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쥬신의 찬가를 쓰면서
대 쥬신족의 역사 바로 알기
쥬신 민족의 기원 - 바이칼호의 전경
-우리 민족을 쥬신 민족이라 명명한다. 왜냐하면 배달민족이나 동이민족은 여러 가지 의미로 해석이 분분하여 쥬신의 찬가에서는 이를 필자가 임의로 바로 잡고자 한다. 이에 대한 이의는 얼마든지 가증하지만 필자는 옥기시대로 대변되는 배달국이 사료가 미미하며 ㄷ공이는 참으로 좋은 뜻과 형상의 글자이나 중화인들이 경멸시하는 글자가 되었으므로 이를 피하고자 한다. 그래서 파미르 고원에서 발원하여, 바이칼호를 거쳐 불함산으로 이동 정착하여 인류 최초로 튀어난 문화를 일구어 불함산에 도착한 우리 조상들은 그곳을 중심으로 집단 정착 문화를 발달시켜 왔다. BC6000년경에는 홍산문명을 이룩하고 이어서는 황하문명을 일으켰다.
배달국 제18세 커붉단한웅 [倍達國 第18世 居弗檀 天皇]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 커붉단 한웅
개천(開天) 1518년: B.C 2380년, 거불단(또는 커붉단) 태자는 배달국 제18세 한웅으로 제위(帝位)에 올랐다. 그 동안 배달국(倍達桓國-밝달한국)은 천해(天海-바이칼호)로부터 동쪽으로 옮겨와 븨류호로 부터 영고탑에 이르는 넓은 북만주를 정복하며 정착에 성공했다. 그리고 중국 산동성 일대에 대한 중화족들과도 평화를 유지하며 지냈다.
-거불단 한웅은 지금까지 고수해오던 정책을 바꾸어 서서히 남만주 즉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와 함경도일대를 장악하여 기반을 삼기 시작했다.
백두산을 중심으로 한 남만주일대는 기마민족인 민족이 서쪽으로부터 이동하여오기 훨씬 전부터 먼저 정착하여 살고 있던 농경토족(農耕土族)들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의 고기(古記)에 보이는 웅족(熊族)이 그들이다.
-웅족의 웅(熊)자는 곰이라는 뜻인데 이 글자는 우리의 옛말로 지신(地神)을 의미하는 표현으로 선택한 글자이므로 웅족(熊族)은 꼭 곰이라는 짐승으로 이해할 필요는 없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중요해 보이는 이들 호족과 곰족 즉 두 종족의 결합은 새로 침략해 오고 있는 배달국족을 하느님을 부모로 하는 천손족(天孫族)으로 하고, 선주 농경토족인 곰족을 지신족(地神族)으로 하여 하늘과 땅이 절묘하게 결합하는 장면을 드라마틱하게 그린 것으로 보여 진다.
-옛 기록들의 행간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밀리게 된 곰족은 북쪽의 강국(强國)인 배달국과 협상을 제의하여 공주를 거불단 한웅에게 시집보내면서 혼인동맹을 요청한 것 같다. 이에 커불단 한웅은 지신(地神)의 지위에 있는 무녀(巫女)를 황후(皇后)로 맞아들이고 동맹을 받아들인 후 군대를 파견하여 곰족을 위기에서 구해냈을 것으로 추이 할 수 있다.
-이리하여 배달국의 황후가 된 곰족의 무녀황비는 BC 2370년 5월 2일, 인시(寅時)에 대쥬신제국[大朝鮮帝國]의 시조(始祖)가 되실 단군성조(檀君聖祖) 즉 왕검을 탄생하였다. 고기에 의하면 ‘왕검의 덕망(德望)이 천인(天人)과 같아 많은 사람들이 따랐다. 그의 나이 14살 때 곰족의 임검 웅씨(熊氏)왕이 그의 신성(神聖)함을전해 듣고 그를 부왕(副王, 裨王)으로 삼아 임검을 대신하여 나라 일을 행하게 하였다.’ 이 기록은 그대로 믿어도 좋아 보인다. 웅녀황비(熊女皇妃)는 단군성상(檀君聖上)의 나이가 14살에 이르자 이제는 제왕이 될 준비가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황자(皇子)를 곰족의 나라로 보내어 이미 늙고 기력을 잃은 친정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이끌도록 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단군(檀君) 왕검께서는 무려 24년 동안 곰족의 나라를 통치했는데 그 동안 늙은 외조부(外祖父)가 죽자 나라의 전권을 확실하게 장악하고 대대적인 개혁을 단행하여 나라를 일약 강국의 위치로 올려 놓았다.
단군세기(檀君世紀)에는 ‘개천 1565년 상달(上月-10月) 3일에 이르러 신인(神人) 임검(壬儉)이 오가(五加)의 우두머리로서 800인의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단목(檀木)의 터에 자리를 잡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4천여 년 전 단군왕검께서 세우신 청동기 문명의 쥬신국은 말기에 서쪽에서 온 연나라 왕족의 후손 위만이 세력을 확장하며 지배권을 차지했다는 기록이 보이지만 위만의 경우 중국인 계라기보다 고조선계의 사람이 중원 쪽에서 재유입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며 위만조선은 오래가지 못하고 위만의 손자 우거왕 때에 한나라와 싸우다 멸망하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미 BC3898년에 배달나라를 세우고, 농경민족인 중화족을 제압해 대제국을 건설하였다.
-배달나라는 18대 1565년을 이어오다가 그 뒤를 이어 지위리 환인 그 사위인 만인중의 인걸인 단군왕검을 내세워 쥬신국이 세워졌다.
-단군쥬신은 아사달을 도읍으로 제국을 형성한 후 다시 신진쥬신을 중심으로 마쥬신과 번쥬신의 세 단군이 넓은 지역을 나누어 신정을 실시했다.
-단군쥬신이 나약해지매 해모수의 부여와 동명왕의 가우리를 함께 계승한 고두막루칸이 제국을 아우르고 졸본부여를 일으켰다.
-부여가 일어나면서 제국의 권위가 크게 떨어져 지방 세력이 성장하였다. BC3세기경에는 황하 상류에 살던 동호족의 한 갈래가 흉노에 밀려 남하하였고, BC57년에 서울에 터를 잡아 나라를 세웠다 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신라(新羅)이다. 신라는 나중에 힘이 쇠퇴하여 소백산맥을 넘어 오늘날 경주인 서라벌로 쫓겨갔다.
-BC37년에는 졸본부여에서 성장한 추모(고주몽)가 부여를 탈출하여 졸본지방에 이르러 가우리(고구려)국을 건국하고 그 나라가 점점 커져서 북만주 일대를 모두 다 통일하였다. 고주몽이 나라를 건국하고 나서 그를 도와 가우리를 세웠던 동료중의 한 사람인 가우리 건국공신 협보가 뜻을 세우고 일본지역으로 달아나 최초의 섬나라 다파라국을 일본지역에 세웠다.
-백제는 가우리 건국 과정에서 배신감을 느낀 황비 소서노와 그 아들 비류와 온조가 가우리를 탈출하여 비류지역에서 세운 나라이다. 이후 백제는 요서 지역으로 옮겼다가 반도백제인 충청남도 아산 지역으로 옮겼다. 이 시기에 온조가 독립하여 십제라 불리우는 한성백제를 건국했으니 사실 따지고 보면 십제 즉 온조가 건국한 나라는 백제의 아우 나라이다.
