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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조주가 선물한 세상 원문보기 글쓴이: 박종태목사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출 4:10-17
성경본문 : 출애굽기 4:10-17
10. 모세가 여호와께 아뢰되 오 주여 나는 본래 말을 잘 하지 못하는 자니이다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령하신 후에도 역시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11. 여호와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누가 사람의 입을 지었느냐 누가 말 못 하는 자나 못 듣는 자나 눈 밝은 자나 맹인이 되게 하였느냐 나 여호와가 아니냐
12. 이제 가라 내가 네 입과 함께 있어서 할 말을 가르치리라
13. 모세가 이르되 오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14.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하여 이르시되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 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 그가 너를 만나러 나오나니 그가 너를 볼 때에 그의 마음에 기쁨이 있을 것이라
15. 너는 그에게 말하고 그의 입에 할 말을 주라 내가 네 입과 그의 입에 함께 있어서 너희들이 행할 일을 가르치리라
16.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 너는 그에게 하나님 같이 되리라
17.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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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지태일목사
내일 8월 15일은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주권을 다시 찾은 지 60년이 되는 날입니다. 1945년 8. 15일은 아마도 지금처럼 뜨거운 뙤악볕이 내리쬐는 8월이었을 것입니다. 감히 끝날 것이라 생각도 못했던 일제 36년, 일본의 패망을 뒤로 하고 울려 퍼진 대한 독립만세의 기쁨은 우렁차고 힘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쁨이 얼마나 오래 갔습니까?
일본이 패망한 뒤 남한에는 미군이, 북한에는 소련군이 진주함으로 남북이 갈리우고 민족 갈등을 부채질 했습니다. 결국 북한의 남침이 1950.6.25, 그것도 주일날 새벽 5시에 시작되어 민족의 큰 전쟁을 치르고 38선이 그어지고 지금까지도 마지막 지구촌의 유일한 분단국가로 남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30여년에 걸친 군사독재의 어두운 시대를 살아가다가 민주화의 길을 걸었지만 험난한 길이었고 온갖 부정과 부패의 정국이었음을 지금 보여줍니다. 지금은 이념적 갈등은 날로 심해 사회 구석구석이 몸살을 앓고 위기국면으로 치닫고 있습니다.
무엇 하나 정리되지 못한채로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기에 부족하여 갈등을 유발하고 때로는 한 민족이 서로 증오와 분노로 국론이 흔들리는 국가의 정체성마저 흔들리기도 하는 그런 상황속에 해방 60년을 맞이하였습니다.
해방 60주년 이 날을 맞이하면서 광복절은 ‘얽매이는 것’에서 완전히 풀려나와 ‘자유’를 선언하는 날로 우리나라 이 민족이 일제에서 하나님의 은혜로 해방의 기쁨을 맞이하듯이 이제는 ‘증오와 분열, 구속’의 어둠에서 ‘사랑과 화합과 해방’의 밝음으로 변화돼야 할줄 믿습니다.
일제에 국권을 강탈당한 한국이 광복을 맞은지 60년이 지나지만 일본은 아직도 독도를 자기 땅이라 주장하고, 중국도 고구려사를 왜곡하는 등 명백한 침략행위를 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북한의 핵문제, 먹고사는 경제의 문제, 참으로 힘든 상황의 분단국가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상황속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이 세우신 모세를 중심으로 출애굽의 유월절을 경험하듯이, 우리 민족이, 모든 성도들이 다시 한번 유월절과 같은 민족의 참다운 해방이 있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얽매는 죄악으로부터, 우상으로부터, 빈곤이나 억압에서 자유케 되는 역사와 큰 기쁨이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러한 일들을 위해서 중요한 것은 사람입니다. 하나님께 붙잡힌바 되어 순종하는 사람, 모세같은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지도자가 요구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모세를 부르셔서 일을 시작하시려 할 때 모세는 자꾸 “나는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변명이나 핑계를 몇 번이나 한지 성경 출애굽기 3,4장을 보면 5번씩이나 계속적으로 못한다고 핑계하고 있습니다.
출3:11절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누구관대 바로에게 가며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리이까” 못갈 사람임을 자처합니다.
