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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평안의 나날 원문보기 글쓴이: 람미
***간증: 1422. [역경의 열매] 최일도 <1-31> 소외 이웃에 29년째 식사 제공… 1000만 그릇 넘어서
노숙인에게 설렁탕 대접한 것이 시작… 무료병원 운영·10개국에 분원 세워
최일도 목사(왼쪽 다섯 번째) 등이 지난 5월 서울 동대문구 밥퍼나눔운동본부에서 열린 ‘나눔잔치 오병이어의 날 행사’에서 1000명이 먹을 수 있는 대형 비빔밥을 만들고 있다.‘밥퍼’라는 이름으로 소외된 형제자매들에게 무상급식을 제공한 지 만 29년째. 굶주린 이들의 허기를 채워준 식사는 지난 5월로 1000만 그릇을 넘어섰다.
1988년 11월 11일 서울 청량리역 광장에 쓰러져 있던 노숙인 할아버지를 우연히 만났고 그에게 설렁탕 한 그릇을 대접한 것이 이 사역의 출발점이다. 당시 난 독일 유학을 준비 중이었다. 무엇이 내 삶에 작용했을까.
유학의 꿈을 접고 청량리역 광장에서 노숙인에게 라면을 끓여주기 시작했다. 이후 봉사활동을 보다 조직적이고 꾸준히 전개해 나가기 위해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을 세웠다. 다양한 복지사업을 펼쳐 나가면서도 밥을 퍼주는 일만은 꾸준히 이어갔다.
다일공동체는 1990년대 후반 외환위기 시절 거리로 밀려나온 이들에게 마음의 안식처가 되어줬다. ‘쓰러진 이들을 다시 일어서도록 도와준 곳’이라며 사람들은 ‘다일’의 뜻을 재창조했다. 후원회원이 3300여명이 되던 1998년 12월 후원금 전액을 출자해 다일복지재단을 설립, 한국의 기독교 최초 무료병원인 다일천사병원을 세웠다.
북한은 물론 제3세계의 가난한 이들을 위해 섬김의 폭을 넓혔다. 다일공동체는 국제NGO로서 현재 베트남 캄보디아 네팔 탄자니아 등 10개국 17개 분원에서 밥퍼(급식 지원), 꿈퍼(교육사업), 헬퍼(의료사업) 등의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17년간 노숙생활을 하다 다일공동체의 나눔정신을 이어받아 12년째 봉사활동을 하는 형제도 있다. 도움 받던 이들이 자원봉사자로 바뀌는 모습을 통해 진한 감동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내가’ 무엇을 하고 이뤘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빈민선교를 한답시고 청량리에 들어오게 된 것은 나의 계획이 전혀 아니었다. 내 뜻과 하나님 계획은 많이 달랐다. 지금도 그분의 뜻과 섭리는 모르지만 세월을 돌아보니 오늘까지 지내온 모든 것이 오로지 하나님의 은총이었음을 고백한다.
하나님이 좋고, 상처받은 이웃이 좋아서 시작한 일이다. 청량리에 들어온 지 30년이 되는 시점에도 하나님께 던지는 질문은 한결같다. “주님,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습니까. 왜 제게 그들을 만나게 하셨으며 그 깊은 상처들을 보여주셨습니까.”
가끔 도시민 빈민선교의 새로운 모델을 제시했다는 말을 듣는다. 혹자는 ‘청량리의 성자’라고까지 한다. 진실로 부끄럽고 민망하다.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이번에 역경의 열매를 쓰기로 한 것은 종교개혁 500주년을 맞아 기독교가 해야 할 일과 가야 할 길에 대해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조금이라도 도전과 용기를 주고자 함이다.
다일공동체는 어떤 사람들이 모여 무슨 일을 하는 곳인가. 그대로 밝혀야 어울리지 않는 칭찬으로부터 벗어날 것이기에, 나의 실수와 실패까지도 다 털어놓기로 했다.
무엇보다 우리 부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고 싶다. 신학생과 수녀와의 만남. 서로 다른 환경과 문화, 교리 때문에 함께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시선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신비하게도 별문제 없이 서로 존중하며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다.
나의 보물 1호인 어머님의 기도와 아버지의 교육. 하나님을 사랑하며 그분께 사랑받은 두 분의 삶이 내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서도 진솔하게 이야기하고 싶다.
정리=이사야 기자 Isaiah@kmib.co.kr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 소외 이웃에 29년째 식사 제공… 1000만 그릇 넘어서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 "태중에 하나님께 바쳤다"… 진보·보수 두 신앙의 합작품
* [역경의 열매] 최일도 <3> "더럽게 춥네" 했다가 "추운 맛 봐라" 부친께 혼쭐
* [역경의 열매] 최일도 <4> "아버지 없는 천당엔 나도 안 가요" 교회 발 끊어
* [역경의 열매] 최일도 <5> "훌륭한 목사님 돼라 했건만 어째 거지들 밥만 먹이나"
* [역경의 열매] 최일도 <6> 베델성서 연구모임서 수녀였던 아내와 첫 만남
* [역경의 열매] 최일도 <7> "수도자보다 목회자로 부름 받으신 분 같아요"
* [역경의 열매] 최일도 <8> 퇴원 직후 김 수녀 찾아 ‘수선화’ 노래로 마음 전해
* [역경의 열매] 최일도 <9> 수녀원 떠난 그녀… 백방으로 수소문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0> 죽기 위해 찾은 섬에서 유서처럼 쓴 戀詩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1> "하나님께 먼저 묻고…" 고민하는 나를 다독인 아내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2>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가난함 수용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3> 인생을 바꿔놓은 청량리역 노인과의 만남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4> 588 포주들 핍박… 교회 비운 새 십자가가 쓰레기장에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5> 라면 대신 쌀밥에 소고깃국… 부활절 첫 '밥 나눔'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6> "있는 돈 다 내놔" 내 목에 칼 겨눈 행려자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7> 오늘 밥퍼 앞마당서 서른 번째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8> 588 희야 자매 "아저씨는 희망 일깨운 '꿈퍼' 목사님"
* [역경의 열매] 최일도 <19> 개미군단 십시일반… 무료병원 설립 기적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0> 고독사하는 노인들 위해 '작은천국' 개소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1> 55세 담임목사 은퇴… 퇴직금 헌금하고 사택 반납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2> 첫 해외사역 '중국 다일공동체'와 훈춘시 어린이집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3> 베다일 설립, 아픈 영혼에 밥과 복음 전해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4> 캄보디아 활동 10년 만에 빈민촌서 대학생 탄생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5> 네팔에선 '빵퍼'… 매일 결식 초등생 300명 먹여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6> 청량리 '밥퍼' 어르신들이 낸 100원으로 세운 필다일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7> 텐트 아래서 시작한 '탄다일' 800여명에 '밥퍼'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8> "밥이 답이다"… 우간다서도 밥으로 예수님 전해
* [역경의 열매] 최일도 <29> 미국 집회 갔다가 안수집사라는 이들에게 폭행당해
* [역경의 열매] 최일도 <30> 북녘땅과 지구촌 빈민을 위해… 지금도 밥 지을 때
* [역경의 열매] 최일도 <31·끝> 역경도 은총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약력=△1957년 서울 출생 △장로회신학대 신학과(1982∼1986), 신학대학원(1986∼1988) 졸업 △다일공동체 대표(1988∼현재) △다일복지재단 이사장(1998∼현재) △다일천사병원 병원장(2002∼현재)
***[역경의 열매] 최일도 <2> “태중에 하나님께 바쳤다”… 진보·보수 두 신앙의 합작품
반공투사 아버지 산·들에서 주일 예배… 어머니는 꼭 강대상 바로 앞자리 앉아
최일도 목사의 아버지 최희화씨(뒷줄 오른쪽 끝)가 특전사 전신인 8240부대 독립대대 대대장 시절 동료들과 찍은 사진.나는 서울 영등포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집 근처 둑에서 강 건너 보이는 마포 나루터와 여의도, 밤섬에서 뛰어 놀았다. 지금도 눈 감으면 넘실거리는 푸른 강물과 인천에서 마포까지 새우젓을 나르던 황포돛대배가 떠오른다.
부모님은 모두 이북 출신이다. 황해도 장연에서 나고 자란 아버지는 가난한 어민의 아들이었다. 황해도 송화가 고향인 어머니는 대지주의 딸이었다. 신분 차이가 컸지만 인물이 준수하고 행동거지가 발랐던 아버지는 부잣집으로 팔려가다시피 장가를 드셨다는 이야길 전해 들었다.
두 분 삶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6·25전쟁이다. 외가의 상당수가 공산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됐다. 살아남은 외삼촌은 아오지로 유배를 갔고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아버지는 반공투사가 되셨다. 민간인 유격부대에 입대해 지휘관이 되면서 상륙함정(LST)으로 피난민을 나르는 임무를 감당하셨다. 특전사 전신인 8240부대 독립대대의 대대장으로 오늘의 북방한계선(NLL)이 있게 한 진짜 군인이셨다. 휴전 이후 60년 만에 그 활약이 드러나 화랑무공 훈장을 받으셨다. 대신 훈장을 받은 어머니는 그 훈장을 특전사에 기증하셨다.
6·25 전부터 예수를 영접한 어머니는 하나님과 수직적 관계의 뜨거운 믿음을 갖고 있었다. 주일성수를 하는 것은 물론 항상 기도하고 찬송을 부르셨다. 아버지는 달랐다. “눈에 보이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면서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건 모순이다. 하나님은 산에도 들에도 계시다”며 주일에도 낚싯대를 메고 훌쩍 집을 나서곤 하셨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자유로운 신앙관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어머니는 내가 태중에 있을 때부터 이미 “하나님께 바쳤다”고 말씀하셨다. 어머니 손을 잡고 부흥회에 자주 갔던 기억이 난다. 큰 천막 안에서 열리는 부흥회에 도착하면 어머니는 꼭 강대상 바로 앞에 자리를 잡으셨다. 목사님을 코앞에서 보는 그 자리가 일등석이라며 말이다. 부흥회는 종종 자정 넘어 새벽까지 이어졌다.
어머니 눈에는 주일에 밖에 나가 자연에서 예배를 드리시는 아버지가 ‘나이롱 신자’로 보였을 것이다. 아버지는 어머니를 보고 ‘꼴통보수 신자’라고 부르셨다. “하나님 사랑의 척도는 이웃사랑의 실천에 있다”고 주장한 아버지는 진정한 휴머니스트였다.
초등학교 4학년 때 교회에서 성탄절 성극 연습을 하던 중 나와 같이 동방박사 역을 맡았던 친구가 예배당을 뛰쳐나간 일이 있다. 성탄절이 다가왔음에도 무대의상을 준비하지 못해서 배역을 빼앗길 처지에 놓이자 부끄럽고 속상했던 것이다. 겉옷 한 벌로 겨울을 나던 집이 많았던 시기라 성극을 위한 의상을 마련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 그 얘기를 전하자 아버지는 말없이 나갔다 오셨다. 양손에는 그 친구가 입을 새 옷과 모자, 동방박사 역할을 맡은 세 사람이 걸칠 무대의상 등이 들려있었다. 그때 아버지와 함께 나눈 따뜻한 크리스마스의 기억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나는 진보와 보수 신앙을 가진 두 분의 합작품이다. 어렸을 때는 어머니의 믿음이 옳다고 생각했다. 하나님 앞에 더 바른 삶을 살고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어른이 돼서 생각해보니 그게 다는 아니었다.
목마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물 한잔이다. 그러나 물을 어떤 그릇에 담을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다가 정작 마실 물을 담지 못한다면, 그래서 결국 갈급한 이에게 물 한잔도 내어주지 못한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역경의 열매] 최일도 <3> “더럽게 춥네” 했다가 “추운 맛 봐라” 부친께 혼쭐
“날씨 못 이기면 세상 고난 못 이긴다” 바깥에서 함께 옷 벗고 추위 겪게 해
최일도 목사가 어릴 적 아버지 최희화씨와 서울 여의도 인근에 나들이 갔다가 찍은 사진.6·25 전쟁이 끝난 후 아버지는 뜻밖에도 섬유 노조의 초대 사무총장으로 일하셨다. 전쟁 당시 대북 첩보 임무를 맡았던 켈로(KLO, Korean Liaison Office) 부대 대대장으로 활약하셨던 분이 노동자의 권익을 위해 선봉에 섰다는 것이 얼핏 이해가 안되는 대목이다.
나중에 아버지 친구에게 들은 바로는 아버지가 부대 부지휘관으로 계실 때 밑에 있던 부하가 지휘관을 저격한 일이 있었다고 한다. 지휘관의 부정부패가 너무 심하고, 인명을 쉽게 죽인다는 이유에서다. 그 일 때문에 군법 회의가 열렸다. 엉뚱하게도 모든 일이 나의 아버지가 주도해서 저질러진 것으로 결론이 났다. 아버지는 그 일로 사형언도까지 받았다. 황해도 출신의 피난민들이 “훈장을 드리지 못할망정 이 무슨 억울한 일이냐”며 각계각층에 탄원서를 올리고 구명운동을 벌인 덕분에 무죄로 풀려나셨다.
상처를 받고 환멸을 느낀 아버지는 조용히 일본으로 떠나 그곳에서 노동조합 운동을 공부하고 귀국하셨다고 한다. 그 후 아버지는 넥타이를 한 번도 매지 않으셨다. 항상 재건복이라 불리는 차이나 칼라의 기름때 묻은 작업복 차림이었다. 주관이 확실한 분이셨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이곳저곳 여행 다니기를 좋아하셨다. 아버지가 낚싯대를 메고 나가자 하시면 그날은 마냥 신나는 날이었다. 산으로 들로 다니며 신나게 하루를 보내고 돌아오면 어머니는 적막한 골방에서 기도를 드리고 계셨다.
아버지는 내게 항상 잘해주신 것만은 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일이다. 무척 추운 날이었다. 나도 모르게 “더럽게 춥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은 아버지는 “왜 추운데 더럽다는 거냐. 날씨가 더러운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이 더러운 것”이라며 “추운 맛을 보여 주겠다”고 하셨다. 그날 아버지와 나는 집 밖에서 옷을 하나씩 벗어가며 온 몸으로 추위를 끌어안아야 했다. 그것도 모자라 아버지는 우물가로 가서 물이 꽁꽁 얼어붙은 펌프 옆에 무릎을 꿇으시고는 나도 앉게 하셨다. 얼어붙은 부자를 보고 놀란 어머니가 더운 물을 붓고 나서야 나는 다리를 질질 끌며 온돌방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그때부터 한동안 내 바지에는 주머니가 없었다. 아버지가 손수 꿰매 버리신 거다. “추운 날에 바지 주머니에 손 넣고 어깨 움츠린 채로 ‘더럽게 춥네’를 연발하는 아들놈 꼴은 못 보겠다”는 이유에서다.
내 아들이 초등학생 때 한번은 겨울방학을 맞아 매일 아침 약수터에 다녀오겠다고 공언한 적이 있다. 기특하기도 해서 가만히 지켜봤다. 하지만 이틀이 지나고 나자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작심삼일이 아닌 작심이틀이었다. 이불을 둘둘 말고 누워 있는 모습을 보고 꾸짖었더니 “약수터 가려고 나갔는데 중간에 돌아왔어요. 미치게 추워요”라고 말했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을 가르쳐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집 밖으로 나가 아들과 상의를 모두 벗었다. 그 이후로 아들은 추운 날이면 그냥 “춥다” 더우면 “덥다”고 말한다.
“일도야 날씨가 더럽냐. 추운 건 추운 맛이 있고 더운 건 더운 맛이 있단다. 날씨 하나 극복 못하는 사람이 어떻게 세상 고난을 극복하며 살겠냐”고 말씀 하시던 아버지. 어릴 적 들었던 추상같은 아버지의 말씀이 지금도 유언처럼 가슴에 남아 쩌렁쩌렁 울리고 있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4> “아버지 없는 천당엔 나도 안 가요” 교회 발 끊어
“믿음 없는 너희 아버지는 지옥 갔을 것” 중3때 전도사님 말에 상처… 방황 이어져
최일도 목사(왼쪽)가 2014년 어머니 현순옥 여사(왼쪽 두 번째), 아내 김연수 사모와 함께 아버지 최희화씨의 화랑무공훈장을 기증하기 위해 특전사사령부를 방문, 당시 전인범 특전사령관(오른쪽)과 대화하고 있다.아버지는 내가 중3 때 돌아가셨다. 병을 오래 앓으신 것도 아니고 갑자기 돌아가셨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다.
나는 과외 열풍에 시달린 세대다. 명문 중학교에 가기 위해 초등학교 4∼6학년 때 혹독하게 과외수업을 받았다. 하지만 6학년 때 중학교 입학전형이 무시험 추첨제로 바뀌었다. 경기중학교를 목표로 공부하던 나는 추첨으로 집과 가까운 선린중학교에 배정받았다. 고등학교만큼은 명문학교로 가기위해 다시 3년 내내 과외를 받아야만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모든 의욕이 사라졌다. 가장 좋은 친구이자 스승이셨던 아버지를 잃었다는 생각에 엄청나게 방황하기 시작했다.