-아산에 정착한 반도백제(비류백제)는 요서, 산동, 일본 지역을 포함한 넓은 해상 제국을 세우고 해상제해권을 누리며 각지에 담로를 두어 다스렸다.
-가우리(고구려)의 제국 통일로 중앙 정권에서 밀려난 옛 쥬신의 중신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한반도 남부로 밀려 내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문물이 뛰어나서 철기시대를 크게 발전시킨 이들로 김해를 중신으로 하여 경상남도에 6가야 연맹을 성립시켰다.
-가야가 신 영지를 개척하는 과정에서 일본 진출의 교두보로 설치한 것이 이른바 임나이다. 일본 역사학자들이 왜곡시킨 임나의 본뜻을 잊지 말고 알아야 할 것이다. 임나는 우리말로는 참고 견딘다는 뜻이고 일본의 입장에서 정직하게 해석하면 주군이 있는 나라라는 뜻이 된다.
-가야가 일본에 진출하자 이후 앞을 다투어 백제 가우리 신라가 일본으로 진출했다. 가야 계통인 가라, 아라, 신라계통인 무라, 백제 계통인 곰, 담로 등과 관련이 있는 일본의 지명들은 모두 이 시기에 개척된 곳이다.
-비류백제가 일본 지역 통치 과정에서 백제 황통의 계승을 위해 전 담로를 제압하고 세운 나라가 바로 오늘날 까지 이어지고 있는 일본의 천황 국가이다. 이때의 토벌장군인 경진주는 백제의 대장군이었으며 천황 선선저도 백제에서 파견된 백제 황족이었다.
-신무왕은 현지처를 취한 선선저 황자를 대신해 백제에서 보낸 새로운 천황으로서 일본열도 동부정벌의 임무를 충실히 수행하여 안정시켰다.
-신라 왕자 천일창의 일본열도 공략 이후 혼슈 지방을 둘러싼 백제와 신라 간의 다툼이 격화되었다. 그런데 가우리도 곰벌을 근거로 세력다툼에 뛰어들어 일본열도가 전화에 휩싸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백제는 경행왕을 파견하였다.
-삼국유사의 연오랑 세오녀 설화는 신라에 망한 마한 유민의 왜 열도 이주를 말하는 것이며 이 세오녀가 바로 비미호이고 그 딸이 신공 여왕이다.
-해상 제국을 이루었던 비류백제는 대가우리의 광개토대왕의 침공으로 본국 곰나루를 빼앗기고 일본 지역으로 피해 갔다. 그 왕이 일본의 응신천황이다. 응신은 나라백제를 세우고 그곳을 중심으로 본국의 곰나루백제를 지배하였다.
-곰나루백제의 혼란을 틈타 신라는 왜 열도에서 세력 만회하려고 했다. 이 때 신라의 주도로 이루어진 일본의 개혁이 이른바 다이카 개신이다.
-부여 천도 후 내정을 정비한 백제가 신라를 압박하자, 신라는 가우리의 중원 통일을 위한 전 민족적 협력 제의를 물리치고 당과 야합하여 결국 백제를 멸망시켰다.
-본국 백제의 멸망을 본 나라백제는 전 국력을 동원해 본국의 부흥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파견군과 본국 홍기군과 불화가 있어 부흥전쟁이 실패하였다.
-백제 멸망 후 당은 중국인의 숙원인 가우리 정벌을 위해 여러 차례에 걸쳐 가우리를 침입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였다. 가우리의 강력한 힘에 막혀 처절한 실패를 맛보았던 것이다.
-가우리는 연개소문이 죽자 그 아들들 사이에 권력 다툼이 일어났다. 그 결과 권좌에서 밀려난 남생이 당나라 군대를 불러들임으로써 어이없게 자멸하고 말았다.
-쥬신의 전통을 계승한 가우리는 이 때 우리 민족 관련 기록들을 민족 보호 차원에서 모두 소각했다. 그러나 이 일 때문에 그 후의 우리 역사가 크게 왜곡되었다.
-가우리 자멸 후 그 유장인 대조영, 이진충 등이 협력하여 당에 대항하면서 민족 부흥을 내걸고 대진국을 건국하였다. 대진국은 그 영토와 건국 정신에서 가우리 계승 정신을 뚜렷이 하였다.
대씨 가우리 건국
-AD699년 대중상 황제에 이어 황위에 오른 대조영은 이 해에 개원하여 천통이라고 국호를 대진국이라 하였다.
-옛 가우리를 이끌던 고씨들이 적극적으로 새 정부에 참여함으로써 대씨가우리는 곧 안정을 찾게 되었으나 북국의 강력한 흑수부와의 협상은 끝내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천 년에 걸친 부여족(고씨가우리)에 대한 원한으로 흑수부가 새 정부에 참여하기를 거부한 까닭이었다.
-대조영은 조각을 단행하고 태자 대무예를 보내 당과 상호 승인 협정을 맺은 뒤 황제의 외삼촌인 대무예를 주당 초대 대사로 파견하였다.
-AD719년 대조영의 뒤를 이어 대무예가 제위에 올랐다. 모든 이가 새 황제의 즉위를 축하 하였으나 제위를 노리던 대문예는 역모를 꾀했고 이에 실패하자 당으로 달아났다. 이 와중에 역모에 연루되어 흑수부의 대칸 예속리기가 처형되므로 어렵게 민족 통일이 달성될 수 있었다.
대당 징벌 전쟁
-당에 대한 징벌전을 벌이기에 앞서 대무예는 당의 동맹국 신라를 견제하기 위하여 고인의 등을 일본에 파견하여 동맹을 맺었다. 장문휴를 연합군 총사령관에 임명하여 당조의 목을 조여 가던 중 신라의 이적 행위로 인하여 눈물을 머금고 회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이때 장문휴는 산동지구의 가우리 유민들로 등주군을 조직하고 산동을 중심으로 한 점령 지구를 지키게 하였다. 이적 행의를 일으킨 신라군을 무참하게 섬멸하였다.
대진국의 세종광성 문황제
-AD737년, 대흠무가 제 4대 제위에 등극하였다. 대흠무는 문치에 힘써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룩하였다. 한편으로는 거란인 안록산을 사주하여 대당 분쇄전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AD756년부터 시작된 대연국의 거듭된 내분으로 인하여 결국 이적치적 작전을 세워 싸웠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안록산은 낙양을 점령하고 대연국을 세운 뒤 스스로 왕위에 올랐던 것이다.
쥬신(동이)의 고지 산동 반도
-산동 반도는 동이족과 화산족의 양보할 수 없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대흠무는 이정기를 요양황으로 봉하고 등주에 대가우리의 대표부를 설치하였다. 이정기는 산동 반도를 완전히 통일하고 당의 대동방 무역을 독점하였다. 대가우리와 교역이 늘어나 양국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으나 반면 당은 이정기의 자비심에 의존해야 하는 비참한 상태에 놓였다.
