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단의 추억 # 62, 아... 친구 아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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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친구 D가 나의 탈출사건 때문에 양학식 베드로목사에게 귀싸대기를 얻어 맞은것(이단의 추억 #51, 다시 데리러 온 친구)같이, 명명(세칭 동방교에서 지성(헌금)을 바치고 받는 새 이름)이 아모스라는 또 다른 친구가 있었는데 역시 부산에서 빈집초월(세칭 동방교에 충성하기위해 무단가출하여 집을 나오는 것을 말하는 세칭 동방교의 은어-隱語)하여 서울의 대기처로 올라가 연단선님 생활을 하고 있었다.
책임점수를 올리지 못해서 순회를 돌던 양학식 베드로목사에게 걸려 귀싸대기를 얻어 맞았는데 그만 고막이 파열되었다. 성질이 고약했던 양학식 베드로목사는 스스로 열기가 고조되면 폭력적이 되기 일쑤였다. 고막이 파열되는 지경에 이르러도 제대로 치료받기는 제도상 불가능했다. 그냥 참고 지내는 수 밖에 없었다.
참다 못한 그도 결국 부산으로 도망을 내려가 가정으로 돌아갔고 그후 세칭 동방교쪽으로는 눈도 돌리지 않고 의식적으로 멀리하고 지내다가 결혼하여 생업을 일구어 생활하게 되었지만 그때 파열된 고막을 제대로 치료받지 못한 후유증으로 인해 평생 고생을 안고 살게 되었고 한쪽귀는 영영 듣지못하는 결과가 되었다.
내가 가끔 세칭 동방교 이야기를 꺼집어 내면 ‘베드로목사 그 새끼~’ 하면서 흥분을 감추지 못하던 친구였다. 노후를 대비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가지 직업을 힘들다 하지않고 참으로 열심히 일하던 친구였는데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는 부인과 함께 낮에는 쌀가게와 치킨가게를 운영하면서 오후에는 학원차량 기사, 밤에는 노래연습장을 차려놓고 두 아들을 뒷바라지 하면서 행복한 노후를 준비하기 위하여 밤늦도록 돈을 벌려고 애쓰더니 가족들과의 행복한 노년을 맞이하지 못하고 홀로 먼저 이승을 떠나게 되어서 안타까운 마음 금할 수 없다.
그의 직업은 또 있었다. 해마다 돌아오는 설과 추석이 되면 벌써 며칠전부터 그의 치킨가게 앞에 널따란 나무판을 차려놓고 쌀과 잡곡등 튀긴 박상(튀밥)을 물엿과 함께 맛있게 버무려 강정을 만들어 잔뜩 진열해 놓고 동네사람들과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팔곤 했었다. 친구가 만든 강정의 맛이 일품이어서 나는 해마다 명절때가 되면 꼭 친구의 가게에 일부러 들러 그 강정을 한보따리 사 가지고 와서 식구들과 맛있게 나누어 먹으면서 명절을 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내가 살고있는 동네를 지나서 시내방향으로 나가는 길을 관통하는 간선도로변의 건물 지하 한층을 세내어 그가 낮의 피곤을 무릅쓰고 밤늦도록 문을 열어놓은채 손님을 기다리던 그 노래연습장 건물 앞을 나는 지금도 자주 지나다니고 있다.
특히 야간에 차를 운전하면서 그 도로변을 지나칠때 마다 친구는 가고 없는데 주인만 바뀐채 아직도 그때 그 간판 그대로 네온싸인 불빛이 화려하게 명멸하는 그 건물앞을 지나면서 나는 친구생각에 젖어드는 상념을 떨쳐내기가 어렵게 된다. 그리고 늘 인생무상을 절감하곤 한다. 인생은 짧고 노래연습장은 길어서일까.
고막이 파열되었던 그때의 기억으로 교회라는 이름만 들어도 끔찍히 싫어하던 그는 중년에 접어들면서부터 불교쪽으로 왕래하더니 결국 그가 살던 동네의 뒷산 어느 사찰에 그의 신위를 모셔두고 있다. 세칭 동방교에서의 폭행으로 고막이 파열되어 평생을 고생했던 또 한사람 내 친구의 안타까운 사연이다.
‘초량12교회’의 학생회 신도 출신인 그의 동생은 후일 경찰에 투신하여 지금은 경찰고위간부로 재직하고 있기도 하다. 본청에서 종교담당을 역임하던 중 여러분야의 공식적인 정보자료들을 접하면서 세칭 동방교의 노광공교주가 전도관의 박태선을 따라 다니면서 북을 치고 분위기를 돋우는 전위부대로써 활동한 경력을 그는 기록들을 통해 확인하고는 아연실색했다고 토로하곤 했다.
그리고 일제 말, 6.25전후를 통한 경력을 직접 확인하고는 내 어이 그런 잡동사니 사이비 이단 종교집단에 들어가서 부모님이 하라는 공부는 뒷전으로 치고 허송세월을 보냈던고... 허망하기까지 했다고 한숨지었다.
참으로 열심히 일하던 친구... 그러나 환갑을 넘기지 못하고 아내와 두 아들을 두고 세상을 떠난 안타까운 내 친구... 그의 명명은 ‘김 아모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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