아버지가 너무도 그리워서 학교에 가지 않고 아버지 산소에 갔다. 당시 담임선생님이 쫓아오셔서 말리셨다. “일도야, 이럴 때일수록 더 열심히 공부해야지. 네가 이럼 쓰니”라는 말에 “선생님 저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나요”라고 물었다. 그러자 선생님은 다소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보시며 말하셨다. “이놈아 내가 그걸 알면 남산 밑에 돗자리 깔고 오가는 사람들 갈 길이나 봐주지. 모르니까 분필가루 마시면서 너한테 수학을 가르치잖니. 정신 차리고 얼른 학교 가자.” 그러나 나는 학교 가기를 거부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어머니는 통곡하시며 내게 말하셨다. “나는 네게 아버지 없는 후레자식이라는 소리를 듣게 하고 싶지 않구나. 그리고 남편 복 없는 여자는 자식 복도 없다는 소리는 정말 듣고 싶지 않아.” 어머닌 매우 무섭게 변하셨다. 얼마나 무서웠는지 야단을 맞을 때마다 울었던 기억이 있다. 세월이 지난 지금은 그저 감사드릴 뿐이다. 나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렇게 벌하시지 않았을 것이다. 다만 당시 심한 방황으로 인해 어머니의 마음을 아프게 해드려 죄송할 따름이다.
방황하던 나는 툭하면 집을 나갔다. 전국에 안 돌아다닌 곳이 없다. 방황하는 비행청소년이었던 셈이다. 하루는 집에 돌아와 있는데 어머니를 위로한다고 찾아온 여전도사님이 날 앉혀놓고 말씀하셨다. “일도야, 어려운 때일수록 더 기도생활 열심히 하고, 학교도 잘 다녀야지. 교회는 왜 안 나오니.” 나는 앞서 담임선생님께 드렸던 질문을 똑같이 했다. “저희 아버지는 어디에 계시죠.” 그 여전도사님은 일고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어디에 있긴, 지옥에 갔지.”
참을 수 없어 다시 물었다. “우리 아버지가 왜 지옥에 갑니까.” 그러자 그 여전도사님은 “주일에 예배당에 안 나오고 허구한 날 낚시나 다니며 어머니의 신앙생활에도 반대했으니 지옥에 가는 게 당연하지. 너도 지옥에 안 가려면 주일성수하고 예배당 열심히 나와야 해.”
대답을 듣자 허탈함과 분노가 몰려왔다. “아 그렇습니까. 그럼 전도사님이나 천당 아랫목에서 영원히 사십시오. 우리 아버지 같은 분이 지옥가면 나도 지옥갈래요. 아버지 없는 그런 천당에 저는 안 갈랍니다.” 그 이후 난 6년간 교회와의 연을 끊었다.
빈민선교를 한다고 청량리 뒷골목에 들어선 내게 상처를 준 사람들은 윤락여성이나 깡패들이 아니었다.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 그것도 열심히 믿는다는 이들에게 무수히 많은 상처를 받았다. 주일성수도 하고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좋지만 간혹 주일 성수를 못해도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살아가는 분들, 오히려 그런 분들이 매주 교회에 다니지만 미움과 시기, 질투 속에서 사는 이들보다 훨씬 예수님의 제자처럼 보인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5> “훌륭한 목사님 돼라 했건만 어째 거지들 밥만 먹이나”
실망해 누나 집으로 갔던 어머니 “네 아들 하는 일 내가 원해” 음성 들어
최일도 목사가 어머니 현순옥 여사를 번쩍 안아 든 모습. 최 목사는 어머니의 기도가 자신의 ‘보물 1호’라고 말한다.어머니는 오로지 기도와 전도에 목숨을 건 분이셨다. 오직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는 보수적 신앙의 아름다움을 물려주셨다.
하나님께 바치겠다고 공언한 아들이 아버지 별세 이후 교회에 나가지 않고 방황하는 모습에 많이 놀라고 눈물도 흘리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나를 위한 기도의 끈을 놓지 않으셨다.
많은 고뇌와 시련, 역경을 겪고 난 이후 장로회신학대에 입학하고 목사가 됐을 때 어머니께서 느끼신 기쁨은 말로 다할 수 없이 컸을 것이다. 그런 어머니와의 일화를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내가 청량리 뒷골목에 들어가자 “목회하는데 그것이 좋은 경험이 될 거야”라며 1년이 될 때까지는 늘 기도만 하셨다. 그러다 2년이 지나니까 걱정하기 시작하셨다. “이러다가 덩말이디 아주 청량리 골목사람이 되갔어. 자네 왜 이러나. 목회를 하시게. 이러려고 대학원까지 공부를 했나. 자네처럼 콩나물 씻고 행려자들 밥해주고 리어카 끌고 다니는 건 누구나 할 수 있어요. 훌륭한 목사님 되라고 태중에서부터 그렇게 간절히 기도해 왔건만 어쩌자고 거지들 밥만 해먹이는 거야.”
3년이 지나면서부터는 노골적으로 비판하셨다. “친어머니 하나 봉양 못하면서 무슨 무의탁 노인을 섬긴다고 하나. 자네가 나한테 3년 동안 용돈 한번 줘봤나. 내 아들이 떳떳하게 벌어주는 돈으로 헌금도 하고 싶고 친구도 만나고 싶다고. 아니 그래 마누라 노동력을 팔아서 밥을 먹고 아이들 교육을 시키냐고. 이게 목회냐.” 할 말이 없었다.
당시 내게 부임을 요청한 규모 있는 교회들이 여럿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알고 계셨다. “그렇게 기성 교회들이 못마땅하면 개척교회를 하라우. 내가 심방 가방을 들고 다니면서 일년 안에 100명은 책임지고 모을 테니까니.”
평생 기도하고 전도하며 전도사 생활을 20년 가까이 하셨던 어머니였기에 하신 말씀이다. 그래도 내가 말을 안 들으니 어머니는 가방을 싸들고 아예 누님 댁으로 가버리셨다. ‘아들 된 도리로 이럴 순 없다’는 자책과 고뇌가 종일 머리에 남는 시기였다. 고독함과 참담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만약 그때 포기했다면 오늘의 다일공동체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는 1년 반 만에 돌아오셨다. 어느 날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에서 설거지를 하고 계신 어머니를 발견했다. 웬일이시냐고 물었더니 “이 사람아, 자네가 하는 일은 정말이지 예수님이 기뻐하는 목회야. 거럼” 하시며 한없이 눈물을 쏟으셨다.
누님 댁에 머무셨을 때 누님이 다니던 교회 목사님이 어머니께 전도사를 해달라고 부탁을 하더란다. 그래서 목사님과 교인들 집 이곳저곳을 심방 다니셨다고 한다. 집집마다 상다리가 부러질 정도로 음식을 차려 내오는데, 그 음식이 도저히 넘어가지 않으셨다고 했다. ‘내 아들은 뭐가 못나서 지금도 노숙인들과 라면을 먹어야 하나’ 하는 생각에 통곡을 여러 번 하셨단다.
기도를 하시며 왜 당신의 아들이 사창가에서 사서 고생을 하는지 하나님께 울며 물어보셨다고 했다. 그러다가 ‘네 아들이 하는 일도 내가 기뻐하고 원하는 일이란다’ 하는 주의 음성을 들으셨다고 했다.
설거지를 하시다가 어머니가 말씀하셨다. “심방 다니는 일도 기쁘지만 죽어가는 한 사람 살리자고 설거지하는 일이 더 기쁘구만 그래. 아주 귀한 목회야 거럼.”
그날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기뻤다. 나의 모든 것에 모든 것 되신 주님과 낳아서 길러주신 어머니에게 인정받는 아들이 된 것 같았다. 더 이상 바랄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6> 베델성서 연구모임서 수녀였던 아내와 첫 만남
아버지 별세 후 가톨릭 수도원 찾아다녀… 프리지어꽃이 웃는 듯 첫눈에 반해
청년 시절 최일도 목사와 당시 수녀였던 김연수 사모가 함께 찍은 사진. 두 사람은 베델성서 연구모임에서 처음 만났다.갑자기 별세하신 아버지가 주일성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아 지옥에 갔다는 전도사의 발언은 참으로 긴긴 세월 상처로 남았다. “더 이상 그런 교회는 나갈 필요가 없다”고 말하자 교인들은 위로는 못할망정 “아버지가 돌아가시더니 일도가 이상해졌고 타락했다”며 정죄만 일삼았다. 그로 인해 나는 교회에 대한 환멸을 갖게 됐다.
어린 나이였다. 기독교는 아니다 싶어서 가톨릭 쪽으로 시선을 돌리게 됐다. 참으로 괴롭고 고통스러웠지만 난 모(母)교회와 어머니 곁을 떠나기로 작정하고 전국의 수도원을 찾아 정처 없이 돌아다녔다.
많은 가톨릭 관계자들을 만났는데 특별히 기억에 남는 고마운 분은 김수환 추기경의 비서실장이던 홍인수 신부다. 그분이 오류동 성당의 주임신부였을 때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가 수도 생활과 이냐시오의 영신수련에 대해 끊임없는 질문을 던졌다. 그분의 서재에 있는 신앙서적은 거의 다 읽었다.
더 많은 책을 읽고 싶다 했더니 홍 신부는 신학대학 도서관만큼 많은 책을 볼 수 있는 곳이 있다고 했다. 바로 지금의 아내가 당시에 수녀로 있던, 명동성당 바로 뒤에 있는 샤르트르 바오로 수녀원의 도서관이다. 그곳을 자주 찾아가 책을 뒤지고 잡히는 대로 정말 열심히 읽었다.
때마침 수녀원에서 베델성서 연구모임이 시작됐다. 지금의 영적 멘토인 박종삼(전 월드비전 회장) 목사님을 통해 베델성서 연구의 내용을 익히 들었던 터라 수녀들 틈에서 베델성서 공부 및 베델의 노래와 레크리에이션을 인도할 기회가 생겼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그 기회는 애초의 목적과 다르게 나와 한 수녀의 운명까지도 바꿔놓고 말았다.
베델성서 연구반에서 물론 난 청일점이었다. 여느 날처럼 악보를 펴놓고 교육내용에 맞는 음악을 선정하고 있었다. 그때 교육관으로 누군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나는 문을 등진 상태였고 소파에 앉아 있었기 때문에 그녀의 목소리부터 들었다. 신선하고 맑은 목소리가 아름다운 멜로디처럼 들려왔다. “유 수녀님, 예고도 없이 찾아와 죄송해요. 저도 베델성서를 공부하려고 왔어요.”
“아네스 로즈. 잠시만요. 아참 두 분 서로 인사하세요. 이분은 수사 신부가 되길 원하는 최일도 전도사님. 그리고 이분은 김 아네스 로즈 수녀님이에요. 계성여중에서 국어를 가르치고 있지요.” 그제야 뒤돌아봤다. 키가 훌쩍 크고 얼굴이 하얗고 목이 가느다란 수녀가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하얀 프리지어꽃이 웃는 듯했고 코스모스가 내게 인사하는 듯했다. 난 그만 황홀경에 빠졌다.
인사를 나눈 뒤 성서연구반 담당수녀와 대화를 나누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참으로 신비로운 일이었다. 천진스러운 얼굴에 함박웃음을 머금고 이야기하는 그 수녀가 왜 그토록 내 마음을 흔들었는지 정말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하나님께 자신의 전 생애를 봉헌한 수도자인데 말이다. 알을 깨고 막 나오는 햇병아리의 솜털과도 같은 의식의 발아가 어쩌면 그리도 아프던지.
그날부터 사랑의 열병을 앓기 시작했다. 그녀를 만난 이후 일기장엔 온통 그녀 이야기로만 가득 찼다. 그날부터 잠들기 전, 그리고 하루가 시작되는 가장 순결한 새벽의 첫 시간이면 어김없이 언제나 목마른 그리움으로 사랑의 시를 썼다. 하루도 빠짐없이.
***[역경의 열매] 최일도 <7> “수도자보다 목회자로 부름 받으신 분 같아요”
좋아하는 수녀 보러 수녀원 근처 서성… “나 역시 수도사로 살아야겠다” 결단
김연수 사모(앞줄 가운데)가 계성여중 국어교사 시절 제자들과 함께 찍은 사진.김연수 시인 수녀를 향한 내 사랑을 지속적으로 간직하기 위해서는 항상 수녀로만 대해야 한다고 굳게 다짐했다. 그녀가 선택한 수도의 삶을 존중하고 나 역시 한 사람의 수도사로 살아야겠다고 결단했다.
“이미 하나님께 바쳐진 한 영혼을 티 없이 순수한 마음으로 사랑해야지. 성 프란치스코가 글라라를 그리워하면서도 주 안에서 아름답고 고결한 사랑으로 승화시켰듯 나도 그래야지.”
이른 아침이면 물 한모금 마시고 명동의 S.P 수녀원으로 오기까지 이 말만을 되풀이하며 걷고 걸었다. 그날 베델성서 연구반에 들어오기까지 자초지종을 그녀에게 다 털어놓았다. 그리고 나 역시 결혼을 포기하고 수도자가 되라는 부르심에 이제는 응답하고 싶다며 기도해 달라고 부탁했다. 내 말을 다 듣고 그녀는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최 전도사님은 수도자보다는 목회자로 부름 받으신 분 같아 보여요. 정말 하느님의 부르심에 대한 응답 때문이라면 그리스도를 본받아 사는 삶이 수사 신부뿐이겠습니까.”
그 시절 만난 가톨릭 관계자들에게 좀처럼 듣지 못했던 말이었다. 대개는 하루 빨리 개종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그녀는 ‘무엇이 될 것인가’보다는 ‘나는 누구인가’ ‘내가 어디 있느냐’에 대한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고 주님께 물어보라고 조언을 했다. 그녀는 내가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젊은이라고 했다
유럽의 재속 수도회와 기독교 공동체에 관련된 자료와 책자도 소개해줬다. 하지만 내 생각은 달랐다. 1년에 단 한번 만이라도 그녀를 만날 수 있도록 하나님이 허락해 준다면 평생 수사신부의 길을 가도 좋다고 생각할 만큼 남몰래 싹튼 사랑은 깊어만 가고 있었다.
당시 그녀는 계성여중 국어교사이면서 종교부 학생들의 여름수련회 책임자였는데, 난 학생들 레크리에이션 담당자로 그녀와 함께 충북 미원천주교회로 동행한 일이 있다. 수련회를 마칠 즈음 내 심신은 매우 지쳐있었다. 그녀는 내게 어디라도 가서 휴양하며 쉬고 올 것을 부탁했다. 마땅한 곳을 찾지 못하다가 마침 대화 중 알게 된 그녀의 고향집이 떠올라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부탁했다.
도착하니 김 수녀의 어머니와 중학생 조카 등이 날 맞아줬다. 김 수녀가 태어난 집에 그녀 가족들과 함께 있다는 생각에 너무 기뻤다. 어머님으로부터 그녀가 수녀가 되기까지 이야기를 눈물겹게 듣기도 했다. 특별한 휴가를 마치고 서울에 돌아와서 일상 속에 파묻혔다.
어느 날 성 바오로 서원에서 책을 보고 있는데 오랜만에 A수녀를 만났다. 안부를 주고 받다가 여름휴가로 김 수녀의 집에 다녀온 이야기를 무심코 꺼냈다. 대화중 특별히 이상한 점을 느끼지는 못했다.
그런데 사흘이 지나고 그녀로부터 전화가 왔다. 내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걸었기에 먼저 전화가 걸려온 것은 정말 뜻밖이었다. 말투가 평소와 달랐다. 약속을 잡고 만났을 때 그녀의 얼굴은 근심이 가득했다. 교장 수녀가 그녀를 불러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았다. 수녀가 친정집에 남자를 가라고 해도 되느냐”며 책망하며 걱정을 했다고 했다. 어떻게 된 영문인지 짐작은 갔다. 그녀는 다시는 자신을 찾지도, 전화하지도 말라고 애원했다.
그날 이후 수녀원 방문은 말할 것도 없고 전화나 편지, 엽서도 전달되는 일이 없었다. S. P 수녀원 근처를 서성대다 어쩌다 마주쳐도 그녀는 나를 아예 못 본 척하고 지나쳤다. 친하게 지냈던 신부나 수녀들도 나를 경계하듯 서먹하게 대했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8> 퇴원 직후 김 수녀 찾아 ‘수선화’ 노래로 마음 전해
그녀가 병문안 다녀간 후 금세 호전… 내가 쓴 시 ‘그리움’에 답시 남겨
명동성당과 샤르트르 바오로 수녀원을 찾으며 고뇌했던 20대 초반 시절의 최일도 목사와 당시 수녀였던 김연수 사모의 모습.사람과의 관계가 하나둘 끊어지면서 미래의 길도 점차 안갯속으로 사라졌다. 더 이상 견디기 어려웠다. 음식을 먹지도, 잠을 이루지도 못했고 건강이 급속도로 나빠졌다.
만나는 사람마다 “얼굴이 왜 그러냐”고 물었다. 자꾸 헛구역질이 나고 얼굴이 검게 타들어갔다. 당시 오류동에 있던 국립원호병원으로 갔다. 과로와 수면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라며 급성간염으로 추정되니 당장 입원하라고 했다.
어머니와 누나는 당시 나의 행동거지를 무척 못마땅해 했다. 천주교 주변을 맴도는 것부터 싫어했고, 더욱이 김연수 수녀를 놓고 괴로워하는 나를 이해할 리 없었다. 어머니는 병문안도 오지 않았다. 외로움과 그리움을 견디다 못해 그녀가 교사로 근무하는 계성여중으로 전화를 걸었다.
기대하지 않았는데 뜻밖에 그녀가 받았다. 병색이 완연한 내 목소리를 들은 그녀는 통닭 한 마리를 사들고 병문안을 왔다. 너무도 반가웠지만 그녀는 주위의 시선으로 10분도 지나지 않아서 병실을 떠났다. 내가 쓴 시 ‘그리움’과 자신이 쓴 ‘그리움’이란 시를 남겨놓고. 나와 그녀의 시를 소개하고자 한다.
