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코 14,12 – 16. 22 – 26
+찬미 예수님
우리 주님의 이름으로 평화를 빕니다.
여러분들 천주교 신자죠? 혹시 불교 신자 계신가요?
예비 신자분들도 아직 세례는 받지 않았어도 천주교 신자라고 대답하세요.
천주교 신자로 무엇이 행복하세요?
저는 사제이기 전에 천주교 신자로 행복한 이유가 두 가지예요.
첫 번째는 성체성사가 있는 것이고, 두 번째는 성모님이 계신 것이에요.
성모님은 우리들의 울타리이시죠.
엄마는 집에서 울타리 노릇을 하죠.
아버지가 해결 못 한 문제 엄마가 해결할 때 많아요.
부인과 사별한 홀아비는 자식 키우기 힘들어 다시 결혼하는데, 여자들은 애들 바라보며 독하게 살죠.
애들 대학도 보내고 출가시키고. 여자들의 그런 모습을 보면 성모님 모습이 떠올라요.
개신 교회는 이 두 가지가 다 없는데, 희한하게 우리보다 더 기쁘게 사는 것 같아요.
왜 그럴까?
전교하는 것도 밀리는 듯하고, 감사하는 것 표시하는 것도 그렇고.
정말 성체를 영할 때 행복하고, 매일 묵주기도를 하면서 행복하세요?
이론적인 행복이 아니라 성체를 영하면서 눈물이 날 정도로 기뻐하신 적이 몇 번이십니까?
언젠가 얘기해드렸듯이 저는 사제가 참 어렵게 됐어요.
사제서품 그 당일 4시간 전에 취소가 되고, 4개월 후에 참 어렵게 서품을 받았죠.
그 4개월간 내 꿈은 ‘신부 되어 미사 한 대만 드리고 죽어도 소원이 없겠다’였어요.
38년이 지난 지금도 미사를 드리며 성체 성혈을 축성할 때 울컥울컥해요.
제의를 입으면서도 늘 긴장이 됩니다.
왜? ‘오늘도 주님의 몸과 피가 만들어지는구나, 그리고 천상의 약이 교우들에게 배령되는구나.’
이 생각을 하면 온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로 전율이 와요. 그리고 성체를 축성하면서 큰절을 드릴 때 가슴이 뭉클합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성체 없잖아요. 형식이잖아요. 성모님 안 계시잖아요.
그런데 왜 우리가 그들보다 덜 기쁘게 삽니까?
이것은 넌센스죠. 말이 안 되는 거죠. 복에 겨운 겁니다.
성체는 우리 천주교 신자들의 생명과도 같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로 건너가는 7개의 다리, 7 성사 가운데 중심은 성체성사입니다.
나머지 6 성사는 엄밀히 따지면 성체성사 때문에 만들어진 거죠.
신품성사도, 성체 성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죠.
이 세상의 수녀가 모두 이 제단에 올라와 있어도 미사 못 드리죠.
여러분이 보기에 모자라는 사제라도 서품을 받은 그 사제에 의해 주님의 몸과 피가 만들어집니다.
우리 신자들이 성체를 모르는 이방인이나 성체로 시비를 붙으려는 개신교 신자가 있다면
같이 읽어보자고 펼쳐야 할 성경 구절을 제가 4년간 말씀드렸죠.
기억나십니까?
그곳에는 예수님의 성체에 관한 유언이 아주 강하게 나온다고 했습니다.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57절.
곗돈 받을 날만 기억하지 마시고, 제발 외우세요,
예수님이 이렇게 똑같은 말을 7번이나 한 곳은 없다고 했지요?
어떤 이야기를 7번 하셨다고 나옵니까?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지 아니하면 영생을 얻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이 같은 이야기를 이렇게 강조한 것이 또 없어요.
실제로 이 요한복음 6장 50절 이하 때문에 많은 개신교 신자가 개종했습니다.
심지어는 목사님도 있었어요.
이 구절보다 더 성체성사에 대해 강조한 곳은 없습니다.
우리가 다른 성경은 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우리 가톨릭의 중심인 성체성사에 대한 예수님의 유언이 있는 요한복음 6장 50절에서 57절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나중에 하느님께 심판받을 때, 신부님이 알려주지 않아 몰랐다, 이것만 알았으면
내가 뜨겁게 성체를 영 했을 것이라는 변명은 하지 말기 바랍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죠.
‘내 살과 피를 먹고 마시면,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살릴 것이다.’
우리 신자들은 마음만 먹으면 매일, 어려우면 두세 번이라도 모실 수 있잖아요?
그런데 성체가 있다고 해서, 그 성체를 보고 다 감동하는 것은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 성체를 바라보는 세 가지 시선이 있습니다.
