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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레네우스 신학의 이해
A Understanding of Irenaeu’s Theology
유정우 교수
(전 평택대 부총장, 전 교회사학연구원 원장, 역사신학)
이레네우스는 교회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인물이다. 그는 2세기 후반 인물로 속사도 신앙을 계승한 교부이며 그의 시대는 변증가들과 일치한다. 변증가들과는 달리 교회의 정통신앙을 계승하고, 그가 헬라 교부이면서 서방의 신학의 기초를 놓는다. 그의 신학은 “이단 논박”이라는 저술에 잘 나타나있고, 초대 교회 이단인 영지주의로부터 사도적 신앙을 보호한 인물이며, 교회를 영지주의로부터 보호하는 노력이 그의 신학이었다. 그의 구원론은 총괄갱신 교리에 잘 나타난다. 이 논문은 이레네우스가 이단으로부터 기독교 사도적 신앙을 보호했다는 점에서 그의 신학사상을 살펴 본 것이다.
Ⅰ.들어가는 말
우리는 이레네우스를 카톨릭 교회 신학의 비조(鼻祖)라고 한다. 이레네우스는 최초의 교부(敎父)이며 사도시대와 속사도(續使徒) 시대 그리고 변증가들의 시대를 마감하고, 3, 4세기 교부들로 이어주는 교차로에 위치한다는 점에서 교회사적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이레네우스는 2세기 하반기에 활동한 교부이다. 그는 속사도 교부의 신앙을 이은 교회의 인물이었다. 이와 같은 연대는 변증가들의 시대와 일치한다. 교회사에서 제1세기를 사도시대, 제2세기 전반을 속사도 교부시대라고 하면, 제2세기 후반은 변증가들의 시대이다. 이 시대에 이레네우스는 변증가들과는 그 방향을 달리한 활동을 하였다. 변증가들이 이 시대에 기독교 철학자들로서 대외 사상을 다루었다면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정통 신앙을 계승하고, 이를 체계적으로 교회에 가르치기에 힘쓴 신앙의 의식적(意識的) 계승자이었다. 그러기에 그는 ‘교회의 최초의 위대한 조직 신학자’라 일컬어진다1).
변증가들이 외부로부터 오는 교회의 위협에 힘쓴 것에 반해, 이레네우스는 목회자로서 영지주의에 대한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는 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사도들의 신앙을 계승하는데 관심을 가졌다. 그는 헬라교부이면서도 서방에서 활동하여 라틴 신학의 기초를 놓음으로 헬라 신학과 라틴 신학의 교량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과 소아시아 출신으로 폴리갑의 성경적 신학의 전통을 가지고 서방 신학의 기초를 놓았다는데 그의 중요성이 있다2). 이레네우스는 라틴 신학의 원조라고 하는 테르틀리아누스의 직접적인 사상적 선배라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전통, 구속사(求贖史), 신 구약의 일치성 등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지만, 그 보다도 2세기의 영지주의자들과 논쟁에서 그가 기독교회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음을 안다. 그리고 그는 기독교를 진정한 철학으로 보려는 변증가들의 견해에 반대했다. 그는 헬라적 사색을 동원하지 않았고, 계시의 내용이 단지 새로우며 보다 나은 철학에 불과하다는 견해에도 입장을 달리했다. 그에게는 성경적 전통만이 신앙의 유일한 근원이었다3).
우리는 한 시대를 끝내고 다른 시대를 여는 교차로에 있었던 이레네우스가 이전 사상과 연속성과 불연속성 둘 모두를 지니고 있는 인물임에 관심을 가져야 하고, 그의 신학에 대해 이해할 수 있는 범위에서 이해해보려고 하는 노력은 중요하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우리가 그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인물 그리고 그의 신학사상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Ⅱ.이레네우스의 역사적 배경과 인물
이레네우스는 희랍 사람이었다. 그는 소아시아의 기독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서머나에서 135년경에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에 속사도인 서머나 감독 폴리갑으로부터 배웠다. 폴리갑은 사도 요한을 알고 있었다. 이레네우스는 170년경에 고울(Gaul)의 리용(Lyon)에 이주하였고, 그는 177년경에 리용의 기독교 공동체의 장로가 되고, 리용의 감독 폰티우스(Ponthius)의 순교후 감독을 계승했다. 리용의 감독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목회자가 되고 변방의 켈트족에게 선교했다. 그는 교회를 이단으로부터 보호하고 교회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노력했다. 이레네우스의 관심은 이단 반박과 정통 신앙의 강화에 있었다4). 그는 3세기초에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것으로 우리는 그가 2세기 후반에 활동한 사람임을 알 수 있다. 2세기 후반기의 교회는 아직 대외적으로 박해를 받고 있었다. 대내적으로 교회는 영지주의 위협을 받고 있고 교회 내에서 일어난 이단 몬타니즘의 위협을 받았다. 이러한 위협은 사도적 전통의 신앙과 신학을 발전하게 하였다5).