“온갖 수목이 잿빛으로 우거진 / 그대의 뜨락엔 지금 / 몇 구비의 하늘이 구비치고 있습니까 / 사랑하는 슬픔에 / 눈물 짓는 그런 심정으로 / 참으로 사랑하는 이여 / 그대의 가슴엔 지금 / 몇개의 계절이 접히고 있습니까 / 아침마다 새로 태어나는 언어로 / 당신의 이름을 부르고 부를 때마다 / 내 사랑은 자취도 없이 / 연연히 깊어만 가는데 / 몇 만 겹의 장막이 우릴 에워쌌기에 / 당신을 향한 내 그리움은 / 이토록 다 풀리지 않는 것입니까”(최일도)
“바람도 / 아무도 모르게 일어나 / 안으로 치닫더니 / 꽃처럼은 꽃처럼은 살지 못해 / 끝내 살 수 없어 / 소리없는 모반의 깃발로 나부끼는데 / 떨며 나부끼는데 / 바람도 / 바람도 바람도”(김연수)
그녀가 사라진 병실은 다시 적막감에 휩싸였다. 링거를 머리 위에 들고 병원 옥상으로 뛰어가 버스를 기다리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망연히 땅바닥을 응시한 채 차 한대를 그냥 보냈다. 병실에 외로이 남아 있을 내가 마음에 걸렸는지 눈을 돌려 병원 창가를 바라보았다. 이윽고 나를 발견하고는 손을 가슴 높이로 올려 한번 흔들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얼어붙은 자세로, 소리 없는 울음으로 마음을 읽어주며 사랑의 아픔을 고스란히 받아주었다.
그렇게 아무 말도 할 수 없어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그 애잔함과 슬픔이라니. 내게 들려준 도라지꽃의 전설과 함께 그녀는 아직도 내 가슴에 남아 가실 줄 모르는데 말이다. 바로 그때처럼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먼 산을 바로 보고는 이윽고 내게 따뜻한 미소를 보내주고 떠났다. 김연수 수녀의 표정은 온화한 봄날의 훈기 같았다. 입가에 맴도는 잔잔한 그녀의 미소는 세상의 고통을 모두 겪고 난 승자의 그것과 닮아 있었다.
거짓말처럼 그녀가 다녀간 후 병세는 좋아졌다. 퇴원하자마자 수녀원을 찾아갔다. 문전박대를 각오했으나 뜻밖에도 들어갈 수 있었다. 나를 보고 반기면서도 깜작 놀란 그녀에게 “내 말을 잠시만 들어 달라”고 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그대는 신의 창작집 속에서 가장 아름답게 빛나는 불멸의 소곡, 또한 나의 작은 애인이니, 아아 내 사랑 수선화야.’ 나는 작은 목소리로 떨며 노래를 불렀고 그녀는 가만히 듣고 있었다. 노래를 마치자마자 바로 일어나 나왔다. 다음에 이어질 그녀의 말이 듣기가 두려웠기 때문이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9> 수녀원 떠난 그녀… 백방으로 수소문
가까스로 전화 통화했지만 못 만나… 삶 끝낼 작정으로 열차에 올라 통곡
청년 시절 최일도 목사. 친구들과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다가도 당시 명동성당 뒤에 있는 수녀원으로 김연수 수녀를 찾아갔다.매일 새벽기도와 말씀 묵상으로 일기를 쓰며 그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를 계속 써내려가다 1980년 11월 어느 날 수녀원으로 전화를 걸었을 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말았다.
그녀가 교사직을 그만 뒀고 수녀원을 떠났다는 것이다. 너무 황당했고 쓸쓸했고 허무했다. 서둘러 계성여중으로 달려갔고 아무리 주변을 서성여도 그녀는 정말 보이질 않았다. 전국의 성바오로 수녀회 분원마다 전화를 걸어 봤지만 그녀가 있는 곳을 도저히 알아 낼 길이 없었다. 얼마동안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그러다 우연히 수녀들의 대화를 엿듣게 됐고 그녀가 수원 ‘말씀의 집’에서 피정 중인 사실을 알게 됐다.
당시 그곳의 원장 수녀에게 김연수 수녀와의 만남을 눈물로 간청했다. 한 달간 ‘침묵 피정’ 중이라 누구와도 만날 수 없다고 거절했다. 한 달을 기다린 끝에 그녀를 만났다. 그녀는 담담히 말했다. “저는 어떤 경우에도 그리스도 안에서 최 전도사님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저는 하느님께 수도원에서 종신토록 살기로 허원한 사람입니다. 한 달 동안 기도하면서 하느님과의 약속을 지키는 것이 도리라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며칠을 고심한 끝에 다시 수원 말씀의 집으로 향했다. 그러나 그녀는 떠나고 없었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 없었다.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녀의 큰언니 집 전화번호를 알아냈고 언니를 통해 김 수녀가 충남 홍성 광천의 작은 성당에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물어 물어 광천성당을 찾아갔다. 5분 만 시간을 내달라고 말한 뒤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너무 힘들게 해서 미안하다. 먼 길 찾아 왔지만 전도사님이 원하는 말을 해줄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괜찮다”고 태연한 척 말하고는 정확히 5분 후에 일어나 기차역으로 향했다.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걸 확인한 것으로 다행이다. 곧 다시 와서 내 마음을 쏟아놓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건 큰 오산이었다. 일주일 후 아는 형에게 양복을 빌려 입고 친구에게 여비를 빌려 광천성당을 찾았을 때 그녀는 또 다시 그곳을 떠났고, 그 후로는 아무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또 다시 자리를 옮겨 논산에 있는 쌘뽈여고 수녀원에 있었다. 그곳까지 다시 찾아갔지만 수원과 광천에서 만났던 것처럼 다시는 만나게 할 수 없다며 전화 받는 사람마다 냉정하게 끊었다.
학교 근처 제과점 주인 아주머니가 학교 정문 앞에 하염없이 서 있는 내 모습에 감동했다며 수녀원에 전화를 넣어 주어 가까스로 김 수녀와 통화할 수 있었다. “지금 좀 나오세요. 아니면 내가 그리로 갈 겁니다!” 그러자 그녀는 “네 시간이 없으시다고요. 저도 바쁘답니다. 다시 연락주시겠다고요”라는 등 나의 말에 어울리지 않는 대답을 하거나 사무적인 목소리로 안부를 묻는 말만 했다. 옆에 다른 수녀들이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나는 모진 맘을 먹고 한마디를 던진 후 먼저 전화를 끊었다. “정 이러시면 난 이제 섬으로, 가사도로 갑니다. 다시는 내 목소리를 못 듣게 될 거예요. 끝내 사랑과 진실을 마다하고 교회법으로 통제해 온 당신은 곧 후회하게 될 겁니다!”
그 길로 논산역으로 가서 목포행 열차에 몸을 실었다. 정말 삶을 끝낼 심산이었다. 기차는 통곡하는 나를 태우고 무심히 들판을 달렸다. 힘겹고 고단한 삶을 짊어진 이들이 가득한 완행열차 안에서 나는 가까스로 숨을 내몰며 땅끝을 향해 갔다. 목 멘 소리로 김 수녀의 이름 연수씨 연수씨를 부르면서.
***[역경의 열매] 최일도 <10> 죽기 위해 찾은 섬에서 유서처럼 쓴 戀詩
풍랑 속 배에서 하나님 손길 느껴… 마침내 수도복 벗고 내게로 온 그녀
김연수 사모가 십년간 입은 수도복을 반납하고 처음으로 최일도 목사를 만난 날. 최 목사는 “하얀 원피스와 짧은 커트 머리,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영원히 잊을 수 없다”고 말했다.목포에서 ‘옥소’라는 낡은 배를 타고 4시간30분 거리에 있는 섬 가사도로 향했다. 스물넷의 생을 마감하기 전 꼭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선실에 막 들어가려는데 누군가 아는 체를 했다. 전에 서울 오류동 동산교회와 자매결연을 한 가사도교회를 하기봉사대와 함께 찾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이장이던 분이 나를 알아본 것이다. 그분은 동네 사람들에게 내가 왔음을 알렸고, 목회자 없는 예배당에서 설교해주길 부탁했다.
얼떨결에 강단 위에 섰다.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말씀을 전했던 것 같다. 주민들은 크게 감동을 받은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뜻하지 않게 뜨거운 환영을 받았고 주민들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체험했다. 하지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기진 않았다.
이튿날부터는 계획대로 슬픈 내 사랑을 담은 연작시를 쓰기 시작했다.
“진실로 사랑한 그녀를 / 수녀원에 남도록 한다는 것은 / 내겐 피 흘리는 제사요 산 순교나 다름없는 일 / 그러하기에 이제 나는 죽은 목숨이나 다름없소.”(피흘리는 제사)
한 달 가까이 백 편 넘는 시를 짓고 명동 수녀원 본원으로 부쳤다. 그러나 단 한통도 그녀에게 전달되지 않았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수녀원 원장은 내가 보낸 편지를 도착 즉시 불태웠다고 한다.
섬을 떠나기 전 사흘간 쓴 시는 한부씩 더 써서 교회 근처 소나무 아래 묻었다. 유서를 묻은 셈이다. 어머니 앞으로 용서를 비는 글도 몇 장 썼다. 일기장과 끝내 그녀에게 부치지 못한 편지 등을 모아 작은 가방에 넣었다. 배에서 뛰어내릴 때 나와 함께 잠길, 말하자면 부장품들이었다.
다음 날 목포로 향하는 배에 탔다. 얼마 가지 않아 배가 요동치기 시작했다. 하늘이 시커먼 게 예사로운 날씨가 아니었다. 배가 어찌나 심하게 요동치는지 승객들은 나뒹굴었다. 나를 포함한 거의 모두가 구토를 하고 비명을 질러댔다. 며칠 동안 먹지도, 자지도 않았던 탓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런 중에 죽음이 임박했다는 생각이 몰려왔다. 내가 스스로 해치지 않도록 하나님이 나를 이렇게 데려가실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정신을 잃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배는 목포항에 이미 정박 중이었다.
부둣가에 올라서자 이미 죽었던 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이 바닷바람으로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듯했다. 죽고 사는 것 어느 하나도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었다. 벼랑에 선 나를 지팡이로 몰고 가는 듯한 그분의 손길을 도저히 거부할 수 없었다.
순간 출처를 알 수 없는 힘이 솟아났다. 살아서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목포의 달동네에 있는 친구 준오 집을 찾아가 며칠간 머물면서 몸이 회복되자 서울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다음 날 오전 충남 논산의 수녀원에 전화를 걸었다. 웬일인지 그녀가 직접 전화를 받았다. 김연수 수녀는 울먹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감사합니다. 얼마나 기도를 많이 했다고요.” 그러고는 “수녀원에 전화할 필요도 없어요. 건강한 몸과 맘으로 저를 기다려 주세요”라고 말했다. 그렇게 보름간 애를 태우며 기다렸다.
7월 중순이었다. 전화가 걸려왔다. 내게 오겠다고 했다. 내가 가사도로 떠난 뒤 그녀는 하나님께 매달리며 매일 눈물로 간구했다고 했다. “일도씨를 위기에서 건져 주시면 그와 함께 살라는 주님의 뜻으로 알고 아무 조건 없이 따르겠습니다”라고 말이다. 종신허원을 풀어 달라고 교황청에 요청했고 수속 중이라고도 했다. 마침내 그녀는 검은 수도복을 하얀 원피스로 갈아입고 내게로 왔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11> “하나님께 먼저 묻고…” 고민하는 나를 다독인 아내
성당 포기하고 새문안교회 함께 출석… “5세 연상 수녀 안 된다” 모친 결혼 반대
1982년 9월 4일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린 최일도 목사와 김연수 사모가 미소 짓고 있다.그녀는 우리 집 근처에 작은 방 하나를 마련했고 나는 오랫동안 미뤄놨던 책을 다시 잡았다. 목회를 한다면 중도에 포기한 신학공부를 처음부터 다시 할지, 인문학 공부부터 할지 생각이 복잡했는데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을 먼저 묻고 그 길을 함께 걸어가자고 제안했다. 아무리 멀고 험한 길이어도 괜찮다고 했다.
‘올해 시험은 연습’이라는 생각으로 예비고사를 봤다. 기대치 않았는데 결과가 나쁘지 않았다. 장로회신학대 신학과에 원서를 넣었는데 합격할 거라는 생각은 하질 않았다. 합격자 발표 날, 그녀와 서울 광나루의 장신대를 찾았다. 숨을 죽이고 본관 앞 게시판을 살폈는데 놀랍게도 내 수험번호가 합격자 명단에 있었다.
도무지 내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었기에 그날 느낀 기쁨과 부담은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컸다. 그녀의 손을 잡고 본관 로비 건너편 기도실로 들어가 무릎을 꿇었다. “아버지 이 몸을 당신께 바치오니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저는 무엇에나 준비되어 있고 무엇이나 받아들이겠습니다.”
합격 발표 후 경기 동두천에 있는 고등학교에서 그녀에게 연락이 왔다. 국어교사로 근무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녀는 수녀원을 나온 뒤 7개월간 어려운 일이 많았다. 두 사람 다 수입이 없던 것도 그중 하나였다. 그녀는 교회와 성당 사이에서 엄청나게 방황했다. 난 계속 성당에 나갈 것을 권했지만, 그녀는 내가 목회자가 될 사람이기에 내 쪽으로 건너오겠다고 다짐했다. 여러 교회에서 예배를 드려보고는 서울 광화문의 새문안교회가 제일 맘이 평안하다고 했다. 우리 둘은 새문안교회 성도가 되어 새로운 시작을 선언했다.
난 서울 광장동의 신학교 기숙사로, 그녀는 동두천으로 삶의 둥지를 옮겼다. 장신대 입학 후부터 어머니의 성화는 부쩍 늘었다. 목사나 장로의 딸을 배우자로 맞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고통이 줄곧 가슴을 짓눌렀다.
또다시 방황이 시작됐다. 수업이 끝나면 수도원을 찾아 다녔고 용산의 행려자 숙소나 소외된 이웃을 돌보는 시설에서 헐벗은 이들과 한뎃잠을 자기도 했다. 불규칙한 삶은 오래가질 못했다. 과로와 수면 부족으로 인한 영양실조로 또다시 입원했다. 며칠간 병원에서 지내며 흔들리는 마음을 잡고 결심했다. 그녀와 되도록 빨리 결혼하기로.
퇴원해서 기숙사로 돌아오는 날, 우리는 결혼날짜를 1982년 9월 4일로 잡아버렸다. 어머니는 절대로 허락할 수 없다고 했다. 아예 호적을 파가라며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겠다고 했다. 다섯 살 연상의 수녀와 결혼한다는 것은 도저히 용납이 안 된다고 하셨다.
그녀가 수녀원에서 일단 나오면 모든 일이 해결될 것 같았지만 현실은 산 넘어 산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의연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 속에서 그분의 뜻을 다시 확인하는 시간이 된다면 반드시 전화위복이 될 것”이라고 도리어 날 위로했다.
그녀가 개신교에 큰 유익을 주는 목회자 부인이 될 것이라며 기뻐하신 새문안교회 김동익 목사님은 우리 사정을 아시고 전세 보증금을 보태주셨다. 며칠을 찾아 헤맨 끝에 서울 월계동의 낡은 문간방 하나를 전세 150만원에 빌렸다. 화장실도 없는 아주 좁은 방이었다. 그래도 우리는 행복했다.
결혼식 당일, 우리 두 사람의 하나 됨을 만천하에 고했다. 죽음 같은 고통과 수없이 싸우며, 때론 피 흘리는 산제사를 고독하게 올려 드리며 죽었다 다시 살아난 것에 대한 감사함이 넘쳤다. 그러나 그 감격은 큰 시련과 풍랑을 만나게 됐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12>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게 하소서” 가난함 수용
15만3000원으로 세 식구 한 달 생활, 굶고 걷고… 주변 도움에 마음은 따뜻
1985년 예수의 작은형제 수도회 수도원을 찾은 최일도 목사 부부와 자녀의 뒷모습.어느 날 저녁식사를 마친 아내는 중요한 발표가 있다며 싱긋 웃었다. 생명을 잉태했다고 했다. 뛸 듯이 기뻤지만 동시에 과연 아빠가 될 준비가 됐는지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수입이 없는 신학생으로 단칸방에 세 들어 사는 형편을 생각하니 태어날 아기에게 미안하기 짝이 없었다. 아기가 엄마와 조금이라도 가깝게 지낼 수 있도록 동두천과 가까운 의정부로 이사하기로 했다. 나는 월간 ‘새벗’에서 편집기자로 일하고 있던 친구에게 부탁해 아르바이트 자리를 얻었다. 낮엔 학교에서 경건과 학문의 훈련을, 밤에는 이 직장 저 직장 옮겨 다니며 날밤을 지새우는 일이 많았다. 그래도 아빠가 될 거라는 설렘이 커서 피곤한 줄 몰랐다.
1983년 2월 봄방학 동안 의정부로 집을 옮겼다. 어렵사리 미군부대 옆에 있는 방 두 칸짜리 다가구주택 한 층을 빌릴 수 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서울보다 훨씬 싼 가격에 구할 수 있어서 만족했다. 하지만 잔금까지 치르고 보니 집은 비행장 바로 옆이었고, 수도에는 황톳물이 섞인 지하수가 나왔다. 우는 마음을 달래며 그냥 살 수밖에 없었다.
