전국에서 제주도가 유일하게 5·10 선거를 거부한 지역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1948년 4·3 무장봉기로 촉발되었던 제주4·3사건은 남노당이 계획한 것으로 남노당 전남도당과 남노당 중앙당이 지원한 사건으로 희생자수는 대략 20000명 정도로 추산된다. 오늘날 제주 4.3사건을 보상해준다고 하는데 공산당 사주를 받아 국가반역한 자들에게도 보상을 준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문재인은 제주 4.3사건 추모사에서 남노당의 반란폭동을 진압한 군경을 국가폭력집단으로 매도함으로써 대한민국의 헌법과 정체성을 부정한 자가 아니었던가? 문재인은 역사를 왜곡하기 위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과 제주 4.3사건에 대해 유별나게 집착한 나머지 2001년 헌법재판소에서 재판관 전원일치로 제주 4.3사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반대하고 5.10총선거를 방해할 목적으로 조선인민공화국 건설을 지지하는 공산무장세력이 주도한 반란사건이라고 판결을 내린 사건이었음에도 이를 뒤집기 위하여 지난 4.3사건 추모사에서 그 마각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2) 남노당이 주도한 여순반란사건
1948년 정부수립 직후인 10월에는 전남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좌익계 장병들이 갓 출범한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을 정면으로 부정하면서 1948년 10월 19일 밤 여수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14연대의 남노당이 사주하던 좌익계 장병들이 제주 4.3사건을 진압하라는 명령에 반기를 든 사건이다. 이들은 무장폭동을 일으켜 전남 동부지역을 순식간에 장악한 후 지리산과 백운산 등 험준한 산악지대를 근거지로 한반도 남부지역의 이른바 빨치산투쟁을 선도하였다. 군대내에서 공산주의에 빠진 좌익계 사병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은 당시 우리 사회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던 가를 단편적으로 보여준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이처럼 일련의 사건들이 남노당을 중심으로 일어나면서 민족의 최대 비극으로 알려진 6.25전쟁이 일어났는데 이는 1948.4·3제주사건을 시작으로 1948.10.19.여순사건을 징검다리 같은 연결선상에서 1950. 6·25 한국전쟁은 발발했던 것이다.
2. 6.25 한국전쟁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합작품이다
올해는 한국전쟁 73돌이며 한번쯤 정리하고 넘어갈 인물이 박헌영이다. 해방되기 전까지 그가 얼마나 공산주의를 위해 일생을 바쳤는가를 한국의 현대사는 증명하고 있다. 8.15 해방과 더불어 1946년에는 남노당을 조직하였고 남한의 지식인 거의가 남노당에 가입하였다. 해방 후 불안한 시대에 그는 제주 4.3사건과 여순반란사건을 일으킨 배후자였고 마지막은 6.25한국전쟁을 일으킨 공모자였다. 박헌영은 띠동갑인 김일성보다 12살 앞섰지만 두 사람의 의견은 언제나 같았다는 점이다. 북한 권력 1,2인자인 김일성과 박헌영은 모택동을 만났을 때도 둘은 동행했다는 점이다. 한국전쟁은 둘 중의 누구도 반대한 것이 아니라 두사람이 공동으로 일으킨 것이다.
(1) 6.25 한국전쟁이 일어나다
소련 수상 흐루쇼프 회고록에 따르면 김일성은 남침공격을 위한 완벽한 계획서를 가지고 1949년 3월 소련을 방문해 스탈린을 만났다. 그리고 1950년 1월 김일성은 두번째로 모스크바를 방문해 군지원 요청과 남침 승인에 대한 확답을 받는다. 전쟁 발발하기 1950년 6월 10일 북한은 느닷없이 자신들이 억류하던 민족지도자 조만식 선생 부자와 그해 남한에서 체포된 거물간첩들을 맞교환하자는 평화공세를 폈다. 우리는 조만식 선생과 북한 간첩을 맞교환을 긍정 검토했으나 북한은 열흘간 시간을 끌다 무산시켰다. 인민군은 6월 12일부터 훈련을 가장해 38선 인근으로 이동하면서 6월 23일까지 모든 준비를 마쳤고 24일에는 해병대 병력을 실은 인민군 수송선이 동해안으로 출항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남한정부에 평화통일안을 제의하며 연막작전을 펼쳤다. 한편 남한은 북한의 평화공세에도 불구하고 6월11일부터 6월23일 까지 비상경계령을 내렸다가 해제하던 날 북한 김일성이는 전투병력을 38선 부근에 대기하도록 전쟁준비완료한 후 전쟁발생 이틀 전 이런 위기상황을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국방부는 6월 24일 자정을 기해 비상경계령 해제와 더불어 전 장병의 2분의 1에게 휴가를 주어 외출과 외박을 시켰으니 전방 부대 장병 절반 이상이 텅 비었던 상태에서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 북한은 선전포고 없이 38선을 넘어 북한군 포병대가 일제 포격을 개시했다. 11시경에 북한은 “남측이 우리의 평화제안을 거부하고 우리를 공격하여 아군(인민군)이 반격에 나섰다.”라는 거짓방송을 내보낸다. 1953년 7월 27일 까지 3년 1개월간 동족상잔의 비극적인 전쟁은 이렇게 막이 올랐다.