이레네우스는 저스틴에게 영향을 받았고, 초기 희랍 신학과 라틴 신학의 중개 역할을 했다. 라틴 신학은 이레네우스와 동시대 사람인 터툴리안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저스틴이 변증가였고 이레네우스는 이단에 대하여 교회의 정통 신앙을 수호하는 제일 처음의 교부였다. 이레네우스란 인물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되는 것은 2세기 후반에 변증가의 역할과는 다른 역할을 한다는 점이다. 변증가들은 대외 사상을 상대로 기독교에 대한 변증을 시도했으나,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사람으로 영지주의에 대한 정통 신앙의 수호에 관심을 두었다는 점이다6).
우리는 이레네우스의 생애에 대해 많은 것을 알지 못한다. 2세기 전반에 많은 반 이단 문서들이 없어졌는데 반하여 남아 있는 반 이단 문서중 가장 오래 된 것이 “리용의 감독” 이레네우스의 것이 있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남아 있는 두개의 저서가 있다. “소위 그릇 된 지식에 대한 반박과 성토”(Refutation and Overthrow of Knowledge Falsely So-called)가 있다. 보통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이라는 제목으로 알려져 있다. 이 저서는 주로 영지주의를 반박한 책이다. 그리고 “사도적 가르침의 논증”(Demonstration of Apostolic preaching)이다. 이 외의 다른 문서들은 모두 상실되었다7).
전자는 보통 ‘이단 논박’(Adversus haereses ; Against Heresies)으로 통하는데, 5권으로 되어있다. 희랍어 원전은 상실되었다. 라틴어 번역본은 완전히 보존되었고, 마지막 2권에 대해서 아르메니아 판이 남아 있다8).
Ⅲ.이레네우스의 신학
1.그의 저서에 대한 이해 : ‘이단 논박’
이레네우스의 저서는 위에서 말한 대로 두개의 저서가 있다. 이레네우스는 이단으로부터 초대 교회를 보호하는데 있어서 몬타니즘보다는 영지주의가 훨씬 문제가 되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현존하는 저작이 반 영지주의적이고 몬타니즘에는 오히려 동정적이지 않았는가를 생각할 수 있다9). "이단 논박"은 주제에 따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1권은 영지주의에 대한 해석, 2권은 이성에 의하여 논박함, 3-5권은 예언서, 주님의 말씀과 사도들에 기초한 성경으로부터의 논박으로 그 내용이 되어 있다10).
"이단 논박" 제 1권에서 영지주의 이론을 해석한다. 특히 발렌티누스의 제자인 “프톨레마이우스의 제자들”에 대해서 자세히 설명했다. 이레네우스의 대 전제는 1권에서 상식이하의 허황된 비밀 때문에 매력을 느끼지만 그들의 가르침을 자세히 분석하면 그 자체를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이다.(서문과 제1권의 마지막 두 장을 보라) 그가 발렌티누스의 체계에 관심을 갖게 되는 것은 자기의 친구가 프톨레마이우스의 여지주의에 빠져 있음을 알고서부터였다. 그는 하나의 영지주의 체계를 논박하면 다른 모든 체계를 논박한 것과 같다는 생각을 갖는다. 그는 말하기를 “바닷물이 짜다는 것을 알기 위해 바다의 물을 다 마실 필요는 없다”고 했다11).
영지주의는 2세기와 그 이후에 나타난 기독교의 이단적 종교사상이다. 영지주의라는 명칭을 이 사상체계가 영적 ‘지식’(gnosis)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는데 시작한다. 이 사상체계가 기독교 안에 나타난 것은 2세기였으나 그 전의 이교도가 가졌던 이원론적 종교사상에 그 기원을 가지고 있다. 신약성서의 후기 저작이라는 요한 1서와 목회서신에서 이 영지주의를 경계하고 있다12). 2-3세기에 반 영지주의 변증가들인 이레네우스, 테르틀리아누스, 히폴리투스등의 저술로 영지주의 사상이 파악되었다. 영지주의는 복잡한 사상체계를 가지고 있으며, 초기 영지주의의 학자는 발렌티누스(Valentinus), 바실리데스(Basilides), 마르시온(Marcion)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계시된 거룩한 비밀인 ‘지식’이 인간의 기원이며 그것을 통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보았다. 그 지식은 ‘생명의 불꽃’으로 표현되고, 그것이 인간 속에 주입됨으로써 구원받을 수 있다고 본다13).