그해 3월 아이가 태어났다. 기도 중에 아이의 이름을 ‘산’으로 짓기로 했다. 산처럼 우람하고 듬직하며, 모두에게 이롭고 높은 사람이 되라는 의미에서다.
나는 다시 교육전도사 사역을 시작했다. 아내는 교직 생활을 정리하고 내 수입으로 살기로 했다. 서로 이의 없이 그렇게 결정한 것은 아이 때문이다. 엄마를 가장 필요로 하는 시기에 곁에 있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당시 우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인간답게 살자’고 비장하게 결의했고 거처는 서울로 옮기기로 했다. 내가 신학교 수업을 마치고 종로로 출근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내 사례비는 17만원이었다. 십일조를 빼고 나면 15만3000원이 세 가족의 생활비 전부였다. 각오는 했지만 절반도 안 되게 줄어든 수입에서 오는 궁핍함은 생각보다 끔찍하고 무서웠다. 아이의 우유를 제외한 모든 물건의 수준을 전보다 현격히 낮췄다. 옷은 살 엄두를 내지 못해 늘 얻거나 빌려 입었다. 차비가 없어 광진교를 걸어 등하교를 하는 것은 부지기수였다. 학교 뒤 아차산의 약수로 점심을 때운 날도 많았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티내고 싶지 않아 웃고 다녔다. 아내와는 ‘일용할 양식으로 만족하면서 살게 도와주십시오’라고 기도하며 궁핍을 즐기는 삶을 이어갔다.
잊혀지지 않는 것은 당시 나를 따뜻하게 안아준 지인들이다. 당시 그 지역에 살던 친구들은 장신대 성종현 교수의 집에 모여 구역예배를 드리고 교제를 나누곤 했다. 어느 가을날 성 교수는 고향 나주의 맛을 함께 나누고 싶다며 배와 감이 담긴 종이가방을 갖고 불쑥 우리 집을 찾았다. 85년 딸 가람이가 태어났을 때도 방문해 기도해주셨다.
내가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하느라 과로로 쓰러져 입원했을 때 병실에 찾아와 눈물로 기도해 주신 오성춘 교수님과 식권을 사주시고 토큰과 아이 분유를 사주신 조활웅 교수님도 평생 잊을 수 없다.
나는 너무 배고프면 친구들을 찾아가 밥을 실컷 얻어먹고 왔다. 내 사정을 아는 친구들은 주머니 쌈짓돈을 슬쩍 내게 건네기도 했는데 그들이 건넨 돈으로 가람이의 분유를 사기도 했다. 가난 속에서 가족의 친밀함은 날로 깊어졌지만 냉혹한 현실은 서러운 눈물을 자주 흘리게 했다. 둘째 아이까지 태어난 마당에 신학생 수입으로 버티기가 힘들었다. 나는 미래를 위한 꿈을 꿀 여유조차 없었다. 결국 아내는 다시 교사로 복직하기를 원했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13> 인생을 바꿔놓은 청량리역 노인과의 만남
나흘 굶은 노숙인 부축해 설렁탕 대접… 독일 유학 대신 다일공동체 구상
장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최일도 목사.신대원 졸업학기 중인 1988년 11월 11일, 휴강 소식에 환호성을 지르며 청량리역으로 향했다. 틈만 나면 어디론가 휑하니 다녀오던 방랑벽이 또 걸음을 재촉한 것이다.
역 광장을 지나고 있는데 대여섯 걸음 앞서 걷고 있던 한 노인이 힘없이 고꾸라졌다. 생면부지의 할아버지를 돕다가 기차를 놓칠까 걱정됐고 다른 누군가가 도움을 줄 것이라는 생각에 그냥 지나쳤다.
춘천에 도착해서 호숫가를 거닐거나 커피숍에서 시를 쓰며 한나절을 보냈다. 일주일 후 모교 채플에서 첫 시집을 발간하는 꿈에 부풀어 있었다. 다시 기차를 타고 청량리로 돌아왔을 때는 밤이었다. 집으로 가기 위해 역광장을 가로 질러가다 소스라치게 놀랐다. 아침에 봤던 할아버지가 그때까지 온몸을 오그린 채 광장에 누워 있었기 때문이다.
마음속에 무언가가 치밀어 올랐다. 지나가는 행인들에 대한 분노였다. 동시에 ‘나는 이 일에 아무 책임이 없다’는 것을 증명할 핑곗거리를 찾았다. 신대원 졸업 후 독일유학을 다녀와 영성수련센터와 산속에 전원교회를 세우겠다고 아내와 이야기를 끝낸 터였다. 쓰러진 그 노인을 돌보는 건 내 삶의 계획엔 전혀 없었다. 그래도 일말의 신앙 양심은 남아 있어서 노인에게 다가가 물었다. “할아버지 진지는 드셨어요?”
아무 반응이 없었다. 어쩌면 대답하지 않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다시 돌아서서 가고 있는데 등 뒤에서 희미한 음성이 들려왔다. “아니.”
뒤돌아서서 다시 할아버지를 봤다. 그때 마음속에 들려오는 음성을 들었다. “나는 먹지 못했다 일도야. 너는 언제까지 나를 이 차가운 바닥에 눕혀 놓을 셈이냐.” 주님의 음성이 죽어가는 양심을 찌르는 듯했다.
강도 만난 자를 스쳐 지나간 레위인과 제사장의 모습이 떠올라 너무 부끄러웠다. 노인을 일으켜 근처 설렁탕집으로 향했다. 노인을 의자에 앉힌 후 설렁탕을 시켰다. 손수건에 물을 묻혀 그의 얼굴을 닦고 사지를 주물렀다. 그는 나흘간 아무것도 못 먹었고, 지하도에서 잠을 청하며, 고물상에 박스 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생계를 유지한다고 했다. 노인과 헤어지고 그를 수용시설에라도 모셔다 드려야겠다고 생각했다.
이튿날 그를 다시 만나기 위해 청량리역 광장의 시계탑을 찾았을 때 할아버지는 다섯 명의 행려자를 데리고 나왔다. 나는 울며 겨자 먹기로 그들에게 설렁탕을 사드렸다. 그들은 청량리 수산시장과 야채시장의 쓰레기더미에서, 경동시장의 한약방 처마 밑에서 잠을 청하고 역시 끼니 거르는 것은 일상이라 했다.
‘아직도 수도 서울 한복판에서 이런 일들이 벌어지고 있구나. 나는 내 가족만 알고 살아 왔구나’ 하는 자책감이 들었다. 할 수 있다면 그들에게 먹거리와 잠자리를 제공해 주고 싶었다.
그날 이후로 가끔씩 그분들을 만나러 청량리로 갔고 용돈은 날개 달린 듯 날아갔다. 턱없는 지출은 가계에 타격을 줬다. 아내는 혹 내게 다른 여자가 생긴 것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 하게 됐다. 오해를 풀기 위해 하루는 아내와 함께 청량리역 근처 설렁탕집을 찾았다. 그 할아버지와 여덟 명의 행려자들은 이미 식사를 끝내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말없이 밥값을 치르고 나오자 아내는 이 일을 계속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질 못했다.
이후 아내는 나를 말렸고 별명을 지어 불렀다. 일명 ‘대책없음’이라고. 고민 끝에 단안을 내리며 모질게 마음을 먹었다. 청량리역 가까운 곳에 교회와 다일공동체를 반드시 세워야겠다고. 독일유학과 전원 공동체의 꿈을 고이 접어둔 채.
***[역경의 열매] 최일도 <14> 588 포주들 핍박… 교회 비운 새 십자가가 쓰레기장에
청량리에 교회 열고 행려자 라면 대접 “거지들 얼씬 못하게 하라” 항의 빗발
1989년 서울 청량리 588-152번지 인쇄소 창고에 마련한 다일공동체의 첫 번째 삶의 자리.청량리역 안에 있는 철도청 소유의 건물을 빌려 인쇄업을 하던 신길순 형제를 찾아갔다. 다일공동체 교회 창립을 위한 준비 기도회를 그의 인쇄소에서 갖고 싶다고 말했다. 자칫 부담을 줄까 봐 행려자들을 돌볼 계획이라는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그는 흔쾌히 받아들였다.
1989년 7월 4일, 첫 준비 기도회를 드렸다. 인쇄소에 붙어있는 간이 사무실이었지만 공간이 있다는 것만도 감사했다. 아내는 내게 “6개월 안에 그만두겠지만 그것도 좋은 경험이 될 테니 잘해보라”고 했다. 다양성 속에 일치를 추구하고,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존중하는 ‘다일’ 공동체 교회가 은혜롭게 창립될 수 있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인쇄소 창고를 예배당이자 나눔의 집으로 바꾸는 작업을 했다. 66㎡(20평)가 안 되는 작은 공간이지만 정성을 들여 꾸몄다.
89년 9월 10일, 마침내 창립예배를 드렸다. 은사이신 당시 장신대 정장복 교수와 한신대 예영수 대학원장 등 많은 분이 참석해 주셨다. 가난한 교회의 창립예배치고는 풍성하고 화려했다. 순서가 모두 끝난 뒤 정 교수는 내 어깨를 두드리며 말씀하셨다. “오늘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와서 좋았네만 당장 다음 주부터는 무척 쓸쓸히 지내시겠구먼. 이미 각오한바 아닌가. 고비를 잘 넘기리라 믿네.”
정말 그다음 주부터 교회에는 나와 아내를 포함해 다섯 명의 성도밖에 없었다. 세 명의 성도마저 각자 사정에 따라 1년도 안 돼 다 떠났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청량리 588 뒷골목의 작고 쓸쓸한 예배당. “왜 저를 이곳에 보내셨느냐”고 주께 묻고 또 물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 마음을 다잡고 거리로 나섰다.
등산용 버너와 코펠을 들고 청량리역 주변의 행려자들, 경동시장 구석구석에 누워있는 노숙인 형제들과 무의탁 노인들에게 라면을 끓여드리는 일을 시작했다.
물 인심은 좋아서 가게와 음식점마다 물 좀 달라고 하면 거절하는 곳은 거의 없었다. 예배당으로 모셔 와서 라면을 끓여 드리기도 하고 그들이 있는 장소로 가서 드리기도 했다. 술에 찌들어 주정하는 이들은 교회로 모시고 오기 힘들었다.
짝을 지은 행려자들이 예배당을 찾기 시작했다. 나는 날마다 즐겁게 라면을 끓였지만 기쁨은 길게 가질 못했다. 교회 옆 인쇄소와 목재소 등 인근 상가의 사람들이 화를 냈다. 거지들을 동네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하라고 내게 호통을 쳤다.
배척은 말로 끝나지 않았다. 어느 날 교회 밖에서 누군가의 신음소리가 들렸다. 나가보니 할아버지 한 분이 심한 화상을 입은 허벅지를 내놓은 채 다리를 끌며 오고 있었다. 술을 마시고 누웠다가 그만 다리를 모닥불 잿더미에 올려놨다는 것이다. 그분은 내게 아프다며 병원에 보내 달라고 애원했다.
할 수 없이 역전 파출소로 뛰어가 도움을 청했다. 죽어도 경찰차는 안 타겠다는 그를 설득해 시립병원 행려자 병동에 데려다줬다. 파김치가 돼 교회로 돌아왔는데 문이 활짝 열려 있었다. 모든 집기가 밖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벽 중앙에 걸어놓은 십자가도 보이지 않았다. 쓰레기 소각장에 처박혀 있었다. 누군가 이곳에 예배당이 있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피가 거꾸로 솟구쳤다. 하지만 누구에게도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다음 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청량리 뒷골목을 빗자루로 쓸었다. 청량리 588 포주들은 내가 지나갈 때마다 “예수쟁이 놈이 재수 없게”라며 소금을 뿌리거나 가래침을 뱉기도 했다.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제부터 올 것이 오는구나’ 싶어 담담해졌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15> 라면 대신 쌀밥에 소고깃국… 부활절 첫 ‘밥 나눔’
아내의 전 재산 79만원 통장으로 결행… ‘부활절 오찬’ 소문 나자 곳곳서 도움이
다일공동체 초기 최일도 목사가 대접한 라면을 먹고 있는 행려자와 무의탁 노인들.청량리의 겨울은 길고 험했다. 창립예배를 드리고 얼마 후 그해 연말까지만 예배당을 사용할 수 있다는 통보를 받았다. 남은 기간은 한 달 남짓, 공간을 구할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집 없고 배고픈 이들을 가족처럼 섬길 수 있는 나눔의 집을 허락해 달라고 기도했다.
나는 매일 청량리 일대를 돌며 공간을 찾았다. 마땅한 곳을 찾기도 했지만 건물주들은 번번이 거지들 밥 먹여주는 교회엔 절대로 빌려 줄 수 없다고 했다. 낙심하고 있을 때 도움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왔다. 신대원 1년 선배이자 당시 주님의교회를 개척해 목회하던 이재철 목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분과는 장신대 신대원 재학 시절 교정에서 몇 번 마주친 것이 전부였다. 이 목사는 우리의 절박한 소식을 들었다며 선교비를 다일공동체를 위해 쓰고 싶다고 했다. 그때 주님의교회는 창립한 지 2년 밖에 안 된 신생교회였다. 이 목사는 예배당 건물을 짓지 않고 헌금 총 수입의 50%를 선교비로 쓰기로 교인들과 약속했다고 했다. 주님의교회로부터 600만원을 지원받았다. 이 목사는 이후 200만원을 아무도 모르게 더 보내왔다. 그 귀한 도움을 받아 청량리 로터리에 있는 낡은 건물의 4층 옥상 위 가건물을 빌릴 수 있었다.
그 무렵 나는 밖에서 자는 날이 많았다. 일명 ‘라면공동체 가족’이던 행려자, 노숙인들과 함께 길바닥에 눕기도 하고 예배당에서 어울려 자기도 했다. 세탁할 옷가지를 들고 집에 오면 아내는 아이들에게 “얘들아, 대책 없는 분 오셨다”고 인사를 시키곤 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아내는 며칠 동안 제대로 먹지 못한 남편을 위해 정성스레 밥상을 내놓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밥상을 받고 목이 메었다. 아무리 삼키려 해도 밥이 넘어가질 않았다. 속울음이라는 걸 그때 처음 경험했다. 밥을 굶고 거리를 배회하고 있을 이들이 생각났다. 난 집에서 아내가 해주는 밥을 먹는데 그들에게는 라면밖에 대접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자책감이었다.
아내는 평소답지 않게 화를 냈다. “밥 한 끼도 편히 못 먹고 청승 떨려면 당장 그만둬요. 나도 정말 못 참겠어요.” 아내는 눈물을 터뜨렸다. 한참을 울더니 아내가 말했다. “그만 두지 않으려면 얼른 이밥 먹고 기운내서 그들에게도 밥을 해주면 될 거 아녜요.”
눈이 퉁퉁 부어오른 아내는 내게 통장 하나를 건넸다. 우리 집에 있는 현금 전부라면서 내 소원대로 밥 한끼라도 손수 지어 나누어 드리라고 했다. 너무 미안했다. 통장을 열어보니 79만원이 들어있었다.
그 돈으로 전기밥솥 네 개와 40명분 수저를 샀다. 반찬, 배식할 사람, 밥을 옮길 도구 등 많은 것이 더 필요했지만 일단 밥을 손수 지어 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라면공동체 가족들에게 부활절 점심 때 청량리역 광장에 다 모이라고 했다.
그 말이 얼마나 멀리 퍼졌는지 곳곳에서 도움의 손길이 나타났다. 소망교회의 손은경 전도사와 여전도회 회장이 밥집을 지원하고 싶다고 현장을 찾아왔다. 그분들이 모금한 1000만원의 전세 계약금으로 밥을 지을 작은 공간을 빌렸다. 밥 나눔이 있을 거란 소문을 들은 청량리경찰서 정보과 형사들도 날 찾아왔다. 역 광장에서는 밥 나눔을 할 수 없다고 했다.
실랑이를 벌이다가 결국 형사가 직접 알려준 청량리 야채시장 쓰레기더미 위에서 처음 밥을 나누기로 했다. 흰쌀로 지은 밥에 소고깃국, 김치와 잡채 등을 식판에 담아 나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과 국을 처음으로 떠먹던, 지극히 작은 자들의 미소를 난 영원히 잊을 수가 없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16> “있는 돈 다 내놔” 내 목에 칼 겨눈 행려자
밥 먹이고 잘 곳 줬더니 원수로 갚아… 공동체 생활, 뼈깎는 담금질 이어져
최일도 목사(왼쪽)와 다일공동체 식구들이 배고픈 이들을 위해 마련한 밥과 국, 반찬이 담긴 통을 수레에 실어 옮기고 있다.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이 마련되면서 그동안 생각으로만 머물던 공동체 생활이 구현되었다. 하지만 삶의 자리가 너무 열악하다 보니 공동체 생활을 희망하는 사람은 나와 두 명의 신학생, 행려자였던 전씨, 칼갈이 아저씨뿐이었다. 공동체 구성원의 자격엔 그 어떤 조건도 걸지 않았다. 왕따를 당하거나 비난받는 사람일수록 받아들이자고 했다.
공동체 식구들은 오전 5시30분에 일어나 아침기도를 올리고 봉사자들과 함께 점심밥을 지었다. 봉사자들이 매일 온다는 보장도 없어 음식이 담긴 무거운 통들을 나르는 일이 쉽지 않았지만 매우 기쁜 마음으로 했다.
밥을 함께 먹는 이들은 행려자나 무의탁 노인만이 아니었다. 영세 상인들과 의무교육인 초등학교 교육도 받아보지 못한 어린이들도 있었다. 배고픈 사람이면 누구나 밥을 먹도록 했다.
