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진리이신 주님께서 종기와 영광을 받으시기를 함께 찬양합니다.
오늘 지금 짧게 읽은 본문 앞에는 우리가 지금까지 따라오면서 보았듯이 사도들 바울과 디모데가 골로새 교회를 향해서 갖는 감사함의 표현이 있어요. 그리고 높으신 예수님에 대한 찬양이 있고 그리고 사도들의 교회를 위한 기도와 교회를 위한 수고가 내용으로 담겨 있습니다. 그 모든 것을 말하는 이유는 이 교회가 골로새 교회가 하나님 앞에서 그리고 그들 자신을 위해서 믿음에 주님에 맞는 삶을 살도록 돕기 위한 것이에요.
교회의 삶을 위해서 그렇게 쭉 마련을 했다고 했는데 오늘 본문에서 그 뜻이 분명하게 나타나죠. 우리 2절인데 두 절인데 다시 한 번 우리 앉은 자리에서 읽어보겠습니다. 같이 시작이요.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 각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뜻이 하나님의 소리가 있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기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바라느니라고 하는데 이게 우리가 그냥 지나가기에는 너무나 중요한 말씀이에요. 여기에는 지금까지 그냥 2장 6절까지 쭉 말한 내용의 요약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이 되고요. 또 이제 이것을 근거로 해서 교회와 성도가 어떻게 행할지에 대해서 말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에 있는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라는 이 말에는 우리 시대에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한 의미가 그리고 우리 삶과 직결된 의미가 있어요. 주 노드 그리고 그릭으로는 퀴리호스인데 여러분 퀴리에라는 말 들어보시죠. 주여 큐리에 퀴리호스라는 말인데 이 주라는 말은 우리 시대에는 여러 사람들에게 이렇게 가볍게 적용되는 타이틀이기도 해요. 요즘에는 땅 주인에도 노드가 들어가고 집주인에게도 로드가 들어가고 한국말로는 심지어 차 주인에게도 주가 들어간다는 겁니다. 1세기 초대 교회에도 그런 부분이 있어요. 사람들 중에 선생이나 주인에게 를 부를 때 주여라고 부르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이 대문자로 쓰이거나 그 단어 앞에 노드 앞에 정관서 너가 붙으면 사정이 완전히 다릅니다. 그렇게 쓰이는 말로써 이 주는 유대인들에게는 여호와 하나님을 부르는 또 다른 이름이 돼요. 그래서 구약 성경을 헬라어로 번역한 곳에서 여호와 이름이 나오는 곳은 모두 다 주로 번역을 합니다. 그리고 로마인들한테에게 있어선 그들이 신처럼 숭배하고 경배하는 이 황제에게 사용되는 호칭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호와 하나님이 아니거나 로마의 황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를 향해서 주라고 부르는 것은 그들에게 잡혀서 죽임을 당할 수 있는 위험을 감수하는 그런 일이라는 거예요. 그만큼 무게가 있고 중한 뜻이 이 주라는 말에 담겨 있는 겁니다.
그런데 초대 교인들이 그렇게 했어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고백을 하고 죽임을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굉장히 많았습니다. 1세기 때 플린이라는 사람은 당시에 트라니오무스라는 황제에게 편지를 쓰면서 이 그리스도인들을 예수를 주라고 고백하는 이 사람들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 문의하는 편지를 썼어요. 그 사람이 준 대답은 아마도 여러분이 로마에 가면 잘 알고 있듯이 이 원형 극장 있잖아요. 이 원형극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을 놓고 짐승들을 같이 풀어놓는 거죠. 그래서 안디옥교회의 감독이었던 이 이그나티우스라는 감독, 오늘날로 말하면 목사님인데 이분은 로마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들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후에는 이 서원화 교회의 주류였던 폴리갑 여러분 많이 들어봤을 텐데 이 폴리갑은 서원화에 있는 원형 경기장에서 짐승을 넘어서 화형을 당해 죽임을 당했죠.
그리고 시간이 지나서 2천년을 지나 우리가 알고 있는 조선 땅에서는 이 주기철 목사님이라는 같은 분이 일본 제국의 황제 승배였던 신사 참배를 거부하면서 옥중에서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했습니다.
모두 다 예수님을 주님으로 고백했기 때문이고, 그 믿음에서 흔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죠. 그만큼 중요한데 폴리갑은 그냥 입으로 시저 이스털로 오드 찢어가 주라고 말만 해도 살 수가 있었어요.