영지주의는 초월적이고 알 수 없는 하나님과 ‘데미우르고스’(demiurge)로 표현되는 창조주 하나님을 구별한다. 초월적인 하나님과 인간이 사는 물질의 세계사이에 상 하, 창조 피조관계로 설명되는 ‘에온’(aeon) 서열이 있는데, 데미우르고스는 초월적 하나님에게서 유출된 고위 에온이다. 구약의 여호와 하나님이 데미우르고스로 해석하여 절대자 하나님과 구별한다. 그리스도도 ‘지식’을 전달하는 절대자 하나님의 특사로 해석한다. 그리스도는 잠시 인간의 몸을 빌어 그 안에 거하였을 뿐이고, 본질적으로 인간의 육신을 입지 않았고, 따라서 죽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가현설이 나오기도 한다. 요약하면 영지주의는 영육 이원론이다14).
제 2권에서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를 상식으로 논박했다. 2권에서 플레로마와 에온의 이론에 대해 냉혹한 논리로 공격한다. 어떤 사유적 방법도 사용하지 않았다. 1권에서처럼 발렌티누스와 그의 제자들에 대하여 대부분을 할애한다. 마지막 부분에 가서 다른 영지주의들에 대해 논박한다15).
마지막으로 남은 3권은 영지주의를 성경적 입장에서 논박했다. 3권에서는 구약 성경을 사용한다. 이것은 저스틴의 “예언”과 “유형”이론을 상기시킨다. 이레네우스가 공격하는 것은 구약을 배척하는 것과 우의적 해석으로 뜻을 모호가게 하는 것 두 가지 사실이다. 잘 알려진 대로 영지주의는 구약의 하나님과 지고(至高)의 하나님 사이에는 반대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에 이레네우스는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이 연속성이 있음을 주장한다. 이러한 관심 때문에 유형론적 주석을 했다16).
2.이레네우스의 신학의 일반적 이해
1)창조론
이레네우스의 신학은 그의 이단 논박에 나타난다. 그의 반 영지주의 사상에서 그의 신학은 나타난다. 그의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일치성 등 주요한 사상이 거기서 나타난다. 잘 아는대로 영지주의자는 창조와 구속을 연결시키지 않는다. 구약의 하나님으로부터의 구속의 섭리를 영지주의자는 믿지 않는다. 구약의 내용에서 신약의 메시아를 언급하는 사실을 유형론으로 설명한다. 창조는 거룩한데 사탄이 인간을 타락하게 하였으며, 그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건은 사탄에 대한 정복이다. 사탄의 왕국과 그리스도의 왕국의 대립은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로 끝이 났고, 그리스도의 주권은 사탄의 세력을 통치하게 되었다17).
이레네우스는 신구약을 일치성 아래서 볼 때만이 이러한 총체적 구속사 개념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영지주의의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의 구분은 성경의 진리를 왜곡하였다는 것이다. 성육신의 진리를 부인하는 영지주의에 대해 이레네우스는 “만일 그가 참으로 사람이 되지 않았다면 그의 피로서 우리를 참으로 구원하지 아니하였을 것”이라면서 성육신의 역사성을 강조한다18).
역사적 성육신에 기초한 구속사와 신구약의 연속성은 에피데이키스(Epideixis)라고 불리우는 단편 작품 “사도의 가르침의 논증”에 더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다. 이것은 요리 문답집이며 변증적 색체가 깔려 있다. 이것의 목적은 요리 문답자의 교육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이미 믿는 자의 신앙을 강화시키는 데 있다19).
이레네우스는 사유적 원칙에서 결론을 유도하는 조직적인 신학자가 아니다. 그러므로 그의 신학의 일관된 원리가 무엇인지 찾을 수 없고 “에피테이키스”에서 보여 준대로 창조주에서 최후의 완성에까지 구원의 역사를 추구하는 과정을 따라가면 된다.
하나님은 태초부터 계셨으며 무에서 만물을 창조했다20). 이레네우스는 창조에 큰 관심을 갖는다. 그 이유는 창조는 인간과 세상에 큰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발렌티누스의 영지주의는 그 때에 유행하던 이론들처럼 하나님은 세상을 물질로 불완전하게 만드는 데 관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를 설명하기 위해 영지주의는 지고(至高)의 신적 존재와 이 세상을 만들어 낸 오류 사이에 에온들(aeons)을 연속적으로 열거했다. 그러므로 마르시온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의 창조를 구별했다. 이에 대해 이레네우스는 반대하여 우리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과 우리를 창조한 하나님은 동일하다고 주장한다21).
이레네우스는 만물은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고 존재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거역할 수 없다고 했다. 심지어는 마귀까지도 하나님이 창조한 것이며 마귀가 갖고 있는 힘은 일시적이며 한계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지금 여기에(hic et nunc)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다. 마귀가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혼돈시키기는 하나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여전히 하나님이다22).
하나님은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으며 영지주의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달리 무에서 창조이다. 영지주의의 하나님의 구분은 잘못이며 하나님은 한 분이고 동일하다고 했다. 이레네우스도 저스틴과 같이 아들이 로고스라는 사실을 강조하지만 저스틴 보다는 하나님과 로고스 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했다는 면에서 차이가 있다. 삼위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했으며 그것은 아들만의 사역은 아니었다23).