무료급식을 하면서는 봉사자들에게 예수의 ‘예’자도 꺼내지 못하게 했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봉사자들이 간혹 있었는데, 날 아주 심하게 욕하고 떠났다.
밥 한 그릇에 예수님을 팔지는 말자고, 참사랑을 갖고 진정성을 가지고 대하면 결국은 예수 사랑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그들을 설득했다. 하지만 나를 향해 급진적이라며 질책하고 정죄하는 근본주의자나 율법주의자를 대하는 일이 포주나 조폭을 상대하는 것보다 힘들었다. 그럴수록 ‘복음을 입술로 전하진 말자. 삶으로 예수님을 전하자’고 굳게 다짐했다.
가끔 공동체를 비울 때가 있었는데 그 틈을 타고 난감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했다. 행려자였다가 공동체 생활을 하게 된 A씨가 자원봉사자들에게 용돈을 요구했던 것도 그중 하나다. 봉사자들이 그를 가엾게 여기고 돈을 줬고 A씨는 그 돈으로 늘 술을 마셨다. 문제는 술만 들어가면 폭언을 하고 행패를 부린 것이다. 참다못해 회의 끝에 그를 제명하기로 했다.
그날 밤 섬뜩한 기분이 들어 자다가 눈을 떠 보니 A씨가 부엌칼을 내 목에 들이대고 있었다. 그는 “있는 돈 다 내놔. 안 그러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했다. 기가 막혔다. 길에서 굶어 죽어가던 사람을 데려다 밥 먹이고 잠자리도 제공했더니 은혜를 원수로 갚는 사람이 늘어갔다.
또 다른 구성원인 B씨는 판단력이 흐려 가끔 뜻하지 않은 사고를 몰고 왔다. 밤늦도록 촛불을 켜놓고 기도하다가 잠들어 화재를 내거나 음식 만들다가 소금이 모자란다고 다른 집에서 소금을 가져와 절도범으로 몰리기도 했다.
다른 세입자들은 우리가 건물에 들어온 것을 못마땅해했다. 일부러 수돗물 공급을 끊기도 했다. 수백 명 분의 밥을 짓는 것도 문제였고, 한여름에 설거지를 못해 잔반이 쉬거나 썩는 일이 생기기도 했다. 어떤 날은 물이 나오고 있음에도 설거지 거리가 잔뜩 쌓여있는 일이 있었다. 왜 처리하지 않았는지 물었더니, 내가 두 번이나 설거지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부러 남겨둔 것이라 했다. 죽어가는 사람들 살려보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느라 그랬던 건데 기가 막혀 아무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일들이 정기적으로 반복됐다. 하나님은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지 않은 사람들과 공동체를 꾸려 살아가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에 대해 살을 찢고 뼈를 깎는 듯한 고통을 통해 깨닫게 하셨다.
나같이 모난 곳이 많고 함량 미달인 자를 하나님이 편하게 쓰기에는 멀었다고, 멀어도 한참 멀었다고 생각했다. 초창기 만난 그분들이야말로 쓸모없는 나를 담금질하는 데 귀하게 쓰임 받은 도구라 여기게 됐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17> 오늘 밥퍼 앞마당서 서른 번째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
야채 시장 쓰레기 더미서 첫 배식 후 30년… 오늘까지 1000만 그릇 넘도록 중단 없어
지난해 12월 노숙인과 무의탁노인 등이 참여해 거리 성탄예배를 드리는 모습.쓰레기 더미 위에서 밥을 짓고 나누는 모습을 본 청량리 야채시장 영세 상인들의 마음이 움직였다. 배식이 끝나고, 빌려 온 그릇을 돌려 드리기 위해 손수레를 끌고 야채시장을 지나가는 길이었는데 채소 팔던 아주머니가 손수레를 세웠다. 그분은 뭐라고 말도 하기 전에 무와 배추 꾸러미를 내가 끄는 손수레에 올려놓더니 말했다. “이거 내일 아침에 설렁설렁 썰어서 무국 해드리면 좋겠어요.”
조금 더 가니까 이번에는 생선 팔던 아저씨가 생선을 아예 궤짝으로 올렸다. “이거 팔다가 남은 거긴 하지만 상하진 않았소. 가져가서 저녁 때 조려 두었다가 내일 반찬으로 먹으면 좋을 거요.” 그도 나도 소리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 집에 갔더니 누군가가 쌀을 가져다 놓았다. 믿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느 날 쌍굴 다리 아래로 리어카를 밀고 나갔더니 누군가가 벽에다가 ‘사랑의 나눔 있는 곳에 하나님께서 계시도다’라는 글을 정성스럽게 써 놓았다. 그 벽 앞에서 얼마나 많이 또 울었는지 모른다.
단 한 끼라도 함께 나누기 원해서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시작한 나눔이었다. 당장 내일의 대책이라곤 아무것도 세우지 못했다. 그런데 우리 공동체의 소식을 들은 이들의 마음을 하나님이 감동시켜 주셨다. 사랑이 나눠지는 곳엔 지금도 여전히 하나님이 함께 하시며 기적이 일어난다. 야채 시장 쓰레기 더미에서 처음 배식을 시작한 그날 이후 30년이 다 돼가는 오늘까지 1000만 그릇이 넘도록 하루도 먹을 거리가 없거나 자원봉사자가 없어서 밥의 나눔이 중단되는 일은 없었다.
어떤 이들은 이를 현대판 ‘오병이어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물론 나는 기적을 믿는 사람이다. 하지만 어떤 사람이 나서 한강을 두 쪽으로 가른다 해도 나는 그런 기적은 믿지 않는다. 쫓아가서 구경할 생각도 없다. 사랑에 근거하지 않은 기적엔 나는 아무 감동을 느끼질 못했다.
다른 종교에도, 심지어는 이단 종파에서도 신기한 일은 갖가지 형태로 일어난다. 인도에 가면 별별 희한한 사람이 다 있다. 나무 위에 까치처럼 매달려서 100일을 살기도 하고, 물속에서 50일씩 지내는 사람도 있다. 자기 몸을 상하게 하고 피를 쏟고도 멀쩡하고 작두 위를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건가. 그 행위 안에 참사랑이 없다면 아무것도 아니다. 천사의 말을 하는 사람도 사랑이 없으면 그저 울리는 꽹과리나 같다고 주께서 말씀하셨다.
바로 오늘 2017년 12월 25일, 밥퍼 앞마당에서는 서른 번째 ‘거리에서 드리는 성탄예배’가 열린다. 1988년 12월 25일, 노숙인 형제 세 사람 넙죽이, 억만이, 이차술과 초 한 자루 켜들고 쌍굴 다리 옆에서 언 손을 호호 불며 캐럴을 부르던 것이 처음 예배였다. 그 세 사람 중 둘은 길에서 잠을 청하다가 얼어 죽고 말았다. 한 사람 이차술 형제만이 살아남았고, 그는 봉사자로 거듭나 17년째 헌신하고 있다.
이제는 매년 각 언론사에서 우리 공동체의 거리 성탄예배를 소개하고 있다. 역대 대통령 후보들이 찾는 자리가 됐다. 드러낸 일이 없는데 드러나고야 말았다. 우리 모두 겸손하게 말구유로 내려가지 않고는 성탄의 정신은 실현되지 않는다. 이젠 제발 우리 시대 작은 자라고 불리는 형제자매들에게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님만 전해지는 성탄이 되길 소원한다. 청량리의 무의탁 노인이나 청와대 대통령이나 목숨은 똑같이 소중하다. 생명있는 곳이면 그곳이 어디든지 초막이든 궁궐이든 사랑의 나눔이 있는 곳에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역경의 열매] 최일도 <18> 588 희야 자매 “아저씨는 희망 일깨운 ‘꿈퍼’ 목사님”
아내의 시집·내 책 반기던 어린 누이들 “이곳 벗어나 꿈 이루게 기도해주세요”
청량리 588 집창촌과 이를 바라보는 최일도 목사의 뒷모습.숙이가 이사 가던 날,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은 봉사자들로 북적댔다. 근모 형제와 함께 숙이의 방에 찾아갔다. 골목길에 세워둔 용달차가 꽤 오래 기다렸는지 ‘왜 이제야 오느냐’는 눈치였다. 짐이 빠져나간 숙이의 방은 적어도 그녀에겐 붉은 방이 아니었다.
포주 아주머니가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쟤가 행복하게 살길 빌겠어요. 숙이처럼 착한 애는 어딜 가나 인정받지 뭐.”
이 동네에 정말 기적 같은 일이 생긴 것이다. 자신의 돈벌이를 위한 기계라고 생각하는 직업여성의 새로운 삶을 위해 포주가 등을 떠밀며 축복해주다니. 믿어지지 않는 이 놀라운 현실 앞에서 그저 할 말을 잃었다. 그러자 포주 아주머니가 말했다. “아 뭐해요. 목사가 기도나 할 일이지. 숙이야 넌 좋겠다. 그렇게 목사님 얼굴 한 번 더 보고 가면 좋겠다고 하더니.”
난 너무 감격스러워 말을 할 수 없었고 침묵으로 기도드릴 수밖에 없었다. 588번지의 주민으로 더불어 살다보니 그네들은 생각보다 훨씬 마음이 약했고 눈물이 많았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딱한 처지를 그냥 지나치질 못했다. 그런 그들에게 우리도 점점 호감을 갖게 됐고, 마침내 음식을 나누며 기쁨과 슬픔을 서로 들어주고 격려하는 사이로 발전했다.
시집을 들고 가던 날 한 펨푸(호객꾼) 아주머니가 “그 책 내게도 보여줄 수 있냐”고 물었다. 나는 나눔의 집 앞 길 위에 책을 잠시 풀어놓고, 주변에 있던 직업여성들과 호객꾼, 포주들에게도 한 권씩 나눠주기 시작했다. 책을 받아든 그들 얼굴에 환한 웃음이 가득 번졌다.
588 뒷골목에서 책 잔치가 벌어졌다. 음식이나 좋은 옷, 생활용품 등을 나눠줄 때 행려자 무의탁노인들이 모여 인산인해를 이뤘을 때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던 그들이었다. 하지만 시집을 나누자 저마다 나와서 받아가는 거였다. 신선한 충격이었다. 새로운 문화선교의 길을 우리 다일가족들에게 가르쳐 주는 기회가 됐다.
가정과 가족, 친구들을 떠나 몸으로 세파를 헤쳐 가는 그들이 목말라하는 것은 결코 물질적인 도움이 아니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같은 상투적인 전도 구호는 더더욱 아니었다. 오전 내내 가사상태에 빠진 듯 활기 없던 거리에 해가 기울고 붉은 등이 켜질 무렵, 반라의 몸으로 진열대에 쭉 늘어앉아 몸을 파는 어린 누이들이 그리워하고 목말라하는 것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서정적인 시와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였다.
돈을 주고 육체를 사고파는 588 뒷골목에 아내의 시집과 내 책이 나누어지던 날, 조금은 민망한 표정으로 다가섰지만 시집을 받은 그날부터 나를 ‘꿈퍼 목사’라고 부르던 희야 자매가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저씨를 밥퍼 목사님이라 부르지만요 내게는 꿈퍼 목사님이에요. 그동안 아무 희망 없이 살던 내게는.”
난 그때 사람만이 희망이란 사실을 절감했다. 사랑하는 누이들의 찢어진 마음속에 간직한 못다 피운 아름다운 마음을 읽어낼 수가 있었다. 희야는 숙이처럼 인간적인 포주를 만나질 못해서 여러 번 도주를 시도했다 심한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희야의 얼굴에 난 상처를 바라보고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떨구고 떨며 입술을 깨물고 있자 희야가 도리어 다가와 날 위로했다. “괜찮아요, 꿈퍼 목사님. 이번에 또 얻어맞고 붙들려 왔지만 반드시 여길 빠져나갈게요. 사람답게 살아보는 꿈을 반드시 이루도록 계속 기도해줄꺼죠.”
그날 밤 ‘주여, 지난밤 내 꿈에 뵈었으니 그 꿈 이루어 주옵소서’ 하는 찬송 490장을 밤이 하얗게 새도록 불렀다. 너무 감사하고 아파서 울며 불렀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19> 개미군단 십시일반… 무료병원 설립 기적
시장 한모퉁이 무료진료소로 시작… 다일 가족들·직업여성들도 헌금
서울 동대문구 시립대로 다일천사병원 전경. 이 병원은 한국에 세워진 기독교 최초의 전액 무료병원이다.다일천사병원이 오늘까지 운영되고 있다는 건 기적이다. 이 병원은 한국 기독교 최초의 전액 무료병원이다. 말 그대로 개미군단이 십시일반 정신으로 설립해 운영하는 자선병원이다.
지난 15년 동안 무의탁 노인, 노숙인, 외국인 근로자 및 절대 빈곤지역에 사는 이웃나라 어린이 등이 찾아와 생명을 얻고, 치유와 회복을 경험하는 역사가 충만했다.
길바닥에 누워있는 환자들을 병원에 입원시켜 드리지 못한 채 다시 차에 태워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으로 모시고 올 때면 나는 실의와 절망에 빠졌다.
“하나님, 어쩌란 말입니까. 앞이 캄캄하네요. 대안이 안 보입니다.” 미아리 성가복지병원에 할머니 한 분을 입원시켜 드리지 못하고 거절당한 날도 하나님께 따졌다. 그날 마음속에 들려온 세미한 음성이 있었다.
“일도야. 나의 대책은 너 자신이다.” 응답은 너무 막연했다. 사글세 20만원 내기도 버거운 다일공동체가 무슨 수로 대책이 된단 말인가. “하나님, 부디 제가 할 일과 가야 할 길을 깨닫게 도와주세요. 제발 하나님.”
청량리 588뒷골목에서 진행했던 무료진료소는 늘 한계에 부닥쳤다. 마땅한 공간이 없어 처음에는 채소 썩는 냄새가 코를 찌르는 시장 한 모퉁이에서 진료를 했다. 이후 청량리 농수산물 조합건물 한 구석을 빌리거나 나눔의 집의 비좁은 방을 치워 환자를 돌봤다.
찾는 이는 나날이 늘었다. 언제 씻었는지 모를 환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으면 “차라리 시궁창에 코를 처박고 있는 편이 더 나을 것 같다”고 토로하는 의사와 간호사도 있었다.
환자들은 일주일 내내 다일공동체 나눔의 집을 들락거렸다. 그때마다 “진료는 토요일과 공휴일에만 하니 돌아가세요”라며 궁색하게 말했지만 그들은 아랑곳없이 아픔을 호소했다.
주말 진료에 오는 의대생들은 용돈을 털어 의약품을 준비하고 선배 의사들을 찾아다니며 모금을 해서 노인들의 틀니도 직접 제작하는 등 헌신했다. 하지만 상설 진료소는커녕 전담 의사와 간호사가 없었고, 의료장비는 그야말로 원시성을 벗어나지 못했다. 단 하나, 헐벗은 영혼에 대한 뜨거운 사랑만이 있었다.
다일교회 신자들과 공동체 가족들이 소외된 이웃들을 위한 기독교 최초의 상설 무료병원이 마련되길 간절히 기도했던 것은 이런 연유 때문이다. “100원부터 100만원까지 헌금하는 소액기부운동으로 전액 무료병원을 세우겠다고 하면 세상 사람들은 어쩌면 우리를 미쳤다고 할지 모릅니다. 웃음거리가 되더라도 아랑곳하지 말고 주님의 약속을 굳게 믿읍시다. 열심히 뛰고 달리며 이 자리에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를 쌓아봅시다. 주님께서 친히 이루실 것입니다.”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아멘”을 합창했다. 한 달 후 다일가족들이 모은 돈 1100만원과 588번지 아주머니들과 직업여성들이 모아준 47만5000원을 합한 1147만5000원을 무료병원 설립을 위한 밀알 헌금으로 드릴 수 있었다.
천사병원의 기적은 이때부터였다. 늘 다일공동체를 아끼고 사랑해주는 조성기 목사님과 김동호 목사님 등 선배들과 장신대 교수님들이 발 벗고 나서서 협력해 주셨다. 후원회원들과 협력교회들은 100만원을 선뜻 맡겼고, 학생들과 가난한 이웃들은 매달 5만∼10만원씩 분납하겠다고 약속했다.
천사의 사랑을 모아 무료병원을 세우고 운영해보자는 이야기는 KBS 성탄특집 방송을 통해 전국에 확산됐다. 현재까지 ‘천사운동’에 1만2000명 이상이 후원에 동참해주셨다. 기적이라는 단어 이외에 어떻게 설명할 길이 없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0> 고독사하는 노인들 위해 ‘작은천국’ 개소
무의탁 노인·노숙인들 정성으로 섬겨… 입소 후 90%는 세례받고 새삶 얻어
최일도 목사가 지난해 5월 9일 다일작은천국에서 별세한 김휴식씨의 천국환송예배를 드린 뒤 김씨 시신이 실린 구급차에 손을 올려 작별인사를 하고 있다.고독사하는 분들이 주변에 많이 늘어났다. 피붙이 하나 없이 홀로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무의탁 노인과 거리에서 죽음을 맞닥뜨리는 병든 노숙인들, 가족에게 버려져 홀로 돌아가시는 분들을 섬기기 위해 웰다잉 하우스가 될 ‘다일작은천국’을 2011년 5월 31일 개소했다.
이 땅에서 가장 외로운 천사들이 노상에서 죽음을 맞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시작한 일이다. 천국 가기 전까지 함께 울고 웃으며 소망을 나누기 위함이다. 다일작은천국 덕분에 영원한 쉼을 누리며 천국 시민으로 살아가시는 분들이 많아졌다.
