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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복(自服)과 회개(悔改)에 대하여
1. 자복(自服)과 회개(悔改)의 구분
그리스도인치고 ‘회개’(悔改)의 중요성을 언급 않는 사람이 없습니다. 하지만 그 ‘회개’(悔改)가 삶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것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회개’(悔改)를 잘못 인식하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보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그것은 ‘회개’(悔改)와 ‘자복(自服)’을 혼동하기 때문에 더욱 그렇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회개’(悔改)와 ‘자복(自服)’에 대한 바른 이해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1) ‘자복(自服)’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자복(自服)하다’를 헬라어로 ‘엑소몰로게오’라고 합니다. ‘엑소몰로게오’라는 말은 세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이들 세 가지 의미가 가지고 있는 공통점은 입으로, 말로 고백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 자복(自服)하다(엑소몰로게오)의 세 가지 의미
‘자복(自服)하다’의 첫 번째 의미는 '고백하다'입니다.
즉 자신의 잘못을 입으로, 말로 고백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복(自服)하다’의 두 번째 의미는 '동의하다'입니다.
즉 다른 이가 지적한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복(自服)하다’의 세 번째 의미는 '약속하다'입니다.
앞으로는 바르게 살겠다고 약속하는 것을 말합니다.
2) ‘회개(悔改)’ 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 ‘회개(悔改)하다’로 번역된 헬라어 ‘메타노에오’는 두 가지의 의미
① 180도 돌아서거나 길을 바꾸는 것을 말합니다.
② 움켜쥐고 있던 것을 놓아버리는 것을 말합니다.
‘자복(自服)’이 말로 되는 것이라면 ‘회개’(悔改)는 말이 아니라 철저한 행동(行動)으로 이루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말로 하는 ‘자복(自服)’자체가 결코 ‘회개’(悔改)일 수는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알아야 하고 명심해야만 합니다.
‘자복(自服)’이 행동으로 드러나는 것이 바로 ‘회개’(悔改)이기 때문입니다. ‘자복(自服)’은 시작점입니다. ‘자복(自服)’은 점과 같다고 할 것입니다. 점으로 시작한 ‘자복(自服)’으로 인하여 ‘변화’라고 하는 선이 생기는 것입니다. 즉 지속적인 ‘자복(自服)’의 삶으로 드러나는 것이 ‘회개’(悔改)라는 말입니다.
3) ‘회개(悔改)’의 중요성은 무엇입니까?
마태복음 3:1~3절 “그때에 세례 요한이 이르러 유대 광야에서 전파하여 말하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였으니” 마태복음 4:17절 “이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주 예수님의 길을 예비하던 세례 요한이 외친 메시지의 핵심이 바로 “회개(悔改)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땅에 오신 주 예수님의 공생애의 시작을 알리는 첫 메시지도 역시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라고 선포하신 "회개(悔改)"복음이었습니다.
아무리 천국이 임해도 죄와 사망의 길로 치닫던 인간이 천국을 향해 돌아서는 "회개(悔改)" 없이는 천국을 얻을 수 없습니다. 회개는 하나님나라의 전제조건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생활의 출발은 주님을 향해서 하나님의 나라를 향해 돌아서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4) ‘회개(悔改)’하지 않을 경우는 어떻게 됩니까?
① 하나님의 심판을 면치 못할 것입니다.
마태복음 11:20~24절 "예수님께서 권능을 가장 많이 베푸신 고을들이 회개치 아니하므로 그때에 책망하시되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세다야 너희에게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 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② 반드시 망할 것입니다.
누가복음 13:1~5절 “그때 마침 두어 사람이 와서 빌라도가 어떤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저희의 제물에 섞은 일로 예수님께 고하니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 받음으로써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치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③ 주님께서 촛대를 옮기실 것입니다.
요한계시록 2:4~5절 “그러나 너를 책망할 것이 있나니 너의 처음 사랑을 버렸느니라 그러므로 어디서 떨어진 것을 생각하고 회개하여 처음 행위를 가지라 만일 그리하지 아니하고 회개치 아니하면 내가 네게 임하여 촛대를 그 자리에서 옮기리라.”
주님의 사랑을 받는 것과 주님의 신뢰를 받는 것은 다른 의미의 말입니다. 부모가 모든 자식을 사랑하나 모든 자식을 신뢰하는 것이 아니듯이 하나님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을 사랑하십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신뢰하시는 사람은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신뢰받는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확실히 돌아서서 더 이상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는 ‘회개’(悔改)의 사람들인 것입니다.
사도행전 3:19절 “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새롭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성령님과 동행하는 삶을 위해서도, 즉 성령님으로 충만한 것들을 공급받고 살기 위해서도, 또한 영육 간에 새로워진 삶을 위해서는 반드시 ‘회개’(悔改)가 필요합니다.
여기서 ‘새롭게 되는’ 이라는 말, 즉 '새로워짐'으로 번역된 헬라어 ‘아나프쉬크시스’는 '시원함'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회개’(悔改)하여 우리의 몸과 마음을 짓누르던 죄의 중압감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에 시원해진 것입니다.
