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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21일 부활절 넷째 주일 예배를 드리겠습니다.
찬송 38장입니다.
사도신경으로 신앙고백을 하겠습니다.
찬송 18장입니다.
광고, 헌금, 기도입니다.
성경 계13:1-10절(신412)입니다.
성가대 찬양입니다.
제목: 짐승으로 상징되는 국가(정치)
성도 여러분, 요한은 우리의 하늘 이야기, 즉 영적 전쟁의 관점에서 우리의 이야기를 13장에서도 계속 이어 갑니다. “여자에게 분노하여 돌아가서 그 여자의 후손의 남은 자손 곧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들과 더불어 싸우려고 바다 모래 위에 서 있는 용”(12:17)이 그의 심복들인 바다로부터 한 짐승(13:1)과 또 땅으로부터 다른 짐승(13:11)을 불러냅니다. 땅의 짐승은 용과 바다의 짐승을 위해 선전하는 부패한 종교나 언론을 상징합니다. 바다의 짐승은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를 받은’(7) 국가들이나 권력자들을 상징합니다.
오늘 본문(1-10)에서 짐승으로 상징하는 국가는 롬13:1-5절의 긍정적인 국가 모습과 아주 대조적이기에 오늘 본문을 롬13:1-5절과 비교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런데, 롬13:1-5절과 본문을 살펴보기 전에 오늘 본문의 결론적 권면에서의 9절을 살펴보기 원합니다.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 여기서 요한은 일곱 교회의 편지 결말과 같은 방식으로 권면합니다(2:11). 이것은 들을 귀가 있는 자는 들을 것이지만 없는 자는 알지 못한다는 것을 전제합니다. 그러므로 ‘들을지어다’(9)는 국가의 권세(정치), 특히 악한 국가의 권세에 대하여 ‘깨달으라’는 명령입니다.
롬13:1-5절입니다.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 ... 그(다스리는 자)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진노 때문에 할 것이 아니라 양심을 따라 할 것이라.”
바울은 기독교에 대해 우호적이 아닌 로마의 권세가 마귀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에게서 나온 것으로 인정합니다(1, 잠8:15, 16, 단4:25, 막12:17). 하나님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딤전2:2) 국가들의 권세를 정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권세들은 영원한 것이 아니라 만물이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새롭게 될 때까지(21:1-5) 잠정(임시)적으로 존재하는 것들입니다. 그때는 칼(강제력)에 의존하는 국가들은 없어지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노아 언약의 목적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국가의 권세자들은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에게 선을 베풀며,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그들의 권세를 공의롭게 사용해야 합니다(2-4). “그러므로, 즉 이것을 인정한다면, 복종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5)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국가 정치에 대하여 긍정적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역자로서 국가(롬13:1-5)와 대조적인 오늘 본문(1-10)에서의 짐승으로 상징되는 국가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1) 본문에서 짐승이 상징하는 국가의 모습입니다(1-4).
1-2절입니다. “내가 보니, 바다에서 한 짐승이 나오는데 뿔이 열이요, 머리가 일곱이라. 그 뿔에는 열 왕관이 있고 그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더라. 내가 본 짐승은 표범과 비슷하고 그 발은 곰의 발 같고 그 입은 사자의 입 같은데, 용이 자기의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 여기서 ‘바다’(1)는 성경에서 혼돈과 영적인 어두움의 영역입니다.
하나님에 의해서 국가의 권세를 받았음(롬13:1)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모습은 용의 모습(12:3)과 비슷합니다. 짐승은 용처럼 열 뿔과 일곱 머리를 가졌고, 용의 머리에 일곱 왕관이 있는 것과 같이 짐승의 뿔에 열 왕관이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사역자(롬13:2)임에도 불구하고 짐승의 머리들에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이 있습니다.