(2) 북한군 3일간 미스터리
우리의 든든한 미군이 6.25전쟁의 발발 소식을 듣고 유엔 결의에 따라 한국으로 급파된 미 제24사단 21연대의 제1대대가 1개 포병대가 최초로 전투를 벌인 날은 7월 5일이었다. 오산 남방에서 최초로 북한 인민군과 싸웠으나 33대의 전차를 앞세우고 들어오는 적에 포위되어 많은 전사자를 내고 포위망을 탈출, 후퇴했다. 여기서 미 제24사단장 딘 소장은 첫 전투에서 행방불명이 되었다. 이런 전시상황을 종합해 볼 때 인민군이 6월 28일 서울에 입성했을 당시 쉬지 않고 국군을 밀어붙였다면 7월 5일쯤엔 인민군이 낙동강 부근까지 도달해 사실상 한반도 전역을 장악한 상황이 되었다면 아마도 미국은 지상군 파병을 포기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이 일어날 수 있었지만 인민군이 서울 입성도 3일간 지체했지만 서울을 점령한 이후 3일간이나 지체한 것이 6.25전쟁의 가장 큰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당시 6.25전쟁에 참전했던 최태환씨는 중좌(중령)의 계급으로 인민군 6사단 13연대 정치보위부 책임장교였는데 그의 주장은 "김일성은 서울 점령 후 제2대 국회를 소집해 이승만대통령 하야를 결정하는 쿠데타를 벌이려했다"고 증언을 하였다. 북한은 이승만이 퇴진한 후에 국회의원들로 하여금 8월 15일에 남과 북이 통합한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 김일성의 계획이었던 것으로 알고 있다고 했다. 실제로 인민군은 서울을 점령한 후에 국회의원 소집을 공고 하였지만 이곳에 찾아오는 의원이 거의 없어 남한을 통합할 수 없다고 보고 7월2일 군사력으로 전 한반도를 석권하고자 한강 이남으로 공격을 결정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최씨의 증언을 뒷받침 한 것은 6.25 당시 인민군 작전국장이었던 유성철씨의 증언에 의하면 북한의 남침계획은 침공 사흘안에 서울을 점령하는 것으로 끝나게 되어있었다. 만약 서울을 점령하면 박헌영의 공언대로 20만 남노당원이 일어나 남한 정권을 전복시킨다는 말을 믿고 전쟁을 사흘로 예정했지만 결과는 3년이라는 기나긴 전쟁을 보낸 것이다. 결국 인민군은 3일을 제외한 전 기간은 그들의 예상에도 없던 전쟁을 치룬 것이다. 전쟁 발발은 6월 25일 9시 30분에 미국에 보고되면서 UN안전보장이사회는 6월 28일 개최되었고, 북한의 침략을 격퇴하기 위해 필요한 물자를 한국에 제공한다는 안건이 가결되었고. 미국은 이 결의안에 따라 7월 1일에 미 지상군을 한국전쟁에 참전시킨는 결의에 의거해 16개국이 파병을 결정하고 의료지원 5개국도 참전한다. 1945년 10월 24일 UN이 창설되면서 당시 51개국 중 21국가가 한국 전쟁에 참전한다는 것을 두고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하나님의 도우심이 아니었는가? 세계 역사상 국제정의에 입각한 최초의 16개국 유엔군이 편성되어 한국을 지원한다는 것은 놀랄만한 사건이었다. 트르먼 대통령은 군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에게 지상군 투입과 38선 이북의 군사 목표를 폭격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함(6월 30일)에 따라, 맥아더는 주일 미 제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에게 “제24사단을 한국으로 이동시키라.”라는 명령을 하달(6월 30일)하였다. 1950년 6월 25일 부터 1953년 7월 27일 까지 3년 1개월간 지속된 6.25전쟁의 과정은 크게 4단계로 나눌 수 있다.
