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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의 독립운동의 두 갈래 -민족주의와 공산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중국에서 일어난 한국의 독립운동이 엄청 복잡하고 대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가닥을 잡으면 그리 복잡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중국에서의 독립운동은 크게 산해관 서쪽에 있는 본토 중국 경내에서의 독립운동, 중국의 동북삼성인 만주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으로 나눌 수 있다. 그 중에서 북간도의 독립운동을 살펴보고자 한다.
북간도는 1881년 청나라가 이민실변정책을 실시한 후 인구가 늘어나기 시작하였다. 게다가 1885년 청나라가 두만강 북안 길이 동서로 700리, 남북으로 40~50리 구간을 조선족전문개간지구로 확정을 하여 1907년에 14,650호, 72,470 명, 1908년에는 16,101호, 82,999명으로 인구가 빠르게 증가되었다.
1910년 조선이 한일합방으로 멸망하게 되자 1910년에서 12년 사이에 북간도로 24,772명, 서간도로 19,145명, 기타 지구로 6,35명이 이주하여 서간도는 물론 그 중에서 북간도는 명실공이 초기 조선 독립운동의 본산이 되었다.
북간도에서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두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 단계는 1910년에서 1921년까지이고 둘째 단계는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가 결성되어 활동하기 시작하여 1933년 독립군이 관내로 이동하고 1937년 양세봉의 죽음으로 조선혁명군이 해체된 때까지 이다.
1.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1) 제 1 단계의 북간도의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1910년에서 1921년까지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한 조선인들은 사립학교와 캐나다장로회 산하의 교회들, 종교단체들 그리고 간민교육회와 간민회를 통하여 10년간의 준비기간을 거쳐서 1919년 3월 13일 용정만세시위를 기점으로 폭발하였다. “3.13 만세 시위” 후 북간도에는 간도국민회, 북로군정서, 훈춘한민회, 신민단, 의민단, 도독부, 대한독립단 등 40여 개에 이르는 무장독립운동단체가 세워졌다. 그들은 북간도 조선인들을 회원 및 독립군으로 확보하였으며 그들의 각종 활동 참여와 독립후원금 지원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체코 군이 쓰던 무기를 반입하여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치렀다. 그러나 독립군들은 일제의 2만 5천 병력에 쫓기어 러시아 땅 이만으로 갔고 거기서 무장해제를 당하여 자유시(구 알렉셰브스크, 현 스보보드니)까지 가서 레닌이 약속한 도움을 줄 것을 기다렸다. 그러나 이르쿠츠크파(오하묵, 김철훈)와 상해파(이동휘, 박진순)의 주도권 싸움과 코민테른 동양비서부와 극동공화국의 알력에 휘둘려 독립군 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그로 말미암아 민족주의 독립군이 전멸하다시피 하였다.
2)제 2 단계는 1922년부터 1937년까지다.
자유시참변 이후, 일본군의 철퇴를 피해 살아난 독립 운동가들이 참의부, 정의부, 신민부를 결성하여 국내 진격전을 활발하게 벌여 일제기관과 교통시설을 파괴하고 일경 주재소를 파괴는 등의 전과를 올리는 것으로 시작되어 9.18사변 이후, 이청천 장군이 이끄는 한국독립군이 중국 호로군과 함께 한중 연합작전을 펼쳐 쌍성보전투, 사도하자전투, 대전자령전투, 동경성전투 등에서 대승을 거두며 항일투지가 고조되었다.
양세봉은 조선혁명군 사령관으로서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영릉가전투, 흥경성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4년 양세봉 죽음이후로 조선혁명군의 일부는 관내로 가서 임정 산하에 들고 일부는 동북항일연군과 연합하여 전투를 벌이기도 하고 일부는 일본군에게 항복하면서 1937년 역사에서 사라졌다. 이리하여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북간도뿐만 아니라 만주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자유시참변 이후 일치와 단결을 원했던 동북의 독립운동단체들은 연합과 통일 운동을 힘 있게 추진하여 난립하였던 단체들이 1922년 8월에 대한통의부로 통합되었다. 그러나 통의부는 왕정복고를 주장하는 전덕원이 의군부를 만들어 이탈하고 통의군 내부의 의용군 실력자들인 백광운, 최석순, 최지풍, 김명봉 등은 통의부가 임시정부를 무시하는 것과 의군부 군인들을 탄압하는데 불만을 가지고 참의부를 창립하여 나갔다. 1924년 후반기에 길림성 반석현에서 오동진과 현정경 등 통의부 주요인물들이 통의부를 기초로 하여 정의부를 창립하였다. 그 후, 1925년 3월에는 신민부가 결성되어 3부 시대를 열었다.
3부는 이전의 독립운동 단체들과 다르게 자치정부의 성격을 띠었으며 군사 의무제를 설치하여 군대와 지방경호대를 두었으며 삼권 분립을 표방하며 행정, 경사기관을 두었고 구역 안에 있는 조선인들에게 의무금과 의연금을 부과하였다. 또한 토지 매매와 조세를 기관의 지도하에 시행하기로 결의하였다. 교육과 산업 경제를 위한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들은 학교를 세워 항일민족교육과 활발히 전개하였으며 만주 내의 친일파 앞잡이를 처단하고 친일기관을 습격하였으며 무시로 조선 국내로 진출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기관과 군사 시설을 파괴하고 친일단체들을 벌하는 등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다.
그러나 자치구역의 문제로 정의부와 신민부가 서로 충돌하였으며 특별히 공산주의 계열 독립 운동가들과는 첨예한 대립으로 유혈사태를 일으켰다.
1925년 남만일대에서 정의부를 중심으로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이 전개되어 신민부가 군정파와 민정파의 대립으로 참여하지 않은 가운데 1928년 5월 민족 유일당촉성회가 개최되어 집행위원이 선임되었다. 개인 본위 조직을 주장하는 촉성회와 단체 본위 조직을 주장하는 협의회가 대립되어 통합을 이루지 못하였다.
1928년 12월에 신민부의 군정파와 김희산, 김소하 등 참의부 주류, 이청천, 김동삼, 김상덕, 배활신 등 정의부 일부가 탈퇴하여 혁신의회를 조직하고 새로운 기구인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를 조직하고 유일당 조직의 주도권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참의부의 김희산이하 간부들이 통화일본영사관에 의해서 체포되고 김동삼, 김원식, 박창식 등이 일경에게 체포되자 혁신의회는 유명무실해졌다.
김좌진은 1929년 7월에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연합하여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한족총연합회는 1930년 1월 김좌진이 암살되자 자체 분규로 김종진, 김규식을 암살하였으며
7월에는 정신, 남대관, 이붕해가 생육사의 여준, 홍진, 황학수, 이청천, 신숙, 동빈현주민회릐 박관해 등과 함께 위하현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하였다.
한국독립당은 한족자치연합회를 창립하여 군사부, 실업부, 재무부, 교육부, 조직부 등 기구들을 설치하고 하였으나 내부의 분열로 해체되었고 신민부 군정파들이 창립한 한족농무연합회와 한족동맹회를 표면기관으로 인정하고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31년 9.18사변이 터지자 한국독립당은 11월 일 흑룡강성 대석하자에서 중앙위원회를 열고 산하 군구에 총동원령을 내려 군사행동을 할 것을 결의하였으며 아성현 대길하에서 한국독립군을 창건하였다. 한국독립군 창건 후, 중국군과 연합작전을 전개하기 위하여 중동철도호로군과 길림자위군에 파견하여 항일협동작전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그리하여 한국독립군은 중국인 부대와 함께 쌍성보전투, 대전자령전투, 동경성전투를 치렀으며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1933년 9월 오의성부대와 연합하여 동녕성전투를 치른 후 오의성부대와의 불화로 무장해제를 당하였다. 그 후 한국독립군은 사방으로 흩어졌으며 한국독립당 당원들과 지휘관들은 관내로 이동하여 광복군이 되었다.
1929년 3월 정의부 주류 현익철, 김이대, 이웅, 고이허 등과 심용준. 이호, 임병무 등의 참의부 소수파 일부와 신민부 민정파 이교원이 참여하여 새 군정부 조직을 위해 회의를 열었고 4월 1일에 국민부 창립을 선포하였다.
그들은 혁신의회의 유일당책진회에 대항하기 위하여 유일당조직동맹을 만들었다.
국민부는 전체 민족주의 계열의 단체들을 망라하지는 못했으나 조선공산당 화요파재건위원회 김찬이 참여를 하였고 화요파와 서상파 활동가를 받아들여 통일전선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러나 국민부는 이로 말미암아 분열의 극단적인 길로 나아가게 되었다.
국민부는 1929년 9월에 민족유일당조직동맹을 조선혁명당으로 재조직하고 소속군대를 조선혁명군으로 편성하였다.
조선혁명당은 자치를 실현하기 위하여 조선족거주지역을 여러 행정구역으로 나누었으며 유하, 통화, 집안, 관전, 무순 등에 현 조선족지방행정위원회를 설치하고 대의원제를 실시하였다. 조선족농민들을 조직하여 경작권쟁취운동을 벌였으며 국민부 자체경비를 위하여 공장, 상점을 열었으며 정미소를 운영하였다. 각 지역에 학교를 세웠으며 15개 처소에 도서관을 열어 비록 농민일지라도 과학사상과 지식을 접하게 해주었다. 항일투쟁에도 앞장 서 선민부, 민회 같은 친일단체들을 섬멸하였다. 그러나 매 농가에서 연 20원씩 받는 각종 경비로 말미암아 농민들의 민심이 이탈하였고 특히 농민들의 연소득 70~80원에 이르는데 국민부 사무원들의 월급이 매월 40원씩 인 것에 대한 불만으로 가난한 조선족 농민들이 국민부 통치기반을 벗어나 좌익화의 길로 나가게 되었다.
농민들의 이탈은 국민부를 양극화시켜 현익철, 고이허, 양세봉, 김문거, 김학규, 양하산 등 민족주의 계열은 국민부를 옹호하였고 현정경, 고활신, 이진탁, 이장청 김석근 등은 국민부 반대파를 형성하여 서로 치열한 투쟁을 벌였다.
