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렬공 사료수집의 성과 (3)
공과 관련된 시료수집 운동은 11월 19일부터 시작했다. 물론 만족할 정도의 성과를 거둔 것은 아니지만 예상 밖의 결과를 얻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처음 시도한 선조들의 사료수집 운동치고는 기대 이상임이 분명하다. 후손들이 앞으로 지속적으로 자료수집 운동을 벌여나간다면 문중의 기록을 정밀하게 보강하는 것은 물론 문풍을 떨치는데도 크게 이바지 할 것이다.
충렬공과 관련된 사료수집 운동의 성과와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첫째, 공의 한시를 찾았다는 점이다. 그는 고려조정을 대표할 정도의 대문장이셨으나 전해진 작품은 거의 없다. 한시의 경우는「侍中諱繼廷汝宋使口呼聯句」旗脚飜風烈火飛(깃발이 강풍에 펄럭이니 거센 불길이 휘날린 것 같네)7언 한구가 유일한 유고로 믿어왔다. 그러나 그 일곱 자 한 줄의 작품마저 공의 작품이라는 근거가 없다니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런데 공의 한시가 중국에서 확인된 것이다. 즉, 1087년(丙寅 宣宗4, 哲宗 元祐 2) 송나라에 파견됐으나 우리나라에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았다. 하지만 당시 송나라 대신인 심괄(沈括, 1031-1095)의 유고집 「보필담(補筆談)」에 공이 예부시랑(禮部侍郞)일 때 부사로서 주부(主簿) 박경작(朴景綽)과 함께 아래의 칠언절구(對聯)가 실려 있음을 확인하게 된 것이다.
千仞綵山擎日起 천 길의 채산이 해 받치고 솟아나자
一聲天樂漏雲來 한 소리 하늘 음악 구름 속에서 울려오네 (충렬공)
勝事年年傳習久 즐거운 일 해마다 전해온 지 오래인데
盛觀全屬遠方賓 그 장관은 멀리서 온 손님을 위한 것이네( 박경작)
둘째, 천안절표의 오자와 대상을 확인한 것이다. 기묘보(1999년발행, 928쪽)에는 공이 왕의 명을 받아 지었다는 「奉敎製進賀天安節表」가 실려 있다. 다만 이 표전(表箋)을 막연히 「當天子」라고만 지칭해 그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러나 여러 사료를 흩어본 결과 송나라(北宋)의 황제가 아닌 요(遼)나라 道宗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으며, 오자(誤字)도 밝혀냈다.
셋째, 김부식(金富軾)의 승진을 추천한 일도 있다. 우리는 충렬공과 김부식의 관계를 그냥 고려 때의 명신으로만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사료 수집 과정에서 김부식이 「直翰林」으로 승진할 때 추천한 인물이 충렬공임을 김부식의 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의외의 소득인 것이다.
넷째, 사서에 나타난 파송(派宋)기록의 오류도 발견했다. 고려사 등에는 공의 송나라 사절로 다녀온 기록이 1087년은 아예 없고, 1090년, 1101년, 1103년 등으로 기록돼 있다. 하지만 공은 1087년과 1090년 두 번 송나라에 다녀온 것이다. 그러니 1101년과 1103년의 기록은 믿기 어렵다.
다섯째, 관직의 이력을 보다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족보 등에 실린 공의 관직이력은 소략하다. 이번에도 문종 때의 이력은 밝혀내지 못했으나 선종과 숙종 때의 승진기록은 어느 정도 확인한 것은 또 다른 소득으로 여길 수 있다. 관직이력은 앞으로도 계속 추적할 대목이다.
이상과 같이 충렬공과 관련된 사료수집 운동은 밴드라는 소통공간을 통해 이룬 결과물이다. 하나 이 정도에서 그칠 일은 아니다. 충렬공은 한반도에서 태어난 장흥 위씨 가운데 최고의 관직을 역임한 유일한 분이다. 후손에게 자긍심을 가지게 한 주인공이다. 그러나 공이 타계한지 2015년 올해로 1118년에 이른다. 그럼에도 후손은 변변한 비석 하나, 사우 한 채 세워드리지 못하고 있다. 과연 우리가 후손의 도리를 다하고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2015.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