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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살로니가후서 2장
1.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1-7)
사도는 데살로니가교회에 있었던 어떤 문제에 대해 얘기합니다. 그 문제가 어떤 것인가는,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강림에 대해 언급을 하면서, 강림의 문제로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재림과 연관이 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 그리스도의 재림에 대한 잘못된 사상을 접함으로 인해서, 마음이 흔들리고 두려워하는 문제가 발생한 것 같습니다. 이처럼 재림을 중심으로 문제가 발생한 것은,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2절 “영으로나 또는 말로나 또는 우리에게서 받았다 하는 편지로나,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해서, 쉽게 마음이 흔들리거나, 두려워하거나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라.”
주의 날이 이르렀다고 말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재림이 이루어졌다는 말이 됩니다. 곧 예수가 재림했고, 내가 곧 재림한 예수라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이들은 자신이 성령의 감동을 받아서 말한다고 하기도 하고, 사도에게 들었다고 하기도 하고, 사도의 편지를 받았다는 말로써, 자신들의 말에 신빙성을 더하고자 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말을 전한다는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말에 신비감을 더하고, 군중들로 하여금 의심하지 않고 거부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을 이용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말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옷차림을 특이하게 하기도 하고, 말의 억양을 바꾸기도 합니다. 하지만 사도는 그러한 말에 미혹되지도 속지도 말라고 합니다.
3절 “누가 어떻게 하여도 너희가 미혹되지 말라.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고, 저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아니하리니”
이 말을 보면, 사도는 그 날, 곧 재림이 이르는 징조로써, 먼저 배교하는 일이 있을 것이고,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이 나타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일이 있기 전에, 그 날은 이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배교는 종교를 바꾼다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을 배반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기독교에서 불교로 개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실상은 하나님을 배반한 채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배교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배교가 지금은 없습니까? 지금만이 아니라 배교는 예전부터 있어왔던 일입니다. 불법의 사람, 역시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을 때부터, 세상에 존재했습니다. 불법의 사람은 단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을 뜻하지 않습니다. 불법의 사람이 그런 뜻이라면, 주의 날이 이르지 않은 지금은, 불법을 저지르는 사람이 없어야 한다는 것인데, 그것은 현실적으로 전혀 맞지 않습니다.
불법의 사람, 곧 멸망의 아들은 악한 세력을 뜻합니다. 곧 사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탄 역시 분명 세상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것이, 사탄이 하와에게 접근한 결과가 아닙니까?
이처럼 하나님의 창조 때부터, 이미 세상에 존재했던 것이 불법의 사람인데, 그가 나타나기 전에는 그 날이 이르지 않는다면, 지금은 불법의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았다는 뜻이 됩니다. 따라서 이 역시 불법의 세력이 왕성하게 활동하는, 지금의 현실과 모순되는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나타났다’는 말을, 존재의 의미가 아니라 드러남의 의미로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불법의 사람은 창조 때부터, 아니 그 이전부터 세상에 존재하고 활동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세상은 불법의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하와도 자신에게 접근하는 존재가, 악한 영인 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것이 불법의 사람이, 자신을 세상에 드러내지 않고 감추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세상은 분명 사탄이 장악을 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작 세상은 그러한 현실을 알지 못합니다. 사탄에게 장악되고 있으면서도, 자신이 누구에게 장악되고 지배되고 있는가를 알지 못합니다. 자신의 의지와 생각으로, 자유롭게 살고 있다고 여길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사탄이 자신을 감추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법을 행하면서도, 불법을 알지 못합니다. 이것이 또한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실상은 하나님을 배교한 자로 살고 있고, 믿음으로 살고 믿음으로 행한다고 하지만, 실상은 불법을 행합니다. 그런데 그것을 알지 못합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를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이 하나님을 배반하고, 배척하는 것임을 전혀 알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행하는 자신들을,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여겼지만, 예수님에게는 사탄의 자식으로 보였을 뿐입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자신들의 실상을 보지 못합니다. 오히려 그 실상을 낱낱이 드러내신 예수님께 분노하여, 붙잡아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며, 의로운 행위였습니다. 이 모든 것이 불법의 사람이 세상에 나타나지 않고, 자신을 감추고 있기에 발생하는 현상들입니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부르지만, 불법의 사람의 정체를 알지 못합니다. 멸망의 아들에게 속고 있으면서도, 속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기 행위를 신앙의 근거로 삼고, 행위에 의의 의미를 두면서 예수께 나오는 것이, 곧 불법이라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불법은커녕 참된 신앙으로 인정됩니다.