짐승은 표범과 곰과 사자를 합쳐 놓은 것 같은 무섭고 위협적인 괴물의 모습이며(2), ‘용이 자기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그에게 주었더라’(2)는 창조적 능력이 없는 용이 하나님이 국가에 주신 권세와 그의 사역자의 역할을 타락시키는 그의 능력과 권위와 권세를 짐승에게 주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짐승이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모방하는 이적을 행하였습니다(3a). “그의 머리 하나가 상하여 죽게 된 것 같더니 그 죽게 되었던 상처가 나으매.” 이것에 대한 많은 해석이 있지만, 무엇을 가리키는지 분명하지 않습니다. 분명한 것은 짐승에게 일어났던 기이한 일(이적)은 어린 양의 죽음과 부활을 모방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결정적 차이는 어린 양의 부활은 영원한 부활이지만, 짐승의 이적적 치유는 일시적인 것으로 결국 영원한 죽음의 심판을 받는다는 것입니다(19:20).
그 이적의 결과는 3b-4절입니다. “온 땅이 놀랍게 여겨 짐승을 따르고, 용이 짐승에게 권세를 주므로 용에게 경배하며 짐승에게 경배하여 이르되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 하더라.”
짐승(국가)의 이적(능력)을 본 온 세상이 짐승을 따르면서 용과 짐승을 경배하게 됩니다. 이것은 용이 짐승에게 그의 권세를 주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짐승을 하나님처럼 대적할 자가 없고 전능하다고 여겨 ‘누가 이 짐승과 같으냐? 누가 능히 이와 더불어 싸우리요?’라고 말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처럼 국가의 신격화 배경에는 반드시 용의 권세와 이적적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2) 본문에서 짐승이 상징하는 국가의 활동입니다(5-8).
5-7절입니다. “또 짐승이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고 또 마흔두 달 동안 일할 권세를 받으니라.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더라.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여기서 ‘받고(받으니, 받아)’라고 번역된 동사들은 다 부정과거 수동태로서 ‘주어졌다’라는 의미입니다. 표면적으로는 용이 짐승에게 능력과 보좌와 큰 권세를 주었으나(2), 실제적으로는 하나님이 그것을 허용한 것입니다(롬13:1). 짐승에게 주어진 일할 권세가 ‘마흔두 달’로 제한되고, 특히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주어진 것(6)은 하나님의 허락 없이는 있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욥1-2장).
여기서 ‘과장되는 말’(5)은 자신을 높이는 교만한 말을 의미하며,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5)은 하나님에게 불경스럽고 치욕스러운 말을 의미하는데, 1절에서 짐승의 머리들에 있는 신성모독 하는 이름들과 일치합니다.
‘과장되고 신성모독을 말하는 입을 받은 짐승’(5a)은 ‘짐승이 입을 벌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6)합니다.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되’(6)는 더 구체적으로 ‘그의 이름과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망하더라’(6)입니다. 여기서 ‘그의 장막 곧 하늘에 사는 자들을 비방하는 것’(6)도 하나님을 향하여 비방하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과 ‘하늘에 거하는 자(성도)들’은 언약적으로 연합되었기 때문입니다.
7절입니다. “또 권세를 받아 성도들과 싸워 이기게 되고, 각 족속과 백성과 방언과 나라를 다스리는 권세를 받으니.” 이것도 ‘마흔두 달 동안 일한 권세를 받은 짐승’(5b)이 하는 일들입니다. 그런데 짐승에게 성도들과 싸워 이기는 것이 주어졌고(신적 수동태), 온 세상을 다스리는 권세가 주어졌다(신적 수동태)고 설명하면서, 짐승의 활동이 하나님의 절대적 통제 아래에 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제 그 결과인 8절입니다.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하고, 이 땅에 사는 자들은 다 그 짐승에게 경배하리라.” 여기서 ‘경배하리라’는 앞절의 ‘주어졌다(부정과거)’의 결과이기에 미래 시제입니다.