1) 제 1단계 - 북한의 승세 기간
북한 인민군이 3일만에 서울을 점령하고 전쟁 40일후에는 한반도의 10%밖에 남지 않은 낙동강 일대를 제외하고는 전 영토를 차지하고 말았다. 6.25전쟁이 발생한지 거의 한달이 되어가는 1950년 7월20일 김일성은 북한군에게 8월15일까지는 반드시 부산을 점령하라고 독촉 하였다. 북한군은 수안보에 전선사령부를 두고, 미군 정면에 제1군단, 국군 정면에 제2군단을 배치하여 이른바 ‘8월 공세(1950.8.4.∼8.25)’와 ‘9월 공세(1950.9.1∼9.15)’의 두 번에 걸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하여 대구방어전투· 영천전투· 동해안지구전투 등 많은 공방전이 전개되어 지역에 따라서는 방어선을 돌파당할 뻔한 위기를 맞기도 하였다. 그 중에서 낙동강 전투 중 가장 치열했던 다부동전투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한다.
2) 다부동전투
6월 25일 남침한 공산군은 7월 말에 이르러 낙동강을 도하하여 대구와 부산을 잇는 아군의 대동맥을 끊으려고 압박을 가하여 왔다. 이에 미8군 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한 최후의 방어선으로서 서쪽은 낙동강을 이용한 방어선과 낙동강 상류를 포함해 동북부의 산악지대를 잇는 천연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선을 구축하여 이를 사수하기로 하였다. 8월 4일 새벽 1시를 기해 형성된 워커라인이라고도 부르는 낙동강방어선은 남북 160km, 동서 80km의 타원형을 이루었는데, 낙동강 일대의 방어는 주로 미군이, 동북부 산악지대의 방어는 국군이 담당하였다. 다부동은 대구 북방과 상주와 안동에서 대구로 통하는 도로가 합쳐지고 왜관에까지 이르는 지방도로의 필수적인 요충지였다.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갈 경우 다부동에서 25km떨어진 대구가 북한군 공격의 사정권 내에 들어가게 되므로 다부동 방어선이 전쟁의 승패를 좌우하는 것이었다. 북한군도 다부동일대에 3개 사단과 함께 2만2천여명의 병력, 전차 20여대 각종 화기 700여기로 중무장하여 공격을 감행해 왔다. 이곳을 지키는 국군화기는 북한군의 5분의1 수준 밖에 되지 않았다. 그야말로 다부동이 북괴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은 불보듯 뻔한 것이었던 것이다. 그동안 북한군에게 계속 밀림으로써 전투다운 전투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국군과 유엔군은 8월 초부터 마산-왜관-영덕에 이르는 낙동강 방어선을 형성하여 방어태세에 임하였고 북한군은 마지막 남은 총력을 기울여 낙동강 도하 공격을 개시하여 8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공세 작전을 감행하였다. 국군과 유엔군은 북한군의 무차별 공세에 힘겹게 맞서면서 북한군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저지하였다. 이에 미8군사령관 겸 유엔지상군사령관 워커 장군은 북한군의 공격에 대해 “더 이상의 후퇴는 없다”며 최후의 방어선을 구축하라고 지시하였는데 이는 낙동강 전선을 죽음으로 지키라는 명령이었다. 낙동강 전선 이곳저곳에서 다부동전투, 영천전투 등 국가의 운명을 결정지을 만한 결전이 벌어졌다. 국군과 유엔군은 낙동강을 따라 영덕-청송-의성-낙동리-왜관-남지-마산을 잇는 방어선을 구축했는데 전력이 부족한 낙동강 1차 방어선을 지킬 수 없어서 8월 11일에는 왜관-다부동-신령-기계-포항을 잇는 80km 가량의 전선을 축소하여 방어했다. 이 2차방어선을 지키지 못하면 더 이상 반격의 희망이 없다. 이미 초기에 국군과 유엔군이 밀렸으므로 8월 13일 북괴의 3사단 병력이 328고지를 공격하고 북괴 15사단이 국군 제 12연대보다 앞서 아군이 미처 점령하지 못한 674고지를 먼저 점령하였다. 국군은 이미 빼았긴 328고지를 뺏고 뺏기는 피의 쟁탈전을 펼쳤고, 국군은 유학산 837고지와 674고지의 탈환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유학산 일대의 싸움은 매우 처절하였으며 말 그대로 돌산 하나를 두고 서로 수류탄을 던져대는 근접 전투가 지속되어 양측은 하루동안에만 3천여명의 사상자를 냈다. 미 제8군 사령부는 적의 주력부대를 제압하기 위하여 폭격기 편대로 960톤의 폭탄을 쏟아부으며 북한군의 병력에게 큰 피해를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적의 공격은 다부동 축선으로 집중되어 8월 16일 다부동 바로 서쪽 방어선이 돌파될 큰 위기에 놓이게 되었다. 