이레네우스는 교회의 교리의 해석자이다. 그리고 영지주의에 대한 방어자였다. 그는 서로 다른 맥락에서 논거를 사용했다24). 그러나 그의 신학은 조직적이기 보다 일정한 주제를 계속 되풀이하는 통일성이 있다.
2)죄론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아담은 불완전한 인간으로 창조되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형상인 아들에게 이르기까지 성장해야할 존재였다. 아담은 인간의 원래의 상태로 낙원에서 방황했다. 우리보다 더 월등하지 않았다. 아담은 성장해야할 존재였다. 이 성장도 아담의 능력으로 스스로 취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계속적인 창조의 한 부분이었다25).
하나님의 피조물로 계속 성장해야할 인간은 자유로웠다. 이 자유는 이상적 개념이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을 완수할 가능성이었다. 아담의 자유는 하나님의 전능과 결코 견줄 수 없는 것이며 그 전능성의 결과, 그리고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창조는 사탄과 인간의 타락으로 이어졌다. 천사도 하나님이 창조했지만 성장할 필요가 없다. 이 때문에 사탄은 질투심으로 인간을 유혹하게 되었다. 이 유혹은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반대하기 위함이 아니고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을 빨리 달성하므로 하나님의 질서를 뒤집기 위해서였다. 사탄이 “네가 하나님 같이 될 것이다”라고 한 것은 창조 목적을 단순하게 긍정한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유혹에 넘어감으로 하나님의 계획을 파괴하고 죄와 사망의 노예가 된 것이다26).
물론 하나님의 능력과 사탄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도 언급하지만, 이레네우스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러한 예속 관계를 이해하는 것이 근본적으로 필요하다. 하나님과 마귀사이의 적대 관계는 허구적인 것이 아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하여 그 계획 마저 뒤집어 엎으려고 시도한다. 마귀는 부분적이며 일시적인 승리까지 얻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결국 승리할 것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이 세상을 다스리는 분은 하나님이지만 마귀는 그 안에서 하나님의 계획을 좌초시키려고 온갖 노력을 한다. 마귀를 저지하시는 하나님은 마귀가 이용하는 도구 그 자체까지도 지배하시는 주가 된다. 마지막 최후의 완성단계는 만물이 하나님에게 귀속되고 마귀는 멸망당한다. 그 날이 오기까지 투쟁은 계속되며 승리가 약속되었다고 해도 현재의 전투는 여전히 실감나게 진행된다27).
인간은 타락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종이 되었다. 하나님과 사탄사이에서 인간은 어느 하나에 예속될 수밖에 없다. 아담은 자신을 사탄에게 넘겨주었다. 따라서 인간은 마귀의 종이 되었다. 이것은 첫째로 자신의 성장이 저지 당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사탄이 가진 세력, 즉 죄와 사망에 붙잡혀 있다는 뜻이다.
타락을 인간 성장의 저해로 보는 것은 서구 신학의 공통적인 이해와 아주 다른 이해이다.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타락이란 인간의 본래의 완성을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자신의 성장이 저해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28).
물론 죄와 사망은 인간이 사탄에게 굴복함으로써 사탄의 종이 되게 한 마귀의 도구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 마귀의 도구까지 이용해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한다. 그러므로 사망은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의 인간의 한계이다. 인간이 죄에 예속된 것은 선하심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은총을 찬양케하는 기회를 만들어 준다29).
타락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인간을 계속 사랑한다. 이렇게 하여 하나님은 자신의 계획을 수행해나간다. 이 섭리는 하나 뿐이지만 특별한 계약들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가운데 알리어졌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그 절정을 이룬다. 이 계약들은 4가지이다. 첫째가 아담과의 계약이고 이는 노아 홍수까지 계속되고 둘째는 노아의 계약으로 출애급까지이고 셋째는 모세의 계약으로 그리스도의 강림으로 끝난다. 네번째는 그리스도의 계약으로 시간의 마지막까지 지속될 것이다30). 이러한 계약들 가운데 이레네우스는 마지막 두 가지, 율법과 그리스도의 계약에 대해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율법은 하나님의 사랑의 한 부분으로 인간의 죄를 억제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다. 율법에 순종하는 것이 인간의 최종 목적은 아니다. 율법은 노예적인 예속도의 기질을 자아낸다. 죄의 기질과 반대되고 다르다. 율법으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실현시키기에 필요한 자유를 얻을 수 없다. 그러므로 율법은 그 보다 더 우월한 새로운 계약을 약속해 주는 보장에 불과하다. 율법은 규율이며 약속이다. 따라서 율법의 효력은 언젠가 끝이 있음을 뜻한다. 그러나 율법은 하나님의 뜻을 완수하기 위해 인간을 인도하는 수단으로 주어진 것이다. 이 뜻은 변하지 않으므로 율법은 결코 완전히 폐기되지 않는다. 율법의 핵심인 도덕법과 특히 십계명은 지금도 우리의 순종을 요구한다. 그러나 고대의 제의적(祭儀的)인 의미의 율법은 그리스도로 폐지되었다. 이 제의적인 율법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선포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입장으로 이레네우스는 신약과 구약의 통일성 즉 계속성과 완성을 동시에 주장한다. 그는 여기에 의존해서 신구약의 대립을 주장하는 이론을 배격한다.