첫 번째, 성체의 의미를 아예 모르거나, 상징으로만 생각하는 사람들, 수많은 비신자가 여기 속합니다.
비신자들은 성체의 의미를 모릅니다.
알려주는 사람도 없고, 영화에서 신부님이 하얀 것을 들고 기도하더니, 신자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을 보았을 뿐이죠.
어떤 사람이 친구 권유로 성당에 처음 왔는데, 앉았다 일어났다 정신이 하나도 없었지요.
중간에 돈 내러 나가는 것 같았는데, 끝날 즈음에 사람들이 또 나가는 거예요.
쫓아 나갔죠.
신부님이 하얀 500원짜리 동전만 한 것을 주길래 자기도 손을 내밀었죠.
하지만, 좀 어색해 보이니, 신부님이 세례받았냐고 묻고, 세례받으신 후 모시는 거라 좋게 말하며 들여보냈대요.
그날 집에 가서 친구에게 전화 걸어 ‘아니, 천주교는 왜 이렇게 쌀쌀맞아? 몇 푼 되어 보이지도 않던데,
자기들끼리만 나눠 먹고, 처음 간 사람에게 제일 큰 것을 줘야 하는 거 아냐?’ 하더래요.
이렇게 비신자들은 성체가 뭔지 모르죠.
또 많은 개신교 신자들도 성체가 그리스도의 몸을 상징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하기에 절대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성체가 아무런 영적 유익을 주지 못합니다.
일 년에 몇 번, ‘우리 성찬례 한지 좀 됐지?’ 목사님이 이야기하면,
‘빵 준비하고, 이번에는 포도주도 할까?’ 하면서 성찬례를 합니다.
유튜브를 보니 코로나용으로 일인용으로 빵과 포도주가 들어간 것을 개신교 쪽에서 만들었다 하네요.
그렇게 만든 이유는, 그들에게는 그냥 상징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주님의 몸과 피라는 믿음이 단 1 프로 없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영성체하는 사람들입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은 머리로는 성체를 예수님의 몸이라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형식이 되어버렸습니다.
그럼으로써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과 친밀한 사귐을 못 합니다.
준비된 마음 없이 의무적으로 미사 참석하고, 당연히 받아야 할 것 받아먹는다는 마음으로 영성체를 하고 들어갑니다.
또 미사 후에도 성체가 들어와 있는 내 몸뚱아리는 예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의식 못 합니다.
성체가 모셔져 있는 감실은 제대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체를 영하면 내 몸뚱아리가 감실이 됩니다. 걸어 다니는 감실이 됩니다.
예수님을 태중에 열 달 동안 품고 있었던 또 하나의 성모 마리아가 됩니다.
그런데 이것을 못 느낍니다.
자신이 감실이라는 사실을 잊고, 자기중심적이고 세속적인 마인드로 살아갑니다.
성체를 모신 거룩한 입에서 속세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래서 이렇게 형식적으로 습관적으로 성체를 모시는 천주교 신자들에게는 매일 영성체를 한다고 하여도 큰 영적 유익이 되지 못합니다.
삶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합니다.
단순히 영성체 안 하면 좀 찝찝할 뿐, 얼마나 큰 신비가 있는지 모릅니다.
세 번째는 한마디로 성체 신심을 생활화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체가 참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며, 그리스도께서 성체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계시면서
우리에게 필요한 힘을 주시고 변화시킨다는 성체 체험을 하시는 분들입니다.
그런 분들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자주 성체조배를 합니다.
여러분은 일 년 동안 성체조배를 몇 번 해보셨습니까?
TV 조배는 잘하실 겁니다. 온종일 틈만 나면 TV 켜지 않습니까.
이 세 번째 부류의 분들은 자발적으로 성체 앞으로 달려갑니다.
이 세상 어느 장소보다 그 성체 앞에 머무는 시간이 제일 행복한 시간으로 여겨집니다.
감실 안에 계신 예수님과 대화합니다.
그리고 해결되지 못한 것들을 그분에게서 답을 듣습니다
자신의 모든 일을 예수님과 의논합니다.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만 성체를 영하는 것이 아니라, 성체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가능한 매일 미사와 영성체를 하려고 애씁니다.
예수님을 모시고 그분의 힘으로 살아갑니다.
저는 수인 사목을 여러 해 했다고 했습니다.
그때는 사형집행이 많았던 시절로 여기저기 다니면서 입회를 했지요.
그런데 우리 천주교 신자들은 죽을 때 보면 참 담대하게 죽었습니다.
그 담대하게 죽을 수 있는 힘이 무엇인 줄 압니까?