3:13절에서는 “모세가 하나님께 고하되 내가 이스라엘 자손에게 가서 이르기를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 나를 너희에게 보내셨다 하면 그들이 내게 묻기를 그의 이름이 무엇이냐 하리니 내가 무엇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리이까” 할 말이 뚜렷하지 못하니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4:1절에서는 “모세가 대답하여 가로되 그러나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며 내 말을 듣지 아니하고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네게 나타나지 아니하셨다 하리이다”
4:10절에서는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 하고 싶은 말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는 능변가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말이 느리니, 언변이 없으니 가지 못하겠다고 핑계를 댑니다. 그리고 나서는
4:13절에서는 “모세가 가로되 주여 보낼 만한 자를 보내소서” 어이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불러서 친히 함께 하시겠다는 약속과 함께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들을 체험케 하시면서까지 확신을 주고 가라는데도 모세는 인간적인 결점들을 자꾸 내세우며 못가겠다는 것입니다. 모세는 계속해서 다섯 번이나 “나는 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나는 능력이 없습니다. 나에게는 불가능합니다. 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자신에 대해서 부정적인 모습을 말합니다.
그때 4:14절에 보면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하나님은 진노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내가 죄를 지을 때만 진노하고 내가 악한 짓 할 때만 진노하는 줄 알지만, 그보다 또 한 가지 무서운 진노가 있는데 하나님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라고 자구 말씀하시는데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가능성에 대하여 부정하면서 “나는 못합니다.” 하고 핑계대고 변명할 때 하나님이 크게 진노하시면서 그에게 가혹한 책망을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1. 모세(신자)의 죄는 부르심을 거절하는 죄입니다.(10-14절)
신자가 짓는 최고의 죄악중 하나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부르심을 거절하는 것입니다. 자기 맘대로, 뜻대로, 생각대로 사는 것입니다. 이것은 신자들만 짓는 죄입니다. 모든 성도들은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필요하니까 불러서 구원얻게 하시고, 일을 맡기신 것입니다. 일을 맡기셨다는 것도 자체가 축복입니다. 바울은 그래서 이렇게 고백했습니다.
딤전1:12-15절을 보면,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이 고백들은 감동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게 직분을 맡겨주신 것, 나를 충성되이 여겨주셨기 때문입니다. 나는 심판 받아 마땅한 사람이나, 도리어 나를 긍휼히 여겨주셨습니다. 너무 풍성한 은혜를 주셔서 나 같은 사람도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받게 해주셨습니다. 죄인 중에 괴수인 나를 이제는 하나님의 일군으로 만드셨습니다.
이 얼마나 감격적인 고백입니까? 이런 감격이 있어야 하나님의 부르심의 길을 가는 것입니다. 감사함으로 사역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은 30에 팔고 배신한 가룟 유다나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의 겉을 떠나 화려한 데살로니가로 갔던 데마나, 팥죽 한그릇에 장자의 명분을 팔아 먹은 에서나, 이스라엘의 초대왕으로 부름받고 잘 나가다가 나중에 교만하여 제 길로 가다가 불레셋과의 전투에서 자살한 사울왕같은 사람들은 다 부르심을 거절한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길을 거부하고 자신의 길을 간 사람입니다. 이들 중에 행복한 사람 있나 보십시오. 다들 비극적인 인생을 살았습니다. 부르심을 거절하고 자기 맘대로 살면 행복할 것 같지만, 가장 비참한 인생이 되었습니다.
가룟 유다는 죄책감 때문에 목메어 자살했고, 창자가 터져 나와 죽었습니다. 데마 이야기는 그 이후에 아예 나오지도 않습니다.
에서같은 경우는 히12:16-17절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혹 한 그릇 식물을 위하여 장자의 명분을 판 에서와 같이 망령된 자가 있을까 두려워하라/ 너희의 아는 바와 같이 저가 그 후에 축복을 기업으로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구하되 버린 바가 되어 회개할 기회를 얻지 못하였느니라"
배 좀 불러보려고 그 순간을 참지 못하고 팥죽 한 그릇에 장자의 특권을 팔아버렸습니다. 장자로의 부르심을 거절했습니다. 배도 고팠겠지만 장자가 된다는 것이 별의미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 순간 배고픔은 해결되었는지 모르지만 영원히 하나님의 축복을 잃어버렸습니다. 히브리 기자가 말합니다. 나중에 그 축복을 받으려고 눈물을 흘리며 애원했지만 받지 못했다고 기록합니다. 에서는 결코 행복한 삶을 살지 못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거절한 사람이 어떻게 행복하게 살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 혹시 조금 더 벌어보려다가 신앙을 팔아먹지 않습니까? 조금 더 배부르게 살아보려고 하다가 신앙을, 물질을 까먹는 분 없습니까? 조금 편하게 살아보려고, 자존심을 조금 더 내세우다가 신앙을 팔아먹는 분 없습니까? 수고의 짐, 부담감, 십자가 덜어보려고 하다가 더 큰 환란이나 우고를 만난 분은 없습니까? 그런 인생은 행복하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하면서 부담이나 짐도 조금은 갖는 것이 좋습니다. 너무 지나치면 무거워 좋지 않지만 감당할 만큼의 부담은 약이 됩니다. 은혜요 축복이 됩니다.