하지만 그것을 거부하면서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나는 86년 동안 그분을 섬겼는데 그분은 나에게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내가 어떻게 나의 왕이시며 구주이신 그분을 모독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말할 때가 나이가 86세였습니다. 그리고 이 말과 함께 그곳에서 모든 사람들이 쳐다보는 데서 화형을 받고 죽임을 당했죠. 예수를 구주로 주로 받는다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는 일들입니다.
지금은 1세기와 다르죠. 누구를 주로 인정하지 않는다고 해서 또 누구를 주로 고백한다고 해서 잡혀가거나 매를 맞거나 죽임을 당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삶의 주인은 있는 것이죠. 여러분 저와 여러분 모두의 각자의 삶의 주인이 있다 하는 것이에요. 그것은 사람일 수도 있고 돈일 수도 있고 성이나 권력이나 명예일 수도 있어요. 그것이 무엇이든지 간에 여전히 중요하다. 그래서 본질을 잘 아는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가 돈을 예로 들어서 한번 해볼까요? 보통 돈이 세상을 다스린다. 세상은 돈이 다스린다 이런 말을 하지 실제로 그렇게 말할 이유들이 근거들이 있는데 하지만 자세히 보면 돈이라는 것은 물질입니다.
물질은 스스로 사람을 다스릴 수가 없어요. 사람이 그렇게 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돈에게 다스릴 수 있는 자리를 줄 때 돈이 세상을 다스리는 거예요. 그런 측면에서 지금 돈이 세상을 다스린다는 말은 할 수가 있어요.
돈만 아니라 현대판 우상이라고 하는 이 권력도 그래요. 섹스, 얼굴, 몸매 셀럽, 컴퓨터 게임, 스포츠 경기 요즘에 AI도 다 그렇습니다. 이것들은 스스로 신이 될 수 없는 것들이에요. 이것들은 가만히 두면 사람을 다스릴 수 있는 것들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는 것은 사람들이 이것들에게 사람들을 다스릴 수 있는 자리를 내어주고 그들이 그들의 그것들이 그들의 주가 되게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한 것들 중에는 진짜로 인생의 주가 될 수 있는 것이 하나도 없어요. 지금 말한 것들은 모두 사람의 다스림을 바라고 그것도 좋은 다스림, 선한 다스림 잘 받아야 합니다. 그것이 돈이든 물질이든 몸이든 컴퓨터이든 우리가 좋아하는 게임이든 스포츠 경기이든 모두 다 그렇다 하는 것이에요.
진짜로 문제가 되고 경계해야 할 것은 돈도 아니고 섹스도 아니고 권력도 아니고 게임도 아니고 AI도 아니며 그것들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는 사람들, 그것들을 이용해서 주가 되려고 하는 사람들, 그것들을 이용해서 남의 것을 더 많이 뺏어가고 그것들을 이용해서 남의 위에 올려가려고 하는 그러한 사람들이는 것이에요.
아시겠어요? 우리 청소년 여러분들도 아시겠어요?
하나님은 다릅니다. 하나님이라고 부르는 분이 정말로 존재하신다면 사람이 그에게 다스림의 자리를 내어주는 것에 상관없이 인생의 주인이시죠 그렇지 않겠습니까?
하나님을 주로 부르지 않고 그에게 주님의 자리를 내주지 않는다고 하나님이 인생의 주가 아닌 것이 아니죠.
그럼 예수님은 어떻겠습니까? 예수님 예수님은 주가 될 수 없는 피조물인가요 아니면 사람들이 신으로 만들어 놓은 우상인가요? 아니면 사람들의 반응과 무관하게 정말로 하나님이신가요?
답은 이미 주어져 있습니다. 첫 번째는 유대인들이나 무슬림들 믿지 않는 사람들의 대답이고 입장이에요. 그들에게는 예수님은 그냥 우리와 같은 사람일 뿐입니다. 뛰어나봐야 선지자 정도일 뿐이죠.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에게는 어떻습니까?
성경이 전하는 대로 예수님은 하나님이 되십니다. 그리고 근거는 성경에 신실하게 기록된 증언들,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기를 목숨을 내어주면서 주 순교적인 사람 삶,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정말로 주로 믿고 사는 우리 각자가 겪는 실제적인 경험들, 그리고 그 모든 것에 근거한 우리의 아주 합리적인 판단이 근거가 되는 것이죠.
여기에서도 구분이 있어요. 앞에서 하나님과 관련해서 구분이 있다면 하나님을 하나님으로서 주로서 받는 사람들과 하나님을 믿지 않고 거부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이 예수님의 경우도 구분이 있는데 주가 될 수 없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은 주가 될 수 하나님이 될 수 없는 것에 관한 과 사람들과 무관하게 사람들의 반응과 무관하게 이미 하나님이신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것과의 관계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있고 그리고 그를 주로 받은 사람들이 있다.