이 시기 대가우리와 일본과의 무역도 대단히 활발하였으며 일본의 급격한 -대가우리 대표부가 이정기의 아들 이납이 왕위에 오르면서 제나라로 개명하였다. 제나라의 제4대 이사도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려 당의 동도 공략에 나섰다. 그러나 이 또한 신라의 이적 행위와 이사도가 피살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그리고 제나라는 큰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결국 망하고 말았다. 모처럼 다물(多勿: 고토회복운동)했던 불쥬신의 청구땅(산동지구)은 다시 화산족에게 넘어가고 말았다
동경천도와 대원의의 난
-그러면 제나라의 멸망을 지켜보고 있어야만 했던 대진국의 속사정은 어떤 것이었을까? 이미 노령에 접어든 대흠무 황제는 당 토멸에 가장 큰 장애물인 신라를 제거하기 위해 남쪽 국경의 동경성으로 천도하고 남정군을 조직하여 대원의를 사령관에 임명하였다. 그러나 대흠무 황제가 쓰러지자 대원의와 황자들 사이에 또 다시 황위쟁탈전이 벌어져 제나라를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결국 황권은 막내 황자인 대숭린에게 돌아갔다.
불쥬신의 후예들
-AD872년 부여족으로 구성된 거란 세라부에서 거란의 대영웅 야루철리지가 태어났다. AD901년 이리근(군사령관)에 오른 야루철리지는 AD906년 마침내 대망의 칸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국민들은 그를 국부 즉 아버지(중국 발음으로 아보지)라 불렀다. 거란 전통의 3년 질립제를 해제하고 거란 제부를 완전히 통일한 아버지는 마침내 AD916년 황제위에 올라 대진국 정벌에 진력하였다. 그 일환으로 황숙 할저와 그의 두 아들이 대진국으로 거짓 망명하였고 황위를 노리는 대진국의 정보부장 대소현과 밀약을 맺은 뒤 돌아왔다.
대씨 진국 제국의 최후
-AD925년 12월 아버지 황제는 전국 총동원령을 내려 대진국 원정길에 올랐다. 거란군은 대소현의 안내로 진국의 요새들을 교묘히 우회하여 전광석화 같이 도성인 홀한성을 공략 대진국을 멸하고 동단국을 세웠다. 그러나 대진국의 각 지방군들이 기병하기 시작하여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되었다. 한창 전쟁 중 격무에 시달려 아버지 황제가 죽자 태자이며 동단국의 왕인 인황왕과 거란의 병권을 쥐고 있던 둘째 황자 요골사이에 치열한 황위쟁탈전이 벌어졌다. 이때 인황왕은 대진국 다물군의 공격목표가 홀한성임을 깨닫고 요양으로 천도하면서 홀한성의 모든 것을 불태워버렸다.
왕씨 가우리의 천하통일
-AD918년 궁예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왕건은 호족들과의 정략적 결혼 정책을 통해 국력을 하나로 통합하였다. 또 대가우리가 망하면서 망명해온 유민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하여 국력을 키워나갔다. 이때 천하통일을 눈앞에 두었던 후 백제의 견훤이 왕자 신검 등에게 유폐되었다가 탈출하여 왕건에게 투항하여 왔다. 또 신왕 김부가 천년사직을 왕건에게 의탁하였다. 왕건은 나머지 신검군을 섬멸하고 AD963년 마침내 천하통일의 위업을 달성하였다.
대김(大金) 제국
-시조 김함보로 부터 시작된 김나라는 왕씨 가우리 및 대요제국(거란)과 대립하면서 성장하였다. AD1115년 정월 김아구타는 황위에 올라 국명을 대김제국이라 하였다. 대김제국이 대요제국과 최후의 승부를 겨루어 승리함으로써 천하의 주인 자리는 불쥬신계에서 다시 신쥬신계로 넘어가게 되었다.
국력이 강력했던 동이의 제국 김나라는 AD1234년 몽골(원)의 태종에게 무릎을 꿇고 말았다. 고려는 몽골의 침입에 맞서 강화도로 천도하여 장기전에 돌입하였다 그러나,무신정권이 무너지고 나약한 세습왕의 친정체제로 돌입함으로써 결국 출육환도하게 되었다. 이때 삼별초를 이끌던 배중손은 출육환도에 반대하고 왕족 승화후 온을 새 임금으로 옹립하여 반몽 정권을 수립하기도 하였다.
려몽 연합군의 일본 원정
-려몽 연합군은 AD1274년과 1281년 두 차례에 걸쳐 일본 원정을 단행하였다. 몽골의 요청에 따라 고려는 기꺼이 응해야 했다. 두 차례에 걸친 몽고의 일본 원정은 일본 일대에 불어 닥친 태풍으로 인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그러나 고려는 해안을 자주 침입하던 왜구 토벌하는 잇점도 얻을 수 있었으니 아주 허망한 전쟁만은 아니었다.
최무선의 화약과 화포발명
-두 차례에 걸친 해적 소탕전으로 일시 주춤했던 왜구들이 다시 고려 해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AD1334년 가마쿠라 막부가 망하고 일본 황실이 남북으로 갈라져 내전에 돌입함으로써 백성들은 극도로 피폐해졌다. 따라서 이들이 다시 도적떼가 되어 고려의 해안을 침입했다.
최무선은 왜구들을 바다에서 원천 봉쇄하는 것이 최선이라 생각하고 화약과 화포 발명에 진력하여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헌을 세웠다. AD1389년 박위는 전선 1백 여 척을 이끌고 나아가 왜구의 소굴 대마도를 토벌하였다. 이 작전은 고려의 마지막 해군 작전이었다.
이성계의 혁명
-몽골의 지배하에 있던 중국의 한족들이 몽고를 몰아내고 명을 건하였다. 그리고 그들은 계속하여 서쪽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러므로 해서 실지 회복이라는 고려의 정책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고, 급기야 고려는 1388년 요동 정벌을 단행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요동정벌은 4대 불가론을 내세우며 끝까지 요동정벌 철회를 주장하던 친명파에 의해 좌절을 맛본다. 특히 출정한 장수 이성계 등은 결국, 위화도에 이르러 회군을 단행하였다. 그 후 무력으로 정권을 탈취한 이성계는 문신을 우대하였고 그 결과 조선의 군사력은 점차 무력화되어 갔다. 이런 상황에서도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은 아버지의 화약 제조법을 더욱 개량 발전시켜 훗날 임진왜란 때 이순신 함대를 통하여 그 위력을 남해안 제해권을 누리며 증명하였다.
조선 해군과 제독 이순신
-이씨 조선은 한동안 태평세월을 맞이하였으나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이 치열하였다. 반면 일본은 1460년 영주들 간의 혈전이 시작되고 있었고 이후 약 120년간 약육강식의 전국시대가 계속 되었다. 1536년 가난한 농군의 아들로 태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당시 최강자였던 오다 노부나가 밑에서 성장하여 마침내 전국을 통일하고 안목을 넓게 하여 동아시아 침략에 나섰다. 그러나 조선 통신사로서 일본에 갔다 온 정사 황윤길(서인)과 부사 김성일(동인)의 일본을 바라보는 진술이 엇갈려 조정에서는 설왕설래 국책을 바르게 정하지 못하고 세월을 보내다가 1592년 조선국은 임진왜란을 맞게 되었다.
쥬신족의 첫 나라
배달나라를 아는가? 신시시대를 아는가?
그 나라 이름은 밝땅. 밝달. 배달로 변화하니 밝은 동산이란 말이네.
桓國 桓因 桓雄은 밝고 밝은 동방에 빛 태양을 상징한 숭고한 뜻 일 것이네.