편하게만 신앙생활 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의 기적을 맛보지 못합니다. 능력은 수고하고, 희생할 때 나오는 것이지 편한 것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좀 편해보려고 하다가 얼마나 많은 것들을 잃어버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고진감래 아님니까?
사람들이 개척교회나 상가교회는 잘 안 오려고 한답니다. 가면 땅도 사야하고, 건축도 해야 하고, 작정헌금해야 하고, 건축헌금도 할 것 같으니까 부담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 지어 놓은 큰 교회들만 찾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교회들도 건축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온다고 빚을 내어 무리하게 건축들을 합니다. 실제로 저도 많이 봅니다만 좀 무리를 해서라도 교회건축만 하면 사람들이 몰려옵니다.
그런데 그런 내용은 둘째치고 교회건축하는 데, 주의 복음을 위하여 전심으로 헌신했던 사람들이 하나님의 축복을 안받은 사람 있습니까? 저를 신학대학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하고 학비를 대주시던 이모부 이헌무장로님이 계셨었습니다. 오래 전에 돌아가셨습니다만, 당시에 목장을 하시면서, 여러 가지 사업을 하시면서 첫째는 주일성수, 둘째는 수요일도 지방에 수금하러갔다가도 기다리면 돈도 수금해가지고 올 수 잇지만 수요일이 되면 다음에 받는 한이 있어도, 떼는 한이 있어도 올라와 수요예배 드리고 다시 내려가 수금하고 일보심니다. 당시에 자가용은 탈 능력도 충분하지만 연세가 많아서도 불편하게 시외버스 몇 번씩 갈아타고 일보러 다님니다. 아주 급해야 택시탈 정도고, 점심은 빵, 우유, 짜장면으로 대신하면서도 교회들이 건축한다 하면 건축헌금 안보낸 교회가 없을 정도로 도와주고, 신학교 세운다하면 큰 헌금하고 교회와 교단들 목회자들을 위해 엄청난 일을 많이 하셨습니다. 자식들을 위한 돈보다 교회와 주의 종들을 위해 쓴 돈이 더 많았을 것입니다.
오랜 세월이 흐른 지금 어떻습니까? 그 영향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런 장로님 또 안나오시나? 그리워하기도 합니다. 그 후손들도 잘되었습니다. 큰 아들은 대구에서 큰 교회 목회하고 그 아들도 아버지를 이어 신학교 교수하고, 둘째 아들은 의사 장로님으로 이번에도 캄보디아 의료선교 갔다왔습니다. 미얀마, 캄보디아 수년 동안 1년중 자기가 쉬고 쓸 휴가를 바쳐가며, 내 돈으로 약을 사서, 무더위에 고생하며... 그 아들도 의사, 레지던트과정 밟고, 셋째 아들은 고등학교 교사 장로님이고, 넷째 아들은 카나다 이민가 살고, 다섯째 아들은 의료기 사업하고, 큰 따님은 미국 뉴저지에 살고 그 사위도 장로님이고, 둘째딸은 목사님 사모님으로 다양하게 주의 일을 하고 있습니다.
다 열거하기 어렵습니다만 열심히 신앙생활할 때 현세와 내세의 복이 있습니다. 자녀손들도 복을 받습니다.
평소에 열심히 믿고 주의 일을 감당한 사람들이나 그 후손들이 하나님의 은혜 복을 못받았습니까? 아님니다. 대충 믿고, 편하게 믿는 사람들 말고, 진정으로 괴로우나 즐거우나 비가 오나 눈이오나 헌신했던 사람들 한번 보십시오. 건강의 복을 주시든, 자녀의 복을 주시든, 사업의 복을 주시든, 물질의 복을 주시든, 뭔가 하나님의 축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믿음 있는 사람들은 일부러 이런 기회를 만들어서라도, 이런 교회를 찾아 가서라도 헌신하려고 합니다. 왜냐하면 거기에 숨겨진 하나님의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힘들어도 부르심의 길을 가십시오.