이에 국군 1사단장은 백선엽 장군은 후퇴하는 장병들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장병 여러분, 여기서 물러나면 대구가 점령되고, 대구가 점령되면 부산이 점령되면 우리는 전부 죽던지 아니면 포로가 된다. 부산에서 죽을 바에는 여기에서 죽는 것이 낫다. 지금부터 사단장인 내가 선두에 서서 저 산을 돌격할 것이니 귀관들은 내 뒤를 따르라! 내가 선두에서 물러나면 나를 쏘아라! 마침내 8월 23일 새벽2시 야간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유학산 837고지까지 점령하면서 국군 1사단은 장교 부사관 병사들이 투혼을 발휘하여 승리로 이끌었던 다부동전투는 매우 치열했던 탓에 매일 600~700명이 사망하였다. 좀 자세히 설명한다면 18일 밤부터 북한군은 T34 전차를 선두로 공격 하여 개전 이래 최초의 전차 對 전차의 포격전이 전개되어 미군은 적 전차 7대와 자주포 3대, 차량 수대를 파괴했다. 다부동전투에서 국군의 사상자 1만여 명, 적군 사상자 1만 7500여 명을 기록했다. 한국전쟁 당시 국군에게 자신감과 힘을 실어주고, '포기하지 않고 싸우면 지켜낼 수 있다'는 것을 일깨워준 다부동전투는 1950년 한국 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손꼽히는 전투였다. 다부동 전투에서 만약 방어선이 뚫렸다면 대구와 부산이 적의 수중에 들어가면서 전쟁은 종료되었을 것이며 오늘날 대한민국은 존재하지 않았을 것으로 봐야 한다. 만약 단 한 차례만 방어선이 뚫려도 대한민국의 국운 자체가 위태로운 지경이었던 것이 다부동전투였는데 낙동강전투의 총사령관인 워커장군의 한국사랑이 없었다면 오늘의 대한민국이 과연 존재하였을까? 오늘을 살아가는 대한민국 국민들이 워커장군에 대한 존경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낙동강전투에서 특히 다부동전투에서 우리국군과 유엔군이 북한의 집요한 공격을 막았기 때문에 인천상륙작전과 서울수복이 이어진 것이다. 이 모든 성과는 낙동강전투의 사령관 해리스 워커장군의 수훈이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3) 제 2단계 – 서울탈환 이후 평양점령
1950년 9월 15일 미군이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9월 28일 13일 만에 서울을 수복하고 38도선을 넘어 10월 13일에는 평양을 점령한 한국군 일부가 10월 26일에는 압록강 근처 초산까지 진격을 한 시기입니다.
4) 제 3단계 - 중공군의 개입
유엔군의 북진에 위협을 느낀 중공군의 개입(10월 25일)으로 전세가 역전되면서 다시 한국군이 오산 부근까지 후퇴했다가 다시 38도선을 넘어서 (1951년 3월 24일) 철원, 금화 일대까지 진출(6월 11일)하고, 중공군 개입으로 전쟁이 새 국면에 접어들자 유엔군 총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만주를 폭격하고 중화민국의 장개석 군을 동원해 중국 남부지방에 제 2전선을 설정할 것을 주장하였지만 맥아더 장군의 전쟁확대론은 세계대전으로의 확대로 이어질 수 있어서 미국정부에 의해 저지되었고 맥아더 장군은 해임(4월 11일) 되었다.
5) 제 4단계 - 휴전협정
휴전회담 진행과 휴전협정의 성립기로 소련 유엔대표의 휴전제의를 미국이 받아들여 개성에서 7월 10일 본회의가 열렸다. 주요문제는 비무장지대 설치를 위한 군사경계선 설정, 휴전 감시기관 구성, 포로교환 등이었다. 이승만은 휴전반대운동을 전개하는 것에 미국은 한미상호 안전보장조약 체결하고 경제원조를 통해 한국군 증강 등을 조건으로 이승만을 무마시키켜서 53년 7월 27일 유엔군과 북한 인민군 사이에 휴전협정이 조인됨으로써 마침내 우리 민족의 염원과 의사는 전혀 반영되지 않는 가운데 전쟁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3) 6.25전쟁의 결과
6·25전쟁사료에 따르면 3년1개월 동안의 전쟁 피해 상황은 단군이래 수많은 희생을 낸 전쟁결과는 20만명 미망인과 10만명 고아 그리고 1000만 이산가족이 발생했고 미군 사망자만도 5만 4246명(지금까지 이라크전 미군 사망자가 약4천 여명), /한국군을 포함한 유엔군 사망자가 모두 62만 8833명, /부상자는 미군만 10만 380명, /유엔군 전체는 106만 4453명, /미군 실종자만 8177명, /유엔군 실종자는 47만 267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남북한 군인사상자가 모두 약 300만 명, 민간인 사상자도 모두 약 300만 명. 합계 약600만 명이 죽고 다친 전쟁이 6.25전쟁이다. 그리고 수많은 가옥이 파괴 되었으니 전쟁댓가는 5000년 역사상 대재앙임에 틀림없다.