서울시가 노숙인 쉼터 41곳에서 더 이상 돌볼 수 없는, 임종을 앞둔 분들 때문에 걱정이 많다며 다일공동체가 맡아주면 좋겠다고 간청을 해왔다. 지극히 작은 자를 예수님처럼 여기고, 가족으로 품어 더불어 살아가자고 하나님 앞에서 다짐했기에 그 요청을 받아들였다.
“아무도 돌보는 이 없고, 사람들이 가까이 가기를 꺼려하고, 돌보기 힘든 분들이 있다면 저희 다일천사병원에 보내주십시오.” 그랬더니 서울시는 노숙인들의 자활을 위한 영성수련 프로그램인 ‘다시 한 번 일어서기’까지도 보내 우리들이 돌봐 줄 것을 부탁했다.
다일천사병원과 다일작은천국이 우리 사회의 소금과 빛이 되며 어둠을 밝히는 작은 촛불로 계속 쓰임받는 것은 주님의 은혜다. 또 천사 후원회원과 만사 후원회원 덕분이다. 매월 1만원씩 후원하시는 분들이 3만여명으로 늘어나면 ‘작은천국’에 입소하기 원하는 분들을 천사병원에서 더 받아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도록 할 수 있다. 인간으로 그들의 권리를 지켜주고 천사병원에서 행복하게 임종할 수 있도록 섬길 수 있으니 말이다.
한 건물 안에 작은천국과 천사병원이 함께 있어 의료적인 접근이 용이하다. 그러다 보니 이에 대한 소문이 퍼져 작은천국에 들어오고 싶다는 문의가 전국에서 하루에도 몇 통씩 오고 있다. 주한 미국대사관 영사가 한국계 미국인인 홈리스 한 분을 임종 때까지 돌봐 달라고 당부하고 간 일이 있었다.
“그 많은 대학병원과 종합병원을 다 두고 이곳으로 모시고 왔느냐”고 물었더니 그 영사는 “이곳이야말로 한국인이든 미국인이든, 인종에 관계없이 아무것도 없는 사람에겐 천국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답했다. 당시 마크 리퍼트 주한 미국대사는 ‘진실로 감사하고 감동했다’며 감사장을 보내왔다.
대부분 말기환자로, 입소했다가 치유되고 회복해서 놀라운 변화를 체험하는 분들이 언어와 피부색, 종교를 초월해 늘고 있다. 자립 자활 가능성이 있는 입소자는 집중 건강관리를 하고 있다. 사회적 재활의 초석을 마련하도록 적극 지원하고 있는 임정순 원장님과 김은겸 김승규 이기환 박하림 안금영 조윤호 김인 남연옥님 같은 분들은 이 땅 위의 천사나 다름없다. 그 모든 궂은일과 어려움을 다 이겨내고 날마다 웰다잉 하우스를 지상천국으로 만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작은천국에 입소하는 이들은 희망을 잃어버린 채 절망이 머리와 가슴을 지배하고 있던 분들이다. 하지만 신기한 것은 짧게는 6개월 길게는 3년 이상 가족처럼 지내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90%가 세례 받고 신자가 돼 천국시민으로 영원히 산다. 절대로 세례 받도록 강요하거나 부탁하지도 않는데 말이다.
서울시가 인가한 41곳의 노숙인 쉼터 이곳저곳을 돌아다니신 분들이 하나같이 “다일작은천국은 노숙인과 무의탁 노인들이 ‘다시 한 번 일어서기’에 가장 좋은 지상천국”이라는 말을 거의 빼놓지 않고 하는 이유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1> 55세 담임목사 은퇴… 퇴직금 헌금하고 사택 반납
내 것 아닌 것 같아 인세 3억도 헌금… ‘챙긴 게 얼마나 되길래’ 되레 헐뜯어
최일도 목사(오른쪽)와 다일교회 2대 담임목사로 부임한 김유현 목사.청량리 588 뒷골목에서 시작한 다일교회는 고 한경직 목사님의 배려로 대광고등학교 시청각실과 대강당에서 예배를 드리게 됐다. 성도 1000여명이 모이는 교회로 성장했다.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것 같아 몸집을 줄이기로 교우들과 약속했다. 주민과 함께하는 교회를 꿈꾸며 교회를 분립, 2007년 남양주에 자리 잡은 다일교회는 400∼500명이 모이는 지역교회가 됐다.
“다일공동체의 사회봉사활동과 영성수련에만 전념하고 싶습니다. 일체가 은혜요 감사뿐입니다.” 이 말을 남기고 난 55세에 교회의 담임목사직 은퇴를 결심, 2010년 9월 10일 실행에 옮겼다.
재정 절반 이상을 사회로 환원하는 교회, 6년마다 재신임을 물어야 하는 교회라 교역자들이 많이 몰리진 않았다. 교단이 달랐지만 장로님들의 간청으로 김유현 목사를 다일교회 2대 담임으로 모시게 됐다. 다일복지재단 사무국장이던 그가 후임자가 될 줄은 교인들도 김 목사 본인도, 나도 몰랐다.
“다일교회는 단 한 번도 하늘을 찌를 듯한 예배당과 사람이 구름 떼처럼 모이는 것을 목표로 삼은 적이 없습니다. 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일에는 둘째가지 맙시다. 우리 교회에서는 힘겨루기를 영원히 추방합시다. 형제의 허물을 덮어주고 서로 위로하고 서로 사랑합시다.”
김 목사와 교우들에게 건넨 마지막 부탁이다. 당회에서는 담임전도사 2년, 담임목사 20년의 퇴직금을 계산해보니 4000만원이 될 것 같다고 말했다. “얼마를 주더라도 전액 헌금해 장학재단을 만드는 데 밑거름이 되면 좋겠다”고 했더니 “그러면 4억원을 드렸다가 4억원을 되돌려 받아 최일도장학재단을 만들자”고 답해 모두가 크게 웃었다.
퇴직금 전액을 사회봉사와 평화·인권 운동에 뜻을 둔 학생, 교회 갱신과 일치에 뜻을 둔 신학생, 가난한 학생 등에게 써달라며 기증했다. 그랬더니 “그동안 쌓아놓은 게 얼마나 많으면 큰돈을 그렇게 선뜻 내놓느냐”며 중상모략 하는 소리가 많았다. 난 아무 말도 안 했다.
내 주변에 헌금하는 분들은 하나같이 넉넉하지 않은 형편에도 근검절약하여 모은 것을 헌금한다. 22년 전 펴낸 책 ‘밥 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의 인세가 3억원이 넘었을 때, 나에겐 300만원도 없었다. 당시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한 채 시세는 1억5000만원이었다. 아파트 두 채가 생길 뻔했지만 그 인세도 전액 드렸다.
“고민하지 말고 1억원은 하나님께, 1억원은 가난한 사람에게, 1억원은 마누라에게 돌리라”고 아내가 간청했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내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인세와 퇴직금 전액을 헌금하고, 사택까지 반납한 것은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이 땅의 선한 목사님들에게 이와 같이 결단하라 해서도 안 된다. 다만 후배 목회자들이 꼭 지켜줬으면 하는 것이 있다. 사임을 했으면 깨끗하게 사임하자는 것이다.
은퇴 후 6년 만인 지난해 처음으로 다일교회에 가서 창립기념 주일설교를 했다. 후임 목사와 성도들은 큰 행사나 절기 때마다 초청했지만 하나님과 나 자신의 약속이 더 중요했기에 거절했다.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땅에 떨어진 것에 대한 책임은 누가 뭐래도 목사와 장로에게 있다. 그들부터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맨 처음 신앙으로 돌아가야 한다. 순수하던 시절의 정신과 영성을 갖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지 않으면 개혁을 밤낮 외쳐봐야 울리는 꽹과리에 지나지 않는다.
내세울 것 하나 없는, 참으로 부족한 목사지만 후임 목사와 서로 신뢰하고 존중하며 친밀하게 지내는 것만큼은 이웃교회와 후배들이 본받았으면 한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2> 첫 해외사역 ‘중국 다일공동체’와 훈춘시 어린이집
실제로는 북한사역 연장선… 결핵 약·이동검진 차량 보내
중국 지린성 훈춘시에 있는 다일학습문화원에서 다일어린이집 개원 10주년과 학습문화원 개원을 축하하는 참석자들.중국 다일공동체와 두만강 옆 훈춘시의 어린이집은 1997년 1월 중국 옌볜에서 길 잃은 한 아이와의 만남이 계기가 돼 세워졌다. 다일공동체의 첫 번째 해외사역이지만 실제로는 북한사역의 연장선이라 할 수 있다.
‘밥짓는 시인 퍼주는 사랑’의 인세로 받은 3억원을 헌금해 1억5000만원은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에 다일영성생활 수련원을 세웠다. 나머지 절반은 유진벨재단을 통해 북한 동포들에게 결핵퇴치를 위한 의약품과 결핵 이동검진 차량을 보냈다.
먹을 것을 찾아 목숨 걸고 두만강을 건너는 아이들을 위해 쌀과 기초물품이 담긴 다일생명키트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걸 두만강 주변에 놓아두는 사역을 시작했다. 그때 중국 훈춘시의 공식 요청으로 민정국과 함께 조선족 및 한족의 고아를 돕기 위한 다일 어린이집을 설립하기로 합의했다. 훈춘시에서 태어난 고아들은 고아원이 없어 각 촌에 있는 경로당에서 자라고 있었다.
중국 다일공동체의 가족이 된 아이들 한명 한명의 사연은 처절한 아픔 그 자체다. 어린 나이에 견디기 힘든 상처들을 가슴에 안고 있던 그들이 너무 맑고 밝게 잘 자라 줬다. 공동체 가족들은 중국 아이들의 가족이 되어 사랑과 정성으로 돌보며 만 20년을 함께 살았다.
고아원에서 나와 사회로 진출한 자녀들은 ‘다일 애심회’를 만들어 ‘사단법인 중국 다일공동체’를 준비하고 있다. 그들이 결혼해서 가정을 이루고, 직장을 다니면서 건강한 삶을 살아가고 있음이 너무도 감사하다. 그들 가운데 한국과 캄보디아, 네팔 다일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일 가족들의 동역자가 된 이들도 있다. 모두가 곳곳에서 각자 역할을 성실하게 감당하며 살아가고 있음은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다.
20년 넘게 다일의 홍보대사로 활약하고 있는 탤런트 박상원 형제는 훈춘 다일 어린이집에 박상원 도서관을 설립하기도 했다. 아이들이 다양한 책을 접하고 꿈을 꾸도록 도왔다. 계명대는 훈춘시에 계명동산 음악원을 세워 악기 연주를 가르쳐 줬으며, 지역사회에 문화 예술 보급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지금도 그곳 아이들은 훈춘시 민정국이 월급을 주는 중국 측 원장은 원장님이라 부르지만 한국에서 파송한 원장들에게는 ‘엄마’ 또는 ‘아버지’라고 부른다. 덕분에 나는 ‘큰아버지’가 됐다. 70명의 중국인 자녀들은 지금 대학생과 공무원, 직장인으로 곳곳에서 다일 정신을 실천하고 있다.
지난해 8월 28일, 훈춘시 민정국에서 이양식을 마련했다. 만 20년 동안의 수고와 희생에 감사하다며 감사패를 전달하는 시간을 가졌다. 19세 미만의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눈물 나고 아쉬웠지만, 중국 정부가 이제 스스로 어린이집을 운영할 수 있는 때가 됐다는 생각에 감사함으로 이양식을 치렀다.
많은 분들이 어떻게 그렇게 흐뭇하게 이양식을 하고, 다 넘겨주고 빈손으로 올 수 있느냐고 물었다. 우린 처음부터 그럴 생각이었기에 마땅하고 옳은 일이라고 여긴다. 현재 여러 나라에 세워진 다일공동체 분원들 역시 세워진 지 50년이 되기 전에 반드시 현지인을 책임자로 정하고 모든 권한을 깨끗하게 넘겨줄 계획이다. 사명을 실현할 수 있는 또 다른 곳으로 떠나는 것이 우리의 목적이고 하나님의 계획이라 믿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미 중국 사회 곳곳에 흩어진 우리 자녀들은 한국에 오면 언제나 다일공동체와 큰아버지를 찾는다. 그들을 위해 여전히 한 가정이 중국에 남아 사랑으로 양육하고 있다. 천하보다 귀한 한 생명이 부디 아름답게 성숙하고, 그로 인해 다양성 안에서 일치와, 일치 안에서 다양성이 존중되는 중국이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3> 베다일 설립, 아픈 영혼에 밥과 복음 전해
‘올해를 빛낸 한국인’ 상금 전액 기탁… 베트남에 두 번째 해외분원 세워
2016년 11월 베트남 호찌민시 적십자사에서 최일도 목사(앞줄 오른쪽 네 번째)등 다일공동체 관계자들과 적십자 임원들, 떤흥 인민위원회 관계자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사진을 찍고 있다.2002년 6월 30일, 알리안츠 생명으로부터 올해를 빛낸 한국인으로 선정돼 상금 5000만원을 받았다. 베트남 다일공동체(베다일)를 세우기 위해 전액 헌금했다. 그러자 뜻있는 분들이 한마음으로 도와주셨다
베다일은 우리의 두 번째 해외분원이다.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 받는 이웃들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겠다는 다짐을 하고 시작했다. 사회주의 정부의 통제와 공무원들의 집요한 방해 때문에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하지만 작은 것부터, 할 수 있는 것부터, 나부터 시작하는 다일의 정신에 따라 호찌민의 시립원호병원인 야딘병원과 암병원에서 무상급식사업부터 시작했다.
당시 베트남은 사회주의 체제의 우수성을 강조하기 위해 의료비가 무상이라고 주장했지만 대부분 병원의 시설은 열악했다. 환자들에게 약은 주지만 밥은 제공하질 않았다. 환자와 보호자를 위한 도시락을 나누는 것으로 주민들과 친밀해졌고, 그것은 베다일이 시작되는 데 큰 도움이 됐다.
정신지체, 시각, 청각장애인 등 가장 열악한 처지에 있는 아픈 영혼들에게 따뜻한 밥과 함께 사랑을 전하며 복음을 전하는 것이 베트남에서의 첫 번째 사역이었다.
2007년부터 빈흥화 지역에서 적십자와 함께 장애인과 소외된 이웃을 대상으로 공식적인 밥퍼 사역을 시작했다. 2011년 3월 1일은 베트남 정부로부터 베다일이 국제 NGO로 허락받은 날이다. 많은 우여곡절 끝에 베다일 밥퍼센터가 공식적으로 개원한 그 감격은 잊을 수가 없다.
2013년 4월 12일에는 오재학 호찌민 총영사님과 교민들이 모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대·청·밥(대한민국 청소년 밥퍼)’ 발대식을 가졌다. 교민2세인 우리 청소년들이 지속적이고 안정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 위해 마련된 것이다.
빈흥화 지역은 베트남 적십자 회원들과 주민들의 힘으로 자립할 수 있는 역량을 가지게 됐다. 그래서 더 열악한 도시빈민촌인 ‘떤흥마을’로 이전했다. 그곳에 세워진 다일비전센터 주변에는 온통 쓰레기 더미가 가득 차 있다. 주민 중 무상급식이 절박한 독거노인, 고아, 시각장애인, 고엽제 환자부터 섬겼다.
거리가 너무 멀어 찾아오기 어려운 주민에겐 도시락을 배달해 주고, 집이 없는 이웃에겐 집을 지어드리고,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학비를 지원해 주는 등 그들의 갈급함을 조금이라도 채워주는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 현재는 이애리 원장이 섬기고 있으며 캐나다에서 목회를 하다 은퇴하신 이형식 선교사님 내외분이 협동원장으로 도와주고 계신다.
중국 다일 어린이집에서 자란 믿음의 아들 리일은 한국의 선린대학에 유학을 와서 제빵학과를 졸업하고 훌륭한 제빵사가 된 후 현재 베트남에서 ‘빵퍼사역’을 돕고있다.
베트남 법상 외국인이 자국민에게 먹을 것을 전달해 주는 것은 철저히 금지돼 있다. 이 때문에 정부와 적십자사와 협력해야만 사역을 진행할 수 있다. 까다로운 절차와 통제로 갈등도 있지만 밥퍼와 함께 빵퍼 사역을 진행하면서 장거리에 거주하는 빈민층과 열악한 학교에 간식을 지원하고 있다. 또 미혼모를 대상으로 빵을 만드는 기술을 알려줘 취업알선을 연계할 계획이다. 이 또한 먹을 것이다보니 정부기관의 협력이 있어야 가능한 사업이다.
사업이 진행되는 중에는 정부 관계자가 반드시 함께 현장에 있어야 한다. 당장은 빵공장에 대한 승인은 보류된 상태다. 현재 빵퍼 사역이 가능한 지역을 알아보는 것과 함께 우기에 말썽인 낡은 집들을 선정해 보수하거나 새로 짓는 것을 지원하고 있다. 우리가 원하는 것을 하는 것 보다 그들이 원하는 것을 하는 것이 마땅하고 옳은 일이기에 그렇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4> 캄보디아 활동 10년 만에 빈민촌서 대학생 탄생
밥 나누고 의료진 파견… 교육도 병행, 등록금 내던 날 학생·직원 모두 눈물
다일공동체 관계자들과 현지 주민들이 2004년 3월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열린 ‘캄보디아 다일공동체 개원식’에 참석했다.베트남에도 고아원을 설립하기 위해 신학교 동창인 김덕규 선교사와 현지 한국 음식점에 들어갔을 때 일이다. 헐벗고 굶주린 아이들이 있어 누군지 물으니 메콩강을 타고 내려와 구걸하는 캄보디아 빈민촌 아이들이라고 했다.
