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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맑은 혼-꼭두의 시학’
--이주남의 시세계
반경환 애지 주간, 철학예술가
이주남 시인은 대구에서 태어났고, 경북여고와 이화여대 영문과를 졸업했다. 198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고, {햇빛에 말걸기}, {오하이오에서 며칠을) 등의 시집을 출간했으며, ‘제2회 월간문학 동리상’과 ‘제32회 한국현대시인상’, ‘소월문학상 본상’ 등을 수상했다. {아픈 만큼 싹튼 봄빛}은 그의 네 번째 시집이며, {아픈 만큼 싹튼 봄빛}은 영원히 젊은 노시인의 ‘자연철학’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자연철학은 노자의 ‘무위사상’과 만나고, 이 ‘무위사상’은 만악의 근원인 욕망을 버림으로서 인간의 철학으로 이어진다. 인간의 철학은 너와 나의 만남, 즉 우리 모두의 만남으로 이어지고, 우리 모두의 만남은 이 세상의 삶의 찬가로 울려 퍼진다.
인사동 가는 길은 사람도 가을빛.
벽돌담 뒤덮은 담쟁이꼴도 온몸그림 그꽃그림 수놓인 수틀이 되어본다. 내 가을 네 편되어 하늘과 하나된다. 뉘 저안 있는 듯해 여린 눈빛 불도 켠다. 말없이 단풍잎들 제길날기 물었다. ‘이제 넌 어디로 가 무엇을 하겠니?’ ‘나는야, 일체 자연 無爲에 맡겨졌도다.’
이젠야 나도 꼭두삶을 맑은혼에 맡길 거다.
---[낙엽조차 아름다운 가을] 전문
인사동 가는 길은 사람도 가을빛이고, 벽돌담 뒤덮은 담쟁이꼴도 온몸그림의 수틀같다. 나의 가을은 너의 하늘과도 하나가 되고, 네가 담안에 있는 듯해 여린 눈빛도 불을 켠다. “이제 넌 어디로 가 무엇을 하겠니?”라는 물음에는 “나는야, 일체 자연 無爲에 맡겨졌도다”라고 대답한다. 한 뿌리에서 태어나 하나의 몸으로 살아왔던 단풍잎들조차도 자기 스스로 제 갈길로 떠나가는 것이 자연의 이치이듯이, 이제는 “나도 꼭두삶을 맑은 혼에 맡”긴 것이다. 이때의 꼭두는 허깨비, 또는 이 세상의 일반인들을 뜻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 어떤 것의 정수리나 꼭대기를 뜻한다는 점에서 노년에 이른 시인의 삶을 뜻할 수도 있다. 아무튼, 어쨌든, 시인은 자기 자신의 삶을 맑은 혼에 맡긴 것이고, 이 맑은 혼은 ‘무위자연의 진수’에 해당된다고 할 수가 있다. 단풍잎은 아름답고, 아름다운 것은 맑은 혼이고, 이 맑은 혼으로 이주남 시인은 사람과 사람이 모여사는 인사동으로 간다.
이주남 시인의 맑은 혼은 무위자연의 진수이며, ‘꼭두의 시학’이고, 그 물질적 토대는 자연철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물은 물이고, 산은 산이다. 담쟁이는 담쟁이이고, 시인은 시인이다. 모두가 제각각 자기 스스로의 삶을 살면서도 이 ‘하나’들이 모여서 ‘우리’를 이루고,
나 모른 사이에 내 시계 너무 낡았다.
