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봉(般若峰).
전북 남원 산내면 전남 구례 산동면 그 경계선 '반야봉'
.......................산내면........................ 산내면(山內面)은 만수천 연안을 제외한 전지역이 산지 북부와 동부에는 삼봉산(1,187m)·삼정산(1,182m)이 있고 남부와 서부에는 반야봉, 명선봉(1,586m)·고리봉(1,305m)
동북부를 제외한 대부분 지역이 지리산 국립공원 <구례 - 함양>을 연결하는 지방 도로가 지나간다. 실상사, 지리산지구 전적비와 반공기념관이 있다.
대정(大井)·백일(白日)·중황(中黃)·장항(獐項) 입석(立石)·내령(內靈)·부운(浮雲)·덕동(德洞) 8개 마을이 있고, 면적 103.45㎢, 인구 2,186(2002). ...............................................................
.............입석마을................... 원래, 입석마을은 운봉 산내면 지역으로 선독골, 선독 또는 입석(立石)이라 했는데 1914년 삼화리 실상리 일부가 입석리에 편입.
처음 마을이 형성된 시기는 분명치 않으나 신라 흥덕왕 3년(828) 실상사 창건 이후에 많은 승려가 드나들며 형성된 마을 중 하나.
1950년대 빨치산 토벌작전 당시에 뱀사골 주변 마을 주민 소개령으로 <內靈, 浮雲, 德洞>에서 이주민 10호
실상사가 있는 산줄기인 주산(主山)을 개간해 뽕밭을 조성하고 마을을 이루어 신흥리(新興里) 지금은 입석과 신흥 2개 자연마을을 입석리를 편성
마을 동쪽에 거대한 자연석이 우뚝 서 있으므로 돌이 서있는 마을, 선독골, 선돌골 등으로 부르다
이 바위가 서 있으면 입석마을은 흥한다 하지만 건너다 보이는 원천(元泉)마을은 망한다는 전설 하여, 원천 주민이 바위를 넘어뜨린 일도 있었다
이 마을 뒤에는 삼정산(三亭山)이 솟아 있고, 앞으로는 낙동강 상류인 남천이 흐르고 있으며, 실상사는 마을 동남향으로 700m 되는 곳에 있다. .................................................
산내면은 실상사를 비롯한 삼정산의 7암자 순례 길. 지리산이 옛부터 불교의 성도였음을 알려주는 고장. 산동면은 옛부터 중국 산동과 밀접하게 교류한 고장.
........................산동면.................................. 산동면(山洞面)은 구례군 북부에 있고 면면소재지는 원촌리. 만복대(1,433m)·반야봉(1,732m)·노고단(1,507m)·깃대봉(691m) 견두산(775m) 등에서 발원한 계월천·무은천이 면 중서부에서 합류
남쪽으로 흐르며 농경지를 이루고 도로와 취락은 하천을 따라 분포. <남원 - 하동>을 연결하는 국도가 면 서부를 남북방향으로 통과한다.
원촌(院村) 계천(桂川) 원달(元達) 수기(水基) 내산(內山) 대평(大坪)· 위안(位安) 좌사(佐沙) 관산(官山) 탑정(塔挺) 외산(外山) 신학(莘鶴) 이평(梨坪) 둔사(屯寺) 시상(侍上) 15 동리. 101.35㎢, 인구 3,825(2002). ....................................................................................
'반야'란 우리말로 번역하면 '지혜'란 뜻.
대승불교의 반야경에서 강조하는 공(空)의 사상. 어리석은 자가 머물면 무심의 지혜를 얻는다는 곳. 원래, '지리산' 지명의 뜻과 같은 의미를 갖고 있다.
반야봉은 '마야부인과 반야 도사'의 전설의 고향.
마야부인은 지리산의 女神인 천왕봉의 천왕성모. 그 여신은 선도성모 또는 마고(麻古), 노고(老姑) 등의 이름으로도 불리우는데 바로 천신(天神)의 딸.
그녀는 지리산에서 불도를 닦던 반야를 만나 결혼 천왕봉 아래 백무동에서 함께 살며 8 딸을 낳았다. 그러던 중 깨우침을 얻으려 반야봉으로 떠난 반야.
마야부인이 백발이 되도록 돌아오지 않았던 반야. 마야부인은 돌아오지 않는 반야를 기다리다가 운명. 반야와 마야부인의 8 딸은 팔도 무당의 시조가 된다.
그러나 그후에도 두 사람의 만남은 이뤄지지 못했고 마야부인은 반야를 기다리며 나무껍질로 옷을 만든다 그러나, 돌아오지 않는 반야를 원망하며 찢어버린 옷.
그 갈기 갈기 찢어버린 옷이 바람에 날려가 반야봉의 풍란이 되었다는 전설을 간직한 산.
그래서인지 반야봉 주변에 안개와 구름이 자주 끼는데 하늘이 반야와 마야부인을 만날 수 있도록 주선하는 것. 생전에 못 이룬 사랑을 죽어서나마 이루라는., 하늘의 뜻.
애틋한 전설과 낙조가 장관인 반야봉으로 가는 길 여러 갈래지만 대개 종주 등반 중 잠시 들르는 곳. 주능선 상의 노루목 또는 삼도봉에서 오를 수 있다.
지리산 종주 중 이곳을 다녀오려면 약 1시간 소요. 그 때문에 반야봉을 생략하고 그냥 지나치게 된다.
탁트인 사방의 전경을 살펴볼 수 있는 반야봉의 정상. 그곳에 오르면 마치 스스로 신선이 된 느낌을 받는다. 5월이면 철쭉의 향연이 펼쳐지고 야생화가 만발하는 곳.
환상적인 운무가 흐르면 탄성이 나오는 곳. 엎드린 여성의 둔부를 닮은 듯한 반야봉 산세. 쌍곡선 아래 깊숙한 계곡에 달궁을 간직한 산세.
천신에게 무릎꿇고 엎드려 경배하는 여인의 자태. 마치, 여인이 사랑하는 님을 향해 간절히 구애하듯. 천신을 향해 이룰 수 없는 사랑을 갈구하는듯한 산세.
............................................ ............................................ '지리산 제 3 경 - 반야봉의 낙조.' .............................................. ..............................................
천신을 유혹해 그 정기를 뿌리게 한다는 마고 여신. '외래 종교' 불교가 마고 전설에 기대어 정착한 곳. '반야봉의 낙조'는 천신을 유혹하는듯 선정적인 경관.
가뭄 때 무당들이 엉덩이를 드러낸 기우제 의식. 선정적인 자태일수록 효험이 있다고 여기는 풍습. 모계사회의 통치자 무당의 기우 의식에서 유래된듯.
'시각적으로 성적 욕망을 자극하는 노을빛.'
노을빛은 여성 입술 생김새나 질감이 성기와 흡사. 하여, 젊은 여성들이 가장 선호하는 립스틱은 노을빛. 여성이 성적으로 흥분했을 때 음순이 노을빛을 띠는 탓.
금욕을 강요하는 문화권에서 억압받았던 여성의 둔부. 직립원인 진화 이전까지 암컷이 구애하는 성적신호 부위. 직립원인 진화후 둔부 대신 드러내는 여성의 풍만한 젖가슴
여성이 성적흥분을 감추려는듯한 노을빛 립스틱. 엎드려 있는 여성의 둔부 모양새에서 유래된 하트. 각선미가 날씬할수록 하트 모양새도 예쁘다고 한다.
'절정의 순간' 여성의 엉덩이 모양은 '하트'. 여성의 성적흥분를 상징하는 붉은 색 립스틱. 큐피트의 화살이 꽂힌 하트 문양은 성애를 상징.
'큐피트의 화살'이 없는 반야봉의 산세. 여성 홀로 애타게 사랑을 갈구하는 산세. 반야봉은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
천신의 정기를 갈구하는 반야봉 산세. '천신의 정기' 비는 모든 생명의 씨앗. 하여, 반야봉은 토속신앙 기우제의 산실.
모계사회 무당은 천신에게 엎드려 경배. 목욕재개 후에 천신의 정기를 애타게 갈구. 비를 불러 땅에 생명을 불어넣게 하려는 의식.
겨울철 흰눈에 덮인 채 노을빛에 물든 반야봉. 여성의 둔부처럼 희고 탐스러운 쌍곡선 산마루. 노을 빛에 물든 반야봉은 애처로운 여인의 모습.
...................................... ......................................
반야봉 쌍곡선 산마루는 생명의 산실 같다. 천신을 유혹해 그 정기를 뿌리게 하는 산세. 대지를 촉촉하게 적시는 비는 곧 천신의 정기.
'반야봉은 천신의 정기를 유혹하는 산세.'
엉덩이를 드러낸채 엎드린 여인의 자태. 천신의 정기가 비처럼 쏟아지길 비는 기우제. 엉덩이 드러낸 무녀들이 일제히 산상에서 방료.
젊은 미녀일수록 기우 효험이 크다는 믿음. 가뭄일수록 유혹적이고 자극적인 기우제 행사. '생명의 단비'를 내려 달라는 천신을 향한 갈구.
삼남지방 기우제 풍습의 산실, 반야봉. 반야봉은 황진이와 같이 유혹적인 산세.
이조시대 수많은 남성들을 사로잡았던 황진이. 그녀가 유혹에 실패했던 유일한 남자는 서경덕. 송도삼절로 일컬어졌던 당대의 석학 서경덕 선생.
서경덕은 황진이가 죽도록 흠모했던 유일한 남자. 반야봉은 서경덕을 유혹했던 황진이의 모습 같다. 비에 젖은 옷차림으로 서경덕의 집을 찾아간 그녀.
'행여,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문전박대 끝에 그녀를 집안에 들인 서경덕. 단칸방이라 자신의 잠자리를 내어준 서경덕. 그녀의 옷을 벗기우고 이불 속에 누인 서경덕.
잠결인양 이불 밖으로 엉덩이를 드러낸 황진이. 그 옆에서 초연하게 밤늦도록 책만 읽는 서경덕. 그날밤 애간장이 타서 잠을 이루지 못했던 황진이.
깊은 밤에야 한 이불 속으로 들어온 서경덕 그녀 옆에 눕자마자 깊은 잠속에 빠졌기 때문. 기다리고 기다리다 홀로 몸이 달아오른 황진이.
잠결인 양 서경덕 품속으로 파고들며 유혹. 그날밤 끝끝내 사랑을 이루지 못했던 황진이. 그녀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았던 유일한 남자.
결국, 그후부터 서경덕을 스승으로 모신 그녀. 평생 못 이룰 사랑을 가슴에 안고 살았던 그녀. 황진이가 죽을때까지 못잊을만큼 흠모한 서경덕.
.......서경덕1489(성종 20)~1546(명종 1).......... 유학사상 철학문제를 제기하고, 기철학 체계를 완성. 박연폭포 황진이와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1509년(중종 4) 요양을 위해 경기 영남 호남을 유람. 1519년 조광조에 의해 실시된 현량과에 으뜸으로 천거 사퇴하고 화담에 서재를 지어 성리학 연구를 계속했다.
1522년 속리산 지리산 명승지 답사후 기행시를 남겼다. 당시 선비들이 사화로 참화를 당하자 벼슬을 하지 않았다. 1531년 어머니 명으로 생원에 합격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
1540년 김안국(金安國) 등에 의해 조정에 추천되고, 1544년 후릉참봉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고 성리학 연구
이해에 병이 깊어지자 원이기(原理氣) 이기설(理氣說) 태허설(太虛說) 귀신사생론(鬼神死生論) 등을 저술했다.
이듬해 중종이 죽자 대상복제(大喪服制)에 대한 상소 백성 생업에 지장없게 3년상을 3개월로 고칠 것을 주장.
1567년(명종 22) 호조좌랑, 1575년(선조 8) 우의정에 추증 개성 숭양서원(崧陽書院) 화곡서원(花谷書院)에 제향되었다. ...................................................................
그의 생전에 사랑을 이룰 수 없었던 황진이. 고인이 된 그를 잊지못해 유람에 나선 황진이. 1546년 서경덕이 운명하던 해에 유람을 떠난듯.
................허균의 성소부부고에서....................... 풍악산(금강산) 태백산 지리산 지나 금성(나주) 도착. 마침 고을 원님이 목사를 대접하기 위해 베풀었던 잔치 떨어진 옷에 때묻은 얼굴로 상좌에 나가 앉았다는 황진이
이를 잡으며 태연하게 노래하고 거문고를 연주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아 여러 기생들을 질리게 했다. ..............................................................
명문 재상가의 이생 도령과 함께 산 좋고 물 좋은 명산대천을 찾아 금강산에서 시작, 중도에 헤어지고 혼자 지리산 팔도강산 유람하던 시절.
단편적 기록이지만 지리산을 다녀간 황진이. 산행 후 남루한 행색으로도 당당했던 황진이. 당시 스승 서경덕의 발자취를 따라 유람했던듯.
'이조시대 성리학의 대가 였던., 서경덕.'
16세기 초 서경덕은 남명과의 인연으로 며칠씩 함께 고생하며 천왕봉까지 올랐다.
그가 성리학 연구를 위해 반야에도 오른 흔적 그 흔적이 기록으로 남아 지금까지 전해져온다.
...............서경덕............................ "지리산은 우뚝 솟아 동녘 땅을 다스리고 있어 올라와 보니 마음속의 눈이 끝도 없이 넓어지네.'
'험봉들이 춤을 추듯 연이어 솟은 봉우리들. 아득하기만 한 조물주의 공로 그 누가 알리오.
대지에 담긴 현란한 정기는 안개 비를 일으키고 하늘을 머금은 듯 순수한 기운은 영웅을 낳게 하네. 산은 다만 나를 위하여, 구름과 안개를 걷우어 내니 천리길 마다 않고 찾아온 정성이 하늘에 통한 것일까?'
'허공은 어떻게 스스로 바람을 일으키는 것일까? ' .............................................................
이조시대에 성리학이 전성기일 무렵 불교는 쇠퇴. 반야봉은 불교의 산실에서 성리학의 산실로 탈바꿈. 성리학자가 깨닳아야 할 사상과 철학이 담겨진 산세.
반야봉은 이조시대에 들어와 성리학의 산실. 유교 불교 도교 한계선을 넘어선 사상의 산실. 우리나라 민족 사상을 선도하는 곳으로 자리매김.
................서경덕.................... "태허는 말끔하여 형체가 없다. 이를 선천이라고 하는데 그 크기는 끝이 없고 과거에 시초가 없었으며 앞으로도 한끝을 모른다.
말끔하게 허하고 고요한 것이 기의 시원.
끝없이 넓은 우주에 꽉 들어차서 빈틈이 없고 털끝 하나도 드나들 수 없다. 그것을 끌어당기려면 허하고 잡으려면 잡을 것이 없다.
그런데도 사실은 차 있으니 없다고 할 수 없다. 한계가 없는 것을 태허라 하고 시초가 없는 것을 기(氣)라고 하니 허(虛)가 바로 기(氣)이다.
허가 본래 무궁하고 기 역시 무궁하니 기(氣)의 근원은 처음부터 하나." ............................................
....................기일원(一元)의 철학....................... 서경덕은 만물의 근원과 운동변화를 기(氣)로써 설명, 그 기를 능동적이고 불멸하는 실체로 본데 특징이 있다. 그는 세계의 시원을 허(虛) 또는 태허(太虛)라고 보았다.
