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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해진다는 것/ 홍수희
행복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게 되겠지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이 행복인 줄
알게 될 테니
연필을 쥔 손가락의
굳은살처럼
아픔에도 무뎌지고
연민에도 무뎌질 테니
감사는
늘 당연함이 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고
무심할 테니
뒤늦게야 돌아보며
쓸쓸하겠지
두려워라,
익숙해진다는 것!
익숙함의 그늘에서 발견하는 존재의 소중함
― 홍수희의 「익숙해진다는 것」에 나타난 일상의 망각과 상실의 미학
1. 서론 ― 우리는 왜 행복을 잃고 나서야 행복이라 부르는가
인간은 행복을 갈망하면서도 정작 행복한 순간에는 그것을 행복이라 인식하지 못하는 역설적인 존재다. 곁에 있는 사람의 소중함을 잊고, 매일 반복되는 일상의 평온을 당연하게 여기며, 자신에게 주어진 삶의 작은 축복들을 무심히 지나친다. 그러다가 어느 날 익숙했던 것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비로소 그것들이 얼마나 귀한 것이었는지를 깨닫는다.
홍수희의 「익숙해진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 존재의 근원적인 아이러니를 섬세하게 포착한 작품이다.
이 시는 특별한 사건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극적인 이별도, 구체적인 상실의 장면도 등장하지 않는다. 다만 누구나 경험하는 '익숙함'이라는 일상적 감각을 통해 인간이 어떻게 행복에 무뎌지고, 감사하는 마음을 잃으며, 마침내 상실의 자리에서 뒤늦은 깨달음에 이르는지를 보여준다.
특히 이 작품에서 주목할 것은 시인이 익숙함을 단순한 편안함이나 안정감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익숙함이 인간의 감각을 둔화시키고, 삶의 소중한 가치들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위험한 상태일 수 있음을 경고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작품을 단순한 생활시의 차원에서 벗어나게 한다. 이 시는 일상 속에서 반복되는 망각의 구조를 드러내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자체를 성찰하도록 이끄는 존재론적 서정시라 할 수 있다.
2. 행복의 역설 ― 존재할 때 보이지 않는 것
시의 첫머리는 간결하지만 강한 울림을 지닌다.
행복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게 되겠지
사라지고 나서야
그것이 행복인 줄
알게 될 테니
이 여섯 행은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핵심적인 인식을 제시한다.
행복은 인간이 가장 간절히 추구하는 가치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시인은 행복의 실체를 설명하거나 행복해지는 방법을 제시하지 않는다. 대신 행복을 행복이라 부르지 못하는 인간의 인식적 한계에 주목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행복을 느끼지 못한다'가 아니라 '행복이라 부르지 않게 된다'는 표현이다.
'부른다'는 행위는 어떤 대상에 이름을 부여하고 그 존재를 의식적으로 인정하는 행위다. 따라서 행복을 행복이라 부르지 않는다는 것은 행복이 실제로 사라졌다는 의미가 아니다. 행복은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것을 알아보는 감각이 무뎌졌다는 뜻이다.
이것은 인간의 인식에 관한 깊은 통찰이다.
우리는 낯선 것에는 쉽게 감탄하지만, 익숙한 것에는 좀처럼 감동하지 않는다. 처음에는 감사했던 일이 반복되면 당연한 일이 되고, 처음에는 기적처럼 느껴졌던 만남도 시간이 흐르면 일상의 일부가 된다.
그런데 시인은 이러한 인식의 둔화를 '사라지고 나서야'라는 표현으로 전환한다.
이 짧은 구절에는 시간의 비극성이 담겨 있다.
행복이 존재하는 시간과 행복을 깨닫는 시간이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다.
행복할 때는 행복을 모르고, 행복을 알게 되었을 때는 이미 그 행복이 사라져 있다.
이처럼 홍수희의 시에서 행복은 현재에 존재하지만, 그 의미는 상실 이후의 시간에 비로소 완성되는 역설적인 가치다.
이러한 시간적 불일치는 인간이 경험하는 후회와 그리움의 근본적인 구조이기도 하다.