늦처지는 시간은 내 몸살까지 더디게 하고, 그림자 그림자까지 슬몃슬몃 미끄러진다. 뒤뚱거리는 걸음걸이 삐걱거리는 공기까지, 하늘로 바다로 파랗게 사라진다. 해돋이 해시계를 눈으로 밥준다. 내 꿈 내 사랑 함께 성숙해 온 풀꽃들. 감춰온 샛바람틈엔 수소불빛 들끊어 단풍져 들뜬 얼굴 조금씩 삭아간다. 무서워라, 불장난 긴논밭길 목걸이하고 숨졸라 말아쥔 너는 또한 꽃사슴. 살갗을 파고들어가 피를 보는 달빛이다. 기다란 꽃뱀허리 떨칠 수도 태울 수도, 그렇다, 물러가지도 타지도 않을 진한 꽃. 나는 내 꽃시계와 함께 타는 풀무통, 여름내 타는 불길 가을꽃물 쏟아 놓고,
푸성귀 돋는 날 아침 아픈 만큼 싹튼 봄빛.
이라는, [아픈 만큼 싹튼 봄빛]으로 이 세상을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 나간다.
나 모르는 사이에 내 시계가 너무 낡았고, 늦처지는 시간은 내 몸살까지 더디게 한다. 그림자의 그림자까지도 슬몃슬몃 미끄러지고, “뒤뚱거리는 걸음걸이”와 “삐걱거리는 공기까지, 하늘로 바다로 파랗게 사라진다.” 하지만, 그러나 해돋이 해시계를 눈으로 밥 주고, “내 꿈 내 사랑 함께 성숙해 온 풀꽃들”이 “푸성귀 돋는 날 아침 아픈 만큼 싹튼 봄빛”으로 피어난다. 단풍은 왜 아름답게 물드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맑은 혼은 왜 맑은 혼으로 피어나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기 때문이다. 내려놓음은 아픔이며, 욕망의 비움이고, 욕망의 비움은 사랑이며, 사회적 실천인 것이다. 욕망의 비움은 자기 성찰이고 반성이며, 반성은 새로운 인간으로의 탄생이다.
꿈속에 아버지를 만난 날 복권샀다.
눈내린 아침나절 지나다 복권샀다. ‘영혼의 화가’라는 고흐 복권 판매소. 한마디 시행같은 그림을 그려봤다. 복권사러 줄서있는 등굽은 할아빠들. 하는 일 사는 수준 알 수는 없겠지만, 삶지탱 위해서는 발버둥 버팅갯길, 사는 길 환히 보이는 그저런 사람있다. 무리져 서성이는 저사람들 어깨에도 무건 짐 그대론가 찌부러진 느낌이다.
맨첨엔 복권쪽지 짐작보다 신나는 일 더 크게 깊은 뜻이 숨었다는 새싹의 꿈, 오늘은 ‘당첨될까’ 기대를 갖는 이들, 반면엔 복권 당첨 관심도 없는 이들. 품팔잇꾼 눈앞에서 배추잎을 볼 때마다, 포돗잎 대나무잎 사임당을 볼 때마다, 월셋집 옥탑 입장 생각지도 않고서는, 눈앞에 뵈는 것만 봐서는 안 되겠다. 고흐를 떠올리며 복권을 살 때 느낀, 있는 것과 없는 것 사이엔 보이잖은 꿈, 오히려 뚫리는 길 선명하게 그려진다.
어쩌면 시를 더 잘 쓸까, 샀던 복권 찢었다.