여기에서 그가 말한 태허는 곧 물질적인 기이며 이와 같이 만물의 근원을 기로 설명했을 뿐 아니라 인간의 정신, 천지만물은 기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하나의 기가 나뉘어 음양이 될 때 양이 변화를 극한 것이 하늘이 되고 음이 모이고 응결한 것의 극이 땅이 된다.
양의 정수가 맺혀 해가 되고 음의 정수가 맺혀 달이 된다.
나머지 기운이 별이 되고 땅에서는 물과 불이 된다.
물질적인 기는 시작도 종말도 없으며, 따라서 창조도 소멸도 없다는 전제로부터 사물은 소멸되어도 물질적인 기는 흩어질 뿐 소멸되지는 않는다는 주장은 당시 독창적인 것
한편 인성론에서는 전통적인 성선설을 주장하고, 聖人이 되기 위한 수양방법으로 주정(主靜)을 제시 서경덕의 학설은 당시 이황 이이의 비판을 받았다.
서경덕은 우리나라 성리학 최초로 기일원론을 전개
박주(朴洲) 박순(朴淳) 허엽(許曄) 남언경(南彦經) 민순(閔純) 이지함(李之) 이구(李球) 박민헌(朴民獻) 홍인우(洪仁祐) 장가순(張可順) 이중호(李仲虎) 등 그의 문하로서 많은 학자들과 관인들이 배출되었다. ...........................................................................
반야봉 낙조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사랑' 반야봉이 품은 또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 과연, 그렇게 불리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반야봉 북쪽은 남원으로 가는 길. 반야봉 남동쪽은 진주로 가는 길. 남원과 진주는 옛부터 풍류의 본향.
오늘날까지 명성을 떨치는 여류시인 명기들 가슴과 애간장을 태우는 구구절절한 싯귀들.
'하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일까?'
반야봉의 쌍곡선 산세는 생명의 산실과도 같다. 마치, 천신의 정기를 받으려는 여인의 고혹적 자태. 그 독특한 산세를 배경으로 작품사진 촬영도 많이 한다.
흰눈에 덮인 반야봉을 멀리서 보면 더욱 더 교태롭다. 속치마 여인이 수줍은 얼굴을 대지에 파묻고 엎드린 듯. 둔부를 드러내고 엎드려 님을 향해 사랑을 갈구하는 모습.
님을 기다리다 지친 여인의 흐느낌 같은 바람소리. 반야봉은 '마야부인의 전설'이 애닲은 전설의 고향. 반야봉의 신비로운 낙조(落照)는 '지리산의 제 3 경'.
활활 타는 노을과 더불어, 반야봉 운해는 감동적 비경. 반야봉의 낙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상징이다. 반야봉은 종교 철학 사상 사랑 등 다양한 의미의 산세.
'반야봉은 날개옷을 벗어버린 선녀의 자태.'
마치, 자연이 빚어낸 한폭의 하모니즘 누드화. 운해가 감싼 반야봉은 흰비단 잠옷 여인의 유혹. 반야봉은 사진 작가에게 누드모델 같은 자연 모델.
반야봉은 심마니 능선 불로초로 알려진 약초 자생지. 백두대간의 3 수호신 중에서 불로초를 지키는 방장신. 진시황이 불로초를 얻으려고 서불을 보낸 곳이 방장산.
'천왕성모의 영원한 젊음은 불로초 효험 아닐까?'
불로초가 상징하는 영원한 삶이란 득도를 뜻하는 것 같다. 부귀영화와 가정까지 버리고 이곳에서 도를 닦던 스님 반야. 반야봉은 온갖 유혹과 고초를 이겨야 오를 수 있는 산세이다.
지리산 주능선과도 동떨어진 곳에 홀로 있는 수도승 같다. 반야봉은 사람마다 다른 갈망을 말 없이 품어 안는 것 같다. 불노초는 인간에게 영원한 젊음과 삶을 보장하는 신비한 약재.
이곳은 지리산 종주 도중에 잠시 둘러보 듯 찾기 보다는 반선을 들머리로 심마니 능선 또는 달궁에서 올라야 비경. 지리산 유래에 촛점을 둔다면 이곳 들머리 산행이 좋을 듯.
1960년대 지리산 종주 들머리는 반야봉 아래 달궁. 1967년 국립공원 1호, 1970년대 초 개발된 지리산.
반야봉은 산세가 험해 조난 위험이 높았던 곳. 하여, 안전한 노고단 화엄사 입구 코스가 각광. 지리산 종주는 노고단에서 천왕봉까지로 정착된다.
'하여, 차츰 등산객들에게 소외된 반야봉.'
옛부터 지리산 제 2의 봉우리로서 명성 높았던 곳. 반야봉(1,732m)은 소백산맥에서 갈라진 지리산 줄기. 강원도 속초에 있는 설악산 대청봉(1,708m)보다 높다.
주위에 삼도봉 토끼봉이 있는 화강편마암 급경사 바위산 산세가 비교적 험하며 남사면에서는 섬진강의 지류가 발원, 북사면에서는 산내천이 발원해 남강으로 흘러 낙동강과 합류.
월귤 만병초 등의 고산식물 및 산삼의 자생지. 지금은 산삼이 희귀해 심마니 마을도 사라졌다. 하여, 심마니 능선 지명이 옛 전설을 대변한다.
거미줄 같은 미로의 심마니 능선은 초암릉 지대. 전문 산악인이라도 안전을 보장할 수 없는 곳이다. 심마니 능선은 그 아래 뱀사골 계곡과 나란히 있다.
'구도자의 고행길을 상징하는 듯한 반야봉.'
<달맞이꽃/ 가수 김정호.>
얼마나 기다리다 꽃이 됐나 달 밝은 밤이 오면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미소를 띠는 그 이름 달맞이꽃
아 아 아 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파란 달빛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얼마나 그리우면 꽃이 됐나 한 새벽 올 때까지 홀로 피어 쓸쓸히 쓸쓸히 시들어 가는 그 이름 달맞이꽃
아 아 아 아 서산에 달님도 기울어 새파란 달빛아래 고개 숙인 네 모습 애처롭구나
.....................<찾아가는 길.>.......................... * 반선 전적기념관 - 심마니능선 - 달궁 삼거리 - 심원 삼거리 - 중봉 - 반야봉 - 중봉 - 묘향대 - 이끼폭포 - 반선 (1코스) (달궁 제 1 주차장 화장실 뒷편으로 오르는 길은 출입통제구역)
* 반선 - 이끼폭포 - 묘향대 -삼도봉 - 뱀사골 - 반선 (2코스) ......................................................................
공(空)의 사상.
반야봉에서 심마니 능선은 인적이 드물고 힘든 고행길. 옛 심마니들의 억척스러운 삶을 짐작할 수 있는 험한 길. 마치, 마야부인을 두고 떠난 전설 속의 구도자 반야 처럼.
가릴 것도 없고, 숨길 것도 없이 걷기 좋은 산길. 혼자라도 좋고 둘이라도 참 좋을..인적 없는 산길. '공(空)의 사상', '무소유의 삶'..이 떠오르는 산길.
'반야봉은 불교적 관점에서 지리산 제 1 봉.'
반야봉은 반야심경 머릿말 두 글자를 본딴 지명. 신라시대 경전 <반야바라 밀다심경>의 약칭이다. 마음 심(心)은 심장을 나타내며 심수(心髓) 중심.
...............반야심경(般若心經)............. 지혜의 완성을 뜻하는 반야바라밀다 경전들의 정수 자비의 보살 관세음보살의 입을 빌려, 공(空)을 강조
'아제아제 바라아제 바라승아제보리 사바하' (揭諦揭諦 波羅揭諦 波羅僧揭諦 菩提 娑婆訶)
'도달한 때, 도달한 때, 피안에 도달한 때, 완전히 도달한때 깨달음 있나니, 축복하소서!' 온갖 고통을 진정시켜준다고 간주되는 주문(呪文) ..........................................................
반야심경은 262 자이고, 불교의식에서 반드시 독송한다. 색즉시공(色卽是空), 공즉시색(空卽是色) = 알려진 구절.
"현상에는 실체가 없다. 실체가 없기 때문에 현상."
'즉, 변하지 않는 실체란 있을 수 없고, 또 변화하기 때문에 현상으로 나타나며 중생은 그것을 존재로 파악할 수 있다.'
중생을 피안의 세계로 실어다 주는 큰 수레. 종래의 수행자를 '작은 수레', 곧 소승(小乘)
왕실과 부유층 지원 아래 종래의 수행자 집단 개인 해탈만 추구했던 경향을 비판한 대승불교.
이들은 중생들에 대해 행동주의 불교를 강조 그것은 보살이란 이상적 인격으로 표현되었다.
보살은 자신의 구원에 앞서 남부터 구원한다는 자비 본디 보살이란 석가모니의 성불 이전의 존재를 의미 누구든 보살이 될 수 있으며,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
대승불교 보살의 수행법 = 육바라밀다(六波羅密多)
보시는 수행자가 행해야 할 덕목이라는 점 모든 현상적 존재는 공(무실체)에서 비롯.
........대승불교 삼신설(三身說)............. 석가모니와 같은 화신(化身 = 應身, nirm ak ya), 초자연적인 몸인 아미타불 등의 보신(報身, sa bhogak ya), 부처의 깨달음 그 자체인 법신(法身, dharmak ya) ........................................................
굽타 왕조(320년∼6세기) 나란다 대사원 중심으로 체계적이고 철학적인 불교 연구가 행해지게 되었다. 열반은 상(常)·락(樂)·아(我)·정(淨)으로서 규정.
'공(空)의 세계'를 상징하는.., 반야.
대승불교 흐름은 반야사상과 유식사상 두 가지 반야(般若)란 인도어 '프라냐(prajna)'를 음역 사물의 피상적인 모습을 떠난, 절대 완전한 지혜.
사물을 인식하는 주관적 태도엔 늘 문제가 있다. 훌륭해 보이다가도, 형편없다고 느껴지기도 한다. 자기 편견으로 바라보면 제멋대로 본질이 변질된다.
한 떨기 아름다운 꽃이 피어 있을 때 언젠가 병들고 썩어 없어질 것을 인식. 꽃의 본성은 공(空)이고, 헛된 것(假)
그렇기에 꽃의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고 꽃의 말로를 탓하거나 서러워하지 않는다.
반야란 현상의 본질을 파악하지 못하는 인간 이지적인 지혜의 눈을 지니게 되는 상태를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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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야봉은 '반야심경' 불교경전에서부터 유래된 지명. 대승불교에서 반야란 반야경 불교경전 속 공(空)의 사상. '어리석은 자가 머물면 무심의 지혜를 득하게 된다.'는 의미
반야심경은 당나라 승려 현장이 인도에서 갖고온 경전. 그의 전설적인 구도의 길은‘서유기’소설의 창작 동기. 현장 삼장법사는 역경마다 관세음보살을 찾아 위기 극복.
경전을 찾아 서역을 향해 가던 어느 날 해는 저물고 산 속에서 길잃고 헤매일 때 무서운 산짐승들 울음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한참을 그렇게 헤매다 하룻밤 묶을 암자를 발견 그곳엔 늙고 병든 스님 한분이 앓고 누워 있었다. 몸은 부스럼투성이, 상처에서 고름썩는 냄새 진동.
현장은 갈길은 멀지만 꼬박 사흘을 자비심으로 간병 고름을 빨아내고, 옷을 세탁하고, 음식 만들어 먹이기 그런 정성 덕분에 스님은 차츰 원기를 회복해 일어난다.
노승은 현장에게 건네준 한 편의 경전..반야심경.
'반야심경' 경전의 핵심은 ‘공(空)의 사상'. 바람은 모양을 볼 수 없고 붙잡을 수도 없지만 그렇다고 아무 것도 없는 것이 아닌..'공의 사상'.
'마치, 바람이 스쳐 지나치듯 강물이 흘러가듯.'
시시각각 변하는 허공의 어느 시점 어느 한 곳. 그것을 바람이라 할까? 강물이라 할 수 있을까? 그러므로, 붙잡을 수도.. 파악 할 수도 없는 공(空)
아무 것도 가릴 것 없고 가진 것 없는 무소유의 삶. 인간의 모든 감정과 물욕에서 벗어나려는 구도자 모습. 마치, 알몸 여인이 무릎 꿇고 엎드려 경배하는 듯한 산세.
'반야봉 아래 화개골 칠불사는 지리산 최초 암자.'
42년 출생한 김수로왕은 허황후와 사이에 10남 2녀 허황후는 인도 갠지스강 상류 태양왕조 공주 허황옥. 김수로왕의 7왕자는 허황옥의 오빠 장유보옥 따라 출가.
'이들은 득도를 위해 궁궐을 떠나.. 고행의 길.'
가야산에서 3년 수도 후 수도산, 와룡산을 거쳐 101년 반야봉에 운상원을 짓고 103년 모두 성불. 반야봉은 한반도에 남방불교가 꽃핀 성지가 된다.
'국내 최초로 성불한 7왕자를 기려, 칠불암.'
반야봉 운상원에서 수도에 전념한 가락국 7 왕자. 7 아들이 보고싶어 운상원을 오가던 가락국 허황후 결국, 허황후는 7아들이 성불한 후에야 접하게 된다.
아울러, 반야봉은 반야의 구도 정신이 담긴 성지. 반야는 마야부인과 결혼, 8딸을 낳고 떠난 고행 길. 부귀영화를 버리고 반야봉에서 고행길을 택한, '반야'
반야봉은 그 높이와 관계없이 지리산 제 2봉.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당연히 지리산 제 1봉. 지리산에서도 반야봉은 '불교의 성도' 중에 성도.
반야봉은 생명의 모체를 뜻하는 여인의 둔부 같은 산세. 반야봉은 북으로 남원의 기생, 남으로 진주 기생을 상징. 반야봉은 이조 성리학자들이 자연의 이치를 연구하던 장소.
지리산 산간 마을은 각각 고유한 민속신앙을 품고있다. 한반도에 불교 도교 유교가 정착되기 전부터의 민간신앙. 선사시대 또는 신석기시대부터 믿어왔던 전통적인 민속신앙.
'반야봉 또한 독특한 민속신앙 근원지.'
천왕봉에서 멀고 노고단에서 가까운 반야봉. 노루목과 삼도봉 사이에서 북서쪽에 있는 봉. 뱀사골을 오르면서 오른쪽 능선 정상이 반야봉.
반야봉은 지리산 능선과 약간 동떨어져 있다. 주능선 상에서 도보로 30분 거리 쯤 벗어난 곳. 하여, 아직도 그곳은 등산객들의 발길이 뜸한 곳.
반야봉은 높이와 관계 없이 지리산에서 제 2 봉. 불교적인 의미로 본다면, 당연히 지리산의 제 1봉.
인도 불교는 BC 6~ BC 4 세기 즈음 출현. 약 500 년 동안 불상이나 석탑이 없었다.
한반도에 불교가 최초 유입 시기는 가락국 원년. 한반도에 불교가 활발하게 꽃핀 시기는 신라시대. 지리산 최초의 사찰은 반야봉 아래 화개골 칠불사.
반야봉은 이조시대 성리학자들이 즐겨 찾던 곳. 송도삼절로 유명한 서경덕도 찾은 흔적이 있다. 이조시대 지리산에 있는 사찰들은 박해의 대상.
특히, 유교관념이 정착될수록 불교는 점점 쇠퇴한다. 하여, 신라 고려시대 유서 깊은 사찰들까지 사라진다. 지금은 터만 남았거나 흔적조차 없어진 사찰이 대부분.