이 시기 조선혁명군은 조선혁명당의 내부 분열로 항일투쟁에서 힘을 쓰지 못하였다. 그러나 1932년 1월 신빈사건과 동변도지역 검거선풍으로 3월 1일에 국민부 중앙 간부들이 다 체포됨에 따라 양세봉이 총사령이 되고 김학규가 참모장이 되어 당취오의 요녕민중자위군과 회담을 하여 요녕민중자위군 특무대대와 선전대대가 되어 일본군과 2백 여 차례의 크고 작은 전투를 치렀다. 1932년 3월 영릉가전투에 참전하여 대승을 거두었으며 하순에는 흥경성전투에 승리를 거두어 사기가 충천하였다. 그러나 1933년 1월 당취오 근대가 붕괴됨에 따라 중국 의용군과 연합하여 4월에 조선혁명군 활동 무대를 집안현, 임강현 일대의 국경지대로 옮겨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1934년 8월 12일, 양세봉 사령관은 배신자의 음모인 줄 모르고 중국 항일연군과 연합을 논의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친일 주구들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양세봉 사후 조선혁명군은 유야무야 존재하다가 1937년에 남은 군인들이 동북항일연군에 들어감으로서 만주에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군은 지상에서 사라졌다.
2.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이 파트의 글을 쓰기 전에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동만, 북만, 남만에 위치에 대하여 설명을 하고자 한다.
일제 침공당시 현재 중국의 동북삼성은 만주로 불렸다. 당시 만주는 크게 동만과 남만, 북만으로 나뉘었는데 동만은 현재의 길림성에 해당된다. 그러나 협의의 의미에서는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한 북간도, 지금의 연변 자치주에 해당하는 연길, 용정, 도문, 훈춘, 왕청, 화룡, 안도, 돈화를 의미한다. 즈로 두만강 700리의 북안에 있는 지역에 속한다. 남만은 남만주이며 현재의 요녕성과 길림성 경계에 있는 일부 현에 해당된다. 협의의 의미에서는 서간도이며 관전현, 집안현, 환인현, 신비현, 통화련, 유하현, 임강현, 반석현을 포함한다. 압록강 1,300리 북안에 흐르는 지역이 여기에 속한다. 북만은 현재의 흑룡강성에 해당된다. 그러나 협의의 의미에서 조선인들이 많이 거주한 하얼빈에서 목단강 사이의 동녕, 영안, 목단강, 목릉, 계서, 밀산, 해림, 연수, 동경성 등을 포함하는 하얼빈과 길림과 훈춘과 호림을 잇는 사각형 지역에 해당된다.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주로 두만강과 압록강 북안에서 이루어 졌으나 자유시참변 이후 독립군들이 일제의 손길을 피하여 뿔뿔이 흩어지면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의 반경이 만주 전체로 확장되어 갔다.
공산주의의 독립운동은 크게 두 단계로 정리할 수 있다.
처음 단계는 공산주의 사상 전파의 시기와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주도로 활동하는 시기이고 둘째 단계는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5월 투쟁과 길돈폭동에 참여부터 항일 유격대 결성, 인민혁명군을 거쳐서 동북항일연군이 1940년 겨울을 기점으로 해서 러시아로 들어갈 때까지이다.
1)제 1 단계는 1918년부터 1930년까지이다.
십여 년이 넘는 이 기간은 간도의 초기 공산주의운동으로 두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1918년에서 1925년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 전파기간과 1926년부터 1930년까지 조선인이 주도하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활동시기이다.
가. 1918년에서 1925년까지 공산주의자들의 사상전파
맨 처음 그들은 항일투쟁보다 기존의 조선인 마을과 학교, 교회와 단체에 파고 들어가서 공산주의 사상 전파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들은 특히 중학교와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단체와 지도자들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여 공산주의로 입문하게 만들었다. 그리하여 만주에 공산주의 사상이 짧은 10년 사이에 만연하게 되었다.
1918년 6월에 이동휘와 김립, 박진순 등이 하바롭스크에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한 후, “사회주의 국가를 건립한다.”, “일체 계급을 소멸한다.”, “토지와 일체 생산자원을 공동소유로 한다.”는 정강을 제정하고 책자들을 발행하여 만주의 조선인 사회에 러시아의 10월 혁명을 소개하며 사회주의를 선전하였다.
1919년 9월, 이르쿠츠크에서 김철훈과 오하묵. 최고려 등이 전로한족공산당을 설립하고 “홍기”라는 잡지를 발간하여 러시아 10월 혁명을 선전하였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후에 독립군들이 러시아의 스보보드니에 가서 러시아 10월 혁명을 직접 체험하고 중국으로 돌아와서 동북지역을 비롯한 북경과 상해 등지에서 맑스-레닌주의를 선전하였다.
1921년 레닌 자금을 받은 이동휘와 한인사회당은 상해에 유신인쇄소를 만들어 “공산당선언”을 비롯하여 많은 사회주의 서적과 간행물을 조선어로 번역 출간하여 조선인 집거지역에 배포하였다.
정치경제학, 정치학초급교정, 공산당선언, 노동조합독본, 러시아공산당정강, 우리 무산계급의 앞길, 레닌,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공농공산당의 서적과 자유보, 로동신보, 동아공산신문, 신세계, 공농세계 등의 신문을 만주의 독립운동가들과 진보적인 청년들에게 배포하였다.
그들은 1921년 5월에 한인사회당을 고려공산당으로 개칭하였다. 11월에 고려공산당은 김하구를 돈화현에 파견하여 간도국민회 회장인 구춘선과 마진 등과 함께 고려공산당 중앙총감부를
설립하고 각 지역에 지부를 만들었다.
1922년 8월에는 장기영과 주건 등이 연길현 옹성라자에 와서 고려공산당 만주지방위원회를 설립하며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며 지방조직을 확대하여 나갔다.
이때에 전로한인공산당은 김철훈을 돈화, 요하, 할빈, 동녕, 연변 일대에 파견하여 지방조직을 설립하였다. 조선과 러시아에서 온 윤복송과 정치운은 초기 공산주의 단체인 간도공산당을 건립하였다.
연변지역에서는 1921년부터 1924년까지 조선공산주의자들이 용정의 중학교와 학원에서 마르크스와 레닌주의를 전파하였다.
1922년 이주화와 이인구 등은 대성중학교와 동흥중학교에 광복회 등 과외학습소조를 설립하고 마르크스와 레닌의 이론을 연구하였다. 같은 해, 김사국, 방한민 등은 대성중학교에 동양학원을 설립하고 산하에 공산주의 선전부와 특별부를 설치하여 공산주의를 선전하였다. 같은 해, 임호는 국제공산당집행부가 소집한 극동대회에 참석한 후에 용정에 와서 영신중학교와 동흥중학교의 진보적인 교사들과 학생들과 함께 독서회를 만들었다. 1923년 초 소련에서 온 박윤서는 동흥중학교 학생 김광세, 임민호 등과 함께 비밀단체인 고려공산청년회를 설립하였으며 9월에는 광복회와 공동으로 사회관학연구회와 친목회 등 마르크스- 레닌 연구 단체를 만들어 과외시간에 공산주의 사상을 선전하였다.
1920년대 초 연변의 여러 학교는 공산주의를 학습하고 선전하며 가마솥처럼 끓어올랐다. 이로 말미암아 자유시참변으로 위기에 빠진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많은 지탄과 공격, 암투와 자가 당착으로 시대에 뒤처진 봉건적이며 보수적인 운동으로 매도되며 경원시 되었다. 공산주의자들은 당의 지시에 따라 때로는 민족주의 계열과 협력하기도 하고 때로는 첨예한 갈등과 충돌을 일으키며 1930년대부터는 연변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이끌기 시작하였다.
1920년 중반에 공산주의 영향 하에서 조선 청년 학생들은 청년회, 친목회, 학우회 등의 단체를 설립하고 청년운동, 노농운동에 앞장을 섰다.
1922년 동흥중학교 학생들이 “동구청년회”를 만들어 공산주의 사상을 전파하기 시작한 이래, 연변의 조선인청년단체는 왕청, 화룡, 훈춘 등지에서 신속하게 발전하였고 1926년에는 무려 100여 개에 달하였다. 1926년 1월 26일, 조선인청년단체는 용정에서 연합대회를 열고 이인구를 회장으로 하는 동만청년동맹을 설립하였다. 2월에는 단체 지도자 120명이 모여서 평우동맹을 조직하여 간도여자청년회, 간도소년회, 노동회 등 공산주의 연구그룹과 각종 단체들을 산하에 두고 지도, 감독, 관리를 하였다 이로서 연변 각지에는 공산주의를 표방하는 청년단체, 부녀회, 학생회, 노동조합, 농민조합, 소년회가 북간도는 혁명의 불길에 휩싸이게 되었다.
나. 1926년에서 1930년까지 공산주의자들의 만주총국 활동
이시기는 조선공산당이 만주에 세운 만주총국이 항일투쟁을 주도하는 시대이다. 그들은 ML파, 서상파, 화요파로 나뉘었으며 항일 투쟁을 하면서도 각파 세력의 확장을 위해 과열된 경쟁으로 자주 충돌하였다. 그러나 결국에는 1928년 코민테른의 1국1당제도의 결정으로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은 해체되었다. 그리하여 조선 공산주의자들은 개인의 자격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국공산당의 반제반봉건투쟁과 중국독립을 위해 앞장서게 된다. 이로서 만주에서의 조선 공산주의자들의 조선독립운동은 끝이 난다. 이 기간에 일제의 탄압으로 1차, 2차, 3차 공산당사건이 일어났다. 1국1당제로 조선공산당이 사라지고 1930년 5월, 조선공산주의자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하에 홍5월투쟁과 길돈1)폭동을 일으켰다.
1925년 5월에 ML파2), 서•상파3), 화요파4)로 구성된 조선공산당이 서울에서 설립되었다. 1926년 3월에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아 국제공산당의 지부로 등록이 되었다.