----[샀던 복권 찢었다] 전문
셰익스피어의 [존왕]에는 “이득利得아 네가 내 상전이다”이라는 대사가 있다.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친구도 없고, 부모형제도 없다. 우군과 동맹군도 없고, 왕과 신하 사이의 위계질서도 없다. 돈만 있으면 허리를 굽힐 일도 없고, 어렵고 힘든 노동을 할 필요도 없다. 먹고 사는 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고, 그 모든 것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도 있고, 약속을 파기하거나 배신의 뒤통수를 칠 수도 있다. 돈 있고 사람이 있지, 사람 있고 돈 있는 것이 아니다. 돈은 명예이고, 권력이고, 그 모든 것이다. 꿈속에서 아버지를 만나고 눈 내린 아침나절, 시인은 복권을 산다. 복권을 사러가다가 교통사고로 죽을 확률이 더 높지, 복권에 당첨될 확률은 거의 없다고 한다. ‘영혼의 화가’라는 고흐의 복권판매소, 그토록 어렵고 가난하게 살며 오직 그림만을 그리다가 비명횡사한 고흐의 이름을 붙인 복권판매소라니, 이것은 세기말적인 추태이자 자본주의 사회의 광기라고 할 수가 있다. 아무튼 복권은 일확천금의 상징이고, 시인 역시도 이 일확천금의 행운에 눈이 어두워 복권을 샀지만, 그러나 복권 사러 줄서있는 등굽은 할아빠들과 삶을 지탱하기 위해서 발버둥치는 사람들과, 그 반대방향에서, 복권 당첨에는 관심조차도 잃어버린 채, “포돗잎 대나무잎 사임당”의 지폐를 위해서 품팔이 하는 사람들을 생각하며 그 복권을 찢어버린다. 돈 많은 부자들은 절대로 복권을 사지 않지만, 돈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 복권을 산다. 복권이란 돈 없는 사람들의 호주머니를 털어서 자본의 배를 살찌우는 사기행위이며, 만악의 근원인 탐욕의 진수라고 할 수가 있다. 이러한 자본의 법칙, 즉, 이 탐욕의 진수를 알아차리고 시인은 자기 자신을 반성하며, “어쩌면 시를 더 잘 쓸까”라고 그 행운의 복권을 찢어버렸던 것이다.
베란더 꽃들은야 꿈이다, 아니야. 금이다, 은이다, 흰빛깔 아픔이다.
난 몰라, 정수리 와박히는
쫀득한 힘못이다.
---[힘못] 전문
층층꽃 겹접시꽃
반짝향 달빛이랑
새하얀 동정깃에
떨어진 초록눈물.
어머니, 나지막이 불러보면
은하물결 반디불이.
--[은하 別曲] 전문
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
친척집 돌며돌며 ‘눈칫밥’만 먹고자라,
눈물로 삼킨 눈칫밥
대문호의 양념밥.
--[양념밥-톨스토이의 경우] 전문
시는 [누렁이무덤]의 아버지이고, 시는 [은하別曲]의 어머니이고, 시는 “난 몰라, 정수리 와 박히는/ 쫀득한” [힘못]이다. 딸아이 등록금 내느라 소 팔기 전날 밤 숨죽여 울던 아버지, 멍에를 메워서 평생을 쟁기와 써레를 끌고 다녔던 아버지, 절룩발이 주인을 태웠던 소 같았던 아버지, 이 아버지는 “바늘꽃/ 우담바라꽃”([흑백사진틀 속의 아버지])이 되었고, 우리들의 어머니는 “새하얀 동정깃에/ 떨어진 초록눈물”, 즉, “은하물결의 반디불”이 되었고, 시인은 “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 친척집 돌며돌며 눈칫밥”을 먹고 자랐지만, 그 눈칫밥을 양념밥으로 승화시킨 톨스토이같은 시인이 되었다.
시는 ‘맑은 혼’으로 쓰는 ‘꼭두의 시학’이며, 이 세상에 대한 삶의 찬가이다. 이주남 시인은 그토록 어렵고 힘든 삶을 살면서도 “베란더 꽃들은야 꿈이다, 아니야. 금이다, 은이다, 흰빛깔 아픔이다”라는 [힘못]처럼 살았던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수많은 농노와 소작농들을 다 해방시키고 그들과 함께 살며 아름답고 거룩한 인문주의, 즉, ‘사랑의 철학’을 실천했던 톨스토이를 떠올리며, 앵초꽃 피운 아낙들([狂婦日記]), 일본군 위안부([우리들의 할머니에게]), [조선의 핏물역사],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시조인 단군([마리산 다녀오는 길])을 생각해본다.
머리끈 질끈매고 갱도를 찍는다.
새빨간 알몸으로 갱목 대신 버팅기며, 곡갱이 높이들고 땅굴벽을 꽂아댄다.