3)성령론
이레네우스는 “두 손”이라는 은유(metaphor)를 사용한다. 하나님은 “두 손”으로 이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다. 아들과 성령으로 창조하고 다스린다. 이레네우스는 삼위일체 교리를 건너뛴다. 하나님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라고 하며 그 관계는 자세히 언급하지 않는다. 그는 아들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여 저스틴처럼 하나님과 세상의 중간자로 설명하지 않는다. 하나님과 말씀사이의 통일성을 강조한다. 하나님의 손들 곧 아들과 성령이 중간적 존재가 아니고 하나님이 세상과 관계를 가질 때 나타나는 양식이라고 했다31).
이러한 3위의 하나님이 인간을 그의 형상대로 창조했다. 인간 자신은 하나님의 형상이 아니고 아들이 하나님의 형상이다. 그러므로 아들을 통해서 아들 안에서 인간이 창조되었다. 이 형상은 인간 안에서 찾아 볼 수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성장하여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데까지 이를 수 있도록”(엡 4;13) 가르쳐 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장 개념은 이레네우스를 이해하는 데 중요하다32).
이레네우스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될 때 성령의 움직임과 그 역학을 말하고 있다33). 성령은 하나님의 창조 역사에 함께 활동하셨다. 성령은 창조된 것이 아니고 성부와 함께 하는 말씀이며 지혜로서 하나님의 손들이다34). 하나님의 창조의 손은 아들만이 아니라 성령도 포함된다. 성령은 인간으로 하여금 아들의 형상이 되게 하며 인간과 그리스도를 연합시킨다. 물론 인간과 그리스도의 일치는 부활이 있기 까지는 완성되지 않을 것이나 인간은 믿음에서 한 표적으로 성령을 소유하는 것이고 불화에서는 성령이 imago similitudo에 인간을 순응케 할 것이다. 이것이 창조 때 하나님이 창조하였던 바다. 아들과 성령은 부활과 교회에서 하나의 실재이다. 그러나 거기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창조 사역 초기부터 있었다. 성령은 하나님의 figuratio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의 힘을 의미한다35).
그는 이단 논박에서 성령 받은 사람은 참으로 순수하고 참된 인간이라고 하였다. 만일 인간이 성령을 거역하면 인간이 적의 지배하에 있으므로 본래의 상태에 있지 않게 된다. 이레네우스는 성자와 성령을 밀접하게 연관시켜 논증한다. 하나님이 이성적이고 그래서 그분의 로고스를 가지고 계시면 그 분은 또한 영적이고 그러므로 그분의 영을 가지고 계신다.
이레네우스는 성령을 신적인 지혜와 동일시한다. 그렇게 하므로 안전한 성서적 기초를 가지고 성령론에 관한 그의 교리를 강화하였다36).
4)교회론
교회는 총괄 갱신의 사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아담이 인간의 머리이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듯이 그리스도가 교회의 머리가 됨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교회는 사탄을 정복한다. 그리스도는 마귀를 정복하였고 인간에게 하나님의 형상을 충만히 이루기까지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시켰다. 그런데 이 가능성은 그리스도가 머리인 육체에게만 주어졌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고 교회 안에서 그리스도는 세례와 성찬을 통해서 총괄 갱신 사역을 진행시킨다. 세례와 성찬은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켜 준다37).
이레네우스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베풀어진 세례만이 기독교인의 삶을 시작하게 한다고 본다. 그는 세례보다 성찬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세레는 '영원한 삶의 보장'이며 동시에 '하나님을 향하여 다시 태어나는 것'으로 우리가 다시 죽을 숙명의 인간의 자녀가 아니고 영원한 하나님의 자녀됨을 보장한다. 세례를 통해서 그리스도의 몸을 입는 새로운 인간이 되며 우리 몸의 머리가 되신 그리스도 우리 주님의 부활에 동참하게 된다38).
이레네우스는 영지주의의 교회관에 반대했다. 영지주의 우주론에서는 교회는 신비적 에온(aeon)이었다. 그는 이러한 교회관에 반대하여 교회를 새 이스라엘로 그리고 그리스도의 몸으로 이해한다. 그리고 교회는 신비스러운 능력을 받았고 그 능력을 베푼다. 교회는 유일한 성령의 영역이고 성령은 교회에만 위탁되었다. 오직 교회 안에서만 우리는 그리스도와 교통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진리의 유일한 저장소이다.