불교의 '성도 중 성도' 인 반야봉. 만해(卍海)의 詩가 떠오르는 반야봉. 만해는 승려 시인 한용운(韓龍雲)의 법호.
....................만해 한용운...................... 근대 불교계에서 혁신적인 사상과 활동을 펼쳤으며, 일제 강점기에 3·1독립선언에 민족대표로 참가했고 용운은 법명이며 법호는 만해(萬海 : 또는 卍海)이다.
1917년12월 어느날 밤 오세암에서 좌선 중 바람에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득도.
'알 수 없어요.' 가지 마셔요.'는 대표적인 시 .....................................................
<알 수 없어요.>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의 파문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도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 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가지 마셔요.>
그것은 어머니의 가슴에 머리를 숙이고, 아기자기한 사랑을 받으려고 삐족거리는 입술로 표정하는 어여쁜 아기를 싸안으려는 사랑의 날개가 아니라 적敵의 깃발입니다.
그것은 자비의 백호광명(白毫光明)이 아니라 번득거리는 악마의 눈빛입니다.
그것은 면류관과 황금의 누리와 죽음과를 본 체도 아니하고 몸과 마음을 돌돌 뭉쳐서 사랑의 바다에 풍덩 넣으려는 사랑의 여신이 아니라 칼의 웃음입니다.
아아, 님이여! 위안에 목마른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대지의 음악은 무궁화 그늘에 잠들었습니다. 광명의 꿈은 검은 바다에서 자맥질합니다.
무서운 침묵은 만상(萬象)의 속살거림에 서슬이 푸른 교훈을 내리고 있습니다.
아아, 님이여! 새 생명의 꽃에 취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거룩한 천사의 세례를 받은 순결한 청춘을 똑 따서 그 속에 자기의 생명을 넣어 그것을 사랑의 제단에 제물로 드리는 어여쁜 처녀가 어디 있어요.
달콤하고 맑은 향기를 꿀벌에게 주고 다른 꿀벌에게 주지 않는 이상한 백합꽃이 어디 있어요.
자신의 전체를 죽음의 청산에 장사지내고 흐르는 빛으로 밤을 두 조각에 베이는 반딧불이 어디 있어요.
아아, 님이여! 정에 순사(殉死)하려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그 나라에는 허공이 없습니다. 그 나라에는 그림자 없는 사람들이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그 나라에는 우주만상의 모든 생명의 쇳대를 가지고 척도(尺度)를 초월한 삼엄한 궤율(軌律)로 진행하는 위대한 시간이 정지되었습니다.
아아, 님이여! 죽음을 방향(芳香)이라고 하는 나의 님이여! 걸음을 돌리셔요. 거기를 가지 마셔요, 나는 싫어요.
불교.
BC 6세기말에서 4세기초 동북 인도에서 창시된 종교. 그리스도교, 이슬람교와 더불어 세계 3대 종교 중 하나 19세기 후반 서양세계에도 본격적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불교는 고타마 싯다르타(Gautama Siddhrtha)에 의해 창시 '부처'(Buddha 佛陀),란 즉 '깨달음을 얻은 자'라는 칭호. 불교는 기본적으로 부처의 가르침을 전하고 실천하는 종교.
BC 6세기 인도의 브라만교에 커다란 변화가 일고 있었다. BC 1500년경 인도 원주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한 아리아인 4성 계급(vara) 제도를 중심으로 한 사회질서를 구축했다.
브라만교는 4계급 중 가장 신성한 사제계급이 브라만 베다라는 성전에 근거한 다신(多神) 신앙을 지닌 종교. 신과 조상에게 제사를 중요시하고 계급 간 의무를 강조.
브라만교는 주로 인도 서북부에 자리잡고 있었으나 BC 6~7세기 갠지스강따라 북인도 중부와 동부로 전파.
농업생산을 기반으로 도시가 생겨나고 상공업이 발달 코살라와 마가다 같은 강력한 군주국가들이 출현한다. 이에 따라 브라만교는 약화되면서 새로운 종교를 요구
이때 자이나교의 창시자인 니간타 나타푸타 불교의 창시자 석가모니가 새로운 길을 제시.
석가모니 본래 이름은 싯다르타(Siddhrtha) 석가족 출신 성자라 하여 석가모니(釋迦牟尼) 석가족은 지금 네팔과 인도국경 부근 작은 왕국
석가는 BC 560년경 정반왕과 마야부인 사이에서 출생. 야소다라와 결혼 아들까지 두었으나 29세 나이에 출가 마가다국에 가서 각종 명상법을 배우고 선정(禪定) 체험
극심한 고행을 통해 해탈을 얻으려는 노력도 했지만 몸만 쇠약해지고 소용이 없음을 깨닫고는 고행을 포기. 수자타라는 처녀가 공양하는 우유죽을 먹고 몸을 회복
나이란자나 강에서 목욕하고 그 물을 마셨다고 한다. 그의 수행자들은 그가 고행을 포기하자 그를 떠났고, 그는 홀로 보리수 밑에서 선정 도중 깨달음을 얻는다.
그는 부모와 재회하고 아들 '라훌라'를 출가시켰고, 종형제 '데바닷타' '아난다'를 제자로서 받아들였다. 또한 그의 이모도 첫 비구니(比丘尼)로서 받아 들인다.
35세 때 성도(成道)한 후 입적하기까지 45년 동안 마가다국과 코살라국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했다. 80세에 쿠시나가라로 가는 길에 병을 얻어 반열반
죽음을 앞두고 석존은 승가의 앞날을 염려하여 많은 유언 자신이 남긴 법과 계율을 스승으로 삼아 수행할 것을 권고.
석존의 사후 그의 유해는 화장되었고 유골은 중인도의 8 부족들에 의해 분배 각기 부족마다 사리탑이 세워졌다고 한다.
중국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1세기 후한 시대. 실크로드를 통해 서역과 활발한 교역을 했다. 남북조시대(420~581)를 통해 북조에서는 융성
수(隋)에 의해 통일(589)되자 천태종(天台宗) 등장 당조(唐朝)에 현장법사(596~664)가 유식사상을 종합 현장의 법상종은 화엄종 새 종파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천태 법상 화엄에 이르러 인도를 능가한 중국 불교
선불교는 선정(禪定) 실천을 중시하는 불교로서 5세기 말 인도승려 보리달마에 의해 시작되었다. 선정(禪定) 불교는 송대 이후 중국 불교의 주류.
일본
불교가 전래된 것은 6세기초 백제를 통해서였다. 552년(긴메이 천황[欽明天皇] 13) 백제 성왕(聖王) 당시 일본 불교의 지식층은 고구려와 백제의 승려들
그중 혜총·혜자는 쇼토쿠 태자의 스승
티베트
티베트에 불교가 전래된 것은 7세기초 손챈감포 왕 때. 8세기말 인도 승려뿐만 아니라 중국 승려도 포교 활동. 794년경 티베트 특유의 불교를 라마교라 부르기도 한다.
'라마'라는 말은 스승이라는 뜻이다.
티베트 대장경은 14세기 부퇸(1290~1364)에 의해 편찬 14세기 티베트 불교는 매우 세속화되고 도덕적인 타락 그후 '딜라이 라마' 등장으로 밀교 라마교는 정화된다.
달라이 라마 사후 49일 지나 태어난 아이들 중 후계자 물색 다음 달라이 라마는 그 전 달라이 라마의 환생으로 보기 때문
제3대 달라이 라마(1543~88)는 몽골을 불교로 개종시켰으며, 제5대 달라이 라마(1617~82)는 티베트를 정치적으로까지 통치 라마교는 티베트 이외에도 몽골·시킴·부탄 등에도 퍼져 있다.
한국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래된 것은 4세기 말로서 고구려 백제 신라가 중앙집권 군주국가로 도약 종래 씨족중심 가치관을 세계적 윤리관으로 대체
고구려 불교는 372년(소수림왕 2)에 중국 전진 왕이 승려 순도와 더불어 불상과 경전을 보내 오면서부터 시작.
백제는 침류왕 원년(384) 동진(東晉)에서 마라난타라는 승려가 와서 불법을 전했다.
신라는 눌지왕 때(417~458) 불교가 들어왔으나 국가 공인을 받지 못하다가 법흥왕 때 공인(527).
삼국 가운데 불교를 힘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대업을 이룬 것은 신라.
법흥왕의 대를 이은 진흥왕은 백성들의 출가를 허락 스스로 말년에 법운(法雲)이란 법명으로 승가의 일원 왕비도 뒤따랐고 진덕여왕에 이르기까지 불교왕명시대
왕실은 백정, 마야, 승만 등과 같은 불교이름을 사용
진흥왕은 국가적 사찰인 황룡사를 건축 두 왕자의 이름도 금륜 동륜이라 지어서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한 것으로 보인다.
진흥왕대에는 화랑제도도 창시되었는데 화랑도는 미륵신앙과 밀접한 관계에 있다. 김유신을 따르는 무리는 용화향도(龍華香徒)
용화수는 미륵불 출현 때 그 밑에서 성불한 나무
신라의 불교적 애국심 배후에는 원광(圓光)·자장(慈藏) 원광은 고구려가 침범할때 수나라에 군사도움을 요청하는 걸사표(乞師表)를 작성했고 화랑을 위해 세속오계를 작성.
자장법사는 진골출신의 귀족으로 636년 당에 유학 9년후에 귀국해 대국통(大國統), 승려 총괄 중책 황룡사에 9층탑을 세우려고 했다.
신라는 8세기말 사회 혼란기에 불교계 침체 이무렵 중국 선불교가 신라에 들어오기 시작 신라 말부터 고려초에 걸쳐 구산선문(九山禪門)
고려를 세운 왕건은 독실한 불교 신자로서 풍수지리설에 입각하여 많은 사찰들을 창건. 훈요십조(訓要十條)는 불교의 중요성을 강조
이조시대 배불정책에 따라 불교는 커다란 타격 많은 승려 환속, 불교종파 통폐합, 승과제도 철폐 백성들의 출가를 금지, 승려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
.................. 우리나라 불교사 ..................
우리나라 최초 불상 석가여래 금불상 53구 신라 2대 남해왕 원년.
현재 강원도 고성땅에 이윤
당시 그곳은 신라의 영토였는데 얼마뒤 금불상을 금강산으로 이윤 금강산 유점사에 모셨다고 전해온다.
서기 48년 7월 인도 아유타국 공주 허황옥 석탑을 싣고 바다 거너 가락국 해변에 도착. 이것이 불교 포교 시발점 - 조선시대 불교통사 -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최대의 영토를 차지한 왕이다. 그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속에서 죽는 것은 백성들 뿐 그런데도 그는 계속 불교를 신봉하라는 교령을 내렸다.
권력에 의해 짓밟힌 민중들의 행복을 신앙의 위안과 복으로써 보상받게 하여 민심수습 용 기복신앙이 호국불교의 시작
고구려의 기복신앙 불교는 국민정신 통일역할을 했지만 연개소문이 배불정책, 백성들은 당에서 유입된 도교 신봉. 결국 불교는 쇠약해지고 승려들은 일본이나 신라로 망명한다.
<삼국시대>
372 고구려 소수림왕 2 전진왕이 순도를 통해 불경,불상 전함. 384 백제 침류왕 1 동진에서 마라난타가 불교를 전함. 391 고구려 광개토왕 1 왕이 백성에게 불교를 숭봉하라 하교. 392 고구려 광개토왕 2 평양에 절 아홉군데를 지음. 392 백제 아신왕 1 왕이 백성에게 불교를 숭봉하라 하교. 417~458 신라 눌지왕 고구려 승 묵호자가 불교를 전함. 452 가야 질지왕 2 수로왕의 왕후 허왕후 명복을 빌고자 왕후사를 세움. 479~500 신라 소지왕 고구려 승려 아도가 불교를 전함. 512 고구려 문자왕 21 고구려 승랑, 양무제가 보낸 고승 10명에게 삼론학을 가르침. 526 백제 성왕 4 겸익, 인도에서 율장을 가지고 귀국. 527 신라 법흥왕 14 박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 공인. 549 신라 진흥왕 10 신라 최초 유학승 각덕, 양나라에서 귀국. 551 신라 진흥왕 12 고구려에서 망명해 온 혜랑 국통이 됨. 552 백제 성왕 30 일본에 금동불,불경,미륵석불을 보내 불교를 전함. 565 신라 진흥왕 26 유학승 명관, 진나라에서 불경 가지고 귀국. 576 고구려 평원왕 18 의연, 북제에 건너가 불교역사 질의. 577 백제 위덕왕 24 검단, 선운사를 세움. 577 백제 위덕왕 24 일본에 경론과 율사,기술자 등을 보내 일본불교 지원. 576~59 신라 진지왕 진자, 백제에서 미륵화신 미력랑을 맞이함. 595 고구려 영양왕 6 고구려 혜자와 백제 혜총, 일본 쇼오토쿠(백제 위덕왕 42) 태자의 스승이 됨.
601 백제 무왕 2 미륵사 세움. 608 신라 진평왕 30 원광, 수나라더러 고구려 쳐달라는 걸사표를 씀. (612년,수나라 113만대군 고구려 침략) 610 고구려 영양왕 21 담징, 일본에 불교,유학,그림,제지법 등을 가르치고 법흥사 금당벽화 그림. 612 고구려 영양왕 23 살수대첩에 일곱 승려 공헌. 613 신라 진평왕 35 수나라 사신을 위해 황룡사에서 원광을 우두머리로 백고좌회 개최. 643 신라 선덕여왕 12 자장, 왕의 요청에 따라 당에서 귀국. 643 고구려 보장왕 2 당에 사신을 보내 도사,도덕경 들여와 도교 장려 645 신라 선덕여왕 14 황룡사 9층탑 세움. 650 고구려 보장왕 9 보덕, 백제에 망명. 660 백제멸망 후 도침, 복신과 함께 주류성에서 일어나 백제 국권회복투쟁을 벌임. 671 신라 문무왕 10 의상, 당나라에서 귀국하여 당군침략 정보를 알림. 명랑, 당군 침략 물리치는 밀교의식. 676 신라 문무왕 15 의상, 부석사 세움. 왕의 논,밭,노비 기부를 거절.
<남북국시대>
697 발해 고왕 1 당나라와 불교 외교. 713 발해 고왕 16 발해 사신, 당나라 사찰 참배 허용 요구. 740 신라 효성왕 4 심상, 일본에 화엄종을 일으킴. 751 신라 경덕왕 10 재상 김대성, 불국사와 석굴암을 세움. 753 신라 경덕왕 12 대현, 대궐에서 금강명경 강의. 754 신라 경덕왕 13 법해, 황룡사에서 왕을 위해 화엄경을 강의. 763 신라 경덕왕 22 신충, 왕을 위해 단속사 세우고 왕의 복을 기원함. 764 신라 경덕왕 23 진표, 금산사에서 미륵불 조성. 821 신라 헌덕왕 13 도의, 당에서 돌아와 선을 전함. 826 신라 흥덕왕 1 홍척, 당에서 돌아와 실상산파 개창. 845 신라 문성왕 7 무염, 당에서 돌아와 성주산파 개창. 847 신라 문성왕 9 범일, 당에서 돌아와 사굴산파 개창. 864 신라 경문왕 4 도선, 옥룡사 세움. 873 신라 경문왕 13 순지, 당에서 돌아와 오관산파 개창. 875 신라 헌강왕 1 도선, 송악지방 호족 왕륭과 친교. 891 신라 진성여왕 5 궁예, 기훤의 농민봉기군에 참가. 894 신라 진성여왕 8 최치원, 해인사에 은둔. 895 신라 진성여왕 9 궁예, 새 나라를 세움. 898 신라 효공왕 2 궁예, 팔관회 개시. 900 신라 효공왕 4 진훤, 후백제를 세움. 922 신라 경명왕 6 진훤, 미륵사탑 복구, 선운사에서 승려 지도자 선출.
