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경은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 바위로 깎아 만든 무덤,
곧 돌무덤에 묻히셨다고 전합니다(루카 23,53)
□ 그러나 예루살렘이 함락되고,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박해가 계속되면서 예수님 무덤은 사람들에게 잊혀지
고 말았습니다.
□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칙령으로 그리스도교가
자유를 얻게 되자 예수님 무덤에 대한 관심이 되살아
났습니다.
특히 황제의 어머니 성녀 헬레나는 예수님 무덤을 찾
는 데 열성적이었습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헬레나 성녀는 꿈에 예수님 무덤
이 땅 속에 묻혀 있는데
그 위에 아프로디테 신전이 세워져 있다는 말을 듣고
는 무덤을 발굴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곳에 성당을 지었습니다. 그 성당이 예루살
렘의 예수님 무덤 성당입니다.
□ 예수님 무덤 자리에 성당이 세워지자 사람들은 자연
히 이 무덤 성당을 찾아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중세기에 예수님 무덤 성당은 특히 참회하는 고행자들
의 순례지가 됐습니다.
여기에는 사제들이 중죄를 지은 이들에게 예루살렘 성
지순례, 특히 예수님 수난과 관련된 장소들을 순례하
라는 보속을 준 영향도 있다고 합니다.
물론 그 순례의 중심은 예수님 무덤 성당이었습니다.
그곳은 또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곳이기도 하니까요.
예루살렘을 순례해 예수님 수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것 자체가 은총의 체험이었지만 또한 성지를 순례하고
온 이들은 전대사를 받는 특전을 누렸습니다.
□ 하지만 오늘날처럼 교통편이 발달한 것도 아닌 중세
기에 예루살렘 성지순례는 보통 사람들은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돈이 많은 사람들, 신분이 높은 사람들, 건강
한 사람들만 예루살렘 성지순례를 하고 전대사를 받는
다는 것은 공평치 못해 보였지요.
□ 그래서 일부 수도회들을 비롯해서 교회 단체들은 유
럽 여러 도시에 예루살렘 예수님 무덤 성당을 본딴 성
당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성당에는 조각이나 그림 등으로 예수님의 수난
과 관련된 장소들을 표시했지요.
이제는 굳이 예루살렘까지 가지 않더라도 이 성당들
이 있는 도시들로 가서도 예수님 수난과 죽음을 묵상
하면서 영적 은혜를 체험할 수 있게 됐습니다.
□ 하지만 이 역시 가난한 농부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이
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프란치스코회 수사들은 또 다른 방법을
생각했습니다.
각 성당마다 예수님 수난의 길을 묵상할 수 있도록 성
당 안에 나무 십자가로 수난과 관련된 주요한 지점(처)
들을 표시해 놓은 것입니다.
처는 조금씩 차이가 있긴 했지만 보통 14처로 이뤄졌
습니다. 이때가 14세기 쯤이었다고 합니다.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은 이것으로 그치지 않고 교황
청에 청원을 해
이 십자가의 길을 따라 기도하는 이들이 전대사를 얻
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자들은 예루살렘을 가지 않아도, 또 큰
도시에 가서 순례하지 않아도 가까운 성당에서 십자가
의 길 기도를 바치고 전대사를 얻을 수 있게 됐습니다.
□ 1731년 교황 클레멘스 12세는 십자가의 길을 오늘
날처럼 14처로 고정하면서, 교구 직권자(교구장 주교
나 또는 교구장에게서 위임을 받은 책임자, 예컨대 총
대리)의 허가를 얻어 합당한 방법으로 세운 14처가 있
는 성당이나 경당, 순례지 등지에서 십자가의 길 기도
를 바칠 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