3. 굳은살의 은유 ― 고통을 견디는 힘과 감각의 상실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시적 이미지는 '굳은살'이다.
연필을 쥔 손가락의
굳은살처럼
아픔에도 무뎌지고
연민에도 무뎌질 테니
굳은살은 반복적인 마찰과 압력에 의해 피부가 두꺼워지는 현상이다. 그것은 신체가 외부의 자극에 적응하면서 만들어 내는 일종의 보호 장치다.
시인은 이처럼 구체적이고 일상적인 신체의 변화를 인간의 정서적 둔화에 비유한다.
특히 '연필을 쥔 손가락'이라는 표현은 매우 적절하다.
연필을 오래 쥐고 글씨를 쓰는 행위는 반복되는 일상적 노동이다. 처음에는 손가락이 아프지만, 시간이 흐르면 굳은살이 생기고 통증을 덜 느끼게 된다.
이러한 변화는 인간이 환경에 적응하는 자연스러운 과정이다.
그러나 시인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육체의 굳은살이 통증을 줄여 주듯, 마음에도 굳은살이 생긴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그것은 상처를 견디게 하는 힘이 될 수 있지만, 동시에 타인의 고통에 공감하는 능력을 약화시킬 수도 있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굳은살의 은유는 단순한 감각적 비유를 넘어 윤리적 의미를 획득한다.
'아픔에도 무뎌지고 / 연민에도 무뎌질 테니'라는 두 행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된다.
아픔에 무뎌진다는 것은 자신의 고통을 견디는 능력과 관련되지만, 연민에 무뎌진다는 것은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의 상실과 관련된다.
이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자신의 아픔을 견디는 능력은 삶을 지속하는 데 필요한 힘일 수 있다. 그러나 타인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상태는 인간관계의 윤리적 기반을 흔들 수 있다.
시인은 이 두 현상을 나란히 배치함으로써 익숙함의 양면성을 드러낸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살아가는 데 필요한 적응의 과정이지만, 그 적응이 지나치면 인간다운 감수성까지 마모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굳은살은 이 작품의 중심 은유이자, 시 전체의 사상적 깊이를 형성하는 핵심적인 시어라 할 수 있다.
4. 감사가 당연함으로 변하는 순간 ― 일상의 윤리학
시의 중반부에서 화자의 성찰은 더욱 깊어진다.
감사는
늘 당연함이 되고
내일도
오늘과 같을 거라고
무심할 테니
이 부분은 인간의 일상적 태도를 가장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대목이다.
감사는 어떤 존재나 사건이 자신에게 주어진 선물임을 인식하는 마음이다. 반면 당연함은 그것이 원래부터 자신에게 주어져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태도다.
따라서 감사가 당연함으로 변한다는 것은 단순한 감정의 변화가 아니다.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처음에는 고마웠던 사람의 배려가 반복되면 의무처럼 느껴지고, 함께하는 시간이 길어지면 그 존재가 언제까지나 곁에 있을 것이라고 믿게 된다.
그러나 세상에는 영원히 보장된 것이 없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만남도, 건강한 육체도, 평온한 일상도 언젠가는 변화하거나 사라질 수 있다.
그럼에도 인간은 오늘의 상태가 내일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쉽게 믿는다.
여기서 '내일도 / 오늘과 같을 거라고'라는 구절은 인간이 지닌 지속성에 대한 막연한 믿음을 드러낸다.
이 믿음은 삶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데 필요한 심리적 기반이지만, 동시에 현재의 소중함을 망각하게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특히 '무심할 테니'라는 표현에는 조용한 자기반성이 담겨 있다.
화자는 누군가의 무심함을 비난하지 않는다. 자신 역시 그러한 무심함에서 자유롭지 못할 것임을 인정한다.
이러한 태도는 작품의 윤리적 설득력을 높인다.
시인은 독자에게 감사하며 살라고 직접 명령하지 않는다. 다만 감사가 사라지는 과정을 보여줌으로써 독자가 스스로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한다.
이 작품의 미덕은 교훈을 앞세우지 않으면서도 일상의 윤리적 가치를 환기한다는 데 있다.