믿음을 도구 삼아 세상의 복을 얻고자 하는 것이, 불법의 사람에게 장악되어 있는, 사고방식임을 알지 못합니다. 세상에 목적을 두고 하나님을 부르는 것이, 곧 아들을 보내신 하나님의 긍휼과 사랑을 배신하는 것임을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자기 열심을 도구 삼아,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여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할 뿐입니다. 이 모든 것이 불법의 사람으로 인한 사고방식임을 알지 못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불법의 사람이, 아직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불법이 무엇인가를 분명히 알기 전에, 그 날은 이르지 않습니다. 그 날이 이르면 하나님은 세상을 심판합니다. 심판의 근거는 불법과 진리입니다. 진리에 순종한 사람은 생명으로, 불법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므로 심판을 위해 필요한 것은,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불법이었는지가, 먼저 확실하게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 일이 있기 전에, 그 날은 이르지 않는다는 것이 사도의 말입니다.
4절 “그는 대적하는 자라. 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과. 숭배함을 받는 것에 대항하여. 그 위에 자기를 높이고. 하나님의 성전에 앉아,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내세우느니라.”
불법의 사람은 하나님을 대적합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에 대항하여 자신을 높이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자신이 신적인 존재가 됩니다. 그런데 세상이 사는 것을 보면, 하나님을 대항하는 불법의 사람과 동일합니다. 하나님만 섬겨야 하는 것이 피조물의 본분임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섬김을 받으려고 합니다.
주인이 하나님이신데도 불구하고, 자기가 주인이 되어 자기 뜻대로 살려고 합니다. 이 모든 것이 불법의 사람이 나타나 활동하는 증거고, 불법의 사람에게 장악된 현실을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깨닫지를 못합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불법이며, 멸망에 해당되는 악이라는 것을, 하나님이 드러내실 때가 있습니다.
불법의 비밀이 이미 활동을 하고 있지만, 세상으로 하여금 무엇이 불법인가를 알지 못하도록, 막고 계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세상은 자신의 본성에 의해, 불법에 순종하며 살아갑니다. 하나님은 그것으로 자기 백성과 백성이 아닌 자를 구분하십니다. 백성에게는 진리를 알게 하시고, 무엇이 불법인가를 깨닫게 하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에게 모든 희망을 두고 살게 합니다.
우리에게 위로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므로 세상의 불법을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거나 미혹되지 않아야 합니다. 불법은 반드시 드러낼 때가 있고, 오직 진리에 순종한 사람만이, 생명에 들어가게 되는 그 날이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는 ‘언제’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 있다면 ‘언제’는 무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주의 날이 언제 이루어지든, 진리 안에 사는 것 자체가 생명이기 때문에, 날마다 진리를 소망하고, 진리에 순종하는 것이 관심일 뿐입니다.
2. 거짓 것을 믿게 하심(8-12)
9절에 보면 사도는 사탄이라는 존재에 대해 언급합니다. 사탄은 인간의 창조와 함께 세상에 등장한 존재입니다. 사탄으로 인해서 인간은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고, 생명을 잃고 죽음에 처하게 됩니다. 이후로 성경에 등장하는 인간의 모든 역사는, 사탄을 언급하지 않고는 이해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인간에게 임한 저주와 죄는, 사탄을 근거로 했을 때 설명이 가능하게 되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방식으로 죄를 해결하고, 저주에 갇힌 자를 해방시키셨는가도, 사탄을 근거로 했을 때 설명이 가능하게 됩니다.
그런데 현대 교회는 사탄이란 존재를 아예 무시해 버립니다. 사탄을 추상적인 존재로 취급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탄이 무엇으로 인간을 유혹하고, 그 목적하는 바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사탄에게 미혹되어 살아가면서도, 그 실체를 깨닫지 못합니다.