조만간 보일 듯 나올 듯 말 듯도 하고, 흰비단 검은 황금 짱짱 뽑아올릴 것
같다.
서말씩 너말씩 밭은 기침뱉으며
앵초꽃을 피었느니.
----[狂婦日記-狂夫가 아닌] 전문
몇 번을 볼 때마다 슬프디슬픈 역사갈피.
눈귀로 보고듣고 몸으로 겪은 불길, 위안부 부정하는 일본엔 이리도
분개한다.
‘경복궁’서 바라 본 인왕산은 아름답다. 이 나라 잘 지켜내 전해 줄 근력있다.
박물관 나설 때는야, 궂은비가 내린다.
샛바림 매서운 바람은 내 옷깃 파고들고··· 꽃다운 이승 영혼 달래며 발걸음을
옮긴다.
----[우리들의 할머니에게--역사 발물관의 ‘그곳에 나는 없었다’를 보고와서] 전문
가난의 문화는 없다. 가난은 생존만이 최고인 삶이며, 이 가난은 흉년이나 척박한 땅 이외에도 이민족의 침략으로부터 그 모든 것을 다 빼앗겨버린 역사적 사건 때문일 수도 있다. 일제 식민치하의 36년, 8.15 해방과 동족상잔의 남북전쟁, 이 외침과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리들의 어머니는 앵초꽃같은 광부의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새빨간 알몸으로 갱목 대신 버팅기며 곡갱이 높이 들고 땅굴벽을 팠다. 흰 비단과 검은 황금이 짱짱하게 쏟아져 나올 것도 같았지만, 그러나 “서말씩 너말씩 밭은 기침뱉으며” 홍자색의 앵초꽃을 피웠을 뿐이다. 앵초꽃은 일본군의 위안부이자 우리들의 어머니이기도 하고, [조선의 핏물역사]는 모든 우리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역사와도 정확하게 일치한다.
저남쪽 항구 도시 부산과는 상관없다. 그리운 국제 시장 무대로 깐 영화다.
이 영화 보기위해 느지막히 찾아갔다. 한창나이 철모르고 미니에 후레아코트
에, 옷자락 펄럭이며 쏘다녔던 젊은날.
맨몸으로 넘어와서 갖은 고생 이겨냈다. 고생찬 7‧80대 따라지들 한 마디씩,
본 중엔 볼만한 영화 추천하고 싶은 영화. 흥남 부두 철수 난장, 서독의 갱도
사고, 베트남 폭파 현장, 너무나도 사실적. 이산 가족 비비는 장면 언제봐도 가
슴 뭉클. 조선의 핏줄역사, 경험없는 새끼라도 볼만한 영화라서 두고두고 꺼내
볼 영화다. 여전히 흐린 내일 꿈꿀 수 있다는 건, 거저로 얻은 공짜는 절대로
아니로다.
지난 일 질겅질겅 되씹으며 돌아들 왔느니, 아무리 지름길일망정, 10리길도
첫걸음부터···.
----[조선의 핏물역사--영화 ‘국제 시장’을 보고나서] 전문
흥남 부두 철수 난장, 부산에서의 피난민의 생활과 서독의 광부, 서독에서의 갱도의 사고와 베트남 전쟁의 폭파현장 등. 한 마디로 우리들의 아버지와 할아버지도 3.8 따라지의 별 볼일 없는 신세를 면할 수가 없었던 것이며, 하지만, 그러나 그 앵초꽃 같은 삶을 꽃 피워왔던 것이다. 영화 국제시장도 그토록 험한 세월을 이겨낸 앵초꽃이고, 위안부 할머니들도, 우리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도, 그토록 험한 세월을 이겨낸 앵초꽃이다. 반성은 성찰이고, 성찰은 앵초꽃이고, 앵초꽃은 사랑의 꽃이다. ‘나’를 버리니까 ‘네’가 보이고, ‘네’가 보이니까 ‘우리’가 보인다. 민심과 국력을 결집시킬 수 있는 우리----. 이주남 시인은 ‘역사박물관’을 나서면서, “경복궁서 바라 본 인왕산은 아름답다. 이 나라 잘 지켜내 전해 줄 근력있다”며, “꽃다운 이승 영혼 달래며 발걸음을/ 옮긴다.”
