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0년대 중반, 미국의 벨연구소에서는 진공관을 대체하는 새로운 소자를 개발하기 위한 프로젝트 팀이 구성됐다. 비싼 인건비가 들어가는 여성 교환원 대신 도입한 자동식 진공관 교환기가 폭증하는 통화량을 견디지 못하고 고장이 너무 잦았기 때문이다.
이 프로젝트 팀의 리더는 1936년부터 벨연구소에 근무한 물리학자 월리엄 쇼클리였다. 그가 새로운 소자의 구조를 제안하면 실험 물리의 대가인 월터 브래튼이 소자를 제작하는 식으로 연구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처럼 제작된 소자들은 제대로 동작하지 않았으며, 쇼클리와 브래튼은 그 이유를 찾지 못해 고민에 빠져 있었다. 이를 해결한 과학자는 바로 벨연구소에 새로 들어온 존 바딘이었다.
벨연구소가 트랜지스터 개발에 성공했다고 공개 발표할 당시의 홍보사진. 왼쪽부터 존 바딘, 월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 ⓒ public domain
쇼클리의 프로젝트 팀에 합류한 바딘은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소자가 작동하지 않은 이유가 고체 표면에 존재하는 ‘계면 상태’로 인해 전계가 내부로 침투하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걸 밝혀냈다. 그의 원인 분석으로 프로젝트팀은 새로운 소자를 성공적으로 개발할 수 있었다.
존 바딘은 위스콘신대학이 소재한 매디슨에서 1908년 5월 23일에 태어났다. 그가 이곳에서 출생한 이유는 부친이 위스콘신대학 의과대학의 초대학장이었기 때문이다. 해부학 교수 출신 아버지와 교육자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바딘은 어릴 때부터 수학에 재능을 보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바로 중학교로 월반할 만큼 천재적인 면모를 보인 그는 13세 때 고등학교 과정을 모두 마쳤다. 이후 매디슨 시내의 다른 고등학교에서 2년간 더 공부했던 바딘은 15세 때 위스콘신대학에 입학에 전기공학을 전공했다.
트랜지스터 발명으로 1956년 물리학상 수상
석유 유정 발굴에 전기공학을 응용하는 내용의 석사 논문을 제출한 그는 1929년 대형 석유회사인 걸프오일회사의 연구소에 취직했다. 하지만 그는 공부를 더하기 위해 프린스턴대학교 대학원에 진학해 고체물리에 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하버드대학에서 3년간 금속의 전기전도에 대한 연구를 하다가 미네소타대학 물리학과 교수로 부임했다. 그러던 중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미국 국방성의 소환으로 해군연구소에서 근무하다가 1945년에 전쟁이 끝나자 벨연구소로 영입되어 쇼클리의 프로젝트 팀에 합류한 것이다.
1947년 12월 23일, 벨연구소의 쇼클리 팀은 게르마늄과 금박지 조각, 삼각형 모양의 플라스틱 장치, 서류정리용 클립 등으로 만든 물건에 대고 마이크로 말을 하는 실험을 진행했다. 그러자 입력된 소리보다 100배나 더 큰 소리가 헤드셋 속에서 울려 퍼졌다. 그토록 소망하던 새로운 소자의 개발에 성공하는 장면이었다.
벨연구소는 내부 투표까지 진행한 끝에 이 획기적인 소자에 트랜지스터라는 이름을 붙였다. 전도성(Transfer)과 배리스터(Varistor ; 반도체저항소자)의 합성어였다. 즉, 전도성을 가지면서도 저항의 역할을 하는 소자라는 의미였다.
부피가 크고 발열이 심하며 쉽게 깨지는 단점을 지닌 진공관의 대체 소자로 개발된 트랜지스터는 오직 차가운 고체물질로만 이뤄져 진공상태나 필라멘트, 그리고 유리관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라디오에 사용되면서 주목받기 시작한 트랜지스터는 이후 컴퓨터, TV, 자동차, 휴대폰, 디지털카메라, MP3, 항공기, 위성 등에 사용되면서 전자산업혁명을 이끌었다. 트랜지스터가 아날로그 세상을 디지털 세상으로 변화시킨 셈이다. 이 업적으로 존 바딘과 월리엄 쇼클리, 월터 브래튼은 1956년 노벨 물리학상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존 바딘은 트랜지스터를 개발한 후 쇼클리와 불편한 관계가 되어 일리노이대학의 물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쇼클리는 카리스마가 있는 리더형 천재였으나 괴팍하고 독선적이어서 주위 사람들과의 관계가 그리 좋지 못했다.
일리노이대학으로 옮겨간 후 존 바딘은 그동안 관심을 가졌던 초전도현상에 대한 연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초전도현상은 1911년 네덜란드의 물리학자 카멜린 오네스가 절대온도 4.2K(영하 268.95℃)로 냉각된 수은에서 처음 발견했다.
유일한 노벨 물리학상 2회 수상자
초전도현상은 특정 물질이 일정 온도에서 전기저항이 거의 0에 가까워져 전류를 무제한 흘려보내는 현상을 말하며. 이런 특징을 가진 물질을 초전도체라고 한다. 그러나 아무도 초전도현상이 왜 일어나는지는 규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존 바딘은 수학 박사인 리언 쿠퍼와 대학원 박사과정 학생인 존 로버트 슈리퍼와 함께 초전도현상의 이론을 규명하는 작업에 도전했다. 그리고 마침내 일리노이대학에 부임한 지 6년 만인 1957년에 ‘초전도성 이론’이라는 논문을 발표함으로써 초전도현상의 설명에 성공했다.
그에 의하면, 초전도는 두 개의 전자가 양이온의 원자들이 단체로 요동하는 포논과 쌍을 이뤄 전류를 운반할 때 일어난다. 이 이론은 바딘과 쿠퍼, 슈리퍼의 첫 알파벳을 따서 BCS 이론으로 불린다.
미시세계에 양자역학을 적용한 BCS 이론은 ‘응집물질물리학의 경우 BCS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는 말이 나돌 만큼 기념비적인 업적으로 알려져 있다. 초전도체는 까다로운 조건 때문에 실용화에 어려움이 있지만, 어쨌든 그들의 연구 성과 덕분에 자기부상열차, MRI, 초고집적회로, 레이더 등 우리 생활 곳곳에 초전도체가 사용되고 있다.
존 바딘은 이 연구 업적으로 쿠퍼, 슈리퍼와 함께 1972년에 노벨 물리학상을 또 수상했다. 이때까지 과학자 중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이는 마리 퀴리(1903년 물리학상, 1911년 화학상)와 라이너스 폴링(1954년 화학상, 1962년 평화상), 프레더릭 생어(1958년 화학상, 1980년 화학상)과 존 바딘 등 총 4명이다.
그중 가장 어려운 분야라는 노벨 물리학상을 2회 수상한 이는 존 바딘이 유일하며, 동일 분야에서 노벨상을 2회 수상한 최초의 인물이라는 기록 또한 그가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