기가 막혔다. 그길로 무작정 캄보디아 수도 프놈펜까지 달려갔다. 1975년부터 1979년까지 겪은 내전의 여파로 빈민들이 도시 곳곳에 넘쳐났다. 귀국하자마자 2004년 1월 프놈펜에 지부장을 파견하고, 캄보디아 정부에 다일공동체를 NGO로 등록했다. 프놈펜 빈민촌에서 나눔과 섬김 사역이 본격 시작된 것이다. 이듬해인 2005년 3월엔 의료진을 파견하고 다일치과클리닉도 운영하기 시작했다.
캄보디아 정부는 지금도 군경을 동원해 강제 철거 및 이주를 자행한다. 그 과정에서 집에 불을 지르기도 하지만 킬링필드를 겪은 주민들은 별다른 저항 없이 쫓겨난다. 2006년 5월 정부의 대대적인 철거로 인해 공항 뒤편 언동마을에 빈민이 모여들었고, 프놈펜 최대 빈민촌이 형성됐다. 당시 다일공동체 프놈펜 지부도 철거당했고, 우리는 가난한 이웃들을 따라서 언동마을로 함께 이동했다.
마을에는 희망을 잃어버린 이웃들이 가득했다. 매춘, 마약, 도박 등 범죄가 판쳤다. 쓰레기를 뒤지거나 구걸하지 않고는 살 수 없는 빈민이 넘쳐났다.
온갖 질병을 앓으며 센터를 찾는 사람들이 밥을 먹으러 오는 이들만큼 많았다. 경찰조차 들어오길 꺼려하는 그곳에서 다일공동체 가족들은 녹색조끼 하나 입고 마을을 다니며 공동생활을 했다.
몇 년이 지나자 많은 NGO가 들어와 주거개선 및 교육 사업 등을 통해 언동마을을 도왔다. 빈민이 많이 줄었고 교육받는 아이들도 늘었다. 길도 생겼다. 그래도 여전히 500여 가구는 처절하고 어렵게 살아가고 있다.
2006년 3월 17일, 프놈펜 북쪽으로 300㎞ 떨어진 씨엠립 톤레샵 호숫가에 새로운 ‘씨엠립 다일공동체’를 세웠다. 그곳 주민들은 일 년의 반 이상을 물 위에서 살 만큼 주거가 불안정했고, 아이들은 외국인 관광객을 상대로 “원 달러”를 외치거나 사진을 찍어 판매하려고 달려들었다. 그들에게도 밥이 필요했고 교육과 보건사업이 필요했다. 건물 하나 없이 노상에서 천막을 치고 개원예배를 드린 뒤 밥을 나눴다. 이후 교민들과 관광객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곳 아이들을 사람답게 키워 달라며 후원자가 돼주셨다. 그중엔 불교신자도 많다.
쉼 없이 밥과 빵을 나눴다. 많은 아이들이 건강하게 성장했다. 할 수 있는 대로 유치원, 도서관, 방과후학교 등의 교육프로그램을 진행했다. 다일클리닉을 통해 건강을 지켜줬다.
지금은 프놈펜의 분원보다 더 커졌다. 심지어 여행사에서는 한국인들에게 캄보디아 여행을 갈 때 씨엠립 다일공동체를 꼭 봐야 할 곳으로 추천한다고 한다.
그렇게 10년이 지나니 처음에 왔던 어린이들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찾아왔다. 대학에 진학해 꿈을 이루고 싶다고 했다. 당장 후원할 수 있는 분들을 수소문해 학생 8명의 대학 등록금을 납부하던 날, 다일가족들과 그 학생들 모두 울고 말았다. 이후 씨엠립 다일공동체는 꿈 없이 살아가는 청소년에게 꿈을 주는 NGO가 되자고 다짐하면서 ‘꿈퍼’ 사역을 시작했다.
여전히 씨엠립의 빈민촌에서는 수천 명의 아이들이 굶주리고, 동시에 배움에 갈증을 느끼고 있다. 우리가 가야 할 곳과 해야 할 일은 너무 많다.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일자리가 없다는 사실이 이해가 가면서도 어떤 면에서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5> 네팔에선 ‘빵퍼’… 매일 결식 초등생 300명 먹여
다일교회 첫 외국인 신자인 네팔 근로자 제자훈련 후 모국 다일공동체 원장 돼
네팔 다일공동체 책임자 부먼 팀세나 원장(왼쪽)과 최일도 목사. 팀세나 원장은 1999년 5월 한국에 계약직 근로자로 왔다가 다일공동체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다.네팔 다일공동체(네다일)는 현지인들이 세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곳 원장인 부번 팀세나 형제는 한국에 근로자로 와서 일하다가 예수를 만났다.
어느 날 친구와 만나기로 한 약속이 어긋나 청량리역 광장에서 서성이다 배가 고팠던 그는 무료급식소 밥퍼 단골인 할아버지를 만났다. “저 같은 외국인에게도 밥을 주나요”라고 묻자 “당연하지, 배고픈 사람은 누구든지 밥을 먹을 수 있는 곳이 밥퍼야”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 울컥한 그는 도대체 누가 이런 선행을 베푸는지 궁금한 마음에 물어물어 다일공동체 교회를 찾아왔고 결국 교회 최초로 외국인 신자가 됐다.
이후 근로계약이 끝나고 본국인 네팔로 돌아갔을 때 그는 종교가 다른 가족들로부터 모진 박해를 받았다. 하지만 도리어 예수님을 열심히 전하고 다녔다.
현지 한국 선교사를 통해 그 소식을 듣자마자 팀세나를 한국에 초청해 경기도 가평군 묵안리의 다일 DTS 훈련원에서 철저한 제자도를 교육받게 했다. 그는 아내와 자녀들까지 한국으로 데려왔고 온 가족이 훈련받은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에게 영향을 받은 네팔 형제들 꿀 바드로 목사와 쏘남, 꾸말 형제 등도 제자도를 훈련받고 돌아갔다. 현재 포카라 다일교회 담임인 쿠살 목사 등은 네다일의 소중한 일꾼이자 미래다.
2008년 1월 네팔 카트만두의 도시빈민촌인 마누하르 강변에 천막을 치고 창립예배를 드린 이후 오늘까지 네다일이 걸어온 길은 드라마틱하다. 빈민촌에 대나무를 얼기설기 엮어 밥퍼나눔본부를 지었고, 2009년 이를 본 영화배우 유지태 형제가 나와 함께 현장을 찾아가 ‘지태 다일유치원’을 건립토록 지원했다.
2012년부터 코이카 지원사업으로 대안학교 ‘다일호프스쿨’을 시작했다. 빈민촌 어린이들과 인도 터라이 지방에서 올라온 불가촉천민들에게 교복과 학용품을 지원하며 기초교육을 하고 있다. 그림 그리기, 율동, 게임 등으로 시작해 위생 교육과 네팔어, 수학, 영어 등을 가르친다. 이후 정규 학교로 보내고 있는데 네팔 정부로부터 가장 우수한 NGO라는 칭찬을 받기도 했다.
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랑의열매 지원을 받아 네팔 여성들에게 재봉틀 기술을 가르쳐 대안생리대를 만드는 일도 했다. 그 생리대들은 이제 캄보디아, 탄자니아, 우간다 등으로 보내고 있다.
2014년 4월부터는 네팔 포카라 빈민촌에 있는 사하라 초등학교 학생 가운데 결식아동을 대상으로 ‘빵퍼 사역’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매일 300명에게 빵을 나누고 있으며, 현재 빵 공장 건축을 준비 중이다. 포카라 다일교회에서는 현재 어린아이를 포함한 교인 200여명이 예배를 드리고 있다. 마을 주민 90%가 힌두교 신자임에도 매주 예배를 드리고 있는 모습에 절로 눈물이 나온다.
2015년 4월 9000명 이상의 사망자가 발생한 대지진이 발생했을 때, 국내 NGO 가운데 가장 먼저 진앙지인 신두팔초크에 도착해 구호활동을 펼쳤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네다일의 현지 스태프와 당시 원장이던 최홍 목사 덕분이다.
그때 무너진 예배당을 복원시켜 달라며 눈물로 간구하는 네팔인 목사들을 만났다. 주님의 계획이라 깨닫고 진앙지 내 여덟 곳에 무너진 예배당을 다시 건축했다. 카트만두와 포카라에도 각각 한 곳씩 교회를 세웠다. 현지 성도들의 순수하고 환한 웃음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올해 안에 신두팔초크 강가 언덕에 ‘기수다일고아원’을 세울 예정이다. 만민이 기도하는 하나님의 집이요, 고아들의 꿈을 키우는 집을 완공해 봉헌할 생각만 해도 가슴이 벅차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6> 청량리 ‘밥퍼’ 어르신들이 낸 100원으로 세운 필다일
구순구개열 수술로 한국 이미지 높여… 원주민들, 한국인 원장 부족원으로 인정
지난해 필리핀 세부의 수상 빈민촌에 세워진 카만시 다일공동체에서 최일도 목사(앞줄 오른쪽 네 번째)가 역대 필리핀 다일공동체 원장들과 사진을 찍고 있다.필리핀 다일공동체(필다일)는 청량리 밥퍼에서 식사하는 노숙인들과 무의탁 어르신들이 식사하며 ‘자존심 유지비’로 낸 동전 100원짜리 수백만 개가 모여 세워진 해외 분원이다.
아시아 최대 빈민촌인 마닐라 바세코톤도에서 시작돼 카비테와 세부에서 사역 중이다. 쓰레기더미 옆에서 비참한 삶을 이어가는 어린이들과 주민들에게 밥을 먹이고, 의료·보건 교육을 하고 있다. 특별히 입술과 입천장이 갈라진 채 사람들에게 외면당하고 살아가는, 구순구개열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을 위해 수술을 해주는 ‘뷰티풀 체인지 프로젝트’가 이곳에서 시작돼 다른 아시아 지역과 아프리카까지 확대됐다.
이 프로젝트는 특히 필리핀 사람들이 한국을 좋아하게 만드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고 역대 한국 외교부 장차관들과 각 나라 대사들이 이야기할 정도다. 다일 천사병원에 와서 수술받고 간 아시아 빈민촌 아이들만 120명이 넘는다. 각 나라 현지에서 수술받은 이들은 너무 많아 그 숫자를 다 기억할 수 없다.
아시아의 많은 나라들이 도시정비라는 미명하에 부랑자, 빈민 등을 강제로 집단 이주시켰는데 필리핀도 예외가 아니다. 이주민들의 마을 카비테에 다일비전센터를 세웠다. 서울우유의 지원을 받아 다일유치원부터 시작해 밥퍼를 통해 빈민촌 아이들에게 매일 양식을 제공하고 주민을 대상으로 위생교육을 했다.
지난 8년간의 사역을 통해 마을 전체가 변화됐다. 그곳 아이들은 희망을 갖게 됐다. 지난해 유치원과 밥퍼의 전반적인 운영을 필리핀인 스태프와 자발적으로 구성된 마을봉사단에 인계했다. 그리고 세부의 카만시 마을에 또 하나의 분원을 설립했다. 세부는 관광지로 유명하지만 빈민이 가장 많은 섬이기도 하다.
조금만 충격을 줘도 무너져 내릴 듯한 수상가옥들 사이에 카만시 다일커뮤니티 센터가 세워졌다. 이곳은 빈민들의 교회이자 원주민들의 부족회관이며, 배고픈 이들을 위해 밥을 퍼주는 곳인 동시에 꿈을 잃은 아이들을 위한 학교로 사용된다. 마을공동체 구성원들이 우리와 힘을 모았다. 매일 아이들을 위해 빵을 나눠 주고 그 빵을 부족공동체 구성원들과 직접 굽는다. 이를 통해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자생력을 키우는 방향을 모색하고 있다.
카만시의 다일은 마을 주민들과 매일 와서 빵을 먹는 아이들의 자원봉사로 사역이 유지되도록 하고 있다. 실제 거의 모든 활동이 빈민촌 주민과 아이들의 봉사활동으로 이뤄진다.
열악한 빈민촌을 찾아다니며 조사하던 가운데 수상 빈민촌인 카만시 마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말 그대로 너무도 열악한 주거환경 때문이다. 마약과 도박에 빠져 지내는 빈민들과 그 속에서 희망 없이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발견했다.
가난 중에 가난을 경험하며 필리핀 사람들 사이에서도 소외당하고 있는 필리핀 원주민 루마드 부족. 그들과 힘을 합쳐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도록 새로운 공동체 마을을 형성했다. 덕분에 카만시 다일의 류주형 원장은 원주민 부족장과 부족원들에게 인정받아 한국인 최초로 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여졌다.
김혜경 이명현 한성희 원장에 이어 류주형·박설희 부부가 현지 스태프 5명과 함께 필리핀의 다일을 섬기고 있다. 현장에 갈 때마다 할 일은 너무 많은데 정작 일꾼이 부족함을 통감한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7> 텐트 아래서 시작한 ‘탄다일’ 800여명에 ‘밥퍼’
5년 전 빈민촌 쿤두치 마을에 개원… 미취학 아동과 결연 교육지원까지
최일도 목사가 2013년 1월 탄자니아 다일공동체 개원식을 마치고 텐트 아래에서 쿤두치 마을 어린이와 밥을 나누며 소통하고 있다.오랜 세월 아프리카대륙에서 나눔을 실천하겠다는 비전을 마음에 품고 기도했다. 주민들이 땡볕에서 하루 종일 돌을 깨는 빈민촌 채석장 마을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찾아간 곳이 탄자니아의 쿤두치 마을이다.
변창재 선교사 부부를 탄자니아에 파송했다. 내가 그들의 결혼 주례를 맡았는데 결혼식이 파송식을 겸해 진행됐다. ‘둘이 하나 되는 뜻을 온전히 이루기 위해 어디든지 가오리다’라고 약속했기 때문이다. 2013년 1월 11일 탄자니아 다일공동체 (탄다일)의 개원예배를 드리기 위해 갔을 때 한국 대사님과 코이카 관계자 모두가 똑같이 물었다. “건물은 어디 있나요?” “이 텐트 아래 그늘이 다일의 오피스이고 밥퍼의 주방이며 예배당입니다”라고 답했다.
캄보디아와 네팔처럼 탄자니아에서도 텐트 하나로 시작했다. 초대 원장에게 최소 3년을 걸어서 빈민 지역을 다니도록 부탁했다. 철저히 낮은 자세로 섬기는 태도를 갖는 것이 먼저이기 때문이다. 탄자니아 정부에 정식으로 NGO 등록을 하고 공식적인 밥퍼나눔운동을 시작하기 전에 500여명이 밥을 먹었다. 인원이 갈수록 늘어 지금은 800여명이 탄다일을 통해 밥을 먹고 있다.
쿤두치 마을 주민 70∼80%는 무슬림이다. 5인 가족 기준으로 한 달에 미화 50달러에도 못 미치는 수입으로 사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학교에 가지 못하고 돌을 깨거나 남의 집 일을 돕는 어린이들이 많다. 이들을 위해 2014년 대안학교인 ‘다일호프클래스’를 시작했다. 매년 약 40명의 미취학 아동들을 선발해 무상교육을 하고 있다. 일대일 아동결연을 맺어 1년 동안 공부시킨 후 이듬해 일반 초등학교로 편입 시킨다. 그리고 고등학교 졸업 때까지 지원한다. 호프클래스를 졸업한 150여명의 어린이들이 꿈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고 있다. 이 외에도 말라리아 퇴치 사업과 우기에 무너진 흙집을 새로 지어주는 사업 등도 하고 있다.
2015년 6월 탄다일에 현재의 박종원 원장이 취임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직업기술교실, 여성들을 위한 미싱기술교실, 도서관과 방과후교실을 운영하기 위한 다일비전센터를 올해 6월 완공 목표로 건립 중이다.
탄다일에는 5명의 현지인 스태프가 있다. 켈빈(18)은 탄다일을 통해 일대일 아동결연을 맺었던 친구다. 현재 탄다일에서 근로 장학생으로 봉사하고 있다. 이브라(27)는 축구를 매우 잘해 탄자니아 축구 국가대표팀 선수까지 됐으나 벤치만 지켰다. 어린 시절 너무 먹지 못해 덩치가 작아서이다. 탄다일의 초창기 멤버인 그는 이제 없어서는 안되는 기둥같은 존재다.
아부(18) 역시 근로 장학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무슬림이었으나 탄다일을 통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 됐다. 성경읽기와 찬양을 생활화한 친구다. 다일공동체 전통에 따라 지난해 사순절에 마태복음 5∼7장 산상수훈을 암송하도록 했는데 아부가 전체 1등을 했다. 오마리(20)도 탄다일의 아동결연으로 시작해 지금은 다일호프클래스 보조교사와 센터의 야간경비 등으로 봉사하고 있다. 다우디(17)는 이번 달부터 견습·자원봉사자로 열심히 봉사하고 있다.