이는 교회가 사도적 문서, 구전, 신앙을 독점하기 때문이다39). 이레네우스는 사도적 전승을 강조한다. 이 사도적 전승이 감독에게 위탁되었다. 그러므로 교인은 감독에게 복종해야 한다40).
그런데 여기서 사도적 전승이란 사도적 신앙과 생활의 계승이다. 로마 카돌릭의 베드로의 권세를 의미하는 그런 전승이 아니다. 사도의 전승이란 교회가 하나라는 하나의 신앙이란 뜻이다41).
이레네우스가 이 우주적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경우 그리스도의 능력은 지체에게 나누어진다. 그의 몸인 교회를 통해 사람은 새로운 존재가 된다. 부패하지 않은 창조의 역사는 다시 이루어져 인간은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서 인간은 지체로써 새로운 친교관계를 갖게 된다. 이것은 화해를 가져온다. 하나님과 인간, 인간과 인간사이의 화해를 가져온다. 이 화해는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며 믿음과 사랑으로 이루어진다.
이 친교는 총괄 갱신의 한 표현이기도 하다42).
5)성찬론
"이단 논박"이 기독교 교리에 대한 조직적 해석이 아닌 것처럼 이레네우스는 성찬론을 통해서 이단을 논박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특히 육체와 물질을 경멸하는 자들의 모순을 들추어내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이레네우스의 성찬 신학도 자세하거나 체계가 짜여진 해석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단 논박"의 변증적인 본문들을 통해서 물질에 대한 그의 결론을 끌어낼 수 있다43).
이레네우스에 의하면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육체에 속한 지체들은 영양을 공급받으며 주님과 연합되며 그리스도의 생명과 피에 동참하게 된다. 잔을 마시고 떡을 먹음으로써 신자들은 실제적으로 영양을 공급받아 최종적인 부활을 보장받는다. 그 이유는 그가 취한 몸과 피는 불멸이기 때문이다44). 성찬을 통해서 그리스도는 창조를 멸시해서는 안됨을 가르치신다. 왜냐하면 떡과 포도주는 창조의 일부분이고 이것을 사용해서 신자들에게 영양을 공급해 주셨기 때문이다.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할 때 교회는 인간을 그리스도에게 연합시키는 사역을 완수할 수 있다. 그리고 교회는 이 목적을 이루기 위해 올바른 교리를 보존하고 가르쳐야 한다. 그리고 지체의 통일성을 보존해야 한다. 그러므로 이레네우스는 이단을 공격했다. 이단들은 교회에 위협만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사역의 효과적인 수행에도 위협이 된다. 그 이유는 그들이 거짓 이론을 가르쳐서 신자들의 지체를 분리시켜 놓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전수 받은 교리를 확고히 지켜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레네우스는 사도적 계승의 교리를 소개했다. 이 교리는 초대 교회에서 상당한 기간 동안 유효한 도구였으나 후에 논쟁의 초점이 되기도 했다. 오류와 진리 사이를 구별할 수 있는 규범은 사도들로부터 물려받은 교리이다.
3.이레네우스의 “총괄 갱신” 교리
이레네우스의 신학 전체에 있어서 근본적인 원리가 되는 것은 구원론이다. 그의 근본 사상은 창조의 하나님과 구속의 하나님이 동일하다는 것이다. 이 사상은 그의 영지주의에 반대하는 주장이다. 신-인간이 신 그리스도는 인간구원의 중보자이며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다. 하나님은 그의 구원 계획의 마지막 언약인 복음을 통해 인간과 만물을 새롭게 한다. 이 언약에 의해 하나님은 둘째 아담인 예수 그리스도로 인간과 유대를 갖는다. 둘째 아담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이룰 수 있는 가능성을 회복하였다45).
이레네우스의 신학의 중심점은 그리스도이다. 그리스도는 창조와 구속의 연속성을 나타내는 근거이다. 그런데 대부분의 이단들은 이를 부인했다.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지금 구원을 베푸는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인간의 궁극적 목적과 원형인 그리스도는 인간들 가운데 거주하였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레네우스는 이 사역을 “총괄 갱신”(recapitulation)이라고 불렀다.