5. 미래형의 고백 ― 아직 오지 않은 후회를 미리 살아내다
이 작품에서 특별히 주목해야 할 것은 시제의 사용이다.
시인은 대부분의 진술을 미래의 가능성으로 표현한다.
'않게 되겠지', '알게 될 테니', '무뎌질 테니', '무심할 테니', '쓸쓸하겠지'가 그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은 이미 일어난 사건을 회상하는 과거형도 아니고, 현재의 상태를 단정하는 현재형도 아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를 예감하는 말들이다.
이 점에서 「익숙해진다는 것」은 일반적인 상실의 시와 구별된다.
많은 상실의 시가 이미 떠나간 사람이나 사라진 시간을 회상하면서 그리움을 노래한다면, 이 작품은 아직 상실이 발생하지 않은 자리에서 상실 이후의 감정을 미리 상상한다.
화자는 지금 곁에 있는 행복이 언젠가는 사라질 수 있음을 알고 있다. 그리고 그때 자신이 얼마나 후회하고 쓸쓸해할 것인지까지 예감한다.
이는 일종의 선취된 상실감이다.
아직 잃지 않았지만 이미 잃은 사람처럼 자신의 현재를 바라보는 것이다.
이러한 시적 태도는 작품에 독특한 시간적 깊이를 부여한다.
현재의 행복과 미래의 상실이 하나의 의식 안에서 동시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시간은 단순히 현재에서 미래로 흐르는 직선적인 시간이 아니다.
미래의 후회가 현재로 되돌아와 지금의 삶을 성찰하게 만드는 순환적인 시간 구조를 형성한다.
이러한 구조는 독자에게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언젠가 잃고 나서 후회할 것이라면, 왜 지금 그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는가.
이 질문은 작품 전체에 직접적으로 등장하지 않지만, 모든 행의 이면에서 조용히 울리고 있다.
6. 쓸쓸함의 정서와 마지막 감탄의 미학
시의 마지막 부분은 짧지만 강렬하다.
뒤늦게야 돌아보며
쓸쓸하겠지
두려워라,
익숙해진다는 것!
여기서 '뒤늦게야'라는 표현은 작품의 시간적 비극성을 다시 한번 강조한다.
인간은 흔히 모든 것이 지나간 뒤에야 그 의미를 깨닫는다.
그러나 뒤늦은 깨달음은 이미 사라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더욱 아프다.
'쓸쓸하겠지'라는 구절은 그러한 상실의 정서를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다.
시인은 절망이나 비탄과 같은 강한 감정어를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쓸쓸하다'는 일상적인 정서의 언어를 선택한다.
쓸쓸함은 격렬한 슬픔과 다르다.
그것은 무엇인가가 사라진 자리에 남는 조용한 공허이며, 한때 충만했던 시간이 더 이상 현재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을 때 찾아오는 감정이다.
이러한 절제는 작품의 서정성을 더욱 깊게 만든다.
그런데 마지막 두 행에서 시의 어조가 갑자기 변화한다.
'두려워라'라는 감탄은 앞선 연들의 조용한 예감과 달리 강한 정서적 반응을 드러낸다.
이 감탄은 단순히 익숙함이 싫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신이 소중한 것을 소중하게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다.
더 나아가 사랑하는 사람의 고통에도 무뎌지고,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당연하게 여기며, 결국 모든 것을 잃은 뒤에야 후회하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두려움이다.
따라서 마지막의 '익숙해진다는 것!'은 단순한 생활의 습관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것은 인간이 자신의 삶을 무감각하게 통과해 버릴 수 있다는 존재론적 위험을 의미한다.
특히 제목과 마지막 행이 동일한 표현으로 연결되는 구조는 작품에 원형적인 완결성을 부여한다.
독자는 처음에 제목을 읽을 때 익숙함을 편안함이나 친숙함의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러나 시를 끝까지 읽고 다시 제목으로 돌아오면 그 의미는 완전히 달라진다.
처음에는 평범했던 말이 마지막에는 두려움의 대상으로 변화하는 것이다.