‘나’에게서 ‘너’에게로, ‘너’에게서 ‘우리’로의 ‘존재론적 여행’은
갯벌은 질벅밭
안 그런척 웃음밴 산
원초적 리산에
흰이마는 얼빡.
물길은
묏길따라 흘러감긴
천 리 만 리 하늘깃.
*리산:강화 소재. 단군 천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산.마니산‘이 아니라,
‘머리’라는 옛말 뜻의 ‘마리’산이 맞는 말.
----[마리산* 다녀오는 길] 전문
이라는 [마리산 다녀오는 길]에서처럼,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시조인 단군에 대한 숭배사상으로 이어지고, 이 민족주의는 ‘홍익인간弘益人間’이라는 주체성을 통해서,
지구공 변해가고 그 속도 빠르다.
5대양 6대주 사람들이 똑같이 시간맞춰 똑같은 것 보는 사회되었다. 지구공 1초 생활권 변해가고 있을 때 내 중심 모든 것 돼서는 안 된다. 이웃나라, 세상 모두 섬기고 섬기는 새삶을 생활화하는 울타리로 변해야지.
땀흘려 수고한 것 그 댓가도 받았지. 무언갈 얻었으면 하는 일도 버리잖고, 혼자 산 세상 아니라 같이 사는 사회니까. 나보다 나은 사람 못난 사람 있고간에 못난이 있으면, 잘난이 어디라도 있겠지, 실제로 벤치마킹 잘되겠단 생각보다 나눔삶 중요하지, 과거의 삶보다는 사는 게 아니라 미래를 짜나가야 하겠지. 섬긴 삶 평가받아내땀 댓가를 받겠지.
우주공 미래 지향적 지구촌으로 변해간다.
라는 [지구공에서 우주공으로]이라는 시에서처럼 ‘5대양 6대주 사람들’을 향한 ‘나눔삶’, 즉, 만인평등과 만인행복의 삶으로 이어진다.
시인은 언어의 사제이며, 언어는 우리들의 정신의 양식이다. 우리는 언어 속에서 태어났고, 언어의 밥을 먹으며, 언어를 통해서 죽어간다. 시인은 언어를 갈고 닦는 사람이며, 시인이 있기 때문에, 우리들의 영혼이 맑아진다. 맑은 혼은 무위사상의 진수이며, 이 무위사상은 물이 흐르듯 자연철학으로 승화된다. 나를 버리니까 네가 나타나고, 네가 나타나니까 우리가 되고, 우리가 되니까, 그 모든 아픔을 다 잊고, 우리 한국인들의 민족시조인 단군천제를 찾아가게 된다. “원초적 리산에/ 흰이마는 얼빡// 물길은/ 묏길따라 흘러감긴/ 천 리 만 리 하늘깃”이라는 시구는 우리 한국인들과 우리 대한민국의 영원성을 뜻하고, 마리산은 단군천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거룩하고 성스러운 산을 뜻한다. 홍익인간은 모든 사람들을 다 끌어안는 사랑의 화신이며, 인의예지仁義禮智가 결합된 미래의 인간을 뜻한다.
단군천제가 주창한 홍익인간은 ‘5대양 6대주 사람들’을 다 불러모으고, 이 사랑의 힘으로 모든 지구촌을 단 1초의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시인은 가장 힘이 세고, 시인은 가장 빠르고, 이제는 이 지구촌을 벗어나 우주 전체로 그 성스러운 홍익인간의 말씀을 전파하게 되었다. “내 중심 모든 것 돼서는 안 된다”는 것, 이웃나라, 이 세상 모두 섬기는 새삶을 사는 사랑의 터전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 부유하거나 가난하거나, 잘났거나 못났거나 간에, 그 어떤 차별도 없이 ‘나눔삶’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이 [지구공에서 우주공으로]의 시적 전언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인의 행복과 만인의 행복으로 우리 홍익인간들의 미래는 지구공에서 우주공으로 변해가지 않으면 안 된다.