한 달에 한 번 영하는 성체입니다.
그들은 성체를 영하면서 죽음을 준비했습니다.
성체 신심이 있는 사람은 자기 능력 이상의 일을 합니다.
나에게 이런 큰 힘이, 이런 놀라운 담대함이, 이런 하느님다운 모습이 있었던가를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변화되어 갑니다.
우리는 성체를 천상의 약이라 합니다.
다른 말로 우리를 치유하는 약입니다
신자들이 미사 후 안수를 청하면 해드립니다.
하지만, 사제의 안수하는 손보다 수천수만 배 강한 힘이 있는 것이 성체입니다.
정말 성체는 직빵으로 듣는 약입니다.
성체만 열심히 영하면 외적, 내적인 상처 모두 치유됩니다.
세상의 보약이 아무리 좋아도, 설령 천수를 누릴 수 있는 약이 있어도 성체만 못합니다.
성체는 영생을 보장합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는 이야기일 겁니다.
백약이 무효인 아버지를 살려 보고자 효자인 아들은 온갖 좋은 약초를 캐서 가져다드렸지만, 아버지의 병은 점점 깊어만 갔죠.
그런데 어느 날 지나가던 스님이 ‘에휴, 아버지가 많이 아프시구만.’ 하니, 아들이 좋은 방법이 없겠냐고 물었죠.
스님은 딱 한자기 방법, 살을 먹여야 된다 했습니다.
아들은 그 이야기를 듣고 자기 입에 재갈을 물고 칼로 자기 허벅지를 도려냅니다.
그리고 그것을 다른 약과 함께 달입니다.
아들의 살로 만들어진 그 약을 아버지 입술에 한 방울 두 방울 떨어뜨렸더니, 아버지가 일어나는 기적이 있어 났다는 전설이 있지요.
우리 살리려고 미사 때마다 예수님은 당신의 몸을 주시는 겁니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리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아버지가 우리를 살리려고 미사 때마다 당신의 살을 떼어 주시는 겁니다.
이것이 바로 천상의 약이 아니겠는가.
이 어찌 고맙지 않고 치유의 힘이 없겠는가.
성체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성사입니다.
그래서 성체를 영하면 예수님의 신성에 참여하게 됩니다.
성체를 영하면 성령과의 일치를 도모하게 됩니다.
성체를 영하면 예수님과 한마음이 됩니다.
그 마음은 어떤 마음입니까?
‘예수 마음 겸손하신 자요.’라는 성가도 있지요.
예수님의 마음은 겸손입니다.
성체를 영할수록 우리는 겸손해지고 성령과 하나 되고 예수님의 신성에 참여합니다.
그리하여 바오로 사도가 이야기했던 갈라티아서 2장 20절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고
외칠 수 있게 됩니다.
그리스도와 동일화가 됩니다.
여러분들, 성체를 영하고 자리로 돌아가서 각자 하셔야 할 것이 무엇인가?
치유 기도를 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성체를 영한 즉시 여러분의 손은 여러분의 손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손으로 바뀝니다.
마음이 아프신 분들은 가슴에 대고, ‘주님, 제 삶 안에 들어오시어 제 상처를 치유해 주십시오.
제가 어린 시절 아버지에게 받은 상처가 있습니다. 이제 자유로워지고 싶습니다.’
또, 몸이 아프신 분들은 예수님의 손을 아픈 곳에 대고, ‘주님, 제가 간이 굳어지고 있다고 합니다. 치유해 주십시오.’
엄청나게 뜨거움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이 성체에 대한 겨자씨만 한 믿음만 있어도 ‘나무가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어져라.’ 해도 된다고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성체를 모시기 전에는 성가를 부르더라도, 성체를 모신 후에는 성가 부를 때가 아닙니다.
예수님의 손으로 본인을 치유하고, 생각나는 가족, 어둠에 휩싸인 가족이 있다면 그 가족을 위해 기도하셔야 합니다.
믿는 대로 될 것입니다.
추호도 의심하지 마십시오.
저는 그런 마음으로 사제 생활을 하고 삽니다.
물론 제가 신자들의 머리에 안수할 때도 ‘왜 쓸데없이 안수를 받지?’하는 생각 없습니다.
분명히 예수님은 사제의 손을 통해서도 치유해주신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러나 사제의 손보다 더 큰 힘이 어디에 있다고요?
성체에 있다는 것 믿도록 합시다.
그리고 성체 성혈, 성체성사, 성체조배 기쁜 마음으로 임하도록 합시다,
아멘
♣2021년 그리스도의 성체 성혈 대축일 (06/06) 서운동성당 김웅열(느티나무)신부님 강론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