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약성서도 구약성서와 마찬가지로, 문서들이 (非역사적 문서) 역사 위에 씌여진 즉, 다시 말하면 여러 저자에 의해서 오랜 기간에 걸쳐 해석되고 기록된 책들이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집성되어 이루어진 문서들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한가지 알아야 할 것은 초대 교회는 신약성서의 어느 부분도 가지지 않은 채 오랫동안 발전하 왔다. 그러면 어째서 신약성서가 기록되었으며 언제부터 기독교 경전이 되었을까?
Ⅰ 제 1 세기 교회는 신약 정경이 필요하지 않았다
1. 초대교회의 생활 형편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구약성서에 대한 그들의 감격과 신뢰감이 매우 두터웠기 때문에 또 다른 성서가 있어야 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살았다. 그들은 그리스도를 직접 목도(目睹)하고 그의 말씀을 직접 들은 신자들도 많았고, 적어도 그 목격자들의 생생한 보고와 증언을 들으며 거기에 도취하고 감격하여 살았으므로 그리스도와 그의 사업에 대한 어떤 기록의 필요성을 조금도 느끼지 않았다.
신약성서의 문서화 이전에 '복음 사건'에 대한 해석 시대가 있었다. 이런 해석이 문서화되어 신약성서가 형성되기에 앞서서 사도들과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구두 증언과 사색의 시기가 얼마동안 있을 수 밖에 없었다. 사도 교회가 종말적 기대를 강하게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신약 정경이 곧 만들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은 예수의 임박한 재림을 기다리는 동안은 영구 보존을 목적으로 하는 문서화 작업은 불필요 하다고 여겼다. 성령 강림의 사건이 있은 후 초대 교회는 실상 구약성서나 어떤 문헌에 의존하기 보다는 오히려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을 통한 하나님의 계시와 구속 활동에 중점을 두었다. 인쇄술이 발명되지 못한 그 시대에 있어서는 특수한 사정 이외에는 글을 써서 남겨 둔다는 것이 극히 어렵고 드문 일이었다. 그러므로 특별한 이유와 필요성이 없이는 신약 문헌이 생겨날 수 없었다.
2. 구두 전승의 신빙성
옛날에는 사람이 어떤 지식을 가지고 싶으면 부득불(不得不) 머리 속에 기억해 두는 길 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고대 히브리인들 특히 랍비들은 성경을 거의 다 암송하고 있었다. 예수에 대한 이야기와 그의 교훈은 아주 초기부터 어떤 개인의 기억에 근거하여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초대 교회의 공동적 기억에 근거하여 일정한 형태로 고정되어 거의 변함없이 구전 시대를 통과했다.
3. 구전 시대의 종결과 신약 문서의 형성 개시
주후 70년 경에는 사도 요한을 제외한 모든 사도가죽어었다. 따라서 그들의 생생한 증언도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다. 이처럼 사도들의 산 음성이 사라지자 그것을 보충, 대용하기 위해서 나타난 것이 문서화된 복음서들이었다. 기록된 문서의 가치가 문화적 세계로 확대되어 나가는 과정에서 매우 큰 매개체가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게 되었다. 기독교가 요원의 불길처럼 소아시아와 유럽으로 전파되어 갈 때, 조급한 심정으로 땅 끝까지 가서 증거하려는 선교사와 전도자들은 한 곳에 오래 머물러 있을 도리가 없었다. 이런 경우에 제일 좋은 방법은 "예수의 생애와 교훈을 글로 적어서 남겨두는 일"이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전도 내용의 문서화는 선교 과정에 있어서 불가피한 일이었다. 그리스도의 급박한 재림을 기다리다가 수십 년이나 재림이 지연되는 것을 체험하면서 지금까지 급박한 종말신앙 때문에 소홀히 하던 장래의 교회 문제에도 정신을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점 교회를 위하여 문서화된 말씀을 남겨야 한다는 생각들을 가지게 되었다.
교회는 호교적인 목적으로도 문서가 필요하였다. 그 이유는
첫째로 유대인들에게 예수가 메시야였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해서 예수의 생애에 대한 기록을 필요로 하였다.
둘째로 박해가 일어났을 때 우선 로마 정부로부터 예수가 누구인지를 확신케 하기 위해서 문서화 할 필요가 있었다.
세째로 전도자들이 전혀 사상이 다르고 이해의 영역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의 방법으로 문서를 이용하여야 했다.