한님 하느님 하늘님 한울님 하나님이란 말도 천신을 표현하는 우리말이라네.
밝음은 배이고 달은 동산이니 우리의 에덴이 삼위테베에 세운 배달국이라네.
*倍達國(배달국): 한국 다음의 나라로 신시에 도읍했기에 신시시대라고도 함.
*삼위테베(백두산 부근): 참 어려운 것이 역사이다. 왜냐하면 오늘날과 같이 기록문화가 발달하지 않았기 때문에 지명을 두고 수많은 고증이 필요하니 독자여러분의 이해를 청하는 바이다. 예를 들면 불경의 경우만 보더라도 석가 입적 후 500년이 되었을 때 제자들이 모여 결집을 통해 기록물을 만들었으니 이것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겠는가. 마치 필자가 지금 나의 조상이신 태종의 2자 효령대군의 5자 원천군의 행장을 만들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말이다. 하여서 도리 없이 눈에 보이는 것과 풍속으로 전해 오는 것과 언어 속에 묻어 있는 것들을 통하여 유추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자여러분에게 죄송하지만 삼국유사와 <조선왕조실록>에 나오는 조선의 뿌리에 해당되는 역사로서 한웅과 단군이 함께 나오는 장면을 표현하면 "下視三危太白 可以弘益人間"이라는 말에서 '太白'을 '太伯'이라고도 쓴다. 이 "三危太白/伯"을 한결같이 "삼위산"과 "태백산"으로 풀이하고 있으며 이를 백두산 이라 고도 말하니 백두산은 아주 뒷날 나타나는 지명일 뿐이다. 아무튼 이 '三危太白/伯'을 두 개의 산으로 풀이하면 단군이 신단수에 내려온 곳이 거리가 너무 서로 멀어 어떤 행위를 할 적에 불가능하므로 반드시 한 곳으로 모아서 이야기해야 될 것이다. 그렇다면 '三危'가 꾸밈의 말이거나, 고유명사라면 '太白/伯'이 그냥 '산/메'여야 한다. 고유명사로 볼 때에 '危'는 '峗'[魚爲切 虞爲切][위] 이며, 이 '三危/峗'는 신강성과 감숙성 근방의 돈황 남쪽에 있는 산일 것이다.
이 '三危'는 그 뜻으로 보면 소덕(小德)/재하(才下)/무공(無功)이니 덕이 없고, 재능이 형편없고, 공적이 없는 사람이 공직에 있음을 말한다. 이런 말과 뜻으로는 산의 이름에 쓰기에 부적절하다. 또 다른 말로는 '봉래/영주/방장/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것도 전설상의 산이며 부상국에 있다고 말하니 산동성에 있는 어느 산들일지도 모르게 된다.
그런데 그곳에서 흑수(黑水)가 발원하는 곳이라고 한다면 분명 천산산맥의 동북쪽 끝과 알타이산맥의 서북쪽 끝에서 만나는 오브(Ob)강의 샛강 이르티슈강을 흑수라고 본다면 그 삼위산은 3개의 높은 산으로서 천산(음산)과 알타이산(금산)과 샤얀산 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지금까지는 역사상 나타나는 지명을 들어 이야기했으니 소리로 풀어낸 학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먼저 홍익인간, 즉 인간을 널리 복되게 할 수 있는 곳이라면 높은 산일 것이다. 천산/설산/백산이든 알타이산이든 그런 높은 곳을 올라가서 무엇을 하겠다는 것인가 말이 맞지 않다. 오히려 넓은 벌판이어야 백성들이 살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곡식을 심어 백성을 배불리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太白/伯'[태백]은 '벌판/언덕'의 뜻을 품고 있어야 한다. 에덴동산과 같은 성질의 곳이어야 할 것이다. 하여서 '太白/伯'[태백]을 비슷한 소리와 뜻으로 페르시아아서는 'tappe'라는 말이 있고, 터키[투르크]에서는 'tepe'가 있고, 중앙아메리카의 멕시코에서는 'tepe?' 또는 'tepec'이 있다. 모두 '언덕[hill]'과 '산(mountain)'의 뜻이 함께 있다. 특히 'tepe?' 또는 'tepec'은 우리말의 [태백]과 매우 비슷한 소리이다. 그들은 [테베][테벡]라고 소리를 낸다. 이 소리는 아마도 쥬신의 부여어나 고구려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三危/峗'[삼위]를 소리로 풀어봐야 하겠다. 우리는 [삼위]라고 한자에 고정관념에 사로잡혀 있는데, 현재 중국어로 [samwei]는 우리가 말하는 [samui]와 비슷하다. 이 'samui'에 'i'의 탈락과 구르는 소리의 'r'의 삽입으로 그 소리가 'samur'가 되었으며, 프랑스어로 'samour'로 적었을 것이다. [사무르]>[사무]>[삼우]>[삼위]로서의 소리의 변화는 가능하다고 본다. 이 'Samur/Samour' 강이 있다. 중앙아시아 아제르바이잔 코카서스 산맥의 동쪽 줄기로서 바자르뒤쥐(Barzardiouziou) 산의 북쪽에서 흘러 카스피 해로 들어간 강이다.
그런데 이 'Samur/Samour'라는 소리는 '三危/峗'[삼위]에서 페르시아어로 보면 아마도 sana'[se/nun/alef/he>sna']로서 '사뇌/칭찬/찬미/찬사'에서 유래했거나, 'sani'[sad/nun/ye/ein>sni']로서 '은혜/선행/능수능란한'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이것은 천하의 중앙에 있는 산이라는 곳으로서 한자로 숭산(嵩山/崇山/崧山)과 같은 뜻이다. 이 '崧'자가 '고려산'이라고 <옥편>에 나와 있다. 그래서 삼위산이 천산/금산/샤얀산을 가리키든, Samur 강이 있는 곳의 산을 가리키든, 한반도와는 상관이 없는 중앙아시아이며 쥬신의 터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삼위태백'을 '삼위산과 태백산'으로 풀이할 것이 아니라, '삼위 테베' 또는 그냥 '삼위산'이라고 하거나, '삼위벌/벌판'이라고 해야 마땅하다. 그러니 뒷사람들은 백두산을 신시의 땅이라 고집하지 말고 삼위테베를 연구하기 바란다.
*신시: 배달국의 도읍지로 삼위테베에 있었다. 필자는 테베를 동산으로 표현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파나류산 한국은 한님이 다스렸다.
한님이 다스렸던 평화의 나라 바이칼호수아래 녘 남북 3만 리 동서 2만 리
성경은 야곱의 12아들을 12지파라 썼으나 한국은 12연방으로 비리국 양운국 구막한국 구다천국 일군국 우루국 객현한국 구모액국 매구여국 사납아국 선비국 수밀이국으로 그 역사 장구했구나! 3하고도 삼백일 년을 지속했다네.
하지만 중화인들 진서숙신열전에 5만 리 대국 숙신국 적어두고 입을 봉했네.
*파나류산 한국: 지금부터 9,200년 전에 한민족이 건국한 세계 최초의 국가인 한국은 바이칼호의 동쪽 천산(天山.파나류산)을 수도로 하는 대제국 이었다. 남북이 5만리, 동서가 2만리의 광대한 국토를 다스렸으며 한국의 백성들은 천산에서 천해에 이르는 넓은 땅에 흩어져 살면서 문명을 개척하였다.