1926년 5월에 조선공산당총국이 조봉암, 최원택 등을 만주에 파견하여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을 주하현 일면파에서 설립하였다. 만주총국은 본부를 영고탑에 두고 산하에 동만, 북만, 남만 3개 구역국을 두었다.
만주총국 동만구역국은 1926년 10월에 용정에서 건립되었다. 김용락을 책임비서로, 김인국을조직부장으로 이순을 선전부장으로 임명하였다. 동만구역국은 용정, 평강, 화룡, 국자가, 동불사, 왕청, 라자구, 훈춘 등지에 17개의 지부를 세웠다. 기관지로 “불꽃”을 발행하였으며 발행부수가 2,000여 부에 이르렀다. 1927년 통계에 의하면 동만에 19개 지부와 116개의 외곽단체와 가입자가 9,776명에 이르렀다.
만주총국은 항일 투쟁의 차원에서 조선인 농민들의 정당한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향약 개선 운동과 관세자주운동, 길회선 철도부설 반대 투쟁을 벌였다.
1927년 5월 1일, 동만구역국에서 용정과 그 일대의 수백 명의 청년학생들을 동원하여 항일시위를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이에 고무된 동만구역국은 10월 2일에 대규모의 항일시위를 기획하였으나 비 때문에 시위 일정을 하루 미루었다. 그리고 그 밤에 만주총국과 동만구역국 지도자들이 구역의 책임비서인 안기성의 집에 모여 시위 건을 토의하다 일본영사관의 군경에게 2간부 전원이 체포를 당하였다. 이 사건에 100여 명에 달하는 만주총국 산하의 간부들과 민중이 체포되었다. 이것이 “ 제1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최원택 등을 비롯한 수십 명의 간부들이 일제에게 검거되면서 조선공산당만주총국은 와해되었다. 그 후 조선공산당만주총국 내의 세 파는 각자 독자적인 만주총국을 만들어 서상파는 길돈지역을 M.L파는 반석현을, 화요파는 아성현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1928년 9월 3일에 국제청년절을 계기로 ML파 만주총국은 연변의 용정, 국자가 등지에서 수천 명의 청년학생들을 조직하여 항일시위를 이끌었다. 일제는 시위 대중을 진압하고 72명의 혁명청년들을 체포하였다. 이것이 “제 2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이로 말미암아 ML파 만주총국은 큰 타격을 받았으며 조선 항일단체들도 큰 피해를 입었다.
1929년 말에서 1930년 초에 만주의 형세가 크게 달라졌다. 장학량 동북군벌이 국민당과 손을 잡게 되어 국민당 군이 만주에 들어와 공산주의를 지지하는 동북 사람들에 대한 통치를 강화한 것이다. 화요파는 남만의 정의부와 연합하여 항일운동을 하고자 하였고 서울 • 상해파는 민족주의 계열의 항일단체인 참의부와 통일전선을 추진하고 동만의 독립 운동가들과 연합하여 근우회를 맺어 “신간회지회”와 “간도동인회” 지회를 얻고자 하였다. 1927년에는 12월에는 “전간도조선인단체연합회”를 결성하였다.
비공산주의 단체들과 연대를 시도하면서 만주총국의 각 파들은 친일 조직과 친일파 숙청을 위한 활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서울 • 상해파는 1930년 1월 초에 “재만한인반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고 “제국주의의 소련 진공을 반대하며 중동철도를 결사적으로 보위하자!” “일본의 소련 침략음모를 분쇄하자!”, “국민당 정부와 군벌세력을 타도하자!”는 구호를 제기하였다. ML파는 유하, 청원 지방의 농민들을 동원하여 소금세 납부를 반대하고 도전법을 반대하는 농민들의 파경투쟁을 지도하였다. 화요파도 1930년 1월 23일 “재만조선인반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고 반제투쟁을 활발히 전개하였다. 1929년과 1930년에 계속 감조감식투쟁5)을 벌였다. 29년 9월의 화천현 오동하 연안의 복풍도전공사의 감조감식투쟁, 30년 1월과 3월의 아성현 황산주자의 감조감식투쟁은 일정한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같은 해 1월 28일과 3월 1일에 용정과 화룡현의 소오도구, 대동구, 사도구, 약수동, 장인강 등지의 수천 명의 청년학생들과 농민들은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자!”는 구호를 외치며 연이어 시위를 하다가 일본 군경의 제재를 받았다. 이로 말미암아 4월 중순에서 5월 중순 사이에 무려 130여 명의 지도자와 민중이 체포되고 투옥되었다. 이것이 “제3차 간도공산당사건”이다.
다.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해체와 중공공산당이 주도한 “5.30 투쟁”과 “길돈`폭동”
1927년 10월 24일 중공만주성위임시위원회가 설립되고 1928년 2월에 연변지구 당조직을 위해 주동교를 파견하였다. 그는 용정에 첫 당지부인 중공용정촌지부를 설립하였다. 1928년 8월에 중공동만구위가 설립되어 주동교가 서기가 되고 팔도구지부, 국자가지부, 등 지부가 세워졌다. 그러나 1929년 1월 15일 주동교가 적에게 체포된 뒤를 이어 대리서기인 류건장 마저 체포되자 대다수의 당원들이 연변을 떠났고 연변의 중공당 조직은 무너졌다.
1928년 7월 17일 ~ 9월 1일까지 국제공산당 제6차 대표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렸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은 3차례 일제에 의한 검거로 조직이 마비상태에 있었으므로 대회에 정식대표를 파견하지 못하였다. 이런 사정으로 코민테른은 4명의 조선위원회를 조직하여 그들로 하여금 조선공산당의 문제를 조사, 연구한 후에 해결책을 제출하게 하였다. 동년 12월 10일에 공산국제집행위원회 정치서기처는 “조선 문제에 대한 결의”와 “조선농민에게 보내는 글”(12월 테제)을 발표하여 조선공산당의 국제지부 자격을 취소하며 조선공산주의자들이 파쟁을 극복하고 소자산계급 울타리에서 벗어나 노농대중을 토대로 한 진정한 볼셰비키 당을 재건할 것을 촉구하였다. 사실상 조선공산당의 해산을 선포한 것이다.
12월 테제 발표 이후에 조선 국내의 공산당은 해산되었으나 중국내 만주총국들은 해산하지 않았다. 화요파, ML파, 서울•상해파는 오히려 당재건위원회를 세우고 재조직을 위해 백방으로 수고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과 각파의 이견으로 결실을 보지 못하고 코민테른의 1국1당 원칙에 의해 조선공산당원들이 개인의 자격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해야 하는 문제에 직면하였다. 1930년 ML파, 화요파 그리고 서울 • 상해파가 차례대로 해체선언을 하면서 조선 혁명과 조선독립운동의 일환으로서 공산주의 운동을 버리고 개인의 자격으로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여 중공공산당의 일원으로 코민테른 국제부의 지시에 따랐다. 이때를 기점으로 하여 조선공산당은 만주에서 사라졌다. 중공공산당에 가입한 조선인들은 중국의 보전과 중국혁명에의 참여를 최우선적으로 추구하며 국제공산당의 일원으로 자신들의 충성과 열성을 인정받아야 하는 민족성을 부정의 기만과 위선에 직면하였다. 그리하여 1930년부터 만주에서 만주공산당에 의해 진행되는 모든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은 조선을 위한 것이 아니고 중국을 위한 것이 되었다.
1국1당으로 만주에서의 공산주의 운동의 주도권을 잡게 된 중국공산당은 1930년 1월에 연변지구의 당 조직을 회복하기 위하여 조선족공산당원 왕경을 연변에 파견하여 화룡현 달라자에서 중공연변특별지부위원회를 건립하였다. 연변특별지부는 석건평, 달라자, 남양평, 동량사, 대감자, 등 5개 지부를 설치하였다.
1930년 4월 9일에 중공만주성위에서는 “전 만주 노동자, 농민 및 일체 노고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발표하여 동북지구의 전체 조선족 노농대중에게 중국공산당의 감독하에 혁명에 적극 참가할 것을 호소하였다. 중공연변특별지부는 4월 24일에 “5.1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홍5월투쟁”방안을 제정하였다.
1930년 5월 1일에 용정의 400여명의 수공업노동자들이 동맹파업을 단행하고 조선인 중, 소학교들도 동맹휴학을 하고 시위에 나섰다. 같은 날 두도구에서도 300여명의 군중들이 항일집회를 열고 반제동맹을 결성하였다. 화룡현 자동, 평강, 석문, 달라자, 명동, 연길현의 팔도구, 왕청현의 북하마탕 등지의 농민들도 중공당의 지시 하에 5.1국제노동절기념모임과 항일집회를 개최하고 시위행진을 하였다. 5월 1일 이후 시위행진이 연변에 널리 파급되었다. 5일에 화룡현 약수동의 600여 명 농민들이 시위를 벌였으며 돈화, 액목의 1,500여 명의 농맨들도 항일집회를 가진 후 친일지주를 처단하고 고리대 계약서와 장부를 불살라버렸다. 화령과 연길 등지의 농민들도 선전대와 특무대를 조직하여 일본 앞잡이들과 대지주와 자본가들을 청산하고 소작계약문서와 고리대장부를 불태웠다. 투쟁이 계속되면서 연변지구의 농민협회, 농민자위대 등 군중단체들이 확산되었다.
5월 27일 화룡현 약수동과 인근 마을의 1,000며 염의 사람들이 약수동 상촌에서 집회를 열고 약수동소비에트정부를 설립하였다. 소비에트정부는 토지혁명을 전개하며 농민적위대를 조직하였다. 그 후 약수동소비에트정부는 일제와 반동군벌의 탄압으로 무너졌지만 동북지역의 첫 노농혁명정권으로서 동북공산당투쟁의 한 페이지를 기록하였다.
5.1절 거사를 성공적으로 마친 중공연변특별지부는 “5.30참안6)” 5주년 기념일이 되는 날에 대규모적인 무장폭동을 조직하여 반제반봉건투쟁을 고조시키기로 하였다.