교회의 지도자들이 교회의 실제 문제를 해결하고 판단하고 표준을 찾기 위해서 문서화된 복음들이 요구되었다. 일단 교회가 더 넓은 세계로 확장되고 발전되었을 때에는 그 사회의 습관을 따라 예수의 고귀한 생애와 말씀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서 기록을 남겨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예수의 말씀과 생애가 무엇보다도 귀중하며 잃어서는 안 될 것이었기에 필연적으로 문서화 되어야 했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낡은 계약의 책, 즉 구약 책을 필요로 했던 것처럼 새 계약의 책도 필요로 하였다. 그러므로 새 계약 시대에 신약성서가 나타나게 되었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신약 문헌의 대부분은 어떤 개체 교회 혹은 교회의 작은 단체를 위해서 기록된 것들이다. 그런데 이 교회들은 이 편지들을 반복해서 읽음으로써 생활의 여러가지 위기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참 좋은 도움이 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마침내는 그 문헌들이 수집되고 또는 널리 반포되어 결국 정경(Canon)에 포함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4. 신약성서의 실제적 출현
구전 시대가 지나고 문서 운동이 시작되자, 기독교 문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 말은 우리가 현재 27권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약성서 이외에도 다른 많은 복음서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왜 그렇게 많은 문서들 중에서 어떤 것은 성서로 채택되고 어떤 것은 버림을 받았을까? 그 이유는 그 책이 교회의 공중 예배에서 읽혀졌다는 오직 한가지 이유때문이다. 일단 어떤 책이 공중 예배에서 낭독되기 시작하면 그 책이 정경이 된다는 것과 거의 같은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또한 예배에서 무엇을 읽고 무엇을 읽지 않아야 할는지 결정짓는 일은 예언자들과 사도들과 교사들과 같은 성령의 인도를 받는 성령의 사람들이었다. 그렇다면 성령의 사람과 성령 감동받은 사람들은 무엇을 표준으로 하고 책들을 판단하였을까? 그 표준은 그 책이 사도적 권위를 가졌는가 아닌가에 두었다.
다시 말해서 그 책이 어떤 사도의 저술이든지간에 적어도 사도들과 직접 접촉하던 사람들이 쓴 것이라야 했다.
5. 성서로서의 인정
오늘날 우리가 보는 형태로 책들이 신약성서의 정경으로 인정받는 이유는 어느 개인이나 단체가 제 멋대로 판단하거나 인정해서가 아니라, 그 책 자체가 사도적 저작인 동시에, 내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자증적(自證的)인 품질이 독자에게 신언(神言)으로서의 권위를 나타내 보여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는 좀 더 명확하게 어느 책은 성경이고 어느 책은 성경이 될 수 없다고 하는 확실한 한계를 그을 수밖에 없는 특수한 시기에 도달하였다. 그 이유는 영지주의자인 말시온의 운동때문이었다.
말시온 일당은 다른 영지주의자들과는 달리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이원론적 세계관을 담아내는 포장품의 역할로서 기독교 복음을 받아들였다. 말시온은 주후 85년, 부유한 집안의 한 주교의 아들로 태어나 어릴 때 교회 지도자들과 교리싸움을 하고 고향 교회로부터 추방되어 주후 140년경 로마에 사는 영지주의자 Kerdon을 만나면서 유대교의 창조설화 해석을 배우게 되었다. 말시온은 이러한 해석을 구약에 적용시키면서 구약과 신약의 神을 별개의 神으로 보고 신약 가운데서도 유대교 색채를 삭제시켜 "말시온 성서"를 만들게된다. 말시온은 제 멋대로 자기의 주장을 맞추기 위해서 모든 것을 왜곡 해석 했으며 성서를 자기 나름대로 자르고 붙였다. 이 때까지 교회는 아직 공식적인 정경을 가지고 있지 않았었는데 한 개인이 스스로 성서의 정경을 작성, 발표하였으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교회는 정경화 작업을 착수 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무라토리 정경 목록이라는 신약성서 목록이다.
이 목록이야말로 교회 사상 처음으로 나타난 신약성서 목록이기 때문에 매우 귀중한 문헌이라 할 수있다.