‘회개’(悔改)하지 않으면 주님께 신뢰받는 종으로 쓰임 받을 수 없고, 죄의 중압감에서 벗어나 영육 간에 시원한 삶을 살 수가 없습니다. ‘회개’(悔改)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를 얻거나 누릴 수도 없습니다. 마침내는 하나님의 심판에 의해 영원히 멸망할 따름이라는 사실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시면서 첫 명령이 ‘회개(悔改)하라’ 즉 ‘돌아서라’ 고 외치신 것입니다. 성도의 삶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주님께로 돌아서는 것입니다. 돌아서는 것으로부터 믿음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5) 세례 요한은 회개를 촉구했습니다.
주님이 원하시는 ‘회개’(悔改)는 단순한 입과 말의 ‘자복(自服)’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삶과 행동을 통하여 ‘회개’(悔改)에 합당한 열매를 맺을 것을 세례 요한은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촉구하고 있습니다. ‘회개’(悔改)는 반드시 행동으로, 삶으로 드러나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7~9절 “요한이 세례 받으러 나오는 무리에게 이르되 독사의 자식들아 누가 너희를 가르쳐 장차 올 진노를 피하라 하느냐 그러므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속으로 아브라함이 우리 조상이라 말하지 말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이 능히 이 돌들로도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게 하시리라.”
6) 구체적으로 회개를 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① 경제력 있는 사람의 회개는 자신의 여유분을 가난한 사람과 나누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10~11절 “무리가 물어 가로되 그러하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대답하여 가로되 옷 두 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할 것이니라 하고”
② 자신의 자리를 이용하여 치부하던 공직자의 회개는 공평무사하게 법을 집행하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12~13절 “세리들도 세례를 받고자 하여 와서 가로되 선생이여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정한 세외에는 늑징치 말라 하고”
③ 권력자의 회개는 더 이상 권력을 치부의 수단으로 삼지 않고 하나님으로부터 위임 받은 권력의 선한 청지기로 사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3:14절 “군병들도 물어 가로되 우리는 무엇을 하리이까 하매 가로되 사람에게 강포하지 말며 무소하지 말고 받는 요를 족한 줄로 알라 하니라.”
세례 요한은 ‘회개’(悔改)에 합당한 열매를 요구하는 설교를 했지만 사람들은 ‘자복(自服)’만을 하였을 뿐입니다. 진정한 ‘회개’(悔改)로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질책과 명령만으로는 ‘회개’(悔改)를 이끌어낼 수 없음을 증명한 것입니다.
우리가 예배에서 찔림을 받고 ‘자복(自服)’하여도 예배당 밖에서 ‘회개’(悔改)의 삶으로 이어지지 않음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입니다. 반드시 삶이 바뀌는 ‘회개’(悔改)가 되어져야만 합니다.
2. 자범죄의 회개에 대하여
예레미야 3:13절 “주 너의 하나님을 거슬러 범죄 한 것과 모든 푸른 나무 아래서 타국인들에게로 네 길을 흩어 버린 것과 너희가 내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던 네 죄악을 인정하기만 하라. 주가 말하노라” [한글킹]
자범죄에 대한 ‘회개’(悔改)는 저질러진 죄에 대한 자백이라고 하는 것이 타당할 것입니다. 대부분 이에 대해서 ‘회개’(悔改)라는 용어를 사용하지만 죄에 대한 책망에서의 ‘회개’(悔改)와 자범죄에서의 ‘회개’(悔改)는 그 차원이 다릅니다.
자범죄의 ‘회개’(悔改)는 죄의 고백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본문에서 하나님께서는 “범죄 한 것과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던 그 죄악을 인정하기만 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께 범죄를 하였다는 것은 계명을 어긴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하지 않았던 그 죄를 인정하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자들에게는 심각함이 있다는 것을 가르치는 대목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순종하지 않았던 죄악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자범죄의 ‘회개’(悔改)는 여기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을 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요한복음 10:27절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저희를 알며 저희는 나를 따르느니라.”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상태에서의 ‘회개’(悔改)는 의미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 자신에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가를 모르면, 하나님의 음성에 복종을 했는지의 여부는 더더욱 알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곤혹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자백을 요구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모르시기 때문이 아니라 자백을 통하여 진솔함을 보시고 경각심을 주시기 위함입니다.
여기서 자백(自白)은 하나님 앞에서 ‘입술로 죄를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잠언 28:13절 “자기 죄들을 숨기는 자는 번성하지 못할 것이나, 죄들을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누구나 자비를 얻으리라” [한글킹]
본문은 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하지 못하고 죄를 자백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죄에 대한 잘못된 것은 참으로 거북스러운 대목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죄에 대한 고백은 영혼의 짐을 덜어주며 하나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을 수 있기 때문에 득이 되는 것입니다.
