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순 목사
대상이 누구든 다투는 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다투는 것은 당사자도 피곤하고 보는 사람도 피곤합니다.
얼마 전 텔레비전 토론 때마다 당을 대표해 토론을 이끌어가는 사람을 만났습니다.“토론 때마다 입씨름하는 것 견딜만 합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의 대답은 “힘들고 지겹습니다”였습니다.
다투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즐기는 사람도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 총회나 노회가 모여 회의를 할 때마다 사사건건 나서서 발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가 발언을 안하면 회의가 안 되는 줄 알거나 잘못된 방향으로 가게된다는 착각에 빠진 사람들입니다. 회의 때마다 입을 열고 발언하는 것은 결코 좋은 태도가 아닙니다.
그런가하면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들고 안건을 긍정적으로 마무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말은 적게 일은 많이”“회의는 짧게 일은 길게”하는 것이 바람직한 태도입니다.
본문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며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대 전제로 시작됩니다. 피조물이 창조주를 향해 시비를 걸고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피조물의 도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퉈서는 안될 일 세가지를 말씀드리겠습니다.
1. 자연과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창세기 1장을 보면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습니다.
1:1을 보면“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했고“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는 말씀이 6번 “하나님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는 말씀이 1번 모두 7번 반복됩니다.
그리고 1:28을 보면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1:30을 보면 “식물로 주노라”했습니다. 이상의 구절들을 종합하면 하나님이 대자연을 창조하셨다는 것,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게 창조하셨다는 것, 그 자연을 다스릴 책임을 주셨다는 것, 그리고 먹고 살도록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연 친화적 관계를 맺고 살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인간들은 마치 자연이 자기 것인 양 파괴하고 망가뜨렸습니다. 물을 버릴 때 이 오물이 어떤 작용을 하게 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공장폐수를 버릴 때 이 폐수가 하천으로 흘러 들어가 어떤 역할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합니다. 씹던 껌을 땅바닥에 버렸을 때 어떻게 될 것인가를 살펴야 합니다. 꺽어서 꽂은 꽃보다 들에 핀 들꽃이 더 아름답습니다. 이유는 자연 그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연을 창조하셨음을 믿고 고백합니다. 그렇다면 자연을 살리고 아끼고 보존해야 합니다. 작곡가 하이든은 104곡의 교향곡을 작곡한 음악가입니다. 그는 아침에 눈을 뜨면 먼저 기도했고 작품을 끝내고 나면 “하나님께 영광을”이라고 썼습니다. 그러던 그가 62세 되던 해 헨델의 오라토리오「메시아」를 듣다가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받게 되었습니다. 3년 뒤 그는 불후의 명작 「천지창조」를 완성했습니다.
천지창조는 3부 33곡으로 구성되어있습니다. 6일간의 천지창조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하이든은 “천지창조는 나를 통해 전하신 하나님의 말씀이다”라고 했습니다.
저 하늘의 구름, 들판에 피어나는 한 송이 들꽃, 흐르는 시냇물을 볼 때마다 감사합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신 자연을 잘 지키고 보존하고 살립시다.
기독교인은 자연을 살리고 지키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연을 훼손하고 질서를 파괴하면 안됩니다. 자연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2. 사람과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작은 다툼이 커지면 싸움이 되고 싸움이 커지면 전쟁이 됩니다. 부부도 형제도 친구도 교인도 이웃도 다투면 안됩니다.
우리 사회는 크고 작은 다툼으로 멍들어 가고 있습니다. 지금 우리가 처한 국제적 상황은 노사, 계층, 세대, 지역이 혼연일체가 되어 사회안정 정치안정 경제회복에 총력을 기우려야할 때입니다. 그동안 우리는 중국을 얕잡아 보고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를 제치고 세계 4강 대열에 진입했습니다.
상해는 빠리가 무색할 만큼 화려한 도시로 탈바꿈하고 있는가 하면 경제 도급성장세를 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다투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솔직한 제 심정은 왜 북한 때문에 우리가 싸워야 하는 가입니다. 그것은 대학에 떨어진 이웃집 아들 때문에 이쪽 집 부부가 머리채 휘어잡고 싸우는 꼴과 같습니다. 친북은 뭐고 반북은 뭡니까? 친미는 뭐고 반미는 뭡니까? 왜 한나라당, 우리당, 민주당 때문에 국론이 분열되고 서로 다퉈야 합니까? 왜 나라가 병들고 국민이 아파야 합니까?
구약시대 상황을 살펴보면 이스라엘 주변에 앗수르 애굽 바벨론 세 강대국이 패권다툼을 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스라엘 지도자들이 저마다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따라 앗수르와 친해야 한다 애굽과 친해야 한다 아니다 바벨론과 손을 잡아야한다며 국론을 분열시켰습니다. 이에 대한 하나님의 뜻은 단호했습니다. 앗수르도 아니다 애굽도 바벨론도 아니다. 하나님과 친해야 한다. 애굽도 앗수르도 바벨론도 우방이 아니다. 그들은 너희를 삼킬 것이며 짓밟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너희를 구속할 것이며 인도하실 것이다. 하나님과 화친하라는 것이 하나님의 메시지였습니다.