<고려시대>
918 태조 1 왕건 즉위, 팔관회 개시. 921 태조 4 이엄을 왕사로 책봉. 927 태조 10 발해 승려 재웅 등 고려에 망명. 936 태조 19 후삼국 통합, 개태사 세움. 958 광종 9 승과 개시. 961 광종 12 체관을 중국에 보내 천태종 서적 전함. 964 광종 15 균여를 귀법사 주지에 임명. 982 성종 1 최승로, 시무책에서 부패 불교 비판. 987 성종 6 팔관회 폐지. 1010 현종 1 팔관회 재개. 1011 현종 2 거란 침략 물리치기를 기원하여 대장경 간행. 1067 문종 21 흥왕사 세움. 1070 문종 24 의천, 15세에 승통에 임명됨. 1085 선종 2 의천, 송나라에 몰래 건너가 다음해 귀국. 1086 선종 3 의천, 교장도감을 두어 속장경을 조판. 1090 선종 7 의천, 최초의 불교도서목록 `신편제종교장총록'작성. 1096 숙종 1 천태종을 열고 국청사를 세움. 1101 숙종 6 참사상 퍼뜨린 광기와 각진을 처벌. 1107 예종 2 여진 정벌, 옛땅 회복 투쟁에 승군 참전. 1107 예종 2 함경도 정복지에 호국인왕사, 진동보제사 세움. 1129 인종 7 묘청 등, 칭제건원, 금나라 정벌 건의. 1131 인종 9 묘청, 서경 대화궁에 팔성당 지음. 1135 인종 13 묘청, 서경에서 혁명. 새나라 이름을 `대위'라고 함. 1170 의종 25 보현원에서 무신정변 폭발. 1174 명종 4 귀법사 승려 봉기, 개경 승려 반란, 왕정복고투쟁. 1176 명종 6 공주 명학소 민중봉기, 사찰습격. 1177 명종 7 서경 민중봉기, 담화사 근거로 투쟁, 승려들을 봉기군으로 징발함. 1181 명종 11 농민봉기군, 왕실 원찰 봉은사 습격. 1190 명종 20 지눌, 정혜결사 조직. 1202 신종 5 대구 동화사, 부인사 승려들, 농민봉기에 참가. 1217 고종 4 최충헌 타도를 위한 승군 반란. 1231 고종 18 충주 노비해방투쟁 지도자 우본이 몽고 침략군에 항쟁하여 물리침. 1232 고종 19 요세, 백련결사 조직. 1232 고종 19 우본이 이끄는 노비, 승군 2차 노비 해방 투쟁. 1232 고종 19 개경 노비, 승려 봉기. 1232 고종 19 김윤후, 처인성에서 몽고 원수 살리타이 사살. 1236 고종 23 강화도에서 대장경 새김. (1251년 완성) 1253 고종 40 김윤후, 노비군 이끌고 충주성 사수. 1275 충렬왕 1 일연, 삼국유사 저술. 1328 충숙왕 15 무기, 석가여래행적송 지음. 1348 충목왕 4 원 왕실의 장수,행복을 빌기 위해 경천사 대리석 탑 세움. 1356 공민왕 5 보우, 왕사가 되어 승직 임명 관장. 1365 공민왕 14 신돈, 국정의 전권을 맡아 개혁정치. 1366 공민왕 15 신돈, 전민변정도감 설치, 권문세족이 강탈한 토지 환수, 노비해방. 1371 공민왕 20 신돈 처형후 보우를 국사로, 혜근을 왕사로 책봉. 1388 우왕 14 신조, 이성계의 참모로써 위화도 회군에 주요 역할. 1388 창왕 1 이성계 심복 조인옥, 불교배척 상소. 1391 공양왕 3 박초,김초 등 불교배척 상소 잇따름.
<조선왕조시대>
1392 태조 1 도첩제 강화로 승려 출가 억제. 무학을 왕사로 임명. 1402 태종 2 사찰 토지 몰수 시작. 1406 태종 6 사찰 수 제한 조치. 1406 태종 6 성민 등 탄압조치 시정 호소. 1406 태종 6 해선, 지붕개량사업 자청. 1424 세종 6 불교종파 통폐합 조치. 1427 세종 9 천우 등 온천치료 기금 설치 청원. 1433 세종 14 태평관 짓는 일에 승려 동원. 1461 세조 6 간경도감을 두어 주요 경전 번역,간행. 1464 세조 9 왕실 원찰 원각사 세움. 1471 성종 2 염불소 금지. 1492 성종 23 도첩제 폐지, 무단출가 승려 환속조치. 1503 연산군 10 승과 폐지. 1516 중종 11 사찰 토지,노비 몰수. 1535 중종 30 태안반도 운하 공사에 승려 동원. 1550 명종 5 보우 등용, 불교 부흥. 1552 명종 7 도첩제,승과 부활. 1559~ 명종 14~17 임꺽정의 봉기. 1562 1565 명종 20 보우, 제주도에 유배되어 살해됨. 1566 명종 21 도첩제,승과 폐지. 승려 출가 금지. 1589 선조 22 정여립의 혁명 모의에 구월산,지리산, 송광사 불교 세력 참가. 1592 선조 25 일본의 침략에 맞서 의승군이 일어남. 공주 의승군의 청주성 탈환, 휴정의 전국 승군 조직. 1593 선조 26 의승군, 평양성 탈환, 행주산성 전투에 참가. 1593 선조 26 윤눌 등 의승군, 이순신의 수군에 참여 1597 선조 30 의승군, 울산,석주관 전투 참가. 1598 선조 31 의승군과 수군 협동작전으로 노량대첩. 1598 선조 31 이몽학의 민중봉기에 승려들 참가. 1604 선조 37 유정, 일본에 가서 강화회담, 포로 송환. 1623 인조 1 승려 도성 출입 금지. 1624 인조 2 평양성 재건에 승려들 동원. 1627 인조 5 후금이 침략하자 명조, 의승군 일으킴. 1636 인조 14 청이 침략하자 각성, 의승군 일으킴. 1669 현종 10 대흥사에 휴정의 사당 표충사세움. 1688 숙종 14 여환의 미륵혁명 운동. 1687~ 1697 숙종 13~23 장길산 유격대의 투쟁. 1696 숙종 22 뇌현 등, 안용복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울릉도 영토권 확인 소송. 1697 숙종 23 장길산과 연대한 민중불교혁명운동 발각. 1728 영조 4 이인좌의 반란에 지리산 승려들 참가. 1758 영조 34 황해도 농민들의 존경을 받던 `생불' 여인 처형 당함. 1763 영조 39 황해도 미륵신앙자 처형. 1785 정조 9 함경도 거사 집단과 미륵교도의 봉기모의. 1785 정조 9 용파, 관리들의 사찰 수탈 시정 호소. 1826 정조 26 백파, 선문수경 지음.초의,김정희와 논쟁. 1851 철종 2 성월, 구월산 봉기에 참가. 1867 고종 4 순성, 명화적을 조직하여 서울,경기의 양반 부호,관가 습격 1870 고종 7 이필제, 지리산 대원암을 근거로 혁명운동. 1892 고종 26 선운사 마애미륵불 비결사건. 1892 고종 26 승려출신 서장옥, 동학 삼례집회 주도. 1893 고종 27 서장옥, 서울에서 대자보 등으로 반외세운동 주도. 1893 고종 27 동학 보은집회 당시 남접진영에 호남 승려들 참가. 1894 고종 28 갑오농민전쟁에 민중불교세력 참가. 1895 고종 32 일련종 승려과 옴. 승려의 도성출입금지해제를 청함. 1897 고종 34 승려 도성출입금지령을 해제함. 1899 고종 36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하여 각 사찰에 분배함. 동대문밖 원흥사를 세움. 1902 고종 39 원흥사를 대법산으로 삼고, 사찰령36조를 정함. 1908 순종 2 원종종무원을 건립함. 이회광을 대종정으로 임명함. 1910 순종 4 승려들의 취처의 자유를 의논함. 임제종을 창설함.
<일제시대>
1911 임제종 종무원을 설립. 사찰령 시행규칙을 분류함. 30본사를 설정함. 1912 조선불교선교양종 종무원을 설치하고, 각황사를 중앙포교당으로 함. 1913 스리랑카승려 달마파라가 옴. 불교흥릉회를 발족함. 1917 불교진흥회를 설립. 1920 불교청년회를 설립. 1921 조선불교선교양종 중앙총무원을 설립. 1922 불교유신회를 만듬. 사찰령 폐지 등을 조선총독부에 제출. 1924 불교 지 창간. 원종호법회를 설립. 1927 조선불교중흥회를 설립. 금강산 유점사에서 금강불교청년회를 설립. 1928 사법개정. 각사에 평의원회를 설치. 불교 시찰단을 일본으로 파견함. 1929 전국승려대회를 개최함. 1931 각황사에서 조선불교청년동맹의 발기대회를 개최함. 1936 해인사 대장경을 인각함. 1942 조계종법을 발포. 1945 사찰회. 조계종 총본산, 태고사법등의 폐지를 결의. 대한민국 불교신종단의 출발 1946 대한민국 성립.
<대한민국>
1947년 선학원에 조선불교 총본원설립(교정 장석상), 태고사 인도 요구. 1948년 5월 제헌국회에 승려 출신 유성갑. 최범술 당선. 1948년 6월 조선불교 제2대 교정에 방한암 추대. 1948년 12월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장에 박원찬 발령. 1949년 9월 유엽. 한보순. 장도환 등 총무원에 난입. 원장 박원찬 등을 감금. 사직 강요 1949년 10월 제3대 총무원장에 김구하 취임. 1950년 5월 제2대 국회에 승려 출신 이종욱. 허영호. 박성하 당선 진출. 1950년 6월 인민군을 따라서 남하한 김해진에 의해서 총무원이 점령당했으나 곧 수복. 불교계 주요인사 납북됨. 1952년 7월 제4대 총무원장에 이종욱 취임. 1954년 5월 이승만대통령 제1차 정화유시 발표. 1954년 6월 조선불교를 대한불교 조계종으로 개칭 1954년 6월 불교정화운동 발기인대회 개최 1954년 11월 비구측 태고사 강제 점거. 대처승 축출 1955년 1월 종정 송만암, 비구승이 환부역조(換父易祖 : 보조종조론을 가리킴) 한다고 종정을 사퇴하고 대처승측에 가담. 1956년 6월 서울지방법원, 비구측의 종헌 무효 선고. 비구측 항소 1957년 9월 서울고등법원, 비구측 패소 부분을 취소한다고 판시 1958년 12월 장성 백양사. 비구.대처승간 난투극 연출 1960년 11월 비구들 400여명 대법원 청사에 난입. 6명의 비구 할복 기도 1962년 1월 비구측 종정 하동산과 대처승측 종정 국성우 문교부에 출두하여 통일종단 구성에 서명 날인 1962년 5월 불교재산관리법 제정 공포 1962년 9월 통합종단 결렬 1970년 4월 대처승측, 한국불교태고종으로 독자노선을 선언. 1978년 3월 조계종 재야측, 개운사에 임시 총무원을 개원, 조계종 양분. 1980년 10월 개운사측, 조계사측 총무원을 강제 점거 1980년 10월 계엄사령부, 조계종 총무원 및 전국주요 사찰에 계엄군 투임. 10.27법란. 1983년 8월 설악산 신흥사 신임주지 부임 과정에서 폭력사태 발생. 사망 1명, 중경상 6명. 1986년 6월 정토구현 전국승가회 창립 1986년 8월 조계종 제 25대 총무원장 서의현 취임. 1988년 불교재산관리법 폐지, 분종과 창종 사태(30개 가량의 신생 불교 종단 출현) 1993년 11월 조계종 종정 성철스님 입적 1994년 3월 서의현, 조계종 총무원장 3선 1994년 3월,4월 범종추, 구종법회 1994년 4월 13일 서의현 총무원장 전격 사퇴 1994년 4월 13일 조계종 개혁회의 출범. 1994년 11월 21일 송월주 스님 총무원장 당선 1998년 고산스님 1999년 정대스님 2003년 법장스님
반선.
반선.~~~~.~~~~~~.뱀사골....산장...................↘ ........↖...................................삼도봉.......불무장등....화개골(남난희)... 화개장터...섬진강 ...........↖..........*반야봉.........노루목..... .칠불사.....(무학대사)...불일폭포..쌍계사... ..............↖.*달궁................임걸령 샘터..........피아골 산장....연곡사........... .................↖.....................돼지령. .................심원계곡.........노고단 산장....왕시리봉.........문수골 .......................↖............성삼재 ............................←.....차일봉................화엄사
반선은 뱀사골 계곡 들머리. 달궁에서 내령 방향 5KM 지점이다. 달궁계곡을 넘어가면 유명한 화엄사가 있어 등산코스로도 한 몫 천은사로 통하는 관광도로가 있고 남원에서 반선행 버스 15분 간격.
반선에서 지리산 관광도로를 따라 4.6km를 가면 달궁마을. 계속가면 노고단과 시암재를 넘어 천은사까지 연결이 된다. 남원공용버스터미널- 반선행 직행 15분 간격 운행(1시간 소요)
전주공용버스터미널에서 반선행 버스 22회 운행( 3시간 소요 ) 광주종합버스터미널에서 뱀사골행 직행 9회 운행(2시간30분 소요) 대구서부시외버스정류장-거창,함양 경유 뱀사골 버스 7회(2시간 40분)
................................................................... ................................................................... 반야봉, 반선, 뱀사골 지명에 관한 전설. .................................................................... ....................................................................
지금부터 약 1300년전 송림사(松林寺)라는 사찰. 신라고찰 구산선문 실상사보다 100년이 앞선 대찰 많은 고승이 모여 수도를 하는 사찰이였다고 한다.
이 절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음력 칠월 백중날에 불심이 가장 두터운 스님 한분이 뽑혀 목욕 재개 새 옷으로 갈아 입고 신선바위에 올라 기도를 하면 그날밤으로 신선이 된다고 하여 해마다 행사를 계속.
그러던 어느해 송림사에 고승 한분이 찾아온다. 지금까지 송림사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 듣는다. 그리고 그 이상한 일을 직접 확인하려고 결심한다.
고승은 그해에 선발된 스님 옷깃에 비상을 발라 입힌다. 그 스님이 입은 옷은 임금님이 특별히 하사한 비단 도포. 선발된 스님은 신선바위에 올라 기도를 드리도록 하였다. 한편, 송림사는 그 스님을 위해 100명 고승이 100일 기도
100일 기도가 끝나는 날 새벽 축시경 어디선가 찬바람 골짜기가 무너질 듯한 청천병력과 함께 괴성이 들려왔다. 신선바위의 스님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져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날이 밝은 후 스님을 찾아 계곡을 올라가니 스님은 용소 옆에 단정히 정좌하여 합장하고 있었으며 그 앞에는 어마어마한 용이 못된 이무기가 죽어 있었다.