총괄 갱신은 이레네우스의 근본적 주장 가운데 하나이다. 그의 신학을 이해하기 위해서 꼭 알아두어야 한다. “총괄 갱신”이라는 개념은 고대에 여러 가지 의미로 사용되었다46). 이레네우스도 하나 이상의 의미로 사용하였다. 이레네우스가 사용한 총괄 갱신 가운데서 가장 중심적이며 특징적인 의미는 그리스도의 사역을 새로운 인간성의 총화로서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보았다는 점이다. 인간의 구속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은 최초부터 작용했지만, 이 계획은 그리스도가 성육신 함으로 만물을 총괄적으로 갱신하는데서 가장 크고 최종적으로 표현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육신 이전에는 즉 아들이 하나님의 활동 가운데 잠재적으로 계셨던 때는 총괄 갱신을 엄격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총괄 갱신은 과거에 일어난 활동들의 정점이며, 요약이므로 과거 사건의 맥락에서만 이해될 수 있다47).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의 총괄 갱신은 새로운 출발점이다. 그렇지만 과거의 사건들과 긴밀한 관계가 있다. 성육신은 이 세상의 역사의 새로운 시작이지만 창조에 거역되지 않는다. 창조의 계속이며 완성이라고 보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새 아담이다. 그 방향은 다르지만 새 아담 안에서 옛 아담의 역사는 반복된다. 아담 안에서 인간은 아들을 닮도록 창조되었다. 그리스도 안에서 아들은 인간을 자신 안으로 받아들인다. 인간 그리스도는 아담이 유혹을 받지 않았을 때 지닐 수 있었던 완전한 모습이었다. 인간은 아담 안에서 비록 자신을 마귀에게 넘겨주었지만 그리스도를 새로운 출발점으로 삼고 다시금 아들의 형상에까지 자유롭게 성장해 갈 수 있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이레네우스는 아담과 그리스도 사이의 유사성을 강조했다. 아담은 처녀 흙(virgin soil)으로 빚었고, 그리스도는 처녀(virgin)인 마리아를 통해서 이 세상에 왔다. 인간의 타락도 여인의 불순종으로 일어났다. 또 다른 여인의 순종으로 인간은 회복하게 된다. 아담은 낙원에서 유혹 받았고 그리스도는 광야에서 유혹 받았다. 나무를 통해서 이 세상에 유혹이 왔으며 십자가라는 나무를 통해서 생명이 우리들에게 주어졌다48).
그리스도의 총괄 갱신에 대한 또 다른 양상은 사탄에 대한 그의 승리이다. 이레네우스는 구속사를 전체적으로 하나님과 마귀 사이의 투쟁으로 이해했다. 결국은 하나님의 최종 승리로 끝난다. 아담 안에서 인간은 마귀에게 예속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총괄 갱신은 사탄에 대한 승리를 포함하여 우리를 해방하는 것을 뜻한다. 사탄은 아담 안에서 인간을 본래의 형상으로부터 소외시켰다. 그리스도 안에서 그 형상은 인간에게 결합되며 마귀의 목적은 전복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최초의 승리는 부활이 아니고 성육신이다. 하나님이 인간과 연합하면 사탄은 최초의 패배를 맛보며, 최종적인 멸망으로 걷게 된다49).
이레네우스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성과 인성이 서로 연합되어 있음을 논하지 않았다. 그것을 논하면 양성이 서로 대립되어 있음을 긍정하기 때문이다. 이와 반대로 인간은 하나님과 연합되도록 창조되었는데, 이 연합은 그리스도 안에서 달성된다. 더욱이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과 인간은 두개의 본성으로 이해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신성이 그리스도 안에서 인성에 연합되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인간에게 말하는 말씀이며 인간이 그 말씀에 응답하기 때문이다. 그는 본질적이기보다는 동적인 개념을 사용했다. 따라서 신성이 인성에 반대되지 않는다고 본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는 나중에 기독론 논쟁에서 피할 수 있었다50).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성육신은 악에 대한 승리의 시작일 뿐이다. 그리스도의 전 삶은 총괄 갱신 사역의 한 부분이다. 그리고 최종적 완성이 있을 때까지 계속된다. 사막에서 받은 그 시험은 사탄에게 대한 결정적 승리이다. 사탄은 새 아담을 타락시킬 수 없었다51).
그리스도는 삶과 사역을 통해서 인간의 삶을 총체적으로 누렷다. 그리스도는 인간을 사탄의 노예 됨에서 구원하였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은 악의 무서움 무기 곧 사망 그 자체까지 동원해서 사탄의 왕국을 정복했다. 마귀에 대한 최종적 승리는 그리스도의 마지막 승리이다. 그 때에는 만물이 그리스도에게 예속될 것이다. 우리는 부활과 완성 사이에 산다. 우리는 휴전 상태에 있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의 승리를 공고히 하므로 최후의 날에 이르도록 그 날들을 사는 것이다.
Ⅳ.맺는말
이레네우스는 속사도 교부의 신앙을 이은 교회의 인물이다. 그는 변증가들이 활동한 시대의 인물이면서 변증가와 달리 영지주의에 대한 이단을 반박하며 교회의 신앙을 보호한 인물이다. 그는 사도적 신앙 계승에 노력하였다. 그리고 그는 헬라 교부이면서도 서방에서 활동하므로 라틴 신학의 기초를 놓고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그의 신학은 "이단 논박"이라는 그의 영지주의에 대항하는 그의 저술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이러한 반 영지주의적 사상이 곧 이레네우스의 신학이다. 이단으로부터 전통적 신앙을 보호하기 위해 교회의 전통, 구속사, 신구약의 성경의 일치성을 강조한다. 영지주의는 창조와 구속을 연결시키지 않으며 구약의 하나님과 신약의 하나님을 구분한다. 이렇게 잘못된 이단인 영지주의로부터 교회의 신앙을 보호하기 위한 그의 노력이 곧 그의 신학이다.