시는 인간의 위로와 인간 찬양의 최고급의 예술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모든 욕망을 버려야 하니까 자연의 순리에 따른 무위사상이 필요하고, 무위사상을 터득했으니까, 타인을 포용하는 인간의 철학이 필요하고, 인간의 철학을 터득했으니까 자기 자신과 자기 자신이 속한 언어와 국가의 장벽을 뛰어넘은 우주공동체의 일원으로서의 사랑의 실천이 필요하다.
아픈 만큼 싹튼 봄빛, 육십을 넘어 칠순을 넘어 그 싹을 틔운 봄빛, 만인의 평등과 만인의 행복이 싹 트는 봄빛----, 홍익인간과 맑은 혼----, 이주남 시인의 시세계는 이 세상의 삶의 황홀이자 ‘꼭두의 시학’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붉디 붉은 노을이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것은 영원히 젊은 ‘노년의 행복’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주남 시인의 [알것다, 산길 가랑잎]와 [힘못]에 대하여
알것다, 산길 가랑잎
이주남
산길은 가랑잎으로 융단을 깔았다.
가랑잎 느낌이 부드럽고 사랑스러워, 눈길주니 내게 와 귓속말을 건넨다. 노랑잎 노랑말씀을, 빨강잎은 빨강말씀을, 가랑소리 한 잎 한 잎 노랫말 실려있어, 그 사연 한 잎씩을 다려서 새겨본다.
한여름 진초록빛 물들였던 숲속가락, 글읽는 나뭇그늘 가람매미 사랑가사, 온누리 바둑판째 벌려놓고 장군멍군, 날 보고 하늘이치로 고름매란 말씀이다.
무슨 빛깔 옷해입고 새철맞이 해야는가, 어떤 빛깔 가랑잎 지으면서 잠이 들지, 끝자락녘 꼬부랑길은 어디메로 내얄지를.
알것다, 山門에 홀로 선 알몸, 가랑불에 사타릴 열었다.
시조는 양반중심의 문학이고, 초장, 중장, 종장의 형식을 중요시 하고, 사설시조는 서민중심의 문학이며, 자유로운 형식을 중요시 한다. 오늘날은 시조가 문학의 변방으로 밀려났고, 이제는 시조를 쓰는 시인들마저도 대부분이 자유로운 형식을 선호한다. 시조와 사설시조를 구분하는 방법은 시조는 아주 짧고 간결하며 대부분이 시인의 내면의 독백에 머물 때가 많지만, 사설시조는 기승전결의 극적인 구조를 통하여 그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 말과 우리 말가락으로 언어의 유희를 통해 풍자와 해학을 선보일 수도 있고, 이 세상의 삶을 옹호하고 찬양하는 찬가를 선보일 수도 있다. 언어영역의 확대는 세계영역의 확대이며, 세계영역의 확대는 자아의 발전사가 세계의 형성사가 될 수도 있다. 언어는 그 주체자와 민족의 생명이며, 자기 민족의 언어를 얼마나 아름답고 풍요롭게 발전시켰느냐에 따라서 그 민족과 국가의 흥망성쇠를 알 수가 있는 것이다. 언어는 세계를 창조하고, 언어는 우주를 창조한다. 언어는 수많은 동식물과 별들을 창조하고, 언어는 모든 가치를 창조하며, 모든 가치들을 전복시킨다. 언어는 사랑과 미움을 창출해내고, 언어는 명령하는 자와 복종하는 자의 서열제도를 창출해낸다. 시인의 사명은 언어를 갈고 닦는 것이며, 이 언어를 통해서 전통과 역사는 물론, 우리 한국어의 영광과 우리 한국인들의 영광을 창출해내는 것이다. 