100 명 고승의 기도가 그 선발된 스님의 목숨을 구한 것. 이무기는 스님의 옷깃만 물고 하늘로 날아 올라간 것이다. 그 선발된 스님 옷깃에 묻은 비산을 먹고 이무기는 용틀임. 산신령도 감동해 용이 못된 이무기를 벼락으로 쳐 죽인 것.
이때부터 이 산을 반야심경의 반야봉이라 불렀단다.
용소는 용이 못된 이무기가 살던 곳이라 뱀소로 격하 또한 뱀이 죽은 골짜기라하여 뱀사골(巳死谷)이라 명명 신선바위에 올라간 스님들의 반은 신선이 되었다하여, 반선.
임금님이 선발된 스님에게 비단도포를 하사한, 금포정 그때 살아 돌아온 선발된 스님이 '정진 스님'이었단다. 스님은 고승들의 100일 기도를 드렸던 곳에 사찰을 건립.
은혜를 갚기 위해 평생 수도를 하다가 일생을 마쳤다 한다. 그런데 사리가 많이 나와 사리탑을 쌓고 그 암자를 정진암 지금도 정진암(正眞巖) 터에는 기와조각들만이 흩어져 있다.
'반야봉, 뱀사골, 반선' 지명에 담긴 인신공회 전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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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선 지명은 전통 무속신앙과 불교가 결합된 흔적.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인신공회에 관한 전설이 많다. 특히, 우리나라 당집의 전설은 하나같이 내용이 같다.
....................인신공회 전설........................ 어느날 당집 건너 편의 돌덤(石峯)이 점점 커지더니 산덩이만한 수탉이 되어 주변에 사는 사람을 해치고 곡식까지 전부 주워먹어 사람들이 살수 없게 되었다.
예쁜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 환란을 면할 것이라는 스님. 그 뒤 처녀를 제물로 바치면서부터 그 환란은 면했으나 처녀가 있는 집에서는 서둘러 그 마을을 떠나갔기 때문에 이제 그 마을에서 마지막 남아있던 처녀를 바치는 밤이었다.
마을 원로가 제물로 바치기 위해 처녀를 데리고 가는데 별안간 당집이 훤해지며 커다란 구렁이가 당집에서 나와 수탉과 맞붙어 싸우는 광경이 용호상박하는 형상 같았다.
'마을 수호신 당할머니가 구렁이로 변해 수탉과 싸움.'
노인과 처녀는 겁에 질려 쥐구멍 찾듯 당집에 숨어 태산이 진동하듯 으르렁대는 소리에 뜬 눈으로 밤샘.
다음날 수탉은 부리가 잘린 채 죽어 있었고 구렁이는 전신에 상처 입은 채 죽어 있었다.
사람들은 정성껏 흙으로 덮어 주었는데 무덤 하나는 부리 없는 수탉산이 되었고 또 다른 무덤은 구렁이 산이 되었다 한다.
그런데 마을에 재난이 일어나는 것을 막기 위해 마을 수호신 당할머니는 구렁이로 변해 용 써서 수탉산 부리를 못 자라게 하여 마을을 지켜주었다.
마을 주민들은 구렁이로 변해 수탉을 죽이고 죽어서도 마을의 평화를 지켜준 당할머니 은혜 그 보답으로 구렁이 동산에 당집을 지었다 한다.
'그후 음력 정월 사흘 밤마다 당집에서 고사.' .............................................................
'당집 전설은 어디에서 비롯된 것일까?'
천왕성모 8딸이 팔도무당이 되었다는 백무동 전설. 백무동을 거점으로 무당이 전국으로 퍼져나간 흔적. 반야봉, 뱀사골, 반선 일대는 그 사실을 뒷받침한다.
'당집은 기자 조선에서 비롯된 전설의 고향인듯.'
기자 조선 유민들이 세운 고대국가 변한 삼한은 한반도 삼국시대 이전의 고대국가.
이 일대 당집 전설은 한반도 인간역사를 알려주는 듯. 신석기시대부터 옛 조상들이 남긴 삶의 터전 흔적 같다. 즉, 고대 동아시아 유목민들이 집단 이주해 정착한 흔적.
특히, 고려 초에 발해 유민들이 대거 집단 이주한 흔적. 발해는 고구려 지배층과 거란족 피지배층으로 구성된 나라. 거란에게 패망한 발해의 유민들을 받아들였던 고려의 왕건.
'특히, 발해는 고려의 맥을 잇는다고 자처한 국가.'
왕건은 발해 세력과 힘을 합쳐 후백제 점령 후 후삼국 통일. 발해 유민들은 고려 왕조의 굳건한 지지기반으로서 정착한다. 따라서, 고려의 한반도 통일은 옛 고구려의 부활을 상징한다.
지금부터 이 일대 풍습을 통해 그 사실을 살펴보자.
우리나라에서는 제수로 웃는 형상의 돼지머리를 선호한다. 아울러, 돼지 주둥이에 돈을 물려주는 '고사'는 부를 상징. 복권에 당첨됐거나 횡재했다는 사람들은 돼지 꿈을 말한다.
- 진서의 숙신씨 편에 식생활과 시체 매장법 기록 -
“그들은 돼지의 고기를 먹고,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었으며, 기름을 몸에 발라 추위를 막았다. 또한 사람이 죽으면 돼지를 잡아 관 위에 올려놓았으니, 죽은 사람의 양식으로 바치는 습속이 있었다.”
이는 고구려의 영토가 된 만주지방에 살던 읍루족의 기록. 오늘날 제삿상에 돼지 머리 얹는 것은 여기서 유래된 풍속.
삼국지 '위지 동이전’기록을 보면 색다른 사실을 알 수 있다. 부여에는 목축이 발달하였으므로 가축 이름에서 본딴 벼슬 이름. 마가(馬加), 우가(牛加), 저가(猪加), 구가(狗加), 견사(犬使) 등.
'가축을 벼슬만큼 소중하게 생각했음을 알수 있는 기록.'
어쨌든 죽고 나서도 웃는 듯한 제사상의 돼지머리를 보면, 끈질기게 농토를 지켜낸 민족의 한과 해학을 느낄 수 있다. 웃는 돼지머리에 절하며 소원을 빌고는 짤라 나눠먹는 풍습.
'뱀사골 들머리에 있는 유성 식육식당 달궁 만복식당은 토종 흑돼지 요리 명소.
고추장 된장으로 무쳐낸 산나물도 맛있고 철판 숯불구이에 3년 묵은지(김치)도 별미. 뱀사골 또는 달궁을 찾을 때 들러볼만 하다.
남원시 산내면 대정리에서부터 인월면 일대 인근마을. 상황리, 중황리, 하황리, 마천 일대는 흑돼지 오지 마을 옛부터 지금까지 흑돼지 마을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이는 지리산 일대 산간 오지마을들의 특성이기도 하거니와 지금도 쌀죽겨, 구정물만 먹인 흑돼지를 구할 수 있는 고장. 100근 미만 흑돼지는 꼬리가 말려있고 주둥이가 벌쭉거린다.
그 옛날 똥돼지 냄새를 피우고 있는데 보기만 해도 정겹다. 또 허리는 길고 발목은 짧아 대도시의 살찐 돼지와 다르다.
이 일대는 지리산 토종돼지 소금구이가 별미인 지역. 비계 껍질이 골고루 섞이게 삼겹살을 석쇠에 올린다. 굵은 소금만 홀홀 뿌리며 구워도 토종돼지 맛을 실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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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재래식 화장실 안에 흑돼지를 키우던 풍습 화장실 아래 우리에서 인분을 받아먹어 일명 똥돼지 제주 똥돼지 관광은 요즘 신혼여행 부부에게 큰 충격.
1980년대까지 제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집모퉁이 돼지우리 위에 가릴곳 없는 화장실 볼일 볼 때 돼지가 달려와 받아 먹는 놀라움. 이따금 배고픈 돼지가 부랄이라도 따 먹을 듯
'화장실 옆에 놓여있는 장대 같은 막대기.'
비로서 뒤늦게나마 그것의 용도를 알게된다. 화장실에서 용변볼때 필요한 똥치는 막대기. 돼지가 인분을 받아먹다가 귀를 털면 똥벼락.
멋을 잔득 낸 신혼부부에게는 긴박한 상황.
달려드는 돼지를 쫓을 때 인분을 치울 때 요긴. 볼일 본 후엔 천덕꾸러기 신세인 똥치는 막대기. 볼일 볼때 만큼은 이것처럼 소중한 것도 없는 듯.
제주에서는 볼일을 보며 이웃 사람들과도 담소 며느리 볼일 보고 있는데 말을 건네는 시아버지. 감나무 잎으로 뒤처리하는 모습도 흉허물이 없다.
돼지 덕분에 뱀에게 물림 염려 없는 화장실. 돼지가 뱀을 잘 잡아먹기 때문에 안전한 장점. 까만 빛깔 윤기가 잘잘 흐르는 제주 검은 똥돼지.
체중 60Kg 전후라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이 단점 흑돼지 5겹살 단백한 육질 맛은 정평이 나 있다. 흑돼지 사육법은 고려 말 원나라에서 유입된 풍습.
제주도와 지리산 일대는 원나라 풍습이 많은 고장. 흑돼지는 고려 말 원나라 유민들이 정착했던 흔적. 흑돼지 사육은 고구려 유민들의 전통적인 풍습이다.
지리산 흑돼지 마을들은 이웃마다 풍습이 서로 다르다. 백제권 풍습인 듯해도 고대부터 외래 문화가 유입된 듯. 마을 공동으로 올리는 당산제와 기우제가 이를 뒷받침한다.
'도대체 고대사회 어느 나라에서 유입된 문화일까?'
상황리 <상황마을> 입구 둘레 580cm 수령 500년 느티나무 수고 25m인 이 나무에서 해마다 7월 7일(음력)에 '당산제.' 제관은 이장이 하며 마을의 안녕과 질서를 기원하는 목적
<중황마을>은 하황마을과 상황마을의 중간에 있는 마을. 마을에서 북쪽으로 가면 길가에 두 그루 느티(당산)나무. 과거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 지금은 매년 두레 잔치할 때
추수감사의 의미로서 이장이 제관을 하고 주민들이 당산제. 제물로 뫼밥, 돼지, 산나물, 과일 등으로 일반 제사와 같다. 특히, 당산제가 끝나면 농악을 울리면서 동네를 한바퀴 돈다. 제사에 들어가는 비용은 마을 기금으로 공동 운영 하고 있다.
중황마을에는 2기의 누석단( 마을 북쪽과 마을 서쪽 개울가) 북쪽 누석단은 논가에 있는데 너비가 640㎝이고, 높이는 4m 마을 서쪽 누석단은 너비가 약 6m정도이고, 높이는 약 250㎝
이 마을에서 소년들이 자주 죽자 지관 지시에 따라 탑을 쌓았다 또 마을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 누석(累石)을 쌓았다고 여겨진다. 이곳에서는 누석단을 '조산(造山)' 또는 '조산무데기'라고 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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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시 산내면 지리산 자락 매동마을은 곶감 산지로 유명. <매동마을>엔 마을 뒷산에 할아버지와 할머니 당산이 있고, 마을 복지회관 옆에 작은 할머니 당산이 있어 모두 3 군데.
할아버지 당산은 고사한 나무와 누석단의 결합한 형태이고 할머니 당산은 누석단, 작은 할머니 당산은 땅에 뭍힌 암체. 제관은 마을에서 깨끗한 사람을 선정하여 부부가 함께 지낸다.
제관은 삼일간 찬물로 목욕을 하고 부부관계를 금한다. 비용은 마을에서 모우고 제관은 조기, 과일, 밥을 준비 부부가 음력 정월 초사흘날 밤 12시부터 제사를 지낸다.
할아버지 당산에서 할머니 당산, 작은 할머니 당산 순서 당산제의 물은 신령 약수터, 음식은 세 당산을 따로 장만 제사 후 마을에 재해가 없기를 바라며 함께 모여 음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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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동리' <소년대 마을>은 매동마을 옆에 있는 작은 마을. 이 마을 뒷산에 병풍바위 혹은 노암바위가 바로 당산이다. 정월 초사흘 날 새벽 1시에 마을에서 깨끗한 부부가 제관
이들 부부가 음식을 장만하고, 마을 공동기금으로 당산제 제사 전날에 당산에 황토를 뿌리고 왼새끼를 꼬아서 금줄 상주나 산모 등등 부정한 사람의 출입을 사전에 통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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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마을은 산세가 노루 목과 같아 붙여진 이름.'
장항에서는 매년 음력 정월 초이튿날 당산제를 지내온다. 마을 두시산에 산제당이 있고, 그 약간 아래 쪽에 중당산 마을 앞 쪽에 하당산이 있고 산제당 형태는 소나무 4-5 주.
중당산은 소나무와 누석단(累石壇)의 결합 형태이다. 하당산(下堂山)은 귀목나무와 누석단의 결합 형태이다.
음력 1월 2일 밤 12시에 제관 혼자 산제당에서 제사. 직접 밥을 하고, 사과, 대추, 미역자반(건포)을 준비.
다음 날 새벽 2시 정각에 중당산에서 다른 축관이 독축 돼지 머리가 없어지면, 산신이 먹었다고 믿는다고 한다. 계명축시(鷄明丑時) 즉 새벽 3시에 할머니 당산에서 굿 할머니 당산제를 끝으로 모닥불을 지피고 밤 세워 논다.
제관은 부정을 타지 않은 깨끗한 마을사람이 선정되어 삼일동안 찬물에 목욕제게(沐浴齊戒)하며 근신을 한다.
또한 삼일 전에 제관의 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뿌리며, 당산주변에도 금줄을 친다. 제사 비용은 각 집에서 추렴 제사에 쓰이는 모든 물은 '바람골' 계곡의 물을 사용한다.
'장항마을 서쪽 200m 떨어진 천변의 애기바위.'
자연석 3층 윗부분의 돌은 남근을 연상케 하며 2m 정도. 마을 사람들이 애기바위에 돌을 던져 그곳에 맞으면 아들 그곳에 맞추지 못하면 아들을 낳을 수 없다고 전해져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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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천마을 당산제는 제단 주위에 사람이 밟지 않았던 붉은 흙을 뿌리고 금줄에 문종이를 찢어 달아 놓는다.
제사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돼지머리 제사상에 차릴 음식은 간을 보지 않는다.
돼지머리 뼈를 위턱과 아랫턱에 나눠 묻고 밥은 문종이에 싸서 나무 뒤에 따로 묻는다. 제사는 정원 초사흘 11시 30분에서 1시 사이 요즘에 와서는 10시에서 11시 사이에 지낸다.
제관은 초하루와 초사흘 사이에 정하는데 인원수에 제한없고 깨끗한 사람이면 된다.
밤마다 당산나무에 가서 호롱불을 켜고 아침에 끄는 것을 14일 동안을 반복한다.
..................................................... ..................................................... 삼화마을은 할아버지 당산과 할머니 당산. ...................................................... ......................................................
할아버지 당산에는 술, 명태, 과일만 놓으며 할머니 당산에는 돼지고기, 술, 쇠고기로 제사상 여기에서는 지신제와 거리제를 당산제와 함께 한다.