그들은 점차 분파하여 아홉 족속이 이루는 12나라로 나뉘어졌다. 그 12분국을 총칭하여 나라 이름을 한국(桓國)이라 하였다.
*진서숙신열전: 석계룡이 사신에게 그 까닭을 물으니 대답하기를, “언제나 소와 말이 항상 서남쪽으로 향하여 잠자는 것을 3년간 보고나서 대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왔습니다.”하였다.
숙신씨(肅愼氏)는 일명 읍루(挹婁)라고도 하는데, 불함산(不咸山, 백두산) 북쪽에 있으며, 부여(夫餘)에서 60일 쯤 가야하는 거리에 있다. 동쪽으로는 큰 바다에 연해 있고, 서쪽으로는 구만한국(寇漫汗國)과 접해 있으며, 북쪽은 약수(弱水, 송화강)에 이른다. 그 땅의 경계는 사방 수천 리 뻗어 있고 사람들은 깊은 산과 골짜기에 살며 그 길이 험준하여 수레나 말이 통행하지 못하며 사람들은 여름에는 나무 그늘에서 살고 겨울에는 동굴 속에서 산다.
그 나라에서는 부자가 대대로 세습하여 군장(君長)이 된다. 문자가 없기 때문에 언어로 약속을 한다. 말이 있어도 타지 않고 단지 재산으로 여길 뿐이다. 소와 양은 없고 돼지를 많이 길러서 그것을 먹고 가죽은 옷을 만들며 털을 짜서 베(布)를 만든다. 사람들은 모두 머리카락을 묶고(편발編髮), 베로 지름이 한자 쯤 되는 가리개를 만들어 앞과 뒤를 가렸다. 특별히 혼인하러 갈 때에는 남자가 여자의 머리에 깃털을 꽂아주는데, 여자가 결혼을 승낙 하면 그 깃털을 가지고 집으로 돌아갔다가 다음에 예를 갖추어 신부를 맞아드렸다. 부인(婦人)은 정숙한 반면 처녀는 음란하며 건강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고 늙은이는 천하게 여겼다. 죽은 사람은 죽은 그 날에 곧 바로 들에서 장사를 지내고 나무로 작은 곽(槨)을 만들고 돼지를 잡아서 그 위에 쌓아 놓아 죽은 사람의 양식이라고 한다. 그들의 성질은 흉악하고 사나우며, 근심하거나 슬퍼하지 않는 것을 서로 숭상하므로 부모가 죽어도 남자는 슬퍼하거니 울지 않는데 이러한 사람은 씩씩하지 못하다고 한다. 도둑질을 한 사람은 물건의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죽였다. 그 때문에 비록 들에다 물건을 놓아두어도 훔쳐가지 않는다. 숙신에는 돌로 만든 살촉(石砮)과, 가죽과 뼈로 만든 갑옷과, 석자 다섯 치의 단궁(檀弓)과, 한 자(尺) 몇 치(咫)쯤 되는 길이의 화살(고시楛矢)가 있다. 그 나라의 동북쪽에 있는 산에서 산출되는 돌은 쇠를 자를 만큼 날카로운데, 그 돌을 채취하려면 반드시 먼저 신에게 기도하여야 한다. 주(周) 무왕(武王) 때에 그 화살(楛矢)와 화살촉(石砮)를 바쳤다. 주공(周公)이 성왕(成王)을 보좌하던 때에는 다시 사신을 보내어 조하(朝賀)하였다.
그 뒤 천여 년 동안은 비록 진(秦)나라와 한(漢)나라의 강성한 세력으로도 그들을 오게 하지 못하였다. 문제(文帝)가 위(魏)의 정승이 되었을 때인 위나라 경원(景元, A.D.260~263; 고구려 中川王13~16)말경에 고시(楛矢), 석노(石砮), 궁갑(弓甲), 초피(貂皮) 따위를 가지고 와서 바쳤다. 위의 황제는 그 물건들을 승상부(丞相府)에 보내도록 명하고, 숙신의 왕 녹(傉)에게는 닭, 비단, 모직물, 솜을 하사하였다. 무제(武帝)의 원강(元康, A.D.291~299; 고구려 西川王 22~烽上王 8)초에 다시 와서 공물을 바쳤다. 동진(東晋)의 원제(元帝)가 진나라를 중흥시키자, 또 강좌(江左)에 와서 그 석노(石砮)를 공물로 바쳤다. 성제(成帝) 때에 이르러서는 후조(後趙)의 왕 석계룡(石季龍: 석늑의 손)에게 통호(通好)하여 조공하였는데, 4년 만에 비로소 달성하였다.
*肅愼國(숙신국): 한국의 12연방을 중국사서는 숙신이라 적었다.
잊지 못할 쥬신의 역사
동이의 뿌리역사 어디에 있니?
그 이름도 신비한 잃어버린 우리 고사서 잊지는 말아야지.
고조선기. 표훈산성밀기. 조대기. 주남일사기. 신비집. 고조선비사. 대변설. 지공기. 삼성기. 도증기. 지이성모하사랑훈. 수찬기소. 동천록. 마슬록. 통부록. 호중록. 지화록. 도선한도참기 18권아!
그래. 너희들 지금 어디 뫼에서 울고 있니?
그립고 보고 싶구나!
모화하고 사대하던 조선왕들이 싹 쓸어서 없앴다더라.
그래도 애국충정 있든 사람들 몰래몰래 감췄더란다.
숨고 숨기며 매월당이 감추고 도학자도 따라 숨겨서
근근이 조선 두 황제 대까지 남아 있더니
왜인이 보인 족족 쓸어갔댔어.
하지만 물소리 바람소리 낮에 우는 새소리 밤에 찍찍대는 쥐 소리에 묻어
오늘 내가 터럭만큼 알고 말았네라!
끔직 하여라. 인고세월 속에 왜에 갇힌 숫한 사서들이 그립고 보고 싶다.
이마니시 류 그대가 훔쳐간 건 어디에 숨겼느뇨?
그 책에 정영 혼과 넋이 붙어 있을지니
제 아무리 석유환인을 외쳐대도
동이의 움 사리가 석유환국이니 사기 치지 말거라.
머지않아 음모의 밤 음모의 증거 밝힐 새벽이 오고 말리니
그날은 쥬신족의 종주한국 통일된 날일세.
*매월당: 김시습의 호로 단종의 생육신 중의 한 사람.
*이마니시류: 이병도와 함께 한국사를 왜곡한 일본 역사학자로 이마니시 류는『삼국유사』석유환국 부분을 석유환인으로 날조하였다. 그런데 석유환국 부분만 口+土이라고 나와 있고, 그 뒤에는 일반적인 나라국(國)이 또 나온다. 뒤에는 정자인 國자가 나오는데, 왜 구지 석유환국(昔有桓國) 부분만 囗+土 약자로 쓴 것인가. 애초에 이마니시 류가 날조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래 목판본은 잘못해서 오탈자가 생기면 안 되므로 더욱 신중히 해서 실수가 적은 게 특징인 판본이다. 오래된 것이 석남본이라 할지라도 후에 나온 정덕본이 오히려 원본에 가까울 수 있다는 결론이다. 게다가 고판본인 석남본의 석유환국부분에 口+土라고 적혀 있는 부분에 대해서 <삼국유사 교감연구>에서 (口+士)이 나라 국國의 약자라고 했다. 게다가 고려대장경에는 口+士자가 세 번 등장한다. 그리고 영어 번역도 함께 나오는데, 因은 cause,reason, by,because(of) 라고 되어 있고, 口+士는 erect, proud, upright, bald라고 되어 있다. 단순히 口+士를 因의 이체자로 보기 어려운 까닭이 여기에 있다. 결론적으로 나라국國자는 복잡한 글자라 얼마든지 후대에 약자로 바꾸거나 환인으로 조작될 여지가 많지만 환인으로 되어 있는 판본을 국國으로 바꾸었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므로 원래 있던 판본은 석유환국(昔有桓國)으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는 결론이다.