이러한 의미의 전환은 짧은 시 안에서 이루어진 중요한 미학적 성취다.
7. 절제된 언어와 여백의 시학
「익숙해진다는 것」의 형식적 특징은 짧은 행과 간결한 문장, 그리고 반복되는 종결 표현에 있다.
시인은 화려한 수사나 복잡한 상징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일상적인 언어로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을 포착한다.
특히 '행복을 / 행복이라 부르지 / 않게 되겠지'라는 첫 부분의 행갈이는 의미의 전달 속도를 늦추는 효과를 지닌다.
독자는 '행복을'이라는 단어 앞에서 잠시 멈추고, 이어지는 '행복이라 부르지'라는 표현을 거쳐, 마지막 '않게 되겠지'에 이르러서야 문장의 의미를 완성한다.
이러한 행갈이는 행복의 존재와 그 인식 사이에 발생하는 간극을 형식적으로도 환기한다.
또한 '감사는 / 늘 당연함이 되고'라는 부분에서는 '감사'라는 단어를 독립된 행에 배치함으로써 그 의미를 강조한다.
감사가 당연함으로 변화하는 과정은 두 행 사이의 짧은 침묵 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이처럼 이 작품의 행갈이는 단순한 외형적 배열이 아니라 독자의 호흡과 인식의 속도를 조절하는 장치로 기능한다.
다만 작품의 언어가 지나치게 평이하다는 점은 비평적으로 검토할 여지가 있다.
'행복은 사라진 뒤에야 알게 된다'거나 '감사가 당연함이 된다'는 인식 자체는 일상적인 교훈이나 잠언에서도 자주 발견되는 내용이다.
따라서 이 작품의 문학적 성취는 새로운 사상을 발견했다는 데 있기보다, 익숙한 진실을 얼마나 생생한 시적 감각으로 되살렸는가에 달려 있다.
그런 점에서 '연필을 쥔 손가락의 굳은살'은 작품의 중심을 지탱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만약 이 비유가 없었다면 시는 삶에 관한 교훈적 진술에 가까워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굳은살이라는 구체적인 신체 이미지가 등장함으로써 추상적인 무감각은 손끝에서 느낄 수 있는 감각적 현실로 변화한다.
이는 시가 관념을 이미지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획득하는 문학적 힘을 보여준다.
8. 익숙함의 역설 ― 삶을 지탱하는 힘이 삶을 무디게 할 때
이 작품을 더욱 깊이 이해하기 위해서는 익숙함이 지닌 양면성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익숙함은 반드시 부정적인 것만은 아니다.
인간은 익숙함을 통해 삶의 안정감을 얻고,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관계를 지속하며, 고통에 적응하는 능력을 기른다.
사랑하는 사람과 오래 함께할 수 있는 것도, 어려운 시간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익숙함 덕분이다.
따라서 익숙함은 삶을 지탱하는 중요한 조건이다.
그런데 홍수희의 시는 그 익숙함이 어느 순간 삶을 무디게 만드는 위험한 힘으로 변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것이 작품의 핵심적인 역설이다.
삶을 편안하게 만드는 것이 동시에 삶의 소중함을 잊게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사랑의 관계에서 이러한 역설은 더욱 뚜렷하게 나타난다.
처음에는 상대방의 작은 배려에도 감동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그 배려를 당연하게 받아들이기 쉽다.
매일 듣는 목소리, 함께하는 식사, 평범한 안부 인사는 너무 익숙하기 때문에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다.
그러나 그러한 일상이 사라지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그것들이 삶의 가장 깊은 행복이었음을 깨닫는다.
시인은 이러한 인간의 보편적인 경험을 특정한 인물이나 사건에 한정하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독자는 자신의 삶에서 사라졌거나 언젠가 사라질 수 있는 존재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리게 된다.
이 작품의 감동은 바로 이러한 독자의 자기 투사에서 발생한다.
시가 구체적인 상실의 대상을 제시하지 않기 때문에, 독자는 그 빈자리에 자신의 기억과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러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여백은 작품이 지닌 중요한 서정적 장점이다.