“5.30폭동”은 5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전개되었는데 화룡현 삼도구, 약수동, 장인강, 명풍, 두도구, 용정, 대불툰, 남양평, 걸만동, 국자가, 로도구, 이도구 등지의 조선인 군중들의 봉기하여 일으킨 폭동이었다. 일본 영사관과 및 그 산하기구와 친일조직이 공격의 대상이었다. 일제 측 통계에 의하면 지주의 저택이 19채, 총독부 보조학당 5개소, 조선인거류민회 사무실 2개소가 불에 탔고 교량 4개와 발전소 1개소가 파괴되었으며 전화선 10여 곳이 끊어졌으며 피해악은 일화로 약 17,500여 엔에 달했다. 190여 명의 폭동 참여자들이 주었거나 부상당하였으며 3,168명이 체포되고 그 중에서 22명이 사형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공연변특별지부는 연변의 조선인들의 혁명 정신을 함양하고 촉진시키고자 국제반제운동기념일인 8월 1일에 “길돈폭동7)”을 일으키기로 결정하였다.
8월 1일 새벽에 일제히 행동을 개시한 각 지역의 폭동대대들은 맡은 임무를 수행하였다. 가장 먼저 액목대대의 파괴대가 철교를 파괴하고 전선주를 넘어뜨리고 전화선을 단절시켜 길림으로부터 교화, 돈화로부터 신참까지의 교통과 전화 연결을 차단시켰다. 돈화대대의 폭동대원들이 신개도보위단 병영을 습격하고 무기고에 들어가 보총 16자루, 탄약 천여 발을 탈취하고 병영에 불을 질렀다. 한광우가 인솔하는 폭동대원들이 마호에서 육군 제7퇀 병영에 사격을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2시간 만에 퇴각하였다. 홍일산, 윤순찬 등이 인솔하는 폭동대는 남황니허공안국 제3분주소를 습격하여 경찰 2명에게 부상을 입혔고 정철호와 이범용이 등이 지휘하는 액목습격대는 관지에 주둔하고 있는 육군 제7연재 8중대 병여을 습격하여 보총 한 자루와 탄알 50발을 노획하였다. 8월 15일 밤 9시에 폭동대원들은 다시 제8중대 병영을 습격하였다.
“8.1길돈폭동”은 연변각지 여러 민족8)의 혁명의식을 고양시켰다. 도처에서 노동자와 농민의 폭동대들이 시위하며 폭동을 일으켰고 군경들과 충돌하였다. “8.1길돈폭동”은 타격대상이 당지의 봉건반동세력이었는데 그 목적이 토지혁명을 통하여 소비에트정권을 수립하는 것이었다.
일본과 중국지방정부의 통계에 의하면 1930년 6월부터 12월 사이에 중국정부에 체포된 사람이 1,41명인데 그 중 98명이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고 일본 측에 체포되었거나 살해된 사람은 883명에 달하였다.
“홍5월투쟁”과 “8.1길돈폭동”은 일본제국주의와 동북반동군벌에게 큰 타격을 주었지만 그들에게 연합토벌을 당하기도 하였다. 중공공산당 만주성위는 조선인들을 투쟁의 길로 이끌어 대일본 투쟁과 반 동북반동군벌과 반제반봉건투쟁에서 최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들의 승리는 허다한 동북 조선인들의 사망과 부상의 결과였으며 그로 말미암아 수천의 민중들이 체포되었고 투옥 당하였다.
2) 제 2 단계는 1931년부터 1940년까지이다.
2 단계는 중공공산당의 지도로 각종 유격대 설립과 활동, 동북인민혁명군 설립과 활동, 동북항일연군 설립과 활동 및 연해주로 퇴각하는 3개의 기간으로 나눌 수 있다.
가. 각종 유격대 설립과 활동(1930년 후반기~ 1933년)
①중국 동만특위 확산과 활동
중공공산당은 조선인들을 동원하여 1930년에 “5.30 투쟁”과 “길돈`폭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다. 그리하여 1930년 중공만주성위는 중공연화중심현위9)를 설립하였다. 8월말에는 중공연화중심현위에는 10개의 구위와 61개 지부와 470여 명의 당원이 있었는데 10월에 새로 가입한 당원 만해도 670명이었다. 그 670명 중에 660명이 조선인들이었다. 중공만주성위는 중공연화현중심현위를 토대로 하여 중공동만특위를 설립하였다. 그 후 중공왕청현위가 세워졌고 하마탕, 라자구, 요영구, 소왕청, 석현 등 5개 구위와 17개 지부에 당원 150명이 있었다. 훈춘에서는 1928년에 일찍이 중공공산당에 가입한 유경운과 조진가가 중공훈춘지부를 건립하였으나 1930년 8월에 김성도가 중공연화중심현위의 지시를 받고 훈춘에서 중공훈춘구위를 새로 설립하였다. 산하에 대황구, 밀강, 경신, 성관 등 4개의 구위가 설치되었다.
중공연화중심현위는 1931년 8월 초에 취소되고 중공연길현위와 중공화룡현위로 개편되었다. 연길현위는 의란구에 본부를 두고 로두구, 연길, 옹성라자, 등 8개 구위를 설치하였다. 화룡현위는 본부를 달라자에 두고 달라자, 평강, 개산툰, 삼도구 등 4개의 구위를 설립하였다.
1931년 2월 중공동만특위는 산하에 6개의 현위와 19개의 구위를 설치하여 완전한 조직체계를 확립하였다. 1930년 봄, 동북지구의 당원은 200여 명뿐이었으나 크게 증가하여 1931년에 3월에 이르러 1,1900명이 되었다. 그 중 연길, 화룡, 안도, 왕청, 훈춘 5개현의 당원이 636명으로 전 동북지구 중공당원 총수의 54.1%를 차지하였고 조선인 당원이 96.5%나 되었다.
이 기간에 동만지구의 농민혁명단체도 전례 없이 발전하여 연길, 화룡, 안도, 왕청, 훈춘 5개현 및 산하 각 구에 모두 농민협회가 설립되었는데 그 회원 수가 무려 2만5천여 명에 달하였다.
단 기간에 조선인들의 중공공산당 영입으로 엄청난 규모의 세력을 확장한 중공공산당은 크게 고무되어 만주국 사변 이후 31년의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기획하고 지시하기에 이르렀다.
1930년 대 초기 만주는 일본의 대대적인 침략으로 말미암아 피바람이 불었다.
1931년 9.18사변10)을 일으킨 일제는 만주 침략을 시작하여 1932년 3월에 만주국을 세웠다.
일제 침략자들은 만주에 괴뢰정권을 세우고 식민지 통치제도와 “치안숙정”과 “3광”정책11)을 실행하였으며 치안유지법, 반역자징벌잠정법, 보간잠정법 등 일련의 법령을 반포하고 무력통치로 만주를 일본 식민지로 만들었다.
9.18사변 당시 만주의 조선인은 100만여 명에 이르렀다. 그 중 동만주12)에 39만여 명이 거주하였다. 일본제국주의는 정치와 군사적 측면에서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경제적인 측면에서 돈을 풀어서 소농과 소자본의 상공인들과 가난한 자들의 몰락을 촉진하여 경제 예속화를 가속화시켰다.
1933년에 실시한 “자작농창정정책”은 조선인 자작농을 창정한다는 구실로 토지를 구매하고 넘겨주는 과정에서 토지가격을 10배내지 30배를 올려 폭리를 취하였으며 자작농이 환부금을 갚지 못하였을 경우 땅문서를 발급하지 않으며 이주할 수 없도록 정책적으로 못을 박아서 조선인들을 통제하고 억압하였다. 뿐만 아니라 1932년 조선이주민처리요강을 제정하여 조선인이 동북에로 자유롭게 이주하도록 격려하여 36년까지 동만 5개현에 8만 명의 조선인들이 집단으로 몰려왔다. 그러나 그들은 집단부락에 갇혔으며 마을 출입 시 만주군의 조사를 받았으며 밭에서 일할 때조차 자위단의 감시를 받았다.
도시의 공장 노동자들은 매일 10~12시간의 노동을 강요당하였으며 심지어는 14~16시간의 노동을 할 때도 있었다. 조선인들의 노임은 일본 노동자의 1/3에 해당되었으며 1935년 12월 만주국 간도성공서 민정청의 조사에 따르면 일본 철공의 일당은 3원이었으나 조선인 노동자의 일당은 0.9원이었고 일본인 목공의 노임은 2원이었으나 조선인 목공의 노임은 1원 2전에 불과하였다.
1932년 4월, 동만주 토벌을 시작한 일제군은 1년도 안 되는 사이에 381차례나 약탈을 감행하였으며 무려 4,000여 명이나 살해하였다. 연길현 한 지역에서 만해도 700여 명의 조선인이 살해당하였으며 의란구에서는 2,300여 채의 집이 불에 탔다.
1932년 4월부터 5월에 걸쳐 왕청현 덕원리, 동일촌, 전각루 등 마을이 일제의 대포사격과 방화로 다 불에 탔으며 조선인들이 참혹하게 살해당하였다. 5월에 훈춘현의 연통라자는 20여개 마을 1천여 채가 불에 탔다. 사금구촌은 도망친 3명의 청년을 제하고는 모두 살해를 당하였다. 학살 중에서 가장 끔찍한 학살은 해란강대학살이다. 연길에서 30리 떨어진 해란강과 부르하통하가 합류하는 지점 십여 리 협곡에 수침동, 유정촌, 학교촌, 상중개동, 하중개동, 북화련리, 남화련리, 상촌, 중촌, 로가툰, 상고특툰이 등 12개 촌, 툰13)에 거주민 200여세대가 살았다. 일제 토벌대는 1931년 10월 이후 1년 동안 화련리를 중심으로 하는 연길현 해란구에서 94차례에 달하는 토벌을 감행하여 1,700여명의 조선인들을 학살하였다.
일본의 식민지 통치 아래 들어간 만주에서 조선인들은 경제적으로 생존 위기에 직면하였으며 정치적으로 만주국에 협조하는 길 외의 일체의 자유를 잃었다.