3. 6.25 한국전쟁에서 반드시 기억해야 할 두 분의 이야기
(1)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6.25 전쟁이 발발하자 2차대전 때 유럽에서 명성을 떨치던 미8군 사령관 월튼 해리스 워커(Walton Harris Walker 1889년 12월 3일~1950년 12월 23일)는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듣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하는 이 땅에 미8군 사령관으로 사명 받고 왔다. 한국전쟁 시작 후 8월초에는 이미 경상남북도를 제외하고 전 국토의 90%는 북한의 수중에 들어갔던 때라 미국 정부는 정말 낙동강 전투가 뚫리면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다고 한 사실은 비문 내용에 나온다. 한국전에 참전한 미군병들이 파죽지세로 매일 북한군에 엄청난 숫자가 죽어가는 상황에서 미 의회와 정부에서 조차 전면 철수가 거론되는 시점이었으니 당시 한국전에서의 승산이 없어 보였다. 더글러스 맥아더 사령관도 전면철수인 New Korea Plan 이라는 일련의 상황에서 무조건 안된다고 버텨보겠다고 말한 사람이 워커 중장이다. 미8군 사령관인 워커 중장은 총사령관인 맥아더에게 남한 사수를 강력히 주장하였다. 최전선에서 직접 낙동강 전선을 사수하는 입장이었던 워커 중장은 한국 장병들을 만나서 이런 말을 전한다. "내가 여기서 죽더라도 끝까지 한국을 지키겠다." 고 하면서 미국 장병들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린다. "우리는 절대 물러설 수 없다. 물러설 곳도 없고 물러서서도 안 된다. 낙동강 방어선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무슨 일이 있어도 결코 후퇴란 있을 수 없다. 내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한국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 하나님께서 워커장군에게 한국을 지키겠다는 믿음을 갖도록 역사하셨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 사람이 미군 장병들에게 내질렀던 전설적인 명언은 "Stand or die." 사수 혹은 죽음뿐인 이 명령이 낙동강전투를 승리로 이끄는 원동력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 월튼 워커의 무조건 한국사랑
갑작스런 사고로 순직했기에 자서전 등의 사료가 없기 때문에 사실 워커 중장의 무자비한 한국 사랑에 대한 이유는 알 길이 없지만 어쨌든, 워커 중장은 인상적이고 무자비한 명령을 했다는 이유로 미국 의회에서 미국 국민이 알지도 못하고 듣지도 못한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조국도 아닌 전선에서 미국 장병들에게 희생을 강요하는게 마땅한가? Stand or die." 많은 희생을 낸 것에 대해 많은 비난을 감수해야만 했다. 미국 정부도 워커 중장에게 사령관 집어 치우고 집에 가라고 하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한국을 꼭 지켜야 한다고 전쟁을 반쯤 포기한 미국 정부와 사령관을 설득하면서 낙동강 전투를 지휘한 분이 바로 미8군 사령관 워커 중장이다. 결국 낙동강 방어에 성공한 이후에 맥아더의 낙동강 전선 시찰 덕분에 맥아더 사령관의 인천 상륙작전 구상이 가능해졌고, 워커 중장은 맥아더 사령관을 도와서 인천 상륙작전까지 성공시키는 공을 세웠다. 성공 확률 1/5000이라는 전쟁영웅의 업적인 인천상륙작전도 워커 중장이 낙동강전투를 지켜내지 않았다면 시작도 해보지 못했을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결론적으로 말해 맥아더의 선택은 탁월했지만 그 선택이 가능케 만들어준 것은 워커의 공이다. 사실 인천 상륙으로 인한 공을 따지자면 7 대 3 정도로 워커의 공적이 맥아더의 공적보다 크다 하겠다.
2) 안타까운 사고
해리스 워커장군은 1950. 12. 23 아들인 샘 워커 대위의 은성무공훈장 수상을 축하해주러 가는 중, 맞은편에서 한국군 사병이 운전하던 탄약 운반 삼륜차 트럭과 충돌로 즉사하였다. 2차대전에서도 혁혁한 공을 세우고 잠시 쉬지도 못하고 한국전쟁에 참전하여 망해가는 우리나라를 구원하고 한국에 온지 6개월 만에 그리 빨리 가다니 우리는 너무 안타깝고 슬프지만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밖에 없다.