위에서 살펴 본 그의 신학은 영지주의에 대한 논박으로 실제적이고, 목회적이다.
그리고 그의 구원관은 총괄 갱신의 사상에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신학에서 성육신 중심의 구속론이 싹트게 됨을 그의 이 총괄 갱신 교리에서 보게 된다. 그는 로고스 사상을 취하므로 그의 신학이 헬라 기독교 성육신 중심의 신학으로 기울어진다.
이레네우스의 주 관심은 교회의 신앙의 전통을 이단으로부터 보호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신학 전개는 기독교가 유대교로부터 이어받은 유일한 하나님에 대한 신앙과 그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속사에 대한 진리 수호이다.
각 주
1) 한철하, 고대기독교 사상, (서울: 기독교 서회. 1978), 43쪽.
2) 한철하, 같은책, 45쪽.
3) 박용규, 초대교회사, (서울: 총신대학 출판부, 1994), 228쪽.
4) Tony Lane, Christian Thought, 기독교 사상사, (서울: 나침반, 1987). 31쪽.
5) 이때 초대 교회는 ‘신앙의 표준, 감독의 권위, 신약의 정경, 교회의 조직’이 강조되었다. 이때가 고대 교회의 카톨릭 시대이며 카톨릭 교회의 성립이라고 한다.
6) 한철하, 같은책, 44쪽.
7)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Ⅰ). (서울: 대한 예수교 장로회 출판국, 1990), 194쪽.
8)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194쪽.
9) 주재용, 역사와 신학적 증언, (서울: 기독교출판사, 1991), 68쪽.
10) 박용규, 같은책, 229쪽.
11)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I. ed. by Cyril C. Richardson (New York: Simon & Schuster Inc., 1996), 23-31.
12) Henry Chadwick, Die Kirche in der antiken Welt, (Berlin: Walter de Gruyter, 1972) 32~40.
13) Ibid.
14) Ibid.
15)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195쪽.
16) Irenaeus, Against Heresies Book Ⅳ, 20.7-25.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196쪽.
17) 박용규, 같은책, 230쪽.
18) Irenaeus, Against Heresies, V. 2, 1.
19)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197쪽.
20) Irenaeus, Against Heresies, Ⅱ. 10.
21) Irenaeus, Against Heresies, Ⅳ, 6, 2. Ⅳ, 20, 2.
22) Irenaeus, Against Heresies, Ⅴ, 24.
23) 박용규, 같은책, 230-231쪽.
24) 이에 대한 분명한 예는 Against Heresies, Ⅲ, 22, 1이다.
25)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199쪽.
26)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200쪽.
27) 위의 책, 200쪽.
28) 위의 책, 201쪽.
29) Irenaeus, Against Heresies, Ⅲ, 23, 6.
30) Irenaeus, Against Heresies, Ⅲ, 11, 8.
31)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 책, 198쪽.
32) 위의 책, 199쪽.
33) 주재용, 같은책, 77쪽
34) 위의 책, 74쪽.
35) 위의 책, 77쪽.
36) 주재용, 이레네우스 사상, 한신논문집, (서울: 한신대학, 1991), 10쪽.
37) 후스토 곤잘레스, 앞의 책, 205쪽.
38) 위의 책, 206쪽.
39) J.N.D.캘리, 김광식 역, 고대기독교교리사, (서울: 한국기독교문학출판부, 1980), 221-222쪽.
40) 주재용, 앞의 책, 68쪽.
41) 한철하, 위의책, 48쪽.
42) 주재용, 위의책, 89-90쪽.
43) Irenaeus, Against Heresies, Ⅳ, 18, 4-5: Ⅴ, 2, 2-3.
44) Irenaeus, Against Heresies, Ⅴ, 2, 3.
45) J. L. 니이브, 서남동 역, 기독교교리사, (서울: 대한기독교서회, 1974), 138쪽.
46) 이 개념을 가장 먼저 사용한 기독교 기록은 에베소 1:10 이다. 이레네우스는 이 개념이 들어 있는 저스틴의 원문을 인용했다. 그렇지만 어디서 이 인용이 끝이 나는지 알 수 없다. 이 개념이 나타나는 문장은 저스틴의 인용 부분인지, 혹은 이레네우스의 언급 부분인지 구별할 수 없다.
47)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203쪽.
48) 후스토 곤잘레스, 같은책, 204쪽.
49) 후스토 곤잘레스, 위의 책, 204쪽.
50) 후스토 곤잘레스, 위의 책, 204쪽.
51) Irenaeus, Against Heresies, Ⅴ, 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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