지금 우리는 생각보다 훨씬 더 심각한 갈등구조의 늪에 빠져 있습니다. 그렇게 조롱하고 만든 사람들은 얼굴을 가리고 아닌 것처럼 시침을 떼고 있습니다. 다투면 안됩니다. 다투면 국론이 분열되고 국제 경쟁력에서 밀려납니다. 공장은 모조리 제3세계로 빠져나갑니다. 더 이상 다툼을 부추기고 반사이익을 챙기려는 사람들을 용납해선 안됩니다.
성프랜시스가 드렸던 기도처럼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달라”고 우리도 기도합시다. 미움 다툼 절망 죽음이 있는 곳에 사랑과 화해와 소망과 생명을 주고 전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은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화평케 하는 자란 평화를 만드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다투는 사람이 나 때문에 손을 잡게 해줍시다. 나 때문에 사이좋던 사람들이 다투고 싸우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십시다.
3. 하나님과 다투지 않아야 합니다.
본문 9절을 보면 “질그릇 조각 중 한 조각 같은 자가 자기를 지으신 자로 더불어 다툴진대 화 있을 찐저”라고 했고 “진흙이 토기장이를 대하여 무엇을 만드느냐”고 항변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화는 깨트려버린다는 것입니다. 10절을 보면 자식이 부모에게 왜 나를 이렇게 낳았느냐고 대들면 화가 있으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부모는 하나님이시고 자식은 그의 백성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천지와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이십니다.
1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라고 했고 14절 끝을 보면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했습니다.
그 뜻은 유일하신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15절을 보면 “구원자 이스라엘의 하나님”이라고 했고“스스로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침묵하시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숨어 계시는 하나님이라고 해서 힘도 없고 연약한 하남이 아니십니다. 18절을 보면“여호와는 하늘을 창조하신 하나님, 조성하시고 견고케 하신다"고 했고“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고 했습니다.(21, 22절에서도) 그리고 23절에서는 “하나님께 모든 사람이 무릎을 꿇게 되리라”고 했습니다.
요점은 그 하나님과 피조물인 인간이 다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과 다툰다면 결과는 버림받는 것, 멸망당하는 것 뿐입니다. 서울대 소아 정신과 조수철교수의 글에 의하면 “엄마가 나를 버리지 않을까 어머니가 눈에 보이지 않으면 불안해하고 혼자 나가 놀지도 못하고 심부름도 못 가고 혼자 제방에서 잠도 자지 못하고 악몽을 자주 꾸고… 이런 증세를 「격리 불안장애」라고 한다고 했습니다. 이런 아이들한테는“너 말 안 들으면 엄마 어디로 가버릴꺼야”“너 혼자 떼어 놓을거야”“너 갖다 버릴거야”라고 말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아이들은 그런 얘기를 현실로 받아드리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영적 격리」를 두려워해야 합니다.
제 아무리 성공출세를 했더라도 재벌총수가 됐더라도 하나님을 멀리하고 하나님으로부터 격리되면 그 시간부터 불안, 초조, 걱정, 불안정으로 시달리게 되는 것입니다. 재벌총수 저명인사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영적 격리불안장애라고 볼 수 있습니다.“나 밖에 없다. 그 누구도 나를 도울 수 없다 죽는 길 밖엔 없다”는 절망이 그들을 죽음의 길로 가게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22절을 보면 “땅 끝의 모든 백성아 나를 앙망하라 그리하면 구원을 얻으리라”고 했습니다. 앙망하라는 것은 “우러러 바라보아라, 그를 높이고 믿으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 길이 있고 희망이 있고 생명이 있음을 믿고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희망이 있고 길이 있고 생명이 있는데 왜 포기합니까? 왜 죽어야 합니까? 이사야 45장에서 가장 강조되고 있는 사실은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가입니다.
5절에서는“나 외에 다른 이가 없다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고 했고 14절 끝에서는 “그 외에는 다른 하나님이 없다”고 했고 18절에서는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유일하신 하나님 한 분 뿐이신 하나님 다른 그 어떤 신과는 비교할 수 없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7절을 보면“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11절을 보면 “내게 물으라 내게 부탁하라”고 했습니다. 결론이 분명해 졌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하나님을 멀리할 때 시작됩니다. 꿈을 접고 모든 것을 포기하는 것도 하나님을 떠날 때 시작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창조주로 믿고 가까이 하고 살면 인생이 변하고 환경이 변하고 삶이 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성경 안에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과 화목하고 변화되고 새롭게 된 사람들의 얘기로 가득 차있습니다. 병든 자는 고침 받았고 죄인은 죄사함 받았고 죽은 자는 살아났습니다. 억눌린 자는 자유를 갇힌 자는 노임을 받았습니다.
다투는 세상에 평화를 선포합시다. 그릇되게 살지 말고 바르게 살자고 메시지를 전합시다. 그리고 변화된 내 모습을 보여 줍시다. 서로 다투지 말고 용서하고 사랑하며 살아갑시다.
출처: 성경 벌레들 글쓴이: 성경 벌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