(마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아니하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의 허락없이는 그것들 중의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하찮은 참새 한마리도 하나님 허락없이는 떨어지지 않는다고 하셨는데 하물며 워커 장군이야 말로 다 망하여가는 한국을 살려놓는 주어진 일을 100% 다 하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그를 통해 영광을 받으셨다. 이제 나라를 사랑하는 한국인으로서는 그를 정말 잊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 쉐라톤 워커힐 본관 정문 산자락에 세워진 비문 **
"오늘 우리가 장군을 특별히 추모하는 것은 한국전쟁 초기 유엔군의 전면 철수를 주장했던 미국 조야의 지배적인 분위기 속에서 유독 장군만이 홀로 한반도 고수를 주장하여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을 뿐만 아니라 한반도의 공산화를 방지하여 우리의 오늘을 가능케 한 그 공덕을 잊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2) 건국대통령 이승만의 이야기
오늘의 대한민국을 존재가능하게 한 분이 바로 이승만 대통령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대한민국의 건국을 주도적으로 세우신 분의 은혜를 모르고 이승만 대통령을 독재자로 매도하고 있는 거짓교사들이 있을 뿐이다. 이승만 대통령에 대해 독기를 품은 자가 바로 도올이라는 자인데 그는 유트브를 통한 기독교강의 중 여러차례 "이승만 이놈 새끼!"를 반복하여 능욕하는 말을 하는 이유인 즉 "이승만은 뺏속깊이 기독교인으로 기독교 입국론을 펼쳤다"는 죄목이었다. 그것이 그렇게 비난받아 욕을 먹을 일인가? 도올이란 자는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을 희롱하면서도 침략자인 김일성을 뼛속깊이 존경하여 결코 그렇게 부른 적이 없는 자는 스스로 돌이라 부르면서도 역사의 정론은 부정하고 항상 역사의 뒷간에 버려진 쓰레기 학설을 들고 나와 젊은이들을 현혹하며 세상을 소란케 하는 자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예수를 잘 믿으셨던 신앙인으로서 나라를 세우시고 구하셨음에도 무지하고 패덕한 자들로부터 무단히 욕을 먹고 있는 건국대통령임이다. 다음 글은 7년전 조선일보 양상훈 칼럼에 게제된 글이다.
50년 전 1965년 7월 19일 오전 0시 35분 하와이의 한 노인 요양원에서 나이 아흔의 한국인 병자가 숨을 거두었다. 한 달 전부터 피를 토했다.
7월 18일엔 너무 많은 피가 쏟아졌다. 옆에는 평생 수발하던 아내, 대(代)라도 잇겠던 양자와 교민 한 사람밖에 없었다. 큰 한숨을 한 번 쉬더니 숨이 끊어졌다. 어떤 어려움에도 우는 법이 없었던 아내가 오열했다. 전기 작가 이동욱씨는 영결식의 한 장면을 이렇게 전했다. 한 미국인 친구가 울부짖었다. "내가 너를 알아! 내가 너를 알아! 네가 얼마나 조국을 사랑하는지… 그것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을 해왔는지. 바로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그토록 비난받고 살아온 것을. 내가 알아…."
그렇게 외친 미국인은 장의사였다. 그는 1920년에 미국서 죽은 중국인 노동자들의 유해를 중국으로 보내주고 있었는데 이승만이라는 한국인이 찾아와 그 관(棺)에 숨어 상하이로 가겠다고 했다. 독립운동을 하는 그를 일본이 현상수배 중이이므로 그렇게라도 해서 그는 실제 관에 들어가 밀항에 성공했다. '너의 그 애국심 때문에 네가 얼마나 고생했고, 얼마나 비난받았는지 나는 안다'는 절규는 그냥 나온 것이 아니었다.
15일 아침 서울 국립현충원 이승만 대통령 묘소를 찾았다. 필자 역시 이 대통령에 대해 부정적 얘기만 듣고 자랐다. 그의 생애 전체를 보고 머리를 숙이게 된 것은 쉰이 넘어서였다. 이 대통령 묘 앞에서 '만약 우리 건국 대통령이 미국과 국제정치의 변동을 알고 이용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면 지금의 대한민국이 존재할 수 있었을까'라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보았다. 고개를 흔들 수밖에 없었다. 이승만대통령 없이 대한민국을 건국하고, 그 없이 우리가 자유민주 진영에 서고, 그 없이 6.25전쟁에서 나라를 지키고, 그 없이 한·미 동맹의 대전략이 가능했겠느냐는 질문에 누가 "그렇다"고 답할 수 있을까. 추모비에 적힌 지주 철폐, 교육 진흥, 제도 신설 등 지금 우리가 디디고 서 있는 바탕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는 무지몽매한 나라에 태어났으나 열아홉에 배재학당에 들어가 나라 밖 신세계를 처음으로 접했다. 썩은 조정을 언론으로 개혁해보려다 사형선고까지 받았다. 감옥에선 낮에는 고문당하고 밤에는 영어 사전을 만들었다. 이 대통령은 독립하는 길은 미국을 통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1905년 나이 서른에 조지워싱턴대학에 입학하고 하버드대 대학원을 거쳐 프린스턴대에서 국제정치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1941년 미국에서 'JAPAN INSIDE OUT(일본의 가면을 벗긴다)'이라는 책에서 이 대통령은 일본이 반드시 미국을 공격할 것이라고 역설했다. 책이 나온 지 넉 달 뒤 일본이 진주만을 폭격했다. 미국 정치인들은 한국인 이승만을 다시 보았다.