9.18 사변 후 9월 20일에 중공중앙과 중국소비에트공화국 중앙노농혁명위원회에서는 9.18사변에 제하여 선언을 발표하였다. 중공중앙은 “일본제국주의의 만주강점과 관련한 결의”를 발표하여 만주에서 대중적인 반제투쟁과 대중투쟁을 발동하여 일본 제국주의와 싸울 것을 호소하였다.
중공만주성위는 19일에 “일본제국주의 만주 무력적 점령과 관련한 선언”을 20일에는 일본의 만주 침략에 관하여 “전 만주 조선 노동자, 농민, 학생 및 노고대중에게 알리는 글”을 22일에는 “일본제국주의의 만주 무력적 점령 및 목전 당의 긴급과업과 관련한 결의”를 발표하여 파업, 동맹휴학, 철시를 전개하고 대중적 투쟁을 발동하여 유격전쟁을 으로 일제의 침략을 반대하라고 전 조선인들에게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중국공산당의 호소 하에 동만의 조선인들은 각급 당 조직의 지도 아래 “추수투쟁”과 “춘황투쟁”을 근간으로 하는 항일반봉건투쟁을 시작하였다.
②추수투쟁과 춘황투쟁
중공동만특위는 28일에 긴급회의를 소집하고 “대중을 동원하여 시위행진을 하며 일본의 만주점령을 반대하는 것과 목전의 추수투쟁과 결합해서 할 수 있는” 항일투쟁 단체를 만들고 다양한 모양의 반봉건투쟁과 항일운동을 전개할 것을 여러 민족 여러 계층의 사람들에게 호소하였다.
동만의 조선인 농부들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아래 반봉건투쟁과 항일집회와 시위행진을 실시하였다. 연길과 화룡 등 현들에서는 농민협회, 반제동맹 대표대회를 소집하고 일본제국주의 침략을 반대하는 투쟁을 결의하였으며 “반제전선” 등 간행물들을 간행하여 일본제국주의 침략의 야욕을 폭로하며 일치단결하여 싸울 것을 만주 내의 여러 민족에게 호소하였다. 이렇게 조선 농부들이 중공동만특위와 각 현위의 지도아래 감조감식투쟁을 벌인 것을 추수투쟁, 춘황투쟁이라고 부른다.
1931년 봄, 9.18사변이 일어나기 전 동북군벌정부는 3:7, 4:6제로 소작료인하 법령을 반포하였다. 이 때 지주들과 일제의 군벌은 결탁하여 3:7과 4:6의 소작료 인하를 외치는 조선 농부들을 진압하려고 하였다. 이에 중공동만특위는 농민들을 선동하여 “일본제국주의 타도하자”, “반동지주 타도하자”는 구호아래 반봉건 타도 추수투쟁을 시작하였다.
동년 9월에 연길현 로두구 부근의 관도구, 대기동 등지의 800여명 농민들이 중국공산당의 호소에 따라 추수투쟁을 시작하였다.
로두구에서 시작된 추수투쟁은 연변지구를 휩쓸었다. 연길현의 팔도구, 소영자, 화룡현의 개산툰, 왕청현의 배초구, 소왕청, 훈춘현의 경신, 밀강 등지에서도 추수투쟁이 고조를 일으켰다.
특별히 연길현 팔도구, 소영자와 화룡현의 개산툰, 훈춘의 밀강 일대의 투쟁이 거셌다. 4개월 남짓 계속된 추수투쟁에 조선인 농부 1만 5천여 명이 참여하였다. 연길현에서 약 8천여 명, 화룡현에서 약 4천여 명, 왕청과 훈춘에서 각각 약 1천5백여 명이 참여하였다. 투쟁으로 인하여 소작료가 인하되었으며 조선인들 속에 중국공산당의 정치적 영향력이 확대되었고 항일투쟁의 방법이 다양해졌다.
1932년 봄 동만의 조선인 농민들은 중국공산당의 인솔 아래 만주족 농민들과 함께 춘황투쟁을 일으켰다. 당시 일제의 침략과 대지주들의 가혹한 착취로 수많은 사람들이 집을 잃고 추위와 기아에 시달리고 있었다. 이런 고통스러운 상황에서 중공동만특위는 농민들을 조직하여 잡세와 빚의 상납을 거부하고 식량을 빌려 보릿고개를 넘기며 침략자와 그 앞잡이들을 반대하는 취지의 춘황투쟁을 전개하였다.
1932년 2월초에 연길현 의란구의 수백 명의 조선인 농민들이 “차량(借糧)”투쟁14)과 “식량탈취”투쟁을 벌였다. 의란구 부근의 남양동, 신광, 춘흥, 귀암동 등지의 수백 명의 농민들이 시가행진을 하면서 차량과 식량탈취 구호를 외치며 구룡평을 향하여 행진하였고 의란구 북부지역의 왕우구, 청학동, 봉서동, 원수동, 유채 등지의 400여 명의 농민들은 유채촌에 집결하여 지주의 식량창고를 열어 가난한 농민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이리하여 의란구 남북 두 지방의 농민 시위대 1,200여 명은 구룡평에 모여 일본경찰서를 포위하고 친일 지주들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였다. 일본은 연길의 50여 명의 일본군 수비대를 출동시켜 농민들을 향해 저격하였고 농민들은 결사적으로 저항하였다.
의란구의 춘황투쟁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연길현의 세린하, 옹성라자, 조양천, 팔도구, 로두구, 마반산, 화련리, 훈춘현의 중강자, 연통라자, 왕청현의 영청동, 대감자, 전각루, 용번구와 하룡현의 삼도구, 평강, 개산툰, 팔도하자, 및 안도현의 여러 지방의 수많은 농민들이 춘황투쟁에 참여하여 식량을 빌리고, 탈취하며, 친일 지주들과 앞잡이들을 청산하고 축출하며 일본군경의 학살 행위에 저항하였다.
둥만에서 약 2만 명이 춘황투쟁에 참가하였는데 그중 연길현에서 약 1만 명, 화룡현에서 5천 명, 훈춘현에서 3천 명, 왕청현에서 2천 명이 참가하였다. 춘황투쟁은 3개월 정도 지속되었으며 선명한 항일투쟁의 기치를 들고 친일파들을 축출하며 항일운동을 드세게 일으켰다.
두 투쟁을 통하여 일제와 만주 괴뢰정권은 동만의 농촌지역에서 발을 붙이지 못하게 되어 연길현의 해란구, 의란구, 팔도구, 화룡현의 달라자구, 평강구와 삼도구구, 왕청현의 하마탕구, 대왕청, 요영구, 가야하, 훈춘현의 대활구, 연통라자 등의 농촌은 중국공산당의 지시를 받는 조선인 농부들에 의하여 통제되었다.
③항일 유격대 설립과 활동
1931년 10월 12일, 중공중앙은 “만주사변사업에 관한 지시서한”을 내려 유격투쟁을 전개할 것을 동북 각급 당 조직들에게 요구하였다.
1931년 11월 16일, 중공만주성위는 당 중앙의 지시에 따라 유격대창건사업을 활성화시키기 위하여 각지에 순시원을 파견하였으며 양림을 성위 군위서기로 임명하여 유격대 창건사업을 지도하게 만들었다.
1931년 12월 16일, 중공동만특위는 연길현 명월구에서 동만 각 현의 책임자와 당, 단 열성자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에서는 유격대 건립에 관한 성위의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항일유격대 건립 건에 대하여 토론하였다. 명월구회의는 이미 조직된 반제동맹, 농민협회, 공회, 부녀회, 소선대, 적위대 등 민중단체를 근간으로 해서 항일유격대를 건립하여 유격투쟁을 전개하기로 하였다.
1932년 2월 15일, 중공동만특위 군위서기 양림은 동만유격대사업대강을 제정한 후, 2월 17일에는 동만적위대사업대강을 발표하였다.
동만유격대사업대강은 유격대 임무를 “군중을 발동하고 정치여향을 확대하며 무기를 탈취하여 적들의 통치를 뒤엎거나 그 세력을 전멸하고 … 토지혁명을 진행하며 소비에트정권을 건립하고 부단한 투쟁 중에서 홍군을 성장, 발전시켜야 한다.”고 명시하였다. 두 문서는 유격대에 대한 당의 영도문제, 유격대의 조직문제, 유격대의 선전훈련사업, 유격대의 전술, 포로사업과 유격대의 급양 등의 이론을 제공하였다.
1932년 봄, 중공연길현위에서는 당원, 단원과 대중들을 동원하여 봉건세력과 일군의 무기를 노획함과 동시에 의란구, 로두구, 팔도구, 해란구 등지에 돌격대, 적위대 등 항일무장대를 조직하였다. 의란구돌격대, 해란구 화련리적위대, 화련리유격대, 로두구돌격대, 연길현적위총대, 연길현유격대는 친일지주집을 습격하거나 만주국 경찰을 공격하며 세력이 확장되었다.
1932년 10월 말에 중공연길현위는 의란구와 로두구의 돌격대를 합하여 연길현항일유격대를 설립하였다.
안도현에서는 1931년 말부터 항일유격대 창건사업을 시작하였다. 1932년 동만특위 공청단15)
은 항일유격대를 창설하도록 조선인 지도자를 파송하여 1932년 4월 25일에 안도현 소사하 무주툰 토기점골에서 항일별동대를 창건하였다.16)
왕청현항일유격대는 왕청현노농항일유격대와 구국군별동대, 영안에서 온 북만노농의용대, 안도에서 온 유격대가 합하여 조직되었다.
훈춘유격대는 1931년 12월에 중공훈춘현위에ㅓ 군사주비위원회를 설립하였다. 동월에 훈춘현위군사부가 대황구에 별동대를 조직하였다. 1932년 3월에 훈춘 연통라자 서구에서 돌격대가 건립되었다. 1932년 6월, 중공훈춘현위는 연통라자 서구에서 연구항일유격대를 설립하였다. 1932년 7월에 대황구유격대를 토대로 영북항일유격대를 설립하였다. 1932년 가을, 성구와 번구에서 돌격대와 유격대가 설립되었다. 1933년 1월 중공훈춘현위는 연구유격대와 황국유격대를 합병하여 훈춘항일유격대를 만들었다.