시인은 모국어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점에서 있어서 한국문학의 정수인 시조의 중요성은 더욱더 크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주남 시인은 [낙엽조차 아름다운 가을], [아픈 만큼 싹튼 봄빛], [힘못], [은하 別曲], [狂婦日記], [우리들의 할머니에게], [조선의 핏물역사], [마리산 다녀오는 길] 등을 통해서 우리 말과 우리 말가락의 아름다움을 선보인 바가 있지만, 나는 또다시 이주남 시인의 [알것다, 산길 가랑잎]을 읽으면서, 우리 말과 우리 말가락의 아름다움에 재삼-재사 감탄을 쏟아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언어를 갈고 닦는 절차탁마의 시인 정신의 승리이며, 이 고통의 생산성을 통해서 그 어느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한국어의 아름다움의 승리라고 할 수가 있다. 바슐라르의 말대로, 세계의 열림이고, 세계로의 초대이며, 그토록 아름답고 멋진 감동의 무대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시는 시인을 위해서 가랑잎으로 융단을 깔았다. 가랑잎은 느낌이 부드럽고 사랑스럽고, 가랑잎들은 저마다 시인에게 다가와 귓속말을 건넨다. 노랑잎은 노랑말씀을, 빨강잎은 빨강말씀을 전하고, 가랑소리 한 잎 한 잎에는 그 사연이 있어 시인은 그 말씀들을, 그 노래들을 곱씹어 다시 생각해 본다. 한여름 진초록빛 물들였던 숲속가락이고, 글 읽는 나뭇그늘 가람매미 사랑가사를 노래했던 숲속가락이다. 온누리를 바둑판째(장기판째) 벌려놓고 장군멍군, 시인을 보고 하늘이치로 옷고름을 매라고 한다. 노랑잎, 빨강잎, 산길 가랑잎 속에서 새해 무슨 빛깔 옷 해입고, 새철을 맞이해야 하며, 인생의 끝자락녘, 그 꼬부랑길은 어디로 내야할 지가 이 산책의 중심 과제라고 할 수가 있다.
알것다, 山門에 홀로 선 알몸, 가랑불에 사타릴 열었다.
이주남 시인의 [알것다, 산길 가랑잎]은 사물과의 대화이며 자연과의 대화이고, 아름답고 멋진 우주와의 대화이다.
산문에 홀로 선 알몸은 모든 것을 다 비운다는 것이고, 가랑불에 사타릴 열었다는 것은 대자연의 자궁이 열리듯이,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알몸은 비운다는 것이고, 비운다는 것은 산길 가랑잎처럼 수많은 당신들을 위해 사랑의 융단을 깐다는 것이다.
[알것다, 산길 가랑잎]은 언어의 승리이고, 이주남 시인의 세계로의 초대가 언어의 융단으로 깔린 것이다.
힘못
이주남
베란더 꽃들은야 꿈이다, 아니야. 금이다, 은이다, 흰빛깔 아픔이다.
난 몰라, 정수리 와 박히는
쫀득한 힘못이다.
이주남 시인의 {아픈 만큼 싹튼 봄빛}은 언어의 금강산이며, 이 언어의 아름다움이 그토록 절묘한 일만이천봉으로 빛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사시사철 그 풍경이 다르고, 온갖 동식물들이 다 살고 있으며, 그는 시를 쓰는 시인이 아니라, 아름다운 명시 자체의 삶을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인간이 아닌 풍경, 풍경이 아닌 명시 자체의 삶----. 너무나도 아름다워 온몸에 전율이 돋아나고, 그 어떠한 숨소리조차도 소음으로 들리는 삶이 우리 말과 우리 말의 가락으로 울려 퍼지고 있는 것이다. 악마에게 영혼을 팔고 음악으로 숨 쉬는 니콜로 파가니니([파가니니의 음률])도 살아있고, “두 살에 어머니를 잃고/ 아홉 살에 아버지마저 잃어/ 친척집 돌며돌며” “눈물로 삼킨 눈칫밥”을 “대문호의 양념밥”([양념밥])으로 승화시킨 톨스토이도 살아있다. 막대기 하나로도 지휘자가 되었던 [비발디의 봄]도 살아있고, 젊은 날 그토록 실의에 빠져있던 로버트 프로스토의 [두 갈래 길]도 살아있고, 자기 스스로 서점점원과 공장노동자의 생활을 하며, 20세기의 최고의 작가가 되었던 헤르만 헷세도 살아있다([초록온다]). 명시의 토대는 천하의 금강산이고, 그 넓은 옷자락에는 모든 천재와 예술가들이 다 몰려온다.