이 대통령은 1954년 이 책 서문을 '우리는 미국이 어찌 하든지 간에 우리 백성이 다 죽어 없어질지언정 노예는 되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고 합심하여 국토를 지키면 하늘이 우리를 도울 것이다'고 맺었다. 평생 반일(反日)한 이 대통령을 친일(親日)이라고 하고, 평생 용미(用美)한 그를 친미(親美)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모르거나 알면서 매도하는 것이다.
최정호 울산대 석좌교수는 "어지러운 구한말 모두 중·일·러만 볼 때 청년 이승만은 수평선 너머에서 미국을 발견했다. 그래서 그를 19세기 한국의 콜럼버스라고 부른다. 우리 수천년 역사에 오늘날 번영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 박사의 공로인데 지금 우리 국민은 이 위대한 지도자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고 했다. 거인이 이룬 공(功)은 외면하고 과(過)만 파헤치는 일들이 지금도 계속된다. 건국 대통령에 대해 감사할 줄 모르는 우리의 자해(自害)와 업(業)을 생각한다.
이승만 대통령은 물러난 후 겨울에 난방할 땔감도 없었다. 하와이에선 교포가 내 준 30평짜리 낡은 집에서 궁핍하게 살았다. 교포들이 조금씩 보내준 돈으로 연명하며 고국행 여비를 모은다고 5달러 이발비를 아꼈다. 늙은 부부는 손바닥만 한 식탁에 마주 앉아 한국으로 돌아갈 날만 기다렸다. 이 대통령은 근대화된 사고로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자유민주국가로 성장시킬 수 있느냐를 고심하던 애국자였다. 해방되던 해인 45년 이미 70세(당시 한국 남자의 평균수명은 43세)의 노구로 귀국해 48년 초대 대통령에 올랐다. 흔히 이 대통령을 백범 김구(1876~1949) 선생과 비교해서 평가하곤 한다. 조국의 미래에 대한 우남의 생각은 백범과 달랐다. 단적으로 김구 선생은 “김일성하고 만나 얘기하면 왜 통일이 안 되겠느냐”고 주장했다. 실제로 백범 선생은 5·10 총선을 앞둔 48년 4월 북한의 초청으로 김일성을 만났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하고 돌아와야 했다. 곧이어 북한은 남쪽에 공급해 왔던 수풍발전소의 전기를 끊어버렸다. 당시 북한은 남한 전기의 70%를 공급하고 있었다. 반면 이승만 대통령은 처음부터 “김일성과 같은 공산주의자와 얘기를 하는 것만으로는 안 된다. 힘이 있어야 한다. 남한에 이북보다 더 강력한 나라를 세워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런 우남이었기에 김일성이 남침했을 때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그를 막아냈던 것이다. 그러면 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업적 중에 가장 두드러진 업적을 손꼽자면 첫째는 자유 민주주의 체제를 선택하여 뿌리를 내리게 한 업적입니다. 둘째는 휴전 직후 한미동맹을 맺게 한 업적입니다. 셋째는 6.25 전쟁에서 신속히 미군과 유엔군이 참가하게 하여 나라를 지킨 업적입니다. 넷째는 토지개혁을 실시하여 단군 이래 처음으로 소작인들이 자기 땅을 가질 수 있게 한 업적입니다.