중공화룡현위는 1932년 봄에 당원, 단원, 적위대 책임자회의를 소집하여 개산툰구, 달라자구, 평강구, 삼도구구 등지에서 돌격대, 적위대를 건립하였다.
1933년 2월 중공화룡현위는 각 구의 유격대를 어랑촌으로 모아 화룡현유격대를 설립하였다. 그 아래 3개 소대를 두었다.
1933년 초까지 동만의 연길, 화룡, 왕청, 훈춘, 4개의 현 유격대에 도합 360여 명의 대원이 있었고 그 중의 90% 이상이 조선인이었다. 조선인들은 친일 지주를 공격하며 무기를 탈취하고 항일 유격대를 창건하는 투쟁에서 솔선수범하여 용감히 싸우다가 적지 않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다. 항일 유격대는 밀림에서 일제와 만주 군의 대토벌에 맞서 싸우며 동북인민혁명군으로 발전되어 갔다.
④항일유격근거지
1932년 여름과 가을부터 동만의 조선인들은 각지의 당의 지시 아래 항일유격근거지를 창건하는 투쟁을 시작하였다.
일본침략군이 연변을 점령하였지만 초기에는 통치가 농촌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중국과 소련, 중국과 조선 변경지대의 험산준령들은 동만의 일본 침략에 저항하는 노농민들에게 항일유격지 창설의 유리한 환경이었다. 중공동만특위는 동만지구의 항일운동과 토지혁명운동이 대중들 속에 파급되어 퍼지고 있으며 지리적인 환경이 방위에 적합한 지세를 가지고 있어 항일유격근거지를 창건하는 유리한 조건임을 파악하고 유격구 건립을 권장하였다.
9.18사변 이후 동만에는 부르하통하 이북에 위치한 연길유격구, 가야하 양안 산지에 위치한 왕청유격구, 봉밀산간지역에 위치한 화룡유격구, 황구령 이북의 산간지대로부터 훈춘하강 이남의 주소변경에 이르는 훈춘유격구 등이 형성되기 시작하였다. 이런 유격구 안에 1932년 하반기부터 10여 곳에 항일유격근거지가 연이어 나타났다.
연길현의 왕우구, 팔도구, 삼도구, 왕청현의 소왕청, 가야하, 요영구, 훈춘현의 대황구, 연통라자, 화룡현의 어랑촌, 우보동 등 유격근거지다. 이런 유격구를 통 털어 동만항일유격근거지라 불렀다. 유격근거지의 범위는 거개가 6.7십리 내지 100여리 사이고 인구는 적은 곳이 6.7백명, 많은 곳이 2천명 좌우였다. 동만 경내 항일유격지 내의 인구는 약 2만 명에 이르렀는데 그 중 95%가 조선인이었다.
유격근거지 내에 소비에트17)정부와 혁명위원회가 조직되었으며 각 지역 소비에트는 노동자, 고농, 수공업들을 조직하여 공회를 건립하고 빈농단을 설립하였다. 전쟁을 대비하여 농업에 종사하게 하였으며 병기공장, 피복공장과 병원 등을 세웠다.18)
문화교육을 중시하여 1932년 겨울 각 항일유격근거지에서 “소학교의무교육법”을 반포하여 의무교육을 실행하도록 권하였으며 여러 유형의 학교를 세워 항일전쟁이 요구하는 다양한 인재 양성하였다. 당시 동만의 각 근거지에 세운 학교는 모두 30여개에 달하였으며 조선인 학교는 조선어와 조선어 교재로 교육하였다. 수시로 일본군의 토벌의 위험을 받았지만 학교를 끝까지 견지하였다.
전투를 위하여 근거지에는 유격대 외에 항일자위대, 청년의용군, 소선대 등 반군사적 무장조직을 세워 평시에는 보초로서 근거지를 지키고 비상시에는 유격대에 참여하여 출전하게 하였다.
근거지의 병기공장, 재봉대, 취사반, 후방병원이 협력하여 유격대의 전투를 제고(提高)시켜 1932년 봄부터 1933년 말까지 계속된 일제와 만주국 군인들의 동만항일유격근거지를 향한 대대적인 토벌을 좌절시켰다. 통계에 의하면 1932년 11월부터 1933년 말까지 동만의 유격대는 일본군들과 150여 차례의 전투를 벌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지속적인 토벌로 인하여 유격근거지의 농민들이 농사를 짓지 못하여 유격근거지에 식량문제가 발생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본군의 삼광정책으로 유격근거지 곳곳이 폐허가 되었다.
또한 당시 동만항일유격대는 민생단사건19)으로 중국공산당의 프레임에 갇혀 500여 명 이상의 지도자를 잃었으며, 노선의 문제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단체들과 적대적 관계가 되어 스스로 운신의 폭을 좁혔으며 급진적인 토지혁명을 위해 지주들과 토호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하여 다양한 항일저항세력을 배제하여 스스로 유격대의 활동구역을 축소시켜 새로운 돌파구를 찾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또한 일제는 계속 항일유격구에 대대적인 군사토벌을 감행하여 집단부락, 보갑제, 연좌제. 귀순공작반 등 군민분리정책을 병행하여 항일유격구를 고립시켰다. 그리하여 항일유격대의 항일유격근거지에도 변화가 잇달았다.
나. 동북인민혁명군 설립과 활동(1933년 ~ 1935년)
일본의 만주국 통치가 전 만주지역에 두루 미치게 되자 동만지구 중공당 조직들은 그 때까지 의 자신들의 배타적인 좌경노선의 한계성에 직면하였다. 그들은 중공당의 지도를 받는 조선 인 항일유격대를 발전시키며 여러 민족, 여러 계층과 여러 유형의 항일무장역량을 단결하여 일제와 전쟁을 지속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창출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1933년 1월 26일, 그런 찰나에 중공중앙으로부터 “만주 각급 당부 및 전체 당원들에게 보내는 서한 – 만주의 상황과 우리 당의 과업을 론함”(이하 1.26 지시서한으로 약칭함)을 내려 받았다.
1.26 지시서한은 9.18사변 이래 동북 여러 민족의 반일투쟁을 총체적으로 분석하고 항일유격전쟁단계에 있어서의 정치, 군사면의 중공만주당조직의 주요과업을 전 민족항일통일전선을 결성으로 규정해주었다. 규합과 연합의 가능성이 있는 모든 역량 심지어는 믿음직하지 못한 역량이라 할지라도 일제와 결사적으로 싸울 수 있으면 손잡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면서도 중공중앙은 중국공산당은 다른 항일단체와 연합함에 있어서 정치상, 조직상의 독립성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그들은 동북당조직의 중심과업을 가장 훌륭한 유격대를 인민혁명군으로 편성하고 민주정권을 세우며 항일단체를 적극적으로 발전시키라고 지시하였다.
1933년 4월, 중공만주성위는 1.26 지시서한을 접수한 후 5월 중순에 하얼빈에서 성위확대위를 소집하였다. 그들은 지시서한의 정신대로 민족혁명통일전선을 집행하며, 대중들 속에서 정치, 경제 투쟁을 전개하여 무산계급의 주도권을 확보하고, 만주의 인민혁명군 건립과 민주정부 건립을 중심과업으로 삼기로 결의하였다.
1933년 6월 초, 중공중앙의 1.26 지시서한이 동만에 전달되었다. 중공동만특위와 중공길동국 대표가 성위대표단과 함께 왕청, 훈춘, 연길 등 현들에 가서 현위확대회의를 소집하여 지시서한의 내용을 전달하였다.
1933년 6월 10일, 중공동만특위는 민중에게 알리는 글에서 전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하며 중한민중의 연합으로 일본을 물리칠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하여 유격근거지 내의 소비에트정부를 없애고 인민혁명정부 또는 농민위원회가 다시 건립되었다. “모든 지주와 자산계급의 재산을 몰수한다”는 구호를 “일본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의 토지와 재산을 몰수한다”로 바꾸었으며 항일유격근거지와 만주국 통치구역인들의 상호관계를 새롭게 정립하였다. 또한 항일유격대와 각 항일군과의 항일통일전선을 결성하여 일제와의 전투에 연합작전을 수행하였다.
1933년 여름, 연길현항일유격대는 구국군20), 산림대들과 연합하여 일본경찰서와 만주국 자위단 등을 습격하였으며 유격지에 쳐들어오는 일군들을 함께 물리쳤다. 11월에는 구국군과 연합하여 의란구에서 일본 토벌대의 습격을 물리쳤다.
1933년 9월, 왕청유격대는 구국군과 한국독립군와 연합하여 동녕성 전투에 참여하여 일군을 격파하였다. 1934년에는 만순, 만군 등의 항일부대와 연합하여 일본군과 만주군을 섬멸하였다.
동만의 유격대는 일제와 만주군의 제1기와 2기의 토벌을 각 항일부대와 협동작전으로 물리치면서 하였지만 대부분의 유격근거지가 파괴되어 새로운 유격구를 개척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에 직면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4년 봄, 동만의 4개 유격대는 900여명으로 증가하였으며 무기와 장비도 크게 개선되었다. 또한 항일무장부대와 연합작전을 벌이면서 서로간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그러나 1933년 한국독립군이 관내로 이동하고 1934년 조선혁명군의 사령관 양세봉의 죽음으로 항일유격대는 동만의 유일한 항일부대로 남게 되었다.
① 동북인민혁명군 설립과 활동
1934년 3월 하순, 중공동만특위는 중공만주성위의 지시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독립사 건립”을 위해 연길현 삼도만 장지영에서 중공동만특위 및 항일유격대 책임자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다. 회의는 연길현과 화룡현의 유격대를 토대로 하여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 제1사를 설립하였다. 사장은 주진, 정위는 왕덕태가 임명되었다. 그들은 다 중국인으로서 조선인으로 편성되는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보스가 되었다. 회의는 연길유격대를 제1퇀, 제2퇀으로 재편성하고 화룡유격대를 제3탄으로 재편성하였다.
당시 회의에서 왕청현과 훈춘현 유격대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 제2사를 설립하기로 하였으나 계획이 무산되었다. 그리하여 제1퇀은 연길유격대, 제2퇀은 화룡유격대, 제3퇀은 왕청유격대, 제4퇀은 훈춘유격대로 재편성되었다.
