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정상량문梅渠亭上樑文
한 구역 내와 산은
일찍이 석인(碩人) 고반(考槃)의 땅이고,
몇 칸의 집은
곧 어진 아들이 어른을 이어 지은 당일세.
어찌 다만 살던 곳만 황폐하지 않으랴?
길이 갱장(羹墻)의 사모를 깃들이네.
가만히 생각하건대 매거(梅渠) 정공(鄭公)은
고가의 아름다운 후예이고,
말세의 은거하는 선비였네.
멀리 설학(雪壑) 경재(敬齋) 십대(十代)의 아름다운 법도를 따르니
신화(薪火)를 서로 전하고,
일찍 두와(杜窩) 매헌(梅軒) 양정(兩庭)의 지극한 가르침을 받드니
패위(佩韋)를 잊지 않았네.
근실하고 돈후하고 순박하고 진실함은
곧 천성으로 타고난 아름다움이고,
효성스럽고 자애롭고 우애롭고 화목함은
곧 날로 행하는 일상의 행동이었네.
문예가 일찍 성취되니
능하다는 명성이 이미 고을 서당에 퍼지고,
지조가 더욱 확고하니
평소의 뜻이 명리의 굴레에 빠지지 않았네.
상을 보고 점을 쳐서
일찍 과거 공부를 그만두고,
분수에 편하고 본분을 지키니
절로 유가의 법도가 있었네.
세상 밖의 시끄러운 일은
산에서 나무 하고 물에서 고기 잡는 일에 무관하고,
한가한 중의 즐거운 일은
농상(農桑)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데 있을 뿐이었네.
능히 수신 제가의 방도를 다하니
일찍이 오요(五要)의 경계를 두고,
엄숙하고 경건한 효과를 알겠으니
안온히 백 살의 강녕을 누리셨네.
야복(野服)과 산건(山巾)은
소박한 임하의 처사이고,
학발(鶴髮)과 구장(鳩杖)은
완연히 지상의 신선일세.
해치지도 않고 탐하지도 않아
오로지 근본을 돈독히 하고 실상에 힘씀을 주로 하고,
정성을 다하고 힘을 다함이
진실로 후손에게 끼치고 선조를 추모하는 일에 있었네.
이에 토구(菟裘)의 한쪽에,
곧 금서(琴書)의 별장 지었네.
골이 깊고 숲이 우거지니
기거하며 수양하기에 실로 합당하고,
날이 길하고 때가 놓으니
공사가 쉽게 이루어졌네.
그런대로 완비하고 아름다우니,
검소하지도 사치하지도 않네.
마음속에 계획한 지 실로 오래더니,
눈앞에 우뚝한 모습 홀연히 보겠네.
가운데 마루와 양쪽 방은
기거함이 모두 따뜻하고 시원한 데 적합하고,
산을 등지고 물을 임함은
움직이고 고요함이 절로 인지(仁智)에 합하네.
하나의 꽃 하나의 돌이
백 년의 선조 향기 아님이 없고,
어느 물 어느 언덕인들
모두 당일에 남겨놓은 자취일세.
다만 좋은 경관을 즐기기 위한 것일 뿐 아니라,
곧 선조의 가려진 빛을 크게 드러내려 해서라네.
풍운(風韻)이 오래 이어지고,
운연(雲煙)이 더욱 빛나리라.
이에 상량의 글을 베풀어,
긴 대들보 들기를 돕노라.
들보를 동쪽으로 하니
은야(銀野)가 아득하게 눈에 들어오네.
포은(圃隱) 당년에 남기신 향기가 있으니
오늘에 이르도록 오랜 감회 늠연하네.
들보를 서쪽으로 하니
도덕산이 높아 하늘과 가지런하네.
산 아래 가는 사람들 모두 우러르니
힘껏 노력하면 잡고 오를 수 있네.
들보를 남쪽으로 하니
아스라한 팔공산에 푸른 기운 맺혀 떨어지네.
멀리 백운(白雲) 홍수(紅樹)를 바라보니
선가(禪家)의 옛 자취 외로운 암자에 남았네.
들보를 북쪽으로 하니
한 줄기 금호강이 맑게 흐르네.
강가는 상재(桑梓)의 터전인가 하니
전인이 심은 것에 오히려 춘색이 남았네.
들보를 위로 하니
허공이 끝 없고 또 막힘 없네.
밤 되자 바람 고요하고 달 밝으니
사람이 호연지기 기르기에 가장 좋네.
들보를 아래로 하니
향기로운 나물과 누런 벼가 들에 가득하네.
고인이 나라 걱정에 풍년을 빌었으니
태평한 시절 기다려 농사를 부지런히 하네.
엎드려 원하옵건대 들보를 올린 후에
백령(百靈)이 길이 보호하고,
만상(萬象)이 모두 아름답게 하소서.
산이 더욱 높고 물이 더욱 맑아
별천지의 그림 같은 경관을 열고,
난새가 우뚝하고 고니가 우뚝한 듯
일가의 아름다운 상서를 드러내게 하소서.
손과 벗을 맞아 휘파람불고 노래하여
풍류가 운치 있고,
종족을 모아 친분과 화목을 강구하여
화기가 항상 무르익게 하소서.
이로부터 천석(泉石)이 드러나고,
영원토록 시례(詩禮)를 끼치게 하소서.
고반(考槃) : 산수 간에 은거하는 즐거움을 말한다.
갱장(羹墻):우러르고 사모함을 말한다.
매거(梅渠) 정공(鄭公) : 정수일(鄭秀一, 1868∼1960)을 말한다. 자는 문칠(文七), 호는 매거(梅渠), 본관은 동래(東萊)이다. 저서로는 《매거유고》가 있다.
신화(薪火) : 불가어(佛家語). 불씨가 서로 전하여 꺼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스승과 제자, 또는 선조와 후손 사이에 이어지는 도리를 말한다.
패위(佩韋) : 자신을 경계하는 것을 말한다. 전국 시대의 위(魏)나라 서문표(西門豹)가 자신의 성급한 성질을 경계하기 위해 항상 부드러운 가죽을 차고 다닌 고사에서 유래하였다. 《韓非子 觀行》
움직이고……합하네 : 공자의 말에 “지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자는 산을 좋아하니, 인자는 움직이고 지자는 고요하며 지자는 즐겁고 인자는 오래 산다.[知者樂水, 仁者樂山;知者動, 仁者靜;知者樂, 仁者壽.]”라고 하였다. 《論語 雍也》
난새가……듯 : 남의 집의 자제가 훌륭함을 말한다. 당(唐)나라 문장가 한유(韓愈, 768∼824)의 〈전중소감 마군 묘지명(殿中少監馬君墓誌銘)〉에 “푸른 대 푸른 오동에 난곡이 높이 앉았다.[翠竹碧梧, 鸞停鵠峙.]”라고 한 말에서 유래하였다.
백저문집(白渚文集) 배동환 저 김홍영․박정민 역 학민출판사(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