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속의 한국사] 을사늑약
日 "한국 외교권 넘겨라"… 총칼로 위협, 억지로 맺은 조약
입력 : 2022.11.24 03:30 조선일보
을사늑약
▲ ①지난 21일 서울 중구 정동길의 덕수궁 중명전 모습. 1905년 11월 17일 이곳에서 강제로 을사늑약이 맺어졌어요. ②고종은 조약 체결에 찬성 의사를 밝히지 않았어요. ③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④을사늑약 문서. ⑤왼쪽부터 당시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으로 이들을 을사오적(乙巳五賊)이라고 불러요. /박상훈 기자·위키피디아
최근 치러진 2023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한국사 과목에 이런 문제가 나왔어요. '이 조약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은?' 지문을 보죠. '민영환이 조약 체결에 항거하여 자결하였으니, 신들은 매우 놀랍고 슬펐습니다. (…) 폐하께서는 속히 칙명을 내려 박제순·이지용·이완용·이근택·권중현 오적을 모두 처단하소서.' 민영환을 자결케 했고 박제순 등 '오적'이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이 조약은 1905년의 을사늑약(을사조약)을 말하는 것입니다. '폐하'는 1897년 대한제국 수립으로 황제가 된 고종 임금을 말하는 것이죠. 따라서 답은 3번 '헤이그 특사 파견의 계기가 되었다'가 맞습니다. 그렇다면 을사늑약은 어떤 조약이었을까요?
러일전쟁과 열강의 '日 한국 침략' 묵인
1894년의 청일전쟁을 계기로 일본군은 조선을 침략해 경복궁을 점령했고,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고종 임금은 1896년 일본의 압박을 피하기 위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거처를 옮기는 아관파천을 단행했고, 1897년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그러나 대한제국은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었고, 동아시아의 이권을 놓고 경쟁을 벌이던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1904년 2월 8일 러일전쟁이 벌어졌습니다.
전쟁 발발 직후인 2월 23일 일본은 대한제국을 협박해 '한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했습니다. '갑진늑약'으로도 불리는 이 의정서는 4조에서 '일본은 유사시 한국 내 군사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용할 수 있다'고 했고, 이것은 일본이 독도에 군사 시설을 설치해 침탈하는 계기가 됩니다.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해 일본인 '재정 고문'을 둬 대한제국의 재정 관련 실권을 장악했습니다.
러일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면서 일본은 한국의 국권을 빼앗기 위해 열강의 승인을 받으려는 책략에 집중하게 됩니다. 1905년 7월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맺었고, 8월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영국의 양해도 받았습니다. 9월 5일 러시아와의 강화 조약인 포츠머스 조약에선 '한국 정부의 동의만 받으면 주권을 빼앗을 수 있다'는 보장을 받았죠. 제국주의 열강들은 자신의 이권을 지키려는 목적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긴 셈이었습니다.
총칼과 대포로 협박해 외교권 빼앗아
일본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부터 이어진 한반도 침략 계획을 마무리할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본격적으로 발톱을 드러냈습니다. 1905년 11월 9일 일본 추밀원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서울에 도착해 고종을 알현하고 '동양평화를 위해 일본의 뜻을 따르라'고 협박했습니다. 같은 달 15일에는 다시 고종을 찾아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일본이 행사한다'는 협약안을 내밀었습니다. 외교권을 빼앗는다는 것은 사실상 주권을 침탈한다는 것에 버금가는 일이었습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조정에서 조약에 찬성한다는 말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1905년 11월 17일 아침,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2만5000여 명이 경운궁(지금의 덕수궁) 주변으로 배치돼 강압적인 분위기를 만들었습니다. 무장한 일본 헌병과 경찰이 궁궐 안까지 거리낌 없이 드나들며 살기를 내뿜었습니다. 이날 오후 3시 경운궁에서 조약 체결 여부를 논의하기 위한 어전회의(임금 앞에서 중신들이 모여 국가 대사를 의논하던 회의)가 열렸습니다. 고종은 인후염이 있다며 자리를 피했습니다.
궁궐 바깥의 일본군이 대포를 경운궁으로 조준했고, 오후 8시엔 이토 히로부미가 일본군 병력을 거느리고 회의장에 나타나 대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조약 찬성 여부를 물었습니다. 참정대신 한규설 등은 반대했으나 하나둘씩 찬성하는 대신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그 다섯 명의 대신이 외부대신 박제순, 내부대신 이지용, 학부대신 이완용, 군부대신 이근택, 농상공부대신 권중현입니다. 이들에겐 을사오적(乙巳五賊)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을사년(1905)에 나라를 팔아먹은 다섯 역적'이란 뜻이죠. 고종이 조약 체결에 찬성 의사를 밝히지 않았기 때문에 조약 문서에는 고종의 국새 대신 외부대신 박제순의 도장만 찍혔습니다. 일각에서는 "고종이 당시 군주로서 목숨을 걸고 조약 체결을 막았어야 마땅했다"고 보기도 합니다. 조약이 체결된 장소는 지금은 덕수궁 담장 바깥에 있는 중명전이었습니다.
거대한 독립운동의 불길이 시작되다
이렇게 강제로 맺어진 '제2차 한일협약'을 우리는 지금 을사늑약이라고 부릅니다. 늑약(勒約)이란 '억지로 맺은 조약'이란 뜻입니다. 그 내용을 보면 2조에서 "한국 정부는 이후부터 일본국 정부의 중개를 거치지 않고 국제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하지 않기로 한다"고 했고, 3조에선 일본인 통감이 경성(서울)에 주재한다고 했습니다. 을사늑약은 일본이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빼앗는 동시에, 통감부 설치로 한국의 통치를 감독하는 길을 열었습니다. 사실상 나라가 망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이후 외국에 있던 한국의 외교 기관은 모두 폐지됐으며 외교관들은 철수했습니다. 1906년 2월 서울에 통감부가 설치됐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했습니다. 시종무관 민영환을 비롯한 많은 지사들이 자결했고, 나라를 구하려는 의병운동과 구국 계몽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됐습니다. 이때부터 이미 거대하고도 지난(至難)한 독립운동의 불길이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을사늑약과 경술국치]
1905년의 을사늑약으로부터 일제가 한국의 주권을 완전히 빼앗은 1910년의 경술국치(한일강제병합)까지는 5년이라는 시간이 더 걸렸습니다. 고종의 외교를 통한 국권 회복 노력과 의병 항쟁 때문이라는 것이 국내 학계의 통설이었지만, 최근엔 '만주를 놓고 벌어진 일본·러시아·미국의 상호 견제 때문'이라는 분석이 나왔습니다. 일본이 섣불리 한국을 병합했다가는 만주에서 불리해질 수 있었다는 것이죠.
러일전쟁 이후 만주를 관통하는 철도를 놓고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 갈등이 일어났습니다. 1907년의 1차 러일협약으로 러시아와 일본은 만주를 남북으로 나눠 서로 이권을 인정하는 데 합의했습니다. 미국은 1909년 '만주 철도 중립화안'을 내걸고 만주 진출 의사를 밝혔으나, 1910년 7월 2차 러·일 협약으로 러시아가 북만주의 이권을 지키고 일본의 한국 병합을 용인하기로 결정하자 뜻을 접었습니다. 대한제국이 세계 지도에서 사라진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였습니다.
기획·구성=조유미 기자 유석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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