*움 사리: 싹이 틀 수 있는 가지의 눈. 萌芽(맹아). 사물의 시초가 되는 것.
배달국의 선진병기
배달신시 갈고 한웅는 염제신농을 불러다가 국경을 명확히 해두었고 자오지 한웅은 동두철액으로 무장하고 귀신같은 용맹으로 연막을 펼쳐 승전했다네.
대달국의 신병기는 선진야철 장인의 공이고 자오지 한웅의 전승은 질 좋은 철제병기의 위력이나 그 보다 더 중한 것은 시조 거발한 한웅의 유훈일세.
동이족은 잊지 마소. 우레 같은 치우천황 네 글자에 천하가 벌벌 떨었다네.
*염제신농: 염제신농은 중국 상고시시대의 임금으로 최초로 농경을 했고 모든 풀들을 맛보아 약초를 찾아내고 한의학의 시조가 되었으며 도자기도 최초로 굽고 시장도 최초로 만들고 그러다가 황제 헌원과 판천전투에서 패하여 사라졌다 제왕이다.
광개토태왕 당시 후연의 왕자 모용운(고운)은 고구려의 조상이 전욱 고양씨라고 했다. 전욱고양씨는 누구인가? 바로 황제헌원의 손자로 나오는 인물이다. 전욱고양은 북방의 황제로 나오며 그가 다스리는 지역은 황제헌원과 함께 홍산문명의 땅에 있다. 홍산문명이 신시배달과 쥬신의 문화이다.
즉 전욱 고양은 신시배달이나 쥬신의 황제에 대한 중국의 신화적인 기억이며 전욱고양은 홍산문명의 황제로서 곧 고구려와도 조상-후손 관계로 연결이 되며 신농씨는 전욱고양의 할아버지 황제헌원의 형님이라고 중국의 국어사전에는 기록하고 있으니 고구려는 홍산문명의 후손이요 홍산문명은 우리 한민족의 역사임에 틀림없다. 다만 동북공정으로 크게 역사를 훼손시키고 이쓰니 앞날이 망망하다.
*자오지 한웅: 치우천황의 본 이름이고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도깨비문양이 치우천황의 전해오는 모습이다.
*銅頭鐵額(동두철액): 구리로 된 머리 철로 된 갑옷이며 배갈국의 무장이 쓰고 입었던 투구와 갑옷이다. 기록에 의하면 말도 철갑으로 무장했었다.
치우천황의 업적
치우천황이 염제신농의 나라 비쇠하니 큰 뜻을 세워 천병을 보내 평정했네.
색두성에서 기병하여 중원의 기름진 땅 회수와 대산 사이에서 웅거했다네.
황제헌원이 대항하자 탁록 벌 싸움에서 그를 잡아 신하로 거두고 개선했네.
그 후 서쪽의 제곡고신이 소란을 피우니 심복 오장군을 보내어 진압했다네.
그러니 중국의 자랑 삼황2제와 고신이 치우천황에게 무릎 꾼 제후였구나!
*憊衰(비쇠): 몹시 쇠약하고 마름.
*淮岱(회대): 회수와 대산 사이는 중원의 곡창지로 동이족의 보금자리였다.
*황제헌원: 치우와 전쟁 때 주로 곰을 동원했고 비휴라는 짐승도 함께 등장하는데 비휴가 무엇이냐 하면 자이언트 팬더 곰이다. 자이언트 팬더 곰은 한자이름으로는 ‘대웅묘’이고 ‘맥’또는 ‘비휴’라고도 한다. 대웅묘가 바로 맥족의 어원이 되며 황제헌원은 그가 태어날 때 그 어미가 북극성의 기운을 받았다하고 그 기운이 헌원의 언덕에 비추었다하여 헌원이라고 이름 지었다.
즉 북두칠성은 큰곰자리에 있고, 북극성은 작은곰자리에 있다. 또한 큰 별자리로는 용자리에 속한다. 그래서 중국의 천자가 용도 되고 작은곰도 된다. 천자가 있는 곳을 북극성이라 하고 그곳 주위에 보라색기운이 감돌기 때문에 자미원이라고 부르며 ‘자금성’의 이름은 바로 거기서 생긴 것이다. 중국의 오성기는 ‘북극성’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고 황제헌원이 바로 수메르신화에서 주신主神 마루둑이고 산해경에는 황제헌원을 주신主神이라고 되어 있다.
천하주인은 배달국
치우천왕 당시 천하는 대효와 창힐이 제후국으로 배달국을 받들고 살았네.
북쪽은 대효가 동쪽에는 창힐이 그리고 서쪽에는 황제 헌원이 다스렸다네.
셋은 서로 다투어 패권을 가리려 했으나 한 사람도 자기 뜻 이루지 못했네.
처음 헌원은 대효나 창힐을 의지코자 했으나 둘은 치우의 제후라 불응했네.
배달국에서 대효는 간지를 창힐은 부도의 글을 배워가서 성실히 섬기었다네.
*대효와 창힐: 탁록대전의 전초전이 벌어졌다. 그때 배달국의 서토에는 탁록을 중심으로 세 제후가 대치하고 있었다. 북쪽은 대효(大撓)가 동쪽에는 새 발자국을 보고 녹도문을 창제한 창힐이 있었다. 서쪽 유웅 땅에는 전쟁을 일으킨의 헌원이 있었다. 그들은 모두 동이족이었다. 헌원은 서토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가진 절대 군주였다. 헌원은 대효와 창힐과 싸워 이겨서 서토의 패권을 차지하려는 야욕을 불태우고 있었다. 그래서 배달국을 쳐서 이기면 천하의 실력자가 될 터라 헌원은 대효와 창힐의 변경을 여러 차례 침공했다. 그러나 대효와 창힐은 헌원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강했다. 치우천왕의 제후국이기에 치우천황이 뒤에서 받쳐주기에 그랬다. 그리고 대효와 창힐은 자부선인으로부터 도를 전수 받은 제자라서 다방면에 능했다. 전술전략에도 밝았지만 인품도 출중했다. 대효와 창힐은 백두산 천지에서 배달국 치수관(治水官) 공공(共工)과 함께 천부경·삼일신고·삼황내문경·윷판으로 만든 환역(桓易) 등을 전수 받은 실력자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천간(天干)과 지간(地干)의 60갑자에도 밝고 배달국의 녹도문자도 자유자재로 써서 백성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제후였다. 그래서 대효와 창힐이 두 제후는 헌원이 넘보지 못할 여러모로 힘을 갖춘 제후였다.
*苻圖(부도)의 글: 한자의 모체가 된 畵像(화상) 글자로 녹도문을 말한다.