9. 결론 ― 행복을 잃기 전에 행복이라 부르는 일
홍수희의 「익숙해진다는 것」은 인간이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감각의 둔화와 뒤늦은 깨달음을 간결한 언어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는 특별한 사건이나 극적인 서사를 통해 감동을 만들어 내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도 평범해서 쉽게 지나치는 삶의 진실을 조용히 들려준다.
행복은 언제나 특별한 모습으로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아침에 눈을 뜨는 일이며, 누군가와 밥을 먹는 일이고, 사랑하는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 일이다.
그러나 인간은 그러한 일상이 반복될수록 그 소중함을 잊어버린다.
시인은 이 망각의 과정을 '굳은살'이라는 구체적인 은유로 보여주고, '감사가 당연함이 되는' 일상의 변화를 통해 그 윤리적 의미를 확장한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르러 익숙함 자체를 두려움의 대상으로 전환한다.
이러한 전환은 작품의 핵심적인 미학적 성취다.
독자가 익숙함을 더 이상 단순한 편안함으로만 받아들이지 않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이 작품은 상실 이후의 후회를 이야기하면서도 실제로는 현재의 삶을 향하고 있다.
시인이 두려워하는 것은 언젠가 찾아올 상실 그 자체만이 아니다.
그 상실이 찾아오기 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행복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익숙해진다는 것」은 상실의 시이면서 동시에 현재를 회복하려는 시다.
미래의 후회를 미리 상상함으로써 오늘의 소중함을 깨닫게 하는 작품인 것이다.
시인은 행복을 어떻게 얻을 것인가를 묻지 않는다.
대신 이미 우리 곁에 있는 행복을 어떻게 알아볼 것인가를 묻는다.
그리고 그 질문은 독자에게 조용하지만 깊은 울림으로 남는다.
행복의 반대편에는 반드시 불행만이 있는 것이 아니다. 때로는 행복을 행복이라 알아보지 못하는 무감각이야말로 행복을 가장 깊이 훼손하는 힘일 수 있다.
홍수희의 「익숙해진다는 것」은 이러한 인간의 역설을 절제된 언어와 섬세한 감각으로 포착한 작품이다.
결국 이 시가 우리에게 일깨우는 것은 거창한 삶의 철학이 아니다.
오늘 곁에 있는 사람을 다시 바라보는 일, 당연하게 여겼던 일상에 감사하는 일, 그리고 아직 사라지지 않은 행복을 지금 행복이라 부르는 일이다.
그 작은 깨달음이야말로 익숙함의 무감각을 넘어 삶의 본래적인 빛을 회복하는 첫걸음일 것이다.
종합 문학평가
홍수희의 「익숙해진다는 것」은 일상적 경험을 바탕으로 인간의 인식적 한계와 정서적 무감각을 성찰한 서정시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간결한 언어 속에 보편적인 삶의 진실을 담아냈다는 데 있다. 특히 '연필을 쥔 손가락의 굳은살'이라는 은유는 육체적 적응과 정신적 무감각을 연결하면서 작품의 관념적 주제를 구체적인 감각으로 전환한다.
또한 미래형의 반복을 통해 아직 일어나지 않은 상실을 미리 예감하게 하는 시간적 구조는 작품에 독특한 서정적 긴장을 부여한다.
반면 행복과 감사, 무감각에 관한 진술은 비교적 익숙한 인식에 기초하고 있어 시적 발견의 새로움이라는 측면에서는 다소 제한적이다. 그러나 이러한 평이함은 독자의 삶에 직접 다가가는 소통의 힘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결국 이 작품은 언어의 화려함보다 정서의 진정성, 상징의 복잡함보다 삶에 대한 통찰을 통해 문학적 의미를 획득한다.
평론의 핵심 명제:홍수희의 「익숙해진다는 것」은 행복의 상실보다 행복을 인식하는 능력의 상실을 더욱 두려워하는 시이며, 미래의 후회를 현재로 불러들임으로써 일상의 소중함을 다시 발견하게 하는 성찰적 서정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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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선생님, 감사합니다. 모셔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