‘그 짐승을 경배하는 이 땅에 사는 자들’은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지 못한’ 자들입니다. 여기서 ‘죽임을 당한 어린 양의 생명책’은 어린양의 죽음을 통하여 구속받은 자들의 이름이 기록된 책입니다(3:5, 17:8, 20:12, 21:27). 그리고 ‘기록되어’는 완료수동태로서 이것은 오직 창조(율법) 언약을 그의 죽음으로 이루신 어린 양에 근거하기에 그 기록이 영원하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어린 양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즉 어린 양의 생명책에 창세 이후로 이름이 기록되었다고 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창세 전에 세우신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언약(협정, 경륜)’ 때문입니다. 구속 언약은 삼위 하나님이 창조(율법) 언약을 이루신 어린 양의 공로로 죄인을 은혜(믿음)로 구원하시기로 정하신 언약적인 동의(협정)입니다. 이 구속 언약에 근거하여 구약에서의 모든 성도(예를 들면, 아브라함)는 창조(율법) 언약을 이루신 어린 양의 죽음에 근거해서 은혜(믿음)로 구원을 받았고, 신약의 모든 성도도 동일한 방법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성도 여러분, 어린 양의 생명책에 우리 이름이 기록되었다면, 우리 구원은 절대 확실함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3) 오늘 본문과 설교의 결론적인 권면입니다(9-10).
성도 여러분, 역사상에 존재한 국가들은 롬13:1-5절의 국가의 긍정적인 역할과 오늘 본문의 짐승으로 상징되는 국가인 양극단 사이 안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도 이 양극단 사이에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국가들에 대하여 어떻게 할까요?
첫째로 국가들에 대하여 “누구든지 귀가 있거든 들을지어다”(9)입니다. 이것은 본문의 1-8절(롬13:1-5)과 10절에도 해당합니다.
우리는 성도로서 이 말씀들에 근거하여 선지자적 비판 정신을 가지고 국가들에 대하여 ‘들어(판단)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국가 권력(정치)을 지나치게 부정적으로 판단하는 것에 조심하여야 합니다.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는 무정부 상태보다 조금 악한 정부라도 있는 것이 질서 유지에 더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 권력(정치)이 더욱 짐승으로 상징되는 국가로 변해갈 수 있는 위험들을 미리 판단하여 바르게 정치(선거 등)에 참여하여야 하며, 특히 국가를 위해서 더욱 기도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국가 권력(정치)이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그의 사역자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권위(또는 어떤 영적 존재)로서 그 기능을 수행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을 하여야 합니다. 전자에서 후자로 옮겨갈 때마다 국가 권력은 용의 대행자인 짐승(독재 권력)이 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조금 더 설명하겠습니다. 미국을 포함하여 대부분 현대국가는 ‘정교분리의 원칙’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도 ‘국교는 인정되지 아니하며, 종교와 정치는 분리된다’(헌법 제20조 2항)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교분리의 원칙은 국가와 종교의 엄격한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국가가 종교적 중립성을 유지하여 모든 종교와 심지어 무종교자에게까지 공평하게 대하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의 정치적 중립성을 요구하는 원칙입니다. (그러나 종교의 정치적 중립성을 지나치게 엄격하게 해석하여 이를 종교인의 모든 정치적 발언과 행위를 포괄적으로 금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는 없다.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누구든지 민주적 의사결정과정에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기회가 부여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정교분리의 원칙은 종교의 자유를 보장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회질서의 파괴를 방지하기 위해서 도입된 원칙입니다. 특히 미국과 같이 다양한 인종과 종교의 사회와 우리나라와 같이 다양한 종교가 있는 사회에서는 정교분리의 원칙이 사회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 더욱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11월 5일은 거짓말쟁이들에게 심판의 날이 될 것이다.” 이것은 정치를 종교화하여 미국 복음주의 교회의 지지를 받는 미국 대통령 후보인 트럼프가 지난 2월에 대선 유세 중에 한 말입니다. 자신이 올해 미국 대선에서 이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며, 그래야 2020년 대선의 부정선거를 믿지 않은 반대파를 응징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트럼프는 하나님의 권위 아래에서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권위를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의 지지자들은 그를 ‘메시아’로 여길 정도로 맹목적으로 추종합니다. 그 결과로 미국 사회에 극단적인 대립으로 민주주의가 위협을 받고 평화가 깨지며 심지어 무질서와 폭력을 가져왔습니다. 이런 현상은 현재 인디아, 튀르키예(터키), 그리고 이란과 전쟁하고 있는 이스라엘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선지자적 비판 정신을 가지고 국가들에 대하여 바르게 판단하시며 국가를 위해 기도하시기 바랍니다. 딤2:2절입니다. “임금들과 높은 지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하라. 이는 우리가 모든 경건과 단정함으로 고요하고 평안한 생활을 하려 함이라.” 성도 여러분, 우리의 기도가 가장 강력한 정치의 참여입니다.