1933년 여름, 제1퇀과 제3퇀에서 대원을 선발하여 독립된 퇀을 만들었다. 그리고 제1퇀장에 박동근, 정위에 최학철, 제2퇀장에 맹조상, 정위에 김락천, 제3퇀장에 조학춘, 정위에 남창익,제4퇀장에 유장구, 정위에 주운광을 임명하였다.
전 사의 병력은 900여 명으로 그 중 제1퇀의 병력이 450여 명으로 가장 많았다. 이밖에 동만에는 200여 명의 청년 의용군, 1,000여 명의 항일부대가 있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가 창립된 후 일본군과 만주군의 토벌은 갈수록 치열해졌다. 제2군 독립사의 각 퇀은 근거지에서 활동하기가 더욱 힘들게 되었다.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는 유격전술로 계획적인 진공을 실시하는 전략으로 일본통치구역으로 들어가 작전을 펼치기로 하였으며, 중공만주성위는 유격대로 하여금 서쪽과 북쪽으로 진출할 것을 명하였다.
동만특위는 당의 지시를 따라 군사를 나누어 안도, 액목과 왕청 라자구, 영안일대로 근거지를 옮겨 새로운 항일유격구를 개척하였다.
1934년 4월 제2군 독립사 제2퇀의 주력부대가 안도로 진군하여 처창즈를 점령하여 새로운 유격구를 만들었으며 7월에 제2퇀의 일부와 독립퇀은 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800여 명의 병력으로 안도현 북부의 요충지인 대전자를 포위 공격하였다. 연속 11주야나 일본군과 만주군을 포위하였고 치열한 접전 끝에 적을 대파하였다.21)
8월 상순 독립퇀이 구국군의 일부와 함께 따푸차이허를 공략하였다. 제2퇀도 같은 기간에 산림대22)와 연합하여 대사하진을 점령하였다.
1934년 4월부터 10월까지 항일부대는 일본군과 만주군을 103회 습격하여 3,537명을 살상하였다. 그 중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 독립사에서 적들을 습격한 전투는 53회로 1,350명을 살상하였고 항일의용군은 50회 전투를 통하여 2,187명을 살상하였다.23) 이로서 중국공산당이 이끄는 조선인민혁명군의 영향력이 높아졌고 안도, 돈화, 왕청, 영안, 동녕 등 접경지대의 유격구의 개척하여 제2군의 근거지를 확보하였으나 일제는 동북에서의 식민통치를 확고히 하면서 1935년 6월에 중국 본토를 침략하기 위한 교두보를 만들기 위하여 화북사변24)을 일으켰다.
다. 동북항일연군 설립과 활동 및 소련으로 퇴각(1936년 ~ 1940년 12월)
① 동북항일연군 제2군의 설립과 활동 그리고 소련으로 퇴각
화북사변으로 전 중국이 물 끓듯이 끓었다.
1935년 6월 3일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은 “동북의 책임자 동지들에게 보내는 비밀서한”(약칭“6.3지시서한”)을 통하여 동북 항일전쟁에서 유격운동을 확대하고 모든 항일무장역량을 연합하여 공동으로 항일할 것을 호소하였다. “동북의 당 조직은 전인민적인 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 보편적으로 여러 반일무장대오와 하층 민 상층간의 통일전선을 결성하고 모든 반일 무장역량과 단결하여 공동으로 항일해야 한다. 항일연군(또는 항일구국 동맹군) 총사령부와 같은 조직을 건립, 확대하고 공고히 하여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8월 1일 국제공산당 주재 중공대표단은 중공중앙과 종화소비에트 정부의 명의로 “항일구국을 위하여 전체 동포들에게 고하는 글”(“8.1선언”)을 통하여 전국 여려 인민들이 소비에트 항일정부와 동북 각지의 항일정부와 함께 전 중국의 통일된 국방정부를 조직하여 홍군과 동북인민혁명군과 여러 반일의용군과 함께 공동으로 중국의 통일된 항일연군을 조직하자고 호소하였다.
1936년 2월 5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의 정위 위증민은 반일연합군 제5군 군장 주보중을 만나 만주성위를 취소하고 남만, 동만, 길동, 송강 등 4개 성위 건립에 관한 국제공산당 주재 중공대표단의 “8.1선언”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이어서 액목으로 가서 해당지시를 왕덕태, 이학충 등에게 전달하였다.
1936년 2월 10일,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은 “8.1선언”에 근거하여 “동북항일연군 총사령부를 건립하기 위한 결의 초안”을 제기하였다. “초안”은 동북인민혁명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고칠 것을 요구하였다.
2월 20일, 국제공산당주재 중공대표단은 “동북항일연군 군대편제를 통일할 데 대한 선언”을 발표하였다. 선언에 따라 동북각지의 인민혁명군부대들은 중공당조직의 지시 하에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되었다.
3월 상순, 중공동만특위와 제2군 지도간부들이 안도 미혼진에서 회의를 열고 8.1선언과 동북항일연군 군대편제를 통일 선언에 따라 동북인민혁명군 제2군을 동북항일연군으로 개편하였다. 군장에 왕덕태, 정위에 위증민을 임명하고 산하에 3개 사와 교도퇀, 소년영을 두었다. 안봉학이 제1사 사장을 박득범이 제1사 참모장을 맡았다. 전군의 병력은 도합 2,000여 명이었다. 동만지역의 항일군들이 항일연군 제2군으로 재편성된 후 제2군 6사는 장백산지역으로 진격하여 장백, 무송, 몽강, 림강 등 현을 포함한 장백산 서쪽 기슭에 새로운 항일유격근거지를 창설하였다. 부대에서는 장백현 곰골과 홍두산에 세운 아지트를 중심으로 하여 장백, 무송 등지의 삼림 속에 30여 곳의 아지트를 세우고 병영, 연락소, 무기 수리소, 재봉소, 병원, 수군학교 등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대중 속에 조선족항일단체인 “조국광복회”를 설립하고 비밀리에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청년들 속에 생산 유격대를 설립하고 수시로 항일연군의 활동에 참여케 하였다. 이리하여 항일연군의 아지트와 아지트를 후방기지로 한 유격전쟁 그리고 일제통치지역내에 조직된 조선 대중들의 투쟁 이 삼자가 연합된 장백산유격근거지투쟁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36년 7월 상순, 중공남만특위는 제2차 대표 회의를 열어 동북인민혁명군 제1군을 동북항일연군 제1군으로 재편성하였다. 양정우가 군장 겸 정치위원 송철암이 정치부 주임 안광훈이 참모장을 맡았다. 산하에 교도퇀과 3개 사를 두었고 병력은 총 3,000여 명이었다.
남만당조직의 제2차 대표회의가 끝난 후 양정우와 위증민은 금천현 하리에서 동만, 남만 특위 및 제1, 2군의 주요간부들의 연석회의를 열었다. 회의는 동북항일연군 제1, 2군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으로 합병하고 총사령부를 건립하였다. 양정우가 제1로군 총사령을 맡고 왕덕태가 부총사령을 위증민이 정치부 주임을 맡았다. 제1로군 산하의 제1,2군에 도합 6개사를 두었다. 제1군의 3개 사의 번호는 그대로 이었으나 제2군의 3개 사는 제4,5,6군으로 바뀌었다.
1936년 2월부터 1937년 10월까지 만주의 동북인민혁명군이 동북항일련군 11군으로 재편성되었다. 각 군마다 조선족 군인들이 있었다.
동북항일연군은 밀영들을 거점으로 보천보전투, 곰골전투, 홍두산전투, 도천리전투 등 많은 전투에서 승리하여 일본군과 만주군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1938년 7월 제1로군이 3개 방면군으로 재편성되어 100여 명의 일본군을 죽인 홍기하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다.25)
1938년부터 일제는 동북지역에 병력을 대폭 증가하고 각 항일유격근거지에 대한 대규모 군사토벌을 강화함과 동시에 모조리 죽이고 약탈하고 불태우는 “삼광정책”과 마을과 유격근거지를 차단하기 위한 “집단부락” 정책을 실행하였다. 그 결과 설립될 때 2,000여명이었던 군인들이 1940년에 와서는 2,3백 명 밖에 남지 않았다. 1940년 11월부터 제1로군 제2방면군이 중소국경을 넘어 소련으로 들어갔다. 얼마 후 제3방면군 나머지 부대들도 소련경내로 들어갔다. 1940년 말부터 1941년 초까지 소련으로 들어간 항일연군은 700여 명이었는데 그 중에 조선인이 200여 명에 달하였다.26)
그리하여 1940년 12월 이후 동만, 북간도에는 민족주의 계열이거나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투쟁이 사라졌다. 만주는 중국본토 침략의 기지가 되었고 조선인들은 일제의 악랄한 수탈의 대상으로 지옥의 심연으로 떨어졌다.
1942년 7월 16일, 주보중과 이조린은 소련원동군과 협상하여 원동경내에 있는 항일연군부대를 “동북항일연군 교도려”로 재편성하였다. 조선인들은 남야영에 속하였다.
3. 후기 : 중국을 위한 항일투쟁이 과연 조선의 독립운동이 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쉽지가 않다.
아마도 냉전의 시대를 산 세대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에야 진정한 평가와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단군의 후손이면서 서로 다른 나라를 세워서 원수처럼 대립하고 사는 나라가 세워지는 것이 경신대학살에 죽어간 우리 조상들의 뜻이 아님이 분명하다.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를 치룬 무명의 독립군들은 또한 그러할 것이다.
글을 쓰면서 마음이 너무 아팠다.