찬양집 405장 ♬ 이 길은 영광의 길, 이 길은 승리의 길, 나를 구원하신 주님이 십자가 지고 가신 길.....
이 길은 고난의 길, 이 길은 생명의 길......
고난의 길이지만 그 길이 행복의 길이요, 그 길이 축복의 길입니다. 편하게 신앙생활 하는 것은 내 영혼을 죽이는 것입니다. 사망의 길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은 못가겠다는 모세에게 진노를 발하시면서도 모세를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다시 묻습니다.
4:2절에 모세야! “네 손에 든 것이 무엇이냐” 네게 있는 것이 뭐냐, 네 마음속에 있는 것이 뭐냐? “네. 지팡이니이다.” 모세는 자기가 가지고 있는 지팡이가 있음을 그대로 고백합니다. 모세의 이 지팡이가 어떤 지팡이입니까?
생각해 보면 모든 것을 잃어 버리고 이제 그 손에 남은 것은 지팡이뿐입니다. 젊음도, 박력도, 애국심도, 애굽에서 닦은 지성과 무예도 다 상실한 80세의 할아버지입니다. 이제는 나이가 들어 내 인생은 끝장이구나! 이런 생각을 할 때입니다. 한 때는 바로의 궁궐속에는 공주의 아들로서, 애굽의 2인자가 될 수 있는 그런 위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나를 우러러봤는데 이제 미디안 광야에 내 눈에 비취는 것은 양떼와 가시밭길 밖에 없습니다. 모든 것을 다 잃었습니다. 이 지팡이 하나 때문에 양떼도 치고 이 지팡이 때문에 자기 장인 집에서 밥을 얻어먹고 살 수 있었습니다. 지팡이로 양떼를 인도하고, 때로는 자신이 피곤할 때는 지팡이를 의지하고 편히 길을 걷게 하는 도구, 유사시에는 무서운 어떤 짐승이 침입하면 그것으로 짐승들을 막는 무기로서 그의 생애에 유일하게 남은 것이 지팡이였습니다. 자기 자신에 대해서 아무 것도 나에게는 없다는 그런 좌절감으로 하루하루를 그저 양이나 치면서 살아가는 그런 모세입니다. 그런 모세를 하나님이 모르시겠습니까? 뻔히 다 아시면서도 그래도 물은 것입니다. “네 손에 있는 것이 뭐냐” 지팡이니이다.
뭔가 좀 있을 때에, 뭔가 할 수 있을 때에, 젊을 때에 부르시지 왜! 이런 때에 부르셨는지? 모세는 이해가 안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 핑계 저핑게 대고 계속 거절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계획이 있습니다. 뜻이 있어 묻습니다. “그 지팡이를 던져라” 모세가 지팡이를 땅에 던졌더니 뱀이 됩니다. 그 뱀이 모세에게 달려들 때 모세는 두려워 피합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모세야 이 뱀의 꼬리를 잡아라” 꼬리를 딱 잡을 때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생각해보면 지금 모세는 위대한 사람이 된 것입니다. 지팡이를 던질 때 뱀이 되는 능력을 행합니다. 무서운 독사의 꼬리를 잡을 때 다시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모세는 놀라운 표적을 보았습니다. 독사를 손에 쥐는 위대한 능력을 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무슨 큰 능력이나 큰 어떤 표적을 그에게 준 것이 아니고, 그가 가지고 있는 그 지팡이를 통하여 표적으로 나타내셨습니다. 훗날에 그 지팡이 끝을 나일강에 댈 때 강물이 피로 변합니다. 홍해를 향하여 내밀 때 갈라지는 기적이 일어납니다. 반석에서 물이 나와 마시게 하는 기적의 지팡이가 되었습니다.
오늘 이시간이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의 생애와 삶들속에서도 어떤 모양으로든지 하나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귀한 시간될 줄 믿습니다. 여러분의 생애에 지금 남은 것이 무엇입니까? 이제 가진 것이 뭐가 남아 있습니까?
이제 없는 것을 얘기할 필요가 없습니다. 과거의 있었던 것, 가졌던 것, 다 소용없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주신 것 개발하면 됩니다. 작아도 부족해도 지금 있는 것, 가진 것, 순종하여 사용하며 개발하는 것입니다.