정월 대보름에 당산제를 지냈으나 현재는 정월 초사흘 당산(느티)나무 둘레가 18㎝이고 조산과 함께 위치한다. 당산제를 지내는 목적은 마을 수호와 마을의 풍요를 기원
지신제를 지내는 데는 특별한 행사없이 음식만 차려놓고 정월 대보름의 제사를 지금은 당산제와 같은 날에 지낸다. 거리제 역시 당산제를 지낸 후 잘가라는 의미에서 같은 날. 제관은 이장과 깨끗한 젊은이 네 명 정도인데 당일날 선출.
이 마을에 2개의 조산 중 하나는 마을 입구 오른 쪽 끝 이것은 마을의 재앙을 방지하고 마을의 평화를 위한 것. 1m 암반 위에 높이 205cm 높이로 쌓여 있고 암반포함 305cm. 둘레 9m 끝에 입석이 3개, 다른 조산은 당산나무 앞에 위치
내령마을 신선바위는 1800년대 팔령치 화전민들 정착마을. 마을 입구의 300m 지점에 산신바위는 신선이 노는 영대(靈臺) 그 신선바위 이름을 따서 내령리(內靈里)라고 부르게 되었다.
이 일대에 당집은 백무동 지명과 무관하지 않은 듯. 지금은 백무동이라고 하지만 이조시대 지명은 백무당. <지리산 이야기 - 열 다섯. 1790년 방장유록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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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집이 많은 지역은 경기도 광주군 돌마면(분당 신도시 일대.) 분당, 정자, 수내, 서현, 이매, 여수, 율, 야탑, 도촌동 등등. 낙생면(동원, 금곡, 궁내, 삼평, 백현동)과 용인군 수지면 등.
분당은 '당모루' '장터' '안골' '점골'등을 합친 지명 예전엔 '동이점'이라 불렀고, 이후 '분점리'에서 '분당' 분당 = 분점리 '분'자 + 당우리 '당'자 = 옹기 구운 곳.
고려 말 우리나라에 귀화한 당성의 후손들이 사는 고을. 즉, '당모루'라고 부르다가 '당우리'가 된 고을의 이름.
분당의 지형은 '앞발을 들고 일어선 당나귀 상'
'녹수 마시는 당나귀', '여명을 응시하는 당나귀.' 당나귀는 꾸준한 인내심으로 저력을 상징하는 동물. 분당은 고려 말 한반도에 귀화한 원나라 유민 집단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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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에서는 마을 제사인 당산제를 지내는 마을이 많다. 우리나라의 민간신앙을 보면 그 조상의 뿌리가 보인다. 특히, 불교, 도교, 유교 등과 민간신앙과 결합한 흔적들.
마을신, 집안신, 무속, 독경, 고목, 영웅, 사귀(邪鬼) 점복, 예조, 금기, 주술, 풍수지리, 민간의료 등의 신앙.
고구려의 동맹, 부여의 영고, 예의 무천, 삼한의 시월제. 예맥(濊貊) 사람들의 의례와 풍속에 대해 언급된 동이전. 우리나라의 제례는 유교식, 불교식, 무교식 법칙이 주류.
조상제사와 성인을 모신 사당에 대한 제사는 유교식, 49재와 우란분재는 불교식, 서낭제 씻김굿은 무교식. 불교식은 염불, 유교식은 향, 청수, 꽃 과일 음식공양
강릉 단오제는 먼저 시장이 유교식으로 제사를 지내고 무당이 본격적인 무교 제의로 진행되는 이중구조 특징. 남성 중심 제의는 서낭제, 산신제, 거리제, 돌탑제 등 여성 중심 제의는 가족 안녕과 가운번창을 비는 안택제
굿은 신과의 상봉으로 소망과 문제를 해결하려는 행위. 유교식 제사는 가문의 조상 및 성인을 모신 사당 제례.
생활환경이 같은 마을사람들의 공동신앙이 당산(부락)제 호남에서도 전북 지역에 당산제가 많고 전국적으로는 동제.
우리나라 동제의 시초는 12월에 하늘에 제사한 부여의 영고, 10월에 제사한 고구려의 동맹, 마한은 소도라는 신역에 솟대 신라는 진흥왕 33년에 국태민안을 위한 전통적인 산천제 동제.
서낭신·산신·용신·당산신·장승 솟대 마을 뒷산 정상 국사당, 산 중턱 산신당, 동구 옆에 서낭당이나 장승, 동구 밖 솟대
동제는 봄 가을 또는 정초나 대보름날 밤 자정 해안지방의 동제 별신굿이나 용왕굿은 특별히 날.
동제당의 대표적인 명칭으로 서낭당, 성황당, 산제당 산신당(경기·충청), 당산(전라·경상), 포제단(제주)
서낭당은 유목민이 천신의 거주처를 마련한 민속신앙 몽골의 '오보' 신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천신제를 지내는 천제단, 마을 뒷산 고개마루에는 국사당
산신 산신령 호랑이에 대한 신앙이 강한 사람들은 심마니 경기 중부지방은 장승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을 새긴다. 충청 지방은 장승을 수살ㆍ수살막이ㆍ수구맥이 등으로 호칭. 영호남은 벅수ㆍ법수ㆍ미륵이라 부르고, 제주도는 돌 하루방
장승 중 가장 오래 된 것은 전북 부안군 서외리 성문안 돌장승 이조 숙종 15년(1689)에 세운 것과 실상사 입구에 있는 돌장승
<솟대>는 몽고와 만주에서 비롯되었고 까마귀를 상징. 까마귀와 까치를 신성시하여 잡는 것을 금기로 하였다. 까마귀는 '태양의 상징'이고 고구려 고분 벽화에 등장. 고대인에게 까마귀는 암흑을 막을 수 있는 태양의 상징
<돌탑>은 "산의 뼈, 흙의 정(精), 기(氣)의 핵". 돌은 인간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생필품 도구 고인돌처럼 무덤으로 쓰이며 사후의 안식처로 이용
돌은 민간신앙의 차원에서 매우 중요한 신성체(神聖體) 돌은 생명의 근원이고 생활을 풍요롭게 하는 기자신앙. 돌이 인간한계를 극복해 주는 주술적인 영험물로 인식
하여, 사람들은 바위와 돌을 조형하여 탑을 만들어 왔다. 그리고 그 탑을 신앙의 대상으로서 여기고 받들어 섬겼다. 대체로 탑에는 조각한 돌을 층층이 쌓아 만든 사찰의 석탑, 제단으로서의 누석단(累石壇), 몽골의 오보와도 같은 서낭당,
마을의 번창과 삼재(三災)를 막아주는 조산(造山) 냇가 주변에 널린 막돌을 원뿔형으로 쌓아올린 돌탑
돌탑 내부에는 감실을 만들어 내장물을 넣는데 오곡단지 금두꺼비 쇠스랑 부적 숯 등을 넣는다.
오곡단지는 풍농을 기원하는 뜻에서 넣는 곡식단지, 금두꺼비는 제비혈 지세인 마을의 피폐하는 것을 방지. 은두꺼비를 탑 속에 봉안하여 마을의 안녕을 도모한다.
두꺼비는 마을이 부자 되도록 하려는 주민들의 염원. 숯과 소금을 넣은 것은 도깨비 불장난으로 화재 방지. 부인들이 살림을 알뜰히 하라고 간수나 소금을 넣는다.
감실에 두꺼비를 넣는 마을은 두꺼비 형태 윗돌을 얹는다. 전북 진안군 진안면 물곡리는 화재를 막아주는 화재막이 탑 윗돌로는 정교하게 조각한 돌거북을 올려놓아 화재를 예방.
<기우제>는 단군이 360 가지 인간사를 다스린 중에서 으뜸. 부녀자들이 산상에 열지어 앉아 일제히 방뇨하는 방료기우 부녀자들이 강물을 키에 담고 달려 새는 물줄기로 기우 기원.
제주는 딸만 낳은 부인이 기우제 효험이 크다 믿어 비싼 품삯. 일부 지방은 무당들의 속바지를 벗게 한 후 집단 난무로 기우. 여성을 음의 상징으로 여기는 기우제 풍습이 전해져 내려온다.
몽고.
외몽골, 또는 몽고라고도 불리우는.. Mongol Uls. 북쪽 시베리아와 남쪽 중국 사이에 위치한 내륙국. 중앙 아시아 북부에 속하며, 면적은 아시아에서 6번째
인구는 가장 적으며 북위 42~52°, 동경 87~120°에 위치. 동서 2,392km 남북 가장 긴 곳이 1,259km 수도는 울란바토르 타원형의 국토면적은 1,564,116㎢, 인구 2,493,000(2003 추계).
역사적으로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라와 밀접한 관계 몽고와 한반도가 같은 혈통임을 대변하는 몽골반점. 몽고 바이칼 호수에서 도래했다는 고조선 단군 왕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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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벳고원을 말달려 야생동물을 수렵한 유목민 때론 커다란 맹수와 싸우려면 용맹해야 했을듯 옛부터 티벳고원 북방 유목민의 전투력은 일당 백
러시아를 상대로 혹한기 겨울에 연전 연승할 정도. 몽골의 기마 군단은 얼어붙은 강과 하천을 내달렸다. 겨울에 러시아를 패퇴시킨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긴 것.
....................... 몽골 원정군....................... 40% 중기마병이 가죽 갑옷에 투구 쓰고 창을 잡고 충격 행동 60% 경기마병은 활, 던지는 창, 올가미 밧줄, 전통(戰筒) 두 개.
화살 운반 차량이 뒤따랐고 경기마병은 정찰, 수색하고 중기마병을 지원하고 소탕 작전과 추격 작전을 수행했다.
장거리 기동할 때 예비말을 하나 이상 갖고 번갈아 탔으며 경기마병들은 아라비아 언월도(偃月刀). 전투용 도끼를 사용.
몽골군의 무기는 활, 갈고리가 달린 철퇴, 칼과 창을 사용 그 중 말을 타고 달리면서 목표물을 맞추는 활쏘기가 익숙 동물 가죽으로 가벼운 갑옷을 만들어 입어 기동력이 뛰어났다.
전투에 임하면 물불 가리지 않고 덤비고, 위험한 곳이라도 주저하지 않고 뛰어들며 보급이 끊어져 어려움을 당하면 말젖을 먹고 사냥한 들짐승을 먹으며 보통 1개월쯤 견딘다.
남자는 이틀낮 밤을 말안장에서 내리지 않고 견디며 말이 풀먹는 동안 잠잘 수 있도록 훈련이 되어 있다.
급한 임무를 수행할때에는 10일쯤 불도 피우지 않고 고기도 먹지 않고 말의 피를 빨아먹으며 강행군한다. 자기가 타는 말의 정맥을 끊어 그 피를 마시는 것이다.
18필의 숫말과 암말을 가지고 다니며 말이 지치면 다른 말로 바꾸어 달린다.
몽골군은 젖을 걸쭉한 풀처럼 만들어 군량으로 사용한다. 젖을 끓이면 뜬 크림을 다른 그릇에 담아 버터를 만든다. 버터는 전투식량으로 10 파운드씩 지니고 다니며 먹는다.
몽골군은 적가운데로 뛰어들어 혼전(混戰)하는 일이 없다. 말을 타고 적군 주위를 돌며 측면에서 활을 쏘며 공격한다.
전형적인 몽골군의 전술은 기마병의 기동성을 최대로 활용 적의 측면을 돌아 배후공격으로 혼란시킨 다음에 포위 섬멸.
때론 거짓 패하는척 퇴각하며 유인후 매복군으로 급습 또는 말 달리며 도주하다가 뒤로 돌아 활을 쏘아 반격
각 기병대에는 짧은 창(槍)과 검을 가진 500명의 보병 말 엉덩이에 타고 도주하다가 내려서 기습적으로 반격 적의 말을 찔러 적의 기마병을 떨어뜨려서 죽이는 작전.
몽골 기마병단은 어떤 방향으로도 움직일 수 있게 훈련되어 이합집산, 퇴각 공격을 자유자재로 하여 기동성으로 병력집중 순간 순간마다 우위를 확보해 반드시 승리할 때만 싸우는 전법
'갈가마귀처럼 모였다가 별처럼 흩어지는 전법.'
몽골군은 깃대를 뽑기 전에는 전쟁터를 떠나지 않고 싸우다가 포로가 되어도 절대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
몽골군은 첫 폭설이 올 때부터 잡초가 싹이 틀 때까지 주둔지에서 멀리 떠나 대규모 사냥을 하여 군사 훈련.
몽골군이 기동할 때 3개군으로 나눠 중군(中軍), 좌군(左軍) 우군(右軍)이 거의 평행하게 전진하며 서로 정보 교환.
각군은 다시 중로(中路), 좌로(左路) 그리고 우로(右 路)로 3개 제대로 병행하여 행군하거나 전투를 하면서 서로 측익을 엄호하면서 필요시 상호 협력하도록 했다.
행군할 때 1개 부대는 2일 간 노정(路程) 측면 후면 1개 부대씩을 두어 기습에 대비
전투 형태는 주로 다섯 줄(5線)로 배치하며 첫 번째 두줄은 중기마병(重騎馬兵)을 배치 다음 세 줄은 경기마병(輕騎馬兵)을 배치한다.
여기에 배치되지 않은 경기마병은 5선 앞에서 수색과 정찰을 실시한다.
특히 수색과 정찰로 적의 주력 위치를 정확하게 포착 기마병에게 장애가 되는 지형을 사전에 철저히 분석. 역전제도를 만들어 전령이 하루 150내지 250킬로를 달려 인접 부대 소식을 전하고 몽골의 통치 지역마다 역마제도
역사마다 지친 말을 두고 새 말을 타고 가도록 하였으며, 원(元)나라 전역에 역사가 1만개, 역마(驛馬)가 24 만필 역사마다 급사가 있어 2일낮 2일밤 이내 황제 명령이 전달.
대도시를 공격할 때는 정찰대를 먼저 보내 동향을 파악하고 포위해 공격하고 그 지역 포로들을 동원하여 헤자를 메꾸고 투석기 등 공성장비를 운반하도록 하여 공성을 돕도록 한다.
공성장비는 주로 중국인 및 이슬람인 기술자에 의해 제작 수공법(水攻法)은 중국 기술자들의 도움을 받아 제작한다. 몽골군은 어떤 싸움에서 물러나지 않을 만큼 용맹하고 잔인 ....................................................................
원나라 몽골 기마군단 원정군은 12월에 고려를 침공 병사마다 말안장 밑에 깔린 3개월 분 육포 비상식량. 불과 열흘만에 고려를 정복해 80년간 속국으로 지배.
......................역마 제도........................ 몽골은 '역마 제도'라는 독특한 통신망을 확보. 광대한 제국의 통치를 효율적으로 할 수 있었다.
대칸의 명령과 각종 정보가 빨리 전해질 수 있도록 40㎞마다 「참」이란 역을 두고 숙박시설과 말을 구비
전령들은 릴레이식으로 하루에 5백㎞씩 주파, 카라코룸에서 유럽까지 보름이면 도착했었다.
이 통신로는 20세기 초 이전까지는 가장 빠른 지름길 현재 유라시아 횡단철도와 군사로 겸 통상로로 쓰인다.
마르코 폴로는 역마제도를 얌브(yamb)라고 기록하여 각 역에 언제나 400필의 좋은 말을 상비하고 있다가, 사절은 여기에 지친 말을 두고 새 말을 타고 갔었다.