고작 생각하는 것은 교회를 못 가도록 방해하고, 기도를 못하도록 방해하고, 주일을 지키지 못하게 해서 죄를 짓게 하는 것이 사탄이라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탄은 자신에 대해 철저히 감추고 활동합니다. 인간이 선으로 여기는 것을 이용하여, 악으로 이끌어 갑니다. 선에 악을 감추고, 선으로 가장하여 인간에게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죄로 여기시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려면, 사탄의 존재에 대해 알아야 하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사탄이 인간에게 접근하여, ‘하나님 같이 된다’는 말로 유혹합니다. 하나님 같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처럼 존귀한 존재, 강한 존재, 영광된 존재가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이 선악과를 먹은 것은, 자신의 존귀함과 강함과 영광을 위해 살아가는 존재가 되었음을 뜻합니다. 이것이 사탄에게 장악된 인간의 실체고, 하나님의 저주가 임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지금 인간이 어떻게 살아갑니까? 무엇을 인생의 목표로 하고 있고, 무엇을 위해 발버둥 칩니까? 모두가 자신의 존귀와 영광과 강한 힘을 얻는 것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이유입니다. 이것을 세상은 정상적인 모습으로 여깁니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그런 목표를 세우고 살아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성경에 나타난 사탄의 활동을 근거로 해서 본다면, 그것이 곧 사탄에게 미혹되어 있는, 죄의 모습입니다. 삶에 만족이 없는 것 또한, 인간이 원하는 인생의 목적에 미치지 못한, 자신의 현실에 대한 불만입니다. 그런데도 자신의 불만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을 찾을 뿐, 그것이 하나님이 주신 대로 살지 못하는, 죄라는 것을 보지 못합니다. 사탄의 존재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입니다.
현대 교회가 신앙으로 내세우는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대부분의 것이 사탄에게 장악되어 나타나는 죄라는 것을, 누가 인정할 수 있을까요? 십일조 하면 복 받는다는 말이나, 교회 부흥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들이, 사실은 성경과 상관이 없는, 거짓된 말이라는 것을 누가 알 수 있을까요?
9-10절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사탄의 활동을 따라 악한 자가 나타납니다. 악한 자는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속임수로 사람을 미혹합니다. 악한 자가 보여주는 능력과 표적은, 귀신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처럼, 누가 봐도 성령의 역사라고 인정할만한 놀라운 것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능력과 표적이 있는 곳으로 몰리기도 합니다.
이처럼 눈에 보이는 것을, 성령의 역사로 가장하여 미혹하는 것이 사탄의 활동이며,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않은 사람들은, 이 미혹을 따라 보이는 것을 따를 수밖에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께서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신 이유는, 누가 진리의 사랑을 받은 자인지가, 사탄의 활동으로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세상에 악을 허용하고 계신 이유입니다.
진리의 사랑은 우리 눈에 보이는 것도, 몸으로 경험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저주에 갇힌 우리의 죄를 깨끗이 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셨고, 우리는 그 피를 믿음으로 거룩한 자로, 하나님 앞에 서게 되었다는 놀라운 기적이 믿어질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은 성도는, 보이는 것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보이는 것을 능력이나 표적으로 간주하지도 않습니다. 서기관과 바리새인 같은 사람들이, 예수님께 표적을 보이라고 했지만, 예수님은 요나의 표적만이 참된 표적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이 곧 십자가 사건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믿는 성도에게는, 십자가 사건만이 표적이고 참된 기적입니다. 병을 고치는 것도 기적이 아닙니다. 병이 고침 받은 사람도 결국은 죽지만, 십자가 안에서 성도는 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능력과 표적으로 여기고, 참된 기적이라고 고백하는 그가, 진리의 사랑을 받은 사람이고, 눈에 보이는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을 따르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산을 옮기는 믿음이 있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보다, 사랑이 더 크고 존귀하다는 것입니다. 이 사랑이 곧 십자가로 증거된 진리의 사랑입니다. 그러므로 진리의 사랑을 받고 그 사랑을 믿는 성도는, 산을 옮기는 것보다 더 큰 믿음의 사람이기 때문에, 귀신을 쫓고 병을 고치는 표적이 있다는 것에 미혹되지 않는 것입니다.
11-12절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이 말에 따르면, 세상이 거짓 것을 믿고 따르는 것은, 하나님이 하신 일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이 사탄의 활동을 허용하심으로써, 세상이 불의와 거짓으로 가득하게 한 것입니다.
