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송기원 선생을 직접 뵌 적 없지만
마치 오래 알고 지낸 사람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었다.
그것은 1983년에 초판이 발간된 그의 첫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에 대한
친근감 때문이다. 그때 나는
'귀에 파란 불을 켜고 불면의 밤을 지새는 청년'과 어떤 동질감을 느꼈던 것일까. 이유는 모르겠다.
그때 시집을 읽으며 어디서 한번쯤 만나본 적 있는 사람 같은 그냥 그런 느낌이 들었다.
언젠가 자연스런 기회가 닿으면 인사를 한 번 드려야지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선생께서 지난 7월 31일 별세하셨다는 소식을
오늘 인터넷 뉴스를 보고 뒤늦게 알았다.
향년 77세.
빈소는 대전 유성구 선병원 장례식장, 발인은 3일 오전 8시, 장지는 세종은하수공원이다.
선생의 별세 소식을 듣고
무거운 마음으로 서가를 뒤져 그 첫 시집을 꺼내 다시 읽어본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시
송기원(1947-2024)
별빛 하나에도 우리를 빛낼 수는 있다.
한 방울 눈물에도 우리를 씻을 수는 있다.
버려진 정신들을 이끌고, 바람이 되어
한반도에 스민 잠을 흔들 수는 있다 .
춥고 긴 겨울을 뒤척이는 자여.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더 이상 시를 써서 시를 죽이지 말라.
누군가 엿보며 웃고 있도다, 웃고 있도다.
불면의 밤에
귀에 파란 불을 켜면
들린다.
어둠의 중심께 은밀한 곳에
묻힌 나를 꺼내는 소리.
또 들린다. 밤에만 가장 아름답게
모습을 바꾸는 것들의,
가령 헐벗은 나무에 숨어있던
정령들의 빛나는 치장의 소리.
모든 죽은 것들은 바람 끝에 매달려
살아오는 숲 속의 변화.
붉게 앓는 꽃이 그의 순수한 가슴을 열 때
꽃씨를 심는 나의 유년은 살아나고
그 아득한 시간에 빠져, 나는
밝은 불면을, 불면을 갖는다.
좀 더 맑게 들려오는
묻힌 나를 캐내는 소리.
몇 줄기 이슬이 되어 숲 속에
소리가 내리고
소리를 먹다가 먹다가 끝내
정령들은 그들 생전의 착한 모습으로
나무며 풀 혹은 가까운 바위
아무데서나 피어난다.
꽃은 가슴에서 뛰쳐나와
나의 유년도 함께 피어난다.
밤이면 그들의 가슴에 창을 만드는
저 거리의 사람들.
떠나간 연인의 젖은 눈매를
오래도록 기억하고
가계부의 적자를 도무지 무시하며
살아온 사람들.
나무 사이를 날아다니다가 나의 유년은
거리로 몰려와
잠든 사람들이 그들 가슴의 창을 열 때
비로소 빨간 꿈이 된다.
그들 슬픈 사랑이 뒤척이다가
꿈 속에서 잠이 드는.
(후략)
- 시집 『그대 언 살이 터져 시가 빛날 때』, 실천문학사,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