둘째로 짐승이 상징하는 국가에 대하여 비폭력 불복종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이는 “이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베드로) 칼을 도로 칼집에 꽂으라 칼을 가지는 자는 다 칼로 망하느니라”(마26:52)라는 말씀과 “베드로와 사도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사람보다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행5:29)라는 말씀 때문입니다.
그래서 비폭력의 10a절입니다. “사로잡힐 자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을 자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니.” 이것은 짐승에 의하여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지만 실제로는 이것이 하나님의 예정 또는 작정에 의한다는 말씀입니다. 만일 누구든지 사로잡힐 자로 하나님에 의하여 작정 되었다면, 그는 사로잡혀 갈 것이요, 칼에 죽기로 작정 되었다면, 그는 마땅히 칼에 죽을 것이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의 정하신 뜻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마10:29절입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이것(10a)이 참새에게도 해당한다면, 이것은 하나님 아들인 우리에게 너무나 확실한 진리입니다. 그런데 성도 여러분, 우리 주위에 우리나라가 공산화가 될 것을 극히 두려워하는 교회나 성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북한에서 성도들은 누구일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예정하신 뜻에 따라 짐승의 시기가 온다면, 비폭력 불복종의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셋째로 국가(정치)에 대하여 종말론적으로 상대화하여야 합니다.
10b절입니다. “성도들의 인내와 믿음이 여기 있느니라.” 여기서 ‘성도들의 인내’는 폭력에 대해 폭력으로 대항하지 않고 포로 됨과 칼로 죽임당함을 하나님이 정한 것으로 알고 단순히 참고 견디는 것이 아니라, 소망을 갖고 참고 견디는 것입니다. 즉 ‘소망의 인내’입니다(살전1:3, 롬5:3-4).
여기서 소망은 무슨 소망일까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살전1:3)입니다. 그의 죽음과 부활(승천)을 통하여 ‘땅의 임금들의 머리’(1:5) 또는 ‘만왕의 왕이요 만주의 주’(19:16)가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심으로 “세상 나라가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어 그가 세세토록 왕 노릇 하시라”(11:15)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것입니다.
비록 ‘주권 재민’(헌법 제1조)의 민주주의 국가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는 주기도문을 통해서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며,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라고 ‘하나님의 영원한 주권’을 고백합니다. 이것이 복음의 약속(새 언약)입니다. 우리는 이 복음의 약속을 소망하며 믿은 것입니다. 우리의 소망과 믿음의 내용은 동일하게 하나님 나라의 복음입니다. (이처럼 복음은 정치적입니다. 칼 바르트는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정치적이라고 해석합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와는 달리 국가의 권세는 영원하지 않고 잠정(임시)적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의 백성인 우리는 우리 국가나 어떤 정치적 집단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습니다. 국가나 어떤 정치의 이데올로기(자본주의나 사회주의의 사상 등)나 목적을 우리의 이상이나 목적으로 삼아서도 안 됩니다. 이것은 종교가 정치화할 때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우리는 나그네로 머물다가 갈 이 세상에서 우리 국가에 대한 애국심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보다 우리의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며 헌신하며 살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마6:33)는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절대 순종하여야 할 것입니다.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마라나타)”(22:20).
찬송 187장을 부르신 후에 다같이 기도하며 축도로 예배를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