부부지간에 살면서도 없는 것을 얘기하면서 불평스럽게, 짜증스럽게 사는 부부가 많이 있습니다. 있는 것으로 감사하시기 바람니다. 자기 자녀를 보면서 다른 아이에게 없는 것을 보면서 아들을 주눅들게 만들고 윽박지르는 어머니들이 많습니다. 그 아이에게 하나님이 주신 것을 보면서 이 아이의 미래의 가능성을 크게 봐야 합니다.
예화)
전에 한번 말씀을 드린 유명한 상대성 원리를 발견한 천재 박사 아인슈타인이 학교를 다닐 때 열등생이었나 봅니다. 그의 학생기록부에는 "이 아이는 무엇을 해도 성공할 가능성이 없음."이라고 쓰여 있었다고 합니다. 아마 우리네 부모님들 같으면 얼마나 절망했겠습니까?
그러나 아인슈타인의 부모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 아이에게 "네가 남과 같으려고 하면 같을 수가 없단다. 너는 남과 다르단다. 남과 같은 일을 하려고 하면 남보다 나을 수 없지만 남과 다른 일을 하려고 하면 남보다 훌륭할 수 있단다. 나는 너를 믿는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과연 어머니의 말은 아인슈타인에게 용기를 주었고, 축복이 되어 아인슈타인은 모든 사람들에게 금세기 최고의 훌륭한 과학자로 기억되게 했습니다. 아인슈타인의 어머니는 참으로 훌륭한 부모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살한 청소년들 대부분이 저주의 말을 듣고 자랐다고 합니다. "너 같은 건 필요 없어. 꼴보기도 싫어. 너 같은 아이는 낳지 말았어야 하는데. 넌 누구를 닮아서 그렇게 공부를 지질이도 못하니? 넌 이제 소망이 없다" 미래의 소망이 없다고 생각할 때 비극이 찾아 오는 것입니다.
교인들이 목회자를 보면서도 목회자에게 어떤 약점만 보면서 불평하는 교인이 있는가 하면 , 목회자의 가능성을 보면서 기도해 주는 귀한 성도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 약점도 많지만 가능성들, 귀한 지체들의 장점들을 보면서 기도해주고 격려해 주는 교회가 참 아름다운 교회, 건강한 교회, 신령한 교회, 성장해 가는 교회인줄 믿습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믿음안에서 바라보는 긍정적인 사고는 언제나 좋은 것과 장점을 봅니다.
그러나 믿음 없는 부정적인 사람은 자꾸 약점을 보면서 어두운 면을 봅니다. 똑같은 병원에 들어가지만 병원에서 치료 잘 받고 건강한 모습으로 나오는 사람을 보면서 기뻐하는 긍정적인 사람이 있는가 하면, 영안실로 들어가는 사람들만 보면서 ‘이 병원은 사람만 죽네.’ 하고 부정적으로 보는 사람이 있습니다.
똑같은 세상을 살면서 자기 자신에게서 없는 것, 조상으로부터 받지 못한 것을 원망하고 탄식하는 자녀가 있는가 하면 자기 있는 것, 지팡이를 개발해서 위대하게 성취해가는 승리자가 있습니다.
여러분, 인생을 살아가면서 여러분의 생에 어떤 문제가 있습니까, 괴로움이 있습니까, 질병이 있습니까? 가정입니까? 직장입니까? 무엇이든 우리의 지팡이는 하나님 만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덧입을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하시고자 하는 일할 수 있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는 좋은 기회입니다.
하나님은 그 지팡이를 통하여 역사하실 것을 말씀하셨고, 모세는 이제 하나님의 지팡이를 들고 바로에게로 나갑니다. 비록 작지만, 보잘 것 없는 마른 나무 지팡이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에 홍해를 가르는 역사, 마른 땅에 시원한 생수를 나게 해서 목마른 사람들이 시원하게 마시는 그런 역사가 일어날줄 믿습니다.
오늘, 이 시간 우리는 하나님 앞에 자기에게 있는 것, 지팡이를 찾아내는 은혜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하나님으ㅟ 부르심을 거절하지 말고 있는 그대로, 주신 지팡이를 가지고 나갑시다. 믿고 나갈 때 우리의 길을 영광의 길, 승리의 길이 될줄 믿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안에서 능치 못할일이 없음을 믿으시기 바람니다. 내가 주님안에서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믿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나를 창조하셨고 또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통하여 하나님은 계획하신 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계획들을 이루어 나사기는 귀한 성도들이 다 돠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