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세자(昭顯世子) 시책문(諡冊文)
하늘이 큰 재앙을 내려 갑자기 계체(繼體 왕위를 계승하는 적자(嫡子). 소현세자를 가리킴))의 상(喪)을 당하였다. 국가에 법전(法典)이 있는 만큼 죽음에 따른 예법을 갖추는 것이 마땅하겠기에, 공의(公議)에 따라 조금이나마 지극한 정을 표하는 바이다.
생각건대, 너 세자(世子) 모(某)는 효우(孝友)와 인심(因心 인심(仁心))이 돈독하였고, 영명(英明)한 자질이 선천적으로 빼어났다. 시서(詩書)를 스승으로부터 배워 일찍 저이(儲貳 세자(世子))의 존귀한 지위를 받았고, 분조(分朝 세자가 다스리는 임시 조정)를 다스리면서 널리 군민(軍民)의 기대에 부응하였다.
그런데 어찌 생각이나 했으리요. 국난(國難)이 자심(滋甚)한 탓으로, 인질로 끌려가 오랫동안 체류하게 되었다. 9년의 성상(星霜)이 지나는 동안 그저 소식만 통했을 뿐, 수륙(水陸)으로 만 리나 떨어진 이역(異域)에서 온갖 고초를 다 당하였다.
그래도 성신(誠信)함으로 그 사람들을 감동시킨 나머지, 끝내는 빛나는 모습으로 나라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리하여 승화(承華 세자궁의 궁문(宮門))가 다시 열리자 나라 전체가 서로 기뻐하면서, 장차 ‘비(否)’의 운세가 ‘태(泰)’의 운세로 바뀌어 종묘사직의 경사를 크게 열어 줄 것이라고 생각하였고, 나 역시 네가 불란(拂亂)의 과정을 통해 증익(增益)되었음을 알고서 대임(大任)을 맡기려는 계책을 크게 강구하기에 이르렀다.
아, 그런데 내가 무슨 죄를 졌기에, 너로 하여금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나게 했단 말인가. 아마도 너무나 피곤함에 지쳐 몹쓸 병에 걸린 것일 테니, 어찌 잘못된 처방으로 치료한 것에만 책임을 돌릴 수 있겠는가.
부자(父子)가 서로 만나 본 지 몇 달도 채 못 되어서, 이승과 저승으로 영원히 떨어지게 되는 일이 어느 날 아침에 갑자기 닥쳐왔으므로, 피눈물을 닦으면서 가슴만 칠 뿐, 내 몸에 병이 들었다는 사실도 알지를 못하겠다. 깊은 근심 속에 하염없이 생각하노라니 이것이 꿈이요 생시가 아닌 것 같기만 하다.
너의 덕을 드러내 길이 빛나게 할 방도를 생각함에, 시호(諡號)를 내려 후세에 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졌다. 이에 모관(某官) 모(某)를 보내, 책문(冊文)을 받들고서 소현(昭顯)이라는 시호를 내리게 하는 바이다.
아, 엄청난 슬픔에 무슨 허식(虛飾)이 필요하겠는가. 이 의전(儀典)을 거행함에 있어서도 괜히 군더더기 말을 덧붙일 것이 없다. 너의 형체는 이미 없어져 구천(九泉)까지 뒤따라갈 수 없다마는, 너의 행적만은 그래도 기록되어 역사 속에 남아 있을 것이다. 바라건대 정령(精靈)이여, 이 은혜로운 명을 공경히 받을지어다.
昭顯世子諡冊文
天降大戾。遽遭繼體之喪。國有彝章。宜備崇終之禮。勉循公議。少酬至情。惟爾世子某。孝友因心。英明挺質。詩書就傅。早膺儲貳之尊。監撫分朝。普慰軍民之望。豈料魯難之滋甚。而致秦質之久淹。星霜九年。秪續音問。水陸萬里。備經艱關。尙賴中孚之感人。終獲前曜之返國。承華再闢。率土交懽。將謂否泰回環。大
開宗社之慶。亦知拂亂增益。丕恢付託之圖。嗟予負何罪辜。俾爾罹此夭札。殆由勞瘁而成瘵。豈徒鍼藥之乖方。父子相逢。曾未數月。幽明永隔。奄及一朝。抆血拊心。忘疾疹之在己。殷憂永念。若夢寐之非眞。爰思表德而流光。要在易名而詒後。茲遣某官某。捧冊贈諡曰昭顯。於戲。重哀不暇虛飾。嘉典不容溢辭。儀形已亡。雖莫追於泉壤。行迹可紀。尙有徵於簡編。庶幾精靈。欽此寵命。
[주1] 비(否)의 …… 바뀌어 : 액운(厄運)이 행운으로 전환되는 것을 뜻한다. 주역 64괘(卦) 가운데 비괘(否卦)는 하늘과 땅이 막혀 통하지 않는 것을 상징하고, 태괘(泰卦)는 기운이 원활하게 소통되어 문명이 꽃피는 것을 상징한다.
[주2] 불란(拂亂)의 …… 증익(增益)되었음 : 온갖 곤경을 겪으면서 원숙한 인격을 형성하는 것을 말한다. 《맹자(孟子)》 고자 하(告子下)에 “하늘이 어떤 사람에게 큰 임무를 내리려 할 때에는 …… 그 사람이 행하는 일마다 어긋나게 하는 법이니, 이렇게 함으로써 마음을 분발시키고 성질을 참게 하여 원래 잘하지 못했던 것을 더욱 잘 하게 해 주려는 뜻에서이다.[天將降大任於是人也 …… 行拂亂其所爲 所以動心忍性 曾益其所不能]”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