이것은 주후 170년경에 작성된 것으로서 그 당시 교회가 성서로서 받아들인 책들이다. 그 목록에 나타난 책을 열거해 보면 다음과 같다.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사도행전, 고린도 전후, 에베소, 빌립보, 골로새, 갈라디아, 데살로니가 전후, 로마, 빌레몬, 디도, 디모데 전후, 유다, 요한1.2, 요한 계시록, 베드로 계시록이다.
2세기 중엽에 들어서 제도화 된 교회 시대가 시작 되었다. 교회는 이미 예언의 영(靈)이 역사화하는 곳이 못되고, 사람들이 교회로 마구 밀려들어 세상과 교회의 차별이 없어지고 말았다. 교회가 세속화되어 이방 사상, 문화, 철학과 혼동되기에 이르렀다. 기독교 윤리는 이미 그 숭고성을 잃고 말았다. 이런 때에 몬타누스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몬타누스는 스스로 자기를 약속된 보혜사라고 하며, 교회를 위하여 새 환상과 새 메시지를 가지고 왔노라고 주장하였다. 몬타누스는 이제 자기를 통해서 하나님의 새로운 계시가 나타난다고 주장하였으니 성서는 수도없이 늘어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므로 기독교회는 마침내 성서를 마감하지 않으면 안되는 단계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래서 2세기 말경에 교회는 신약 정경을 한정하고 원칙적으로 성서 산출이 이미 끝났다는 데 합의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성서 채택에 대한 논쟁들이 있었다. 논란의 대상이 되었던 책들은 각 책의 사도적 저작권 문제 때문이었다. 그 후 3∼4세기 초에 걸쳐서 문제 된 책들을 체질하여 가려내는 과정이 있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서는 가이사랴의 유세비우스 교부인데 그는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27권을 실질적으로 모두 정경 목록에 넣었고, 그 이후에 정경 내용의 변화가 그리 많지 않았다.
이제 정경 형성의 마지막 단계를 살펴보자. 주후 367년, 애굽 알렉산드리아의 감독 아타나시우스는 그의 부활절 서신을 자기 교구의 여러 교회로 보내면서 지금의 신약성서와 똑같은 내용의 목록을 제시하였다. 이 목록은 신약 정경 형성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분계점을 이루었다. 이 일이 있은 후 서방에서는 어거스틴도 이 정경 목록을 지지하였고, 마침내 제롬의 라틴어 번역을 통하여 전 서방 교회에 유포, 사용되기에 이르렀다. 동방에서도 시간이 지나면서 서방교회의 정경과 동일한 정경목록을 가지는데 도달하였는데 수리아 교회는 22권만을 채택하였다. (cf. 베드로 후서, 요한 2 3서, 유다서, 계시록 제외) 지금도 동방 수리아 교회는 여전히 22권의 신약성서를 정경으로 가지고 있다.
결론
신약 정경은 교회협의회의 활동을 통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형성되었다. 개개의 책들이 지닌 영감성과 내적인 권위가 그것들을 궁극적으로 인정하고 정경화하는 결정적인 요소를 이루었다. AD 200년에 이르러서야 신약은 본질적으로 오늘날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 문서들을 포함하였다. 그 후 이것들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오늘날과 같은 권위와 확실성을 지니게 되었다. 3세기에는 「안티레고메나」로 논쟁이 벌어졌다. 동방에서는 요한계시록을 인정치 아니하였으며, 서방에서는 히브리서를 부정하였다. 실제적으로 3세기 말에 가서야 모든 외경서들이 히에로니무스와 아우구스티누스의 영향, 그리고 이집트 아타나시우스의 정경이 설정한 명확한 구분으로 실제로 어떠한 문서가 정경의 지위를 갖는가에 대한 논쟁은 그치게 되었다. 제3차 카르타고 교회회의(397년)는 이 결정을 확증하였으며, 이때부터는 어느 신약 문서에 대한 논쟁도 그치게 되었다. 동방에서는 오랫동안 논쟁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서방과 알렉산드리아 아타나시우스의 경우, 갑바도기아 교부들의 영향은 모든 반론을 일축시켜 버렸다. 페쉬타(시리아 성경)에 요한 2.3서, 베드로후서, 유다서, 요한계시록을 첨가함으로써 정경에 대한 문제는 동방 역시 해결되었다. 그리하여 신약 정경은 모든 실제적인 목적에 맞추어 서방에서는 400년에, 동방에서는 500년에 이르러 그 결정을 보았다.
/출처ⓒ† : http://cafe.daum.net/cgsbon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