원(元)니라 천역에 역사가 1만개, 역마(驛馬)가 24만필 각 역사에는 황제의 급사(急使)가 있어 한 역까지 가면 다른 급사가 서류를 받아 계속 달려 황제의 명을 전했다. ............................................................
원나라는 많은 이민족 문화를 수용한 다민족 국가였고, 복합적 사회였으며, 몽골은 혈통을 중시하는 지배민족 따라서, 통치 방법에 있어서도 신분제 의식에 따랐다.
몽골인을 국족(國族), 서방계 투르크, 이란 유럽인을 색목인(色目人), 한인(漢人), 강남에 사는 남송의 유민을 남인(南人)이라 구별.
종교도 거의 모든 종교를 수용했다. 이슬람이든 불교든 관여하지 않았다.
13세기 티무르,무굴(몽골)제국은 인도를 점령. 몽골 호라즘 왕자가 인도로 도망가 세운 나라.
칸은 그를 잡으려 인도까지 부하들을 보내었다. 그들이 바그다드에 갔다하여 바그다드까지 침공. 당시 어느 누구도 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배신자는 지구 끝까지 쫓아가 처형했던., 칸.'
특히 피정복민들을 무자비하게 학살하고 약탈 어느나라 누구도 반항할 수 없게 하려는 심리전. 그 앞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목숨을 구걸했을까?
....................징기스칸......................... 1155년 또는 1162년 몽골 바이칼 호 근처에서 출생. 1227. 8. 18. 운명한 몽골의 무사이자 통치자 태무진. 그 손자 쿠빌라이(忽必烈)가 원(元) 태조(太祖)로 추증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정복왕 가운데 하나이며, 유목민 부족들로 분산되어 있던 몽골을 통일후 1206년 칸에 올라 몽골을 아드리아 해까지 확장.
[역사적 배경]
유목민과 정착민 두 사회는 정반대 생활양식 늘 적대 관계이면서도 상호 의존적인 처지였다. 북방 유목민들은 남부 생필품과 사치품들을 필요
유목민이 생필품을 얻는 방법은 무역, 또는 약탈 중국 남쪽의 정착민은 유목민 침략에 늘 시달렸다. 하여, 중국의 역사는 유목민과 정착민 간의 전쟁사.
징기스칸은 뛰어난 체력, 강한 목표, 강철 같은 의지 아내들, 어머니, 모든 사람들의 조언을 즐겨 경청했다. 남을 속이기도 했지만 사소한 일에는 신경쓰지 않았다.
그는 충성심의 가치를 잘 알고 있었다. 배신자는 징기스칸으로부터 차가운 대접 그는 배신자의 배신을 이용할 줄도 알았다.
그는 무엇보다도 배울 줄 아는 사람이었다. 조직, 기강, 기동성, 무자비한 목적의식 등
그가 이룩한 베이징부터 카스피해까지 제국 그의 부장들은 페르시아와 러시아를 침공했다. 또한 후계자들은 중국, 페르시아, 러시아를 정복. .............................................................
'몽골은 아시아 중동 유럽을 지배했던 대제국.'
징기스칸이 몽골을 일으킨지 불과 2년 만에 이룬 업적. 징기스칸은 부하들을 흙벽돌 집에서 살지 못하게 했다. 몸에 군살 붙으면 기동력이 떨어져 말타기 어렵기 때문.
'평생, 유목민 텐트에서 살다 간.. 징기스칸.'
결국, 징기스칸 군사의 화살같은 기동력은 세계를 정복. 말안장 밑에 깔아놓은 육포는 징기스칸 용사들 전투식량. 그들이 정복한 나라의 모든 재산과 여성은 몽골제국 소유.
그들은 고려를 침략한지 불과 한달 만에 제주도까지 정복. 제주도는 원나라의 자치령, 고려는 80년간 원나라의 속국. 80년간 수많은 고려 여인들이 공출되어 원나라로 끌려간다.
"용감한 자만이 미녀를 찾이할 수 있다."
몽골 병사들은 약탈혼으로 점령국에서 신부 조달. 신부가 4~5세 연상이면 적당하다고 여긴 몽골 풍습. 신부의 구비 조건은 바느질 솜씨와 띠와 기질을 중시.
할하족은 생기가 돋는 얼굴, 두터운 입술, 크고 검은 눈, 정렬된 하얀 치아, 눈썹이 두꺼우며, 긴머리와 넓은 이마, 넓은 얼굴, 가는 허리, 긴다리, 행복한 미소와 온화한 얼굴.
이를 미인으로 여겨 적합한 여자를 골라 약탈혼이 성행. 그러면서도 몽골 민족은 결혼 약속을 매우 귀하게 여겼다. 당시 원나라 몽골족 군사에게 고려 여인은 이상형인 신부감.
원나라로 공출된 헤일 수 없이 많은 고려 여인들. 고향 가족 애인을 두고 끌려간 고려 여인들의 한. 당시 생이별의 한이 담겨진 고려 가요가 청산별곡.
"남자는 도둑놈." = 몽골 약탈혼에서 유래.
몽골의 징기스칸은 아버지가 전쟁에 나간 뒤에 출생. 어머니가 상대 부족에게 겁탈당한 뒤 세상에 태어났다. 징기스칸의 첫아들 오고타이 역시 비슷한 운명으로 출생.
징기스칸이 원정나간 사이 그 아내가 겁탈 당한 결과 당시 여성은 승전국의 노예 또는 점유물로 취급받았다. 징기스칸 역시 패전국의 여성들을 겁탈하며 승전을 자축.
징기스칸이 몽골통일 전까지는 5 부족이 내전 상황 당시 칭기스칸과 첨예하게 대립했던 메르키트 부족. 메르키트 부족과 칭기스칸의 몽골 부족은 서로 악연.
징기스칸 어머니는 징기스칸 아버지에게 납치 당했다. 아내를 빼앗긴 사람은 메르키트 족장 동생 칠레두였다.
징기스칸 아버지는 타타르 부족에 의해 독살을 당했고 남은 유족은 자기 부족인 몽골 부족에게도 버림 받았다.
징기스칸이 외롭고 힘든 생존투쟁을 벌릴 때였다. 고립된 징기스칸의 숙영지에 침범한 메르키트 족. 남자들은 몸을 피했지만 여자들은 무사하지 못했다.
수레를 타고 도망치던 징기스칸의 아내 버르테 포로로 잡혀 적지에서 적장과 함께 살아야 했다. 징기스칸의 아내를 납치한 칠레두의 동생 칠게르.
1202년 가을, 나이가 마흔이 된 징기스칸은 몽골 통일. 징기스칸 어머니를 약탈했던 메르키트 족장은 전사한다. 징기스칸은 그 아들 '다이르 우순'의 딸 콜란과 약탈혼. 그녀가 징기스칸의 두번째 부인이자 가장 사랑했던 여인
'징기스칸 발 아래 무릎꿇은 패전국 여성들.'
패전국 여성들의 굴복을 보며 승리를 만끽한 징기스칸. 혹한기에 알몸으로 무릎꿇고 칸의 발 아래 엎드린 미녀들. 패전국 남자 포로는 무조건 거세 후 몸으로 전쟁부채를 청산.
칸에게 끝까지 항전했던 패전국 지배 계층은 비참한 말로. 어느 나라도 그와 감히 맞서 싸울 꿈도 꾸지 못할 정도였다. 하여, 달리는 말의 속도로 그당시 세계를 정복했던 징기스칸.
당시 몽골의 징기스칸은 유라시아 대륙을 석권. 1274년과 1281년 고려 군함을 타고 규슈로 침공 그러나, 폭풍으로 전투 다운 전투도 못하고 퇴각.
결국, 몽골의 일본 정복은 수포로 돌아가고 만다. 당시 몽골 군사들은 지리산 일대에 주둔한 듯 싶다. 흑돼지 마을, 마을제(당제) 풍습이 이 사실을 뒷받침.
징기스칸은 부하들의 개인 약탈을 엄금해 군기강 확립. 그는 패전국 여성들을 부하들이 불평 없도록 고루 분배. 결국, 몽골 제국 관비 또는 기생은 전세계 여성들로 구성,
'바다가 앞을 막아 더 정복할 땅이 없었던 몽골.'
유목사회는 전투성을 바탕으로 하는 약육강식 약탈문화 우리나라 민족성은 약육강식 몽골 부족의 전통이 흐른다. 우리나라는 역사 상 천여 번 외침 속에 명맥을 이어왔다.
특히, 지리산 일대는 고대국가 간 전쟁이 잦았던 격전지. 옛부터 남원과 진주는 기생이 많게 된 역사적인 배경이다. '전통적인 기생의 고장' 남원은 전쟁역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나라 전쟁 역사를 대변해주는..토렴 국밥.' '우리나라 3일 장, 5일장, 장터마다 몽골식 텐트.
오늘날 시골장터마다 맛볼 수 있는 뚝배기 토렴 국밥. 밥에 뜨거운 국물을 몇 차례 부었다 따라내는 조리 방식. 뚝배기에 국밥을 담아 조리하는 과정만 봐도 침넘어간다.
토렴 조리방식은 삼국시대부터 유래되었다는 설도 있다. 토렴 국밥은 옛날부터 전쟁터에 군사들이 먹던 음식이다. 우리나라 전통 음식에는 꿩토렴, 닭토렴, 한우토렴도 있다
철 투구에 물을 끓여 아채와 고기를 익혀먹거나 데워먹기. 고려시대 때 몽고군이 토렴을 배워 징기즈칸 요리로 발전 일본은 임진왜란 때 토렴을 배워 샤브샤브 요리로 진일보.
징기스칸은 몽골 병사들의 전쟁터 음식으로 알려져왔다. 커다란 솥에 얇게 썬 고기를 살짝 데쳐서 먹는 즉석요리. 그 전쟁터 즉석요리에 정복자의 이름을 붙여서 징기스칸.
샤브샤브(しやぶしやぶ)는 살짝살짝 찰랑찰랑’이란 뜻. 펄펄 끓는 육수에 음식을 살짝 데쳐 먹는 일본 음식이다. 얇게 썰은 고기를 끓는 유수에 흔들어 익혀 먹으면 맛있다.
샤브샤브, 징기스칸은 끓는 육수에 살짝 익혀먹는 조리법, 토렴은 밥(국수)에 뜨거운 육수로 음식을 데워 익혀 먹기. 샤브샤브 징기스칸 토렴은 몽골리안 기마족의 전쟁터 음식.
'모두 천연 맛과 영양을 지닌 고단백 저칼로리 건강식.'
고려는 80년간 원나라의 지배를 받았다. 제주도는 1세기 동안이나 원나라 자치령. 그당시 원나라는 일본을 두차례 침공했다.
그러나, 풍랑 때문에 두 차례 다 실패했다. 원나라 군사들은 장기간 한반도에 주둔했다. 고려 여인들은 원나라 약탈혼 풍습의 피해자.
원나라에서는 고려에서 내시까지 조공받았다. 그 내시들이 앞장서 고려 여인들을 뽑아간다. 하여, 고려여인들은 원나라에 많이 끌려간다.
고려 왕 이름에 충(忠)자를 넣어야 했던 시기. 제주도는 원나라의 자치령이었고 고려는 속국. 원나라는 왜를 정복하려고 제주에 말을 키웠다.
사실 상 원나라와 고려는 국경 없는 주종 관계. 고려에 주둔한 원나라 군사와 민간인도 많았다. 세계를 지배했던 몰골은 오늘날 약소국으로 변모.
'몽골이 오늘날 쇠퇘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약탈혼으로 출생한 2세 후손들은 모계 쪽으로 동화. 몽골 대제국은 그들이 정복했던 나라 별로 쪼개진다. 약탈혼은 몽골을 융성케도 했지만 패망하게도 한 요인.
여성을 전리품으로 여기며 약탈혼을 했던 몽골족. 약탈혼 후손들은 대부분 아버지의 나라를 버리고 어머니 나라로 흩어져 원나라는 국력이 쇠퇴한다.
'여성을 존중하는 나라가 오늘날 선진 강대국.'
가문에서 대접받은 여성이 가문을 일으키고 나라에서 대접받은 여성이 나라를 일으키 듯. 몽골의 흥망성쇄 역사는 가슴속에 새길 깨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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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는 원나라의 속국으로 80 년간 지배받았다. 하여, 지리산 일대에 원나라 풍습 흔적들이 있다. 초나라 풍습을 비롯한 일본 남방계 풍습도 섞여있다.
고대국가 이전부터 유입된 다양한 민족의 풍습들. 반선 일대 마을제(당제), 춘향전, 단오 풍습.등등. 제주도를 포함한 산청군 일대의 토종 흙돼지 마을들.
고대사회부터 다양한 민족 풍습이 토착된 지리산 일대. 국가 위기마다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킨 지리산 산간마을.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전란에 많이 시달린 고장이기도 하다.
.............................. 몽골의 3차례 일본 원정 ...............................
서쪽으로는 다뉴브 강 유역 평원지대까지, 남쪽으로는 사라센 제국의 중심부 지역까지, 동쪽으로는 한반도 고려까지 속국내지 우호국
'원나라와 여러 '칸국'으로 합쳐진 몽골제국.'
동해 너머 일본 열도까지 정복욕을 불태운 몽골. 일본이 항복하지 않자 몽골은 일본 침공을 단행 해전에 약한 몽골은 고려를 앞세워 두 차례 침공.
고려는 몽골의 강압에 못 견뎌 연합군을 결성
당시 몽골은 송나라와의 마지막 결전에 총력을 집중 고려와 승산 없는 전쟁을 30년간 해오고 있었으므로, 전쟁에 필요한 준비를 고려로 하여금 담당하게 했다.
고려는 몽골과 불평등한 속국으로서의 강화조건
고려는 몽골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몽골은 당시 남송 공략에 전력을 기울이고 있었기에 후방 위협요소였던 고려의 국력을 소모시키려고 했다.
몽골은 일본 침략이 승리로 끝나건 실패로 끝나건 당시 몽골에게 별 관심이 없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려는 몽골전쟁 후 10년 만에 급속도로 국력 회복
몽골은 고려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1274년 몽골과 고려 연합군은 큐우슈우 해안에 당도 태풍을 만나 25,000 명 병사 중 13,500명이 사망했다. 몽골 2만, 고려 5천 연합군은 많은 함선을 잃고 귀환.
이에 고려의 국력은 매우 피폐해졌으나 몽골은 2차 일본 정벌을 시도하기로 하고 고려에 더욱 많은 전쟁 준비 부담을 지웠다.
그리하여 남송을 멸망시킨지 2년후인 1281년 원나라와 고려의 연합군 10만명 (원나라 병력 7만5천명, 고려군 만여명)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과 태풍으로 다시금 실패 당시 태풍을 일본인은 신풍(가미가제)이라 하여 천우신조의 증거로 지금까지도 고마와하고 있다.
몽골의 강압에 의한 두번에 걸친 전쟁준비를 한 고려 고려는 국력이 피폐해졌기에 몽골을 원망하게 되었다. 당시 몽골군은 일본의 수비군과 주민을 잔인하게 진압
학대와 학살이 일본에게 복수의 집념을 심어주게 된다. 그리고, 그 목표는 원나라가 아닌 고려로 향하게 되어, 그후부터 고려는 일본으로부터 수많은 침공을 겪게된다.