신시 배달국 청구 청구국
신시에 도읍한 배달국의 황제를 천하를 통치하기에 한웅천황이라 불렀네.
도읍이 청구라 청구국으로 불렀고 18한웅이 다스려서 역년이 1565년이었네.
시조는 거발한천황이고 6세 다의발 천왕은 하도를 창안해 낸 태호복희씨네.
고구려 을파소의 참전계경대로라면 5세 6세 천왕은 서로 115년을 살았다네.
14세 치우천황이 청구로 천도하였고 거불단천황을 끝으로 나라가 그치었네.
*신시 배달국 청구 청구국: 도읍지를 나라 이름으로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그래서 시조 거불한천황이 신시에 도읍할 때는 신시국으로 14대 치우천황이 청구로 천도한 후로는 청구국 이라고도 불러졌다. 靑丘(청구)는 지금의 중원의 회대근방으로 중화의 핵심지이다.
*태호복희: 복희씨는 백두산에서 삼신님께 천제를 올린 후 천하天河에서 용마의 등에 그려진 상을 보고 하도를 그려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수의 체계를 세웠다. 이 하도에서 팔괘가 나오고, 팔괘에서 주역의 64괘 음양론이 나왔다. 복희씨는 또한 천지의 음과 양을 3수 원리로 변화시켜 건乾☰ 태兌☱ 리離☲ 진震☳ 손巽☴ 감坎☵ 간艮☶ 곤坤☷ 팔괘를 그어 주역의 기초를 닦았다. 이로써 인간이 우주의 시공간의 변화 법칙을 체계적으로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복희씨는 그물을 만들어 물고기 잡는 법을 알아내고, 야생 동물을 잡아 제물로 삼기도 하였다. 일부일처의 혼인제도를 정하고, 구침(치료목적의 아홉 종류의 침)과 금슬琴瑟(거문고 비파)을 만들었다. 풍산風山에서 살았기에 풍風을 성씨로 삼은 인류 성씨의 원조이다. 복희씨는 한마디로 동양철학의 아버지요 인류 문명의 창시자이다. 중국에서는 태호복희씨를 인류 문명의 첫 조상으로 받들고 있으나 우리 역사는 배달국의 6세 다의발천황으로 기록하고 있으며 하도를 알아낸 분으로 추앙하고 있다.
*하도: 고대 중국에 삼황이 있다하여 말하는 것은 복희氏(伏羲氏), 신농씨(神農氏), 황제씨(黃帝氏)이다. 이들은 각각 한가지씩의 기술을 가지고 하늘에서 하강(下降)하였다는데 복희씨는 목축(牧畜:축산)하는 기술을 가졌었고 신농씨(神農氏)는 농사짓는 기술을 가졌으며 황제씨(黃帝氏)는 불을 지피우는 기술을 가졌다 했다. 그중 최초의 제왕인 복희씨가 송화강 가에서 올라온 용마(龍馬)의 배꼽에서 얻은 문자로 선천수(先天數)인 하도(河圖)를 만들었으나 그후 주(周)나라의 문왕(文王)은 음양(陰陽)과 천인지(天人地)의 이치에 부적합하다 하여 다시 락수(洛水)에서 거북의 등에 있든 문자를 얻어 락서(洛書)를 만들었으니 곧 후천수(後天數)이니 이것을 합하여 하도락서(河圖洛書)라 한다. 그러나 우리의 고대역사에 태호복희는 배달국의 6대천황이라 확실하게 기록하고 있으니 사마천의 잡서는 역사왜곡의 본보기라 할 것이다.
그리고 지나간 김에 더 밝히고 싶은 것은 문왕과 그의 아들 주공이 효사(爻辭)와 괘사(卦辭)를 만들었다. 그리고 춘추시대의 공자는 그 문헌을 아름답게 정리하고 찬양한 글로서 해설을 달았으니 그것이 곧 십익(十翼)이다. 그러나 이 십익도 공자 혼자만이 다 만든 것이 아니라 공자왈(孔子曰)이라는 뜻과 그냥 자왈(子曰)이라는 표현으로 봐서 증자나 맹자 같은 후학들이 그를 추모한 나머지 이러한 뜻을 붙여 오랜 세월동안 역경(易經)을 다듬어 나왔으리라 생각한다. 원래 이 역경(易經)은 주(周)나라 보다 먼저 하나라 때에 생긴 하역(夏易) 즉, 연산역(蓮山易) 39권과 은(殷)나라 때에 만들어진 은역(殷易)즉 귀장역(歸藏易) 44권이 있었는데 주역(周易) 48권이 나오자마자 이 책들이 완전 유실되고 또다시 지금에 이르러서는 주역도 몽땅 유실되고 점술서 한권만이 유일하게 전해오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기억할 것은 이 모든 역학의 기초가 하도에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배달국 부마에서 왕으로
배달국 단웅과 웅녀 사이에 신묘년 5.2일 인시 단목수하에 아기가 태어났다.
아기는 성장하여 부마가 되고 덕이 있어 14세 갑진년 대읍비왕이 되었다네.
무진년 제요도당 때 국토가 단국에서 아사달까지 확장되어 천하대국 되었네.
하여 천자로 우뚝 서니 9한이 하나로 통일되고 교화가 천하만방에 떨쳤다네.
대읍비왕 24년 쥬신 제위 93년에 130세를 향수하고 삼신 중 일신 되셨네.
*檀木樹下(단목수하): 밝달나무 아래에서 단군왕검이 태어났다.
*대읍 비왕: 왕검의 아버지는 단웅이시고 어머니는 곰씨족의 왕녀인데 신묘년(BC2370년)5월2일 인시에 박달나무아래에서 태어났다. 신인의 덕이 있어 주변의 모든 사람들이 겁내어 복종했다. 14세 되던 갑진년에 곰씨족의 왕(외할아버지)은 그가 신성하다 함을 듣고 그로써 비왕을 삼고 대읍의 다스림을 대행하도록 하였다. 이것이 대읍비왕이 된 첫 기록으로 무진년(BC2333년) 제요도당(요임금)때에 그 나라가 넓어져서 단국으로부터 아사달의 단목 터에 까지 이르니 온 나라 사람들이 받들어 천자로 모시게 되었다. 이에 구환이 모두 뭉쳐서 하나로 되었고 신과 같은 교화가 멀리 미치게 되었다. 이를 단군왕검이라 하니 비왕의 자리에 있기를 24년이었고 제위에 있기를 93년이었으며130세까지 사시다가 돌아가시니 삼신 중의 한분인 한검이 되셨다. 참고로 삼신은 환인 환웅 환검 이시다. 그러나 본서에서는 이미 언급한바 있지만 桓을 한으로 읽어 한인 한웅 한검으로 표시한다. 그리고 대읍이란 신시의 다른 말임을 명기한다.
단군왕검의 쥬신국
왕검은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어진 마음을 가져 만인이 우러러 보았네.
한국 개천 1565년 상월 3일에 왕검이 쥬신국을 선포하고 제위에 올랐다네.
오가의 우두머리로 800인을 거느리고 신단수에서 삼신님께 제사를 드렸네.
능히 하늘의 뜻에 따라 다스리니 9한의 백성이 천제의 화신으로 알았다네.
단군왕검은 신시의 옛 규정을 찾고 아사달에 궁궐을 지어 도읍을 삼았다네.