1) 토지개혁이 6.25한국전쟁의 승리의 기폭제가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 중의 하나가 토지개혁입니다. 해방 직후 농업 국가였던 우리나라는 농촌 인구의 70%-80%가 소작인들이었다.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이승만은 자유 민주주의 국가를 세워야겠는데 소작인들이 이렇게 많아 경제가 일어나지 못하고는 진정한 민주주의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 농림부 장관이던 조봉암에게 토지개혁팀을 꾸리게 하여 지주들의 농토를 소작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토지개혁 사업을 착수하였습니다. 북한의 김일성 정권도 1946년에 토지개혁은 무상몰수 무상분배였습니다. 남한의 토지개혁은 유상몰수 유상분배였습니다. 거기에다 결정적인 차이가 북한은 토지 소유권을 농민들에게 주지 않고 경작권만 주었다가 후에 회수하여 정부 소유로 하였다. 남한은 지주들에게도 값을 치르고 회수하고 소작인들에게도 값을 치르게 하되 5년간 농사지은 수확에서 갚게 하였다. 그리고 북한과는 달리 토지를 받은 소작인들에게 소유권까지 주었다. 대한민국에서 토지개혁을 완성한 시기는 6.25 전쟁이 일어나기 2달 전인 1950년 4월 20일에 끝났기에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토지를 소유한 소작인들이 자기 땅을 지키기 위하여 용감히 싸운 덕으로 침략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경제 전문가의 진단에 의하면 그때 토지개혁이 이루어지지 못하였더라면 유엔군이 참전하였더라도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었을 것이라 합니다. 한국의 토지개혁은 세계 전체에서 가장 모범적인 성공 사례로 평가 받습니다. 한 예로 월남전은 경제적인 면에서는 토지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 전쟁으로 침략국인 프랑스에 줄 서서 지주가 된 카톨릭 신자들과 소작인들인 불교 신자들 간의 싸움이 월남전이었습니다. 미국 CIA가 이 점을 간파하고 월남 지도자들에게 베트콩을 물리치려면 한국처럼 토지개혁을 하라고 충고하였으나 월남 지도자들과 카톨릭 지도자들은 이를 거부하면서 결국은 카톨릭 지주들은 땅문서를 쥔 채로 베트콩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2) 한미방위조약 체결
1953년 <한미상호방위조약>이라는 동맹을 맺은 후 거의 70년 동안 한국은 평화와 번영을 누려왔습니다. <한미상호방위조약> 이전 70년동안 과 이후 70년 동안 이 땅 안팎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큰 사건들 중심으로 정리해봅니다.
1. 임오군란과 대원군 납치1882년 임오군란이 터지자 이를 기화로 청나라 군대 3,000명과 일본 군대 400명이 조선으로 들어오면서 조선에서의 지배권을 놓고 청나라와 일본 양국 간에 청일전쟁(1894~1895)이 터졌을 때 일본군이 승리하고 고종은 사로잡혔습니다! 이어 일본군은 평양으로 진격 평양성을 지키던 조선과 청나라 연합군을 격파했고 청나라 군대는 을밀대에서 항복하면서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했습니다.
2. 1895년 을미사변 청일전쟁이 1895년 4월 일본의 승리로 종결되자 조선 내에서 일본의 위세는 더욱 공고해졌고 동년 1895년 10월 8일 일본 낭인(사무라이보다 낮은 계층)들이 경복궁에 난입, 옥호루에 숨어 있던 민비(명성황후)를 죽였습니다. 고종은 선교사의 도움을 받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했지요. 이 사건을 후세 역사책에서는 '아관파천'이라 부른다.
3. 1905년 을사조약, 외교권을 상실하고
4.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이 망했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하고 1950년 6월 25일 북한군 침략전쟁으로 300만 명이 죽고 전국이 잿더미! 1953년 7월 27일 휴전된 후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의 군대가 주둔한 이후 70년 한반도에 큰 난리 없이 70년을 지내왔다. 포항제철 삼성전자 현대조선 경부고속도로. 한강의 기적을 일으키면서 경제적으로 세계 10대 강국이 되었지만 그 기간동안 북한은 고난의 행군을 겪으면서 수백만 명이 굶어죽은 아시아 최빈국이 되었다. 동맹이란 이렇게도 중요한 겁니다. 그러나!..이재명이가 중국에서 제일 큰 방송국인 관영 CCTV 인터뷰에 나와서 자신이 대통령되면 한반도에 배치된 미국 사드를 철수시키겠다고 선언했다. 나라 자존심 운운하면서 전시작전권 회수하고 사드 철수시키고 한미동맹 무너지면 어찌 될까요? 대한민국이 중국을 이길 힘이 있나요? 러시아 이길 힘이 있나? 경상도 김천 성주 지역을 지나다 보니 "사드 가고 평화 오라!" 이렇게 적힌 플래카드들이 눈에 띄더군요. 중국 러시아 이길 힘은 없어도 북한 핵무기에 대항할 힘은 없어도 평화타령 불러대면 평화가 옵니까? 노무현 대통령이 주한미군 철수 운운했었을 때 미국 국방장관이 럼스펠트가 유명한 말 한 마디 했지요."자주국방! 그것 좋은 말입니다. 하지만 우리 미국도 자주국방을 다 하지 못해서 여러 나라들과 동맹을 맺습니다. 힘이 부족하면 동맹을 맺어야 그 관계를 지켜 나아가야 하는게 살 길이지요.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