한국 청량리에서 시작된 토종 NGO 다일공동체로 하여금 적도 아래 아프리카 쿤두치 마을까지 인도하신 뜻과 섭리를 하나님께 열심히 묻고 있다. 그곳에 다일의 홍보대사 박상원 형제와 함께 벌써 다섯 번을 다녀왔다. 올해 여름 여섯 번째 방문 때 쿤두치 채석장 공터에 다일비전센터와 더불어 ‘다일 서번트 리더십 훈련학교’를 헌당할 계획이다. 지금 내 몸은 청량리에 있지만 마음은 쿤두치에 가 있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8> “밥이 답이다”… 우간다서도 밥으로 예수님 전해
우간다 다일서 헌신하는 변창재 원장, 아프리카 선교사인 어머니 뒤이어
우간다 한인교회에서 2014년 7월 열린 우간다 다일공동체 창립 예배가 끝난 뒤 참석자들이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2014년 7월 31일 우간다에 하나밖에 없는 한인교회에서 아프리카 대륙 두 번째 다일공동체 설립예배 및 개원식이 열렸다. 다일공동체는 전 세계 어디서든지 건물 구입은 나중에 한다.
우간다에서도 자체 건물 없이 시작했다. 박종대 우간다대사와 조장주 한인회장, 박영웅 선교사 협의회장과 이계안 협력대사 등 많은 동역자들과 교민들이 축하해줬다.
개원식 순서를 맡은 분들이 하나같이 감동적인 말씀을 해주셔서 감사와 은혜로 차고 넘쳤다. 박상원 홍보대사는 모든 참석자에게 직접 디자인한 티셔츠를 한 벌씩 선물로 나누어 드렸다. 카모챠 빈민촌 아이들에게 그 티셔츠를 선물로 주고 함께 마당에서 예배를 드리며 우간다 다일공동체(우다일)는 시작됐다.
우간다는 고등학교까지 무상 의무교육 정책이 실시되고 있다. 그러나 실제 재정지원은 등록금 면제에 제한돼 결과적으로 초등교육 수료율과 중등학교 진학 비율이 높지 않다. 2013년 기준으로 초등교육의 순등록률은 91.5%에 달했지만 중등학교 등록률은 22.7%에 그쳤다. 초등학교 수료율이 54.2%, 중등학교 수료율은 28.6%였다.
부모 수입은 한정돼 있고, 자녀들 수는 많기 때문에 공립학교에 아이들을 보낼 수밖에 없다. 이마저도 지속적인 교육을 시키지 못하는 상황이다. 다일공동체는 먼저 음푸무떼 초등학교에서 급식을 시작해 현재 키티코 초등학교, 키고 초등학교 학생들에게 일용할 양식을 나누고 있다. 이른 등교로 빈속에 두세 시간을 걸어서 등교하는 아이들. 돈이 없어 밥을 먹지 못하는 아이들에게는 힘이 되는 일용할 양식이 된다. 이 밥을 먹이기 위해서라도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보낸다.
학생들 가운데 특히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에이즈로 부모를 잃고 친척집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있다. 이들을 대상으로 1대1 아동결연을 실시해 학비와 교복, 식량지원 등을 하고 있다. 무상교육인 초등학교조차 다니지 못해 소외되고 방치된 어린이들을 밥퍼센터에서 교육시켜 다시 학교로 보내기 위한 ‘호프 클래스’를 준비 중이다.
우다일의 2대 원장은 탄자니아 다일공동체 원장이던 변창재 선교사가 맡았다. 김혜경 초대원장의 아들이기도 하다. 모자 세습이지만 이를 비판하는 이는 단 한 사람도 못 봤다. 처절한 아픔의 땅 아프리카, 그중 가난한 나라에서 가난한 마을을 찾아다니던 어머니 선교사의 대를 이어 아들이 헌신하는 모습은 현지 한국 대사와 교민들에게도 큰 울림이 됐다.
지금부터 18년 전 유엔에서 전 세계 지도자들이 채택한 의제인 ‘밀레니엄 개발 목표(MDGs)’는 여덟 가지다. 절대빈곤 및 기아 근절, 보편적 초등 교육 실현, 양성평등 및 여성능력의 고양, 아동사망률 감소, 모성보건 증진, 에이즈 말라리아 등 질병 예방, 지속가능한 환경 확보, 개발을 위한 글로벌 파트너십 구축 등이다.
국내외 다일가족들이 해외 빈민촌마다 찾아가서 절대빈곤 퇴치와 기아근절, 초등교육 실현을 위해 집중하는 것은 그곳 아이들이 우리의 희망이라 여기고,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에 공감하기 때문이다.
한 영혼이 천하보다 귀하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돌보고 만나고 있다.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는 일을 주님께 하듯 하면서 언제 어디서나 한 영혼에게 이 땅에 밥으로 오신 예수님을 밥으로 전하고 있다. 밥 속에 사랑을 담아 나누는 굶주림 퇴치부터가 시작이다. 가 보면 깨닫게 된다. 밥이 답이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29> 미국 집회 갔다가 안수집사라는 이들에게 폭행당해
588 조폭의 집단 구타 등 수모 수차례… 시련·고난 이기게 한 은혜에 감사할 뿐
2003년 7월 1일 열린 미주 다일공동체 개원식에서 최일도 목사와 김연수 사모 등 참석자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미주다일공동체(미다일)는 2002년부터 교민들을 중심으로 화해와 일치를 위한 나눔과 섬김을 펼치고 있다. 미다일은 올해부터 중남미로 사역의 지경을 넓히기로 했다.
다일영성수련을 통해서 큰 관심을 갖고 다일공동체를 후원하던 교민들은 내가 미국 조지아주 순회집회 갔을 때를 계기로 2002년 3월 애틀랜타에 미다일 본부를 설립했다. 그해 8월 8일 미 연방정부로부터 NGO와 NPO로 허가를 받았다.
남가주와 북가주, 뉴저지, 뉴욕, 시카고의 후원회 등 5개 지부를 통해 구제·긍휼사역을 적극 후원하다가 이제는 그 사역의 범위가 캐나다까지 확산됐다. 캐나다 다일공동체(캐다일) 원장인 이형식 목사 부부가 주축이 돼 제3세계의 가난한 나라 어린이들에게 빵과 복음을 함께 전하고 있다. 캐다일은 특별히 베트남 다일공동체를 적극 지원하면서 이웃사랑의 범위를 점점 넓히고 있다.
미주 지역의 한인교포들을 위해 미주다일 종교재단도 설립, 2007년 3월 1일 제1회를 시작으로 다일영성수련회를 현재까지 열여섯 차례 진행했다. 이민사회에서 상처받은 이들의 영혼을 치유하기 위함이다. 올해 5월 21일부터 4박5일간 미국 서부지역 몬트레이 영락교회에서 산호세 샌프란시스코 등의 교민 등을 상대로 17번째 영성수련을 진행한다.
미다일은 다일공동체 창립 30주년을 맞는 올해 다일공동체가 세워질 열한 번째 나라를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있다.
30년 전 청량리에서 시작한 작은 공동체가 열방에 퍼져 17개의 분원이 세워졌다. 그러나 결코 자랑이 될 수 없다. 저절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작은 것의 아름다움을 소중히 여기고 나누니 주님이 동행하여 주님이 했을 뿐이다.
정작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끊임없이 이어진 시련과 고난을 이기게 한 하나님의 은혜다. 지난 30년을 돌아보니 여러 날 밤을 지새우고 주리고 목마르고 추위에 몸을 떨었다. 청량리에 다일공동체를 시작했던 초창기엔 여덟 명의 조폭에게 집단 구타를 당해 거의 반죽음에 이르렀고 20일 이상을 옴짝달싹 못하고 누워만 지낸 일이 있었다.
한 번은 미국에 집회하러 갔다가 자신들을 안수집사라고 밝힌 두 사람에게 폭행을 당했다. “TV에 뻔질나게 나오는 놈들 중에 사기꾼 아닌 놈이 없다. 네가 병원을 세운다고? 병원 아무나 하는 줄 아느냐. 사기 치는 거 아니냐”며 멱살을 잡았고, 구둣발로 나를 여러 차례 밟았다. 너무도 억울한 마음에 차라리 죽고 싶은 마음이 들어 혼자 숙소에서 입에 수건을 틀어막고 새벽까지 통곡한 일도 있었다. 주님의 일을 하다가 조폭에게 매를 맞은 것은 오히려 가문의 영광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한국교회와 이민교회의 비참한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너무도 서러워 밤새 울어야했다.
목에 칼을 들이밀며 부산까지 갈 교통비를 달라던 노숙인과 청량리를 떠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위협한 588의 조폭까지도 지나고 보니 하나같이 하나님께 감사해야 할 소중한 추억들이다.
내가 수모당해서 마음 아팠던 일보다 아들이 매 맞는 걸 보신 어머니가 우시던 모습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핑 돈다. 밥을 나눌 때 새치기를 하면 안 된다고 하자 대뜸 어머니 앞에서 밥상을 뒤집어 놓고 몽둥이로 나를 때린 사람도 있었다. 가래를 하도 땅에 뱉는 이에게 “신문지에 싸서 휴지통에 버리면 좋겠다”고 말하는 순간 내 이마에 가래를 뱉은 할아버지도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본 어머니는 실신할 지경이었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30> 북녘땅과 지구촌 빈민을 위해… 지금도 밥 지을 때
밥부터 나누자는 ‘밥 피스메이커’ 운동… 남북 함께 밥상에 둘러앉는 날 오기를
밥 피스메이커의 박종삼 이만열 한완상 고문(윗줄 왼쪽부터), 가운데 줄 왼쪽부터 조용근 장순흥 정영택 공동대표, 아랫줄 왼쪽부터 김동호 임성빈 곽수광 공동대표.굶주린 한 사람을 위해 한 그릇의 밥을 퍼드렸던 작은 섬김이 올해로 30년이 됐다. 그동안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퍼드린 밥그릇 수만도 1000만 그릇이 넘었다. 하지만 그 숫자보다도 더 놀라운 사실이 있다. 밥 안에 담긴 따뜻한 밥심(心)이 다양성 안에서 일치를, 또 일치 안에서 다양성을 이뤄냈다는 것이다.
하다 보니 시간이 흐른 것이고 중국, 베트남, 캄보디아, 필리핀, 네팔, 탄자니아, 우간다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밥퍼 나눔운동이 퍼지게 됐다. 미국과 캐나다는 한국과 함께하기 위한 NGO 가 생겨났고 그들은 중미와 남미의 빈민촌에서 밥을 함께 나누며 예수님이 기뻐하시는 상생하는 식탁 공동체를 준비하고 있다. 인간이 계획한 것이 아니다. 마땅히 해야 될 일을 했을 뿐 나 스스로는 참으로 무익한 종이라는 고백만 나온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불이 되어 국내외에서 종교와 신념, 언어와 피부색을 뛰어넘어 화해와 일치가 있는 잔칫집을 이루게 했다.
지금은 한결같이 밥을 지을 때다.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위해서도 정성껏 밥을 짓겠다. 오늘은 5000만 국민의 마음을 모아 굶주린 북녘 땅 우리 동포들을 살리고, 내일은 통일 조국의 밥심을 모아 기근과 질병으로 고통당하는 지구촌 빈민들을 위해 세계로 나아가길 간절히 희망한다.
많은 사람이 평화통일을 염원하지만 대부분 체제와 이념의 통일을 먼저 생각한다.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먼저 마음의 통일, 영적인 통일이 돼야 한다. 그래야 진정한 화해와 일치가 이뤄진다. 지금 당장 나의 형제가 굶어 죽어가는 판에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주지 않으면 통일은 헛된 구호에 불과하다.
평화통일의 원리는 결코 복잡하지 않다. 북한은 오래전부터 ‘쌀이 사회주의’라고 외쳤다. 문재인 대통령은 ‘밥이 민주주의’라고 선언한 바 있다. 남과 북의 공통분모가 ‘밥’이다. 어머니가 해주신 따뜻한 밥을 먹고 희망과 용기를 가지게 됐고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다. 밥심의 원리는 바로 그것이다. 밥이 평화요, 답이다. 밥부터 나눠야 한다. 이것이 평화통일로 가는 밥심이요 민심이다.
무모하고 이상주의적인 시도라며 비웃는 사람도 물론 있지만 언젠가는 눈물을 흘리며 뿌린 씨앗으로 열매를 거두는 날이 오리라 믿는다.
남북한 병사들과 최고 지도자가 함께 밥상에 둘러앉아 ‘밥이 평화다’라고 온 세계에 외치며 밥부터 나누자는 것이다. 휴전선 곳곳에서 밥상 나눔이 이뤄지는 꿈을 꾸고 있다.
이를 위해 뜻이 맞는 분들과 ‘밥 피스메이커’ 운동을 하고 있다. 2015년 광복절에 판문점에서 제1차 밥 피스메이커 행사를 진행했다. 올해 광복절에도 4차 행사를 진행할 예정이다.
서해부터 한반도 동쪽 비무장지대 철책선까지 우리 어머님들이 행주치마 입고 밥상을 들고 다니며 “얘들아, 밥이 평화다. 밥부터 같이 나누자”라고 눈물로 외치며 통일의 바닥을 다지는 운동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소견이다.
국민일보 독자들도 각자 삶의 자리에서 평화통일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이 운동에 동참하기를 희망한다. 후에 한반도 평화통일이 이뤄졌을 때 다일공동체와 한국교회가 밥 피스메이커 운동으로 작은 기여를 했다고 하나님이 인정하고, 민초들이 기뻐하는 날이 어서 오기를 바라며 오늘도 두 손을 모은다.
***[역경의 열매] 최일도 <31·끝> 역경도 은총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주님 아니면 이룰 수 없었던 열매들… 새로 창립한 ‘데일리 다일’도 주께 맡겨
다일공동체의 기치가 담긴 이미지. 최일도 목사는 “다일은 시작부터 예수의 영성생활을 추구하는 생활공동체이자 그리스도를 본받고 주와 동행하길 원하는 이들의 모임”이라고 강조했다.나라 안팎을 다니며 강연이나 언론매체와의 인터뷰를 통해 수많은 사람에게 했던 말과 행동을 반추해 보니 부끄러움이 앞선다. 여러 가지로 함량 미달이고 자랑할 것 없는 죄인이지만 바울 사도처럼 나의 무지, 약점과 실패를 자랑하고 싶은데 어느새 마지막 회가 됐다.
분명한 한 가지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모욕과 궁핍, 박해와 곤란을 겪은 것에 대해서는 진실로 감사할 뿐이다. 내가 약할 때 오히려 그리스도 안에서 강하고 담대할 수 있었기에 역경도 은총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다양성 속에서의 일치, 일치 안에서의 다양성을 추구하는 다일의 영성과 ‘다시 한 번 일어서기’의 정신을 귀하게 여기신 주님께서 교리와 교파의 벽을 넘어서게 도우셨다. 피부색과 문화, 언어와 종교를 뛰어넘어 자유와 기쁨의 문을 열어 주며 아름다운 열매를 맺게 해주셨다.
지난해 10월 31일 종교개혁 500주년의 날에 발기인 대회를 갖고 11월 11일 창립된 ‘데일리 다일’은 더 많은 해외 빈민촌 주민과 아이들에게 밥과 꿈, 복음과 희망을 주고자 한다. 기존의 국내 사역과 분리해 더욱 전문적이고 국제적인 NGO로 거듭나고자 한다. 실패와 실수는 내 탓이지만 모든 열매는 주님 은혜가 아니면 감히 이룰 수 없었다. 앞으로의 모든 사역도 주께 온전히 맡겨 드릴 것이다.
우선순위를 명확히 하려 한다. 먼저가 영성생활이고 그다음이 공동생활, 나눔과 섬김의 봉사생활이다. 많은 분이 다일공동체를 봉사단체라고 말하지만 시작부터 영성공동체로 살아가는 것을 우선했다.
다일영성생활수련원과 자연치유센터가 있는 경기도 가평 설악면의 설곡산에 처음 오를 때가 생각난다. 아무도 다니지 않았던 산이기에 잡풀이 무성했고 길이 어딘지 알 수가 없었다. 여러 날 낫을 들고 잡풀을 잘라가며 올라갈 수밖에 없었다. 풀에 종아리와 팔목이 베이기 일쑤였다. 그러다 보면 날은 금방 어두워져서 되돌아 내려와야 했고 다음 날 또 올라가서 똑같은 일을 되풀이했다. 그렇게 몇 년을 반복하며 길을 닦다 보니 15년의 세월이 지난 지금은 길이 잘 만들어졌다. ‘참 아름다워라’라는 감탄이 절로 나온다.
노약자도 편안하게 산에 오를 수 있도록 ‘맨발로’라는 산책길을 만들었다. 육체노동이야말로 내겐 휴식이고 기쁨이다. 이 오솔길을 만들다가 2007년 4월 8일 부활주일에 처음으로 해외에 있는 벗님들과 소통하기 위해 SNS를 시작했다. 마음의 길을 내기 위해 하루도 빠짐없이 내 마음에 드는 생각과 느낌을 나누고 전했다. 그러다 보니 다일공동체의 해외 가족들, 후원회원들과 소통할 수 있었다. 더 나아가 종교가 다르고 언어와 피부색이 다른 벗들과도 대화할 수 있었다. 어느덧 SNS를 통해 날마다 6만5000여명의 친구들과 진솔하게 마음 나누기를 하며 살아가게 됐다. 그런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할 따름이다.
그리고 오늘까지 서른한 번에 걸쳐 역경의 열매를 연재한 덕분에 내게 다가왔던 시련과 역경을 깊이 묵상하는 시간이 있어 참으로 감사했다. 시련과 역경은 고통스럽다. 하지만 그 시련과 역경이야말로 아름다운 열매를 맺기 위해 꼭 필요한 씨앗이자 귀한 선물이다. 그 사실을 깨닫게 하시는 분이 내 안에 계시기에 일체가 은혜요 감사뿐이다.