*天帝(천제)의 化神(화신): 단군이 삼신 중의 인신에 해당됨을 말함.
*쥬신: 조선의 옛 발음. 이하 고조선을 쥬신으로 쓴다. 이는 숙신을 말하며 만주원류고에서는 숙신의 옛 이름은 주신(珠申)이라고도 쓰고 있다.
*九桓(구한): 구한이 모두 삼신을 한 뿌리의 조상으로 삼고 소도(蘇塗)를 관리하고, 관경(管境)을 통치하며, 책화(責禍)를 규율하는 것 등을 여러 무리와 더불어 의논하여 화백(和白)을 이루었다. 아울러 지혜와 삶을 나란히 닦으면서 온전함을 이루었다. 이 때 이후로 구한을이 모두 다 삼한(三韓)의 통솔을 받고 나라의 우두머리인 천제의 아들을 단군이라 불렀다. 여기서 ‘소도’는 교육이고, ‘관경’은 행정과 국방이며, ‘책화’는 사법을 말한다. 국가경영체계를 운영하는 방식은 부족의 지도자들이 모여 민주적으로 논의하여 의견을 수렴하는 화백으로 하였다. ‘화백회의’는 다수의견이 소수의견을 강박하는 ‘다수결’이 아니고, 자유로운 토론과정으로 소수파가 다수의견에 공감하도록 설득하는 ‘공감정치’ 제도이며 훗날 원효대사가 주장한 화쟁사상의 모체가 아닌가 싶다. 또한 쥬신을 구려(九黎)라고도 했는데 이는 구한과 맥을 같이 하는 말이며 쥬신의 여러 민족을 총칭하는 오래된 명칭이다. 하니 구려 또한 구한(九桓)이고 배달국의 여러 민족을 총칭하는 표현방식이다.
한웅이 왕검에게 양위하고
배달국 신시시대 한웅 거발한이 BC3898년 나라를 세워서
아들인 거불리에게 물려주니 대대로 우야고. 모사라. 태우의. 다의발. 거련. 안부련. 양운. 갈고(독로한). 거야발. 주무신. 사와라. 자오지(치우). 치액특. 축다리. 혁다세. 거불단 한웅으로 그침 없이 물려주어 1565년간이었고BC2333년 불세출의 신인 왕검이 나타나자 나라를 물려주니 쥬신국이라네.
*거불단: 거발한 한웅이 배달국을 세운지 1565년 만에 천하의 제일성인 왕검이 나타나므로 居氏의 나라 배달국을 왕검에게 선위하였다. 이때부터 삼위테베의 신시시대가 끝을 맺었다고 본다.
*神人王儉(신인왕검): 신이시고 인간인 단군왕검 지상에 나타난 첫 성인.
*쥬신: 쥬신의 이두식 표기는 조선, 숙신, 주리진, 주신 등이다. 따라서 숙신, 누, 물길, 말갈, 여진, 만주 등의 민족이름은 모두 쥬신족과 동일한 배달민족이고 이를 동이족이라고 통칭한다. 조선의 원래 우리 발음은 '쥬신'이며 그 뜻은 우리 배달민족이 사는 온 누리를 뜻한다. 숙신도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써 발음은 여전히 쥬신이며 중국인은 '쑤우신'이라 발음한다. 여진은 쥬신의 이두식 표기로 발음은 쥬리진이며 중국인은 '뉴우신'이라 발음한다. 이들 여러 민족이름은 시대의 변천에 따라 조금씩 달라지지만 다 같은 쥬신족이며 자랑스런 배달겨레이고 동이족이다. 동이족이란 중국인들은 예부터 우리 민족을 동이족이라 불렀다. 중국 시전의 동이는 '떳떳하다','당당하다'인데 사기에는 '상하다',죽이다'의 뜻으로 쓰인데서 중화족의 동이족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알 수 있는데 우리는 스스로를 오랑캐로 알고 있는 등 역사에 대한 열등감이 만연한 것이 오늘날 우리의 역사의식이다. 동이란 '동쪽의 큰 활을 쓰는 대인'을 의미할 뿐이다.
東方之人夷大從弓이라 하였으며 그 뜻은 동방사람들은 대인으로써 활을 따른다. 고 했고 사기에는 은나라는 동이족이고, 주나라는 중화족이다. "동이는 대륙의 동쪽에, 화하족은 서쪽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필자는 앞으로 조선을 쥬심으로 통일하여 사용할 것이다.
왕검의 쥬신국 건국
왕검은 불함산 아사달에서 9한 백성의 추대로 쥬신국을 세웠다.
배달의 법도인 국유현묘득도를 터득한 왕검은 팽우에게 개간을
성조에게 건축을 고시에게 농사를 신지에게 글자를 창제하게 하고
기성에게는 의약제조를 나을로 호적정리를 희에게 점을 치고 우는 군대를
관장하게 하여 천하에 없는 부국강병의 나라를 이룩하고 다스렸다네.
*왕검: 쥬신의 시조를 말하며 일반적으로 정치적 군장을 뜻하는 ‘임금’으로 풀이한다. 단군은 제사장의 의미로 무당 또는 하늘을 뜻하는 몽고어 ‘텡그리(tengri)’ 옹군과 서로 통한다. 왕검은 정치장의 의미로서 결국 단군왕검은 제사장과 정치장의 기능을 겸한 제정일치적 사회의 우두머리로 배달국이 최고 통치자를 천황이라 하였으니 그와 유사한 성격의 명칭임에 틀림없다.
그는 지극한 신의 덕과 성인의 인을 겸하셨다. 마침내 능히 조칙을 받들어 하늘의 뜻을 이어받아 건국한 뜻이 지극히 높고 넓고 장렬하였다. 구한의 백성들이 모두 기뻐하며 정성으로 복종하였고 천제의 화신이라 추앙하여 그를 임금으로 삼았다. 이 분이 단군왕검이시다. 신시의 옛 법을 복원하고 아사달에 도읍을 건설하고 개국하여 쥬신이라 이름 하셨다. 단군은 두 손을 단정히 모으고 작위 없이도 세상을 다스리셨다. 깊고 오묘한 도를 터득하여 여러 생령들을 이어 교화하였다. 팽우에게 명하여 땅을 개간시키고 성조에게는 궁실을 짓게 하고 고시에게는 곡식 심는 일을 주관케 하고 신지에게는 글자를 만들게 하고 기성에게는 의료와 약품을 베풀게 하고 나을에게는 호적을 관장케 하고 희에게는 점치는 일을 맡게 하고 우에게는 군대를 훈련시키게 하였다. 비서갑의 하백녀를 거두어 왕후로 삼고 누에를 치게 하니 인정 넘치는 정치가 빛나고 흡족하여 사방의 나라에 표상이 되었다.
*불함산 아사달: 신인이신 왕검께서 불함산 박달나무의 터전에 내려오셨다. 불함산(不咸山)은 하르빈 남쪽의 완달산(完達山)이다. 아사달(阿斯達)은 고대어로 아사는 새 것을 의미하고 달은 산 또는 땅이니 아사달은 새 땅 새로운 동산이라는 뜻이며 불함산 일대를 말한다.
▸玄妙得道 : 최치원의 鸞郞碑(난랑비)서문에서 말하는⌜國有 玄妙之道 實乃 包含三敎⌟우리나라 고유의 도(종교)인 선불유(仙·佛·儒) 3교를 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