그래서 악한 자가 나타나 불의를 행하고, 거짓된 말로 세상을 미혹해도, 하나님은 그냥 두고 보십니다. 왜냐하면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표적을 따르게 되어 있습니다. 진리를 믿지 않기 때문에, 악한 자의 거짓된 말을 따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악한 자의 활동으로, 세상이 불의와 거짓 된 것으로 가득함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을 허용하심으로써, 마지막 때를 준비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진리의 사랑을 받았습니까? 진리의 사랑을 받았다면, 관심은 자연히 십자가로 향할 수밖에 없습니다. 저주에 갇힌 자신을 보면서, 예수님의 피의 은혜가 어떠함을 깨닫게 되고, 그 피로 인해 감사하게 됩니다. 이것이 진리의 사랑을 받은 성도입니다.
진리의 사랑 아래서는, 나의 존귀와 영광과 힘은, 아무 의미가 없음을 알게 됩니다. 나의 존귀보다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은혜가 더 존귀하고, 그 은혜를 받은 것이 세상에서 누리는 그 어떤 영광보다, 더 크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진리의 사랑을 받은 성도의 눈에는, 자신의 존귀와 영광과 세상에서의 힘을 얻기 위해 살아가는 모든 것이, 악으로 보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악이 여전히 자신에게 있고, 자신을 충동질하고 있음을 발견하면서, 단 한 순간도 십자가의 은혜를 떠나서는 살 수 없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일은, 지옥 보낼 자는 지옥으로 보내시고, 천국 보낼 자는 천국으로 보내시는, 하나님의 뜻에 의해 흘러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노의 자식으로 태어난 우리가 천국에 간다는 것은, 우리의 노력과는 전혀 무관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만 가능한 기적의 사건입니다.
이 기적 아래서 성도는 모든 것을 초월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으로 모든 것이 충족되었기 때문에, 자신을 채우고자 하는 삶으로부터 초월이 가능한 것입니다.
성도는 이 같은 믿음의 삶을 열망해야 합니다. 능력과 표적을 체험하는 것을 열망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진리의 사랑이라는 놀라운 기적이 덮쳐온 성도로써, 그 사랑에 붙들려 살기를 소원한다면, 이미 거짓된 것이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증거일 것입니다.
3. 전통을 지키라(13-17)
사도는 하나님께 감사를 하되 항상 감사합니다. 이처럼 항상 감사하기 위해서는, 일단 하나를 초월해야 하는데, 그것은 육신의 형편입니다. 우리가 겪는 육신의 형편은, 항상 감사할 수 있는 좋은 일만 주어지지 않습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고통스러운 일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육신의 형편을 기준으로 하면, 항상 감사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습니다.
바울이 항상 감사할 수 있는 것은, 감사의 내용이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현대 교인들이 하는 감사와 다른 점입니다.
13절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데살로니가교회의 성도를 택하신 것은, 처음부터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게 하셔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입니다. 이 외에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곧 인생을 편히 살거나, 부요한 삶을 누리게 하기 위해, 택하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직 택한 자들을 거룩하게 하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셔서, 구원을 받게 하는 것만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 뜻을 이루시기 위해서, 택하신 자기 백성에게 함께 하시고 인도하십니다.
따라서 비록 힘들고 고통스러운 일이 주어진다고 해도, 변함이 없는 사실은, 그 모든 일들이 택한 백성을 거룩하게 하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면, 비록 육신은 힘들어도, 나를 구원에 이르게 하기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으로 인한 감사가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도의 감사를 좀 더 살펴보면, 사도는 하나님의 택하심을 말합니다. 그리고 택하신 이유는, 성도의 거룩과 구원을 위해서입니다. 이를 위해서 사도의 복음으로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얻게 하시는 것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입니다. 사도는 이러한 하나님의 일하심으로 인해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도의 감사를 접하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떻습니까? 어쩌면 여러분께는 별로 흥미가 없는 감사일 수 있습니다. 단지 기독교인의 통속적인 감사로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우리가 바라고 원하는 것은, 영생이나 그리스도의 영광이 아니라, 다른 것에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영광이 우리의 속마음에 자리하고 있는 욕망이기 때문에, 사도의 감사에 마음이 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도의 감사에서 한 가지 생각할 것은, 사도가 데살로니가교회 성도들의 무엇을 보고, 이같은 감사를 하느냐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신 것으로 감사한다면, 그들에게서 그같은 감사를 할만한 뭔가가 보였기 때문일 것입니다.