1907년 평양 대 부흥이 일어 날 수 있었던 것은 장로 한 사람이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자백한 것을 기화로 민족복음화가 시작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회개’(悔改)에 있어서 죄에 대한 고백은 죄를 단절시키는데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함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자범죄의 ‘회개’(悔改)는 이미 저질러진 죄에 대한 고백으로 간단히 마무리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반복되는 자범죄의 구조를 보면 마음속의 생각에서 죄가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모든 죄 된 생각은 욕심이나 탐욕, 정욕으로부터 시작되고 거기에 생각이 거듭되면 생각 속에 감정의 교차가 이루어지며 마른침을 삼키게 됩니다.
그러면서 자기가 원하는 스릴을 느끼고 흥분을 맛봅니다. 그리고는 행동으로 옮겨지는 것입니다. 결국, 자범죄에 대한 ‘회개’(悔改)의 핵심은 생각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생각에 경계를 세워 차단시키지 아니하면 자범죄의 ‘회개’(悔改)는 결코 이루어질 수가 없습니다.
이러한 말초적인 죄악의 구조가 모세혈관까지 침투되어 있다는 것은, 자기중심적 사고가 뿌리를 내릴 때까지 내리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때문에 자범죄의 ‘회개’(悔改)는 생각의 차단을 넘어서 자기중심적 사고를 하나님 중심으로 바꾸지 않으면 이루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영적 전쟁의 실체를 알아야 할 수 있는 일입니다. 사탄의 공격이 생각을 통해서 시작된다는 것과 우리의 싸움이 혈과 육의 싸움이 아니라는 것, 사탄의 견고한 진이 우리 생각 속의 진이라는 것 등 영적 싸움의 실체를 이해할 때 가능하다는 것이 우리를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6:12절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게 대함이라.” 지금 대부분의 교회에서는 귀신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고 영적 전쟁에 대해서 가르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55:7절 “악인은 자기의 길을 불의한 사람은 자기 생각들을 버리고 주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주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넘치게 용서하실 것임이라” [한글킹]
본문에서 이사야는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돌아오라.”고 말합니다. 마음 가운데 죽이고 싶은 마음, 도둑질, 간음, 각종 죄 된 마음들이 있으면서 다만 죄의 대가가 두려워 행위로 나타나지 아니한 경우는 이미 죄를 범한 자들인 것입니다. 어느 순간에 행동으로 옮겨질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 생각을 버려야 되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5:28절 “마음속에 음욕을 품고 여자를 바라보는 자는 이미 간음을 하였다.” 는 주님의 말씀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마음으로라도 죄를 범하면 안 된다는 것이 인식되어야 할 것입니다. 생각에 경계를 세우지 않으면 자범죄의 ‘회개’(悔改)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자범죄에 대한 질긴 유혹에 따른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그 내면적 과정을 설명합니다. 생각의 경계를 세우고 유혹을 벗어나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즉 우리 안에서 주님이 일하실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설파하고 있는 것입니다(로마서 7:7~25참조).
▶ 자범죄의 회개의 과정
자범죄의 ‘회개’(悔改)는 우리의 의지로 가능한 것입니까? 다윗의 자범죄에 대한 ‘회개’(悔改)의 과정을 보면 자범죄의 ‘회개’(悔改)도 우리의 의지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간음하고 자기의 범죄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 그 남편 우리아를 치열한 전투의 선봉에 내세워 그를 죽게 하여 그 아내를 취할 때, 하나님은 다윗의 모든 행동을 지켜보십니다. 그리고 그것을 불쾌하게 생각하시고 나단 선지자를 보내십니다.
사무엘하 11:27절 “그 장사를 마치매 다윗이 보내어 저를 궁으로 데려 오니 저가 그 처가 되어 아들을 낳으니라 다윗의 소위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하였더라.” 사무엘하 12:1절 “여호와께서 나단을 다윗에게 보내시니 와서 저에게 이르되 한 성에 두 사람이 있는데 하나는 부하고 하나는 가난하니”
하나님께서 나단 선지자를 보냈을 때에는 이미 밧세바가 아이를 낳은 후였습니다. 밧세바가 아이를 낳았다는 것은 다윗이 그 일을 은밀히 처리하고 ‘회개’(悔改)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사무엘하 12:12절 “너는 은밀히 행하였으나 나는 이스라엘 무리 앞 백주에 이 일을 행하리라 하셨나이다.”
만약, 다윗이 ‘회개’(悔改)를 하였다면 하나님께서는 나단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을 것입니다. 성경학자들은 나단이 다윗을 찾았을 때가 죄를 범하고 1년이 넘은 후였다고 말합니다.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온 시점이 밧세바가 다윗의 아이를 낳은 후였기 때문입니다.
그동안 다윗이 ‘회개’(悔改)를 하지 않았다는 것으로 보아 자범죄의 ‘회개’(悔改)도 성령님의 조명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원죄뿐만 아니라 자범죄의 ‘회개’(悔改)역시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주님께 영광~!!
첫댓글 아멘아멘
할럴루야
귀한말씀생명의말씀 감사드립니다
온전한 회개가 의루어 지길 기도합니다
주님께 영광 ~♡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