한반도의 역사가 남북으로 분단될 줄 알았으면 선열들이 어떻게 행동하였을까를 생각하며 고뇌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독립운동을 하면서 중국과 소련에게 무시당하고 이용당하는 약소민족의 설움을 느꼈을 선열들의 절망과 분노도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길이 없기에 뛰어들어 충성심을 보여야 했던 선열들의 복잡한 심사와 억울한 죽음의 그림자가 오늘 우리에게까지 드리워져 있음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분노와 절망감 때문에 우울하여 지구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기분에 빠지기도 하였다. 식민지 침략전쟁의 시대는 끝났지만 국가와 민족 그리고 인간의 탐욕이 사라지지 않으므로 역사는 자칫 한 순간에 전쟁의 소용돌이, 살육과 약탈의 지옥 속에 들어갈 수가 있다는 뼈아픈 자각! 그럼에도불구하고 인간의 존엄과 살 권리를 말살하는 권력자들의 다툼과 전쟁을 막지 못하는 인간의 무능과 무력함에 두 손을 들 뿐이다.
북간도는 나에게 역사를 보는 눈을 뜨게 만들었다.
어디에 속하지도 않고 하나님, 생명, 평화, 작은 자의 자리에서 역사를 보는 관점을!
권력 장악을 목표로 하는 일들은 아무리 그럴 듯해도 부패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종교도, 교육도, 언론도, 민간인의 봉사활동조차도 권력 지향적이 되는 순간 갈라치기를 하면서 본질을 잃게 된다는 사실을!
자유시참변 이후 동만, 북간도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졌지만 분화되는 독립운동이 너무 복잡하다는 생각에 글 쓰기를 기피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갑자기 동만의 독립운동이 단순하고 명료하게 보여 졌다. 그래서 대강 윤곽만 그리는 글을 써보기로 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은 3쪽으로 간결하게 썼다. 그런데 사회주의 독립운동은 기원이 되는 1918년 이동휘의 한인사회당부터 언급을 해야 되어서 처음부터 길어졌다.
삼부를 공격하며 와해시키는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의 활동, 조선인들의 중공공산당 가입, 중공공산당 주도의 춘황투쟁과 추수투쟁 그리고 유격대와 인민혁명군, 항일연군에 이르기까지 중공공산당의 지시에 맹종하는 조선군을 바라보는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연길에서 나온 책은 중국공산당의 지도아래 이루어진 투쟁에 대하여 찬양 일색이고
한국에서 나온 독립운동에 관한 서적 중에 사회주의 계열의 항일투쟁을 자세하게 다룬 책이 많지 않아서 전투와 사건을 일일이 대조해보지 못하는 아쉬움이 크다.
전자사전도 마찬가지였다. 연길에서 나온 책의 기록에 관하여 다양한 자료를 대조하며 크로스 체크를 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 민족주의 계열의 독립운동 부분을 조금 더 보강해야겠다.
그리고 크로스 체크를 통해서 사회주의 계열의 독립운동을 정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하려면 일본 제국주의 만주 침략의 역사를 처음부터 다시 공부해야 하는데 …
이 땅에서 사는 날 동안 남은 시간을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의미 있고 자유로운 사람을 평화롭게 살련다.
어쨌든 작은 글이지만 중단하지 않고 끝까지 다 쓸 수 있도록 마음을 다듬어 주신 하나님께 깊은 감사를 드린다.
2023년 9월 9월 4일 월요일 축시
우담초라하니 쓰다
미 주
1) 길돈 – 길림과 돈화를 의미한다.
2) ML파 – 1920년 대 중반에 분열된 운동선의 통일을 위하여 혁명사, 레닌주의동맹, 고려공산청년회 만주총국, 서울파 신파, 일월회가 연합하여 만든 사회주의 단체. 대표 인물은 한빈, 양명, 김월성, 한명찬, 안광천 등이다.
3) 서울파–국내 자생적인 그룹으로 서울청년회라고 칭한다. 노동운동과 코민테른 지부 공산당을 만드는 것을 목표하고 화요파와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922년 9월에 노동대회 임시대회를 열어 김사국과 이향발을 간부로 선임. 10월에는 비밀회의를 열어 서울콤그룹을 결성. 김사국, 이영, 김영만, 임봉순, 이중각, 장채극, 김유인 등은 “종래 상해파의 무원칙한 지도를 거부”하기로 결의하였으며 1848년 카를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작성한 “공산당 선언”이 자기 당의 강령이며 자기들은 코민테른의 직접적이고 확고한 지도로 전진하는 것을 자신의 임무로 삼는다고 선언하였다. 그들은 민족통일전선 결성과 노동자 농민의 헤게모니 장악을 주장했다.
*상해파는 1918년 이동휘가 하바롭스크에서 결성한 한인사회당을 모체로 하여 1919년 상해에서 조직한 정당이다. 대표적인 인물에는 이동휘, 박진순, 이한영, 김립, 김철수, 윤자영이 있다. 상해파에서 이탈한 김만겸, 여운형, 안병찬, 박헌영은 이르쿠츠크파 상해지부를 결성한다.
4) 화요파 – 1924년 11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일본 유학생이었던 김찬, 김재봉, 윤덕병, 조봉암, 박헌영, 임원근, 조동호가 주축이 되어 “신사상연구회”로 출발하였으나 화요회로 바꾸었다. 화요회는 카를 마르크스의 생일이 화요일이라는 데서 유래하였다.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의 결합으로 결성되었으며 조선공산당 창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926년에 해체되었다.
5) 감조감식투쟁 : 세금과 소작세 인하를 위한 투쟁.
6) 5.30참안 : 영국 경찰이 상하이에서 중국인 시위대에 발포하여 13명이 죽은 것이 사건의 발단이 되었다. 이는 유례가 없었던 대규모의 반외세 시위였으며, 이 시위에는 중국 각지의 모든 계층이 참여하였다.
7) 길돈폭동 : 길돈은 연길과 돈화에서 한 자씩 떼어서 만든 말로 연변지역을 의미한다.
8) 여러 민족 : 당시 만주에는 조선인, 만주인, 한족이 살고 있었는데 조선인 인구가 가장 많았다.
9) 중공연화중심현위 : 중공 만주성위가 연길과 화룡현를 하나로 묶어서 만들어 동만에 건립한 현 단위의 공산당 조직.
10) 9.18사변 : 국민당의 국권회복운동과 세계경제공항과 소련의 제1차 5개년계획의 성공 등의 상황으로 만주에서 위기감을 느낀 관동군 중심의 일본 군국주의자들은 동북침략을 위해 나카무라대위사건, 만보산사건을 일으켰다. 그러나 사건들이 침략의 구실이 되지 못하자 관동군 지도부가 9월 18일에 자작극을 벌여 침략의 기회를 만든 사건이다. 관동군 작전 주임참모 이시하라 간지, 관동군 고급참모인 이타가키 세이시로, 관동군 사령관 혼조 시게루는 18일 밤 유조호의 만철 선로를 스스로 폭파하고 이를 중국 동북군 장학량의 공격으로 발표하였다. 그리고 만주를 점령하기 위한 전쟁을 시작하였다.
11) 삼광정책 : 다 불 태우고 다 죽이고 다 약탈하는 일본 식민지 토벌정책.
12) 동만주 : 연변지구, 북간도에 해당하며 당시 연길현, 화룡현, 왕청현, 훈춘현, 안도현으로 나뉘어 있었다.
13) 툰 : 마을 아래 단위를 말한다. 예를 들면 백구면 삼정리에는 1구, 2구, 3구가 있었는데
중국에서 툰은 바로 마을의 가장 작은 단위인 “구”를 의미한다.
14) 차량(借糧)”투쟁 : 양곡을 빌리는 투쟁.
15) 공청단 : 공산청년단.
16)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선족사 상⌟, 263쪽, 연변인민출판사, 2010년
17) 소비에트 : 노동자, 농민, 병사의 대표자로 구성되는 평의회
18)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선족사 상⌟, 276쪽, 연변인민출판사, 2010년
19) 민생단사건 : 동만지역에서 중국 공산당이 친일단체인 민생단과 관련된 혐의로 조선인공산당원을 숙청하는 과정에서 무고한 조선인들을 체포, 살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1,000여 명이 체포되었고 500명 이상이 살해를 당하였으며 2,000명에 달하는 조선인이 희생되었다. 1932년 11월에 시작하여 1936년 2월까지 계속된 중국공산당의 조선인사냥이었다. 반민생단사건이라고 칭하기도 한다.
20) 구국군 : 중국 군벌 출신의 군인들로 편성된 군대로서 만주 독립을 위해 일제와 싸웠다.
21) 대전자전투 : 사실 확인이 필요하다. 동북혁명군이 치른 대전자전투는 1934년 7월에 있었다. 지청천과 신숙의 한국독립군이 중국의 구국군, 호로군과 연합하여 싸운 대전자전투는 1933년 6월에 있었다. 동북인민혁명군이 항일의용군과 연합하여 싸웠다고 하는데 한국독립군은 그때 이미 관내로 이동하였다. 조선혁명군은 34년 7월 10일 전향수부대가 동북인민혁명군 제1사 특무대와 함께 흥경현 경찰서를 습격하였고 그 뒤 조선혁명군사령부 호위대가 제2사와 함께 통화현 쾌다무자에서 일본군, 만주군과 함께 접전을 하였을 뿐이다.
* 참고문헌 : 조문기, 정무 저,⌜항일명장 량세봉⌟,261쪽, 민족출판사, 2009년
22) 산림대 : 처음에는 산적이나 마적 집단이었으나 9.18사변으로 만주국이 세워지자 일본에 저항하는 항일부대로 전환하였다.
23)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선족사 상⌟, 298쪽, 연변인민출판사, 2010년
24) 화북사변: 1935년 6월 9일, 국민당북평군분회 위원장 대리 하웅흠은 중국주둔 일본군 사령과 우메쯔 우쯔끼오사로와 “하매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에 따라 중국정부는 화북을 일본에게 양보하고 일본이 하북성과 북경, 천진 두 개 시의 대부분의 권리를 장악하게 되었다. 그 후 일본은 화북 5개성을 중국에서 빼앗고자 “자치”를 실시하려고 획책하였다. 이를 화북사변이라고 한다.
25) 김춘선 주필, ⌜중국조선족사료전집 사진자료집 2 항일전쟁편⌟,210쪽, 연변인민출판사, 2017
26) 연변조선족사 집필소조 편, ⌜연변조선족사 상⌟, 376쪽, 연변인민출판사, 2010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