우리가 이렇게 이야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는다고 하는 것은 로마 황제를 주로 인정한다는 것처럼 그냥 말로 하는 것이 아니고 또 우리 머릿속에만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에 구체적으로 나타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전의 삶 곧 주인이 없거나 자신이 주인 되거나 아니면 주인이 될 수 없는 것들을 주인으로 삼아서 살았던 이전의 삶을 떠나버리고 그것의 뜻과 단절하고 이제는 주 안에서 밝혀진 이 밝고 귀한 새로운 삶으로 나아간다는 선언과 같아요.
예수님이 나의 주님입니다고 말하면 이제 내가 정말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삶으로 나아갑니다는 고백이 선언이 담겨 있다 하는 것이에요. 그래서 오늘 6절 말씀에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본문은 예수님의 주 되심에 근거한 삶, 예수님이 주님 되심에 근거한 삶을 세 가지 은유로 설명을 하는데 하나는 길이에요. 오가 하나는 길 또 하나는 나무 그리고 세 번째는 건물입니다. 이 은유에 따르면 믿는 우리는 길로 행하는 사람이고 그리고 뿌리를 가진 나무와 같고 세 번째로 터 위에 세워진 집과 건물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은유에서 주님은 우리가 믿고 받은 주님은 걷는 자의 길이 되고 그리고 나무를 지키고 그 나무에 생명을 공급하는 뿌리와 같고 건물의 견고한 터와 같다고 얘기를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이 부분에서 이렇게 다른 여러 비유들을 사용을 했을까 우리가 묻을 수 있어요. 짧은 본문인데 여기에 길 나무, 건물 세 가지 비유가 들어왔잖아요. 그런데 비유는 다르지만 은유는 다르지만 전하는 메시지는 공통적으로 있는 겁니다.
칼뱅의 주석으로 말하자면 이 골로새 교회에 들어오는 거짓 교훈들을 대적하는 의미가 있는 거예요. 맞습니다. 그래서 예수의 길은 확실하여서 가장 확실하여서 그 길로 행하는 자는 넘어지거나 실족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의 뿌리는 깊게 내려가고 정말로 풍요로워서 나무에 생명을 공급하고 나물 농어치려는 모든 공격에서 나무를 남은 인생을 지켜줄 것입니다.
예수의 터는 바람이 불고 창수가 나도 그 위에 세워진 집이 넘어지지 않게 흔들리지 않게 우리 우원의 집의 공격을 받은 분들이 있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지켜준다는 것인데 이 정도 되면 한국말로 어려운 난공불락이라고 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그 안에서 행하고 그 안에 뿌리를 내리며 그 안에서 새움을 입으라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과정의 의미가 담겨 있어요. 프로그래스 또 그로스라는 이런 과정과 성장의 의미가 담겨 있는 것입니다. 시작과 방향은 이미 다 주어져 있어요. 이제 할 것은 잘 출발하는 것 그래서 가진 믿음이 삶으로 잘 나타나는 거예요. 우리 학생들 청년들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 들어오면 시작과 방향은 확실하게 세워집니다.
그런데 그 길로 행하면서 그 안에 들어온 이 말씀의 씨앗 복음의 씨앗이 자라나는 거예요.
열매로 피어나는 겁니다. 그것을 여기서 말하는 것이에요.
어떤 삶입니까?
뿌리를 내리고 계속 내리는 거죠.
그 뿌리가 뭐예요?
그리스도에요. 그리고 세움을 받고 견고히 세움을 받는 겁니다. 어디에 예수 그리스도의 위에 그의 사랑 위에 우리가 찬양했던 것처럼 그의 사랑 위에 우리의 삶이 견고히 세움을 받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 굳게 서서 믿음도 아무 믿음이 아니라 전해 받은 그 믿음 위에 굳건히 서서 감사함으로 넘치는 삶, 이것이 성경이 교회와 성도에게 보여주는 신앙인의 삶이라는 것이에요. 이건 청사진과 같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거고 우리는 각자의 삶으로 그것을 이루어 나가는 겁니다. 출발도 그리스도요. 과정도 그리스도여, 목표도 그리스도가 되는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 삶이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영접 주로 받은 저와 여러분의 삶이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바라고 축원합니다.
◈ Messenger’s Note:
“In his heart, a man plans his course, but the LORD determines his steps.” (Proverbs 16:9)
“Nevertheless, not my will but yours, be done.” (Luke 22: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