아름다움은 만국의 공통언어이고, 이 아름다움은 니콜로 파가니니, 톨스토이, 비발디, 로버트 프로스트, 헤르만 헷세처럼 제도권의 획일주의를 벗어나 온갖 만고풍상을 다 겪으면서도, 그러나 오직 한눈 팔지 않고 자기 자신의 길만을 걸어갔던 예술가들의 피와 땀, 아니, 그들의 붉디 붉은 피의 언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언어가 있고 인간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있고 언어가 있는 것이다. 인간이 자연을 찬양하지 않고, 자연이 명시의 아름다움을 찬양하고 숭배한다. 베란더꽃들(명시들)은 꿈이고, 금이고, 은이고, 베란더꽃들은 파가니니이고, 톨스토이이고, 이주남 시인이다. 베란더꽃들은 비발디이고, 로버트 프로스트이고, 흰빛깔의 아픔이다. 오오, 흰빛깔의 아픔이 꽃으로 피어나다니, 그것은 놀라움이자 기적이 아닐 수가 없다. 이 놀라움-기적 앞에서, ‘난 몰라’라는 반어가 자연스럽게 튀어나오지만, 그러나 이 반어는 “정수리 와 박히는/ 쫀득한 힘못”처럼, 그 어떠한 말보다도 더 강한 절대 긍정의 말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주남 시인의 [힘못]은 순수한 우리 말, 즉, 가장 기본적인 말들로, 베란더꽃들-꿈- 금- 은- 흰빛깔의 아픔- 정수리- 쫀득한 힘못 등의 고산영봉을 이루고, 이 상징적이고 함축적인 이미지들에 의해서 다양한 의미와 그 메아리들이 울려퍼진다. 꽃은 꿈이고, 꿈은 금은이고, 꽃은 흰빛깔의 아픔이다. 흰 빛깔의 아픔은 정수리에 와 박히는 힘못이고, 힘못은 새시대의 서막을 알리는 베란더의 꽃들이다. ‘쫀득하다’는 씹히는 맛이 차지고 탄력성이 있다는 뜻이지만, 그러나 정수리에 와 박히는 힘못을 생각할 때, 새시대에 새로운 깃발을 꽂는 그 희열과 그 기쁨의 미적 감각이라고 할 수가 있다.
명시-꽃들은 흰빛깔의 아픔이고, 흰빛깔의 아픔은 정수리(꼭대기)에 와 박히는 새시대의 깃발이다. 명시-꽃들은 고통으로 꽃 피고, 모든 꽃들은 언제, 어느 때나 새롭다. 꽃은 힘못이고, 힘못은 아버지이다. 아버지는 언어의 창시자이자 종족의 창시자이며, 이 아버지의 힘못으로 베란더의 꽃들은 그토록 아름답고 예쁜 금은으로 꽃 피어난다.
모든 명시, 모든 꽃들은 힘못이다.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들의 정수리에서 꽃이 피고, 이 꽃의 힘으로 역사의 수레바퀴는 그 발걸음을 멈추지 않는다.
옛세대는 가고, 새세대가 태어난다. 새세대는 가고, 또다른 새세대가 꽃 피어난다.
꽃은 아픔이고, 아픔은 힘못이고, 힘못은 천지창조의 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