당시 고려가 처한 국제정세를 이해하지 못한 왜인들 고려를 철천지 원수로 여겨 전라도 남해 일대를 침공. 훗날 일본의 임진왜란 침공은 고려의 침공에 대한 보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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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정복자들은 과감한 무력행사와 잔인한 통치법 짧은 기간 내 인류역사 상 최대 판도의 영토를 확보
그러나, 몽골에 억눌린 각 민족들의 불만이 팽배 결국, 몽골 제국주의는 급격한 쇠퇴의 길을 초래. 약 백년간의 전성기를 거쳐 몽골제국은 붕괴한다.
원나라가 멸망한 결정적인 계기는 '홍건적의 난'
하남(河南)지역에서 백련교(白蓮敎)를 주축으로 한 봉기 홍건 세력 중 주원장이 두각을 나타내며 그 세력이 신장 남경 함락후, 양자강 하류 곡창지대를 장학악해 세력 구축
1368년 원나라 수도 대도(大都)를 함락후 몽고를 축출 원나라는 몽골 귀족들간의 내분 내전으로 국력이 쇠퇴 하여, 원나라 황제는 북경을 떠나 몽골로 옮겨가버린다.
이때 주원장은 "원 왕조는 멸망했다"고 선언 명 왕조를 세웠지만, 그후로도 원 왕조는 유지. 즉, 원 왕조는 원래 고향으로 돌아가버렸을 뿐.
명 왕조는 몽골제국 일부분 중화지역을 되찾았을 뿐. 몽골 제국의 다른 영토들은 서로 나뉘어져 계속 유지.
킵차크 한국 등은 러시아 제국에게 정복되고 아랍 지역의 한국들은 티무르에게 정복당한다.
'칸',은 우리말 '간'과 같은 '위대한 지도자'란 뜻. 칸이 통치하는 나라를 칸국 또는 한국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원나라 멸망후 유럽과 아시아에 있던 4 한국.
'챠카타이(중앙 아시아) 한국, 오고타이 한국, 일 (아랍) 한국, 킵챠크(러시아) 한국.
.....................오고타이.......................... 1227 징기스칸이 운명 후 몽골제국의 제2대 황제. 칸의 3남이자 계승자로서 몽골제국의 영토를 확장 자신을 카간(大汗)으로 부른 최초의 몽골 통치자이다.
오고타이는 동쪽으로 중국북부에 있던 금나라를 공격. 남송은 금에게 빼앗겼던 영토를 되찾으려 몽골과 연합, 1234년 오고타이가 금을 공격해 점령하는 것을 도왔다.
요(遼)나라 출신 오고타이의 정치고문 야율초재
정복지에 대한 몽골의 정책을 바꾸도록 건의했다. 이에 따라 오고타이는 정복지의 전주민을 살해하고 모든 것을 파괴하는 전통적인 몽골 방식을 삼가했다.
대신, 그 지역의 부와 주민의 기술을 활용하는 정책. 그의 이같은 결정으로 화북 문화가 보존될 수 있었고 몽골군이 중국무기를 이용해 남송을 정복할 수 있었다.
몽골은 화북지방 주민들로부터 통치기술을 익혀 중국의 정복자가 아닌 그 지배자가 될 수 있었다.
오고타이는 이란·이라크·러시아로 원정군을 파견. 1240년 러시아 키예프를 함락후 저항을 종식시켰다. 다음해 독일 폴란드 연합군을 분쇄하고 헝가리 정복.
그후 200년 동안 러시아는 킵차크 한국(汗國)의 속국 오고타이가 주연(酒宴) 중 사망하자 유럽 진격은 중단. 그가 죽은 후 미망인 토레게네가 1246년까지 섭정했다.
그녀와 오고타이 사이 아들 구유크가 제위를 계승. 그당시 기록들은 오고타이는 강인하고 정력적이며 술과 여색을 몹시 탐닉했던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
우리말에서 '한'은 '큰'이란 뜻이다. 예를 들면, 큰강인 한강과 대한민국.
몽골제국 원나라가 힘을 잃자 고려 왕조도 쇠퇴. 이성계는 이조를 건국하고 명 주원장과 우호관계. 임진왜란 당시에 명나라는 이조에 구원군을 파견
명나라는 임진왜란 이후 국력이 쇠퇴. 몽골 제국 후예 후금에게 망하게 된다. 후금은 중국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건국.
결국, 구한말 일본에 의해 점령 당한 우리나라. 일본은 그 여세를 몰아 청일전쟁으로 중국 정복. 과거, 몽골의 영역인 동아시아 대부분을 장악한다.
박영발 비트
반야봉 일대는 1955년 5월까지 빨치산들의 은둔 항전처. 1948년 10월 여순사건 당시 문수골로 진입했던 남부군들. 대부분, 뱀사골 반야봉 일대에서 토벌군에 의해 섬멸된다.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도 패잔병을 수습해 잠입한 문수골. 당시 김지회, 홍순석 등이 이끄는 문수골 빨치산은 2천명. 구례읍과 인근마을에 빨치산의 야간 습격이 잦아지게 된다.
1948년 11월 5일 토벌대 주둔, 1949년 4월 18일까지 토벌작전
토벌대의 끊임없는 소탕작전과 빨치산의 반격 빨치산 토벌 작전 일환으로 진행된 거점 분쇄작전 군작전상 지리산 주민들을 강제 이주 시킨, 소개령.
그후 은신처를 찾아서 반야봉으로 들어간, 빨치산 결국, 그곳에서 모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다. 그리고, 반세기가 흐르는 동안 잊혀진 빨치산 비트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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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전향 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가해 탐사한 비트. 조선노동당 전남도당 박영발 위원장 은신처
박영발 비트는 2005년 2월 처음으로 발견됐으며, 광주지역 인터넷신문 '시민의 소리'가 최초 보도. '조선출판사'를 운영하며 북에서 내려온 지령을 담아 유인물을 만들 때 사용한 등사기가 이곳에서 발견되었다.
"50년 전 주인을 잃은 고무신 한짝. 지리산 능선, 골짝 돌부리 풀뿌리마다 붉은 피로 물들이며 흙 한 줌으로 변해간 동지들이여”-옛 동지 추모 위령제 글에서 -
지금은 백발이 성성한 빨치산 출신 옛 동지들. 빨치산 당사자들과 공작원 출신 비전향장기수들, 시민사회단체 50 여명은 지리산 성산재 고개에 모여 뱀사골 인근 반야봉 함박골 '박영발 비트'를 찾아갔다
연로해 산을 오르지 못하는 원로들은 성산재에 남아 심장 속에 깊숙이 자리 잡은 지리산을 바라다 보았다. 비트 안에는 아직도 당시 숨결을 느낄수 있는 유품들
그러나 70대 후반의 일부 빨치산 출신들은 약 2시간 가량을 걸어 임걸령 샘까지 동행.
박영발과 함께 일했던 박남진 선생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년 빨치산 출신이었던 김영승(73세)선생이 찾아냈다. 이번 비트 위치를 증언한 박남진(84. 54년 12월 체포) 선생
...............박남진 선생 증언 내용...................... 1953년 9월 18일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이 빗점골에서 사망하자 박 위원장의 보위대가 반야봉 아래 암벽지대에 비트를 마련했다. 그해 10월 말부터 다음해 2월 박 위원장이 사망할 때까지 4개월 박위원장 일행이 이용했던 빨치산 전남도당 지휘본부로 알려졌다.
이현상 남부군 사령관은 비교적 건강한 체력으로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임시 비트를 이용한 반면, 박 위원장은 일제로부터 받은 고문후유증 때문에 한쪽 다리가 불편해 비트 중심으로 활동을 펼쳤다.
하여, 김선우 남로당 전남도당 부위원장은 박위원장을 대신해 전남 유격대를 이끌었고 박 위원장은 이곳 비트에서 조국출판사를 운영 유인물 등을 찍어내며 지휘부 역할을 수행했다.
이 동굴에서 박 위원장 이외에 연락병, 여성비서, 보위병, 무전사, 견습 무전사, 의사, 간호사 등 8명이 거주했던 곳.
일반인이 알아볼 수 없을 만큼 교묘한 V자 형 천연동굴 V자 오른쪽 꼭지점에서 중앙을 향해 2.3m를 타고 내려가 다시 3.2m쯤 되는 왼쪽 석벽을 타고 올라가야 동굴 입구 ........................................................
반야봉 중간 허리 노루목에서 삼도봉으로 가는 길목 '함박골’
묘향암 스님들 만이 다니는 인적 뜸한 길.
함박골로 들어서려면 이 길 막다른 곳에서 방향을 돌려 수풀이 우거진 오른쪽 험한 비탈길로 내려가야만 하는데, 산을 잘 타지 못하는 몇몇 일행은 발길을 돌려야만 했다.
김영승, 기세문, 양희철 선생 등 젊은 층 비전향장기수들 민가협 양심수 후원회 권오헌 회장, 전국연합 노수희 의장, 그리고 광주지역 시민사회단체 활동가 20명은 수풀을 헤치고 썩은 나무를 치워 길을 만들면서 함박골 비탈길을 내려갔다.
날랜 동작으로 산비탈을 내려가는 김영승 선생을 따라 사납게 돋은 풀이 정강이를 베는 지도 모르고 약 40분 정신 없이 걷자 비트로 사용한 동굴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치처럼 엉킨 수풀이 시야를 가려 동굴이 아니라 보통 검은 빛깔의 큰 바위라고 생각될 정도의 비트. 53년 10월부터 54년 2월 22일 사살될 때까지 은신처
비트로 들어가려면 높이 3m 가량의 미끄러운 벽을 타고 내려가거나 동굴 아래 하수관 모양의 터널을 지나야 한다. 표준 성인 남성이 낮은 포복 자세로 기어가기에 알맞은 크기.
좁은 틈새 사이를 두고 구분된 주거 공간과 통신 공간
통신용 공간은 성인 남자 2명이 누울 수 있을 정도였다. 간이 사다리를 타고 동굴안 은신처로 올라가자 컴컴한 어둠 50년을 묵은 듯한 퀴퀴한 냄새와 함께 온 몸을 휘감는 한기.
초여름인데도 은신처 안에 들어가자 하얗게 입김 2평 가량 공간에 허리를 펼 수도 없는 낮은 천장. 토벌대 수류탄에 맞아 여기저기 무너진 돌무더기.
무전을 하는데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전깃줄 흰색 주사용 앰플, 깨진 갈색 병, 깡통, 50여 개 배터리 그리고 바닥이 반으로 갈라진 고무신 한 짝
치료용으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주사약
이 굴은 박영발 위원장을 호위하고 있는 보위대가 반야봉 허리를 훑어 발견한 동굴로 8명의 거주공간. 박영발 외 무전사, 여성비서, 견습무전사 의료병 등
북측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지령 등을 모아 유인물 제작. 비트에서 10여m 떨어진 곳에는 구들장 아궁이 주거공간 아궁이에 불을 지펴 천막 치고 겨울을 지낸 곳인듯 하다.
동굴을 나와 50m 내려가니 3층으로 쌓아올린 '구들장터’ 구들장터에서 오른쪽 10m 지점에 불을 땐 아궁이도 발견.
아궁이에 불을 때면 돌과 흙이 달아 따뜻해진다. 여기에 천막을 세우면 추운 겨울도 지낼 수 있다. 구들장터에선 인쇄하는데 사용했던 등사기도 발견.
등사기와 함께 발견된 잉크통에는 검은색 잉크 고스란히 담겨있어 일행을 다시 한번 놀라게 했다.
모든 생활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었으나 빨치산의 유골은 흔적도 남아있지 않았다. 토벌대가 시신을 산내면 초등학교에 전시후 빨치산 포로을 불러 신원을 확인하고 처분한 탓.
54년 2월 22일, 동굴을 발견한 군경이 던진 수류탄으로 동굴 안에서 죽었으며 박영발 여성비서 이정례 만 생존. 숨이 끊어지지 않은 채 사경을 헤매다 보위대에게 발견.
이정례는 이후 화개재에서 빨치산 활동 중 뱀사골에서 잠복한 토벌대에게 사살 당한다.
매일 토벌대의 동태를 감시하던 보위대는 55년까지 전라도 조계산에서 싸우다 전멸.
"두 번 다시 비극적 역사 되풀이되지 않기를..."
지리산에 울려 퍼진 살아남은 빨치산의 노래 마치 50년 전 그 때로 돌아간 듯 굳은 표정들. 동지들의 흔적들을 어루만지며 기억을 반추했고 청년들은 경건하게 구들장 위에 제사상을 차렸다.
굴비, 완두콩밥, 돼지고기, 과일, 떡 등 정성스럽게 마련한 음식이 올라간 제사상
마지막 순간까지 조국의 통일을 보지 못하고 지리산에서 숨을 거둔 넋들을 위로하려는 듯. ‘백두산 불로초’술이 그 넋들에게 바쳐졌다.
김영승 선생은 박영발 위원장의 비트 외에 백운산, 지리산 문수골, 피아골, 천왕산골, 장흥 유치내산 등에 숨겨진 비트를 찾고 있다.
이제 전국에 확인된 빨치산 생존자는 30 여명, 물론 전력을 숨기고 사는 빨치산까지 포함되면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되나 이들 대부분 70 - 80세 사라져가는 반쪽 역사를 복원할 시간은 많지 않다.
사회적 여건이 성숙될 때까지 동굴 개방은 하지 않기로 했다.
다만 동굴에서 발견된 유품들은 그대로 두어 역사기행을 위해 비트 방문객에게 전시할 계획.
위령제를 마치고 일몰시간 전에 하산하기 위해 일행은 서둘러 3시간 30분 만에 노고단에 도착.
비전향장기수들의 모임인 '통일광장'이 주최한 지리산 역사기행에 참석한 시민단체와 옛 빨치산 피아골 부근 산장에 여정을 풀고 옛 전우들과 해후.
저녁 9시부터 시작된 모임에서 빨치산 출신들은 자신들이 활동한 지역과 당시 전투상황을 소개했고 빨치산들이 즐겨 부르던 '태백산에 눈 나린다'를 합창.
사전모임에는 전남도당에서 활동했던 정운창 (77,)선생 남편따라 입산 이현상 부대에서 활동한 이옥자(78) 여인. '부부 빨치산'이 참석해 여러 참석자들의 눈길을 끌었다.
비전향장기수 김용선 선생의 아들 김병제 씨 전라도당 빨치산 양혜정 선생의 아들 양근서 씨 빨치산 후손들도 자리를 함께 해 눈길을 끌었다.
여성 빨치산 전덕례 선생과 함께 활동한 전영선 두 사람은 오랜만에 만나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정운창 선생과 이옥자 선생은 출소후 만나 가정을 꾸렸고 딸 정지아 씨가 '빨치산의 딸'이란 책을 집필하기도 했다.
이옥자 선생은 지리산에 입산해 갓난아기를 업고 토벌대에게 쫓겨 아이를 잃고 남편마저 잃어버렸다. 빨치산의 삶을 책으로 남긴 딸이 자랑스럽다는 부부.
김영승 선생은 소년빨치산으로 활동하다 54년 3월, 전남 광양 백운산 옥녀골에서 육군 5사단에 의해 총을 맞고 사로잡혔다.
국방경비법 32조 이적행위혐의로 사형선고 35년 9개월 간 복역했으며 89년 9월에 출소 '통일광장'에서 활동하며 빨치산 유적지를 탐사.
현재 생존해 있는 빨치산은 몇 명 쯤일까?
아직도 묻혀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 분들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으로서 자기 정체를 드러내고 통일운동 하는 분들은 30 여명 되지 않을까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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