데살로니가교회는 환난과 박해가 심한 형편에 있었습니다. 그런 형편에 있는 그들을 향해서, 하나님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구원 받게 하셨다는 것으로, 감사하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박해를 받으면서도, 스데반처럼 얼굴에 기쁨이 충만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박해를 받으면서도, 매일 같이 찬송을 부르고 기도했기 때문일까요?
우리는 데살로니가교회가 박해라는 환경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했는지 자세히 알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믿음의 삶에 대해서도, 정확히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누구나 인정할만한, 대단한 외적 증거를 나타낸 것은 아니라고 생각됩니다.
만약 데살로니가교회가 박해라는 환경에서,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는 대단한 믿음의 외적 증거를 보임으로, 사도가 감사한 것이라면, 오늘날에도 그 같은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병고침이나 방언과 같은 것을, 믿음의 외적 증거로 주장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우리의 얕은 시각에 의한 생각일 뿐입니다.
외적인 증거를 가지고는 우리의 얕은 시각으로는, 쉬지 않고 일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일을 볼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행하시는 구원의 일은, 우리의 생각과 상식을 초월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일은 우리가 이해하고 받아들 수 있는 수준이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이해가 되고 받아들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자신의 인생에서 일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읽을 수 있다면, 그것은 곧 믿음이 주어졌다는 증거입니다. 믿음에 의해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고, 어떤 형편에서도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의 감사도 이런 시각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박해와 환난이라는 고통의 형편에 처하게 되면, 하나님에 대해 어떤 생각이 앞설까요? 아마 원망과 불평과 갈등과 혼란이 섞여서, 도무지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 수 없는 심정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를 택하신 것이, 성령으로 거룩하게 하시고,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기 위함이라는 뜻에 의한 것임을 놓치지 않는다면, 성도가 어떤 박해와 환난에 놓인다고 해도, 그 안에서 우리를 구원으로 인도하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열심과, 긍휼과 사랑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믿음의 시각입니다. 이 믿음에 의해서 성도는, 모든 형편을 초월하여,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사도의 감사와 일치하는 것입니다.
사도는 박해와 환난으로 고통을 받는 데살로니가교회를 보면서, 이같은 하나님의 일을 본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박해와 환난에서, 성도가 어떻게 믿음으로 행동하는가를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하심을 본 것입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었기 때문에, 박해와 환난에 있는 성도들의 구원을 말할 수 있는 것이고, 그로 인해 하나님께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간은 항상 실패하고 넘어지는 존재이지만, 하나님께는 실패가 없고, 오직 말씀을 이루시는 신실하심만이 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보면서, 구원을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본다면, 구원에 감히 자신 있다고 말 할 수 없습니다. 구원 받았다고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성도는 구원 받은 자임을 당당히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구원은 우리의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과 일하심에 의한 결과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에 대해 절망하는 성도만이,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고, 하나님으로 인해 항상 감사하게 되는 것입니다.
15절 “그러므로 형제들아, 굳건하게 서서, 말로나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
우리가 아는 사도는 전통에 매인 사람이 아닙니다. 복음 자체가 전통에 매여서 전통을 주장하지 않는데, 복음을 전하는 사도가 전통을 강조하고, 전통을 지키라고 하는 것은, 뜻밖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사도가 언급한 전통은, 유대인들이 지켜온 인간적 전통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바울은 우리의 편지로 가르침을 받은 전통을 지키라고 합니다. 곧 바울이 말한 전통은, 바울이 가르친 내용을 의미합니다. 바울이 편지로 가르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복음입니다. 그리고 복음의 중심은 그리스도입니다. 그렇다면 사도가 말한 전통은, 곧 그리스도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왜 그리스도를 전통이라고 말할까요? 전통은 어떤 공동체에서 예전부터 전해오는, 사상이나 의미를 뜻합니다. 따라서 그리스도는 믿음의 세계에서는, 전통일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부터, 이미 계획되어진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도는 이 전통을 굳게 지킬 것을 당부합니다. 어떤 경우에도 예수님의 피의 은혜로 감사하고 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전통을 지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하면서, 예수님만 자랑하고 높이는 것이, 창세전에 우리를 예정하시고 택하시고 부르신 하나님의 뜻이기에, 어떤 형편의 삶에서도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은혜로 감사하는 것이야 말로, 전통을 지키는 것이며, 믿음에 굳게 선 삶이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